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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겐 철학이 있습니까?
박이문 지음 / 미다스북스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의 지은이인 박이문 교수는 개인적으로 이번 책으로 처음 소개받는 인물이다. 한국 철학계의 거목이라고는 하는데, 필자는 그의 이전 저서나 학문적 체계에 대해선 자세히 아는 바가 없고, 따라서 그런 사전 지식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다만 이번 책의 보도자료와 인터넷 검색을 참조해서 알아본 그의 이력에서 눈에 띄는 점이 있다면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에세이가 수록되어 "한국적 산문의 전범"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길 나의 삶'이란 작품이 국어교과서 (하)권에 수록되었다 하니 6차 교육과정을 거친 필자도 분명 언젠가는 접해본 적이 있을텐데 사실 기억은 안 난다.
기억에 없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다. 고등학교에서 배운 것은 대학입시가 끝나는 동시에 새하얗게 잊어먹는 한국인들 특유의 버릇 때문만은 아니다. 국어교과서는 문학이 알고 보면 아주 지루하고 정나미 떨어지는 성질의 것이라는 선입견을 초등학생 시절부터 마음 속에 무섭게 각인해 들어가는 대표적인 기제가 아니던가. 그러나 (마무리 부분에서 이야기하겠지만) 그 날카로운 첫키스의 낙인은 평생을 간다.
국어교과서 이야기를 꺼낸 건 이 책의 문체와 내용이 꼭 학생 시절 지루하기 짝이 없는 국어교과서를 읽어내려가던 기억을 그대로 되살려 내기 때문이다. 이 책의 기본 얼개는 철학 입문서와 지은이 개인의 단상을 모은 에세이 모음집이라는 두 가지 형식을 결합한 외양을 띠고 있다. 표지에 적혀 있는 주제들만 보아도 그 무게가 상당한 편이다. 실존적 선택, 실존적 방황, 죽음에 대한 명상, 전쟁윤리, 불공평성의 공평성, 악법도 법인가, 인권이냐 주권이냐...... 이런 주제들에 대해 지은이가 사유한 바를 에세이 형식으로 가볍게 풀어냈다는 건데, 얼핏 마치 범인(凡人)들은 그 단어만으로도 거리감을 느낄 법한 주제들에 대해서 한 수 알려주시겠다는 인상이다.
그러나 박이문의 접근법은 우리의 기대를 정확히 배반한다. 그의 사유의 폭은 너무나도 깊고 넓은 나머지, 한 가지 주제에 해당되는 세부적인 사항들을 백이면 백 가지 모두 따지고 들려고 한다. 그 예로, 동물권과 동물해방의 주제를 다룬 장의 내용 전개를 한번 살펴보자.
1) 동물을 해치고 잡아먹고 우리에 가둬놓고 심지어 실험까지 일삼는 인간의 탐욕성은 잔인하다.
2) 그에 반(反)하는 입장으로 채식주의를 비롯한 동물해방 구호가 범람하게 되었다.
3)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동물해방은 불가능하다. 동물권의 인권의 충돌 같은 부차적으로 복잡한 문제가 존재한다.
4)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동물 학대를 정당화할 수도 없다.
5) 동물해방론 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사유의 가시밭을 지나고 있다.
여기서 딱히 내려지는 결론은 없다. 지은이는 대부분의 주제에서 이런 태도를 견지한다. 한 주제를 놓고 인류 역사상 등장한 견해들을 죄다 꺼내놓고 이리저리 여러 각도에서 재본 다음, 갑자기 "아이고 이거 너무 복잡해서 여기선 뭐라 딱히 결정 못짓겠구나" 식으로 중간에 황급히 사유를 정지해버리는 것이다. 읽는 사람으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한국 철학계 사상계의 거목이라는 분이 대체 왜 이러세요?" 도무지 자기 주장이 없다. 게다가 "동물해방론 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사유의 가시밭을 지나고 있다"는 마무리는 누구나 아는 상식 수준의 얘기다. 지은이의 고도의 계산된 수법으로 봐야할지, 명백한 논지상의 실패로 봐야 할지 난감해지는 부분이다.
이 상황에서 이 글이 택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전개방식은, 이 책의 논지 전개방식을 빌려, 이 책의 논지 전개방식을 평가해 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먼저 이 태도를 지지하는 입장에 서보자. 이 책에서 나타나는 지은이의 일관된 입장은 인간사(事)의 모든 문제는 개개인의 어려운 선택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갈림길이 있되, 각각의 갈림길은 서로 다른 장단점과 이익/손해를 가져다 준다. 어떤 갈림길을 택해도 단점이 있고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박이문의 갑작스런 '사유의 중단'은 충분히 이해 가능한 우유부단함이다. 일단 그는 돌다리 두드리듯 신중하게 모든 가능성을 재어보는 것이다. 혹시라도 잘못된 길을 선택할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이건 그의 고유한 삶의 방식으로 보인다. 뒤늦게 찾아본 그의 수필에도 이를 암시하는 구절이 등장한다.
...... 나는 아직도 잘 배우지 못했고, 아직도 잘 알지 못한다. 배운 것이 있다면 잘 알 수 없다는 사실 뿐이며, 아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단편적인, 파편과 같은 것뿐이다. 전체적으로 모든 것이 아직도 나에게는 아물아물하다. 그러기에 나는 사물의 현상을 더욱 관찰하고 남들로부터 더욱 배우고, 더욱 생각하고, 더욱 알고 싶은 의욕에 벅차 있을 뿐이다.
내가 궁극적으로 찾는 것은 "이게 다 뭔가", "어떻게 살아야 참다운가?"에 대한 대답이다. 이처럼 근본적이고 총괄적 물음에 대한 대답을 내가 찾아낼 수 없음은 처음부터 잘 알고 있다. 아마도 확실한 대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고, 또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내가 지금까지 배우고 생각한 끝에 알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극히 단편적이며 극히 피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이런 것들이나마 더 배우고, 생각해보고, 더 알고 싶다. 나는 눈을 감는 날까지 더 배우고 더 알고자 노력할 것이다. 내가 새로운 것을 알았다고 믿게 되거나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더 투명하게 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철학적 저서를 통해서, 혹은 문학 작품을 통해서, 혹은 잡문의 형식으로라도 표현하고 남들에게 전달하고 싶다. ......
- 수필 '나의 길, 나의 삶' 중에서
그러나 반대 입장에서 볼 때, 그는 결국 아무 것도 택하지 못한다. 제대로 된 선택을 하기 위해 지(智)와 지(知)의 양식을 끝없이 탐하지만, 그럴수록 나 자신이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한계, 그래서 이상적인 길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만이 그를 압박한다. 그래서 결국, 그는 무언가 '만족'스런, 혹은 '완벽'하다는 느낌이 들 때까지는, 지금은 그저 자신 앞에 펼쳐진 선택지들이 자신을 그저 지나쳐 버리도록 내버려 둔다. 그러는 동안 다시 배우고 알고자 하는 노력 안으로 침잠해 버린다. 이건 분명 악순환이다. 앎과 지혜가 개개인의 독특한 신념과 행동으로 우러나지 못하고 뇌의 뉴런 속에 갇혀 끝없이 암세포처럼 덩어리를 불려가며 유영하는 것이다.
이는 동시에 지식인만이 부릴 수 있는 특유의 겸손을 가장한 사치이기도 하다. 세상은 지금 막 애덤 스미스가 옳은가 레닌과 마르크스가 옳은가, 독재 정권을 해방하기 위해 다른 나라가 간섭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이냐 아니냐 같은 뜨거운 감자 같은 사안들을 놓고 서로를 파괴하는 다툼을 거듭하고 있다. 그런데 이 앞에서 이 책이 말하는 철학이란 "이 쪽 말도 맞고 그 쪽 말도 맞긴 한데, 이쪽 말도 석연치 않고 그 쪽 말도 마찬가지니 어디 다들 잘 생각해 보세요" 식으로 어설프게 공자의 에피소드를 흉내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동양철학에 대해서는 깊이 아는 바가 없지만, 공자가 말하는 중용이 이런 무책임함을 의미한다고는 절대 믿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현실의 갈등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철학을 말 그대로 '머릿속에 박제해버리는' 태도이다.
물론 독자들에게 지은이의 입장을 반드시 보여줘야 할 필요는 없다. "당신에게 철학이 있습니까?"라는 제목처럼, 독자들에게도 스스로 사유의 기회는 주어질 필요는 있다. 그러나 이 책의 글들은 결과적으로 공감과 이해를 이끌어내기 보다는 수많은 견해와 팩트만이 난무하는 카오스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이는 지은이가 이 짧은 글 안에서 지식과 지혜는 물론 이 세계를 통째로 망라하려는 듯한 만용을 부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구절이 있다.
혼자됨은 아름답고 고귀하고 창조적일 수 있다. 눈 쌓인 넓은 들 저편 유난히 붉게 지는 저녁 해를 배경으로 높은 하늘 위를 홀로 유유히 날아 사라지는 한 마리 두루미의 모습은 아름다우며, 혼자 우뚝 서 있는 히말라야는 무엇보다도 장엄하며, 험준한 산의 계곡 큰바위 위에 홀로 앉아 자연을 음미하는 동양적 시인을 그린 동양의 산수화에서 우리는 한없이 숭고한 정취를 경험한다. 깊은 산속 암자에서 혼자 좌선에 몰두해 있는 불교적 수도승의 모습에는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정신적 충족감이 담겨져 있고, 밤늦게까지 책상 앞에 혼자 앉아 시상에 빠져있는 시인이나 사색에 몰두하는 철학자의 모습에서 군중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 개인의 심오한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불의와 타협하기보다는 정의의 편에 서서 혼자 갇혀 있는 혁명가, 종교적 순교자, 철학자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고귀하고 거룩하다. - pp.43~44
이 책에런 이런 식으로 수만 수천 장의 순간적인 포토샷을 한 컷에 압축해 모아놓은 듯한 묘사가 자주 쓰인다. 물론 이 표현만 보자면 짧은 분량 안에서 다양한 예시로 논지를 강화해 보려는 의도였겠지만, 그 특수하고 복잡한 온갖 담론들은 압축 속에서 결국 세상을 멀찍이서 관조하는 일반론으로 환원되어 버린다. 쉽게 말해 "뻔한 얘기"로 가라앉아 버린다는 것이다. 저 수많은 풍경들을 한 문단에 모아 묘사한 것은 시인과 혁명가, 순교자, 철학자를 비롯한 수많은 다양한 입장에 서 있는 독자들에게 폭넓은 공감의 순간을 제공할 수도 있지만 그 공감의 순간은 채 감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극히 찰나적이며 애매모호하다. 결국 이 책의 스타일은 모두를 배려하고자 하지만 결국 아무도 배려하지 못하고, 모든 걸 말하려 하지만 결국 아무 것도 말하지 못한다.
이것이 일개 책의 문제라면 필자가 이렇게 흥분한 어조를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서술한 필자의 견해는 박이문 교수 개인의 글쓰기 스타일과 가치관에 대한 개인적인 호오 차원의 문제일 수도 있으며, 어떤 면에선 이는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지은이가 에필로그에서 이야기했던 대로 무거운 '철학'과 가벼운 '에세이'를 충돌시키는 과정에서 논지가 지나치게 단순화된, 이미 예상됐던 어쩔 수 없는 문제점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우려하는 점은 이것이 비단 박이문 교수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특히 이는 이 책의 주된 추천 대상이 되는 청소년들이나 대학교 새내기들에게 있어 더 중요하다. 이에 대해선 이전에 한번 인용했던 글을 다시 읽어보도록 하자.
대학에서 면접을 보면 학생들이 그 자리에서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려 정말 안타까워요.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라며 그 학생의 생각을 물어본 건데, 이 아이는 '모범답안이 뭘까? 출제된 의도가 뭘까?'를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독서를 해도 독서가 안 되는 거예요. 지난번에 박노자 씨하고 홍세화 선생을 만났을 때도 그 얘기를 했는데, 그분들이라면 대한민국에서 글 꽤나 쓴다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모여 우연히 논술 얘기를 했는데 모두 '그거 어떻게 쓰지? 문제를 이해조차 못하겠다'고 하더라구요.(웃음)
그런데 어느 해인가 뉴스를 보는데, 우리는 그 문제를 놓고 어떻게 써야 할까 한참 고민하는데, 시험을 본 학생들이 '예상했던 문제가 나와서 너무 쉬웠다'고 하며 나오는 거예요.(웃음) 저는 논술 채점은 안 해봤습니다만, 채점을 하면서 교수들이 치를 떠는 게 뭐냐 하면, 특히 철학 선생님들 하는 말이 논술이 오히려 애들을 죽인다는 거예요. 논술을 만든 이유가 주체적으로 사고하라는 건데, 어떤 문제가 나와도 답이 똑같다는 거예요. 그래서 무슨 책을 읽었는지도 중요하겠지만, 여러분이 정말 편하게, 그리고 진짜 주인이 되어, 그게 사회에서 얘기하는 모범답안과 어긋나도 좋으니, 스스로 책읽기를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주체적으로 말이죠.
(...) 저는 여러분의 마음이 결코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심리학자한테서 들은 건데 16세 때부터 나이가 들면서 뇌가 발달하는 사람은 5퍼센트도 안 된대요. '여러분 선생님이 너 커서 뭐가 될래?' 그러시면 '다 컸는데요'라고 대답하세요. (웃음) 이미 어른이 됐다고 답하고 자신감을 가지세요. 그러나 그 부분에서 여러분이 잃지 않아야 할 것은 바로 초심입니다. 여러분은 그 초심을 뛰어 나가는 문턱에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이 처음 가졌던 그 마음이 꼭 필요합니다. 그때 옳았던 게 진짜 옳은 거구요. 여러분이 경험이 많지 않기 때문에 어리석을 수도 미숙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의 기본적인 판단 방향에 대해서는 제가 신뢰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옳다고 생각하는 것, 그게 진짜 옳은 겁니다.
- <주제와 변주> pp.250~251, 청소년 인문과학서점 인디고 서원 www.indigoground.net 독서토론회 중에서 역사학자 한홍구의 발언
자신의 신념을 제대로 표상할 기회와 능력을 박탈당하고, 지식과 지혜의 잣대에 기대어 무엇이 "객관적으로" 옳은 답인가에만 골몰하고, 그러다 결국 어떤 의미있는 답도 내놓지 못한 채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 것 같아서 도무지 입장을 정리할 수 없는" 나약한 일반론으로 빠져버리는 게 요즘 아이들의 실상이 아닐까? 그리고 이는 더 나아가 아이들의 자아를 약체화시키고, 한겨레21 기사에서 한 고등학교 교사가 지적했던 대로 민족과 국가 같은, "자신[자아]를 압도해버리는" 것에 열광하게 만드는 파시즘의 위험성까지 품고 있다.
모든 대립적인 가치들을 달관하며 적당히 인정하고 넘겨버릴 수 있는 여유는 이미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연륜을 쌓아온 노학자 한 사람으로 족하다. 필자 개인의 지난날을 돌아봐도 후회스러운 일이지만, 그런 멘털리티가 국어교과서와 청소년/대학생 추천도서의 이름으로 아이들의 심성을 깊숙히 파고들어가 그 아이들이 스타일과 겉멋, 어설픈 쿨함부터 배워버리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서두에서 지적했지만, 아무리 지루하고 따분한 국어교과서라도 결국 한국인들의 가장 대중적인 문학적 정서를 지배한 작가들은 교과서에 제일 많이 단골로 등장하는 윤동주와 김소월이지 않던가. 디테일한 문구와 내용은 얼마 안가 잊어버릴지라도, 그 안에 담긴 멘털리티의 권위가 가진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됐을 때 터진다. 이런 상태로 대학에 올라온 아이들은 등록금이 오르는 것이 옳은지 나쁜지 재단할 수 없고, 운동권과 반권 총학생회 중 어느 한 쪽을 쉽사리 지지할 수도 없고, 취업 전선과 고시 열풍에 휩쓸리는 당사자가 되면서도 이에 대한 어떤 문제제기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이성과 논리는 패션으로 전락하고, 결국엔 "어르신" 말씀하신 대로 잘 따르는 순한 "어린이"의 상태에서 진정한 사유는 그대로 정지해 버리는 것이다. (혹자가 이 책에 나타난 그의 사유를 두고 "(순수한) 칠순 어린이"와 같다는 평을 했던 사실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지금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자아와 신념을 튼튼히 하고 이를 자신의 행동으로 결단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거지, 벌써부터 애늙은이 흉내를 내면서 그 모든 가능성들을 차단해 버리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 세계가 얼마나 간단히 해결될 수 없는 복잡한 문제들로 직조된 요지경 세상인지를 철학적 언어로 간단히 엿보고 싶다면, 그리고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깔끔하고 유려한 그의 문체를 맛보고 싶다면 이 책은 충분한 가치를 발휘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다. 이 책을 굳이 읽지 않아도 이미 뒷표지에 나오는 "당신에겐 철학이 있"다는 립서비스 수준의 격려 이상의 이야기가 없는데 무슨 소용인가. "당신에게 철학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려면 그 전에 하워드 진의 유명한 책 제목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는 전제가 결합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전제에 맞추어 질문도 바뀌어야 한다. "당신의 기차는 달리고 있습니까?"
by lyh1999
2006/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