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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간 심리학 - 미술관에서 찾은 심리학의 색다른 발견
문주 지음 / 믹스커피 / 2025년 9월
평점 :

문주 저자의 『미술관에 간 심리학』은 미술 작품을 통해 인간의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작업,
즉 ‘내 안의 무의식을 만나는 여행’을 아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저자는 자신을 ‘미술치료사’라고 소개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한국 의료법상 ‘치료’라는 용어는 심리·정서 영역에서 자유롭게 쓰기 어렵기 때문에 공식 직함은 ‘미술심리상담사’다. 하지만 그녀가 실제로 하는 일은 단순 상담 그 이상이다. 개인 미술치료 연구소를 운영하며 만난 수많은 내담자와 수강생의 그림 속에서, 말로 다 표현되지 않은 무의식적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들을 목격해 왔다. 사람의 내면에는 이미지로 떠오르는 세계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이미지는 언어보다 더 직접적으로 감정을 말한다는 사실을 그는 반복해서 확인해왔다.
이게 미술치료의 핵심이다. 보통 상담은 언어로 진행된다. 하지만 미술치료에서는 ‘그림’이라는 제3의 매개가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에 놓인다. 이 그림은 방어를 약하게 만들고, 우회적으로 마음을 드러내게 하고, 때로는 스스로도 몰랐던 감정을 깨닫게 만든다. 저자는 이것을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공명성”이라고 부른다. 어떤 감정은 말로 옮기는 순간 이미 달라지지만, 이미지로 나올 때는 굉장히 솔직하고도 생생하다. 그래서 미술치료는 단순한 ‘그림 놀이’가 아니라 무의식에 닿는 하나의 통로다.
책은 이 지점을 심리학 이론과 연결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칼 구스타프 융의 분석심리학은 미술치료의 기반을 이룬다. 융은 예술을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무의식이 상징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예술가가 작품을 만드는 순간은 ‘내가 뭘 그릴지 의식적으로 통제하는 시간’이 아니라, 나보다 더 깊은 힘—개인적 무의식과 집단적 무의식—이 표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그림은 그리는 사람의 인생 전체가 묻어난다.
이 관점은 책의 첫 장 “천재인가, 광인인가?”로 이어진다. 우리는 예술가와 광기(정신질환)를 거의 자동으로 연결해 떠올린다. 반 고흐, 뭉크, 툴루즈-로트렉, 쿠사마 야요이 같은 이름은 너무 유명해서, “예술=고통”이라는 공식처럼 받아들여지기까지 한다. 저자는 그 통념을 흥미롭게 파고든다. 단순히 ‘그들은 아팠다’ 수준이 아니라, “왜 그들의 고통이 그렇게까지 강렬한 작품으로 전환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예를 들어 툴루즈-로트렉은 귀족 집안 출신이었지만 유전적 문제로 150cm 남짓의 왜소한 체격을 가지고 태어났고, 평생 우울과 불안, 편집 증세, 심각한 알코올 의존에 시달렸다. 술에 취해 눈앞에 없는 적에게 총을 겨눴다는 일화는 그의 정신이 얼마나 벼랑 끝에 서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그는 정신병원에까지 입원하게 된다. 그런데 중요한 건 바로 여기에 있다. 로트렉의 삶은 끝없이 무너지고 있었지만, 그의 예술은 그 무너짐을 정확히 기록했다는 것. 그의 캉캉 댄서, 친구이자 뮤즈였던 제인 아브릴의 초상에는 화려한 물랄리가 아니라, 신경질적 긴장감, 사회의 냉혹함, 여성 신체가 상품화되는 장소의 잔혹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단순히 ‘밤의 파리’를 그린 게 아니라, 그 세계에서 사람들의 영혼이 어떻게 닳아 없어지는지를 기록했다. 그의 수백 장의 드로잉과 수천 점에 가까운 작업을 보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정조는 화려함이 아니라 소외, 우울, 권태다. 우리는 그의 그림을 통해 그림 바깥의 인간적 고통을 감지한다.
이것은 에드가 드가에게도 이어진다. 드가는 흔히 발레리나의 화가로 불리지만, 그가 바라본 무대 뒤 현실은 우리가 상상하는 화려한 분홍 발레 의상과 눈부신 스포트라이트의 세계만이 아니었다. 19세기 말 파리 오페라의 무대 뒤, 어린 무용수들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혹독한 훈련과 통제에 놓여 있었고, 부유한 남성들은 그들을 사실상 지배했다. 발레 무대는 예술의 공간인 동시에 권력과 성적 거래의 공간이기도 했다. 드가는 그 불편한 진실을 집요하게 그렸다. 대기실, 리허설, 무대 뒤의 피로한 다리. 준비는 되어 있지만 아직 무대에 오르지 않은 몸들. 그는 무용수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그 아름다움이 어떤 대가 위에 올라서 있는가’를 포착하려 했다. 동시에 드가 자신의 삶도 어둠으로 향하고 있었다. 시력이 망가져 가는 공포, 사회적 편협함, 후기로 갈수록 심해진 고립과 우울. 드가의 발레 장면은 그래서 단순한 미인 찬양이 아니라, 자신과 타인의 취약함을 들여다보는 어두운 자화상처럼 읽힌다.
이 책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신질환과 예술은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가?”를 역사적으로 살핀다. 오래전에는 정신질환이 악령, 마법, 저주로 여겨졌고, 사람들은 두개골에 구멍을 내거나(고대 trephination), 피를 뽑거나, 고문에 가까운 방법으로 치료를 시도했다.
중세 유럽의 일부 병원은 사실상 전시장이었고, 부유층이 정신질환자들을 구경하고 조롱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만큼 인간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태도 자체가 부재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18~19세기에 들어서며 관점이 바뀌기 시작한다. 광기를 단죄할 것이 아니라 치료할 대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몇몇 정신과 의사들은 환자들의 그림을 단순한 증상의 부산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분석 가능한 기록이라고 생각했다. 예컨대 폴 막스-시몽은 환자들의 그림과 글을 체계적으로 모아 분류했고, 조울증(양극성 장애)을 앓는 환자의 상태가 그림의 형식과 에너지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관찰했다. 발터 모르겐타우어는 아돌프 뵐플리라는 환자의 작품을 진지한 예술로 다루며, 그를 환자가 아니라 ‘예술가’라고 불렀다. 이 선언은 이후 ‘아웃사이더 아트’, 즉 제도권 교육 밖에서 나온 예술을 미술사 안에 올려놓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다. 한스 프린츠혼 또한 수천 점의 환자 작업을 수집하고, 그들의 시각 언어를 미술사와 심리학 두 영역 모두에서 의미 있는 자료로 바라보자고 주장했다. 이 흐름은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의 그림 = 병적 낙서”라는 낙인을 깨고, 오히려 인간의 내면 세계를 가장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시각 기록이라는 인식을 만들었다.
즉, 예술이 질환의 증거라는 식의 낙인 대신, 예술을 통해 고통이 ‘언어화’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표현은 곧 생존이다. 이 생각은 프리다 칼로에서 절정에 달한다.
프리다 칼로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다. 소아마비로 약해진 다리, 열여덟에 당한 버스-전차 충돌 사고로 인한 골반·척추·갈비뼈·다리의 복합 골절, 장기 손상, 반복 수술, 만성 통증, 임신 불가능이라는 상실. 그녀는 거의 전신이 부서진 채 침대에 묶여 살아야 했다. 그 속에서 칼로는 붓을 들었다. 그녀에게 그림은 재능 뽐내기가 아니라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선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자신을 끝없이 그렸다. 칼로의 작품 중 자화상이 유난히 많은 이유는, 그만큼 자기 몸과 자기 마음이 전쟁터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자화상들은 단순한 ‘셀카’가 아니다. 가시 목걸이에 목이 조여 피가 흐르고, 검은 원숭이가 어깨에 얹혀 있고, 부활과 재탄생을 상징하는 새나 나비가 주변에 떠다니며, 무너진 몸이 그대로 노출된다. 이건 타자가 그린 ‘아름다운 여성 화가 프리다’가 아니라, 프리다가 스스로에게 들이대는 냉정한 거울이다. 결혼 생활에서 겪었던 배신감, 특히 남편 디에고 리베라의 반복된 바람과 심지어 자기 여동생과의 관계까지 목격했을 때의 무너짐은 ‘짧은 머리의 자화상’ 같은 작품에서 폭발한다. 머리카락을 잘라 바닥에 흩뿌린 모습은 단순한 스타일 변화가 아니다. 여성성으로 규정되어 왔던 정체성(긴 머리, 전통적 여성 이미지)을 스스로 잘라내고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자르는 것은 머리카락이 아니라, 과거의 관계, 순종적인 여자의 역할, 사랑에 속박된 자기 자신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사슴으로 그리기도 한다. 온몸에 화살이 박혀 피 흘리는 사슴. 어디에도 기대지 못한 채 숲에서 방치된 사슴의 얼굴은 바로 칼로 자신의 얼굴이다. 통증은 육체적인 동시에 정서적이다. 이 이미지가 15세기 르네상스의 성 세바스티안 도상과 겹쳐 보인다는 언급은 매우 상징적이다. 세바스티안은 화살 투성이의 순교자고, 칼로는 일상 자체가 순교인 사람이다. 그녀에게 그림은 고통의 증명이자 저항이다. “나는 이렇게 다쳤고, 그렇지만 아직 여기 있다.”
여기까지가 “예술은 마음의 기록”이라는 책의 절반이라면, 후반부는 “우리는 왜 이런 그림들 앞에서 강하게 반응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넘어간다. 저자는 프로이트와 융의 이론을 바탕으로 인간의 무의식 구조를 설명한다.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관리할 수 없는 충동·욕망·분노·불안의 저장고다. 겉으로는 멀쩡한 척할 수 있어도, 이 무의식은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밖으로 나온다. 몸의 증상일 수도 있고, 꿈일 수도 있고, 예술일 수도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 정신을 원초아(충동), 자아(현실 조정자), 초자아(도덕적 감시자)로 설명하면서, 인간은 이 세 힘의 줄다리기 속에서 살아간다고 봤다.
융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무의식을 개인적인 차원(개인 무의식)과 인류 전체가 공유하는 깊은 층(집단 무의식)으로 나눴다. 그리고 이 집단 무의식 안에는 ‘원형(archetype)’이라고 불리는 보편적 상징 패턴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본다. 남성 안에 있는 여성성(아니마), 여성 안에 있는 남성성(아니무스), 어머니상, 현자상 같은 것들이다. 융의 핵심은 “우리는 겉으로만 남성/여성인 게 아니다. 내 안에는 반대 성질을 가진 또 다른 자아가 살고 있다”는 통찰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처음 봤는데도 강하게 끌리거나 강하게 거부감을 느낀다. 실제의 그 사람에게 반응하는 게 아니라, 내 무의식 속 아니마/아니무스를 그 사람에게 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첫눈에 반했다’는 표현 속에는 이런 투사가 겹쳐 있다. 문제는 이 투사가 벗겨지는 순간이다. 흔히 말하는 “콩깍지가 벗겨졌다”라는 순간은 사실 ‘무의식적 투사를 회수하고, 그 사람을 실제의 사람으로 보기 시작한 것’에 가깝다. 이 과정이 잘 지나가면 관계는 성숙해지고, 나 자신도 성장한다. 못 지나가면 파국으로 간다.
책은 여기에 예술가들의 실제 작업을 다시 끌어와서 설명한다. 클림트가 여성의 성을 그리는 방식, 달과 태양 같은 상징이 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지, 그리스 신화 속 달의 여신 셀레네와 잠든 엔디미온의 장면이 왜 수백 년 동안 수많은 화가에게 그려졌는지 등은 모두 “인간은 결국 상징으로 자기 마음을 이야기한다”는 주장과 연결된다. 상징을 이해한다는 건 단순히 ‘해석 잘하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이게 왜 나를 이렇게 흔들지?”를 알아차리는 일이다.
흥미롭게도 이 책의 마지막에 현재 시대로 급격하게 넘어간다. 오늘날 인공지능 화가, 특히 휴머노이드 로봇 ‘아이다(Ai-Da)’ 같은 사례가 등장한다. AI가 그린 그림이 경매에서 엄청난 금액으로 팔리고, 로봇이 창작자로 불리는 시대다. 그럼 인간 예술가는 사라질까? 저자의 대답은 단호하게 “아니다”에 가깝다. 인간의 예술은 완벽함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남겨둔다. 떨리는 선, 지워진 흔적, 망설임, 주저, 상처, 부끄러움, 집착, 의지. 그런 결함 자체가 우리의 마음을 건드린다. 하지만 AI는 너무 완벽하다.
다시 말해, “고통받는 주체로서의 나”가 없다. 결국 우리는 그림을 볼 때 결과물만 보는 게 아니라, 그 결과물을 만든 존재와 그 존재의 시간을 함께 본다.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은 그림 하나가 아니라 그녀라는 사람 전체와 마주하게 만든다. 그 체온을 AI가 대신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정리하면, 『미술관에 간 심리학』은 세 가지를 동시에 보여준다.
첫째, 예술은 고통과 무의식의 언어다.
둘째, 우리가 작품 앞에서 강하게 흔들리는 이유는 그 이미지가 나의 심리와 만나기 때문이고, 그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셋째, 그렇기 때문에 예술은 앞으로도 인간의 몫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예술은 단순히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 내가 살아 있었다라는 증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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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용 중에 언급 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란 말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인다.
예전에는 사람들 대부분이 “우주의 중심은 지구야. 다 우리 주변을 돈다”고 믿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가 “아냐, 지구가 중심이 아니고 태양을 돌고 있어”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의 세계관이 완전히 뒤집혔다. 즉, 내가 중심이라고 믿던 세계가 사실은 아니었다는 충격.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이 바로 그런 역할을 했다. 사람들은 “나는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선택해. 나는 나를 알아”라고 믿었는데, 프로이트는 “사실 너를 움직이는 진짜 힘은 네가 ‘모르는 곳(무의식)’에 있다”고 말한 거다. 즉, 인간은 자기 마음의 주인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마음 깊은 곳의 어둠과 상처, 욕망이 진짜 조종석에 앉아 있었다는 선언.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프로이트의 등장을 “인간 정신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우리가 생각하던 인간의 중심이 통째로 바뀐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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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채손독) @chae_seongmo'를 통해
'믹스커피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미술사에서 우울증을 앓은 화가들은 매우 많다. 그들이 우울했기 때문에 그림을 그렸다기보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에너지로 우울감을 토해냈다고 보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천상의 아름다움과 발레리나의 역동적인 묘사로 오랫동안 우리를 매료시킨 인상주의 화가 에드가 드가도 그 중 하나다. 그의 작품 뒤에 숨어 있는 고통, 슬픔, 집착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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