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원래는 주간 문학동네(http://www.weeklymunhak.com/)에서 읽은 문유석 작가의 글에서 『사람, 장소, 환대』가 떠올라 사형 제도에 대한 두 사람의 입장 차이... 같은 걸 정리해보고자 했으나(정확히 말하면 체사레 베카리아의 사형 제도에 대한 입장과 이에 대한 문유석 작가의 반박), 읽고 있는 책들에 치여 이미 읽은 책을 뒤적일 시간이 충분치 않아 잠시 미뤄두었다. 그래서 이번 주에 생각한 것은 사형 제도보다는 훨씬 가벼운... 내 밑줄긋기가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에 대한 소고(小考)이다.
















학생 시절의 나는 책을 굉장히 깨끗하게 보는 사람이어서,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는다는 건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 언제부터 책에 표시를 하기 시작했을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군 제대 이후로 추정된다), 확실한 건 그 시작은 밑줄이 아니라 책 한 귀퉁이를 접는 것이었고, 여기에는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뒷표지에 실린 김연수 작가의 추천사에 쓰인 한 단어, "도그지어"가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점이다(지금 생각하면 왜 '독스이어'가 아니라 '도그지어'인지 알 수 없지만).


시작은 가벼웠으나 어느새 나는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접기에 밑줄긋기를 추가했는데, 이때 내가 애용한 것은 스테들러의 주황색 형광 색연필이었다. 그렇게 접기+밑줄긋기+중요한 부분은 포스트잇 종이 플래그에 메모 후 붙이기로 정착하는 듯 했으나, 너무 많이 접다보니 책 아래 두께가 늘어나 책이 잘 꽂히지 않는다는 문제에 봉착했고, 이후 접기는 더이상 하지 않은 채 포스트잇 스티커 플래그+색연필로 밑줄긋기로 단순화되었다. 현재는 가끔 중고로 되팔고 싶은 책을 넘길 수 없다는 문제로 인해 밑줄긋기는 웬만해선 하지 않으며 긋더라도 연필이나 샤프를 사용한다. 점점 간소화되고 있지만 밑줄을 긋는 양이 간소화되고 있는지는...


오프라인으로 밑줄을 긋는 건 이러한데, 온라인으로 기록을 남기는 건 다른 문제다. 살고 있는 공간이 넓지 않아 책을 모두 가지고 있을 수 없는 입장(비율로 따지면 내 집에 30%, 부모님 집에 70% 정도가 있다)에선 생각나는 책의 구절을 찾아볼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알라딘에 끄적이기 시작하면서 적재적소에 내가 원하는 구절을 인용하고 싶다는 욕구도 한몫을 했으리라. 처음에는 책을 다 읽고 그었던 밑줄을 모두 한글 문서로 타이핑하는 방법을 썼으나, 시간도 많이 걸리고 불편하다는 문제에 부딪혔다. 그러고 나서 내가 눈을 돌린 것은 온라인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밑줄긋기 앱들이었다.


(주의: 여기서부터는 앱들에 대한 편파적인 시각이 반영되었을 수 있으며, 특정 앱을 홍보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음)



처음으로 내가 사용한 것은 '리드그라피(Readgraphy)'라는 앱이었다. 지금은 거의 들어가보지 않지만 남겨놓은 메모가 아까워 지우지 않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들어가보니 내가 처음 메모를 남긴 것은 3년 전(『한나 아렌트의 말』이 최초의 기록인데 정확한 날짜가 안 나온다)이었다. 당시에 사용할 때도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현재 얼리버드로 유료 회원과 똑같은 혜택을 누리고 있는데, 처음에는 열심히 해보려 했으나 앱이 여러모로 나와 맞지 않았다. 앱으로 밑줄을 긋는 것도 다 읽은 뒤 한 번에 하려니 일일이 책을 쫙 펴서 찍는 것도 일이었거니와(따라서 메모 하나에 모든 밑줄이 다 들어갔다), 당시에는 따로 하이라이트 표시를 할 수도 없었고 내용 검색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에는 페이지순으로 정렬할 수가 없었고(이 역시 내가 못 찾은 건지는 알 수 없다. 3년 전의 내가 더 기계치였으므로), 책들의 서지사항이 잘 검색되지 않았다. 사진에 나온 『움베르토 에코』는 당시에 검색이 되지 않아 내가 직접 입력하고 표지를 찍은 것이며, 『글래머의 힘』은 표지가 검색되지 않아 그냥 둔 것이다. 아무튼 당시에 많은 불편함을 느꼈기 때문에 나는 곧 책의 내용을 텍스트로 변환해줄 수 있는 앱을 찾기 시작했다.



중간에 MS에서 제공하는 앱을 이용한 적이 있으나(PDF 문서를 워드로 변환하는 것이었는데, Office Lens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텍스트 변환을 했을 때 외계어가 나오는 경우가 너무 많아 금방 지웠고, 그 후 가장 오랫동안 애용하던 것은 북플 앱의 사진으로 밑줄긋기 기능이었다. 생각보다 꽤 정확하게 사진 속 내용을 텍스트로 옮겨주고(알파벳 포함), 컴퓨터로 알라딘서재에 쓸 때와 달리 밑줄의 분량에 제한이 없으며(나는 한 페이지 반 정도의 분량까지 하나의 밑줄로 기록한 적도 있다), 내가 글을 쓰는 알라딘서재에 기록이 남으니 쉽게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텍스트로 옮기는 과정이 완벽한 건 아니어서 내가 매번 교정을 해야 했는데, 특히 띄어쓰기에 가장 많은 오류가 났고 'ㅙ'나 'ㅖ'와 같은 이중 모음이나 잘 쓰지 않는 단어는 자주 오타가 났다(사진의 예시는 굉장히 잘 된 경우이다). 이걸 일일이 교정하면서 올리면 타이핑하는 것과 비슷한 속도가 났다. 대략 200~300페이지의 책을 읽은 뒤 밑줄을 모두 옮기는 데 1~2시간 가량이 걸렸으니까. 또한 알라딘서재에 게시글의 형태로 올라가기 때문에 읽을 때마다 밑줄긋기를 하면 한 권의 책에 대한 기록이 중구난방으로 남으므로, 다 읽은 뒤에 한 번에 긋다보면 또 시간이 오래 걸렸다(내가 독보적 서비스로 밑줄을 긋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때나 밑줄을 그어도 책별로 모아주면서, 페이지 순으로 정리해주고 핵심어별로 정리할 수 있는 앱이었다.



'하이라이트'라는 앱을 알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어떤 커뮤니티에서 국어교사가 학생들에게 독서 수업을 온라인으로 진행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후기를 보고, 새로운 밑줄긋기 앱인가 싶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사용한 바를 토대로 이야기해보면, 밑줄긋기의 인스타그램 같다는 느낌을 준다. 책의 서지사항은 바코드만 잘 인식시키면 제대로 찾아내며, 내가 읽을 때마다 매번 찍은 내용을 책별로 분류해주고(세번째 사진의 체크박스 옆에는 내가 기록한 메모의 숫자가 쓰여 있다), 입력할 때 해시태그를 넣으면 해시태그별로도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읽으면서 수시로 사진을 찍어 올려도 분류가 잘 된다는 점에서 현재까지는 만족하며 사용하는 중이다. 다만 여기도 안정적이지 않아서 새로 태그를 넣으려고 수정을 하면 책이 최근에 글을 올린 책으로 바뀌어 수정이 되지 않는다든지, 올린 게시물의 사진을 저장할 수 없다든지 하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해시태그 외에 책 속 내용으로 검색이 되는 건 아니어서 해시태그를 잘 입력해놓아야 한다는 문제가 있지만, 구절로 검색을 할 수 있으려면 현재로서는 에버노트 프리미엄 말고는 방법이 없는 듯하다. 난 프리미엄 요금제를 쓰고 있지만, 아직 사용이 익숙하지 않아 블로그나 기사 등을 스크랩하는 용도로만 쓰고 있다..















정리하고 보니 밑줄을 긋지 않던 내가 이렇게 수없이 밑줄을 긋고 그것을 텍스트화하려는 사람으로 변화한 것은 나이를 먹으면서 생기는 기억력의 감퇴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어릴 때 읽었던 책은 여전히 그때의 느낌이나 줄거리도 생생한데, 날이 갈수록 최근에 읽은 책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놀라면서 말이다. 나의 감정, 사고, 지식의 폭을 넓혀준 책들을 계속 기억하고 싶다는 욕망이 저장에 대한 욕망을 촉진한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것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싶다는 욕망만큼이나 부질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망각이 인간의 삶에 필수적이라고 하지만, 때로는 내가 망각하고 싶은 것만 버리고 책에 대한 기억은 끌어안은 채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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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의 1부 제3장 「다른 사람들이 하는 책 얘기를 귀동냥한 경우」에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책은 그 자체의 물성으로 한정되지 않으며, 사람들이 책에 대해 주고받는 일련의 교환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책에 대한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 우리는 읽기 행위에 참여한다는 것이 이 장의 요지다. 바야르는 『장미의 이름』의 결말(윌리엄과 호르헤의 추론과 오류의 과정)을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화제로 삼는 책들은 실재(實在)하는 책이 아니라 특정 상황이 만들어낸 대체물(책의 표현에 따르면 "가공의 오브제")일 뿐이며, 우리가 책에 대한 수많은 담론과 견해(이조차 우리의 기억에서 재구성되어 버린다)에 둘러싸인 사이에 진짜 책은 저 멀리 모습을 감추어버린다는 주장을 펼친다. 정독과 완독을 둘러싼 신화를 깨뜨리려는 과격한 주장이라고 해야 할까.


한데, 이 장을 읽으면서 내가 내내 거슬렸던 것은 저자의 주장이 아니라 인물의 이름이었다. 바야르는 『장미의 이름』의 주인공 이름을 "바스커빌 기욤"이라고 소개하고, 이후에 자신의 논지를 펼치는 과정에서 그를 끊임없이 "바스커빌"이라고 지칭한다. 작품을 읽은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장미의 이름』에서 주인공들은 모두 '(출신지)의 (이름)'의 방식으로 호명된다. 그러니까 '바스커빌'은 인물의 이름이 아니라 '기욤'(국역본으로 본다면 '윌리엄')의 출신지를 말하는 것이다. 아마 이것은 역자의 실수가 아니라 저자의 (의도적일 수도 있는) 오기라고 생각되는데, 바야르 스스로 『장미의 이름』을 SB(Skimmed Book, 대충 뒤적거려 본 책)HB(Heard Book,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된 책)로 분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 달 전 책을 읽을 때에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발견한 오류를 간단하게 언급하는 글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었으나 금세 잊어버렸고, 한동안 이 책을 펼쳐보지 않았었다. 그러다 문득 다시 이 책을 떠올리게 된 것은, 1부의 1장에서 3장까지 저자가 펼치는 주장(책 한 권 한 권에 매몰되지 말고 집단 도서관의 시각으로 바라보라, 전체성과 책들 간의 유기적 연결을 보라는 것이 요지다)에서 사례들을 종합해 원칙으로 추상화하는 과학적 방법론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뇌는 하나의 기계이자 컴퓨터이다. 그 점에 관한 한 고전신경학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와 삶을 구성하는 정신과정은 단순히 추상적 혹은 기계적인 과정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다. 대상을 분류하고 범주화할 뿐만 아니라 판단하고 느낀다. 따라서 판단과 느낌을 배제한다면, 우리는 P선생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컴퓨터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느낌과 판단이라는 개인적인 것을 인지과학에서 배제한다면, 그 역시 P선생과 똑같은 결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 즉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파악하는 능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 따라서 P선생의 사례는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에게 던져진 하나의 경고이자 우화일 수도 있다. 판단이나 구체적인 것, 개별적인 것을 등한시하고 완전히 추상적이고 계량적으로만 변해가는 과학이 장차 어떻게 될지에 대한 경고 말이다.

-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45~46쪽)


개별의 사례를 원칙으로 추상화하는 과학적 사고가 있었기에 인류가 이토록 발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올리버 색스가 24편의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과학적 방법론의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았을 때 우리는 인간이라는 개별적인 주체를 볼 수 없게 되고, 나아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지각하지도 못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P선생의 사례(「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가장 앞부분에 배치한 것은 색스의 주장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형태는 인지하지만 현실의 구체적인 면을 지각하지 못하는 P선생을 통해 색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신경과학의 문제점을 꼬집는 것이다. 추상성의 눈으로만 현실을 재단하는 움직임은 때로 폭력적이어서, 이를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교정'하려고 하기도 한다(「쌍둥이 형제」). 추상성이라는 축으로 기울어진 과학에 색스가 제안하는 것은 "내러톨로지(서사학)"의 회복, "구체성의 과학"이다. 그가 보기엔 "현실을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것으로, 개인적이며 의미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 '구체성'"이기 때문이다. 과학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문학, 특히 소설의 근간을 이루는 '이야기(서사)'의 회복을 말했다는 것이 색스에게 "과학계의 셰익스피어"라는 찬사가 붙게 된 이유였으리라.

















그러나 구체성을 등한시하는 추상성이 세계를 바로 보지 못하듯, 추상성 없는 구체성은 세계를 톺아보지 못하고 차이점에 매몰되도록 할 것이다. 바야르의 책으로 돌아오면, 구체성만 가지고 세계를 마주한 인간은 "대속(代贖)의 사상"을 찾아 황실 도서관을 찾았다가 350만 권의 책을 마주했던 스툼 장군(바야르가 이 인물의 이름은 제대로 쓴 걸까?)과 비슷한 처지이다. 달리 말하면 "'개'라는 속(屬)적 상징이 형태와 크기가 상이한 서로 다른 개체들을 포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으며, 또한 3시 14분에 측면에서 보았던 개가 3시 15분에 정면에서 보았던 개와 동일한 이름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푸네스와 비슷한 상태일 것이다(「기억의 천재 푸네스」). 바야르는 어떤 책도 읽지 않는 황실 도서관 사서의 "총체적 시각"에서 진정한 독자와 교양인이 책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를 역설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선뜻 그의 손을 들어주기 어렵다. 텍스트이든 사람이든, 그들 사이의 관계에서 추상화(또는 일반화)할 수 있는 원리의 힘도 강하지만, 각각의 대상이 품고 있는 개별적인 서사의 감정적 자장 역시 강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결국 양쪽 사이의 균형을 잘 찾아야한다는 식상한 결론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둘 사이의 중간점은 계산해서 딱 떨어지는 그런 지점이 될 수 없음도 이미 안다. 가벼움과 무거움, 이성과 감성, 운명과 우연과 같은 개념들이 끊임없이 길항하며 공존하듯, 추상성과 구체성 역시 그러하다...















추신)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이야기의 회복 부분에서 내가 연상했던 것은 '문학은 보다 나은 현실을 위한 대안이 될 수 있는가?'였고, 여기에서 떠올린 작품이 조이스 캐롤 오츠의 『그들』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작품의 중반부에서 모린이 '오츠 선생님'의 강의, "문학은 삶에 형태를 부여한다."는 말을 듣고 보낸 두 통의 편지였다. 소설 속 삶을 동경하고 지향했던 모린의 일생을 보고 있으면, '오츠 선생님'의 말에 한 번쯤은 의문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이 연상은 오늘 끄적인 주제와는 동떨어져 있어 이렇게 메모로만 남겨두었다. 언젠가 다시 머릿속에서 엮어지길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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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코로나 시국이 장기화되면서 집에 있는 나날이 점점 늘어가고 있지만, 일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해보고자 크게 벌이는 성격과 잠재된 게으름, 점점 떨어지는 집중력, 그리고 저질 체력으로 인해 독서량은 점점 줄어가는 추세다. 요즘 들어서야 다시 하루 중 잠시라도 책을 붙들고자 하는 시간을 가지려 노력 중이지만, 더 큰 문제는 전혀 쓰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책에 대해서 쓸 때는 조금이라도 더 완결된 한 편의 글로 표현하려는 욕심이 글쓰기를 저어하게 하는 것일 테다. 그러나 생각의 속도는 언어보다 빨라서 적확한 언어로 정돈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몇 시간씩 진득하게 앉아 리뷰 하나를 쓸 여유까지는 내게 부여되지 않고 있다. 이러다 정말 글쓰기의 근육이 다 사라지는 게 아닌가라는 걱정에 고민을 하다가, 어떤 주제로든 일주일에 하나씩이라도 끄적여 보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누군가는 매일매일 꾸준히 글을 써서 하나의 결과물로 내기도 하고, 알라딘에도 매일 긴 글을 남기는 분들이 적지 않은데 주간이라니, 라고 생각도 해보았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생각하며... 이 카테고리(혹은 게시판)의 이름은 '주간 아무르'가 되었다. 쓰던 닉네임과 비슷한 단어를 골랐을 뿐, Amour의 의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잡다한 글들의 모임이 될 것이다. 책 제목을 비틀어 고민의 결론을 정리하면, '무엇이든 쓰게 되어야 쓰는 법을 '잃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1.

며칠 동안 이런 글을 시작해야 할 텐데라고 고민만 하다가 오늘 맘을 잡고 책상에 앉은 것은, 황정은 작가의 신간 『연년세세』의 출간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제목의 소설집이 출간될 거라는 소식을 나는 올해 초부터 알고 있었는데, 언제쯤 나오게 될지를 참다 못해 그동안 발표한 단편 중 「파묘(破墓)가 실린 『2019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을 구입해놓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사는 속도를 읽는 속도가 따라잡지 못해 책은 펴보지도 못한 채 한쪽으로 밀려나 있었고, 어느새 소설집이 출간되는 바람에 수상작품집을 읽을 일은 더욱 요원해지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생각보다 이렇게 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도 언젠가는 읽어야 할 텐데라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으나 표지가 너무 안 예뻐서(그렇다. 나에겐 디자인도 중요하다..) 구매를 망설이고 있었다. 그 와중 2017년에 하드커버로 된 양장 특별판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바로 구매하였으나(알라딘 상품 검색이 되지 않아 올리지 못했다. 표지는 http://aladin.kr/p/ao1MN 참고) 워낙 두꺼워서 집 한 쪽에 모셔두고 있었는데, 올해 개역판이 나와버렸다... 결국 개역판은 특별하게 모셔두었던 양장본을 밀어냈고, 양장본은 알라딘 중고서점으로 향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개역판을 펼치고 틈틈이 읽고 있다...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도 이전 판본을 중고로 구매하였지만, 구매한 뒤 한번도 꺼내보지 못한 채 부모님 집의 내 서가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아마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었을 때의 기억이 너무 고되어서일 것이다). 그러던 중 개정판이 또 나와버렸고, 개정판 구매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하여 중고서점으로 향했지만, 점원은 구매 후 한 번도 건드린 적 없는 책의 앞쪽 하드커버가 살짝 뜯어져 있다며 중고로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집에는 두 종류의 『인간의 조건』이 있고, 나는 서울로 올라올 때 또 들고 오지 않았다...















이외에 악착같이 읽힐 기회를 잃지 않으려 버티는 책들도 있다. 『감시와 처벌』은 2020년에 개정판이 나왔지만 2016년본을 악착같이 버리지 않고 참고 있는 경우이다. 『반딧불의 잔존』은 절판되었을 때 7만원에 가까운 돈을 주고 구입했는데, 올해 리커버 에디션이 다시 정가에 나와버렸다. 돈이 아까워서도 그렇지만 리커버 에디션이니까 번역을 손보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위안하면서 리커버 에디션은 장바구니에만 넣어두었다. 읽는 속도는 사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지만, 책이 새로 나오는 속도도 따라가지 못한다...











황정은 작가의 신작 소식에 떠오른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렇게 이어졌다. 읽힐 기회를 잃은 책은 안타깝지만, 언젠가 다시 복권될 일도 있을 테다(다른 작가들의 작품도 함께 있으므로). 무엇보다도 신작이 나왔다는 것이 팬으로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일이다. 다만 이미 발표한 것으로 알고 있던 「MANNING TREE」가 수록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쉽다. '年年歲歲' 연작에 해당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겠지만. 그렇다면 이 단편은 나중에 나올 단행본에 묶일 것인가, 아닐 것인가. 이런 걱정에는 단편 하나를 위해 책으로 가득한 방 한 칸에 또다른 책을 들였다가, 이 책을 읽을 기회를 또 잃게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노파심이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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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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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에서 다뤄지는 워킹 푸어의 현실은 2000년대 초반이지만, 현재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을 뿐더러, 책 속의 현실보다 지금이 더욱 악화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의 생활 곳곳에 공기처럼 스며든 신자유주의는 빈곤은 나태함과 태만의 소치라는 관념을 주입하고, 인성 검사와 약물 검사, 오리엔테이션과 같은 방법으로 그들에게 모멸감과 자괴감을 안기기도 한다.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그들은 중산층과 고위 계층의 눈에 띄지 않도록 분리되고 배제되며, 그들이 버는 돈으로는 최소한의 생계조차 유지하기 힘들다(에런라이크의 위장 취업기는 이 명제를 증명하는 과정이다). 아직은 호황기를 누리던 2000년대의 미국 경제에서도 왜 그들은 부당한 임금과 노동 조건에서 탈출하려 하지 않았는가? 그 답은 우리가 경제학에서 말하는 경제적 인간이 아니라는 데 있다.


처음에 나는 동료들이 적극적으로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지 않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왜 그들은 내가 허스사이드에서 제리스로 옮겼던 것처럼 급여가 더 나은 직장으로 옮기지 않는 걸까? 그 해답의 일부는 인간은 구슬과 다르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은 구슬과 달리 거취를 결정할 때 적지 않은 마찰을 경험하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 가난할수록 기동성이 더 떨어지기 마련인데, 차가 없는 저임금 노동자들은 흔히 차가 있는 친척의 도움을 받아 출퇴근을 한다. 이것은 매일 반복되고 어떤 경우에는 출퇴근길에 보모의 집이나 탁아소에 들르도록 부탁해야 한다. 따라서 일자리를 옮기게 되면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지형학적 난관에 봉착할 수도 있고 어찌 됐든 이제껏 차를 태워주던 친척에게 새로운 직장에 맞춰 경로를 바꿔 달라는 미안한 얘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276)

 

저소득 노동자들이 경제적 인간과 다른 점이 한 가지 더 있다. 경제학 법칙이 제대로 적용되려면 우선 선택을 하는 주체인 개인이 자기에게 주어진 선택의 범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 그러나 저임금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조언을 구할 곳이 없다. 손에 들고 다니는 기기도, 케이블 방송을 볼 수 있는 채널도, 컴퓨터 웹사이트도 없다. 이들에게 구직 정보를 제공하는 유일한 소식통은 직원 구함이라는 안내문과 구인 광고뿐이며, 그나마 급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듣지 못하기 일쑤다. 따라서 누가 어디서 얼마를 받고 일한다는 정보는 입소문을 통해 듣는 게 다인데, 그마저 어떤 설명할 수 없는 문화적인 이유로 전파 속도가 아주 느리고 다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277~278)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이하 리얼리스트)에서 결핍은 시야를 좁혀 자신의 즉각적인 부족함, 5분 안에 시작하는 회의, 내일 지불해야 하는 청구서에만 초점을 맞추게 한다.”(리얼리스트, 66)라고 이야기한다. 빈곤층이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에는 정신적 대역폭의 수축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에런라이크가 레스토랑과 청소 업체, 월마트에서 만난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임금 조건의 불합리성을 견디는 이유에는 누구라도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맥락(리얼리스트, 66~67)이 존재한다. 차가 이 되기도 하는 상황”, “몸이 아프거나 부상을 입어도 이를 악물고 참고 일해야하는 상황”, “병가 수당도 의료보험도 없으니 오늘 하루 일을 못하면 당장 내일 식료품을 살 돈조차 없는 절박함(288)이 산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0여 년이 지난 지금, 세계는 더 나아졌을까?

 

노동의 배신2001년에 나왔고, 한국어판에는 10년 후에 에런라이크가 덧붙인 후기가 함께 실려있다. 저자는 일자리마저 줄어든 현실, 가난을 범죄로 만들고 복지 혜택을 받기 위해 학대와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 현실을 보며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고 진단한다. 그로부터 10년이 더 흐른 지금도 상황은 그리 변한 것 같지 않으며, 여전히 임대료는 그들이 받는 임금에 비해 터무니없이 높고, 사회는 그들을 가장 비민주적이고 자유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작업 공간에 몰아넣어 선택의 폭을 한없이 축소시킨다. 그들이 자신들이 받아 마땅한 임금을 달라고 요구할”(296) 때에 경제가 휘청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우리의 머릿속에 주입되어 있지만, 노동의 대가에 무관심하고 이를 평가절하하는 사회의 종말은 더욱 빠르지 않을까?

 

에런라이크는 말미에서 우리가 느껴 마땅한 감정은 수치심(296)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생계의 필수조건을 충족하며 살아가는 삶의 기반에는 그들의 노동이, 정당한 임금을 받지 못하고 행해지는 노동이 있기 때문이다. 워킹 푸어의 양산에 우리가 직접적으로 일조한 것이 없더라도(죄책감은 흔히 특정한 행위(behavior)에 대해 느끼는 감정으로 설명된다), 그들이 정당한 임금을 받지 않아야 우리의 생활이 유지되는 현실의 방조자로서 우리는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는 뜻일 테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사회 구조는 우리가 불합리함에 의문과 분노를 갖지 못하도록 노동의 흔적을 감춰버리는 데 능숙하다. 청소 업체가 다녀간 집에서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워킹 푸어를 우리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박애주의자(296)라고 지칭한 것은 워킹 푸어가 있어야 작동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에 대한 조소로 읽힌다. 빈곤에 대한 비난의 시선을 담은 안경을 벗고 그들과 함께 연대할 때, 그들의 저항에 지지를 보낼 때 하늘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마침내 우리 모두가 더불어 더욱 잘 살게(296) 되지 않을까. 나는 그들과 다르다며 눈감을 수도 있겠지만, 언제고 그들이 곧 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지난 20년 동안 노동을 대하는 자본주의의 모습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경제적 불평등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극단적인 불평등을 향해 치닫는 일종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노동력을 확보하려면 너무 적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도 대기업의 최고 경영자들, 심지어 더 메이즈의 사장 같은 피라미 경영자들도 노동자들에게서 몇 킬로미터는 떨어진 과하게 높은 경제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경영자들은 자신을 위해 일할 노동자를 특정 범주의 사람들 중에서 뽑아야 하지만 그 범주의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불신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실제적인 경험보다는 계급 또는 인종에 관한 편견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앞서 설명한 억압적 경영을 해야 한다고 믿고, 개인의 영역을 침해하는 약물검사와 인성검사를 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하지만 이 모든 일에 드는 비용이 엄청나고(매니저 한 사람을 쓰는 데 1년에 2만 달러 이상, 약물검사 한번에 100달러 정도 든다), 이렇게 억압하는 데 비용을 많이 쓰다 보니 임금을 낮게 유지해야할 수밖에 없다.- P285

가난을 직접 체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빈곤을 일반적으로 어렵지만 어찌어찌해서 넘어갈 수 있는, 생존 자체는 위협받지 않는 상태로 이해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 곁에 늘 있었으니‘ 말이다. 특히 빈곤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통의 심각성은 더욱 짐작하기 어렵다. 점심을 과자나 핫도그 빵으로 때웠다가 근무 시간이 끝날 때쯤이면 현기증이 나 기절할 지경이 되는 것을, 차가 ‘집‘이 되기도 하는 상황을, 몸이 아프거나 부상을 입어도 이를 악물고 ‘참고 일해야’ 하는 상황을, 병가수당도 의료보험도 없으니 오늘 하루 일을 못하면 당장 내일 식료품을 살 돈조차 없는 절박함을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 같은 경험들은 지속할 수 있는 삶, 심지어는 만성적 결핍에 시달리는 삶의 일부라고도 할 수 없으며 낮은 수준의 처벌을 끊임없이 받는 것이라고밖에는 말할수 없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기준을 어떻게 정한다 할지라도 이들이 처한 상황은 응급 상황에 해당한다.-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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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일이 돌아올 때마다 내가 떠올리는 여러 문장들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자주 떠올리는 문장은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의 한 대목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연민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함을 일깨우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다소 길지만 인용하면 이렇다.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텔레비전 화면에서 클로즈업되어 보여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비록 우리가 권력과 맺고 있는 실제 관계를 또 한번 신비화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러운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154)


이 대목은 연민에서 그치는 것이 침묵하는 권력에 동조하는 것이기에 공감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로도 읽히지만, 불의와 폭력에 맞서 끊임없이 행동하고 발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연민에 머무르며 자신이 힘을 쓸 수 없다는 무력감으로 숨는 것은, 개인을 '비-존재'의 영역으로 몰아가는 세계를 묵인한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다.















일인시위용 피켓을 만들어주기도 했던 동생에게 그 자리에 같이 가자고 말하자 단번에 싫다, 는 대답이 돌아왔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냐고 조심스럽게 묻자 곰곰 생각하더니 "내 일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한다. 그녀는 용산이 참혹하게 고립되어 있다는 점을 알며 그러한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막상 그 자리에 가기는 무섭다고 말한다.

여러 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여러 가지 처지가 있을 수 있다.

한 가지만 생각해보자. 광장에 모인 오십만, 칠십만의 촛불을 향해 촛불을 들지 않은 나머지 사천 몇 백만의 손이 있다라고 말하는 이들의 시절에, 당신의 침묵과 부재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 황정은, 입을 먹는 입(문학동네 61-2009.겨울, 51-52(쪽수는 전자책 기준))















6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세월호에서 우리가 (프리모 레비가 줄곧 말해왔던) 세상에 대한 수치심을 생각해야 하는 것은 여전히 변화해야 할 지점들과 기억해야 할 이름들, 그리고 발화해야 할 언어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공공연하게 세월호를 깎아내리는 발언이 전파를 타고, 탄핵 이후 청산될 줄 알았던 적폐의 정치는 산재해 있고, 진상조사는 여전히 지지부진하다. 촛불이 광장을 가득 채웠던 혁명의 시기를 지났음에도 세계의 움직임이 너무나 미미해서 변화하는 것 같지 않아 눈을 돌릴 때, “침묵과 부재는 권력이 과거를 되풀이하도록 만들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는 또다시 우리에겐 세상을 바꿀 힘이 없었다며 면죄부를 줄 것인가.
















니체의 입장에 우리가 난감해하는 것은 그가 수치심에 대해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을 펼쳐서가 아니라 고결한 자의 수치심과 선한 자의 연민을 대비시키며 후자를 집요하게 비난하기 때문이다고결한 자와 비교했을 때 연민의 정을 지닌 선한 자는 사실 자기 역량의 최소치만을 사용한다그들은 고통의 상황을 그대로 두고서 아주 소량의 도덕적 선행만을 반복한다. 니체는 이런 도덕주의자들을 마비되어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는 그런 무기력한 앞발을 갖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이 선하다고 믿는 그런 겁쟁이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앞발을 들어 약자를 해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느라 분주한 통에 수치심을 느낄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그들은 자신의 역량즉 진정으로 행하고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고통받는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대신 그 고통 앞에서 수치심을 느껴라연민이란 참으로 게으르고 뻔뻔한 감정이다.’

진은영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눈먼 자들의 국가, 72-73)


6년 전 오늘의 나는 사건의 존재마저 알지 못했던 무지하고 침묵했던 이였다. 6년이 지난 오늘은 총선 결과가 도래했고, 앞으로 도약할 것인가 후퇴할 것인가를 지켜봐야 할 것이다. 나는 다만 6년 전의 수치심을 간직한 채 감각을 곤두세우고, 침묵하지 않고 끊임없이 발화할 따름이다. 단 하나의 목소리도 허투루 여기지 않고 호명하는 것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한 걸음일 것이다. 여전히 발화되어야 할 목소리들은 우리와 가까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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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3 23: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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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9 17: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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