5.

요즘 읽고 있는 황정은의 『일기』 중 「민요상 책꽂이」에는 책갈피에 대한 이야기가 잠시 등장한다. "도톰한 집게 모양의 책갈피나 복잡한 형태로 종이를 깨무는 클립 책갈피는 도대체 뭐하자는 사물인지 모르겠다. 그걸 종이에 끼우고, 끼우는 단계에서 이미 종이가 구겨지거나 하는데, 책을 덮으면 책 무게에 눌려 책갈피에 물린 종이가 꼬집힌 것처럼 구겨지고 앞뒤 종이에도 집게나 클립 모양으로 자국이 남는다. 오래두지 말고 얼른 독서를 끝내면 될 일이지만 독서는 중단될 때가 많다."(82쪽) 이 부분을 읽다가 문득, 내가 쓰고 있던 책갈피를 보았다. 이번 신간을 구매하면서 굿즈로 함께 판매하던(증정이 아니다. 마일리지를 내야 하니까) 소위 팝업 책갈피를.




나도 금속 책갈피나 클립형 책갈피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데, 이번 기회에 한번 이용해볼까.. 하는 생각으로 함께 구입(그렇다. 마일리지를 냈으니까)한 것이었다. 『일기』의 색깔과 맞기도 하고. 몇 차례 사용한 뒤 내가 얻은 결론은 '역시 못 쓰겠다.'는 것이었다. 자석으로 책장을 집는 구조인데 이미 고무자석부터 두껍고, 집게형이니까 두께도 두 겹이 되니 책을 덮었을 때 매우 거슬린다. 가방에 책을 항상 넣고 다니는 입장에서 책 바깥을 비집고 나오는 책갈피는 구겨짐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그러니 더욱 정이 안 갈 수밖에. 작가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힌 유형의 책갈피를 굿즈로 함께 내놓은 건 왜일까?


작가와 달리 나는 책갈피를 많이 모으는 사람이다. 편리함과 필요도 이유이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예뻐서. 신간이 나올 때마다 주는 책갈피를 덥석덥석 모으는 시기는 넘겼지만 종종 동네서점을 들렀을 때 예뻐서 눈길이 가는 책갈피엔 손을 내밀게 된다. 그럼 지금까지 내가 모은 책갈피는 얼마나 될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책장 한 켠에 쌓아둔 책갈피를 하나하나 진열하기 시작했다.




몇 개는 어떤 책 속에 얌전히 잠들어 있겠지만, 읽다 말고 오랫동안 방치한 책의 책갈피는 종종 빼고 있으므로 이것이 거의 대부분일 것이다. 과거의 나는 책갈피에 대한 뚜렷한 호불호가 있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나, 지금의 나는 플라스틱이나 코팅된 책갈피보다는 종이 책갈피가 좋고, 종이 책갈피도 지나치게 빳빳하면 싫다. 너무 두껍지 않으면서 빳빳하지 않고 책 바깥으로 삐져나오지 않고 그 안에 있는 듯 없는 듯 표시만 내주는 것... 그리고 예뻐야 한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양장본에 흔히 달려있는 가름끈인가 싶지만, 전집류가 아니라면 나는 양장본과 문고본 중 문고본을 고르는 사람이다. 어쩌라는 것인지.















이렇게 무수히 많은(개수를 세진 않았다) 책갈피를 나는 잘 쓰고 있는 것일까? 책을 읽으면서 갈피를 잡는 데 쓰진 않고 수집가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고민은 '독서가가 아닌 장서가가 되고 있는가'라는 고민과 겹치는 듯하다.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학문이 본래 '여가'라는 뜻을 가졌듯이, 여가가 없는 이들은 텍스트를 읽을 틈이 없다."(강유원, 『책과 세계』, 6쪽)고는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핑계처럼 들린다. 총기와 끈기와 열기는 점차 사그러들고 있고, 끝나지 않을 숙제처럼 쌓여있는 책들을 보며 몸서리칠 때가 있다. 가장 애정하는 작가 중 한 명의 신간을 찬찬히 읽으면서, 그 책이 떠올리게 해준 책갈피들이 다시 내가 갈피를 잡고 매진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인지를 생각한다. 항상 바쁜 와중에 짬을 낼 수 있는 시간 활용법에 대해 고민하지만, 그것보다 필요한 건 알고 싶다는 마음가짐, 그리고 '책읽기의 괴로움'에서도 재미(흥미가 아니다)를 찾을 줄 아는 마음일 것이다. 어쩌다보니 책읽기를 장려해야 하는 직업을 갖게 된 터라 "무턱대고 읽으라고 하니까 읽지 말고 책읽기가 재밌어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저 말은 나에게도 적용되는 것이기도 하다.


『일기』로 돌아와서, 절반이 조금 넘게 읽고 느낀 바는 '황정은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구나'라는 것이다. 에세이에 흐르는 정조(調)와 소설의 그것이 마치 하나인 것 같다는 인상은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윤리적) 태도가 곧 소설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것이 소설세계가 좁아진다는 비판을 낳을 수도 있겠으나(나에게도 약간의 염려가 있다), 나는 소설부터 에세이까지 일관된 그 태도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이성복, 「그날」)는 일은 없겠구나, 당신은 더 민감하게 아프고 세계의 병듦을 말하겠구나, 라는 안도감을.





여담) 책갈피에 대한 이야기에는 포스트잇 플래그에 대한 언급도 있는데, 나는 이 이야기를 직접 들은 적이 있었다. 2019 서울국제작가축제에서 사인을 받을 때, 내 책에 빽빽하게 붙어있는 플래그를 보자 그는 본인도 책을 읽을 때 자주 쓰는데 썩지 않더라...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 썩지 않는 플래그를 열심히 사고 붙이고 있다. 때때로 기억하기 위해 붙이는 것인가, 아니면 언제고 돌아보겠지라는 마음에 붙이고 보는 것인가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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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어제 부모님 집으로 내려왔다. 이러저러한 우려가 없지는 않았으나 같은 수도권...이라서 엄명을 받고 내려오게 되었는데(지하철로 2시간 30분 거리), 이곳의 분위기도 매우 한산하고 썰렁하다. 내려올 때마다 항상 가는 카페를 왔는데, 언제나 절반은 채워져 있던 넓은 공간에 한 팀만 있었다.















집으로 내려올 때는 항상 집에 둘 책을 가방 한가득 챙겨서 오게 된다.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읽었거나 당분간 읽을 일이 없을 것 같은 책들이 대부분이다. 내가 택배로 보낸 책들이 상자에 그대로 담겨 나를 반기므로 가져온 책과 상자 속 책을 꺼내 서가 정리를 하는 게 첫번째 일과였지만, 이번에는 일거리 때문에 노트북을 챙기게 되어 내려와서 읽을 책만 챙기게 되었다. 첫번째 일과가 간소화된 셈이다. 내려와서 읽을 책 역시 무게를 고려하게 되므로 서울에서 읽고 있던 벽돌책은 생략하고 적당한 분량의 책을 고르게 된다. 그래서 읽은 책이 아니라 읽고 있는 책이 자꾸 늘어나는 것인가.















크지 않은 서가이지만 읽은 책은 많지 않아서(북플은 내가 가진 책의 1/4만 읽었다고 알려준다) 둘러보면 읽고 싶은 욕구를 부르는 책들이 자꾸 생겨 올라갈 때를 고민하게 된다. 이번에 내 눈길을 끈 것은 『예술가들의 파리』 시리즈와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였다. 두께 때문에 가져다 놓고 다시 못 올라가는 책들. 이런 책이 한둘이겠냐마는, 이런 생각을 매번 할수록 서가 이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 같이 든다. 하지만 서가가 가까워지면 내가 더 읽을 수 있을까, 더 열심히 모으게 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읽기보다 모으는 데 치중(또는 집착)하고 있는 몇 개의 시리즈를 보고 있자니 더 그렇다(조르주 페렉 선집이나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 같은 책들).

언젠가는 한 곳에 모이게 될 때도 있겠지 생각하며 이제 읽어야겠다. 카페에 있을 시간도 그리 길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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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09-30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가 참 단정하네요! 책 읽는 즐거움이 저절로 생기겠어요!
행복한 추석명절 되십시요!ㅎ

아무 2020-09-30 18:01   좋아요 1 | URL
실상 1년에 열 번도 보지 못하는 서재입니다..^^;; 막시무스님도 추석 잘 보내세요~

scott 2020-09-30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술가들의 파리 시리즈 저도 눈독 들이고 있던 책들이네요. 두께에 놀라고 가격에 놀라고 ㅎㅎ 컴퓨터 옆에 가지런하게 꽃혀 있는 책들은 가장 가까이두고 보시는 책들인가봐요추석연휴 가족들하고 따스하게 보내세요

아무 2020-09-30 23:24   좋아요 0 | URL
아 저건 사실... 책장에 자리를 더 만들어보려고 벽돌책을 최대한 다 꺼내서 책상에 진열한 겁니다. 양쪽에 북엔드를 세우고...^^;; 가장 가까운 책들이 되어야 할 텐데.. ㅎㅎ
추석 연휴 잘 보내세요~^^

syo 2020-09-30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책장은 엉망진창인데, 아무님 서재는 손대면 손 베겠어요! 깔끔!

아무 2020-10-01 00:26   좋아요 0 | URL
많이 넣기 위해 정리를 열심히 한 경우입니다. 조그마한 공간이라도 만들고자.. 서울의 제 방은 저렇게 깔끔하지 않아요^^;;

scott 2020-12-31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님 서재방에 2021년 연하장 놓고 가여
2021년 새해 행복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2021년 신축년
┏━━━┓
┃※☆※ ┃🐮★
┗━━━┛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아무 2021-01-12 00:04   좋아요 1 | URL
축하 감사합니다. 연말연시를 이런저런 일에 치여보내느라 확인하지도 못했었네요^^; scott님도 새해에 건강 잘 챙기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3.

원래는 주간 문학동네(http://www.weeklymunhak.com/)에서 읽은 문유석 작가의 글에서 『사람, 장소, 환대』가 떠올라 사형 제도에 대한 두 사람의 입장 차이... 같은 걸 정리해보고자 했으나(정확히 말하면 체사레 베카리아의 사형 제도에 대한 입장과 이에 대한 문유석 작가의 반박), 읽고 있는 책들에 치여 이미 읽은 책을 뒤적일 시간이 충분치 않아 잠시 미뤄두었다. 그래서 이번 주에 생각한 것은 사형 제도보다는 훨씬 가벼운... 내 밑줄긋기가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에 대한 소고(小考)이다.
















학생 시절의 나는 책을 굉장히 깨끗하게 보는 사람이어서,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는다는 건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 언제부터 책에 표시를 하기 시작했을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군 제대 이후로 추정된다), 확실한 건 그 시작은 밑줄이 아니라 책 한 귀퉁이를 접는 것이었고, 여기에는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뒷표지에 실린 김연수 작가의 추천사에 쓰인 한 단어, "도그지어"가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점이다(지금 생각하면 왜 '독스이어'가 아니라 '도그지어'인지 알 수 없지만).


시작은 가벼웠으나 어느새 나는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접기에 밑줄긋기를 추가했는데, 이때 내가 애용한 것은 스테들러의 주황색 형광 색연필이었다. 그렇게 접기+밑줄긋기+중요한 부분은 포스트잇 종이 플래그에 메모 후 붙이기로 정착하는 듯 했으나, 너무 많이 접다보니 책 아래 두께가 늘어나 책이 잘 꽂히지 않는다는 문제에 봉착했고, 이후 접기는 더이상 하지 않은 채 포스트잇 스티커 플래그+색연필로 밑줄긋기로 단순화되었다. 현재는 가끔 중고로 되팔고 싶은 책을 넘길 수 없다는 문제로 인해 밑줄긋기는 웬만해선 하지 않으며 긋더라도 연필이나 샤프를 사용한다. 점점 간소화되고 있지만 밑줄을 긋는 양이 간소화되고 있는지는...


오프라인으로 밑줄을 긋는 건 이러한데, 온라인으로 기록을 남기는 건 다른 문제다. 살고 있는 공간이 넓지 않아 책을 모두 가지고 있을 수 없는 입장(비율로 따지면 내 집에 30%, 부모님 집에 70% 정도가 있다)에선 생각나는 책의 구절을 찾아볼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알라딘에 끄적이기 시작하면서 적재적소에 내가 원하는 구절을 인용하고 싶다는 욕구도 한몫을 했으리라. 처음에는 책을 다 읽고 그었던 밑줄을 모두 한글 문서로 타이핑하는 방법을 썼으나, 시간도 많이 걸리고 불편하다는 문제에 부딪혔다. 그러고 나서 내가 눈을 돌린 것은 온라인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밑줄긋기 앱들이었다.


(주의: 여기서부터는 앱들에 대한 편파적인 시각이 반영되었을 수 있으며, 특정 앱을 홍보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음)



처음으로 내가 사용한 것은 '리드그라피(Readgraphy)'라는 앱이었다. 지금은 거의 들어가보지 않지만 남겨놓은 메모가 아까워 지우지 않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들어가보니 내가 처음 메모를 남긴 것은 3년 전(『한나 아렌트의 말』이 최초의 기록인데 정확한 날짜가 안 나온다)이었다. 당시에 사용할 때도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현재 얼리버드로 유료 회원과 똑같은 혜택을 누리고 있는데, 처음에는 열심히 해보려 했으나 앱이 여러모로 나와 맞지 않았다. 앱으로 밑줄을 긋는 것도 다 읽은 뒤 한 번에 하려니 일일이 책을 쫙 펴서 찍는 것도 일이었거니와(따라서 메모 하나에 모든 밑줄이 다 들어갔다), 당시에는 따로 하이라이트 표시를 할 수도 없었고 내용 검색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에는 페이지순으로 정렬할 수가 없었고(이 역시 내가 못 찾은 건지는 알 수 없다. 3년 전의 내가 더 기계치였으므로), 책들의 서지사항이 잘 검색되지 않았다. 사진에 나온 『움베르토 에코』는 당시에 검색이 되지 않아 내가 직접 입력하고 표지를 찍은 것이며, 『글래머의 힘』은 표지가 검색되지 않아 그냥 둔 것이다. 아무튼 당시에 많은 불편함을 느꼈기 때문에 나는 곧 책의 내용을 텍스트로 변환해줄 수 있는 앱을 찾기 시작했다.



중간에 MS에서 제공하는 앱을 이용한 적이 있으나(PDF 문서를 워드로 변환하는 것이었는데, Office Lens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텍스트 변환을 했을 때 외계어가 나오는 경우가 너무 많아 금방 지웠고, 그 후 가장 오랫동안 애용하던 것은 북플 앱의 사진으로 밑줄긋기 기능이었다. 생각보다 꽤 정확하게 사진 속 내용을 텍스트로 옮겨주고(알파벳 포함), 컴퓨터로 알라딘서재에 쓸 때와 달리 밑줄의 분량에 제한이 없으며(나는 한 페이지 반 정도의 분량까지 하나의 밑줄로 기록한 적도 있다), 내가 글을 쓰는 알라딘서재에 기록이 남으니 쉽게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텍스트로 옮기는 과정이 완벽한 건 아니어서 내가 매번 교정을 해야 했는데, 특히 띄어쓰기에 가장 많은 오류가 났고 'ㅙ'나 'ㅖ'와 같은 이중 모음이나 잘 쓰지 않는 단어는 자주 오타가 났다(사진의 예시는 굉장히 잘 된 경우이다). 이걸 일일이 교정하면서 올리면 타이핑하는 것과 비슷한 속도가 났다. 대략 200~300페이지의 책을 읽은 뒤 밑줄을 모두 옮기는 데 1~2시간 가량이 걸렸으니까. 또한 알라딘서재에 게시글의 형태로 올라가기 때문에 읽을 때마다 밑줄긋기를 하면 한 권의 책에 대한 기록이 중구난방으로 남으므로, 다 읽은 뒤에 한 번에 긋다보면 또 시간이 오래 걸렸다(내가 독보적 서비스로 밑줄을 긋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때나 밑줄을 그어도 책별로 모아주면서, 페이지 순으로 정리해주고 핵심어별로 정리할 수 있는 앱이었다.



'하이라이트'라는 앱을 알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어떤 커뮤니티에서 국어교사가 학생들에게 독서 수업을 온라인으로 진행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후기를 보고, 새로운 밑줄긋기 앱인가 싶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사용한 바를 토대로 이야기해보면, 밑줄긋기의 인스타그램 같다는 느낌을 준다. 책의 서지사항은 바코드만 잘 인식시키면 제대로 찾아내며, 내가 읽을 때마다 매번 찍은 내용을 책별로 분류해주고(세번째 사진의 체크박스 옆에는 내가 기록한 메모의 숫자가 쓰여 있다), 입력할 때 해시태그를 넣으면 해시태그별로도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읽으면서 수시로 사진을 찍어 올려도 분류가 잘 된다는 점에서 현재까지는 만족하며 사용하는 중이다. 다만 여기도 안정적이지 않아서 새로 태그를 넣으려고 수정을 하면 책이 최근에 글을 올린 책으로 바뀌어 수정이 되지 않는다든지, 올린 게시물의 사진을 저장할 수 없다든지 하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해시태그 외에 책 속 내용으로 검색이 되는 건 아니어서 해시태그를 잘 입력해놓아야 한다는 문제가 있지만, 구절로 검색을 할 수 있으려면 현재로서는 에버노트 프리미엄 말고는 방법이 없는 듯하다. 난 프리미엄 요금제를 쓰고 있지만, 아직 사용이 익숙하지 않아 블로그나 기사 등을 스크랩하는 용도로만 쓰고 있다..















정리하고 보니 밑줄을 긋지 않던 내가 이렇게 수없이 밑줄을 긋고 그것을 텍스트화하려는 사람으로 변화한 것은 나이를 먹으면서 생기는 기억력의 감퇴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어릴 때 읽었던 책은 여전히 그때의 느낌이나 줄거리도 생생한데, 날이 갈수록 최근에 읽은 책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놀라면서 말이다. 나의 감정, 사고, 지식의 폭을 넓혀준 책들을 계속 기억하고 싶다는 욕망이 저장에 대한 욕망을 촉진한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것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싶다는 욕망만큼이나 부질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망각이 인간의 삶에 필수적이라고 하지만, 때로는 내가 망각하고 싶은 것만 버리고 책에 대한 기억은 끌어안은 채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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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의 1부 제3장 「다른 사람들이 하는 책 얘기를 귀동냥한 경우」에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책은 그 자체의 물성으로 한정되지 않으며, 사람들이 책에 대해 주고받는 일련의 교환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책에 대한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 우리는 읽기 행위에 참여한다는 것이 이 장의 요지다. 바야르는 『장미의 이름』의 결말(윌리엄과 호르헤의 추론과 오류의 과정)을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화제로 삼는 책들은 실재(實在)하는 책이 아니라 특정 상황이 만들어낸 대체물(책의 표현에 따르면 "가공의 오브제")일 뿐이며, 우리가 책에 대한 수많은 담론과 견해(이조차 우리의 기억에서 재구성되어 버린다)에 둘러싸인 사이에 진짜 책은 저 멀리 모습을 감추어버린다는 주장을 펼친다. 정독과 완독을 둘러싼 신화를 깨뜨리려는 과격한 주장이라고 해야 할까.


한데, 이 장을 읽으면서 내가 내내 거슬렸던 것은 저자의 주장이 아니라 인물의 이름이었다. 바야르는 『장미의 이름』의 주인공 이름을 "바스커빌 기욤"이라고 소개하고, 이후에 자신의 논지를 펼치는 과정에서 그를 끊임없이 "바스커빌"이라고 지칭한다. 작품을 읽은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장미의 이름』에서 주인공들은 모두 '(출신지)의 (이름)'의 방식으로 호명된다. 그러니까 '바스커빌'은 인물의 이름이 아니라 '기욤'(국역본으로 본다면 '윌리엄')의 출신지를 말하는 것이다. 아마 이것은 역자의 실수가 아니라 저자의 (의도적일 수도 있는) 오기라고 생각되는데, 바야르 스스로 『장미의 이름』을 SB(Skimmed Book, 대충 뒤적거려 본 책)HB(Heard Book,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된 책)로 분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 달 전 책을 읽을 때에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발견한 오류를 간단하게 언급하는 글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었으나 금세 잊어버렸고, 한동안 이 책을 펼쳐보지 않았었다. 그러다 문득 다시 이 책을 떠올리게 된 것은, 1부의 1장에서 3장까지 저자가 펼치는 주장(책 한 권 한 권에 매몰되지 말고 집단 도서관의 시각으로 바라보라, 전체성과 책들 간의 유기적 연결을 보라는 것이 요지다)에서 사례들을 종합해 원칙으로 추상화하는 과학적 방법론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뇌는 하나의 기계이자 컴퓨터이다. 그 점에 관한 한 고전신경학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와 삶을 구성하는 정신과정은 단순히 추상적 혹은 기계적인 과정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다. 대상을 분류하고 범주화할 뿐만 아니라 판단하고 느낀다. 따라서 판단과 느낌을 배제한다면, 우리는 P선생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컴퓨터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느낌과 판단이라는 개인적인 것을 인지과학에서 배제한다면, 그 역시 P선생과 똑같은 결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 즉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파악하는 능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 따라서 P선생의 사례는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에게 던져진 하나의 경고이자 우화일 수도 있다. 판단이나 구체적인 것, 개별적인 것을 등한시하고 완전히 추상적이고 계량적으로만 변해가는 과학이 장차 어떻게 될지에 대한 경고 말이다.

-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45~46쪽)


개별의 사례를 원칙으로 추상화하는 과학적 사고가 있었기에 인류가 이토록 발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올리버 색스가 24편의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과학적 방법론의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았을 때 우리는 인간이라는 개별적인 주체를 볼 수 없게 되고, 나아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지각하지도 못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P선생의 사례(「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가장 앞부분에 배치한 것은 색스의 주장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형태는 인지하지만 현실의 구체적인 면을 지각하지 못하는 P선생을 통해 색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신경과학의 문제점을 꼬집는 것이다. 추상성의 눈으로만 현실을 재단하는 움직임은 때로 폭력적이어서, 이를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교정'하려고 하기도 한다(「쌍둥이 형제」). 추상성이라는 축으로 기울어진 과학에 색스가 제안하는 것은 "내러톨로지(서사학)"의 회복, "구체성의 과학"이다. 그가 보기엔 "현실을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것으로, 개인적이며 의미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 '구체성'"이기 때문이다. 과학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문학, 특히 소설의 근간을 이루는 '이야기(서사)'의 회복을 말했다는 것이 색스에게 "과학계의 셰익스피어"라는 찬사가 붙게 된 이유였으리라.

















그러나 구체성을 등한시하는 추상성이 세계를 바로 보지 못하듯, 추상성 없는 구체성은 세계를 톺아보지 못하고 차이점에 매몰되도록 할 것이다. 바야르의 책으로 돌아오면, 구체성만 가지고 세계를 마주한 인간은 "대속(代贖)의 사상"을 찾아 황실 도서관을 찾았다가 350만 권의 책을 마주했던 스툼 장군(바야르가 이 인물의 이름은 제대로 쓴 걸까?)과 비슷한 처지이다. 달리 말하면 "'개'라는 속(屬)적 상징이 형태와 크기가 상이한 서로 다른 개체들을 포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으며, 또한 3시 14분에 측면에서 보았던 개가 3시 15분에 정면에서 보았던 개와 동일한 이름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푸네스와 비슷한 상태일 것이다(「기억의 천재 푸네스」). 바야르는 어떤 책도 읽지 않는 황실 도서관 사서의 "총체적 시각"에서 진정한 독자와 교양인이 책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를 역설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선뜻 그의 손을 들어주기 어렵다. 텍스트이든 사람이든, 그들 사이의 관계에서 추상화(또는 일반화)할 수 있는 원리의 힘도 강하지만, 각각의 대상이 품고 있는 개별적인 서사의 감정적 자장 역시 강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결국 양쪽 사이의 균형을 잘 찾아야한다는 식상한 결론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둘 사이의 중간점은 계산해서 딱 떨어지는 그런 지점이 될 수 없음도 이미 안다. 가벼움과 무거움, 이성과 감성, 운명과 우연과 같은 개념들이 끊임없이 길항하며 공존하듯, 추상성과 구체성 역시 그러하다...















추신)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이야기의 회복 부분에서 내가 연상했던 것은 '문학은 보다 나은 현실을 위한 대안이 될 수 있는가?'였고, 여기에서 떠올린 작품이 조이스 캐롤 오츠의 『그들』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작품의 중반부에서 모린이 '오츠 선생님'의 강의, "문학은 삶에 형태를 부여한다."는 말을 듣고 보낸 두 통의 편지였다. 소설 속 삶을 동경하고 지향했던 모린의 일생을 보고 있으면, '오츠 선생님'의 말에 한 번쯤은 의문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이 연상은 오늘 끄적인 주제와는 동떨어져 있어 이렇게 메모로만 남겨두었다. 언젠가 다시 머릿속에서 엮어지길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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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국이 장기화되면서 집에 있는 나날이 점점 늘어가고 있지만, 일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해보고자 크게 벌이는 성격과 잠재된 게으름, 점점 떨어지는 집중력, 그리고 저질 체력으로 인해 독서량은 점점 줄어가는 추세다. 요즘 들어서야 다시 하루 중 잠시라도 책을 붙들고자 하는 시간을 가지려 노력 중이지만, 더 큰 문제는 전혀 쓰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책에 대해서 쓸 때는 조금이라도 더 완결된 한 편의 글로 표현하려는 욕심이 글쓰기를 저어하게 하는 것일 테다. 그러나 생각의 속도는 언어보다 빨라서 적확한 언어로 정돈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몇 시간씩 진득하게 앉아 리뷰 하나를 쓸 여유까지는 내게 부여되지 않고 있다. 이러다 정말 글쓰기의 근육이 다 사라지는 게 아닌가라는 걱정에 고민을 하다가, 어떤 주제로든 일주일에 하나씩이라도 끄적여 보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누군가는 매일매일 꾸준히 글을 써서 하나의 결과물로 내기도 하고, 알라딘에도 매일 긴 글을 남기는 분들이 적지 않은데 주간이라니, 라고 생각도 해보았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생각하며... 이 카테고리(혹은 게시판)의 이름은 '주간 아무르'가 되었다. 쓰던 닉네임과 비슷한 단어를 골랐을 뿐, Amour의 의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잡다한 글들의 모임이 될 것이다. 책 제목을 비틀어 고민의 결론을 정리하면, '무엇이든 쓰게 되어야 쓰는 법을 '잃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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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이런 글을 시작해야 할 텐데라고 고민만 하다가 오늘 맘을 잡고 책상에 앉은 것은, 황정은 작가의 신간 『연년세세』의 출간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제목의 소설집이 출간될 거라는 소식을 나는 올해 초부터 알고 있었는데, 언제쯤 나오게 될지를 참다 못해 그동안 발표한 단편 중 「파묘(破墓)가 실린 『2019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을 구입해놓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사는 속도를 읽는 속도가 따라잡지 못해 책은 펴보지도 못한 채 한쪽으로 밀려나 있었고, 어느새 소설집이 출간되는 바람에 수상작품집을 읽을 일은 더욱 요원해지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생각보다 이렇게 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도 언젠가는 읽어야 할 텐데라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으나 표지가 너무 안 예뻐서(그렇다. 나에겐 디자인도 중요하다..) 구매를 망설이고 있었다. 그 와중 2017년에 하드커버로 된 양장 특별판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바로 구매하였으나(알라딘 상품 검색이 되지 않아 올리지 못했다. 표지는 http://aladin.kr/p/ao1MN 참고) 워낙 두꺼워서 집 한 쪽에 모셔두고 있었는데, 올해 개역판이 나와버렸다... 결국 개역판은 특별하게 모셔두었던 양장본을 밀어냈고, 양장본은 알라딘 중고서점으로 향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개역판을 펼치고 틈틈이 읽고 있다...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도 이전 판본을 중고로 구매하였지만, 구매한 뒤 한번도 꺼내보지 못한 채 부모님 집의 내 서가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아마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었을 때의 기억이 너무 고되어서일 것이다). 그러던 중 개정판이 또 나와버렸고, 개정판 구매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하여 중고서점으로 향했지만, 점원은 구매 후 한 번도 건드린 적 없는 책의 앞쪽 하드커버가 살짝 뜯어져 있다며 중고로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집에는 두 종류의 『인간의 조건』이 있고, 나는 서울로 올라올 때 또 들고 오지 않았다...















이외에 악착같이 읽힐 기회를 잃지 않으려 버티는 책들도 있다. 『감시와 처벌』은 2020년에 개정판이 나왔지만 2016년본을 악착같이 버리지 않고 참고 있는 경우이다. 『반딧불의 잔존』은 절판되었을 때 7만원에 가까운 돈을 주고 구입했는데, 올해 리커버 에디션이 다시 정가에 나와버렸다. 돈이 아까워서도 그렇지만 리커버 에디션이니까 번역을 손보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위안하면서 리커버 에디션은 장바구니에만 넣어두었다. 읽는 속도는 사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지만, 책이 새로 나오는 속도도 따라가지 못한다...











황정은 작가의 신작 소식에 떠오른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렇게 이어졌다. 읽힐 기회를 잃은 책은 안타깝지만, 언젠가 다시 복권될 일도 있을 테다(다른 작가들의 작품도 함께 있으므로). 무엇보다도 신작이 나왔다는 것이 팬으로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일이다. 다만 이미 발표한 것으로 알고 있던 「MANNING TREE」가 수록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쉽다. '年年歲歲' 연작에 해당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겠지만. 그렇다면 이 단편은 나중에 나올 단행본에 묶일 것인가, 아닐 것인가. 이런 걱정에는 단편 하나를 위해 책으로 가득한 방 한 칸에 또다른 책을 들였다가, 이 책을 읽을 기회를 또 잃게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노파심이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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