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기지가 않네, 아무것도 - P94

멀리서 바라본 안쪽은 거대한 유리산을 이루고 있었다반사된 빛 때문에 좀처럼 눈을 뜰 수 없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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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저녁 여덟시. 한주를 마무리하는 루틴이 있다.
거실장 안에서 꺼낸 플라스틱 상자 하나. 나는 상자에 들어있는 손톱깎이로 손발톱을 자르고 족집게로 눈썹을 다듬는다. 거실장에는 자주 들여다보는 거울도 있다. 돌아가신아버지의 거울. 내 얼굴을 비추지만 아버지가 보이기도 하는 거울. - P77

‘내 발톱을 자르듯이 해보면 되지 않을까?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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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 캐스팅하면 어때? 한 역할을 세 사람이 맡는 거야. 실험적으로 가보자. 나쁘지 않을 거야. - P132

괜찮냐니까. 말을 좀 해봐. - P133

"언제 왔어요?"
"세 시간 전에 공항 떨어졌어. 너는?"
"방금 왔어요. 무궁화호 탔거든요." - P136

천장과 바닥이 맞붙기 시작한다. 녹아내리는 유리지붕 뒤편에서 검표원이 걸어온다. 항아가 나와 눈을마주친다. 그렇지만, 하고 말한다. 꿈속에서조차 쇠고집이다. - P134

부산역에 내린다. 플랫폼을 통과해 계단을 오른다.
정문으로 나가 택시를 탄다. 새벽 부산의 추위는 엷거나 부드럽다는 말이 어울리는 정도다. 하늘 가장자리가 부옇게 밝아오고 있다. 택시에서 내리자 병원 뒤편으로 번지는 붉은 기운이 보인다. 일출이다. - P135

과연 눈을 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디션장이 내 앞에 나타난다. 항아가 종을 흔든다. 링포 오디션, 링포오디션. 두번째 조가 무대에 오른다. 황 쌤과 선배, 선이 있는 조다. 황 쌤이 남자, 선이 여자, 선배가 천사 역을 맡겠노라고 한다. 항아의 눈길이 느껴진다. 항아가웅을 볼 때처럼 나도 선을 보고 있을까? 아니길 바라며 배를 누른다. 꿈속인데도 속이 울렁인다. - P118

"다들 예쁜 걸 좋아하니까요."
"맞아요. 옷도 사람도 그렇죠." - P19

"그럼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담배를 한 대 태우겠다는오스틴을 두고 전철역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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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품 속 어린것들이 아른거린다한 모금에도 잠기고 한 방울에도 쪼개질 것 같다 - P23

나는 그가 죽음을 말하는 방식이 좋다나는 이 누수를 멈추고 싶지 않다 - P48

공인 날에는 멀리 차고비눗방울인 날에는 후후 분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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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강아지나 고양이 중 한 마리만 키워야 한다면 어느 쪽이야?"
"둘 다 별로, 난 동물 안 좋아하잖아."
마트의 반려동물용품 코너 앞을 지나며 선주가 물었을 때 정현은망설임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 말에 선주는 입을 떡 벌리고 정현을돌아보았다. 어떻게 인간 된 자로서 개나 고양이를 싫어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바라보는 듯했지만 곧 답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물었다. - P67

빚이야말로 정현이 잘 돌보고 보살펴 임종에 이르는 순간까지 지켜보아야 할 그 무엇이었다. 빚 역시 앞으로 수년간은 정현의 옆자리를떠나지 않고서 머무를 것이고, 정현이 죽었나 살았나 그 누구보다도계속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다. 빚이야말로 정현의 반려였다.
"나는 그런 거 없어. 그리고 난 연어 안 좋아해" - P70

"너 지금 속으로 개편 들었지?"
정현은 아무 말도 못 했다.
"너야말로 진짜 미친년이야. 정신 좀 차려. 걘 결혼도 해서 잘 산다며." - P73

"얼마나 더 기다려야 돼?"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안 될까?"
"얼마나 더? 하도 오래돼서 요샌 빚이 내 반려자 같고 그래."
정현의 말에 서일은 정색을 했다.
"넌 진짜 뭘 아껴본 적이 없구나. 어떻게 반려자랑 빚을 비교해? 그건 반려라는 단어한테 모욕이야." - P77

정현에겐 그 말이 꽤 달콤하게 들렸다. 오랜만에 다시 맞잡은 서일의 손도 너무 부드럽고 따뜻했다. 이토록 변변찮은 자신을 믿는다는서일의 말을, 정현도 믿고 싶었다. 돌고 돌아 마침내 귀의해야 할 종교를 만난 것처럼 정현은 다시 서일을 믿었다. 그 사실이 감격스러워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갑자기 나타난 선주가 서일의 머리채를 잡지만 않았다면 정현은 서일이 다시 자신의 집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전셋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했을 것이다. - P84

"그래, 번호 하나만 골라줘."
"나머지 다섯 개는 다 골라놨어요?"
"응. 하나만 더 있으면 돼."
"반줄 거예요?"
"뭐?""
"당첨되면 반 줄 거냐고요."
"그래, 줄게."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그리고 번호 하나만 골랐는데 왜 반이나줘요?"
서일의 번호를 가진 초등학생은 정현보다 더 야무진 데가 있었다.
"그렇지...... 네 말이 다 맞다." - P87

반려빚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코트 깃을 세우고 현관에 서서 정현과 작별 인사를 했다. 반려빚은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정현을 떠났다.
정현 역시 현관에 오래 서 있지 않았다. 찬장에서 소금을 꺼내 와 현관밖에 팍팍 뿌렸고 문이 닫히자마자 걸쇠를 단단히 걸어 잠갔다. 다시는 얼씬도 못 하도록. 꿈속에서 정현은 마냥 홀가분했고 깨어서도 그랬다. 마침내 0이 된 기분. 정현은 그 이상을 바라는 것도 이상하게 무섭기만 해서 그저 0인 채로 오래 있고 싶었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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