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심해(深海, 心海)의 물길을 바로 잡는 일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서중석 지음, 역사문제연구소 기획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고등학교 다닐 무렵 나의 대학 진학 목표는 대학에 진학해 한국근현대사를 전공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 목표를 이루진 못했으나 지금도 역사학이 주는 매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걸 보면, 애초에 당시 공부의 끈을 놓아도 완전히 놓지는 말았어야 할 일이다. 나름대로 사연이 있어 그 때의 꿈과는 다소 다른 삶을 살게 되었지만 요사이도 역사와 관련된 책 읽기는 즐겁고 때로 고통이다. 고통인 사연인즉 우리 역사를 살피다보면 나도 모르게 슬퍼지기 때문이리라. 예전에 한국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우리 영화에 가장 적합한 장르는 "느와르"라고 자못 근거를 대어가며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 근거는 우리 근현대사가 느와르적이었기 때문이다. 암살과 모략, 음모와 권모술수 속에서 숱한 이들이 그들의 뜻을 마저 펼쳐보이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우리 영화 속에서의 히어로, 히로인들은 죽음으로, 혹은 비극적으로 영화를 종결짓는다. 해피엔딩이 없는 사회다 보니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가상의 사건들 속에서도 해피 엔딩은 리얼리티가 한껏 떨어지는 결말로 코미디가 되고 만다. 다시 말하면 우리 사회는 승리의 기억은 과소하고, 패배의 기억은 과다하다는 것이다.

역사문제연구소가 기획하고, 서중석 선생님이 쓴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는 교양으로 읽는 한국의 근현대 역사서다. 예전에 "옥스포드 영국사"를 읽으며 우리 역사에 대해서도 이런 통사가 하나쯤 나와야 하지 않을까. 책 만드는 사람으로 그런 기획이 부재하(거나 여전히 충분치 못하)다는 사실에 마음 아팠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기획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필자를 찾아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런 책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적당한 필자와 함께 편집/기획하는 이의 만만치 않은 노력과 자본력이 뒷받침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이란 설명이 붙는 책들은 만들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우선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부터 몇 배의 수고가 든다. 그런 점에서 '웅진'이 이런 기획을 하고 실행에 옮겨준 것은 개인적으로도 고마운 일이라 생각한다. 게다가 이 책의 23쪽에는 내가 몸담고 있는 잡지에서 인용된 내용도 포함되어 있으니 반가운 마음도 든다. (다만, 인용하고 있는 글의 저자 이름이 잘못되어 있다. "내가 겪은 해방 - 인중 시절과 태극기에 대한 추억"에 대한 필자는 "임명박"이 아니라 "임명방" 선생이다. 나중에 기회가 있다면 바로잡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쨌든 우리 근 현대사에 대한 좋은 책이 나온 것만큼은 사실이다.

사실 이 책을 집필한 서중석 선생이나 추천사를 쓴 이이화 선생님, 두 분 모두 개인적으로 뵈온 적이 있고, 두 분 모두 우리 사회적으로도 존경받을 위치에 계신 분들이며 실제로 내 개인적으로도 존경하는 분들이기도 하다. 사실 이이화 선생이 쓴 이 책의 추천사부터 만만치 않다. 상례적으로 추천은 말 그대로 추천, 칭찬으로 일관되기 쉬운데, 이이화 선생은 원고를 꼼꼼하게 읽어낸 뒤 부족한 부분들도 함께 지적하는 추천사를 썼고, 서중석 선생은 그에 못지 않게 튼실한(일반적인 저자 서문에 비해 매우 길다는 점에서도) 저자 서문을 썼다. 사실 이 책의 서평은 이이화 선생의 추천사나, 서중석 선생의 저자 서문을 읽는 것만으로도 다른 평자의 리뷰를 읽지 않아도 될 정도의 함량을 담아낸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에 대한 신뢰는 충분히 보증할 만한 것이다.

2005년은 해방60년, 을사조약 100년, 한일협정 40년, 남북정상회담 5주년이면서 동시에 카쓰라, 태프트 밀약이 우리 민족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 비밀리에 체결된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러일전쟁 직후 미국과 일본이 한반도의 미래를 결정짓는 비밀 협약을 맺었다는 것은 장차 포츠담선언, 얄타협정에 의해 한반도의 운명이 다시 열강에 의해 결정되었던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한반도의 현대를 기술하기 시작해야 한다고 믿지만, 이 책은 1945년 해방 이후부터 2000년까지를 기술 대상으로 삼는다. 물론 그 이전의 역사에 대한 기술은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엮고, 웅진에서 펴낸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의 역사1.2.3"에서 다뤄진다. 그런 점에서 이 책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는 외따로이 떨어진 책이 아니라 이전의 시리즈들과 연계된 일반 시민들을 위한 교양으로 읽는 한국사 시리즈의 완결본에 해당하며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는 별권격이다.

물론 서중석 선생의 이 책에 대한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대중사회의 도래라는 한국 현대사의 또 하나의 특기할 점에 대한 기술이 부족하단 점이다. 즉, 정치사와 경제사에만 치중하지 않고, 사회사를 두루 아우른 측면은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대중문화와 예술, 그리고 생활사에 대한 측면은 이 책을 넘어서는 기획, 혹은 개정판이 필요한 요구가 될 것이다. 그것은 이 책 혹은 이 시리즈가 한반도와 우리 민족이 살아온 역사를 통사 형태의 개설서로 대중이 읽기 쉽게 기술한다는 측면에서 반드시 요구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일이고, 이 책이 발간되기 이전의 기획들과 연속성을 갖는다는 측면에서 현대사 분야에만 월등한 분량을 허락하기도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역사는 현재와 가까운 시점에서 더욱 많은 기술을 필요로 한다는 아쉬움은 가시질 않는다. 어떤 이들은 정치권력의 변화만으로 세상이 바뀔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권력이 천해(淺海)라면 역사에 대한 인식이 바르게 서는 것, 우리들의 상식이 바로 서는 것이야말로 민중의 마음 속 깊은 심해(深海, 心海)의 물길을 바로 잡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그런 첫 걸음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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