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 (15주년 특별기념판) - 사람을 얻는 마법의 대화 기술 56
샘 혼 지음, 이상원 옮김 / 갈매나무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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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혼의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은 갈등을 부추기는 언어 습관을 벗어나, 상대와 협력하고 스스로를 지키는 말하기의 기술을 알려주는 책이다. 쿵후(Kung Fu)가 육체적 공격을 받아내고 흘려보내는 무술이라면, 저자가 말하는 텅후(Tongue Fu)는 정신적·언어적 공격에 대응하는 지혜로운 커뮤니케이션 방식이다. 이 책은 단순히 ‘말을 예쁘게 하는 법’을 넘어, 나와 상대를 모두 지키는 성숙한 대화법의 철학을 제시한다.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언어적 실수를 짚고, 그것이 얼마나 쉽게 사람 사이에 벽을 쌓는지를 보여준다. 무례한 말을 들었을 때, 본능적으로 반격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럴수록 감정의 고리는 더 깊은 적대감으로 이어지기 쉽다. 이 책은 그런 순간에 ‘즉각 반응’ 대신 ‘한 박자 멈춤’을 권한다. 특히 “공감은 성숙의 가장 좋은 지표다”라는 문장은 책의 핵심 정신을 잘 드러낸다. 상대의 말과 행동이 이해되지 않을 때, ‘나라면 어땠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되묻는 것만으로도 적의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 공감의 질문은 갈등을 단순히 피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맥락을 이해하고 내 감정까지 지키는 가장 강력한 기술로 작용한다.

책은 또한 ‘말을 삼키는 기술’에 대해 강조한다.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에 상처받았을 때, 즉각적으로 되받아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추고 스스로를 추스르는 힘이야말로 진짜 지혜라는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남긴 말처럼, “그 순간 꿀꺽 말을 삼켜버려라.” 그 말이 언젠가 되돌아와 내게 상처를 줄 수 있다면, 지금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낫다. 침묵은 때때로 말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며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게 해준다.

또한 이 책은 대화에서 자주 사용되는 작은 단어 하나—‘하지만’—이 얼마나 많은 논쟁을 낳는지를 보여준다. “좋은 아이디어야, 하지만…”이라는 문장은 앞의 칭찬을 무효화시키며 상대를 방어적으로 만든다. 반면 “좋은 아이디어야, 그리고…”라고 바꾸는 것만으로도 대화의 온도는 달라진다. ‘그리고’는 반박이 아닌 연결을 만들어낸다. 사소한 단어 하나가 분위기를 바꾸고, 사람의 마음을 여닫는다는 사실은 대화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은 실수한 상대에게 어떻게 말할지, 나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면서도 상대를 존중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그리고 불편한 상황에서 어떻게 협상을 이끌 수 있을지를 하나하나 짚어준다. “인간의 뇌는 부정형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처럼, 부정적인 지시보다 긍정적인 요청이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도 인상 깊다. “지각하지 마세요” 대신 “9시에 자리에 앉아주세요”라고 말하면, 듣는 사람의 행동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결국 ‘말의 목적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얻는 데 있다’는 점이다. 심술궂은 사람, 무례한 사람, 까다로운 상대는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그들이 내 감정을 빼앗도록 내버려둘 필요는 없다. 내가 어떤 말투와 태도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관계는 적으로 끝날 수도 있고 동료로 이어질 수도 있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듣는 법’에 대한 장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말할 기회를 찾기에만 급급해 듣는 데에는 인색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당신의 귀를 원한다”는 저자의 말처럼, 귀 기울이는 자세는 때로 말보다 더 큰 위로와 설득이 된다. 제대로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화난 사람의 목소리가 낮아지고, 문제의 본질이 드러난다.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은 결국 대화가 감정을 주고받는 행위임을 상기시킨다. 아무리 좋은 논리도 감정이 무너지면 전달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말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이며 그 태도는 곧 내 삶의 반경을 바꾼다. 상대를 이기기보다 이해하고 연결하는 말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적을 만들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이 책은 그런 말의 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나침반이 되어준다.

말로 관계를 망친 적 있는 사람, 대화 앞에서 자주 불편했던 사람,

그리고 더 나은 말 습관을 갖고 싶은 모든 이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말은 칼이 될 수도 있지만 다리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친절하고 실전적인 언어로 가르쳐준다.

이 책은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겪는 수많은 상황들을 예시로 들기 때문에 깊은 공감을 자아낸다. 갈등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조언이 가득해, 실전에서 곧바로 활용할 수 있는 점이 큰 장점이다. 실용성이 뛰어난 책인 만큼,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어 다시 읽으며 활용한다면 더욱 유용할 것이다.

'북피티 @book_withppt'님의 서평 모집단을 통해 

'갈매나무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도서제공 #북피티 인스타 @book_withp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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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를 휘두르며 관계를 만들 수는 없다.
- 무명씨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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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나
루퍼트 스파이라 지음, 주잔나 첼레이 그림, 김주환 옮김 / 퍼블리온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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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나야.”

짧게 반복되는 이 문장이 생각보다 깊은 울림을 주어서 놀랐던 책이 여기에 있다.

루퍼트 스파이라의 그림책 『나는 언제나 나는』을 부모가 아이에게 읽어주다가 문득 나 자신이 위로 받게 되는 책이 아닐까 싶다. 나 역시 슬플 때도, 기쁠 때도, 실수했을 때도, 누군가에게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도 있었다. 그 모든 순간에 과연 나는 나였을까?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감정과 역할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았을까?

“나는 언제나 나야”라는 말은 그렇게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문장이었다.

이 책은 명상가 루퍼트 스파이라가 어린이를 위해 쓴 동화책이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단순한 그림책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에 대한 깊은 철학적 질문을 담고 있다. 스파이라는 “나는 존재한다(I am)”는 사실 자체를 중심에 두고, 어떤 감정이나 상황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짜 나’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이가 화가 나든, 외롭든, 기쁘든, 그 감정은 모두 지나가는 것이고, 그 모든 것을 경험하는 ‘나’는 여전히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을 부드럽고 반복적인 문장으로 보여준다.

이 책은 아이에게 조용히 말해준다.

“너는 언제나 너야. 어떤 감정을 느끼든, 어떤 상황에 있든, 그건 너의 일부일 뿐이지, 너의 전부는 아니야.”

이 메시지는 비단 아이에게만 필요한 말이 아니다.

어른인 우리도 종종 ‘나’라는 존재를 감정이나 평가, 사회적 역할에 묶어두고 살아간다.

“나는 엄마야”, “나는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야”, “나는 실패했어” 같은 말들이 어느새 자아를 규정하는 이름표가 된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이름표를 조용히 떼어내며 그 너머에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나 자신을 다시 만나게 해준다.

책은 반복적이고 단순한 문장, 따뜻한 색감의 부드러운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슬퍼, 그래도 나는 나야”, “나는 놀고 있어, 그리고 나는 여전히 나야”처럼 감정과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그 모든 것을 경험하고 바라보는 변하지 않는 나를 강조한다. 이는 명상에서 말하는 ‘알아차림(awareness)’의 감각을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전달해주는 방식이다.

감정이 흘러도 그 감정을 인식하는 존재는 늘 그대로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옮긴이 김주환은 이 책을 스파이라의 철학서 『알아차림에 대한 알아차림』과 『사물의 투명성』의 핵심을 아이들의 눈높이로 옮겨온 작업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이 책이 단순히 철학을 쉽게 풀어낸 책이 아니라, 아이가 자신의 내면을 안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정서적 안식처가 되어주는 책이라고 말한다. 반복되는 문장을 통해 아이는 감정과 자아를 구별하는 능력을 키우고, 점차 자신 안에 변하지 않는 ‘존재의 중심’을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된다.

이 책을 읽을 때는 반드시 아이와 함께 읽는 것이 좋다.

중요한 건, 책의 내용을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느끼는 것’이다.

부모나 교사가 아이 옆에 조용히 앉아, 천천히, 따뜻한 목소리로 한 문장 한 문장 읽어주는 시간 자체가 이 책의 핵심이다. 그 시간 속에서 아이는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집중하고, 감정에 대해 말하며, 결국에는 ‘나는 언제나 나’라는 말의 의미를 조금씩 체험하게 된다.

책을 다 읽은 뒤에는 간단한 질문을 건네보자.

“너는 언제 외로워?”, “화가 나면 어떤 느낌이 들어?”, “그럴 때도 너는 너 같아?”

이런 질문은 아이로 하여금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관찰하게 하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존재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감각을 키워준다.

또한 아이가 그림을 그리거나, 몸으로 표현하거나, 자신만의 언어로 감정을 풀어내는 활동으로 확장해도 좋다. 중요한 건 아이의 반응을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태도다.

『나는 언제나 나는』은 한 번 읽고 덮는 책이 아니다. 아이가 마음이 복잡할 때마다 다시 꺼내 읽을 수 있도록, 가까운 자리에 두는 것이 좋다. 반복해서 읽을수록 책 속 문장 하나하나가 아이의 마음 깊숙이 닿게 된다. 그리고 그 문장들은 아이가 살아가면서 겪게 될 수많은 감정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내면의 힘이 되어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지금 여기’ 함께 있는 시간이다. 책을 읽는 동안 아이 옆에 함께 앉아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부모나 교사의 존재는 그 자체로 아이에게 ‘나는 지금 이 순간 존재한다’는 감각을 가르쳐준다. 말보다 더 깊게, 존재 자체로 느끼게 되는 평화. 그것이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나는 언제나 나는』은 아이에게 ‘마음의 면역력’을 길러주는 책이다.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존재의 본질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능력. 이 힘은 아이가 앞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든든한 내면의 기반이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아주 작고 조용한 순간, 엄마 아빠와 함께 이 책을 읽는 그 순간이다.

“기뻐도 나는 나고, 슬퍼도 나는 나야.”

그 말을 아이도, 어른도 함께 되뇔 수 있다면, 이 책은 우리 모두에게 깊은 위로와 용기와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다.


'퍼블리온 서포터즈 2기' 활동을 통해 도서 협찬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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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모든 새벽의 앞
마미야 가이 지음, 최고은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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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모든 새벽의 앞』을 읽고 있으면, 너무 고요해서 삭막하기까지한 어느 시골 공간에 홀로 남겨진 기계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느낌이 든다. 책을 읽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문장을 만나게 된다. “ㄱㄱ팔이라 저리지 않아서 좋습니다.”라는 뜻밖의 표현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문장 사이에는 ( )라는 빈칸이 수도 없이 등장한다. 소설이라는 형식 안에 이런 파격적인 문장 구조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형화된 문장이 아니라서 그런지 의외로 신선하고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리고 처음에 언급했던 ‘ㄱㄱ팔’은 ‘기계팔’을 뜻한다고 한다. ‘기계’라고 쓰는 것도 귀찮아서 줄여 썼다는 설명까지 읽고 나면, 이런 디스토피아적인 삶 속에서도 인간적인 농담만큼은 잃지 않았구나 싶다.

괜히 다행이라는 기분까지 들었다.

주인공은 25살에 ‘융합수술’을 받는다. 이 수술로 인해 몸의 거의 모든 부분이 기계화되고, 그녀는 늙지 않는 몸을 얻게 된다. 영생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지만, 삶은 전혀 가볍지 않다. 엄마는 너무 어릴 때 돌아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아빠, 고 오빠, 마리 언니, 사야 언니, 그리고 연인이자 조카였던 신에 대한 기억은 또렷하다. 문제는, 그들이 이제 모두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오직 그녀만이, 백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살아남아 있다. 말할 상대도, 반응해줄 존재도 없는 고립 속에서, 그녀는 더 깊은 외로움과 마주한다.

소설은 2013년 10월 1일, 규슈 지방의 산속, 더는 아무도 살지 않는 장소에서 시작된다. 그곳에서 그녀는 가족사를 기록하기 시작한다. 말을 더 좋아했지만, 신이 곁을 떠난 이후로는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없어 기록으로 대신한다. “심심한데 어쩌지, 하고 난감해하고 있을 때 가족사가 떠올랐습니다.”라는 말처럼, 이 소설은 심심함을 견디기 위한 기록이자, 존재의 흔적을 되짚는 고독한 독백이다.

놀랍게도 그녀는 한때 자살을 원했다. ‘자발적 방조 자살법에 기초한 안락사 조치’, 일명 ‘자살 조치’가 제도화되었을 때, 그녀는 전용 기계를 통해 조용히 죽고 싶다고 아버지에게 털어놓는다. 그때 아버지는 부엌에서 식칼을 들고 오며 절규한다. “정 죽겠다면 내 손으로 널 죽이고 아빠도 죽겠다.” 치매가 오기 전,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감정 폭발이었다. 그 장면은 소설 내내 반복되는 회상의 중심축이 된다. 그녀가 살아남기로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전환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살아남는다. 융합수술을 통해 기계의 육체를 얻고, 생을 연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생존일 뿐이다. “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생각하고 사고하는 뇌는 조금씩 늙어가고 있는 걸까요.”라는 문장처럼, 몸은 기계가 되어도 생각하고 느끼는 마음은 여전히 인간의 것이다. 감각은 계속되고, 기억은 잊히지 않는다.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은 해바라기에 대한 이야기다. 신이 40년 넘게 키워온 해바라기를 보며 그녀는 무덤덤하게 “까만 가운데 부분이 울퉁불퉁해서 무섭다”고 말한다. 기계 몸을 가진 존재가 식물의 한가운데를 무서워한다는 점이 묘하게 인간적이다. 게다가 이 세계는 더 이상 우리가 아는 세상이 아니다. “일본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계절이 없어지고 계속 여름 같은 날씨가 계속돼서…” 벚꽃은 피지 않고, 해바라기 같은 꽃만이 피어난다. 기후, 문명, 사람의 감정마저도 흐릿해진 세계. 그곳에서 그녀는 익숙한 슬픔과 함께 덧없고 고독한 삶을 살아간다.

이 책은 SF 장르의 외형을 띠고 있지만, 그 안에는 지극히 인간적인 이야기들이 촘촘히 담겨 있다. “재능이란 노력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이다.” 확실한 보상이 없더라도 계속해나가는 끈기, 바로 그것이 진짜 재능이라는 구절은 오래 마음에 남는다. 그녀에게도 그런 지속의 힘이 있었고, 그것이 지금 이 순간까지 그녀를 살아 있게 한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이 책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미래의 일본, 주인공은 융합수술을 통해 기계의 몸을 얻는다. 가족은 모두 죽었고, 유일하게 함께했던 연인이자 조카였던 신마저 세상을 떠난다. 규슈의 외딴 산속, 더 이상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가 된 그녀는, 과거를 더듬고 기억을 붙잡으며 ‘가족사’를 써 내려간다. 이 책은 그런 주인공의 독백과 기억, 그리고 잊히지 않는 감정들에 대한 기록이다.

『여기는 모든 새벽의 앞』은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는 삶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 삶은 희망이나 구원이 아닌, 기억과 외로움으로 채워진 긴 새벽이다. 새벽은 낮이 아닌 밤의 끝이지만, 빛이 오기 직전 가장 어두운 시간이다. 제목처럼 이 책은 그 어둠을 견디는 이야기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살아남은 자가 느끼는 ‘심심함’이었다. 아무도 곁에 없어 너무 오래 혼자 있다 보니, “심심하다”는 그 고백. 그것은 기계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인간적인 외로움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는다. 그 말 한마디에 그녀가 얼마나 긴 시간을 견뎠는지, 얼마나 많은 기억을 안고 살아왔는지가 담겨 있다.

이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반전들이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마치 정제된 농축액처럼 밀도 높은 서사와 사유의 시간을 제공한다. 처음엔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던 인물이 후반부에 이르러 알고 보니 끔찍한 인간이었다는 반전도 있고, 반대로 어떤 인물은 의외의 진심을 품고 있었음을 알게 되기도 한다. 인간 군상의 복잡함, 누군가의 기억에 남겨진 ‘진실’의 형태란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지를 뼈아프게 느끼게 된다.

이 책은 기술이 아닌 사람을, 미래가 아닌 과거를, 기계가 아닌 감정을 이야기한다. 그런 점에서 『여기는 모든 새벽의 앞』은 SF라는 장르의 경계를 뛰어넘는다. 고요하고 쓸쓸하지만, 동시에 날카롭고 섬세한 생의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살아남은 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누구에게도 들려줄 수 없는 이야기를 품은 채, 우리 각자는 자신만의 새벽 앞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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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책방'의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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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이란 노력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이다.
무언가에 도전했을 때 확실한 보상을 받는다면 누구나 반드시 도전할 것이다.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도 똑같은 열정과 기력, 동기를 가지고 계속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며, 나는 그것이야말로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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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켜야 할 한국사 - 서경덕과 전문가들이 들려주는 살아있는 역사 이야기
서경덕과 분야별 전문가 지음 / 허들링북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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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여행을 처음 떠났던 대학 시절, 서경덕 저자는 끊임없이 “중국인이냐, 일본인이냐”는 질문을 받아야 했다. ‘한국인’이라는 존재가 서양인들에게 얼마나 생소했는지를 실감한 그 순간이, 지금의 ‘대한민국 알리기’ 활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우리가 지켜야 할 한국사』는 그 출발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이어 받아, 단순한 역사 지식의 나열을 넘어 우리가 ‘지금 왜, 어떤 방식으로 역사와 문화를 지켜야 하는가’를 설득력 있게 전하는 책이다.

이 책은 독도, 위안부, 강제동원, 동북공정, 한복, 김치, 한류 등 현재진행형 역사·문화 논쟁 10가지를 다룬다. 각 주제는 단순히 ‘우리 것이 맞다’는 주장에 머무르지 않고, 왜곡의 본질이 무엇이며,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짚는다. 서경덕은 말한다. 이제는 우리 문화를 알리는 일에만 힘쓸 것이 아니라, 왜곡과 침탈로부터 지켜내는 일에도 집중해야 한다고.

독도 편에서는 ‘왜 독도가 한국 땅인가’라는 질문에 가장 본질적인 대답을 건넨다.

“독도에는 한국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도는 단순한 암석 섬이 아니라, 사람이 살고, 우체통이 설치되어 있으며, 경비대와 등대관리인이 교대로 근무하는 대한민국의 영토다. 1954년 처음 설치된 등대와 경비대 건물은 지금까지 수차례 개축되어, 우리나라의 동쪽 끝을 지키는 상징이 되어 있다. 특히 동도에는 주민 숙소, 태양광 발전기, 해수 담수화 시설, 119 구조대까지 마련되어 있어 독도가 생명의 터전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처럼 실질적 지배를 기반으로 한 주권의 존재는, 일본이 독도를 ‘분쟁지역화’하려는 의도를 거부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기도 하다.

가장 분노를 자아낸 부분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였다.

이 책은 위안부를 단지 ‘피해자’로 기술하지 않는다. 수요시위를 통해 당당하게 목소리를 낸 여성 인권운동가들의 얼굴을 기억하게 하고, 그들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진실의 무게를 우리에게 건넨다.

특히 2025년 기준 생존자 단 6명이라는 현실은 시간이 많지 않음을 일깨운다.

그리고 나는 책 속 한 문장에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군인 전용 위안소를 ‘공동 변소’라 표현한 일본군의 보고서.”

사람을 변소에 비유하다니, 어떻게 이런 표현을 사용할 수 있는가? 이 문장은 일본 제국주의가 위안부 피해자들을 인간이 아닌, 군수품처럼 다뤘음을 보여주는 끔찍한 증거였다.

참고로 ‘위안부’라는 단어 역시 일본이 붙인 명칭이다. 그들은 ’위안(慰安)’이라는 단어로 자신들의 전쟁 범죄를 감추려 했고, 한국에서는 이 용어 대신 ‘일본군 성노예’ 또는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위안부’라는 용어가 피해의 본질을 희석한다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 왜곡, 특히 동북공정에 대한 설명도 매우 중요하게 다뤄진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 국가 차원에서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고구려, 발해, 고조선 등 한반도 북방의 고대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학술 연구가 아니었다. 중국사회과학원이 주도하고, 중앙 정부가 지원한 이 작업은 고의적 역사 침탈이었다. 고구려는 한국사의 정체성과 연결되는 핵심 고대국가이고, 발해는 신라와 대등하게 공존했던 독자적 국가임에도, 동북공정은 이를 중국 내 소수민족의 지방정권으로 축소한다.

서경덕은 이러한 문제를 단순한 민족주의 감정이 아니라, 국제적 여론전에서 대응 전략이 필요한 일로 바라본다. 일본은 독도를 분쟁 지역화해 동해에서의 군사·경제적 이득을 확보하려 하고, 중국은 ‘중화주의 역사관’ 아래에서 한복과 김치마저 자신들의 것이라 주장한다. 한류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이들 주변국의 역사 왜곡은 더욱 교묘하고 치밀해진다. 때문에 저자는 우리가 “한국을 알리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확한 역사 인식과 문화 주권 수호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책은 단지 분노나 감정에 호소하는 책이 아니다. 독자가 스스로 판단하고 근거를 들어 말할 수 있도록 풍부한 자료, 국제사례, 법적 논거, 실증적 통계를 바탕으로 정리되어 있다. 또한 독도, 위안부, 동북공정 같은 주제 외에도 김치와 한복, 한글과 한국어 등 문화 정체성과 관련된 항목도 다뤄, 한류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가 꼭 읽어야 할 내용을 충실히 담았다.

『우리가 지켜야 할 한국사』는 과거의 역사를 되짚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지켜야 할 미래의 문화와 정체성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를 묻는 책이다. 이 책을 덮고 나면, 누군가 “왜 한국이 그렇게 중요하냐”고 물었을 때, 우리는 “우리는 지켜야 할 것을 잊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지켜야 할 한국사의 진짜 이유다.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채손독) @chae_seongmo'를 통해

'허들링북스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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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류병(성병)의 적극적인 예방법>이라는 보고서에서 상하이와 난징 지역 병사들의 높은 성병 감염률을 지적하며, 성병 예방을 위해 군인 전용 위안소 설치를 주장했다. 그는 보고서에서 위안소를 ‘군인들의 공동 변소’라고 표현했는데, 일본군의 ‘위안부’ 피해자를 어떻게 취급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창부의 질은 연령이 어릴수록 양호하다. 군인은 군용 위안소를 이용해야 한다. 군인이 매독에 걸리는 것은 전력이 소비되는 것과 동일한 결과를 초래한다. 또한 군인이 술집에 가서 음주를 하게 되면 화류병을 증가하므로 군대 내에서 술의 소비를 최소한도로 해아 한다. 군용 특수 위안소는 향락의 장소가 아니며, 위생적인 공동 변소이기 때문에 변소에서 술을 팔지 않는 것과 같이 주류를 금지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화류병(성병)의 적극적인 예방법』中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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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지 않아도 잘 지냅니다
김민지 지음 / 샘터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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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번쯤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에 잠긴다.

반짝임이 없으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세상에서,

빛나지 않아도 나답게 살아간다는 건 얼마나 큰 용기일까?

김민지의 에세이 『반짝이지 않아도 잘 지냅니다』는 바로 그런 질문에 조용하지만 확고한 목소리로 답을 건네는 책이다. 화려한 방송국을 떠나 일상의 속도를 새롭게 정비한 그녀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꾸려가며, 무엇을 위해 사는지에 대한 질문에 정직하게 응답해 나간다.

책 속에는 그녀가 겪은 수많은 도전과 선택의 순간들이 차곡차곡 담겨 있다.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 보낸 3년은 단순히 시험을 준비하는 시간이 아니었다. 그 시간 동안 그녀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세상을 더 넓게 바라보게 되었다. “이상한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대체로는 괜찮고, 더러는 아주아주 좋은 사람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마음만 열면 누구에게서든 배울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시험을 준비하며 셀 수 없이 많은 질문을 받았지만 그 답은 결국 자신 안에 있었다.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아나옹서(아나운서)”가 되겠다 외치던 순간부터 현장에서 생방송으로 인터뷰를 진행하던 시간까지 그녀가 지나온 모든 경험들이 자신만의 답이 되어주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삶이 늘 당당하고 명확했던 건 아니다.

낯선 곳에서 혼자 돌아다닐 수 있을까 망설이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처음 가보는 동네를 혼자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정의하자 오히려 더 많은 것을 해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겁을 줄이고 용기를 키우면서, 그녀는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했다. 그런 자신이 꽤 괜찮다고 느꼈고, 그렇게 자신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갔다.

그러나 몸은 쉽게 속일 수 없었다. 면역력이 바닥까지 떨어져 대상포진이 찾아왔을 때, 그녀는 비로소 삶의 속도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맡겨진 일이, 그 소명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줄 알았지만, 결국에는 삶 자체가 가장 소중하고 의미 있다는 것”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마치 치르치르와 미치르가 끝없는 여정을 마치고 나서야 방 안의 파랑새를 발견한 것처럼,

나의 인생도 그 자체로 충분히 소중하다는 자각이었다.

이 책에는 엄마로서의 시선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열 손가락이 다 똑같지 않듯, 아이들도 각자 다른 통증과 어려움을 안고 살아간다.

그녀는 “너희가 비록 똑같은 모습으로 태어나진 않았어도, 각자 필요한 걸 나름대로 잘 가지고 이 세상에 왔다고. 엄마는 할 일을 다 했다고.” 아이들을 향한 믿음은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위로일지도 모른다.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그녀는 점점 더 큰 시야로 세상을 바라본다.

우주를 바라보며 인간이 얼마나 작고도 용감한 존재인지를 생각한다. “우주는 끝이 없고 우리는 유한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인간은 꿈을 꾼다.” 그렇게 무모함으로라도 계속 도전하고, 다시 한 번 사랑하고, 다시 걸어 나아가는 존재야말로 진짜 강한 존재라고 믿는다. 그녀가 말하는 진짜 힘은, 바로 ‘좋아하는 마음’이다. 그것은 별처럼 작고 빛나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된다.

해외에서 외지인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도 그녀는 “있는 듯 없는 듯 묻혀서 지내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한 번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냈을 때, 스스로의 존재가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우리가 아니면 아무도 우리를 대신해 주지 않는다.” 그녀는 이제, 자신을 대표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저자의 문장은 거창하지 않지만 그 안에는 오랜 시간 삶을 곱씹으며 얻은 진심이 묻어난다.

언니가 있어서 기대어 울 수 있었던 순간을 떠올리며, 정작 언니는 어디에 기대었을까를 생각하는 장면에서는 울컥 눈물이 나려고 했다. 과연 세상의 모든 언니들은 의지하고 싶은 순간을 어떻게 버텨냈을까?

언니를 두고 있는 입장에서 공감이 많이 가는 문장이기도 했다.

아들러의 이론처럼 출생 순서도, 꼬리를 자르고 달아나는 도마뱀의 결심도 모두 삶의 무게와 연결되어 있다. 결국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견디고 회복하며 자기만의 속도로 살아간다.

이 책은 화려하지 않아도 단단한 삶을 꿈꾸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한 권이다.

위로가 필요할 때 조용히 마음을 다독이고 싶을 때, 이 책을 펼쳐보면 좋겠다.

반짝이지 않아도 나는 내 삶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주는 문장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용기를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우리처럼 작은 존재가 이 우주의 광대함을 견디는 방법은, 결국 사랑뿐이라는 사실을 이야기 해주는 것 같다.


'샘터 출판사'의 물방울 서평단 활동을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그 3년은 나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그토록 염원하던 ‘다양한’ 사람을 만나 보았고 그리하여 배우게 되었다. 이상한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대체로는 괜찮고, 더러는 아주아주 좋은 사람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배우려는 마음만 있다면 그 모두에게서 얻을 것이 있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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