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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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배수아의 소설적 세계에서 기형도의 시 세계가 보인다면 그건 착각에 불가할까? 우울하고 아스팔트의 빛을 머금어 회색빛을 품은 안개. 표정을 감춘 채 거리를 쏘다니는 사람들. 겨울 바람, 오래되고 버려지는 아파트. 이러한 이미지는 배수아의 이번 소설집 <>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이미지다. 마치 1980년대 동구권이 붕괴하기 이전의 풍경을 엿보는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던 러시아, 중앙아시아의 구소련권에 속하는 국가들. 북유럽의 풍경을 상상하게 하는 세계를, 배수아는 그리고 있다.

 

소설집의 표제작 <>은 세 사람의 훌이 등장한다. 우선 주인공 의 절친한 친구 훌, 사람이 많은 곳에 다니기를 싫어하고 악수하거나 포옹하는 것을 싫어하는 훌은 주인공과 방에서 뒹굴거리며 텔레비전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반대로 같은 이름을 가진 동류 훌은 인형극에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진지하게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존재다. 좀더 진보적인 정치 구호에 관심이 많은 동료 훌은 를 친근하게 대하지만 는 그를 귀찮아 하기만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 나의 이름이 다른 둘과 마찬가지로 이라는 사실은 가장 마지막 순간에 밝혀진다. 그럼으로써 단순하게 현대 도시인의 우울을 다룬 게 아닌가 싶은 소설의 서사는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소설의 초입에서 는 자신의 집에 있는 텔레비전에서 <보리스 고두로프>라는 오페라가 방영되고 있는 걸 발견한다. 오페라 따위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오히려 <미인에게 청혼하다>라는 연속극에나 관심이 있던 나는 그런 오페라의 방영이 짜증만 난다. 그러다가 시간에 상관없이 오페라가 방영되는 것이 결국엔 집의 텔레비전이 고장 났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을 깨닫고 새 텔레비전을 구하려고 수소문을 시작한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가 텔레비전을 구하려고 하는 과정을 그렸다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친구 훌은 몸이 좋지 않은지 연락이 자꾸 안 된다. 그 사이로 앞에서 말했듯이 진지한 취향을 가진 동료 훌이 자꾸만 의 앞에 나타나 참견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나는 그가 짜증 나지만 그렇다고 그를 뿌리치지는 않는다.

 

나는 이러한 서사의 진행 속에서 분리된 개인의 자아의 역할을 바라본다. ‘라는 훌을 가운데 두고, ‘안 진지한 훌’ (친구). ‘진지한 훌’ (동료)로 나뉘어지는 것이다. 텔레비전이 고장 난다는 사건은 언뜻 보면 별 의미를 가지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텔레비전이 고장나면서 는 자꾸 동료 훌과 엮기 게 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너는 주말에 텔레비전이 고장나서 어떡하니 여기 내가 하는 인형극이 있어 어서오렴.’ 나는 그 말을 들어는 주지만 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약국에 가면서 인형극이 열리는 근처까지는 가게 된다. 이런식이다.

 

는 중간지대에 서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처음 텔레비전이 등장한 이후, 1984나 멋진 신세계 같은 SF소설은 텔레비전을 하나의 통제 수단으로 여겨왔다. ‘바보상자라는 오명도 이러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배수아의 소설 <>은 텔레비전이 고장 난다는 사건을 시작으로 를 강하게 지배해온 일상의 관성이 서서히 힘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은 그런 관성이 힘을 잃게 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는 짜증나지만, 자신과 다른 인물들(동료 훌, 몽고 여자)과 관계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친구 홀은 계속해서 연락이 되지 않는다. 이런 접촉은 에게 과도한 피로감을 주지만 과연 는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어떤 노력을 하는가. 텔레비전을 구하는 과정은 터무니없는 가격을 제시함으로써 번번이 좌절시키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강하게 내치지는 않는다. 물론 소설의 결말은 가 동료 훌과 함께 권투 경기를 보러 가려고 하다가 그를 떠나는 것으로 끝이 난다. 결국엔 자신이 안온하다고 느껴왔던 일상의 관성을 되찾으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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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 장혜령 소설
장혜령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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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진주에 간 날, 하늘이 파랬던 것이 기억난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45일로 기획된 수학여행은 버스를 타고 남도 지방의 명승지를 돌아다니는 여행이었다. 1년 전인 고1 때는 무주에 있는 해병대 캠프에 가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즐거운 수학여행이었다. 거의 내내 버스를 타고 보성 녹차밭이나 순천 갈대밭 같은 유명한 곳을 찾아다녔는데 진주에는 가장 마지막 순서로 간 곳이었다. 우리는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떨어졌다는 정자와 임진왜란 때 치열하게 전투가 일어난 진주성터를 돌아보았다. 내게 잠시 스쳐 간 남도의 도시인 진주는 이 소설의 화자이자 작가의 아버지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교도소가 있는 도시이며, 열 살 때 그리고 수십 년 후 이 책을 쓰기 위해서 작가가 방문한 곳이다. 나나 작가에게나 낯설었을 도시에 대한 기억은, 작가를 사로잡고 끝내 하나의 언어가 된다.

 

다수가 기록하기로 합의한 기억은 역사가 된다. 버려지는 기억들은 무엇이 되는가. 무너진 신전의 기둥, 부서진 항아리의 조각, 누군가가 여기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물화 된 부재.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기에 쓸쓸하지도 서글프지도 않는 기억들. 그러나 딸은 기억해 낸다. 붓을 들고 허리를 숙인 채 땅속을 털어낸다. 역사의 쓰레기들은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져 간다.

 

기억을 닮은 소설은 물속의 사금파리처럼 반짝인다. 수선집을 운영하신 어머니. 계속 아버지를 찾으며 대문을 두드리는 사복 경찰. 어느 날 집에 눌러앉아 버리는 하얀 개. 그리고 아버지, 부재했지만 항상 곁에 존재했던 아버지. 마침내 감옥에서 나와 바로 옆에 존재하게 되었지만, 부재했던 시절의 그림자에 휩싸인 아버지. 보통 어린 시절의 기억은 언어화되지 않은 짤막한 장면의 연속이고 이 소설의 글들은 그런 장면의 연속을 닮아있다. 어린 시절의 화자는 고독해 보인다. 이어지는 언어의 여백 속에서 고독하다는 말은 쓰여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끝없이 부재에 대해서 말하는 화자의 말에는 혼자 가로질러갈 운동장, 말없이 책을 읽는 눈동자, 말하기를 그만두고 다무는 입이. 읽힌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작가가 어린 시절 쌍둥이처럼 뺨을 맞대고 지내던 고독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요즘에는 혼자 지내는 아이의 모습은 불안하게만 하지만, 그런 고독 속에서 이런 언어가 탄생하기도 한다.

 

어떤 작가는 자신의 기억과 화해하기 위해서 쓰기도 한다. 나는 이 소설의 작가가 이 같은 마음으로 글을 썼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다만 짐작할 뿐이다. 모든 아이는 부모를 사랑하고 어느 순간 실망하기 마련이다. 작가는 불행한 어린시절은 아니었다고 했지만, 부재하는 아버지에 대해서 분노하던 순간이 하나도 없었을까. 나는 화자가 부재하던 아버지에 대해서 씀으로써 그 기억에서 해방되었다고 생각한다. 화해의 종소리가 울리기까지는 수십 년이 걸렸다. 나는 언제쯤 과거의 분노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이제는 이 책을 읽으며 사로잡힌 내 기억에 대해서 말할 차례다. 내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전화를 걸어 내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술을 먹으면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보다는 낫지만, 술을 먹지 않을 때는 내게 하나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무책임한 가장이었다. 앞에서 말한 수학여행을 가기까지도 곡절이 꽤 많았다. 수학여행비를 제때 내지 못해서 허둥되었고, 그전에도 몇 달 동안 급식비를 제때 내지 못해서 학교 행정실에 몇 차례나 불려가 행정실 직원에게 추궁을 당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존재했으나 부재했다. 벌써 10년 전의 기억이지만 그때 느끼던 모멸감과 버려졌다는 기분이 생생하다. 나는 언제쯤 기억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진주>의 작가는 십 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내게도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까. 때때로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면 몸서리가 쳐진다. 그러나 그때도 존재해왔고 지금도 존재해왔던 것들. 푸른 하늘, 석양 속에서 걷던 하교길, 잠을 자고 깬 뒤 느껴지던 적요로움. 그런 것들이 나를 살게 해왔음을 알고 있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내게도 언어가 들려오는 순간을, 그 긴 시간을 견디고, 기다릴 수 있음을 지금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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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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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의 마지막에, 2020년의 제일 처음 읽은 책이다. 환하고 환해서 어제까지의 1년이 과거가 되고 새로운 1년의 하얀 하루하루처럼 기분 좋고 아름다운 백색의 언어들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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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여행 다니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
언젠가 여자친구인 K가 내게 한 이 말은 참 이상하게 들렸다. 왜냐하면, 나는 여행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혼자서 여행을 가본 적도 없었고 가족들과 어디를 가는 것도 속으로는 짜증 내기 일쑤였다. 몇 번 가본 해외여행은 친구가 계획한 걸 몸과 돈만 들고 따라간 것에 지나지 않았고 그나마도 가까운 일본(물론 올해 전에)에 간 게 전부였다.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했는지 이유를 묻자 K는 하도 싸돌아다녀서 당연히 여행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고 대답했다. 하긴 그 얘기가 나온 당일에도 나는 2만 보를 걸었다. 집순이인 K에게 나는 여기저기를 싸돌아다니기를 좋아하니 의례 여행을 좋아할 줄 알았던 것이다.

올해, 2019년은 내내 걷고, 책을 읽는 한해였다. 두 가지 일 모두 예전에도 똑같이 하던 일들이었지만 올해 들어서 절대량이라고 할까. 두 행동이 차지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예를 들자면, 독서량은 20퍼센트 정도 늘었고, 걷는 양은 평균적으로 50퍼센트 정도 증가했다. 2월에 학교를 졸업한 후, 올해정도는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온전히 투자해보자하고 취업을 미뤘었더랬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백수. 백수에게는 남는 것은 시간밖에 없었고 나는 걷고, 걷고, 읽었다. 때마침 원래부터 쓰던 독서 어플인 <북플>에서 독보적이라는 만보기 기능을 추가한 것은 이런 추세에 기름을 얹었다고 할까. 하루의 목표를 달성하면 50원 정도를 받을 뿐이지만, 운동을 떠나서 주어지는 작은 보상은 이 개고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도로는 충분했다.

그렇게 12월이 된 지금 나는 매일 2만 보를 걸었다. 집에서 게으름을 부리고 목표를 초과 달성해서 3, 4만 보 정도를 걷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들을 합치니 평균적으로 2만 보를 걸었다. 매일 15km 정도를 걸어 다닌 셈인데 훈련소 때 하던 10km 행군을 매일 1.5 배 정도 더하는 것이었다. 대충 어디까지 거리나 고민해보니 구로구 오류동인 우리 집에서 2호선 홍대입구역까지 걸어가는 거리였다. 그럼 두 배가 되는 날에는 왕복까지 할 수 있는 거구나.

<걷는 사람 하정우>에서 배우 하정우 씨는 걷는 것의 의미를 예찬하면서 자신이 매일 걸어서 출퇴근하고 그 코스까지 소개했다. 어디까지는 몇만 보, 저기까진 몇만 보. 이런 식이다. 나에게도 그런 코스가 몇 개 있다. 첫 번째 코스는 도서관까지 걸어가는 한 시간 남짓의 코스다. 지름길로 단번에 걸어가면 45분 남짓 걸리지만, 주변 샛길로 돌아가면 딱 한 시간이 걸린다. 6000보 정도. 왕복으로 합치면 12000보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이걸로 하루 운동 다 하겠다고 하겠지만 내 하루 목표치는 2만 보. 턱없이 모자란 결과다. 영등포까지 자전거를 타고 집에 오면 15000보. 홍대까지는 20000보. 매주 토요일마다 하는 스터디를 위해서 신촌까지 다녀오면 27000보. 그 정도를 걷고 집에 오면 지쳐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잠을 잘 수 있다. 어쩌면 그걸 바라고 걸어 다니는 건지도 모르겠다.

스물일곱 내 나이에서 취직에서 한걸음 멀어진다는 결정은 그 자체로도 불안했다. 보통은 취직하고 어떤 이들은 내가 꿈꾸는 분야에서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하는 노력이 어떤 결과물을 얻어 줄지는 아무도 몰랐다. 불안했다. 집에 앉아 있으면 어떤 것이 터질까 봐 나는 자꾸 밖으로 나갔다. 걷고 걷다 보면 조금씩 불안이 휘발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잘 잊어버리는 사람이었다. 특히 걸을 때는 더 잘 잊어버릴 수 있어서 매일 보는 풍경도 잊어버려서 같은 곳에 가더라도 이런 곳이 있었나 싶었다.

계절이 지나면서도 나는 같은 곳을 자주 지나쳤다. 그동안에도 나는 많은 것들을 잊어갔다.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햇빛의 궤적, 나날이 무거워지고 가벼워지는 나뭇잎들. 서서히 차가워지는 공기들. 매일 다른 각도로 한강을 물들이는 낙조. 잊어버리고 잊어버릴수록 나는 매일 걷는 자리마다 다른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그 안에 불안은 없었다. 조금씩 결은 다르지만, 마음을 물들이는 감정은 기쁨에 가까웠다. 걷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순간들이었다.

처음 느끼는 사랑의 추억, 소중한 이를 잃어버리는 슬픔, 친구들과 함께한 추억과 즐거움. 이런 감정들을 잊어버리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잊혀지는 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잠시 없어졌다가 이내 다시 떠오르는 것이다. 그렇기에 잊어버리는 것은 슬프지만 아름다운 일이기도 하다. 스스로 약속했던 1년은 다 지나가고 올해는 며칠 남지 않게 되었다. 새로 오는 1년 동안 나는 무슨 일을 겪을 것인가. 적어도 지금처럼 오래 걷고 책을 읽을 거라는 건 알고 있다. 그리고 많은 일을 잊어버릴 것이다.

핸드폰에 작게 표시된 <북플>의 아이콘이 친숙해 보이는 것은 이 작은 아이콘이 내가 결심한 걸 해보라고 등을 떠미는 친구 같아서다. 그래 나는 네 말을 듣고, 오늘도 걷고 읽을 거다. 잊는 걸 잘하는 나지만 걷는 것의 의미를 잊어버릴 정도로 건망증이 심하지는 않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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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예능 - 많이 웃었지만, 그만큼 울고 싶었다 아무튼 시리즈 23
복길 지음 / 코난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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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로 뒤범벅 된 글을 읽는 일은 즐겁지 않았다. 남자라고 해서 여성의 분노를 공감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는 아니다. 책은 트위터가 아니다. 분노 좋다. 여자가 한국 사회에서 힘들게 산다는거 알고 있다. 그런데 글을 읽는 게 즐겁지가 않다. 글들은 티브이 예능에서의 남성 권력에 대한 비판을 이어나간다. 읽으면서 숨이 막힌다. 내가 남자이기도 때문이지만 글이 별로여서였다. 무언가를 싫어할때 논리적이기는 쉽지 않다. 비슷한 공감대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는 분노는 좋은 매개체 이지만 나는 아니다. 소설로 따지자면 백인 노예를 학대하는 흑인 주인이 나오는 역사 소설이고,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목사를 훈계하며 구타하는 동성애자가 등장하는 소설이다. 그런 소설을 읽으며 우리는 ‘이 소설 참 구리다.‘라고 말한다. 그렇다 이 책은 구리다. <글쓰기 특강>에서 유시민씨에 따르면 취향이 논리가 되지 못하는 글이랄까. 분노에 어울리는 매체를 떠난 글이 책이 될때 글에 묻힌 분노는 오히려 단점이 된다. 충분한 정보를 제시하지 않기에 비평이 될 수 없고, 결국엔 취향을 따라서 쓰인 리뷰라고 할 수 있다. 에세이집인줄 알았는데 리뷰집이었다. 그것도 1점만 주는 인색한 리뷰집이다.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 오래 쓰는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독자인 나는 글을 읽는 게 즐겁지 않았다. 그래서 1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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