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n
‘타자‘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무죄한 사람으로 이해할 필요가없으며, 오히려 그들이 악을 행하는 사람임을 알 때조차도 그들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확신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십자가의 이야기는 곧 "지옥의 자녀"를 끌어안고자 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 P131

윙크가 ‘권세‘라는 성경적 개념을 바르게 해석했는지에 관한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그는 사람들을 지배하고 옭아매고 그들로 하여금 타자를 지배하도록 유혹하는 악의 초인격적이며 제도적인 복합적 실체를 바르게 지적하고 있다. 나는 그의 용어를 바꿔 ‘지배‘를 ‘배제‘로대체할 것이다. 대체로 지배의 목적은 경제적이든 사회적이든 심리적이든 희소한 재화로부터 타자를 배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핵심 사상은 그대로 가져갈 것이다. 즉, 악의 힘은 ‘제도적인‘ 동시에 ‘영적인 초인격적 ‘체제‘의 작동 방식 전반에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사람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덫에 걸린 것처럼 배제의 체제에 갇혀 그 도착된 논리에 따라 행동한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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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어법은 그보다 더 교활하게 배제하지 않는것을 도덕적으로 나쁘게 보이게 하여 배제를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필수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남들도 그렇게 행하도록 도덕적의무를 부과한다. 타자의 비인간성을 말하는 수사는 자아로 하여금 비인간성을 실행하라고 요구한다. 투치족은 ‘타락을 조장하는 사람들(agents corrupteurs)이며, 그러므로 파괴되어야 한다. 여성은 ‘비합리적이며, 그러므로 통제받아야한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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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분리된 동시에 연결되어 있으며, 구별되는 동시에 관계를맺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체성을 표시하는 경계는 장벽인 동시에 다리다... 정체성은 타자와의 구별 짓기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타자와의 관계를 내면화한 결과다.
그것은 자아와 타자가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협상하는 양쪽 모두가 참여하는 ‘구별‘(differentiation)의 복잡한 역사로부터 나타난다. 리쾨르가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에서 주장했듯이, "한 사람의 자아됨은 너무나 친밀하게 타자성을 내포하기 때문에 타자 없이는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할 수없을 정도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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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좋음 > 솔로 계급의 경제학 (우석훈 지음. 한울)

8년전이라니...북플쓴지도 오래됐구나. 오래된 년수에 놀라고, 그사이 빈곤청년이 더욱 늘어나는 현실에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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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사악한 사람들의 짓이 아니라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의 짓이었다.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은 영혼이 ‘자신의 선한 양심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분이 선에 대한 자신들의관념을 거부하신 것을 악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Nietzsche 1969, p. 229, Westphal 1993, pp. 262-263). - P91

배제는 ‘악한마음‘에 의한 죄일 수도 있지만, 또한 ‘선한 양심에 의한 죄일 수도 있다. "세상의 악당들이 어떤 해를 입힌다 할지라도 선한 사람이 입히는피해만큼 해롭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니체의 경고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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