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빠지진 않았어?"
영경은 그거 아주 훌륭한 질문이라는 듯 고개를 돌려 두 언니들을 차례로 보았다.
"어떻게 더 안 나빠지겠어? 원래 나빠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없는 병이라는데." - P15

수환이 뻣뻣한 손을 움직여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하자 영경은그의 병상 옆으로 와서 눈을 내리깔았다. 오전 면회 때 기순이 붙들고 울던, 제멋대로 자란 관목처럼 굽고 흰 그의 손가락 위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 P20

"내가 생각해봤는데 이 비유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시킬 수 있을것 같아. 분자에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놓고 분모에 그 사람의 나쁜점을 놓으면 그 사람의 값이 나오는 식이지. 아무리 장점이 많아도단점이 더 많으면 그 값은 1보다 작고 그 역이면 1보다 크고." - P25

그나마 자신의 분자를 조금이라도 늘리는 일이라고, 영경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조금이라도 크게 만드는 일이라고 수환은 생각했다. - P27

영경은 컵라면과 소주 한병을 비우고 과자 한봉지와 페트 소주와 생수를 사가지고 편의점을 나왔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영경은 큰 소리로 외치며 걸었다.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영경은 작은 모텔 입구에 멈춰 섰다.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갑자기 수환이 보고 싶었다. 오후에 면회를 온 영선과 영미 생각도 났다. 그 아이가 살아 있다면, 하고 생각하다 영경은 고개를흔들었다. 촛불 모양의 흰 봉오리를 매단 목련나무 아래에서 그녀는 소리 내어 울었다. 울면서도 자신이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감정조절장애 때문에 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P33

종우는 손을 우뚝거리며 잠시 멍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열린 문틈으로 늙은 간호사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요양원 사람들은 입주자들뿐 아니라 의사와 간호사, 직원들까지도 모두 늙었다. 힘을 써야 하는 몇몇 간병인들만이 젊었다. 종우는 자신이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 P37

몸이 어느정도 회복된 후에도 영경은 여전히 수환의 존재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다만 자신의 인생에서 뭔가 엄청난 것이 증발했다는 것만은 느끼고 있는 듯했다. 영경은 계속 뭔가를 찾아 두리번거렸고 다른 환자들의 병실 문을 함부로 열고 돌아다녔다. 요양원 사람들은 수환이 죽었을 때 자신들이 연락 두절인 영경에게 품었던 단단한 적의가 푹 끓인 무처럼 물러져 깊은 동정과 연민으로바뀐 것을 느꼈다. l - P39

가끔 영경의 눈앞엔 조숙한 소년 같기도 하고 쫓기는 짐승 같기도 한, 놀란 듯하면서도 긴장된 두개의 눈동자가 떠오르곤 했는데,
그럴 때면 종우가 대체 무슨 일이냐고, 왜 그러느냐고 거듭 묻는데도영경은 오랜 시간 울기만 했다. - P39

미리 뺐지. 갔다 와서 빼면 더 이상할 거 같아서. 그러니 얼마나낯설어, 집이? 거실에 내 책이랑 음반 빠진 자리가 뻥뻥 뚫렸는데그걸 보고 있으려니 잠이 오겠냐고? 근데 주란이 저거 말하는 본새좀 보라고 규가 흥분했다. 안 자고 부스럭이 뭐냐, 부스럭이? 내가과자봉지냐? - P46

그들이 떠날 때까지 개가 죽을 둥 살 둥 깨어있었던 것에 대해 규와 훈은 의견이 갈렸다. 규는 낯선 사람들이자기를 해코지할까봐 그런 거라 했고, 훈은 낯선 사람들로부터 주인집을 지키느라 그런 거라 했다. 둘 다 주장의 근거로 다친 뒷다리를 들었는데, 규는 그로 인해 강화된 개의 자기방어기제에 무게를 실었고, 훈은 그로 인해 강화된 개의 주인에 대한 의존과 충성심에 중점을 두었다. 주란은 가엾은 개의 이력에 대해 쥐뿔도 모르면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지 말라고 충고했다. - P49

너희들은 아무튼 평생 종합적이질 못해. 이번에도 보라고. 한놈은 생태만 보고 한놈은 습지만 보잖아. - P51

던져 놓으면 어쩌나? 얼른 펴서 하우스를 지어야지.
훈은 저들 부부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이런 식의 걱정도 팔자인 대화를 나누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양양을 지나 낙산 쪽으로접어들자 오른편에 다시 그립고 푸른 바다가 나타났다. 활공하는새들도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는데 훈은 그게 오히려 낯설었다. 속초에 도착할 때까지 작은 항과 해수욕장들을 거점으로 한유흥지들이 꽈배기처럼 부풀었다 줄어들며 7번국도를 감싸고 꿈틀꿈틀 이어졌다. - P54

왜?
모기 같은 건 고객님 부담이래.
훈도 웃었다.
모기 같은 건 우리 부담이래?
응, 우리 부담이래.
어쩌냐, 부담스러워서 - P56

딱 두놈이거든 젊은 놈 하나 늙은 놈 하나 후우, 젊은 놈이 직장 담당이고 늙은 놈이 지역 담당인데 늙은 놈이 받아서 후우, 본인이담당자가 아니라고 하는 거야 자기는 직장 담당이고 후우, 지역 담당은 따로 있습니다 그러는 거야 분명히 목소리는 후우, 늙은 놈맞는데 환장할 노릇이지. - P61

다 메스껍다!
오래 씻어서 미안하다.
다 메스꺼워! 다 메스껍다고! - P68

"글에 담긴 기운이라고 해야 하나? 글자도 아니고, 글씨체도 아니고."
"문체요?" - P79

나는 좀 부끄러워하면서 달링과 신랑을 합쳐 달랑이라고 부른다고 대답했다.
"달랑이라고 부르면 달랑거리면서 달려오겠구나."
결혼도 하지 않은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뜻밖의 농담에 나는당황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에는 딱히 장난기라고 할 만한 것이보이지 않았고 말투도 날씨 얘기를 하듯 무심했다. - P83

그렇게 그녀와 나는 두달 남짓, 나름대로 공평하고 정직하게 월요일 오후에 그녀의 집에서 만나 묽은 블랙커피를 마시며 얘기를나눴다. 누군가의 삶을 간단히 요약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모의 삶이야말로 가장 간단히 요약될 수 있는 삶이 아닐까 싶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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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보다는 추한 삶을 더 두려워해야 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그동안 가치 체계가 뒤집히긴 했다. 플라톤은 지식의 단계도 나이를 따라간다고 보았기 때문에 50세가 넘어야만 선을관조할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플라톤의 국가는 일종의 "입헌노인통치 체제라고 할 수 있다. - P13

사실, 나이는 우리가 비교적 기꺼이 따르는 협약이다. - P16

늙는 것이야말로인간이 유일하게 찾아낸 오래 사는 법이다.
-샤를 오귀스탱 생트-뵈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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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당신이 달리 할 일이 없고 인생이 따분하다고 생각하고있다면, 반드시 이 세계로 들어오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펜을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지금부터 장황하게 늘어놓은 말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당신에게 보내려 합니다. - P34

재능이 있다고 해서 원고지를 마주하자마자 바로 멋진 소설을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화에 사용되는 언어를 좀 안다거나 글로 쓰는 언어에 좀 익숙하다고 해서, 문학 작품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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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달이 끝날 무렵 긴급히 조사할 일이 생겨서 내 퇴근 시간이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여느 때 같으면 대개 7시까지는 돌아와서 나오미와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었지만, 9시까지회사에 남아 있다가 돌아오면 그럭저럭 11시가 넘게 됩니다.
그런 밤이 대엿새나 계속될 예정이었는데, 정확히 나흘째 되던날이었습니다. - P192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쫓아낼 수는 없잖아."
"안 되는 게 어디 있어요. 방해가 되니까 돌아가 달라고 냉큼 쫓아내주겠어요.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나요?"
"그랬다가는 또 구마가이한테 놀림을 받을걸."
"놀림을 받아도 좋잖아요. 남들이 모처럼 가마쿠라까지 왔는데 방해하러 오는 사람이 나쁘죠." - P191

기라코는 반쯤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리고 반쯤은 경멸하는 듯한 눈으로 나오미의 얼굴을 훔쳐보면서 어디까지나 "어머나!"라는 한 마디로만 대꾸했습니다. - P139

"어머나, 뭔데요?"
"아니, 저분이 원숭이 같은 느낌을 주잖아요. 그래서 내가일부러 원숭이, 원숭이 하고 말해준 거예요." - P139

그러자 나오미는 허리춤에서 부채를 꺼내 건네주고는,
"그래도 하마상은 아주 잘하던데요. 어시스턴트 자격이 충분해요. 언제부터 배우기 시작했어요?" - P93

"왜?"
"나도 댄스를 할 수 있을까‘ 하고 말했잖아요?"
그래서 나는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왠지 나오미에게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 P103

‘카페 엘도라도‘로 댄스를 하러 간 것은 토요일 밤이었습니다.
오후 7시 반부터라고 해서 5시쯤 회사에서 돌아와 보니, 나오미는 벌써 목욕을 끝내고 웃통을 벗은 채 부지런히 화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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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높고 먼 곳에서 바라보면 - P103

스크린과 관객은 계약 관계다. - P105

마음을 다지고 최전선에 섰더니, 영화가 사라졌다. 상투적인 표현으로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 - P111

대개 재난 영화에서 재난은 극복해야 할 상황으로 제시될 따름이다. 정작 영화가 뼈대로 삼는 건 재난이 아니라 이를 돌파하는 인물들의 관계다. 어떤 경우 이는 주인공의 영웅담으로 포장되기도 하고, 인물의 성장을 따라가기도 하며간간이 로맨스가 양념처럼 버무려지는 경우도 있다. 대개는위기 상황에 놓인 인물들의 연대에 초점이 맞춰지며 재난이라는 압력이 더해질수록 관계는 단단해진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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