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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을 오해한 대한민국
신현철 지음 / 소명출판 / 2025년 8월
평점 :

입시 한 번 실패했다고 “인생이 끝났다”는 말이 나오는 나라,
한 재벌 기업 임원이 수백억 원대 퇴직금을 받았다는 뉴스가 뜨면 월급 통장을 보며 허탈해지는 나라,
특목고–스카이–대기업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에 모두가 몰려 서로를 팔꿈치로 밀어내야만 할 것 같은 이 나라가 답답하게 느껴진다면,
ㅡ 이 책이 꽤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 같다.
『다윈을 오해한 대한민국』은 이런 현실을 “그냥 요즘 세상이 원래 그렇지!”라며 넘기지 않는다.
개화기 때 만들어진 일본식 번역어부터, 사회진화론이 들어오며 <경쟁, 생존경쟁, 적자생존> 같은 말이 어떻게 왜곡되어 퍼졌는지, 또 그 말들이 어떻게 한국 사회의 무한경쟁·승자독식 분위기를 떠받치는 기둥이 되었는지 차근차근 짚어 나간다. 우리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믿어 온 ‘경쟁’과 ‘진화’의 언어를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게 만들고, “정말 다윈이 이런 세상을 원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는 “적자생존”, “무한 경쟁”, “진화론적으로 그렇다” 같은 말을 너무 흔하게 쓴다. 이런 말들 뒤에는 늘 다윈의 이름이 따라붙고, 우리는 그 표현들을 깊이 따져보지도 않은 채 “과학이 증명한 진실이겠지”라고 믿어 왔다. 그런데 『다윈을 오해한 대한민국』을 읽고 나면, 그 믿음의 바닥에 번역의 역사, 애매한 이해, 그리고 일본을 거치며 생긴 왜곡이 겹겹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이 책은 그 불편함을 피하지 말고,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쓰는 단어와 개념을 처음부터 다시 따라가 보자고 제안한다.
저자는 먼저 개화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 우리가 쓰는 서양 사상 관련 한자어들, 이를테면 “자유, 경쟁, 진화” 같은 말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만든 번역어를 일제강점기를 거쳐 그대로 들여온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때 우리에겐 서양 사상을 자기 말로 소화할 여유도, 학문적 기반도 없었고, 일본에서 만든 한자어들은 모양만 보면 익숙한 글자라 거부감도 덜했기 때문에 그냥 가져와 쓸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 단어들이 이미 “일본식으로 해석된 서양 사상”을 담고 있었다는 점이다. ‘자유’만 해도, 조선의 전통적 감각에서는 “윗사람 간섭 없이 내 마음대로 하는 것”에 가까웠지만, 일본 개화기에는 생명·신체·재산·사상·종교·결사에 대한 권리, 즉 근대 시민권의 언어로 바뀌어 있었다. 표기는 같지만, 단어 하나에 담긴 세계가 완전히 달라진 셈이다.
이런 번역어들은 서양 사상의 깊이까지 충분히 품지 못한 채, 다소 피상적으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았다. 일본 내부에서도 서양 개념을 자기 언어로 깊게 녹여낼 토대가 부족했고, 그 결과 껍데기만 남은 번역어들이 양산되었다. 한국은 그런 단어들을 다시 가져와 사용하면서, “원래부터 우리 말이었던 것처럼” 쓰게 된다. 저자는 다윈의 “natural selection”이 “자연선택” 혹은 “자연도태”로 옮겨지는 과정도 이 흐름 안에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자연선택’이라는 말은 흔히 “자연이 직접 골라 준다”는 뜻처럼 들리지만, 다윈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건 환경이 변하는 동안 그 환경에 잘 맞는 특징들이 조금씩 쌓여 가는 과정에 가깝다. 사람들은 이 말을 자꾸 “자연이 사람처럼 생각하고, 누가 더 나은지 따져서 뽑는 것”처럼 이해한다. 마치 자연이 심사위원이 되어 머리를 쓰며 합격·불합격을 정하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다윈이 그린 모습은 전혀 다르다. 책에서 인용된 설명을 빌리면, 자연선택은 “도움이 되는 변이는 보존되고, 해로운 변이는 사라지는 것”이다. 눈 덮인 곳의 흰 새, 히더가 널린 들판의 자주빛 새, 나무껍질과 비슷한 색의 곤충은 환경 덕분에 더 잘 숨을 수 있고, 그만큼 살아남을 확률도 높다. “자연이 흰 새를 골랐다”고 말하고 싶어지지만, 실제로는 환경에 어울리는 특징이 살아남아 다음 세대로 이어진 결과일 뿐이다. 저자는 이런 예를 길게 풀어 설명하며, 자연선택의 ‘자연’은 의지를 가진 주체가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어 가는 상태”, ‘선택’은 의식적인 눈과 손이 아니라 “결과로 드러난 차이”를 가리키는 말에 가깝다고 정리한다.
여기서 책은 ‘경쟁’이라는 단어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파고든다. 우리 고전 문헌에서 ‘경쟁(競爭)’이라는 한자어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가끔 나오는 용례도 시 구절 속 “다투다” 정도의 의미일 뿐, 오늘날처럼 “너 죽고 나 살자”는 느낌은 아니다. 중국 고전에서도 비슷하다. 공자가 활쏘기를 예로 든 “군자의 다툼”은, 서로 예를 갖추고 양보한 뒤 겨루고, 끝나면 함께 술을 나누는 장면이다. 결과보다 과정의 예를 중시하는 다툼이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세 사람, 유길준, 후쿠자와 유키치, 가토 히로유키를 나란히 놓고 비교한다.
이 부분이 책의 백미 중 하나다.
후쿠자와 유키치 : 영국식 자유주의와 정치경제학을 받아들이며 ‘competition’을 번역했다. 그에게 경쟁은 “서로를 해치지 않으면서 각자가 능력을 발휘해 발전을 도모하는 힘”에 가깝다. 더 잘하려고 애쓰는 과정이지만, 상대를 짓밟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익이 커지는 방향의 경쟁이다.
유길준 : 일본 유학 시절 후쿠자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경쟁론’과 『서유견문』에서 경쟁을 설명한다. 그가 말하는 경쟁도 “문명과 부강함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각자가 분발하는 힘”에 가깝다. 공자의 활쏘기 비유를 인용하며, 예를 잃지 않는 경쟁, 서로를 자극하지만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 경쟁을 강조한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이 “유길준이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정작 그가 말한 경쟁은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약육강식과는 거리가 멀다”고 평가한다.
반면, 가토 히로유키는 전혀 다른 길을 택한다. 그는 영어 struggle을 “경쟁”으로 번역하면서, 동식물 세계의 생존투쟁을 그대로 인간 사회에 가져온다. 그의 글에서 경쟁은 “우월한 존재가 열등한 존재를 압도하고, 결국 열등한 존재는 자손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지는 과정”이다. 여기서 “우승열패”, “약육강식”이라는 말이 힘을 얻는다. 경쟁은 더 나아지기 위한 자극이 아니라, 강자가 약자를 제거하는 자연법칙처럼 묘사된다.
저자는 이 세 사람을 나란히 보여주면서, “경쟁”이라는 같은 단어가 어떻게 자유주의적 자기계발, 그리고 사회진화론적 약육강식, 두 갈래로 찢어져 간 역사를 설명한다. 후쿠자와–유길준의 경쟁은 함께 나아가기 위한 경주에 가깝지만, 가토의 경쟁은 이기지 못하면 사라지는 싸움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한국 사회에 더 강하게 남은 것은 후자의 그림이다.
책의 1부와 2부는 이렇게 언어와 개념의 계보를 추적하면서, 우리가 너무 쉽게 쓰는 “경쟁, 생존경쟁, 적자생존, 진화” 같은 단어의 숨은 역사와 오해를 하나씩 드러낸다. 3부에서는 다윈의 『종의 기원』과 『인간의 유래(인간의 친연관계)』에서 실제로 말하고자 했던 바를 정리한다. 다윈은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환경이 변함에 따라 조금씩 변하고, 이런 변이를 동반한 계승이 오랜 시간 누적되면서 한 종이 다른 종으로, 혹은 한 종이 여러 종으로 갈라져 나간다고 설명한다. 이 설명의 핵심에는 “종, 적응, 환경, 변이, 진화, 변형”이라는 개념들이 놓여 있는데, 저자는 우리가 이 단어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진화론을 다 안다고 착각해 온 것은 아닌지, 조용히 되묻는다.
후반부로 갈수록 저자의 시선은 더 직접적으로 오늘의 한국 사회를 겨냥한다. 우리 사회는 “팔꿈치 사회”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서로를 밀어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구조가 되어 버렸다. 교육은 시민을 기르는 장이라기보다, “경쟁 국가의 병정”을 만드는 체계가 되었고, 특목고–명문대–대기업으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는 공감과 연대보다는 “우리는 다르다”는 경계를 굳히는 역할을 한다. 경쟁은 사람들의 내면을 소모시키고, 끝없는 비교 속에서 열등감과 스트레스를 키우며, 결국 자신이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잊게 만든다.
여기서 저자는 다시 다윈에게 질문을 돌린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경쟁을 여러 번 언급했지만, 동시에 “생명체들 사이의 상호연관성”을 더 중요한 것으로 꼽았다. 한 종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단순한 싸움이 아니라, 주변 생명들과 맺고 있는 복잡한 관계망이다. 오늘날 생태학에서 말하는 공생, 상호작용, 생태적 지위의 개념과 이어지는 지점이다. 붉은토끼풀–진홍토끼풀–꿀벌–뒤영벌의 관계처럼, 각 생물은 자신만의 자리를 찾고 서로의 틈을 메우며 공존한다. 다윈이 그려낸 세계는 “누가 누구를 이겼는가”로만 설명되는 세계가 아니라, 서로 기대고 얽힌 관계의 그물망이다.
그래서 이 책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핵심 메시지는 결국 이것 같다. “인생과 사회를 오직 경쟁으로만 설명하는 언어를 잠시 내려놓고, 관계와 상호연결의 언어로 다시 생각해 보라.” 다윈이 관찰한 것은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법칙이 아니라, 저마다의 자리에서 환경에 맞춰 살아남으려 애쓰는 다양한 생명의 모습이었다. 그 시선을 우리 삶에 옮겨 보이면,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밀어내야 한다’는 생각보다 ‘살아가기 위해 서로의 자리를 인정하고 협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훨씬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나에게 『다윈을 오해한 대한민국』은,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당연하게 믿어 온 “경쟁의 상식”을 한 번쯤 의심해도 좋다는 허락을 주는 책이었다. 그리고 그 의심에서 출발할 때, 비로소 나와 타자를 모두 조금 덜 상처 주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희망을 보여주는 책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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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후쿠자와는 개인의 자립과 자유를 존중하는 것을 기초로 하는 영국 사상을 일본에 최초로 도입한 반면, 가토는 국가의 개인에 대한 우월성을 지향하는 독일 사상을 일본에 최초로 도입했다. 그래서 후쿠자와는 영국식 의원내각제를 지향점으로 삼은 반면, 가토는 훗날 일본 제국주의 헌법 체제에서 볼 수 있는 독일식 입헌정치를 지향점으로 삼았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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