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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flaneur > <음악이란 무엇인가> 역자 후기

저의 다섯 번째 번역서입니다. 아래는 아마존 주소입니다.
http://www.amazon.com/exec/obidos/ASIN/0192853821/qid=1097840593/sr=2-1/ref=pd_ka_b_2_1/104-4184829-6048733

저자가 서문에서 책의 범위를 규정했듯이 본서는 "음악에 관한 것이면서 음악에 관한 사고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개별적인 음악의 정보보다는 포괄적인 음악의 이해를, 음악의 역사보다는 음악의 개념과 해석의 역사를 다루며, 작곡과 레퍼토리 중심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연주와 담론을 포괄적으로 소개한다. 그래서 여러분이 음악이 제공하는 음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을 넘어 음악적 경험과 그 의미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은 바로 여러분을 위한 책이다.

오늘날 음악이 처한 상황을 생각할 때 이 책이 갖는 의의는 더욱 특별하다. 20년 전만 해도 동네마다 음반점이 하나둘씩은 있었으며, 이 곳은 음반을 사고 파는 상점을 넘어 음악에 관한 정보와 대화가 교환되는 문화적 소통의 창구 역할을 했다. 음악은 책과 더불어 당당히 문화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고, 오디오 기기는 모든 가정의 거의 필수적인 가구였다. 이제 영화가 이끄는 영상 시대가 도래하면서 음악은 슬그머니 우리의 삶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음악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우리는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로 수많은 음악에 둘러싸여 하루를 보낸다. 음악은 어느덧 그림자 같은 존재가 되어 우리와 함께 있다.

이렇게 변화된 상황에서 음악에 관한 진지한 질문들을 던지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음악이 일종의 소비재 내지 배경막이 되었을 때, 음악의 의미는 어떻게 될까? 레코딩으로 인해 온갖 음악이 무차별적으로 소비될 때, 기존에 음악을 갈라놓았던 관습과 전통의 장벽은 어떻게 될까? 이런 상황에서도 음악(주로 클래식 음악)은 예전의 순수함과 숭고함을 간직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부터 음악은 정말로 순수했던 것일까? 과거의 음악들이 현재의 음악보다 우대 받는 상황은 정상적인 것일까? 음악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니콜라스 쿡 교수는 이런 질문들로 우리를 인도하는 최적의 안내자다. 그것은 그가 비단 전통적인 음악학뿐만 아니라 미학, 민족음악학, 심리학, 사회학, 대중 음악 연구 등 음악과 관련된 학과들을 폭넓게 이해하고 있어서 오늘날 음악, 나아가 음악 담론의 상황을 가장 공정하고 비판적으로 보고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니콜라스 쿡 역시 전통적인 음악학을 공부한 학자답게 음악 분석에서 출발했지만, 일차적으로는 분석이 음악의 이해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해왔다. 1987년에 나온 <음악분석입문 A Guide to Music Analysis>은 바로 이런 고민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어 1990년 그는 <음악, 상상력, 그리고 문화 Music, Imagination, and Culture>라는 문제작을 내놓았는데, 이 책은 음악학적 경험과 음악적 경험을 구별하여 악보 중심의 구조적 청취가 일반적인 음악 청취와 무관하다는 주장을 통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사실 이 책을 통해 그가 역설했던 점은 들리는 것이 음악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 음악의 의미와 해석은 해당 문화의 틀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때부터 니콜라스 쿡은 관심 분야를 분석에서 미학 쪽으로 옮기면서 주로 연주와 해석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가 보기에 기존의 음악 담론이 갖는 가장 큰 문제는 지나치게 작곡가 편향이라는 점이다. 그는 작곡가의 독재에서 벗어나 연주와 해석을 적극 수용하여 음악의 이해에 균형을 맞추고자 했고, 작품과 연주 사이의 어딘가에서 음악의 존재론을 정립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대중 음악과 민족음악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대중 음악이야말로 연주에 큰 의미를 두는 음악이며, 또 단일 저자라는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는 음악의 의미를 순수한 음이 아니라 보다 폭넓은 멀티미디어로 확장하려는 야심 찬 시도를 한다. 1998년에 나온 <음악적 멀티미디어 분석 Analysing Musical Multimedia>이 바로 그런 시도의 산물이다. 일반적으로 뮤직 비디오나 영화 음악, 광고 등 멀티미디어에 관한 담론들이 음악의 의미를 철저히 시각적 정보에 종속시켰다면, 이 책은 음악이 중심이 되어 의미를 생성하고 폭을 넓혀 가는 과정을 이론화하고 있다. 그는 궁극적으로 경합(contest)을 지향하는 멀티미디어 미학이 자율성의 윤리와 작가의 권위에 도전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생성한다고 믿는다.


본서 <음악이란 무엇인가>(원제는 A Very Short Introduction: Music)는 이런 그의 이력이 총망라된 책이다. 비록 분량은 짧지만 가볍지 않은 주장을 담고 있는 책이다. 여기서 책의 내용을 요약하는 일은 불필요해 보이며, 다만 이 책과 관련하여 음악학의 지형도를 간단히 제시하고자 한다.

1980년대에 베이비붐 세대가 음악학계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의미 있는 변화들이 일어났다.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민족음악학과 음악학의 소통, 대중 음악 연구의 등장, 아도르노 르네상스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 모두를 연결하는 키워드는 음악 '안'에서 음악 '밖'으로 눈을 돌리자는 것으로, 쿡의 표현을 따르자면 '음악학을 골방에서 끌어내기'라고 할 수 있다. 본서에서도 언급되었지만, 그동안 민족음악학은 모든 음악을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연구하는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주류의 음악학자들에 의해 클래식이 아닌 음악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오인되었다. 그런데 이런 민족음악학의 방법론이 이 시기에 주류와 소통하면서 클래식 음악 연구에 서서히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 흐름에 대중 음악 연구가 가세했다. 기존의 대중 음악 연구는 거의 사회학과 문화 연구가 독점한 분야였는데, 영국의 학술 저널 이 창간된 이후로 음악학이 대중 음악을 진지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음악학은 더 이상 협소한 악보의 틀만을 고집할 수 없게 되었고, 음악의 사회적 의미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아도르노가 선구자의 위치로 떠올랐다. 본서의 6장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새로운 음악학'은 바로 이런 흐름과 나란히 한다.

니콜라스 쿡은 이런 흐름에 직접 몸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발 떨어진 위치에서 이 같은 시도들에 지지를 보낸다. 주목할 점은 한발 떨어져 있다는 사실인데, 그는 음악의 순수성과 악보의 절대화를 거부하고 연주를 중시하는 점은 높이 평가하면서도 지나치게 음악 외적인 맥락에 치중하는 것--다시 말해 문화가 음악의 모든 의미를 규정한다는 식의 주장--을 경계한다. 한마디로 음악 안과 음악 밖, 텍스트와 콘텍스트 사이에 균형을 잡으면서 새로운 흐름과 구별되는 위치를 다지기 위해 고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은 음악의 자율성이 타자를 이해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재구성하게 하는 능력을 높이 평가한 결론 부분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니콜라스 쿡과 음악학의 새로운 흐름의 미묘한 차이점을 여기서 더 설명하기보다는 책 한 권을 추천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얼마 전 국내에 소개된 크리스토퍼 스몰의 <뮤지킹 음악하기>(조선우, 최유준 번역, 효형출판)로 이 책은 위의 새로운 흐름과 관련된 저술 가운데 국내에 번역된 거의 유일한 책이다. 스몰이 이 책에서 음악의 의미를 규정하는 방식과 니콜라스의 본서가 음악의 의미에 접근하는 방식을 서로 비교해본다면 흥미로울 것이다. 아울러 이제는 새로운 음악학의 스타가 된 수잔 매클러리와 로렌스 크레이머를 비롯하여, 아도르노와 더불어 1980년대 음악학의 방법론에 큰 충격을 주었던 자크 아탈리, 대중 음악 연구의 이정표를 제시한 리처드 미들턴, 그리고 무엇보다 조제프 커만의 저술도 하루빨리 국내에 소개되기를 기대한다.

언제나 학술 서적 출간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는 동문선에는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교차한다. 대학 출판부들이 제몫만 했어도 동문선의 어깨에 지워진 짐이 훨씬 가벼웠을 것이다.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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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annerist > 천재란 이런 것이다!
Evgeny Kissin - Chopin : Piano Concertos No.1 & 2
예프게니 키신 (Evgeny Kissin) 연주 / 아울로스(Aulos Media)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분명히 말한다. 에브게니 키신의 이 음반은 쇼팽 피아노 협주곡의 명연에 들기는 부족함이 많은 음반이다. 1번 협주곡 처음부터 전개되는 현의 울림은 누가 러시아 악단 아니랄까봐 우악스러울 정도로 과도하게, 직설적으로 터져나온다. 기존의 쇼팽 피아노 협주곡 명연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과도한 도입부가 적잖게 부담스러울게다. 차이콥스키 교향곡(특히 4번) 연주하듯 시종일관 현을 거칠게 긁어대니 나긋나긋하고 섬세한 쇼팽 피아노 협주곡의 본질을 잘 담아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연주이다. 거기에 피아노 소리는 애매한 구석 하나 없이 분명하고 또랑또랑하다. 과도할 정도로. 바로 이 부분에서 이 음반에 대한 가치평가가 엇갈릴게다.

이 음반을 한마디로 평하자면 키신의, 키신을 위한, 키신에 의한 음반이다. 고작 열두살의 소년이, 미스터치라곤 거의 없이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을 애매모호한 구석 하나 없이 연주해 냈다는 사실말이다. 아직 손 크기도 다 자라지 않은 소년의 쇼팽 1번은, 아르헤리치나 치베르만의 쇼팽처럼 맑고 투명하게 다듬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후 키신 하면 떠오르는 완벽한 테크닉과  분명하고 또랑또랑한 소리는 이미 이때 완성되었다고 해도 그리 지나친 표현이 아닐 것이다. 유연한 2악장의 로망스, 혹은 3악장 손가락 끝의 힘을 빼고 조금은 유연하게, 모호하게 처리해 왔던 부분들을, 예의 명정함으로 거침없이 처리해 나간다. 아르헤리치의 두번째 연주처럼 잘 다듬어진 소리를 매끄럽게 감정을 실어 처리해내데는 역부족이지만 손도 다 자라지 않은 소년이 한 음 한 음을 미스터치 없이 처리해나가는 광경을 상상하면 소름이 돋을 정도다. 게다가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은 오케스트라 반주가 피아노 독주에 비해 비중이 작은 협주곡인지라, 피아노가 곡 전체를 이끌어 나가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데 이 연주에서도 이 열두살 소년은 적잖게 거친 소리를 내는 오케스트라를 일점의 망설임 없이 예의 그 명정한 소리로 이끌어나가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게다가, 이건 실황 연주다. 놀라울 수 밖에 없다. 데뷔무대에서 거친 소리를 뿜어대는 악단과 협연하며 조금도 움츠려들지 않고 자기 소리 내는데 여념이 없는 패기만만한 열두살짜리 소년의 소리가.

쇼팽 피아노 협주곡을 한장만 꼽아 들어야겠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는 수이 권하기 힘들다. 분명히, 이 음반보다 좋은 연주는 많다. "그녀" 아르헤리치의 엘범도 좋고 치베르만이 직접 지휘를 담당한 멋진 연주도 좋다. 하지만 예브게니 키신의 팬이라면, 그의 완벽한 테크닉과 또랑또랑한 소리에 매력을 느낀 사람이라면 한번쯤 사서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실황 연주의 분위기도 꽤나 잘 담아낸 음반이다.

잔걱정 한가지 - 다닐 샤프란을 비롯해 멋들어진 러시아의 음원을 발굴해서 보급해 온 아울로스 뮤직에서 왜 이 음반을 냈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은 절판된 예당 클레식에서 2년 전쯤 풀었었고, 가장 최근에는 브릴리언트 예브게니 키신 박스세트에 들어있는 것과 똑같은 음원의 연주이다. 이들 음반으로 인해 키신의 쇼팽 찾는 사람들은 적잖게 이 음원을 구했다는 걸 생각해 본다면 이 음반의 기획은 무언가 어긋장났다는 생각이 든다. 내 주변 사람이 쇼팽의 키신을 꼭 듣고 싶다고 한다면 이 음반보다는 브릴리언트의 네 장짜리 키신 박스세트를 사라고 해주겠다. 이만원을 조금 넘는 cd두 장 가격에 이 연주 이외에도 발레리 게르기에프와 함께 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내 생각에, 차이콥스키 1번에 한해 다섯손가락 안에 들어갈 연주이다) 같은 키신의 소름끼치는 연주가 수록되어있기에, 가격 면에서나 연주 면에서나, 키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최상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잡설이 또 길었는데, 하여간 훌륭한 러시아 음원을 계속해서 좋은 음질로 발굴해내는 아울로스 뮤직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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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nomadia > 타자의 현현, 윤리의 지평
타인의 얼굴 - 레비나스의 철학 현대의 지성 122
강영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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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성은 서양철학의 비밀이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현상계의 범형이고, 그 제작의 원동력이었던 이래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거쳐 칸트에 이르기까지 이들 철학자들이 한결같이 원했던 것은 개념화된 추상과 표상 아래 세계와 인간을 환원하는 것이었다. 실재와 사유 즉 진리성에 대한 회의가 창궐할 때조차 이러한 기본적인 가정은 변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한 철학체계의 일관성과 개념적 정합성이 관건으로 떠올랐고 그 외의 것은 부수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이를테면 개념과 정의(horismos, definition)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일종의 환각(phantasma, simulacre)으로 아예 철학의 대상에서 배제되었으며(Plato, Aristotle), 일상성(Alltäglichkeit)이란 주제는 <현존재의 가장 가까운 존재양식>으로 인정됨에도 불구하고 본래적인 것이 될 수 없었다(Heidegger). 아우슈비츠와 굴락, 수용소와 대량학살이라는 20세기의 끔찍한 아이콘은 이러한 배제와 통제 그리고 그 배후에 숨은 전체성이라는 이념의 참혹한 결과다.


이 책의 저자 강영안은 레비나스를 이 서양철학의 치부에 과감히 메스를 갖다 댄 인물로 소개한다. <레비나스는 유럽의 전체주의는 유럽 철학 전체가 빚어낸 파국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 전체주의 속에서는 한 개체의 고유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레비나스는, 서양 철학은 대체로 질적 다양성 또는 다원성을 수적 다양성으로 대치하고 이것을 또다시 일원성 또는 단일성으로 환원하는 철학이었다고 본다>(30-1). 이러한 환원은 개체의 고유성 즉 ‘다름(l'altérité)’을 희생시킨다. 개인의 차원에서 다름은 인격의 고유성으로 드러나며, 주체의 참된 자리는 전체성이라는 배제와 환원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환대와 책임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주체는 여기서 기반적인 ‘자아’가 아니라 ‘타자’에 매개된 결과다. 다시 말해 레비나스의 철학은 전체성을 떠난 주체가 진정한 주체의 모습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때 타자는 기술적 조작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최대한의 경의를 가지고 대해야 할 윤리적 무한자에 가깝다. 게다가 레비나스는 이 타자를 부자도 권력자도 아니며 <가난한자, 과부, 고아>라고 분명히 못 박는다. <헐벗은 모습으로, 고통 받는 모습으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불의에 의해 짓밟힌 자의 모습으로 타인이 호소할 때 그를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책임지고, 그를 대신해 짐을 지고, 사랑하고 섬기는 가운데 주체의 주체됨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32-3).


이렇게 해서 타자는 고통에 겨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현현하며 그것을 통해 하나의 지평, 즉 윤리적 지평이 열린다. 타자의 고통스런 얼굴을 대하기 전에 주체는 단지 먹고, 마시고, 즐기는 향유(jouissance)의 존재, 또는 경제적 존재일 뿐이다. 자기의 거주와 향유 안에 고립된 주체는 어떤 윤리적 책임도 느낄 수 없다. 따라서 타자의 얼굴의 현현은 하나의 사건으로 주체를 <침범한다>. 이때 타자의 고통은 곧 주체의 고통이 된다. 윤리적 지평이 환히 드러남으로써 주체를 깨우는 최초의 정서는 레비나스에게 어떤 기쁨이라기보다 고통이다. 이 지점에서 칸트와의 대별점이 세워진다. <타인에 대한 윤리적 책임은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데는 레비나스도 동의한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받는 고통이냐 하는 점에서는 칸트와 구별된다. 고통은 법칙에 대한 존경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고통 받는 이웃의 호소와 부름에 응답했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레비나스는 보고 있다>(230). 칸트에게 있어서 도덕법칙은 실천이성의 이념 즉 자유에 기반하고 있다. 이것은 주체의 윤리적 자율성에 방점을 두는 것이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자율성이 윤리의 기반이라고 보지 않는다. 윤리적 기반은 시종일관 ‘고통 받는 이웃의 호소와 부름’에 대한 응답이며, 따라서 타율성이다. 호소와 부름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이 윤리는 자유의 윤리라기보다 그래서 ‘책임의 윤리’가 되는 것이다. <칸트 도덕철학의 핵심명제는 “자유는 책임에 선행한다” 또는 “책임은 자유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레비나스의 핵심 명제는 “책임은 자유에 선행한다” 또는 “자유는 책임에서 나온다”는 것이다>(247).


그러므로 자유는 책임의 윤리 하에 새롭게 해석된다. 레비나스가 자유보다 책임을 강조한 이유는 애초에 서양철학의 전체성에 대한 비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타인의 얼굴을 짓밟고 선 자유는 전쟁과 살육만을 가져온다. 이때 자유는 그 순전한 의미를 잃어버리고 자아의 권력욕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오직 타자의 고통스런 얼굴을 대하고 거기서부터 윤리적 자각을 얻을 때만 이러한 자유의 타락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유는 전혀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나의 ‘할 수 있음,’ 나의 ‘힘’에서 나오는 자유가 아니라 타인의 부름에 ‘응답’하고 그의 고통에 ‘반응’하며 타인에게 책임지는 가운데 나의 자유도 그 참된 의미를 얻게 된다>(246).  


그렇다면 전체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이 타자의 이념을 우리는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레비나스는 이것을 ‘무한’(infini)이라고 한다. 이 점에서 레비나스는 서양철학에 대한 비판적 수용자다. 이 무한자의 이념은 서양철학의 주요한 지점마다에서 전체성과 대별되어 은밀히 제시되어 왔기 때문이다. 플라톤과 데카르트 그리고 칸트, 싸르트르, 마르셀에서 유대교에 이르기까지 이 무한자의 이념, 즉 타자 철학과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 플라톤에 있어서 무한자는 바로 ‘선’이다. 그는 선을 ‘존재 너머’에 두었으며, 이성적으로 파악이 불가능한 무한한 대상으로 설정하였다. 또한 데카르트에 있어서도 Cogito를 객관적으로 떠받치는 것은 신, 또는 무한자였다. 칸트의 실천이성에 대한 강조와 이념들 또한 이러한 무한자에 대한 상당한 접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무한자의 이념은 윤리적 무한자이며 형이상학적 무한자다. 여기에 레비나스가 형이상학과 존재론을 구별짓는 근거가 있다. 다시 말해, 존재론은 타자에 의해 자신의 존재를 문제시하지 않지만, 윤리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은 이 관점에 대한 비판으로 탄생한다는 것이다. 형이상학과 존재론에 대한 이런 특유한 이해는 하이데거의 이해와 대조적이다. <하이데거는 ‘기술적 사유’ 혹은 ‘계산하는 사유’에 바탕을 둔 철학을 ‘형이상학’으로 이해하고 ‘근원적 사유’, 혹은 ‘자각적 사유’를 ‘존재 사유’로 이해한다. 반면 레비나스는 이해와 지배의 틀 안에서 사유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존재론’으로 이해하고 나의 지배와 소유의 틀 안으로 환원할 수 없는 타자와의 관계와 그것에 관한 사유를 ‘형이상학’으로 이해한다>(242). 그러므로 하이데거에 있어서는 존재론이 형이상학에 앞서지만 레비나스에게는 형이상학이 존재론에 앞선다.

타자의 얼굴의 현현, 윤리학으로서의 형이상학, 그리고 무한자의 이념은 레비나스 철학의 근간을 이룬다. 그렇다면 레비나스는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무엇을 하려고 한 것인가? 강영안은 레비나스 철학이 <주체성의 변호>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주체성’은 데카르트적 코기토나 하이데거의 현존재와는 물론 다르다. 주체는 레비나스에게 윤리적이며 타율적이다. 그러나 이 윤리적이고 타율적인 측면이 소극적으로 이해되는 것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윤리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존재 너머’에 있는 무한자를 가리키는 것이며, 타율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자율성의 전횡을 비판적으로 교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레비나스는 서양철학의 전체성에 대한 진정한 비판자이면서도 현대 프랑스 철학에서 주요하게 운위되는 주체부정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주체부정에 대한 레비나스의 응답은 반휴머니즘에 대한 반응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인격적 개인의 자유를 타자의 얼굴이라는 일상적 대상을 통해 정당화함으로써 그는 그 자유의 기반을 더 탄탄하게 다지기 때문이다. 자유는 자율성의 이념임과 동시에 타율성, 즉 타자라는 구체적 대상을 존재근거로 채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레비나스는 주체가 도대체 타자 없이는 존속할 수 없다는 것, 타자 없는 세상은 단지 ‘있음 il y a’의 암흑이며 이때 주체란 단지 고립되어 자연적 요소들에 가뭇없이 침범당하는 필멸의 존재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후기 철학에서 인간의 출산성이 중요하게 거론되는 것은 타자 철학의 사전 작업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타자의 무한성이 출산성을 통해 주체의 영원성이라는 철학 고유의 주제와 맥락을 맞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강영안이 레비나스의 철학을 <주체성의 변호>라고 한 것은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정당한 경의며 규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레비나스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서라는 것 외에 이 책이 소중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저자의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상당한 연륜과 애정이다. 저자 자신도 밝히고 있다시피 석사와 박사 논문을 칸트로 썼지만 70년대 초 유학시절부터 강영안은 레비나스에 매료되었었고 당시 생존해 있었던 그의 저서를 읽고 강연을 직접 들었다. 햇수로만 본다면 근 30년 이상 레비나스와 인연을 두고 있었던 셈이다. 남한 사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동시대의 한 서양철학자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고 꾸준히 연구해 왔다는 것은 사조의 유행에 과도하게 민감하여 갈팡질팡하고, 부실한 말잔치에만 익숙한 연구자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혜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오랫동안의 연구에 힘 입어 저자는 레비나스의 난해한 철학을 놀라울 정도의 평이한 언어로 풀어낸다. 어떤 저자의 문체가 쉽다고 해서 무조건 대단하다거나 어렵다고 해서 덮어 놓고 경시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독자에게 익숙치 않은 한 서양철학자의 원전을 충실히 해석해서 쉬운 말로 써 나가는 능력은 철학에 대한 오랜 연륜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 점이 또한 이 책이 레비나스 철학을 탐구하는 연구자나 일반 독자들에게 값진 하나의 선물인 이유다.

  - Noma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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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행복나침반 > 미래를 만드는 모든 오묘함이 나오는 문
노자와 들뢰즈의 노마돌로지
장시기 지음 / 당대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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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동물은 고정된 계급 혹은 확고부동한 위치로 존재하는 정착민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풍요로움과 사랑과 우정의 삶을 찾아서 끊임없이 떠나는 노마드(유목민)이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모든 존재는 노마드이다. (p,23)


장시기 교수의 저서 『노자와 들뢰즈의 노마돌로지』는 존재는 모두 노마드라고 명명하며 시작한다. 사랑과 우정으로 엮여진 ‘흐름’의 생명성을 지니고 있던 모든 노마드적인 존재가 정착민으로 한 곳에 고착된 계기를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지배자들이 피지배자들에게 정착을 강요했기 때문이며 ‘바로 이것이 성과 감옥의 역사가 동일한 근원을 지니고 있는 이유이다. 지배자는 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물리적(구체적) 폭력과 지식적(추상적) 설득을 동원하여 인간의 이동과 탈주를 가로막는다.’고 밝히고 있다.

과거의 역사 또한 대립과 투쟁의 문명사관이 아닌 삶의 방식의 이동과 생성이라는 문화사관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지만 서구적 근대의 국가철학에 의하여 확산된 근대의 민족과 국가 중심의 역사연구는 중국과 한국․일본의 역사를 대립과 투쟁의 역사로만 인식할 뿐, 상호 이동과 보완을 통한 상생의 역사를 등한시하거나 왜곡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가 노자와 들뢰즈의 노마돌로지를 사유하고자 하는 것은, 들뢰즈가 자신의 수많은 책들에서 서양의 노마돌로지를 계보화하듯이 노자의 『도덕경』을 바탕 삼아 동양의 노마돌로지를 계보화하려는 것이며, 이러한 동양과 서양의 노마돌로지가 오늘날의 동아시아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 필요한 탈근대적 노마돌로지로 합당하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p.40) 라고 책을 쓴 이유를 밝히고 있다.


내가 나의 앞날을 위해 무엇인가 결정의 기로에 서게 될 때 나는 무엇을 기준으로 결정을 할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난 결정의 순간에 오로지 나 혼자만을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일전에 가족사회학을 수학하던 때에 ‘나를 위한 결정이 아닌 가족을 위한 결정’을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사회의 가족주의를 설명할 수 있었음을 기억하면 난 내 자신이 아닌 가족의 일원으로, 우리 가족은 사랑과 애정으로만 뭉쳐진 가족이 아닌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사회 구성원으로 역할하고 있음을 부인할 순 없을 것 같다. 내가 경험으로 필요성을 깨닫게 됐던 ‘가족과의 거리’는 내가 서 있는 영토에서 탈주하여 탈영토화하고 또 다른 관계에서의 애정을 키우며 재영토화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는 것도. 어느 누군가, 혹은 어떤 장소, 혹은 어떤 물건에 편집적으로 집착하는 것은 관계를 고착시키고 무한한 가능성을 소멸시킨다. 가족주의, 국가주의, 결혼에 대한 환상성 모두 지배자들이 만들어낸 우리 모두의 편집증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노자가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한다/그러므로 추악함이 생긴다/사람들이 올바름을 올바르다고 한다/그러므로 올바르지 않음이 생긴다”고 이야기하고 있듯이, ‘아름다움’과 ‘추악함’ ‘올바름’과 ‘올바르지 않음’의 관계는 대립적인 동시에 상대적이다.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하는 것 혹은 ‘올바름을 올바르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아름다움과 하나의 올바름을 절대적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그것이 아닌 모든 것을 추악함이나 올바르지 않음으로 규정하는 대립적 관계를 낳는다. 이것은 고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국가장치의 ‘마법사-왕의 머리’를 따르거나 ‘법률가-사제의 머리’를 따르기 때문에, 항상 ‘아름다움’과 동시에 ‘올바름’이라는 ‘유일자’(the One)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관념적 형이상학의 원칙에 충실하다. 중세유럽은 신-인간, 그리고 서구적 근대는 정신-몸이라는 대립적 관계를 통하여 신과 정신을 ‘아름다움’과 ‘올바름’을 동시에 지닌 유일자로 간주한다.(p.90)


예를 들어 감자를 먹는 식량으로만 생각한다고 말해보자. 누군가는 감자를 갈아 팩도 하고, 감자를 도장처럼 깎아 가지고 놀기도 할 것이다. 그럼 먹는 데에만 익숙하고 그게 일종의 법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팩을 하거나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고 별종으로 취급한다. 그렇게 아웃사이더는 생겨나고 적은 생겨난다. 미국의 적-동맹의 명확한 이분법은 그렇기에 공존과 상생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배제의 정치학은 공고해지고 폭력은 정당화되며 법과 규칙이 만들어진다. 무한한 가능성과 상상력은 공동체주의와 폭력의 먹이가 된다.

내가 부모의 딸, 누군가의 아내, 자식의 엄마로만 존재하면 나는 변화의 가능성은 손톱만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모든 관계에 여유를 가지고 탈영토화할 수 있다면 나는 손가방 하나 달랑 들고 여행을 떠날 수도 있고, 사회의 속박에 길들여진 내 몸도 스스로의 자유를 찾아 재영토화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항상 미래를 향해 활짝 열려 있고 언제나 가능성의 ‘오묘한 문’앞에 설 수 있으리라.


이 책의 흥미로운 부분은 들뢰즈(들뢰즈가 동양철학에 깊은 관심이 있었다는 것은 많은 분들이 알 것이다)의 노마드학을 도덕경과 노자의 학문을 통해 설명했다는 것과 문학은 물론 영화까지 가로질러 노마돌로지에 대해 친근하게 설명했다는 점이다. 때문에 한창 유행처럼 번지던 노마드에 대해 철학에 문외한인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박찬욱의 「올드보이」로 노마드를 이해해보자.
이우진의 근친상간은 오대수에게 프로이드의 가족주의의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절대로 보지 말아야 할 ‘아버지의 거시기’이다. 그것은 가부장제 아버지의 법률이고, 오대수를 지배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이우진이 만든 법률이다. 그러나 가족주의나 국가주의가 없는 오대수는 폭력을 휘두르는 독재자 이우진에게 말한다. “누이를 죽인 것은 내가 아니라 너…”라고. (p. 406) 그러나 이우진과 달리 오대수에게는 두 가지 길이 열려 있다. 하나는 이우진이 각인시킨 과거의 기억이고 또 하나는 미도를 통한 과거의 망각이다. 그에겐 이제 새로운 삶과 새로운 미래가 필요하다. 새로운 삶과 새로운 미래를 구성하는 자에게 과거는 기억의 과거가 아니라 망각의 과거이다. 그에겐 이제 새로운 삶과 새로운 미래가 필요하다. 새로운 삶과 새로운 미래를 구성하는 자에게 과거는 기억의 과거가 아니라 망각의 과거이다. ‘사랑’(love, 愛)이나 ‘친구’(friend, 親)는 과거를 규정하는 명사가 아니라 미래를 구성하는 동사이다. 과거의 명사는 항상 미래의 동사가 만드는 생성에 의하여 재구성되고 재명명된다. (p.407)

이 책은 많은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지만 실상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태초의 자유로움’을 찾으라는 것이다.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라는 것. 내 몸에 얽힌 그 많은 올가미들을 벗고 나면 나 자신의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과 마주하게 될 것이란 이야기다. 황홀하고 꿈결같은 이야기. 너와 나의 차이를 이해하고 모든 관계가 사랑과 애정만으로 직조된 관계라면 물론 지금처럼 나날의 삶이 전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질서와 법을 벗어던지는 것도 쉽지는 않다. 애정으로 맺어진 동맹,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의 아름다움은 모두가 꿈꾸는 바이나 그것이 아름다울 수 있는 까닭 역시 현실적으로 힘들기 때문이리라. 모두가 일탈과 탈주를 꿈꾸지만 항상 제자리에 설 수밖에 없는 것이 삶임을 알기에 모두가 일탈에 매료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내 자신이 현재의 자리를 박차고 새로운 영토에 발을 들일 수 없음은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더라도 타인의 탈주와 재영토화를 색안경을 끼고 눈을 홉뜨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태초의 자유로움은 찾지 못하더라도, 꿈꾸는 영혼이 될 수는 있을테니. 타인에게 배제의 폭력, 무관심의 폭력을 휘두르는 일을 거둬들여야만 내 뒷덜미를 향하고 있는 칼날도 사라질 수 있으리라.

누가 당신을 아버지나 선생이라고 부르면, 그의 곁을 떠나라. 누가 당신의 부관이 되거나 장군이 되려고 하면, 그들의 영토로부터 탈영토화하라. 탈주하라. 끊임없이 탈주하라. 그래서 노마드들의 무리를 형성하는 친구들의 세계와 연인들의 세계를 구성하라. 노마드의 원칙이 살아 숨쉬고 있는 재영토화의 공간을 창출하라. 단 하나의 연인, 단 하나의 친구와 짝을 이루어 사막과 바다, 초원과 산맥을 가로지르는 탈주선을 타라. 그곳에 젖고 꿀이 흐르는 새로운 친구와 연인들의 세계를 창출하라. 그리고 친구나 연인의 손을 잡고 고원의 저 너머, 전쟁이나 무력의 상황 속에서 “살인이 많이 이루어지니” “측은하고 담담한” “비통한 마음으로 통곡을 하라.”(p.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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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lyh1999 > Everything but Nothing
당신에겐 철학이 있습니까?
박이문 지음 / 미다스북스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지은이인 박이문 교수는 개인적으로 이번 책으로 처음 소개받는 인물이다. 한국 철학계의 거목이라고는 하는데, 필자는 그의 이전 저서나 학문적 체계에 대해선 자세히 아는 바가 없고, 따라서 그런 사전 지식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다만 이번 책의 보도자료와 인터넷 검색을 참조해서 알아본 그의 이력에서 눈에 띄는 점이 있다면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에세이가 수록되어 "한국적 산문의 전범"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길 나의 삶'이란 작품이 국어교과서 (하)권에 수록되었다 하니 6차 교육과정을 거친 필자도 분명 언젠가는 접해본 적이 있을텐데 사실 기억은 안 난다.

기억에 없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다. 고등학교에서 배운 것은 대학입시가 끝나는 동시에 새하얗게 잊어먹는 한국인들 특유의 버릇 때문만은 아니다. 국어교과서는 문학이 알고 보면 아주 지루하고 정나미 떨어지는 성질의 것이라는 선입견을 초등학생 시절부터 마음 속에 무섭게 각인해 들어가는 대표적인 기제가 아니던가. 그러나 (마무리 부분에서 이야기하겠지만) 그 날카로운 첫키스의 낙인은 평생을 간다.

국어교과서 이야기를 꺼낸 건 이 책의 문체와 내용이 꼭 학생 시절 지루하기 짝이 없는 국어교과서를 읽어내려가던 기억을 그대로 되살려 내기 때문이다. 이 책의 기본 얼개는 철학 입문서와 지은이 개인의 단상을 모은 에세이 모음집이라는 두 가지 형식을 결합한 외양을 띠고 있다. 표지에 적혀 있는 주제들만 보아도 그 무게가 상당한 편이다. 실존적 선택, 실존적 방황, 죽음에 대한 명상, 전쟁윤리, 불공평성의 공평성, 악법도 법인가, 인권이냐 주권이냐...... 이런 주제들에 대해 지은이가 사유한 바를 에세이 형식으로 가볍게 풀어냈다는 건데, 얼핏 마치 범인(凡人)들은 그 단어만으로도 거리감을 느낄 법한 주제들에 대해서 한 수 알려주시겠다는 인상이다.

그러나 박이문의 접근법은 우리의 기대를 정확히 배반한다. 그의 사유의 폭은 너무나도 깊고 넓은 나머지, 한 가지 주제에 해당되는 세부적인 사항들을 백이면 백 가지 모두 따지고 들려고 한다. 그 예로, 동물권과 동물해방의 주제를 다룬 장의 내용 전개를 한번 살펴보자.

1) 동물을 해치고 잡아먹고 우리에 가둬놓고 심지어 실험까지 일삼는 인간의 탐욕성은 잔인하다.
2) 그에 반(反)하는 입장으로 채식주의를 비롯한 동물해방 구호가 범람하게 되었다.
3)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동물해방은 불가능하다. 동물권의 인권의 충돌 같은 부차적으로 복잡한 문제가 존재한다.
4)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동물 학대를 정당화할 수도 없다.
5) 동물해방론 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사유의 가시밭을 지나고 있다.
여기서 딱히 내려지는 결론은 없다. 지은이는 대부분의 주제에서 이런 태도를 견지한다. 한 주제를 놓고 인류 역사상 등장한 견해들을 죄다 꺼내놓고 이리저리 여러 각도에서 재본 다음, 갑자기 "아이고 이거 너무 복잡해서 여기선 뭐라 딱히 결정 못짓겠구나" 식으로 중간에 황급히 사유를 정지해버리는 것이다. 읽는 사람으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한국 철학계 사상계의 거목이라는 분이 대체 왜 이러세요?" 도무지 자기 주장이 없다. 게다가 "동물해방론 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사유의 가시밭을 지나고 있다"는 마무리는 누구나 아는 상식 수준의 얘기다. 지은이의 고도의 계산된 수법으로 봐야할지, 명백한 논지상의 실패로 봐야 할지 난감해지는 부분이다.

이 상황에서 이 글이 택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전개방식은, 이 책의 논지 전개방식을 빌려, 이 책의 논지 전개방식을 평가해 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먼저 이 태도를 지지하는 입장에 서보자. 이 책에서 나타나는 지은이의 일관된 입장은 인간사(事)의 모든 문제는 개개인의 어려운 선택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갈림길이 있되, 각각의 갈림길은 서로 다른 장단점과 이익/손해를 가져다 준다. 어떤 갈림길을 택해도 단점이 있고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박이문의 갑작스런 '사유의 중단'은 충분히 이해 가능한 우유부단함이다. 일단 그는 돌다리 두드리듯 신중하게 모든 가능성을 재어보는 것이다. 혹시라도 잘못된 길을 선택할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이건 그의 고유한 삶의 방식으로 보인다. 뒤늦게 찾아본 그의 수필에도 이를 암시하는 구절이 등장한다.

...... 나는 아직도 잘 배우지 못했고, 아직도 잘 알지 못한다. 배운 것이 있다면 잘 알 수 없다는 사실 뿐이며, 아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단편적인, 파편과 같은 것뿐이다. 전체적으로 모든 것이 아직도 나에게는 아물아물하다. 그러기에 나는 사물의 현상을 더욱 관찰하고 남들로부터 더욱 배우고, 더욱 생각하고, 더욱 알고 싶은 의욕에 벅차 있을 뿐이다.

내가 궁극적으로 찾는 것은 "이게 다 뭔가", "어떻게 살아야 참다운가?"에 대한 대답이다. 이처럼 근본적이고 총괄적 물음에 대한 대답을 내가 찾아낼 수 없음은 처음부터 잘 알고 있다. 아마도 확실한 대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고, 또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내가 지금까지 배우고 생각한 끝에 알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극히 단편적이며 극히 피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이런 것들이나마 더 배우고, 생각해보고, 더 알고 싶다. 나는 눈을 감는 날까지 더 배우고 더 알고자 노력할 것이다. 내가 새로운 것을 알았다고 믿게 되거나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더 투명하게 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철학적 저서를 통해서, 혹은 문학 작품을 통해서, 혹은 잡문의 형식으로라도 표현하고 남들에게 전달하고 싶다. ......

- 수필 '나의 길, 나의 삶' 중에서
그러나 반대 입장에서 볼 때, 그는 결국 아무 것도 택하지 못한다. 제대로 된 선택을 하기 위해 지(智)와 지(知)의 양식을 끝없이 탐하지만, 그럴수록 나 자신이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한계, 그래서 이상적인 길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만이 그를 압박한다. 그래서 결국, 그는 무언가 '만족'스런, 혹은 '완벽'하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는, 지금은 그저 자신 앞에 펼쳐진 선택지들이 자신을 그저 지나쳐 버리도록 내버려 둔다. 그러는 동안 다시 배우고 알고자 하는 노력 안으로 침잠해 버린다. 이건 분명 악순환이다. 앎과 지혜가 개개인의 독특한 신념과 행동으로 우러나지 못하고 뇌의 뉴런 속에 갇혀 끝없이 암세포처럼 덩어리를 불려가며 유영하는 것이다.

이는 동시에 지식인만이 부릴 수 있는 특유의 겸손을 가장한 사치이기도 하다. 세상은 지금 막 애덤 스미스가 옳은가 레닌과 마르크스가 옳은가, 독재 정권을 해방하기 위해 다른 나라가 간섭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이냐 아니냐 같은 뜨거운 감자 같은 사안들을 놓고 서로를 파괴하는 다툼을 거듭하고 있다. 그런데 이 앞에서 이 책이 말하는 철학이란 "이 쪽 말도 맞고 그 쪽 말도 맞긴 한데, 이쪽 말도 석연치 않고 그 쪽 말도 마찬가지니 어디 다들 잘 생각해 보세요" 식으로 어설프게 공자의 에피소드를 흉내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동양철학에 대해서는 깊이 아는 바가 없지만, 공자가 말하는 중용이 이런 무책임함을 의미한다고는 절대 믿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현실의 갈등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철학을 말 그대로 '머릿속에 박제해버리는' 태도이다.

물론 독자들에게 지은이의 입장을 반드시 보여줘야 할 필요는 없다. "당신에게 철학이 있습니까?"라는 제목처럼, 독자들에게도 스스로 사유의 기회는 주어질 필요는 있다. 그러나 이 책의 글들은 결과적으로 공감과 이해를 이끌어내기 보다는 수많은 견해와 팩트만이 난무하는 카오스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이는 지은이가 이 짧은 글 안에서 지식과 지혜는 물론 이 세계를 통째로 망라하려는 듯한 만용을 부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구절이 있다.

혼자됨은 아름답고 고귀하고 창조적일 수 있다. 눈 쌓인 넓은 들 저편 유난히 붉게 지는 저녁 해를 배경으로 높은 하늘 위를 홀로 유유히 날아 사라지는 한 마리 두루미의 모습은 아름다우며, 혼자 우뚝 서 있는 히말라야는 무엇보다도 장엄하며, 험준한 산의 계곡 큰바위 위에 홀로 앉아 자연을 음미하는 동양적 시인을 그린 동양의 산수화에서 우리는 한없이 숭고한 정취를 경험한다. 깊은 산속 암자에서 혼자 좌선에 몰두해 있는 불교적 수도승의 모습에는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정신적 충족감이 담겨져 있고, 밤늦게까지 책상 앞에 혼자 앉아 시상에 빠져있는 시인이나 사색에 몰두하는 철학자의 모습에서 군중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 개인의 심오한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불의와 타협하기보다는 정의의 편에 서서 혼자 갇혀 있는 혁명가, 종교적 순교자, 철학자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고귀하고 거룩하다. - pp.43~44

이 책에런 이런 식으로 수만 수천 장의 순간적인 포토샷을 한 컷에 압축해 모아놓은 듯한 묘사가 자주 쓰인다. 물론 이 표현만 보자면 짧은 분량 안에서 다양한 예시로 논지를 강화해 보려는 의도였겠지만, 그 특수하고 복잡한 온갖 담론들은 압축 속에서 결국 세상을 멀찍이서 관조하는 일반론으로 환원되어 버린다. 쉽게 말해 "뻔한 얘기"로 가라앉아 버린다는 것이다. 저 수많은 풍경들을 한 문단에 모아 묘사한 것은 시인과 혁명가, 순교자, 철학자를 비롯한 수많은 다양한 입장에 서 있는 독자들에게 폭넓은 공감의 순간을 제공할 수도 있지만 그 공감의 순간은 채 감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극히 찰나적이며 애매모호하다. 결국 이 책의 스타일은 모두를 배려하고자 하지만 결국 아무도 배려하지 못하고, 모든 걸 말하려 하지만 결국 아무 것도 말하지 못한다.

이것이 일개 책의 문제라면 필자가 이렇게 흥분한 어조를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서술한 필자의 견해는 박이문 교수 개인의 글쓰기 스타일과 가치관에 대한 개인적인 호오 차원의 문제일 수도 있으며, 어떤 면에선 이는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지은이가 에필로그에서 이야기했던 대로 무거운 '철학'과 가벼운 '에세이'를 충돌시키는 과정에서 논지가 지나치게 단순화된, 이미 예상됐던 어쩔 수 없는 문제점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우려하는 점은 이것이 비단 박이문 교수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특히 이는 이 책의 주된 추천 대상이 되는 청소년들이나 대학교 새내기들에게 있어 더 중요하다. 이에 대해선 이전에 한번 인용했던 글을 다시 읽어보도록 하자.

대학에서 면접을 보면 학생들이 그 자리에서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려 정말 안타까워요.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라며 그 학생의 생각을 물어본 건데, 이 아이는 '모범답안이 뭘까? 출제된 의도가 뭘까?'를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독서를 해도 독서가 안 되는 거예요. 지난번에 박노자 씨하고 홍세화 선생을 만났을 때도 그 얘기를 했는데, 그분들이라면 대한민국에서 글 꽤나 쓴다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모여 우연히 논술 얘기를 했는데 모두 '그거 어떻게 쓰지? 문제를 이해조차 못하겠다'고 하더라구요.(웃음)

그런데 어느 해인가 뉴스를 보는데, 우리는 그 문제를 놓고 어떻게 써야 할까 한참 고민하는데, 시험을 본 학생들이 '예상했던 문제가 나와서 너무 쉬웠다'고 하며 나오는 거예요.(웃음) 저는 논술 채점은 안 해봤습니다만, 채점을 하면서 교수들이 치를 떠는 게 뭐냐 하면, 특히 철학 선생님들 하는 말이 논술이 오히려 애들을 죽인다는 거예요. 논술을 만든 이유가 주체적으로 사고하라는 건데, 어떤 문제가 나와도 답이 똑같다는 거예요. 그래서 무슨 책을 읽었는지도 중요하겠지만, 여러분이 정말 편하게, 그리고 진짜 주인이 되어, 그게 사회에서 얘기하는 모범답안과 어긋나도 좋으니, 스스로 책읽기를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주체적으로 말이죠.

(...) 저는 여러분의 마음이 결코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심리학자한테서 들은 건데 16세 때부터 나이가 들면서 뇌가 발달하는 사람은 5퍼센트도 안 된대요. '여러분 선생님이 너 커서 뭐가 될래?' 그러시면 '다 컸는데요'라고 대답하세요. (웃음) 이미 어른이 됐다고 답하고 자신감을 가지세요. 그러나 그 부분에서 여러분이 잃지 않아야 할 것은 바로 초심입니다. 여러분은 그 초심을 뛰어 나가는 문턱에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이 처음 가졌던 그 마음이 꼭 필요합니다. 그때 옳았던 게 진짜 옳은 거구요. 여러분이 경험이 많지 않기 때문에 어리석을 수도 미숙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의 기본적인 판단 방향에 대해서는 제가 신뢰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옳다고 생각하는 것, 그게 진짜 옳은 겁니다.
- <주제와 변주> pp.250~251, 청소년 인문과학서점 인디고 서원 www.indigoground.net 독서토론회 중에서 역사학자 한홍구의 발언
자신의 신념을 제대로 표상할 기회와 능력을 박탈당하고, 지식과 지혜의 잣대에 기대어 무엇이 "객관적으로" 옳은 답인가에만 골몰하고, 그러다 결국 어떤 의미있는 답도 내놓지 못한 채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 것 같아서 도무지 입장을 정리할 수 없는" 나약한 일반론으로 빠져버리는 게 요즘 아이들의 실상이 아닐까? 그리고 이는 더 나아가 아이들의 자아를 약체화시키고, 한겨레21 기사에서 한 고등학교 교사가 지적했던 대로 민족과 국가 같은, "자신[자아]를 압도해버리는" 것에 열광하게 만드는 파시즘의 위험성까지 품고 있다.

모든 대립적인 가치들을 달관하며 적당히 인정하고 넘겨버릴 수 있는 여유는 이미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연륜을 쌓아온 노학자 한 사람으로 족하다. 필자 개인의 지난날을 돌아봐도 후회스러운 일이지만, 그런 멘털리티가 국어교과서와 청소년/대학생 추천도서의 이름으로 아이들의 심성을 깊숙히 파고들어가 그 아이들이 스타일과 겉멋, 어설픈 쿨함부터 배워버리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서두에서 지적했지만, 아무리 지루하고 따분한 국어교과서라도 결국 한국인들의 가장 대중적인 문학적 정서를 지배한 작가들은 교과서에 제일 많이 단골로 등장하는 윤동주와 김소월이지 않던가. 디테일한 문구와 내용은 얼마 안가 잊어버릴지라도, 그 안에 담긴 멘털리티의 권위가 가진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됐을 때 터진다. 이런 상태로 대학에 올라온 아이들은 등록금이 오르는 것이 옳은지 나쁜지 재단할 수 없고, 운동권과 반권 총학생회 중 어느 한 쪽을 쉽사리 지지할 수도 없고, 취업 전선과 고시 열풍에 휩쓸리는 당사자가 되면서도 이에 대한 어떤 문제제기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이성과 논리는 패션으로 전락하고, 결국엔 "어르신" 말씀하신 대로 잘 따르는 순한 "어린이"의 상태에서 진정한 사유는 그대로 정지해 버리는 것이다. (혹자가 이 책에 나타난 그의 사유를 두고 "(순수한) 칠순 어린이"와 같다는 평을 했던 사실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지금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자아와 신념을 튼튼히 하고 이를 자신의 행동으로 결단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거지, 벌써부터 애늙은이 흉내를 내면서 그 모든 가능성들을 차단해 버리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 세계가 얼마나 간단히 해결될 수 없는 복잡한 문제들로 직조된 요지경 세상인지를 철학적 언어로 간단히 엿보고 싶다면, 그리고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깔끔하고 유려한 그의 문체를 맛보고 싶다면 이 책은 충분한 가치를 발휘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다. 이 책을 굳이 읽지 않아도 이미 뒷표지에 나오는 "당신에겐 철학이 있"다는 립서비스 수준의 격려 이상의 이야기가 없는데 무슨 소용인가. "당신에게 철학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려면 그 전에 하워드 진의 유명한 책 제목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는 전제가 결합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전제에 맞추어 질문도 바뀌어야 한다. "당신의 기차는 달리고 있습니까?"


by lyh1999
2006/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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