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문장 수업 - 다산 평생의 내공으로 삶의 질서를 만드는 하루 한 문장 필사
정약용 지음, 한정호 엮음 / 구텐베르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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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장을 만드는 법을 묻는 책은 많다. 그러나 문장 이전에 사람과 태도를 먼저 세우라고 말하는 책은 드물다. 『다산의 문장 수업』은 바로 그 희귀한 책이다. 다산 정약용은 글을 기술로만 보지 않았다. 글이란 결국 배움(學)과 익힘(習), 그리고 사유(思)의 총합이며, 그 작동이 바로설 때 비로소 기쁨(說)이 따라온다고 보았다. 이 책은 그 믿음을 촘촘한 정의와 예문, 간명한 훈계로 정리해 오늘의 독자에게 다시 건넨다.

책의 첫머리에 실린 「학이(學而)」 주석에서 다산은 배움과 익힘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學, 受敎也.(학, 수교야)”

“習, 肄業也.(습, 이업야)”

“時習, 以時習之也.(시습, 이시습지야)”

“說, 心快也.(열, 심쾌야)”

다산의 정의는 간단하지만 아주 구체적이다.

배움(受敎)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이고,

익힘(肄業)은 그 배움을 업처럼 꾸준히 반복해 실력으로 만드는 일이다.

이것을 정해진 시간에 계속(時習) 해 나가면 마음이 시원해지는 기쁨(心快)이 생긴다.

이 네 가지는 이 책 전체를 이끄는 핵심 리듬이자 다산식 문장론의 바탕이다.

그래서 이 책은 아이에게 억지로 글을 시키기보다 습관과 호흡을 만드는 법을 가르친다.

다산은 화려한 요령 대신 매일의 반복으로 삶과 글을 함께 단련하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반복만 하면 되는가?

다산은 곧바로 「위정(爲政)」 대목을 통해 사유의 규율을 더한다.

“學, 謂徵之於藏籍。(학, 위징지어재적.)”

“思, 謂研之於自心。(사, 위연지어자심.)”

“罔, 受欺也。殆, 危也。(망, 수기야. 태, 위야.)”

“不究本末而輕信古書, 則或墮於誣罔。(불구본말이경신고서, 즉혹타어무망.)”

“不稽古先而輕信自心, 則所知者危殆。(불계고선이경신자심, 즉소지자위태.)”

“二者不可偏廢也。(이자불가편폐야.)”

여기서 다산은, 배움은 문헌에서 증거를 찾는 일(徵之於藏籍)이고, 생각은 자신의 마음에서 깊이 따져 보는 일(研之於自心)이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면 ‘망(罔: 속음)’과 ‘태(殆: 위태로움)’에 빠진다. 근본과 말단을 따지지 않은 채 고전을 가볍게 믿으면 거짓에 속고, 옛 법을 상고하지 않은 채 제 마음만 믿으면 그 앎이 위태롭다. 결국 결론은 배움과 사유는 어느 한쪽도 폐기하거나 치우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오늘의 글쓰기에도 치명적으로 중요하다. 출처 불명 정보가 넘치는 시대, 글을 빨리 잘 쓰려는 조급함이 우리를 망(罔)과 태(殆)에 밀어 넣는다. 다산은 속도를 늦추고 증거를 세우라고 말한다.

SNS 문장도 마찬가지다. 멋있는 수사를 한 줄 얹는 대신, 무엇을 근거로 말하는지 보여주어야 한다.

이 책을 통해 문장이 아닌 근거와 책임을 배우게 되고, 화려함보다 정직함의 기술을 익히게 된다.

다산이 의도한 ‘문장의 윤리’가 오늘의 독자에게도 그대로 전달된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다산이 “글은 곧 사람”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문장은 그 사람의 얼굴이기 때문에, 허풍이나 모방, 책임 없는 말은 용납할 수 없다.

그래서 다산은 멋진 말보다는 핵심(명제), 감탄이 아니라 근거, 선동보다 원칙을 선택한다.

이런 다산의 생각은 현대 문서 작성법과도 자연스럽게 통한다.

짧지만 바로 실전에 써먹을 수 있는 조언들이다.

또 하나 큰 장점은 언어의 뉘앙스를 정확히 세운다는 것이다.

‘習, 肄業也’에서 ‘肄(익힐 이)’를 택한 까닭은 익힘이 단순 반복이 아니라, 업業처럼 꾸준히 들이는 공력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殆(위태할 태)’를 써서, 생각의 게으름이 아니라 근거 없는 지식의 위험을 경계한 것도 미묘하지만 결정적이다. 글자 하나가 사유의 방향을 바꾼다.

한마디로, 이 책은 기술서가 아니라 기준을 세워 주는 책이다.

먼저 배우고(受敎) 익히고(肄業) 정해진 시간에 반복(時習) 하면, 마음이 맑아진다(心快).

또 책에서 근거를 찾고(徵之於藏籍) 스스로 끝까지 생각한다(研之於自心).

즉, 근거 + 사유라는 두 가지 렌즈로 글을 쓰라는 뜻이다.

까다로워 보이지만, 한 번 붙잡으면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책을 덮고 이렇게 스스로 묻게 된다.

“이 주장의 출처는 무엇이며, 나는 끝까지 생각해 봤는가?”

『다산의 문장 수업』은 근거 있게 배우고, 스스로 깊이 생각하게 도와주는 책이다.

그래서 말만 멋있는 글이 아니라 믿을 수 있는 글을 쓰게 만든다.


'구텐베르크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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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 온 - 10년 후, 꿈꾸던 내가 되었다
이은정 지음 / 에피케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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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의 『캐리 온』은 작은 시작에서 출발해, 베풀며 일하는 태도, 일의 전체를 보는 눈, 상실과 돈의 문제를 통과한 경험을 차곡차곡 적어 내려간 에세이다. 이 책은 영웅담이 아니라 매일의 선택과 책임이 어떻게 브랜드와 삶의 방향(취향·나눔)으로 이어지는지 보여 준다. 화려한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현실에서 얻은 기준과 일하는 방식을 담백하게 전한다.

이 책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목은 엄마가 늘 건네던 한마디다.

“주변 사람들에게 늘 베풀어라. 집에 오는 손님은 빈손으로 보내지 마라.”

저자는 이 말을 단순한 훈육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훗날 브랜드를 만들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도, 그 문장이 오래도록 기준이 되어 자신을 붙잡아 주었다고 고백한다.

저자는 자신이 일을 배운 과정을 담담히 풀어놓는다. 작은 회사에서 바잉·기획·영업을 동시에 맡으며 수익 구조를 직접 계산해 보고, 주어진 예산 안에서 어떤 제품을 들여와야 하고 얼마를 팔아야 이익이 남는지, 한 해의 큰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몸으로 익혔다고 말한다. 반면 대기업에 들어가서는 오히려 시야가 좁아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솔직히 밝힌다. 직함이나 조직의 규모보다 중요한 것은 업의 전체 흐름을 보는 눈이었다. 이때의 전천후 경험이 훗날 자신의 브랜드를 세우는 가장 단단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브랜드가 바로 베베드피노다. 처음 준비했던 자금은 단돈 25만 원이었다. 취미로 시작한 블로그 ‘솔맘 스토리’에서 리뷰와 추천 글을 올리던 사람이었고, 아동복을 좋아해 샘플을 주문하고 사진을 찍어 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작은 시도가 점점 자리 잡으며 브랜드가 생겼고, 소비자의 신뢰를 얻으며 성장했다. 이후 주니어 라인의 ‘아이비스킷(ICEBISCUIT)’, 다양한 해외 브랜드와 국내 브랜드를 큐레이션하는 키즈 편집숍 ‘캐리마켓(Carry Market)’까지 확장된다. 현재는 연 매출 1,500억 원 규모의 패션 기업으로 성장했고, 단순히 제품을 파는 회사가 아니라 ‘키즈 패션 트렌드를 제안하는 기업’으로 발전했다. 시작이 크지 않아도 방향이 분명하면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장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성장은 눈에 띄는 순간보다, 보이지 않는 시간이 훨씬 길다. 아산병원에서 엄마와 보낸 1년은 그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입원과 퇴원이 반복되고, 항암 초반의 극심한 통증과 식사조차 못 하던 날들이 솔직하게 이어진다. 그러다 컨디션이 조금만 나아지면 성북동을 걷고, 광화문과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남대문시장을 들렀다가, 엄마가 좋아하던 삼청동 식당에 들렀던 행복한 기억을 꺼내 놓기도 한다. 잠시라도 아픈 일상에서 벗어나 평범한 하루의 기분을 느끼고 싶었던 순간들이었다. 그 과정을 지나며 저자는 엄마의 마음을 새로 이해한다. 왜 식은 밥을 싫어해 따끈한 도시락을 직접 배달해 주었는지, 왜 그토록 부지런히 살았는지. 그리고 어느 날 그 말이 깊게 와 닿는다.

“은정아, 나는 너희가 식은 밥 먹는 게 싫어서 따끈따끈한 도시락 만들어서 배달해 주면서 너희를 위해 열심히 살았어. 너희가 나의 우주였고 나의 전부였어. 너희들이 정말 잘 되길 바랐다.”

하지만 그 시간의 이면에는 냉정한 돈의 현실이 있었다. 당시 임시 실험용 신약은 한 알에 10만 원이 넘었고, 하루에 두세 알을 먹어야 했다. 게다가 1인실 입원비만 하루 40~50만 원, 약값까지 더하면 하루 70만 원이 훌쩍 들었다. 그런 날들이 한두 달 이어지면 1억 원이 족히 넘는 비용이 됐다. 카드를 돌려 막고, 여기저기서 돈을 빌리며, 원망과 미안함이 뒤섞이던 시절을 그는 숨기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누군가를 돕는 일은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 자리에는 다짐이 남았다.

“돈을 잘 버는 사람이 된다면 아픈 사람들을 돕고 싶다.”

그 다짐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는 베베드피노를 단순한 패션 브랜드가 아니라 누군가의 일상을 지탱하고 기억을 남기는 브랜드로 세우겠다고 마음먹는다. 어느 날, 입원 중인 아이의 보호자로부터 “외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날에 꼭 베베드피노를 입는다”는 메시지를 받았고, 급히 기부를 준비하던 중 재고가 부족하고 시간이 촉박해 부득이하게 B품을 보낸 일이 있었다. 내내 마음에 걸리던 그때, 아이에게서 편지가 도착한다.

“제가 태어나서 입어본 옷 중에 가장 밝고 예쁜 옷이었어요.”

그 한 문장을 읽는 순간 그는 소리 내어 울었다. 중요한 것은 새 상품이냐 B품이냐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진심이라는 사실을 더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곧바로 신상품이 나오자 가장 먼저 그 아이에게 정성껏 포장해 보내며 마음을 전했고, 이후에도 어려운 처지의 아이들을 위한 지속적인 기부와 지원을 이어 갔다. 그 흐름은 결국 강남세브란스 희귀 난치병(미토콘드리아 질환) 연구기금 후원으로까지 확장된다. 옷을 만드는 일이 누군가의 하루를 조금 더 빛나게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뒤의 시간도 솔직하게 기록돼 있다.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쓰러져 링거를 맞았다. 남편이 몰래 이력서를 넣어 다시 일을 시작하게 만든 것도, “내버려 두기에는 더 무너질 것 같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슬픔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리듬 속에서 조금씩 옅어진다는 것을 몸으로 배운다. 저자는 엄마라는 울타리가 사라지자, 그녀가 지켜준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동시에 그 시간은 책임, 법적 절차, 채무 문제를 처음으로 직접 배우는 계기가 되었고, 과하게 순진한 태도를 벗고 현실을 버틸 힘을 만든 시기이기도 했다.

“힘들었지만 그 덕분에 삶의 기준이 생겼다”는 문장이 담담하게 남겨져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취향’이라는 단어로 자신의 삶을 정리한다. 취향은 취향 그 자체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 어떤 방식으로 살고 싶은지를 증명하는 언어라고 말한다. 유행처럼 번쩍이는 것도 좋지만, 시간이 지나도 질리지 않는 것, 오래 곁에 둘 수 있는 것, 마음에 천천히 스며드는 것이 결국 삶의 기준이 된다고 말한다. 이 생각은 브랜드 운영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사람을 많이 아는 것보다 진짜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한두 명만 있어도 충분하고, 브랜드 역시 넓게 퍼지는 이미지보다 오래 남는 신뢰를 목표로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캐리 온』은 성공을 자랑하는 책이 아니라, 삶이 어떻게 자리를 잡아가는지 보여주는 기록에 가깝다. 25만 원으로 시작해 연 매출 1,500억 원 회사로 성장한 과정은 단번에 만들어진 업적이 아니라, 작은 선택들이 오랜 시간 쌓여 만든 결과라는 것을 강조한다. “버티며 조금씩 나아가는 사람”의 마음이 책 전체를 통해 일관되게 흐른다.

책을 읽고 나면 이런 질문을 한번 해보는 건 어떨까.

나는 어떤 기준으로 일하고 있는가?

어떤 걸 소중히 여기며 살고 있는가?

그리고 누군가의 하루를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가?

『캐리 온』 책을 추천하고 싶은 대상

예비 창업자·1인 브랜드 운영자

브랜딩·마케팅 실무자

커리어 초년생·이직러

키즈 패션/리테일 종사자

사회공헌·기부 관심자

돌봄·상실을 겪는 독자


'북피티 @book_withppt'님을 통해

'에피케 출판사'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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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며 하나씩 위시리스트를 채워 가는 과정은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내 삶을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에 대한 선언이었다. 그 작은 소망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내가 만든 브랜드와 회사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가장 중요한 건, <시간이 흘러도 질리지 않는 것>이다. 유행보다 오래 남는 잔잔한 힘, 첫눈에 화려하게 다가오진 않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 깊숙이 스며드는 것.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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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뿌리, 한국광복군
조승옥 지음 / 세종마루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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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욱의 『국군의 뿌리,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기원을 미군정 경비대가 아니라 의병·독립군·한국광복군으로 이어지는 무장 독립투쟁의 계보에서 재정립하려는 책이다. 우리가 흔히 “국군은 미군정 시기 조선경비대에서 시작됐다”고 배워온 통념에 대해, 저자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국군의 뿌리를 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 이후 이어진 의병, 그 의병이 만주와 연해주에서 성장한 독립군, 그리고 1940년 충칭에서 임시정부가 창설한 한국광복군으로 이어지는 항일 무장투쟁의 계보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계보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실제 전투 경험과 지휘 방식, 작전 계획, 사람들의 연결, 그리고 군의 정신이 오늘날 국군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 메시지다.

이 책에서 특히 중요한 문제의식은 이렇다.

국군은 스스로를 누구의 후예라고 말할 것인가?

독립운동이 세운 나라의 군대인가, 아니면 미군정이 만든 치안조직의 연속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상징 싸움이 아니다. 장병의 자부심과 직결된 문제다. 만약 국군의 기원을 조선경비대에만 둔다면, 국군은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인사들을 바탕으로 미군정이 만든 조직의 후예가 된다. 반대로 국군의 뿌리를 의병‧독립군‧광복군으로 선언한다면, 국군은 일제에 무력으로 저항하고 나라를 되찾으려 했던 무장 독립군의 후예가 된다. 저자는 이 차이가 현재 국군의 정통성과 사명감을 결정한다고 본다. 이 주장은 육군사관학교의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논란과도 직결된다. 홍범도를 기릴 것인가, 아니면 흉상을 옮길 것인가의 문제는 곧 ‘우리 군이 어떤 전통을 이어받겠다고 공식적으로 말할 것인가’를 묻는 일이다.

저자는 먼저 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짚는다. 일제는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고 무력으로 진압했지만, 장병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의병으로 전환되었다. 이 의병은 농민들의 즉흥적 봉기 같은 이미지와 달랐다. 이미 훈련받은 해산 군인들이 합류하면서 의병 부대는 조직력과 전투력을 갖춘 실질적인 무장세력으로 발전했다. 이후 많은 인물들이 만주로 넘어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체계적으로 독립군 간부를 길러냈다. 신흥무관학교는 망명지에 세운 사실상의 사관학교였고, 수천 명의 무장 독립 인재를 배출했다. 그 전통은 만주 독립군, 대한민국임시정부, 그리고 광복군으로 이어진다. 즉 국군의 원류는 이미 이때부터 “조직된 무력”의 형태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계보의 분기점이 바로 한국광복군이다. 1940년 충칭에서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했다. 광복군은 상징용 깃발이 아니라 실제 전투부대였다. 총사령 지청천은 만주에서 독립전쟁을 지휘한 실전 지휘관이었고, 광복군은 선전‧심리전‧정보전은 물론, 미국 전략첩보국(OSS)과 협력해 일본군 점령지(조선 본토)에 잠입해 정보 수집과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독수리 작전’까지 준비했다. 이 계획은 해방 직전까지 실제로 진행되었다. 즉 광복군은 해방 후 입국하는 난민 집단이 아니라, 해방 이전에 이미 국내에 투입될 준비가 된 국군의 전신이었다. 김구는 이 점을 누구보다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광복군을 국제 무대에서 ‘대한민국의 군대’로 인정받게 하려고 움직였고, 이를 통해 해방 후 군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다. 이 책은 김구를 단순한 독립운동 상징이 아니라 국군의 정통성을 설계한 인물로 다룬다.

해방 이후의 전개는 이 책의 하이라이트다. 남한을 통치하던 미군정은 조선경비대와 군사영어학교를 세워 치안과 경계를 맡길 조직을 만들었고, 여기에 일본군·만주군 출신 인사들이 대거 들어갔다. 그래서 “경비대가 국군의 모체”라는 말이 지금까지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조승욱은 “그건 절반만 본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인사 기록을 근거로, 미군정도 광복군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했다고 보여준다. 미군정은 군 통제부서의 수장 격인 통위부장에 임시정부 참모총장 출신 유동열을 임명했고, 경비대 총사령 자리에는 광복군 출신 송호성을 앉혔다. 즉 미군정조차 광복군 라인을 ‘정당한 주체’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 흐름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더 명확해진다. 초대 국방부 장관 이범석, 차관 최용덕은 모두 광복군 출신이었다. 초기 사단장들 중 상당수, 육군사관학교 교장들 역시 광복군 출신이 맡았다. 단순히 이름만 들어간 장식이 아니라, 실제로 국가 무력기관의 지휘권을 잡은 것이다. 이범석은 특히 중요하게 그려진다. 그는 광복군 지휘 경험을 바탕으로 “국군은 특정 정파의 사병이 아니라, 독립운동이 만든 국가의 군대여야 한다”라고 밀어붙이며 군의 정신적 토대를 설계하려 했던 인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광복군은 상징이 아니라 국군의 실질적 골격에 참여했다는 게 책의 주장이다.

이 책의 또 다른 강점은 인물의 서사다. 지청천(광복군 총사령), 홍범도(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상징), 이동녕(임시정부를 끝까지 지켜낸 버팀목), 유동열(임시정부 군 책임자에서 미군정·통위부장으로 이어지는 가교), 이범석(국방부 초대 수장), 최용덕(초기 공군 전력의 씨앗), 그리고 여성 광복군들까지. 특히 여성 광복군 대원들은 모병, 선전, 첩보, 심리전 방송 등 현대전의 핵심 기능을 맡은 주체로 다뤄진다. 저자는 “국군의 뿌리가 광복군이다”라는 말이 남성 영웅 몇 명의 이야기로만 소비되는 것을 거부한다.

국군의 정통성은 더 넓은 기반 위에 세워졌다는 걸 보여준다.

이 책은 마지막으로 묻는다.

국군은 스스로 어디에 닻을 내릴 것인가?

경비대의 후예라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광복군의 후예라고 말할 것인가?

이 질문은 역사 해석 싸움이 아니라 지금과 미래의 문제다.

국군이 “우리는 광복군의 법통을 잇는다”고 선언하는 순간, 군은 단순한 행정조직이 아니라 독립전쟁의 완성선상에 선 민족의 군대가 된다. 그 자의식은 장병의 사기, 국민의 신뢰, 그리고 군이 민주공화국의 통제 아래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라는 기준까지 바꾼다.

『국군의 뿌리,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시작점은 미군정의 경비대가 아니라 의병·독립군·광복군이다”라는 사실을 다시 세우며, 국군이 스스로를 그런 역사 위에 소개해야 한다고 말하는 책이다.


'세종마루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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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역사관은, 어제가 있었기에 오늘이 있다는 믿음이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이후 우리 민족은 쉬지 않고 독립을 위한 투쟁을 이어갔고, 그 끈질긴 노력은 결국 광복으로 이어졌다. 같은 맥락에서 대한민국 국군 역시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분명한 뿌리가 있으며, 역사적 계승의 흐름이 있기에 그 뿌리를 밝히고자 이 책을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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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간 심리학 - 미술관에서 찾은 심리학의 색다른 발견
문주 지음 / 믹스커피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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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 저자의 『미술관에 간 심리학』은 미술 작품을 통해 인간의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작업,

즉 ‘내 안의 무의식을 만나는 여행’을 아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저자는 자신을 ‘미술치료사’라고 소개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한국 의료법상 ‘치료’라는 용어는 심리·정서 영역에서 자유롭게 쓰기 어렵기 때문에 공식 직함은 ‘미술심리상담사’다. 하지만 그녀가 실제로 하는 일은 단순 상담 그 이상이다. 개인 미술치료 연구소를 운영하며 만난 수많은 내담자와 수강생의 그림 속에서, 말로 다 표현되지 않은 무의식적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들을 목격해 왔다. 사람의 내면에는 이미지로 떠오르는 세계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이미지는 언어보다 더 직접적으로 감정을 말한다는 사실을 그는 반복해서 확인해왔다.

이게 미술치료의 핵심이다. 보통 상담은 언어로 진행된다. 하지만 미술치료에서는 ‘그림’이라는 제3의 매개가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에 놓인다. 이 그림은 방어를 약하게 만들고, 우회적으로 마음을 드러내게 하고, 때로는 스스로도 몰랐던 감정을 깨닫게 만든다. 저자는 이것을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공명성”이라고 부른다. 어떤 감정은 말로 옮기는 순간 이미 달라지지만, 이미지로 나올 때는 굉장히 솔직하고도 생생하다. 그래서 미술치료는 단순한 ‘그림 놀이’가 아니라 무의식에 닿는 하나의 통로다.

책은 이 지점을 심리학 이론과 연결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칼 구스타프 융의 분석심리학은 미술치료의 기반을 이룬다. 융은 예술을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무의식이 상징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예술가가 작품을 만드는 순간은 ‘내가 뭘 그릴지 의식적으로 통제하는 시간’이 아니라, 나보다 더 깊은 힘—개인적 무의식과 집단적 무의식—이 표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그림은 그리는 사람의 인생 전체가 묻어난다.

이 관점은 책의 첫 장 “천재인가, 광인인가?”로 이어진다. 우리는 예술가와 광기(정신질환)를 거의 자동으로 연결해 떠올린다. 반 고흐, 뭉크, 툴루즈-로트렉, 쿠사마 야요이 같은 이름은 너무 유명해서, “예술=고통”이라는 공식처럼 받아들여지기까지 한다. 저자는 그 통념을 흥미롭게 파고든다. 단순히 ‘그들은 아팠다’ 수준이 아니라, “왜 그들의 고통이 그렇게까지 강렬한 작품으로 전환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예를 들어 툴루즈-로트렉은 귀족 집안 출신이었지만 유전적 문제로 150cm 남짓의 왜소한 체격을 가지고 태어났고, 평생 우울과 불안, 편집 증세, 심각한 알코올 의존에 시달렸다. 술에 취해 눈앞에 없는 적에게 총을 겨눴다는 일화는 그의 정신이 얼마나 벼랑 끝에 서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그는 정신병원에까지 입원하게 된다. 그런데 중요한 건 바로 여기에 있다. 로트렉의 삶은 끝없이 무너지고 있었지만, 그의 예술은 그 무너짐을 정확히 기록했다는 것. 그의 캉캉 댄서, 친구이자 뮤즈였던 제인 아브릴의 초상에는 화려한 물랄리가 아니라, 신경질적 긴장감, 사회의 냉혹함, 여성 신체가 상품화되는 장소의 잔혹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단순히 ‘밤의 파리’를 그린 게 아니라, 그 세계에서 사람들의 영혼이 어떻게 닳아 없어지는지를 기록했다. 그의 수백 장의 드로잉과 수천 점에 가까운 작업을 보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정조는 화려함이 아니라 소외, 우울, 권태다. 우리는 그의 그림을 통해 그림 바깥의 인간적 고통을 감지한다.

이것은 에드가 드가에게도 이어진다. 드가는 흔히 발레리나의 화가로 불리지만, 그가 바라본 무대 뒤 현실은 우리가 상상하는 화려한 분홍 발레 의상과 눈부신 스포트라이트의 세계만이 아니었다. 19세기 말 파리 오페라의 무대 뒤, 어린 무용수들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혹독한 훈련과 통제에 놓여 있었고, 부유한 남성들은 그들을 사실상 지배했다. 발레 무대는 예술의 공간인 동시에 권력과 성적 거래의 공간이기도 했다. 드가는 그 불편한 진실을 집요하게 그렸다. 대기실, 리허설, 무대 뒤의 피로한 다리. 준비는 되어 있지만 아직 무대에 오르지 않은 몸들. 그는 무용수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그 아름다움이 어떤 대가 위에 올라서 있는가’를 포착하려 했다. 동시에 드가 자신의 삶도 어둠으로 향하고 있었다. 시력이 망가져 가는 공포, 사회적 편협함, 후기로 갈수록 심해진 고립과 우울. 드가의 발레 장면은 그래서 단순한 미인 찬양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의 취약함을 들여다보는 어두운 자화상처럼 읽힌다.

이 책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신질환과 예술은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가?”를 역사적으로 살핀다. 오래전에는 정신질환이 악령, 마법, 저주로 여겨졌고, 사람들은 두개골에 구멍을 내거나(고대 trephination), 피를 뽑거나, 고문에 가까운 방법으로 치료를 시도했다.

중세 유럽의 일부 병원은 사실상 전시장이었고, 부유층이 정신질환자들을 구경하고 조롱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만큼 인간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태도 자체가 부재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18~19세기에 들어서며 관점이 바뀌기 시작한다. 광기를 단죄할 것이 아니라 치료할 대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몇몇 정신과 의사들은 환자들의 그림을 단순한 증상의 부산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분석 가능한 기록이라고 생각했다. 예컨대 폴 막스-시몽은 환자들의 그림과 글을 체계적으로 모아 분류했고, 조울증(양극성 장애)을 앓는 환자의 상태가 그림의 형식과 에너지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관찰했다. 발터 모르겐타우어는 아돌프 뵐플리라는 환자의 작품을 진지한 예술로 다루며, 그를 환자가 아니라 ‘예술가’라고 불렀다. 이 선언은 이후 ‘아웃사이더 아트’, 즉 제도권 교육 밖에서 나온 예술을 미술사 안에 올려놓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다. 한스 프린츠혼 또한 수천 점의 환자 작업을 수집하고, 그들의 시각 언어를 미술사와 심리학 두 영역 모두에서 의미 있는 자료로 바라보자고 주장했다. 이 흐름은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의 그림 = 병적 낙서”라는 낙인을 깨고, 오히려 인간의 내면 세계를 가장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시각 기록이라는 인식을 만들었다.

즉, 예술이 질환의 증거라는 식의 낙인 대신, 예술을 통해 고통이 ‘언어화’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표현은 곧 생존이다. 이 생각은 프리다 칼로에서 절정에 달한다.

프리다 칼로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다. 소아마비로 약해진 다리, 열여덟에 당한 버스-전차 충돌 사고로 인한 골반·척추·갈비뼈·다리의 복합 골절, 장기 손상, 반복 수술, 만성 통증, 임신 불가능이라는 상실. 그녀는 거의 전신이 부서진 채 침대에 묶여 살아야 했다. 그 속에서 칼로는 붓을 들었다. 그녀에게 그림은 재능 뽐내기가 아니라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선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자신을 끝없이 그렸다. 칼로의 작품 중 자화상이 유난히 많은 이유는, 그만큼 자기 몸과 자기 마음이 전쟁터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자화상들은 단순한 ‘셀카’가 아니다. 가시 목걸이에 목이 조여 피가 흐르고, 검은 원숭이가 어깨에 얹혀 있고, 부활과 재탄생을 상징하는 새나 나비가 주변에 떠다니며, 무너진 몸이 그대로 노출된다. 이건 타자가 그린 ‘아름다운 여성 화가 프리다’가 아니라, 프리다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냉정한 거울이다. 결혼 생활에서 겪었던 배신감, 특히 남편 디에고 리베라의 반복된 바람과 심지어 자기 여동생과의 관계까지 목격했을 때의 무너짐은 ‘짧은 머리의 자화상’ 같은 작품에서 폭발한다. 머리카락을 잘라 바닥에 흩뿌린 모습은 단순한 스타일 변화가 아니다. 여성성으로 규정되어 왔던 정체성(긴 머리, 전통적 여성 이미지)을 스스로 잘라내고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자르는 것은 머리카락이 아니라, 과거의 관계, 순종적인 여자의 역할, 사랑에 속박된 자기 자신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사슴으로 그리기도 한다. 온몸에 화살이 박혀 피 흘리는 사슴. 어디에도 기대지 못한 채 숲에서 방치된 사슴의 얼굴은 바로 칼로 자신의 얼굴이다. 통증은 육체적인 동시에 정서적이다. 이 이미지가 15세기 르네상스의 성 세바스티안 도상과 겹쳐 보인다는 언급은 매우 상징적이다. 세바스티안은 화살 투성이의 순교자고, 칼로는 일상 자체가 순교인 사람이다. 그녀에게 그림은 고통의 증명이자 저항이다. “나는 이렇게 다쳤고, 그렇지만 아직 여기 있다.”

여기까지가 “예술은 마음의 기록”이라는 책의 절반이라면, 후반부는 “우리는 왜 이런 그림들 앞에서 강하게 반응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넘어간다. 저자는 프로이트와 융의 이론을 바탕으로 인간의 무의식 구조를 설명한다.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관리할 수 없는 충동·욕망·분노·불안의 저장고다. 겉으로는 멀쩡한 척할 수 있어도, 이 무의식은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밖으로 나온다. 몸의 증상일 수도 있고, 꿈일 수도 있고, 예술일 수도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 정신을 원초아(충동), 자아(현실 조정자), 초자아(도덕적 감시자)로 설명하면서, 인간은 이 세 힘의 줄다리기 속에서 살아간다고 봤다.

융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무의식을 개인적인 차원(개인 무의식)과 인류 전체가 공유하는 깊은 층(집단 무의식)으로 나눴다. 그리고 이 집단 무의식 안에는 ‘원형(archetype)’이라고 불리는 보편적 상징 패턴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본다. 남성 안에 있는 여성성(아니마), 여성 안에 있는 남성성(아니무스), 어머니상, 현자상 같은 것들이다. 융의 핵심은 “우리는 겉으로만 남성/여성인 게 아니다. 내 안에는 반대 성질을 가진 또 다른 자아가 살고 있다”는 통찰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처음 봤는데도 강하게 끌리거나 강하게 거부감을 느낀다. 실제의 그 사람에게 반응하는 게 아니라, 내 무의식 속 아니마/아니무스를 그 사람에게 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첫눈에 반했다’는 표현 속에는 이런 투사가 겹쳐 있다. 문제는 이 투사가 벗겨지는 순간이다. 흔히 말하는 “콩깍지가 벗겨졌다”라는 순간은 사실 ‘무의식적 투사를 회수하고, 그 사람을 실제의 사람으로 보기 시작한 것’에 가깝다. 이 과정이 잘 지나가면 관계는 성숙해지고, 나 자신도 성장한다. 못 지나가면 파국으로 간다.

책은 여기에 예술가들의 실제 작업을 다시 끌어와서 설명한다. 클림트가 여성의 성을 그리는 방식, 달과 태양 같은 상징이 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지, 그리스 신화 속 달의 여신 셀레네와 잠든 엔디미온의 장면이 왜 수백 년 동안 수많은 화가에게 그려졌는지 등은 모두 “인간은 결국 상징으로 자기 마음을 이야기한다”는 주장과 연결된다. 상징을 이해한다는 건 단순히 ‘해석 잘하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이게 왜 나를 이렇게 흔들지?”를 알아차리는 일이다.

흥미롭게도 이 책의 마지막에 현재 시대로 급격하게 넘어간다. 오늘날 인공지능 화가, 특히 휴머노이드 로봇 ‘아이다(Ai-Da)’ 같은 사례가 등장한다. AI가 그린 그림이 경매에서 엄청난 금액으로 팔리고, 로봇이 창작자로 불리는 시대다. 그럼 인간 예술가는 사라질까? 저자의 대답은 단호하게 “아니다”에 가깝다. 인간의 예술은 완벽함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남겨둔다. 떨리는 선, 지워진 흔적, 망설임, 주저, 상처, 부끄러움, 집착, 의지. 그런 결함 자체가 우리의 마음을 건드린다. 하지만 AI는 너무 완벽하다.

다시 말해, “고통받는 주체로서의 나”가 없다. 결국 우리는 그림을 볼 때 결과물만 보는 게 아니라, 그 결과물을 만든 존재와 그 존재의 시간을 함께 본다.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은 그림 하나가 아니라 그녀라는 사람 전체와 마주하게 만든다. 그 체온을 AI가 대신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정리하면, 『미술관에 간 심리학』은 세 가지를 동시에 보여준다.

첫째, 예술은 고통과 무의식의 언어다.

둘째, 우리가 작품 앞에서 강하게 흔들리는 이유는 그 이미지가 나의 심리와 만나기 때문이고, 그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셋째, 그렇기 때문에 예술은 앞으로도 인간의 몫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예술은 단순히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 내가 살아 있었다라는 증언이기 때문이다.

+

책 내용 중에 언급 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란 말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인다.

예전에는 사람들 대부분이 “우주의 중심은 지구야. 다 우리 주변을 돈다”고 믿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가 “아냐, 지구가 중심이 아니고 태양을 돌고 있어”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의 세계관이 완전히 뒤집혔다. 즉, 내가 중심이라고 믿던 세계가 사실은 아니었다는 충격.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이 바로 그런 역할을 했다. 사람들은 “나는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선택해. 나는 나를 알아”라고 믿었는데, 프로이트는 “사실 너를 움직이는 진짜 힘은 네가 ‘모르는 곳(무의식)’에 있다”고 말한 거다. 즉, 인간은 자기 마음의 주인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마음 깊은 곳의 어둠과 상처, 욕망이 진짜 조종석에 앉아 있었다는 선언.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프로이트의 등장을 “인간 정신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우리가 생각하던 인간의 중심이 통째로 바뀐 사건”이다.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채손독) @chae_seongmo'를 통해

'믹스커피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미술사에서 우울증을 앓은 화가들은 매우 많다. 그들이 우울했기 때문에 그림을 그렸다기보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에너지로 우울감을 토해냈다고 보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천상의 아름다움과 발레리나의 역동적인 묘사로 오랫동안 우리를 매료시킨 인상주의 화가 에드가 드가도 그 중 하나다. 그의 작품 뒤에 숨어 있는 고통, 슬픔, 집착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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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경영: 소년병과 아인슈타인
여현덕 지음 / 드러커마인드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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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현덕의 『AI 경영: 소년병과 아인슈타인』은 “AI가 세상을 바꾼다” 같은 추상적인 감탄사가 아니라, 우리가 AI를 어떤 태도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묻는 책이다. 단순한 기술 해설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책이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특히 저자가 반복해서 끌어오는 비유 ― 지뢰밭에 투입된 소년병, 전혀 다른 시야를 여는 아인슈타인, 그리고 감정 없이 끝없이 일하는 AI ― 는 AI를 단순한 자동화 도구로 보지 말고 인간과 조직의 문제까지 함께 생각하라고 요구한다.


책의 출발점은 “지능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튜링은 “기계가 사람처럼 대답해 사람과 구별되지 않으면 그건 지능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저자는 거기에 의문을 단다. 그게 정말 인간적인 의미의 지능인가, 아니면 훈련된 흉내인가? 이 질문은 지금의 생성형 AI에 그대로 적용된다. 답변은 점점 사람 같아지지만, 그게 정말 ‘이해’인지 아니면 ‘모사’인지 우리는 여전히 구분하지 못한다.


마빈 민스키의 관점도 인용된다. 민스키는 지능을 하나의 거대한 의식으로 보지 않고, 많은 작은 기능(에이전트)의 조직적 결합으로 봤다. 오늘날 AI 역시 이 조합과 누적의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즉 AI는 이미 복잡하고 강력한 수준까지 왔고, 더 이상 장난감이 아니다.


여기서 책은 중요한 전환점을 제시한다. 생성형 AI 시대에 중요한 건 ‘협업지능(CQ, Collaborative Intelligence)’, 즉 인간과 AI가 함께 만드는 지능이다. 인간은 맥락, 감정, 책임, 윤리를 제공하고 AI는 지치지 않는 분석과 반복 실행을 제공한다. 결국 앞으로의 단위는 ‘나 혼자’가 아니라 ‘나+AI’ 팀이다. 이는 단순한 생산성 얘기가 아니다. “AI가 다 하게 두고 인간은 빠지면 된다”가 아니라, “AI가 낸 결과를 사람이 이해하고, 방향을 정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저자는 이걸 사람과 AI의 ‘공진화’라고 부른다. 인간을 없애는 AI가 아니라 인간을 확장시키는 AI. 그는 이것이 ‘신이 된 인간(호모 데우스)’을 만드는 방향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더 윤리적인 목표라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갈림길을 제시한다. 하나는 사이보그의 길, 즉 AI를 효율 극대화 수단으로만 쓰면서 더 빠르게, 더 싸게, 더 많이 돌리는 길. 다른 하나는 케이론의 길, 즉 AI가 인간의 가치와 목적을 공유하도록 만드는 길이다. “AI로 얼마나 더 벌 수 있나?”에서 멈추지 않고 “AI로 어떤 사회를 만들 건가?”까지 묻는 길이다. 저자는 이 선택이 앞으로 기업 문화, 교육 방식, 노동의 존엄을 결정할 거라고 본다.


흥미로운 건 이 거대한 얘기가 결국 현실적인 질문으로 내려온다는 점이다. 즉 “AI로 도대체 뭘 도울 건데?”라는 문제정의다. 책은 앤드루 와이어스의 ‘크리스티나’를 예로 든다. 언덕 위 집을 바라보지만 그 언덕을 오를 수 없는 한 여성. AI는 그녀의 다리를 마법처럼 고쳐줄 수는 없다. 하지만 자율주행 휠체어, 보조 외골격 슈트 같은 현실적인 해결책을 설계할 수는 있다. 결국 핵심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있다. 이걸 저자는 ‘AI Thinking’이라고 부른다. AI를 쓰는 능력보다, AI를 어디에 써야 하는지를 묻는 능력이 인간 쪽 역할이라는 거다.


저자는 또 한 가지 경고를 한다. 우리가 AI가 준 답을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인간은 점점 생각하지 않게 된다는 것. 알고리즘이 복잡하다는 이유로 “맞겠지” 하고 넘기는 순간, 우리는 검증도, 책임도, 창의성도 내려놓는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점점 ‘대체 가능한 존재’가 된다. 그래서 협업지능은 그냥 “사람+AI=시너지!”라는 낙관적인 구호가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스스로 쓸모를 잃는다”는 현실적인 경고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지점은 감정의 문제다. 우리는 보통 AI를 ‘차갑고 완벽하게 이성적인 존재’라고 상상한다. 그런데 책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끌어온다. 인간은 감정이 없으면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것. 뇌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가 보여준 것처럼, 감정이 망가지면 오히려 이성적인 판단 능력까지 무너진다. 즉 감정은 방해물이 아니라 방향 감각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지금의 LLM은 반쪽짜리다. 수많은 데이터를 먹고, 그럴듯한 답을 내지만, 맥락적 배려나 윤리적 책임은 없다. 그래서 거짓을 자신 있게 말하는 할루시네이션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책은 다음 단계를 “감성 인공지능”, 즉 인간의 정서 상태를 읽고 반응하는 AI에서 찾는다. 단순히 말을 잘하는 AI를 넘어서, 운전자의 피로를 감지해 사고를 막고, 자폐 스펙트럼 아동의 의사소통을 돕고, 돌봄과 안전 영역까지 개입하는 기술 말이다. 저자는 이것을 “2AI”라 부르며, 결국 AI가 인간의 마음과 연결되지 않으면 끝내 신뢰받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책의 마지막은 산업의 현재로 내려온다. 빅테크와 스타트업들은 엄청난 자본과 인프라를 계속 투입하고 있고, AI는 식는 쪽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깊이 들어오는 중이다. 저자는 지금을 “AI의 겨울”이 아니라 “AI의 가을”이라고 부른다. 이미 싹은 텄고, 이제 수확과 재편의 단계라는 뜻이다. 이건 더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우리 일에 직접 영향을 주는 현재형 이슈다.


결국 이 책이 말하는 핵심은 단순하다. AI를 두려워할 이유도, 맹신할 이유도 없다. 중요한 건 AI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AI를 어떤 기준과 책임으로 사용할 것인가다. 저자는 말한다. AI는 불과 같다. 불은 방을 따뜻하게도 만들고 집을 태워버리기도 한다. 문제는 불이 아니라, 불을 쥔 사람이다. 이 책은 그 불을 쥐고 있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생성AI 시대가 열리면서 인공지능과 인간지능이 멋지게 만나는 협업지능(CQ:Collaborative Intelligence/Quotient)이 탄생한다면 인류 역사에 어떤 변화를 몰고 올까? 두 지능이 자유자재로 통합되어 ‘인간의 창조지능,감성지능‘과 ’AI의 무심한 지능’이 합쳐져 지능이 증강된다면 장차 무슨 지능이 탄생할까? 신을 닮은 호모데우스의 지능이 탄생할까? 초거대 증강지능이 탄생할까?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Harari)는 인간이 AI의 힘을 빌려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호모데우스(Homo Deus)가 탄생할지도 모른다고 예견했다. 호모데우스는 라틴어로 Homo(인간)와 데우스(Deus=God)를 결합한 조어로 ‘신이 된 인간’을 뜻한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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