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로소포스의 책 읽기 - 철학의 숲에서 만난 사유들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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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티노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숲에서 만나는 이들은 다 사유의 친구다. 친구들이 해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궁금해 못 견딜 것 같으면 잠시 조심스레 물어본다. 거기서 들은 이야기를 서둘러 기록한 것들의 모음, (그것은 곧, 책이다.) 이것도 작은 사유의 숲일지 모른다. 숲은 숲을 키운다. 숲은 잠들지 않는다.

- p11, 프롤로그 내용 중


프롤로그 마지막 글이다. 이 문장이 왜 이렇게 웅장하고 뭉클하게 다가오는지.. 괜히 울컥하는 마음.

한 권의 책은 작은 사유의 숲일지 모르지만, 그 책들이 쌓이고 쌓이면 언젠가는 거대한 숲이 된다. 그리고 그 숲은 살아 있는 사유로서 결코 잠들지 않는다. 어쩌면 누군가는 하찮게 여길지도 모를 나의 독서 여정이, 언젠가 그렇게 살아 있는 숲을 이루게 되기를 바라며 책장을 넘겼다.


책을 읽는다는 건 세상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일이자, 낯선 질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음을 키우는 일이다. 내가 누구인지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삶을 잠시 빌려 살아보는 경험이 되기도 한다.


고명섭의 『필로소포스의 책 읽기』는 책을 읽는 일이 그저 지식을 쌓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을 울리는 사유의 여정임을 일러준다. 이 책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오래된 질문을 독서라는 길 위에서 다시 마주하게 한다. 고전은 물론, 영화와 문학, 신화, 생명과학까지 넘나들며, 책 속 문장 하나하나가 삶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창이 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문득 어느 한 구절이 오래 품어온 마음의 결을 건드리는 순간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책의 인상적인 도입부는 두 편의 영화를 통해 ‘반복’이라는 주제를 풀어낸다.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과 빔 벤더스의 《퍼펙트 데이즈》. 두 영화는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을 공유하지만, 하나는 어둠의 되풀이, 다른 하나는 빛의 되풀이를 그린다. 《토리노의 말》은 절망의 반복 속에 갇힌 삶을, 《퍼펙트 데이즈》는 미세한 차이를 품은 반복 속의 조용한 희망을 보여준다. 이 대비는 곧 독서의 구조로 연결된다. 동일한 책을 반복해 읽는 행위 속에서 우리는 삶의 다른 국면과 만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이어 등장하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귀향’이라는 개념을 통해 독서의 본질을 비춘다. 오디세우스가 진짜로 돌아온 증거는 침대다. 살아 있는 올리브나무를 기둥 삼아 만든 침대. 반복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실의 자리. 이 장면은 수없이 반복해 읽는 책 속에서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귀향하는 독서의 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이졸데 카림의 『나르시시즘의 고통』을 인용한 장이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현대 사회가 개인을 어떻게 고립시키고 있는가를 되짚는다. 카림은 신자유주의 사회가 개인에게 끝없는 ‘자기 이상’을 추구하도록 요구하며, 그 과정에서 자발적 복종이라는 형태의 고통이 발생한다고 진단한다. 자유롭고 자율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스스로를 ‘자기 경영’의 대상으로 삼아 끊임없이 성취를 강요받는 주체. 그것이 오늘날의 나르시시즘적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때 등장하는 ‘자아 이상’은, 초자아처럼 외부의 금지 명령이 아닌 ‘무엇이든 해내라’는 내면의 명령이다. 이를 수행하지 못하면 열등감과 수치심에 시달리게 된다. 이 사유는 젠더 정체성의 자기 결정 문제로도 이어진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성적 정체성을 갖고 있는지를 스스로 정의한다는 것은 자유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사회가 요구하는 ‘개성의 극대화’를 충족시키는 방식이기도 하다. 카림은 이 현상이 지배적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더 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경고한다. 결국 “나는 나다”라는 자기 이상은 우리를 고립으로 이끈다. 진정한 관계도, 교류도 없는 채, “깊디깊은 내적 고독” 속에 남겨진 개인들. 그 고통은 나르시시즘 사회의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필로소포스의 책 읽기』는 이러한 사유들을 독서라는 행위 안에서 하나로 모은다. 책 읽기는 단지 문장을 이해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지도를 다시 그리는 일이며 삶을 다시 설계하는 일이기도 하다. 결국 이 책은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넘어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다.


책을 읽는다는 건 결국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누구를 위한 삶인가?

나는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어떤 사유가 나를 붙잡고 흔들고 있는가?


철학책을 좋아하는 사람, 깊이 있는 사유를 즐기는 사람, 좋은 문장을 곱씹으며 오래 생각하고 싶은 사람, 책을 통해 삶의 방향을 다시 묻고 싶은 사람, 그리고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스스로를 돌아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필로소포스의 책 읽기』는 반드시 만나야 할 책이다.

강력히 추천한다.


'우주서평단 @woojoos_story 모집',

'교양인 출판사' 도서 지원으로 우주서평단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이졸데 차림(Isolde Charim)은 『나와 타자들』이라는 저서로 국내에도 이름을 알린 오스트리아의 여성 철학자다. 철학 저술과 언론 활동을 병행하는 차림은 오스트리아의 극우화에 맞서 정치적 저항 운동을 벌이는 실천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나르시시즘의 고통>(2022)은 우리 시대의 현실을 분석하는 카림의 철학적 사유가 번득이는 저작이다. 이 책에서 카림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계가 개인의 나르시시즘적 욕망을 통해 작동함을 밝혀 보인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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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 지음, 야나 렌조바 그림, 이한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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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늘 인간이 중심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나의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불멸의 유전자』를 읽고 나니 그 믿음에 균열이 생긴다. 생명은 유전자의 생존 전략이라는 시각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도 사실은 그 전략을 수행하기 위한 임시적인 생존 기계라는 설명은 낯설고, 때로는 불편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 불편함 속에서 진화에 대한 가장 생생하고 근본적인 질문들을 만나게 된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를 통해 이미 유전자의 주체성을 강조한 바 있다. 『불멸의 유전자』는 그 논리를 더 넓고 깊게 확장한 책이다. 특히 ‘표현형 확장’이라는 개념을 통해, 유전자의 영향력이 단순히 생물의 몸속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새가 만든 둥지, 비버가 만든 댐, 심지어 인간이 만든 예술작품이나 문화까지도 유전자가 환경과 상호작용한 결과물일 수 있다는 시각은 경이롭다. 생명은 더 이상 개별 개체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유전자와 환경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개념은 ‘사자의 유전서(The Genetic Book of the Dead)’였다. 하나의 동물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는 단지 그 개체의 정보가 아니라 그 조상이 어떤 환경에서 살아남았는지를 기록한 기술서라는 것이다. 그 유전체는 마치 겹겹이 쓴 양피지처럼 과거의 환경, 생존 전략, 생물학적 선택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자벌레가 고목을 흉내 내는 능력, 뻐꾸기 새끼가 둥지 안에서 울새에게 먹이를 받아먹는 장면 모두가 그 유전서에 기록된 조상 세계의 설계도인 셈이다.

저자는 여기서 가상의 미래 과학자 ‘SOFT(Scientist Of the Future)’를 종종 언급한다. 이 미래 과학자는 과거 환경을 이해하기 위해 현재 유전체를 분석한다. 각 생물체가 가지고 있는 유전자는 과거 생존에 적합했던 전략들의 기록이며 이는 현재 환경과 연결된 단서가 된다. 지금 눈앞에 있는 동물의 형질 하나하나가 조상 시대의 생존 해법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자연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다.

이 책의 강점은 개념만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진과 그림, 도식이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어, 복잡한 이론도 시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돕는다. 예를 들어 뻐꾸기 새끼가 둥지 안에서 다른 종의 어미 새에게 먹이를 받는 장면은, 이타성과 기생, 본능과 진화가 교차하는 강력한 시각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런 사례들은 머리로만 이해하던 유전자 이론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도킨스는 이 책에서 수렴 진화(convergent evolution) 개념도 강조한다. 서로 전혀 다른 계통의 생물이지만 비슷한 환경에 놓일 경우 유사한 생존 전략을 택하게 된다는 것. 조류의 다양한 부리 형태는 모두 환경에 맞춰 진화한 결과이며, 유전자의 세계가 얼마나 유연하고 적응적인지를 보여준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신경과 혈관, 인대와 뼈의 배치는 단순한 ‘디자인의 결과’가 아니라, 수천만 년의 발생 과정을 통해 형성된 생명의 지도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더 나아가 ‘학습’조차 유전자 수준에서 선택될 수 있다는 내용도 등장한다. 유전자는 뇌가 어떤 것을 더 쉽게 학습하게 만들지, 어떤 정보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만들지를 미리 준비시킬 수 있다. 즉, 생물의 학습 능력조차 진화의 일부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사고하고 선택한다고 믿지만, 어쩌면 그 자유조차 유전자라는 구조물 위에서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나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로 생각하게 된다. 저자는 ‘당신은 득실거리고 뒤섞이며 시간여행을 하는 바이러스들이 빚어낸 위대한 협력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이 책 전체를 압축적으로 설명해주는 구절이라 생각한다. 유전자는 협력하며 복제되고 그 과정에서 생명은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찾아간다.

『불멸의 유전자』는 읽기 쉬운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읽기 쉬운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 장 한 장 곱씹으며 읽다 보면 그 보상은 생각보다 훨씬 크게 다가온다. 생명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고, 나를 둘러싼 자연과 인간, 문명까지도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 책은 그냥 과학책이 아니라, 유전자의 언어로 쓰인 철학이고 생명의 역사이며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이기적 유전자』와 함께 읽는다면, 우리는 이 복잡한 생명의 체계를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수억 년의 생존 전략 위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 유전자의 세계는 경외의 대상으로 다가온다. 이 책을 추천한다면 과학을 좋아하고 자연과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내용이 다소 어려울지라도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 책인 것 같다.

'을유문화사'를 통해 도서 협찬을 받아서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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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의 유전성는 조상이 살던 세계들에 관한 메시지를 동물의 몸과 유전체에 숨긴 팰림프세스트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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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뇌
마수드 후사인 지음, 이한음 옮김 / 까치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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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우리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이 책은 이와 같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흔히 자아를 형성하는 요소로 가정 환경이나 교육, 사회적 배경, 또는 우리가 속한 집단을 떠올린다. 그러나 저자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에 주목한다. 바로 ‘뇌’다. 우리의 자아는 뇌가 만들어낸 하나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지만, 이 책의 저자이자 신경과학자인 마수드 후세인은 묻는다. “생각한다는 건 무엇인가? 그리고 그 생각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는 우리가 사고하고 느끼고 판단하는 모든 과정이 뇌의 특정 기능들이 정교하게 협력한 결과라고 말한다. 우리의 말투, 기억, 감정, 유머 감각, 도덕성까지—그 모든 것은 뇌가 유기적으로 작동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 작동이 멈추거나 어긋나는 순간, 우리는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

이 책에는 언어를 잃어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2장 ‘단어를 떠올리지 못한 남자’ 파트에 있는 부분으로, 우리는 마이클이라는 인물을 만난다. 그는 60대 후반의 지적이고 품위 있는 남성이다. 말하기에 어려움을 겪으며 병원을 찾은 그는, 대화를 하다 말문이 막히는 자신에게 좌절과 당혹을 동시에 느낀다고 털어놓는다. 어릴 적 자신이 잘하던 럭비 경기의 기본 용어인 ‘스크럼’이라는 단어조차 기억해내지 못한다. 그가 겪고 있는 문제는 단순한 건망증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개념화하는 능력, 즉, 의미 기억(semantic memory)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


마이클은 여전히 자신의 과거, 가족, 여행지 같은 일화적 기억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하지만 일상적인 개념, 농담의 맥락, 단어의 의미 같은 지식은 점점 사라져간다. 그의 아내는 “예전의 남편이 아니에요. 유머를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어색해졌어요.”라고 말한다. 마이클은 더 이상 예전처럼 농담을 던지는 사람이 아니고, 친구들 또한 그를 피하기 시작했다. 말과 웃음이 사라지자, 관계도 사라졌다. 결국 그는 ‘의미 치매(Semantic Dementia)’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이는 언어와 개념을 담당하는 뇌 부위가 점진적으로 손상되며 사람의 내면의 사전이 무너지는 병이다.

이 책은 마이클만을 다루지 않는다. 뇌의 손상으로 인해 ‘자신’을 잃어가는 수많은 사례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데이비드는 바닥핵이 손상되어 감정이 거의 사라진 ‘병적인 무관심 상태(아파시)’에 빠졌다. 한때 사랑과 공감을 표현하던 그는 이제 주변의 기쁨이나 슬픔에 무반응한 존재가 되었고, 그의 가족은 정서적 관계의 붕괴를 견뎌야 했다.


트리시는 알츠하이머병으로 일화 기억이 무너져내리는 과정을 겪고 있다. 남편과 나눴던 대화, 가족의 얼굴, 소중한 추억들이 하나둘 지워지면서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과거를 통해 자아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기억이 사라지자 그녀의 존재감도 옅어져갔다.

와히드는 시각 착시에 시달렸다. 신경 손상으로 인해 그는 현실을 오인하고, 주변 사람들을 기이한 방식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의 세상은 더 이상 타인과 공유되지 않았고, 그는 현실과 자신 사이의 경계를 잃어버렸다.

윈스턴은 집중력이 무너진 사례다. 뇌의 주의 조절 기능에 이상이 생기며 일상적인 대화조차 유지하기 힘들어졌고, 사회적 상황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능력이 흐려졌다. 그는 말하자면, 사회의 ‘속도’와 ‘리듬’을 놓쳐버린 사람이었다.

수 라일런드, 이른바 ‘카우걸’은 전두엽 손상 이후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타인에게 해가 되는 말과 행동을 반복하면서도 멈출 수 없었고, 스스로를 조절할 수 없다는 인식은 그녀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사회적 자리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고, 점점 더 외부인으로 밀려났다.


마지막으로 애나는 신체 자기 인식의 상실을 경험한다. 뇌졸중 이후, 그녀는 자신의 팔과 다리가 어디에 있는지 느낄 수 없었고, 심지어 자신의 몸 일부를 타인의 것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몸의 경계가 사라지자,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병리학적 현상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다. 감정, 언어, 기억, 공감, 집중, 충동, 신체 감각—이 모든 뇌 기능들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나’를 구성하는 축이다. 이 중 하나만 어긋나도 우리의 자아는 흔들리고, 사회 속 위치 역시 불안정해진다.

우리가 어떤 집단에 속하는가, 누가 우리를 내부인 혹은 외부인으로 간주하는가는 단지 인종이나 언어, 국적 때문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사회적 기대를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가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자기 자신’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정교하고, 동시에 얼마나 깨지기 쉬운 구조 위에 놓여 있는지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이 책의 저자 또한 외부인의 경험을 몸소 겪었다. 방글라데시 출신의 유색인으로서 영국에 정착해 신경과학자가 된 그는, 억양, 외모, 피부색, 이름 모두에서 ‘다르다’는 시선을 받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어느 집단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다는 실감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뇌와 타인의 뇌, 그리고 그 뇌들이 만들어내는 정체성을 연구하며, 그 질문에 대한 과학적 대답을 찾아간다. 속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언제 ‘우리’이고, 언제 ‘그들’이 되는가.


『아웃사이더』는 결국 자아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뇌의 섬세한 작용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구성되고 해체되는 존재임을 말한다. 우리는 감정이 사라질 수도 있고, 기억을 잃을 수도 있으며, 자신의 몸조차 낯설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는 단지 생물학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나를 정의하고 이해하는 방식마저 뒤흔든다. 자아란 타인의 시선과 기대, 그리고 나 자신의 뇌 작용이 만나는 접점에서 태어난다. 이 책은 우리 모두가 언제든 ‘아웃사이더’가 될 수 있으며, 그 경계에 선 사람들을 이해하고 품는 일이야말로 가장 절실한 공동체적 과제임을,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전하고 있다.


'까치글방 서포터즈 3기' 활동을 통해 '까치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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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일에는 단순한 정보 교환이상이 필요하다. 관계가 즐거워야 하며, 즐겁게 어울리려면 서로가 무엇에 재미를 느끼는지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깔깔거리는 웃음은 사회적 유대에 필수적이며, 더 나아가 우리의 집단 소속감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진화적 구조일 수도 있다. 유머의 공유는 우리에게 사람들과 계속 접속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그러나 그런 유머는 우리가 쓰는 표현들과 관련된 더 폭넓은 의미론을 공통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가능하다. 마이클이 이제 확실히 느끼듯이, 그런 유머를 상실하면 우정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질 수 있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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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같은 방 둘이서 2
서윤후.최다정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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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의 방에서 시간을 보내며 쌓은 감정, 읽고 쓴 책, 지어 먹은 밥 들이 모여 지금과 같은 모양의 나에게로 도착했다. 만약 내가 다른 주소의 방에 살았더라면 지금 나는 다른 표정과 말투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됐을 것이다. 스무 살 이후로 혼자 옮겨 다닌 방들은 시절마다의 언어였다. 단 하루를 묵었든 몇 년을 살았든, 지금까지 머물렀던 각양각색의 방들은 모두 나름의 문장으로 각인되어 삶의 서사에 일부분 기여했다. 한동안 내 집이라고 불렀던 주소로 다시 더듬어 찾아가면 금세 그 방문을 열고 그 시절로 입장하게 된다.

p9. 프롤로그 내용 중

그동안 살아왔던 방들.. 반지하 단칸방, 고시원, 작은집 월세살이를 하면서도 머무르던 공간에서의 삶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면서도 이렇게 서정적이고 낭만으로 표현한 책이 있을까?란 생각을 하며 읽게 된 책


『우리 같은 방』은 한 사람의 방이 아닌 우리 모두의 방에 대한 이야기다.

저마다 다른 공간에서 살아온 우리가 누군가의 방 이야기를 읽으며 울컥하고, 어떤 문장 앞에서 오래 머무는 건 그 방이 나의 기억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방을 넘어 시간이 스며든 장소, 감정이 접힌 구석, 그리고 말하지 못한 기억들이 눌려 있는 자리를 바라보게 만든다.

프롤로그에서 최다정 작가는 ‘방’이라는 단어 하나로 지난 시절의 수많은 장면들을 되짚어낸다. 감정을 쌓고, 책을 읽고, 밥을 해 먹으며 혼자 보낸 그 시간들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고백한다. 방 문을 하나 열었을 뿐인데 그때의 공기, 온기, 분위기가 한꺼번에 떠오르는 느낌?이랄까. 마치 오래된 기억이 그대로 되살아난다. 저자의 말처럼, 한동안 ‘집’이라고 불렀던 공간은 여전히 기억의 문장으로 남아 있다.


그녀는 이사를 앞두고 짐을 정리하며, 지난 방들과 재회한다. 일부러 외면했던 장면들, 서랍 안에 차곡차곡 접어 넣고 덮어두었던 감정들이 다시 고개를 든다. 예쁘게 잘 정리해 떠나지 못했던 어떤 방은 뒤늦게 억지로라도 써보려 할 때, 오히려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방은 곧 내가 살아온 방식 자체였다. 그래서 그 안에 남아 있던 감정이나 기억들을 아무렇게나 지워버릴 수 없었고, 결국은 구석구석 숨어 있던 마음들을 하나씩 마주해야 했다.

이 책은 그런 진심에서 시작되었다. 지나온 방들, 그 방 안의 시간과 감정을 정면으로 들여다보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 용기는 결국 글이 되었고, 그 글은 그 방으로 안내한다. 담담한 문장으로 꺼내 놓는 지난 시간들은 결코 특별하거나 거창하지는 않지만, 솔직하고 조심스러우며 깊다.

“살았던 시절의 우리를 닮은 방에서 우리는 제일 안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

프롤로그의 이 마지막 문장은, 이 책을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말이다. 그 문장처럼 이 책은 누군가의 방을 구경하는 일이 아니라 나의 방을 천천히 열고, 들여다보고, 조심스럽게 정리해 나가는 과정이다.

나 역시도 어떤 방에선 슬픔이 가득했고, 어떤 방은 떠나기 싫어 다시 돌아가고 싶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또 어떤 방은 쉽게 들여다보지 못한 방도 있다. 그 방들에는 아직 말로 꺼내지 못한 감정들이 눌려 있다. 이 책은 그런 마음의 조각들을 부드럽게 건드린다.

“괜찮아요, 그런 방 하나쯤 누구에게나 있어요.” 하고 말하듯이.

최다정 작가는 과거의 자신이 살았던 방들을 차근차근 되짚는다. 그 방은 때론 낯설고, 때론 따뜻하고, 때론 서늘하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방들이 지금의 자신을 만든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다시 바라보며 한 문장씩 꺼내놓을 수 있었던 건, 스스로를 안전하다고 느끼게 해주는 기억이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가 어딘가에서 머무른다는 건, 잠시 그 공간에 머물렀다는 뜻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지냈던 나의 모습, 함께했던 감정, 지나간 계절들이 함께 어우러져 지금의 나를 만든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 같은 방』은 다양한 모습을 따뜻하게 풀어낸다. 한때 집이라 불렀던 공간, 다시 돌아갈 수 없어도 여전히 마음 한쪽에 남아 있는 장소, 그리고 그 방 안에 있던 나를 천천히 꺼내어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꼽으라면, ‘의자’에 관한 묘사였다. 방 안의 의자는 단순한 가구가 아니라, 쉼과 각성을 동시에 품은 존재다.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있던 시간들이야말로 가장 깨어 있었던 시간이라는 것! 저자는 누군가의 생일날 “편하게 앉아 너를 축하할 수 있는 오늘이 되길”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의자 사진을 받았다고 했다. 나 자신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의자같은 존재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책의 문장들은 조용하다. 크게 말하지 않지만 멀리 퍼진다.

아마도 그것은 이 글이 누군가를 위로하려고 쓰인 글이기보다는 스스로를 솔직하게 꺼내 보이기 위해 쓰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더욱 진심이 전해지고, 그래서 더욱 읽는 사람의 마음에 오래 남는다.


『우리 같은 방』은 결국 방에 대한 이야기이자 나를 이해하고 껴안는 이야기다.

혼자만의 방에서 보낸 시간, 다시 돌아가기 어려운 방, 여전히 마음속 한 켠에 자리 잡은 방. 그 모든 방은 우리의 일부였고, 우리가 잠시 머물렀던 세계였다. 마음속 방 하나를 아직 닫아두고 있다면, 이 책이 그 문을 여는 첫 열쇠가 되어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 방을 떠나든, 다시 들여다보든, 어쩌면 더 단단한 마음으로 오늘의 방에 머물 수 있게 될 것 같다.




월마다 정해진 날짜에 값을 치르면 최대 2년간은 내 방이라 부를 수 있는 보금자리가 생겼다. 혼자인 도시에서 세를 내고 잠시 빌린 방들을 전전해 오며 여태껏 나를 무사히 지켰다. 들어갈 때보다 한뼘이라도 더 자란 모습으로 나올 때면, 어느새 방은 지나온 시절의 대명사가 되어 있었다.
얼마 전에도 이사를 했다. 또 한 마디 시절의 문을 닫고 월셋집을 떠나면서 눈에 밟혀 자꾸 돌아보았던 건 책을 읽고 글을 썼던 나의 공부방이다. 작은 옷방, 부엌, 화장실이 딸린 집에서 사는 동안 이 공부방에 제일 깊은 자국을 남겼다. 언젠가 마침내 떠나게 될 방이란 걸 늘 염두에 두고 살았지만, 이 방이 영원히 내 방이길 바란 적이 많았다. 여러 낮과 밤의 나를 안아 주고 덮어 주었던 고마운 방과 헤어지며, 이 공간의 새로운 세입자에게 내 방이었던 방을 살뜰히 사용하는 비법을 남겨 둔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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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낙원에서 만나자 - 이 계절을 함께 건너는 당신에게
하태완 지음 / 북로망스 / 2025년 5월
평점 :
품절


마음이 힘들고 외로울 때, 곁에서 위로해줄 사람 하나 없어서 서글프고 공허할 때 마음을 토탁여줄 위로 에세이!
어설픈 몇명보다 글 한자, 한 문장이 더 위로가 되는 순간이 있다. 바로 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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