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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한국사
김재완 지음 / 믹스커피 / 2025년 6월
평점 :

우리는 왜 역사를 알아야 할까?
사람들은 쉽게 과거를 잊는다.
어떤 시대에 어떤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로 인해 어떤 흐름이 생기고 또 무엇이 무너졌는지에 대해 무심할 때가 많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그 과거의 선택과 무관하지 않은 자리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역사를 아는 일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우리가 왜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지를 이해하려는 마음의 태도다.
『기묘한 한국사』는 바로 그 시작점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던 역사 속 장면들을 다시 들춰 보여준다.
단순한 사건이 아닌, 흥미진진한 사람의 이야기로 말이다.
책의 첫 장은 <세한도> 이야기로 시작된다.
추사 김정희가 유배지에서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한 폭의 수묵화.
소나무와 찻나무 몇 그루, 그리고 조촐한 초가 한 채.
누구에게는 단순한 그림이지만, 이 그림은 이후 조선, 청나라,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현대까지 이어지는 긴 시간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림은 이상적을 통해 북경으로 전해졌고, 청나라 문인들의 제시가 더해지면서 14미터가 넘는 ‘길이의 사연’이 된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학자의 손에 들어갔고, 그것을 다시 한국으로 되돌리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과 결정이 더해지면서, <세한도>는 한 점의 예술작품을 넘어 한국사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적인 유산이 된다. 저자는 이 과정을 단순히 설명하지 않고, 그 속에 담긴 마음과 가치—‘염치’—에 주목한다. 손창근 옹이 그림을 국립박물관에 기증하며 보여준 그 염치는, 이 책 전체를 꿰뚫는 중심 단어로 작용한다.
그 다음 장에서 다루는 건 <정감록>이다.
금서였지만, 수백 년 동안 민중 사이에서 비밀처럼 전해지던 예언서다.
“정씨 성을 가진 도인이 나타나 나라를 다시 세울 것이다”라는 이 한 문장은
조선 후기 백성들의 절망과 희망, 좌절과 기대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문장이기도 하다.
<정감록>은 단순한 허무맹랑한 예언이 아니라, 왕조가 더 이상 백성의 삶을 책임지지 못하던 시기에,
사람들이 그 허전한 자리를 스스로 메우기 위해 만든 하나의 ‘이야기이자 믿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동학농민운동, 미륵신앙, 예언자 민담 등으로 확장되며 조선 말기 민중의 심리적 기반이 된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단연 조선 궁중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특히 ‘지밀나인’으로 대표되는 궁녀들의 삶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감정으로 읽혔다.
궁녀들은 대부분 어린 나이에 입궁해 생을 거의 궁궐에서 마무리했다.
‘상궁’이라는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감정도, 욕망도, 연대도 철저히 조절해야 했고,
때로는 다른 궁녀들과의 감정적 유대를 통해 외로움을 달래기도 했다.
책에서는 궁녀들 사이의 관계, 정서적 애착, 그리고 여성 간의 동성애적 감정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짚어낸다.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조선의 궁궐이라는 공간이
한 사람 한 사람의 감정과 삶이 충돌하는 복잡한 사회이자,
겉으론 고요하지만 속으론 늘 긴장감이 흐르는 공간처럼 보이기도 했다.
또한 책에서는 세종대왕의 무덤과 관련된 전설도 소개된다.
지관이 말하길, 그곳에 묻히면 ‘장손이 끊긴다’ 했지만, 세종은 그 말을 무시하고 묻힌다.
결과는 문종의 단명, 단종의 폐위와 죽음, 그리고 세조(수양대군)의 왕위 찬탈로 이어진다.
세조는 왕이 된 뒤에도 밤마다 나타나는 현덕왕후의 귀신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 부분은 단순한 괴담처럼 읽히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 조카를 죽였고, 형의 자리를 빼앗은 자의 불안과 죄의식이 무형의 존재를 통해 드러난 것처럼 느껴졌다. 권력의 이면에 자리한 두려움, 그 어두운 감정을 귀신이라는 형상으로 구현한 대목이었다.
그리고 사육신과 생육신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저 ‘의리로 죽은 충신’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그들의 선택이 이 책을 통해 다시 읽히면서 조금 더 무겁고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김시습은 사육신의 시신을 몰래 수습해 노량진 돌무덤에 안치하고 삭발한 채 세상과 멀어져 떠돌며 살아간다. 그는 더 이상 유교의 세계에 자신을 둘 수 없었고, 글을 쓰는 행위로 시대를 이겨내려 했다. 그가 남긴 『금오신화』는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 한국 최초의 소설로 평가받게 된다.
이 책에는 이 외에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예를 들어, 광개토대왕비 해석을 둘러싼 논쟁,
묘지 자리를 두고 벌어진 산송(山訟, 조상의 묘를 둘러싼 소송),
조선 후기 묘지 분쟁이 살인까지 번진 사건,
홍범도 장군의 생애와 망명 이후 이야기, 경종 독살설,
조선 최고 부자가 겸한 뜻밖의 직업들 등
익숙하지만 쉽게 지나쳤던 역사적 장면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다룬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내용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스토리였고,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역사들은 새롭게 느껴지는 경험을 했다.
그 안에서 살아 있던 사람들의 감정이 더 또렷하게 읽혀지는 느낌이랄까?
아무래도 그 시대 인물이 나눴을만한 대화체 글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글이 어렵지 않게 술술 읽혀지지만 신기하게도 어느 부분마다 질문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았던걸까?
부당함을 그저 인정하며 살았던걸까? 반발심은 없었던걸까?
힘든 순간을 어떻게 이겨냈을까?” 등등
『기묘한 한국사』는 결국, 역사라는 큰 이야기를 통해 사람을 본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지키고자 했던 마음, 끝까지 버티려 했던 자존 같은 것들을 잊지 않게 만든다.
시간이 흘러도 오래 기억에 남을 만한 흥미진진한 책이다.
또한, 재미있는 역사책을 찾고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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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채손독) @chae_seongmo'를 통해
'믹스커피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마늘은 양기를 돋우는 최악의 음식으로 내시에게 엄격히 금기했으니, 내시가 되지 않으려는 자들에겐 최고의 음식임을 참고하기 바란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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