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아이네이스 1~3 세트 - 전3권 아이네이스
베르길리우스 지음, 김남우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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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네이스』는 나라의 탄생이 사랑과 희생 위에 세워졌음을 보여준다.”

고전은 왜 지금 읽을 가치가 있을까?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펼치면 답이 선명해진다.

이 작품은 한 영웅이 도시를 세우는 신나는 모험 이야기가 아니라,

나라의 전설이 한 사람의 마음과 선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들려주는 이야기다.

흥미로운 점은, 서구 비평사에서도 이 작품을 새롭게 읽기 시작한 시점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역자 해설에 따르면 서구에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재평가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였다. 이전에는 호메로스의 모방으로 폄하됐지만, 이제는 ‘단순한 모방 이상의 일’로 본다.

그리고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영웅 아이네아스를 중심으로 읽는 해석이 과연 타당한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오비디우스가 시도한 디도의 시점은 베르길리우스의 의도를 분명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렇게 시선을 전환하면, 『아이네이스』는 단순한 영웅담이 아니라 한 사건을 어떤 인물의 시선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일깨우는 작품임을 알게 된다.

이 번역본은 라틴어 원전의 12권을 4권씩 묶어 총 3책으로 완역한 열린책들 판본이다.

역자는 라틴 서사시의 헥사미터 운율을 우리말에서도 최대한 살리기 위해 한 줄 18자 내외로 옮겼다.

우리말 어순에 맞추면서도 원문의 어휘·구성·시행 순서를 최대한 보존하려는 노력이 곳곳에 배어 있다. 인물·지명·신화 설명과 원문 행 번호, 촘촘한 주석이 함께 실려 있어, 원전을 처음 접하는 독자도 길을 잃지 않고 따라갈 수 있다.

작품의 작가 베르길리우스는 기원전 70년 만투아 근교에서 태어나, 『목동가』와 『농경가』로 이름을 알린 후 마지막 11년을 『아이네이스』 집필에 바쳤다. 그러나 기원전 19년, 작품의 무대를 직접 답사하려 떠난 여행에서 병을 얻어 브룬디시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미완성 원고를 불태워 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뜻으로 친구 바리우스와 투카가 편집만 마친 채 지금까지 전해졌다. 그래서 작품 곳곳에는 사건의 흐름에 비해 길거나 미묘하게 이질적인 부분들이 남아 있는데, 이는 결함이라기보다 완성을 향해 치열하게 공사 중이던 흔적으로 보는 편이 맞다.

1권 (원전 1~4권)

이야기는 유노의 질투가 부른 폭풍 속에서 시작된다. 난파한 아이네아스 일행은 카르타고에 표착하고, 여왕 디도의 환대를 받는다. 그는 불타는 트로이에서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를 회상한다. 목마 속임수, 라오쿤의 경고, 프리아모스의 죽음, 그리고 “아버지를 어깨에 메고 아들의 손을 잡은 채” 떠나는 장면은 이 서사의 정서를 단번에 압축한다. 이어지는 여정에서 그들은 폴리도로스의 음산한 표징, 잘못 해석한 신탁, 예언자들의 경고와 불길한 예언을 거쳐 시칠리아로 향한다. 4권에서 서사는 가장 비극적인 고비를 맞는다. 유노와 베누스가 꾸민 함정 속에서 아이네아스와 디도는 사랑에 빠지고, 디도는 그 관계를 혼인으로 믿는다. 그러나 아이네아스는 “로마의 운명이 나를 부른다”며 떠나고, 디도는 절망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장면은 국가적 소명과 개인의 사랑이 어떻게 양립할 수 없는지를 보여 준다.

2권 (원전 5~8권)

시칠리아에서 아이네아스는 부친 앙키세스의 1주기를 기리는 장례 경기를 연다. 배 경주, 권투, 활쏘기, 소년 기마대 등 다양한 종목은 공동체가 애도를 의례로 승화해 결속을 다지는 과정을 그린다. 이어 쿠마이로 향한 아이네아스는 시빌라의 안내로 저승을 여행하며, 엘리시움에서 아버지에게 로마의 미래와 후손들의 영광을 듣는다. 7권부터 무대는 라티움으로 옮겨지고, 라티누스 왕은 아이네아스에게 딸 라비니아를 주려 하지만, 유노가 보낸 알렉토가 이를 방해해 전쟁의 불씨를 지핀다. 아이네아스는 에우안드로스와 동맹을 맺고, 젊은 팔라스가 그와 함께 전장에 나선다. 베누스가 불카누스에게 부탁해 만든 새로운 무장은 아이네아스의 사명을 상징하는 중요한 장치다.

3권 (원전 9~12권)

아이네아스가 부재한 틈에 트로이군은 포위당하고, 니수스와 에우리알로스가 목숨을 건 돌파를 시도하다 전사한다. 아이네아스가 돌아와 전세를 뒤집지만, 팔라스가 투르누스에게 쓰러진다. 분노한 아이네아스는 메젠티우스를 무찌르고, 그의 아들 라우수스와의 싸움에서 인간적인 슬픔과 전쟁의 잔혹함이 교차한다. 11권에서는 잠시 휴전 속에 장례가 치러지지만, 여전사 카밀라가 창에 맞아 전사하며 다시 전투가 격화된다. 12권에서 마침내 아이네아스와 투르누스가 일대일 결투를 벌이고, 양 진영은 승자의 조건을 따르겠다고 맹세한다. 그러나 전투 끝에 쓰러진 투르누스를 살리려던 아이네아스는 팔라스의 허리띠를 보고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그를 죽인다. 장엄하지만 씁쓸하게 끝나는 결말은, 로마의 영광이 결코 값없이 얻어진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이 번역본의 진짜 매력은 원문 헥사미터의 리듬을 살린 18자 구성에 있다. 좀 더 쉽게 이야기 하자면, 원래 시의 리듬감을 살리기 위해 한 줄에 비슷한 길이의 글자를 맞춰 읽기 좋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운율 덕분에 서사시의 장중함이 문장 호흡에 그대로 살아나고, 촘촘한 각주와 인명·지명 설명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해설은 베르길리우스의 생애와 집필 과정, 미완성 원고의 사정까지 꼼꼼하게 짚어 주어 작품을 단순히 ‘읽는 것’을 넘어 ‘감상하고 해석하는 경험’으로 확장시킨다.

『아이네이스』는 영웅을 미화하기보다 국가의 영광 뒤에 가려진 희생과 상실을 드러낸다.

그래서 이 작품은 로마의 찬가이자 동시에 한 도시의 탄생이 누구의 삶 위에 세워졌는지를 끝까지 묻는 기록이기도 하다.

📚 이 책을 추천하고 싶은 사람

- 고전을 완역으로, 운율의 호흡까지 느끼며 읽고 싶은 분

- 로마사·신화, ‘국가와 개인’의 문제에 관심 있는 분

- 서사시가 지금-여기의 질문과 만나는 지점을 찾는 분


'열린책들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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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쇄 위픽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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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의 『일단 마음 먹고 칼을 집었으면 - 파쇄』는 장편소설 『파과』의 외전이자,

주인공의 10대 시절 한 장면을 담은 단편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시대적 배경은 1963~1965년 정도라고 한다.

그 시기는 박정희 정권 시절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서는 주인공의 나이나 직업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읽다 보면 그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다양한 추측을 하게 된다.

이야기는 깊은 산속에서 시작된다.

주인공은 손과 발이 결박된 채 깨어난다.

시야는 가려져 있고, 풀잎의 촉촉함과 흙 냄새, 공기의 온도, 새소리만이 이곳이 어디인지 짐작하게 한다. 실장이라는 인물은 무사한지, 소리를 내야 할지, 숨죽여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시각이 차단된 채 청각과 촉각에만 의지하는 상황이 나까지 숨을 죽이게 만든다.

주인공은 묶인 손을 풀기 위해 돌로 결박을 풀고 있을 때,

스륵— 젖은 바지 위로 발목에서 다리를 따라 천천히 올라오는 감촉이 느껴진다.

반가운 마음에 하마터면 “실장님” 하고 부를 뻔했다는 대목에서, 나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런데 그것은 사람의 손길이 아니라 뱀의 포복이었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공격으로 간주되어 물릴 수 있고, 독사라면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주인공은 어깨가 들썩이지 않도록 호흡을 줄이며 버틴다.

뱀은 그녀의 몸을 젖은 나무나 바위로 여겼는지 나른하게 몸을 옮기고, 머리부터 기다란 몸통이 옆구리와 어깨를 스치며 지나간다.

그 순간, 나 역시 숨을 멈춘 채 이 상황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바랐다.

나는 그 순간 그녀와 같이 그곳에 함께 존재했다.

그 공포와 막막함이 온전히 나에게 느껴졌는데,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남는 부분이기도 했다.

이 극한의 상황에서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된 경위를 재빠르게 파악하기 위해

산장에 오게 된 첫날부터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한다.

산장에서 함께 있는 ‘그’라는 인물이 ‘실제 현장’에서는 총보다 이걸 더 쓰게 될 거라며 칼을 들어 보인다.

그 말투나 몸짓이 내일 날씨는 맑고 구름 한 점 없겠다고 하는 예보 같은 톤이어서 위협 비슷한 무언가도 읽어내지 못하고, 와서 자세히 보라는 뜻인 줄 알고 무심코 몇 발 걸음 다가가는데, 칼날이 눈앞의 허공을 사선으로 가른다. 그 순간 나 조차도 덜컥 겁이나며, 이 인물이 결코 안전한 존재가 아님을 경각하게 된다. 이 장면에서 총과 칼을 다뤄야 하는 상황과 ‘실제 현장’에서 이것들이 쓰인다는 말 때문에 이들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인지, 그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 점점 짙어지기 시작한 지점이다.

그 이후에도 그녀를 단련시키기 위한 다양한 훈련이 병행된다.

처음 위험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실장이라는 직함을 가진 자로,

주인공을 훈련시키기 위해 특별 지시를 받은 인물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는 그녀가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강인한 존재로 만들어야하는 인물처럼 보였다.

예상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으로 그녀를 몰아넣는 것도, 모든 것이 계획된 훈련 과정의 일부였다.

그 공간은 매 순간 긴장을 놓칠 수 없는 곳이었다.

책을 읽어나갈수록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녀는 간첩을 처리하기 위해 정부가 비밀리에 길러낸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것!

물론 책에서 그런 설정을 명시하진 않았다.

그저 읽는 과정에서 시대적 배경과 훈련의 성격이 맞물리며 자연스럽게 떠오른 상상이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주인공은 자신이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지 점차 자각하는 듯했다.

앞으로 수많은 시체의 산을 쌓을 손, 자르고 찌르고 태우는 불모의 손.

과녁이 아닌 생명을 쏘고, 빼앗고, 파괴하는 삶이 시작될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동시에 그 손은 무언가를 죽임으로써 무릎 아래 깔린 사람을 살려내기도 할 것이다.

폭력과 구원, 파괴와 보호가 한 손 안에 공존하는 아이러니가 그녀를 흔들었다.

평범했던 과거와는 영영 결별하게 될 예감, 그리고 자신이 침몰하게 될 높은 확률을 직감하면서도 그 길을 받아들여야 함을 인지했다.

작가 구병모는 이 주인공을 완전무결한 인물로 그리지 않는다.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은 유해한 감정과 건강하지 않은 사고도 품은 채 살아간다.

오히려 그 결격이 주인공을 매력적인 인물로 만든다.

그래서 독자는 이 인물을 단순히 ‘킬러가 되어가는 과정’으로만 보지 않고,

불완전한 모습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아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한 사람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흥미로웠던 점은, 간첩이나 강인한 상대를 제거해야 하는 킬러와 같은 설정이라면 흔히 남성 캐릭터를 떠올리기 쉽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여자’라는 이유로 나약하다고 여겨지는 고정관념을 깨고,

오히려 남성과 동등하게 — 혹은 그 이상으로 — 극한의 상황을 돌파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는 여성이라는 존재가 단지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치열한 생존의 장에서도 능동적으로 움직이며 스스로의 서사를 써 내려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 하다.

결국 『파쇄』의 주인공은 성별에 구속되지 않는 힘과 결단을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복합적인 면모를 끝까지 증명해낸다.


'최규리 북스타그램 @guulyy_'님을 통해

'위즈덤하우스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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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수많은 시체의 산을 쌓아나갈 손, 자르고 찌르고 태워버릴 불모의 손, 과녁 아닌 생명을 쏘고 나서야 악탈과 섬멸의 언어로밖에 표현할 길 없는 삶을 시작했음을 알게 되고 지나온 보통의 시간과 평생을 걸쳐 이별하게 되리라는 예감, 높은 확률로 예정된 자기 침몰의 방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죽임으로써 무릎 아래 깔린 사람을 살려낸 손이라는 총체적인 아이러니가 콧속을 시큰하게 찔러오다 뒤흔든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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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한국사
김재완 지음 / 믹스커피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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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역사를 알아야 할까?

사람들은 쉽게 과거를 잊는다.

어떤 시대에 어떤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로 인해 어떤 흐름이 생기고 또 무엇이 무너졌는지에 대해 무심할 때가 많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그 과거의 선택과 무관하지 않은 자리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역사를 아는 일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우리가 왜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지를 이해하려는 마음의 태도다.

『기묘한 한국사』는 바로 그 시작점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던 역사 속 장면들을 다시 들춰 보여준다.

단순한 사건이 아닌, 흥미진진한 사람의 이야기로 말이다.

책의 첫 장은 <세한도> 이야기로 시작된다.

추사 김정희가 유배지에서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한 폭의 수묵화.

소나무와 찻나무 몇 그루, 그리고 조촐한 초가 한 채.

누구에게는 단순한 그림이지만, 이 그림은 이후 조선, 청나라,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현대까지 이어지는 긴 시간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림은 이상적을 통해 북경으로 전해졌고, 청나라 문인들의 제시가 더해지면서 14미터가 넘는 ‘길이의 사연’이 된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학자의 손에 들어갔고, 그것을 다시 한국으로 되돌리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과 결정이 더해지면서, <세한도>는 한 점의 예술작품을 넘어 한국사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적인 유산이 된다. 저자는 이 과정을 단순히 설명하지 않고, 그 속에 담긴 마음과 가치—‘염치’—에 주목한다. 손창근 옹이 그림을 국립박물관에 기증하며 보여준 그 염치는, 이 책 전체를 꿰뚫는 중심 단어로 작용한다.

그 다음 장에서 다루는 건 <정감록>이다.

금서였지만, 수백 년 동안 민중 사이에서 비밀처럼 전해지던 예언서다.

“정씨 성을 가진 도인이 나타나 나라를 다시 세울 것이다”라는 이 한 문장은

조선 후기 백성들의 절망과 희망, 좌절과 기대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문장이기도 하다.

<정감록>은 단순한 허무맹랑한 예언이 아니라, 왕조가 더 이상 백성의 삶을 책임지지 못하던 시기에,

사람들이 그 허전한 자리를 스스로 메우기 위해 만든 하나의 ‘이야기이자 믿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동학농민운동, 미륵신앙, 예언자 민담 등으로 확장되며 조선 말기 민중의 심리적 기반이 된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단연 조선 궁중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특히 ‘지밀나인’으로 대표되는 궁녀들의 삶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감정으로 읽혔다.

궁녀들은 대부분 어린 나이에 입궁해 생을 거의 궁궐에서 마무리했다.

‘상궁’이라는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감정도, 욕망도, 연대도 철저히 조절해야 했고,

때로는 다른 궁녀들과의 감정적 유대를 통해 외로움을 달래기도 했다.

책에서는 궁녀들 사이의 관계, 정서적 애착, 그리고 여성 간의 동성애적 감정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짚어낸다.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조선의 궁궐이라는 공간이

한 사람 한 사람의 감정과 삶이 충돌하는 복잡한 사회이자,

겉으론 고요하지만 속으론 늘 긴장감이 흐르는 공간처럼 보이기도 했다.

또한 책에서는 세종대왕의 무덤과 관련된 전설도 소개된다.

지관이 말하길, 그곳에 묻히면 ‘장손이 끊긴다’ 했지만, 세종은 그 말을 무시하고 묻힌다.

결과는 문종의 단명, 단종의 폐위와 죽음, 그리고 세조(수양대군)의 왕위 찬탈로 이어진다.

세조는 왕이 된 뒤에도 밤마다 나타나는 현덕왕후의 귀신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 부분은 단순한 괴담처럼 읽히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 조카를 죽였고, 형의 자리를 빼앗은 자의 불안과 죄의식이 무형의 존재를 통해 드러난 것처럼 느껴졌다. 권력의 이면에 자리한 두려움, 그 어두운 감정을 귀신이라는 형상으로 구현한 대목이었다.

그리고 사육신과 생육신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저 ‘의리로 죽은 충신’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그들의 선택이 이 책을 통해 다시 읽히면서 조금 더 무겁고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김시습은 사육신의 시신을 몰래 수습해 노량진 돌무덤에 안치하고 삭발한 채 세상과 멀어져 떠돌며 살아간다. 그는 더 이상 유교의 세계에 자신을 둘 수 없었고, 글을 쓰는 행위로 시대를 이겨내려 했다. 그가 남긴 『금오신화』는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 한국 최초의 소설로 평가받게 된다.

이 책에는 이 외에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예를 들어, 광개토대왕비 해석을 둘러싼 논쟁,

묘지 자리를 두고 벌어진 산송(山訟, 조상의 묘를 둘러싼 소송),

조선 후기 묘지 분쟁이 살인까지 번진 사건,

홍범도 장군의 생애와 망명 이후 이야기, 경종 독살설,

조선 최고 부자가 겸한 뜻밖의 직업들 등

익숙하지만 쉽게 지나쳤던 역사적 장면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다룬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내용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스토리였고,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역사들은 새롭게 느껴지는 경험을 했다.

그 안에서 살아 있던 사람들의 감정이 더 또렷하게 읽혀지는 느낌이랄까?

아무래도 그 시대 인물이 나눴을만한 대화체 글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글이 어렵지 않게 술술 읽혀지지만 신기하게도 어느 부분마다 질문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았던걸까?

부당함을 그저 인정하며 살았던걸까? 반발심은 없었던걸까?

힘든 순간을 어떻게 이겨냈을까?” 등등

『기묘한 한국사』는 결국, 역사라는 큰 이야기를 통해 사람을 본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지키고자 했던 마음, 끝까지 버티려 했던 자존 같은 것들을 잊지 않게 만든다.

시간이 흘러도 오래 기억에 남을 만한 흥미진진한 책이다.

또한, 재미있는 역사책을 찾고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채손독) @chae_seongmo'를 통해

'믹스커피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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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은 양기를 돋우는 최악의 음식으로 내시에게 엄격히 금기했으니, 내시가 되지 않으려는 자들에겐 최고의 음식임을 참고하기 바란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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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령 - 지금, 사랑을 시작하라
이용현 지음 / 필독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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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ELDOK의 『사랑령 Love Order』는 제목처럼 사랑을 시작하라는 하나의 ‘선언문’이자 ‘다짐문’에 가깝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령(愛令)은 강압적인 명령이 아니라, 사랑이 두렵거나 주저될 때 스스로에게 내리는 다정한 지시다. “사랑이 어려운 때, 사랑이 두려운 때, 사랑을 시작하고 싶을 때” 우리는 사랑령을 선포하고 지금 여기서 사랑을 시작해야 한다.

책 속에서 사랑은 ‘깊이 생각하고 헤아리는 마음’으로 정의된다.

‘사랑’이라는 말이 과거에는 ‘사량(思量)’—생각할 사(思)와 헤아릴 량(量)—로 쓰였다는 어원 이야기는 특히 마음에 남는다. 누군가를 계속 떠올리고, 그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부족함까지 품으려는 태도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 마음이 타인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거울 속의 나를 볼 때 부족함이 아닌 가능성을 보고, 오늘의 실패보다 내일의 성장을 믿는 것!

그것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이다.

흥미로운 건, 사랑을 타인을 대하는 태도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맞물려 있다고 보는 시선이다.

타인을 존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타인의 감정을 섬세하게 살피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도 놓치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결국 생활 속 작은 습관—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하거나,

대화 중 휴대폰을 내려놓는 행동—에서 드러난다.

이 책이 전하는 사랑은 형태가 다양하다.

열정과 갈망을 담은 에로스, 신뢰와 우정의 필리아, 조건 없는 헌신의 아가페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형태든 사랑은 우리의 시야를 넓히고, 감정을 다채롭게 만들며 더 나은 사람으로 자라게 한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먼저 생각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기 내면의 세계도 확장된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부분은 ‘음악으로 흐르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음악은 사랑의 기억을 저장하는 특별한 장소라는 문장에 깊이 공감했다.

어떤 노래 한 곡이 과거의 순간과 감정을 고스란히 되살려 주듯,

사랑은 음악을 통해 살아 있는 기억이 된다.

음악이 흘러나오면 그 시절의 표정, 냄새, 공기까지 되살아나는 경험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작가는 사랑을 미루지 말라고 강조한다.

사랑은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해야 하는 것이다.

자연은 말없이 사랑을 실천하듯, 우리도 생각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순간을 줄여야 한다.

사랑의 선물은 결국 ‘시간’의 형태로 오지만, 그 가치는 양이 아니라 깊이에 있다.

무엇을 함께 했는가보다 어떻게 함께 있었는지가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살아있으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므로 살아 있음을 느낀다”고 말한다.

사랑은 평범한 순간을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

지금보다 아름다운 날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사랑령』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사랑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어서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대답을 권한다.

“그렇다면 지금 시작하라.”

사랑을 감정이 아니라 삶의 태도로 품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다정한 메시지가 될 것이다.


'필독 feeldok'님을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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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말하지 않는다. 그저 행동으로 보여줄 뿐이다.
인간의 복잡한 언어와 생각 없이도 자연은 매일 사랑을 실천한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많이 생각하고 너무 적게 행동하는지도 모른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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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고민, 이런 책 - 인생의 고비마다 펼쳐 볼 서른일곱 권
박균호 지음 / 북바이북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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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균호의 『이런 고민, 이런 책』은 저자가 서재에서 오랫동안 간직해 온 책들 가운데, “내일 지구가 망해도 버리지 말아 달라”고 할 만큼 소중한 37권을 골라 소개하는 책이다. 하지만 단순히 좋은 책 목록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다. 각 권은 특정한 상황에서, 고민이나 감정의 무게를 덜어주고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책들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단순하다. 읽는 재미가 쏠쏠하고, 인생의 어느 순간에든 한 줄의 문장이라도 마음을 붙잡아 줄 수 있는 책일 것. 각 장 끝에 덧붙여진 ‘소소한 한마디’는 저자가 그 책에서 길어 올린 깨달음을 압축해, 읽는 이의 마음속에 오래 남게 한다.

타인에게 부탁하는 일이 어려울 때 저자는 신영복의 『청구회 추억』을 권한다. 신영복 선생이 20대 시절 동네 아이들과 ‘청구회’를 결성하며 나눈 우정을 그린 수필 속에는, ‘아이들의 세계에 들어가는 방법’이 담겨 있다. 첫마디는 반드시 대답이 가능한 것이어야 하고, 그 질문이 아이에게 ‘도움을 줄 기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 “이쪽으로 가면 서오릉으로 갈 수 있지?”라는 질문이 바로 그런 예다. 부담 없이 대답할 수 있으면서도, 대답한 아이가 누군가를 도왔다는 뿌듯함을 느끼게 만든다. 저자는 이를 “부탁도 하기에 따라선 호감을 줄 수 있다”는 배움으로 간직했다.

소신을 세우고 싶을 때는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를 권한다.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한 가부장제 속에서 제인은 순종형도, 타락한 여성상도 아닌 새로운 여성상을 보여준다. 특히 권위와 체벌 대신 칭찬과 설득으로 학생을 이끈 템플 선생의 모습은 “진정한 권위는 소통과 공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증명한다. 제인이 훗날 가정교사가 되어 아델을 가르칠 때, 학습자의 특성을 존중하고 자유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교육한 것도 이러한 경험 덕분이었다.

불행의 감정이 몰려올 때는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을 펼친다. 탄광 노동자의 비참한 삶과 자본가의 착취를 그린 이 작품은, 극도의 가난도 지나친 풍요도 모두 행복을 해친다는 역설을 담고 있다. 노동자와 부르주아 모두 각자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저자는 “완전한 행복은 없다는 깨달음이 오히려 행복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통찰을 얻는다.

기록 습관을 들이고 싶을 때는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권한다. 유년기와 청춘기를 회고한 이 작품 속에서 저자는 “책 읽기의 재미는 책 속에만 있지 않다”는 말을 발견한다. 책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바꾸고, 평범한 풍경을 새롭게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소한 메모라도 꾸준히 남기는 습관이 글쓰기뿐 아니라 삶 전체를 단단하게 만든다고 강조한다.

저자가 특히 인상 깊게 다룬 책 중 하나는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다. 많은 사람들이 마키아벨리를 『군주론』으로만 기억하고, 히틀러나 무솔리니처럼 이를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악용한 사례를 떠올린다. 그러나 『로마사 논고』에서 드러나는 그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고대 로마 공화정의 정치 구조와 시민의 역할을 분석하며, 자유롭고 정의로운 국가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설파한다. 고향 피렌체가 전쟁과 혼란 속에 있던 시절, 마키아벨리는 로마 공화정을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시대를 막론하고 같으니, 과거의 역사를 배우면 현재의 문제를 풀고 미래의 문제를 예측할 수 있다. 『군주론』의 주인공이 권력자 한 명이라면, 『로마사 논고』의 주인공은 시민 전체다. 이 책 속 마키아벨리는 냉혹한 모사꾼이 아니라 권력 집중을 경계하고 시민의 참여를 옹호하는 공화주의자다. 저자는 이 두 책을 비교하면서, 한 사람의 사상이 얼마나 다면적인지를 깨닫고, 역사를 보는 눈을 길러야 함을 강조한다.

판단을 내리기 전에는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이 도움이 된다. 성격이 급하고 첫인상으로 사람을 단정 짓는 주인공 봇짱은, 한쪽 이야기만 듣고 행동하다 종종 낭패를 본다. 그러나 부당함에 맞서고 약자를 돕는 의리를 지키는 모습도 있다. 저자는 이 소설에서 “무슨 일이든 양쪽 말을 다 들어야 한다”는 중요한 교훈을 전한다.

이 책에는 이 밖에도 전시륜의 『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어느 바보의 일생』, 기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강창래의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 유안진 외의 『지란지교를 꿈꾸며』,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 민병산의 『철학의 즐거움』, 스탕달의 『파르마의 수도원』, 스티븐 크라센의 『읽기 혁명』,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안우광의 『꼴 보기 싫은 상사와 그럭저럭 잘 지내는 법』 등 다양한 작품이 상황별로 소개된다. 각 책은 현실 속에서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중심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런 고민, 이런 책』을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는 분명하다. 책 읽기는 그 자체로 즐겁지만, 진짜 가치는 책 속의 문장을 삶 속에서 녹여내는 데 있다. 저자는 각 상황에 맞는 책을 통해 부탁을 건네는 방법, 소신을 지키는 태도, 불행을 다루는 마음, 기록의 힘, 신중한 판단력, 역사에서 배우는 지혜를 전한다.

그리고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하며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는 힘이야말로 독서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임을 보여준다. 결국 이 책은, 책이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인생의 나침반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한 사람의 깊이 있는 독서기록이다.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채손독) @chae_seongmo'를 통해

'북바이북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소소한 한마디]
"무슨 일이든 간에 양쪽 말을 다 들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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