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연은 교습실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구 모자를 푹눌러쓰고 있었다. 해쓱한 볼과 턱에는 수염이 덥수룩했다. 인사는 반가웠지만 안색은 창백하고 푸석푸석했다. - P387

돈은 돈이야, 돈은 돈이라고! 너나 나 같은 사람한테 그게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 건지 몰라서 그래? 그게 기분으로 결정할 문제야? 지금껏 어떻게 살았어? 앞으로는 어떻게 살려고?
마흔 넘어서 얼마나 더 그렇게 살려고? 그렇게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머리가, 그 머리가 안 돌아가?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대체! - P389

난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냥 나 좋자고, 속 편하자고 한 거였어요.
그래서, 어떻게 한 거야? 수첩에 있던 돈은 다 어떻게 됐어?
하진이었다. - P393

이제는 바라는 것이 아니라 사실과 진심으로 나는 하진을 위해 살고 있었다. 기꺼이 더 안정적인 지금 회사를 포기하려고했던 것도, 내가 먼저 내 돈으로 투자하겠다는 것도 다른 이유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달콤하고 낭만적인 기분에 취해서도 아니었다. 그러기엔 너무 많은 나이였고 이미 내 과거가 그런 것과 무관하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증명했다. - P397

낭만만 즐겨요. 낭만이 되진 말고. - P401

하진을 사랑할수록, 나는 점점 부모 자식 간의 사랑과 연인 간의 사랑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굳이 차이를 두자면 연인 간의 사랑이 어떤 준비 과정 같다고, 더 크고 깊게 사랑할 존재를 위한 연습과 훈련 같다는 것 정도였다. 사랑이 뭔지, 자신이 어떻고 관계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배워 나가는 아닐 이유도 없지 않을까? 둘 다똑같이 사랑이라고 부르니까. - P407

갑자기 직진해 사고를 일으킨 오토바이는 그대로 사라졌다.
경찰이 소재 파악 중이라고 했지만 쉬울 것 같지 않았다. 번호판도 일부러 시커멓게 가린, 불법개조 오토바이였다. 단속은 안하고 사고 난 뒤에야 소재 파악. 현실이 그런 것이기도 했다. 일어날 일에 대비하기보다 안 일어날 거라고 믿는 편이 늘 쉬우니까. - P415

•병원 소독약 냄새로는 부족해요?
수준연이 피식 웃었고, 나도 같이 웃었다. 그제야. -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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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경기도 외곽 소도시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할 때였다. 한 학생이 여러 날 학교에 오지 않았다. 그 학생은 할머니, 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고, 아버지는 다른 도시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빈곤 대물림에 대한 박사논문을 준비하면서 이십여 명의 청소년과 가족들을 만났다.
2016년 논문을 끝낸 후, 이들이 어른이 된 이후의 삶까지계속 따라가는 책을 쓰기로 했고, 여섯 명의 청소년이 흔쾌히 참여 의사를 밝혔다. 첫 만남부터 강렬했던 소희, 모범생 중의 모범생 영성, 에너지가 넘쳤던 지현, 빈곤 이후의 삶을 진솔하게 들려준 수정, 어두운 과거를 교훈삼아일어선 현석, 여전히 홀로서기 중인 혜주. 이들을 3, 4년에한 번씩 만나 세 차례 이상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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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했음 해 - P31

네 목구멍이 목마름으로 타들어 가듯네 몸의 새가 타올랐음, - P31

나는 깃털을 뽑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왜 여기다 붙이는가알은 깨어지고 왜 거기서 털도 없는 것이 나오는가 - P33

새로 태어난 새들이 물결 위에 앉아 부리로노란 깃털을 하나하나 쓰다듬는 방 - P35

나는 하늘과 땅 사이를 베고 싶다엄마가 누운 곳만 빼고 다 베고 싶다 - P38

두 발에 매달린 은줄이 찰랑거린다 - P39

저 건너 도시의 불이 하나씩 켜집니다 - P41

해탈한 스님은 늘 같은 나무 아래, 새는 늘 같은 스님머리 위에 있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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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진짜 물속에서도 전화 울리니?" - P170

아이의 뇌가 번개에 맞을 모든 가능성을 내가 다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그것에 전혀 대비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24시간 중 23시간 59분 동안 아이만 쳐다보고 있었더라도 딴 데 보고 있었던 1분 동안 일은 벌어지려면 벌어지는 거였다. 삶의 어느 한 요소도 예측할 수 없다는 현실이 숨 막히고 기막혔다. - P174

내 수모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Turn, Baby turn.
그래, 계속해 보지 뭐. - P176

캔커피에 녹여 삼킨그 시절의 불안 - P153

입원 기간 아이를 봐준 시어머니가 대구로 돌아갈 채비를 서두르신다. 좀 전까지 가스 불을 쓰신 모양인지 부엌에서 열기가 느껴지고 식탁 위에는 내가 좋아하는 부추전이 스무 장쯤 쌓여 있다. 외투를 챙기며 그냥 누워 쉬어라, 그렇게 애 안고 있지 말아라, 그러다 배 찢어진다고하시는데 그때 내가 웃었던가, 웃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었던가. - P152

내 안에서 ‘은지의 커피가 더 맛있다고 너 왜 바로 말못 했어?‘ 묻는 목소리를 분명히 들었지만 못 들은 척, 우겨보기로 한다. - P163

된 아이의그토록 머나먼 곳에 내 아이가 있었다. 어떻게 해도내 손이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아이가 숨 쉬고 누워 있었다. 아이와 내가 어딘가 이어져 있다고 믿는 건 완전한 착각이었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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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옹은 ‘우리(we)의 포옹‘이란 뜻의 합성어로 클럽에 가입하려면 아래의 항목에 동의해야 했다. - P14

"안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을 때가 있잖아요?" - P17

"제가 나서서 이응을 심었죠. 학생 복지를 위해서요.‘
우유수염은 학교 기숙사에 이응이 없어서 자신이 친구들과 의견을 모아 최신 버전의 이응을 들여놓았다고 했다. 한창 컨디션이 좋을 땐 점심시간에 밥을 먹고 기숙사로 달려가 이응을 한다음 책상 앞에 돌아와 앉아도 오 분이 남았다고 했다. - P20

"클리토리스의 파시니 소체는 페니스의 귀두보다 두 배 많은신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P25

"성욕을 풀려고 연애하고 결혼하는 열등한 짓은 그만둡시다!" - P24

"시험관아기가 뭐야?"
나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는 숨김없이 대답해주었다.
"고추 대신 주사기로 정자를 쏘는 거." - P25

오히려 나는 나를 잊게 해주는 누군가의 이야기에서 느리고 모호한 쾌감을 느꼈다. 내가 좋아하는 건아무도 찾지 않는 도서실의 고전문학 서가에 앉아 책을 통해 누군가의 느낌이나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글로 쓰이고, 종이에 인쇄된 인간의 욕구가 나에게는 위협적이지 않을 만큼만 생생했고, 그렇기에 안전하게 나를 열 수 있었다. 미 - P30

"차차 가리겠지. 차차 배우겠지. 너무 몰아붙이지 마라."
하지만 보리차차는 차차 배우거나 달라질 수 없었다. - P32

"그거 알아요? 인간은 기계 앞에서 제일 솔직해요." - P34

우리의 스토리가 마음에 드셨습니까? - P46

나는 울고 있었지만, 비옷을 입고 빗속을 걷는 것처럼 두 뺨은눈물 자국 없이 보송했다. - P46

그렇다면 성욕은? 성욕은 만지고 닿고 싶은 마음과 어떻게 다를까. 설마 그 모든 접촉의 기쁨이 번식이란 최종 목표를 위한 달콤한 미끼 같은 것일까. 대체 성은 무엇이길래 이토록 세상을 풍부하게, 또 폭력적으로 만드는 걸까. 왜 날마다 잔혹한 성범죄 뉴스가 끊이지 않는 걸까. 이만큼 기술과 과학이 발달한 사회라면,
그 문명을 앞다퉈 자랑하는 인류라면, 성에 대해, 주기적으로 맺혔다가 풀어지길 반복하는 그 욕구에 관해 다른 접근 방법을 고민하고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 P49

이 소설은 이런 길들을 거쳐 저에게 왔습니다. 저를 깨우치게한 책들과 나무가 자라 있는 풍경, 그 안에 머무는 개와 새들이 제가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겨 떠올리고픈 이미지입니다. 그 기억을 따라 저는 넘어지고 발을 헛디디며 틈과 오류로 가득한 ‘이응‘
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기억은 ‘ㅇ‘이란 글자의 생김새처럼 저를 지나쳐 또다른 곳으로 굴러갑니다. 부디 이 소설이 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구 굴러가 자신만의 이응을 그려내는 누군가에게 잘 썩은 낙엽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온 세상이 등 돌리고 선 듯한 절망에 빠진다 해도, 그 이응 안에서 자기 자신만은스스로를 꽉 안아주면 좋겠습니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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