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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빠가 길을 헤매기 시작했다
이재아 지음 / 담다 / 2025년 5월
평점 :

아버지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아버지는 퇴직 후에도 한시를 배우고 친구들을 가르칠 만큼 똑똑하고 품위 있던 분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약속을 잊거나 같은 말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친구분의 전화를 받고 병원에 모시고 갔을 때, 이미 알츠하이머라는 낙인이 찍혔다.
엄마에 이어 아빠까지 같은 병을 진단받는 순간, 우리 가족의 삶은 전혀 다른 궤도로 들어섰다.
처음에는 단순히 자주 깜빡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짐을 싸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다.
나중에 되어서 알게 되었지만, 그건 불안증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집 안 곳곳에서 발견된 수많은 보따리들을 보면서, 얼마나 두렵고 불안했으면 그랬을까 싶어 가슴이 저려왔다. 그때는 왜 그런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을까. 저자는 엉뚱한 소리만 하며 짐을 풀어 놓았던 모습이 자꾸 떠올라 마음이 쓰라렸다.
알츠하이머는 기억만 앗아가는 병이 아니었다.
성격이 달라지고, 때론 억지를 부리고, 작은 일에도 짜증을 냈다.
신사에 멋쟁이셨던 아버지가 목욕을 거부하시며 화를 내실 때마다,
“이게 정말 우리 아빠가 맞나?” 싶었다.
그러면서 저자는 스스로를 달랬다.
“내가 미워서 이러는 게 아니야. 다 병 때문이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억지로 웃었다.
그러나 돌봄은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부모의 돌발행동을 받아내는 건 단순히 인내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끝없는 불안, 책임감,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부모만 신경쓰고 버티고 있다 보니 우울증이 찾아와 정신의학과를 찾게 되었다.
의사 앞에서 10분 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 날도 많았다.
대화 도중에 의사 선생님이 “고생 많았어요”라는 한마디의 위로가 삶을 버티는 힘이 되기도 했다.
아버지는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을 선명하게 꺼내셨다.
6.25 전쟁 직후 미군 부대에서 영어를 배우지 못한 아쉬움,
원래 가고 싶었던 법대 대신 아버지의 권유로 들어간 공대 이야기, 이루지 못한 아메리칸드림….
환자가 아니라 한 남자로서, 청년으로서의 아버지를 다시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낯설게 다가오는 아버지의 과거를, 나는 늦게나마 곱씹었다.
끝내 병세는 악화되었고 중환자실에 누운 아버지를 마주했을 때,
팔이 묶인 채 애절하게 “이거 다 풀어다오”라고 하던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코로나 시국이라 병실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유리창 너머로 마지막 얼굴을 본 것이 생전 마지막이었다. 집에 돌아와 무릎 꿇고 엎드려 목 놓아 울며 “끝까지 돌봐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을 수없이 되뇌었다. 사망신고를 하루 늦게 하며 과태료를 낸 것도, 아버지가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어서였다.
그 후의 시간은 공허했다. 엄마마저 돌아가시자 우울은 더 깊어졌다.
두 달 동안 집 안에만 누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본 바이크 영상이 작은 변화를 일으켰다.
자연 속에서 거침없이 달리는 모습이 묘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나도 한번 타 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작은 설렘이 내 삶의 시동을 다시 걸게 만들었다.
아버지를 돌보며 받았던 수많은 작은 도움의 손길도 떠오른다.
휠체어를 들어 올려주던 낯선 사람, 문을 잡아주던 이웃. 그 사소한 친절이야말로 내 삶을 지탱해 준 힘이었다. 돌봄은 한 사람이 온전히 짊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도움, 나눔, 함께 버티는 마음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이제 집에 혼자 남았지만,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보며 인사를 건네는 일상이 나를 지탱한다.
“다녀오겠습니다.”, “저 들어왔어요.” 그렇게 속삭이면, 여전히 곁에서 대답해 주실 것만 같다.
텅 빈 방에 햇살이 스며들 때, 그 온기가 아버지의 손길처럼 느껴진다.
이 책은 단순히 한 가족의 고통스러운 기록이 아니다.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현실이자, 돌봄의 무게와 상실의 아픔,
그리고 다시 살아내려는 의지에 관한 이야기다.
읽는 내내 저자의 눈물이 내 눈물이 되었고, 죄책감이 내 마음까지 짓눌렀다.
하지만 동시에, 작지만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을 응원하게 되었다.
어느 날 아빠가 길을 헤매기 시작했다』는 알츠하이머 환자를 돌보는 가족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고,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도 삶과 죽음, 사랑과 돌봄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해 주는 책이다.
이 책을 덮고 나면 현재 곁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이 새삼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언젠가 사라질 수도 있는 순간들 앞에서, 우리는 더 늦기 전에 사랑을 표현하고,
함께하는 시간을 귀히 여겨야 한다는 사실을 절절히 일깨워 준다.
결국 이 책은 한 사람의 기록을 넘어, 우리 모두에게 ‘지금, 곁에 있는 이를 사랑하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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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다스 5기 서포터즈' 활동을 통해 도서 협찬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아빠의 영정사진은 슬픔이 아니라 의지할 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였다. 돌아가시고 한동안 집에서 누워만 있고 밖에 나가지도 않았다. 일주일 넘게 누구와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지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조금씩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영정사진을 보고 대화를 시작했다.
"저 지금 나가요. 다녀오겠습니다." "저 들어왔어요."
그렇게 말을 건네고 사진을 바라보고 있으면, 저 멀리 어딘가에서 아빠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희미한 연결감을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 두 달이 지나고 나서야 친구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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