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인
이혁진 지음 / 민음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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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초반부의 예술론에 취하듯 홀리고 나면 후반부 미친남자의 판소리가 광광 울려 퍼집니다… 그야 말로 미친 사랑의 노래 이 책은 소설보다 장시에 가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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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야 사는 거 같으니까, 사는 맛이 그거니까. 남들 못하는걸 나만 할 때, 남들 모르게 나만 아는 걸 하는, 바로 그때. - P489

이날을 기다렸다. 늘 이날을 기다렸지. 이 병을 샀을 때부터언젠가 올 이날을 고대했다. 마셔 보자. 37년 전에 병입한, 31년산 캠벨타운 위스키가 어떤 맛을 내는지. 온더록스 잔에 아버지는 넉넉히 위스키를 따라 내게 건넸다. - P491

오면서 밟아 왔던 그 언 눈이 아니라 싱싱하고 보들보들한 새 눈이었고, 이 눈 덕분에 불길은 얌전하고 착실하게 이 증류소만을 태워줄 터였다. 고생 끝에 낙이 있었다. - P509

톡, 톡, 톡, 톡. 자른 손톱을 줄로 갈고 15분 정도 따뜻한 수건을 덮은 채 마사지를 받은 나는 나른한 기지개와 함께 바버숍의자에서 일어섰다. 마사지를 해줬던 여자가 재킷을 가져와 뒤에서 입혀줬다. 나는 재킷을 입고 느슨히 했던 넥타이를 바짝당겨 맸다. 내가 원했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어떻게 봐도 방화범처럼 보이지 않는, 모든 면에서 세련되고 기품 있고 다소 권위적이지만 섬세하고 앳된 인상의 남자, 내 아버지와 너무나 닮은 아버지의 분신, 같은 성을 물려받은 아버지의 유일무이한 혈족이 거울 속에 있었다. - P524

더는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었다. 나는 하진한테 가야 했다.
수갑을 차고 철창에 갇히더라도, 하진의 저주를 받고 성대가 찢어질 것 같은 하진의 절규를 듣더라도, 그 때문에 내가 한 번도느껴 본 적 없는 고통과 후회를 느끼고 차라리 내 손으로 모가지에 칼을 쑤셔 박고 싶어지더라도 이러고 있을 수 없었다. 아버지와 얘기를 맞추고 내 거짓말을 짜맞추고 그런 걸, 그따위걸 나는 할 수 없었다. 가야 했다. - P536

나는 기다렸다. 하진이 나아지기를, 다시 일어서기를 하진은 그럴 수 있는 여자니까. 이전까지, 그 모든 일에도 꺾이지 않고 더 올곧고 옹골차게 자신을 길러 냈던 사람이니까. 처음부터먼저 성큼성큼 다가왔던, 한창 말다툼 중에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내가 안아 달라고 하면 주저 없이 안아 주던, 자기 자신뿐 아니라 자기 삶까지 강력하게 사랑할 줄 알았던 사람이니까. 그게내 유일한 희망이었다. 모든 게 재가 돼도 재가 될 수 없는 것을가진 내가 사랑한 하진. - P553

아무것도요. 아무것도 안 했죠. 준연은 두 손을 드러내 보였다. 하진과 사랑을 하지도 않았고 해원 씨한테 하진을 놓아 달라고도 안 했고 하진에게 해원 씨가 나한테 와서 그런 짓까지했다는 말도 안 했고, 아무것도 안 했어요. 전. 아무것도 한게없는데, 다 해원 씨 혼자 벌인 일이죠. 다. 전부 다 해원 씨 혼자 - P564

우린 악연인가요?
오늘 제가 보고 싶어서 찾아왔나요? - P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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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이 지난 지 이틀인가 사흘 뒤 나는 경찰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권준연의 친구가 맞냐고. - P413

그래서 더 상품이고 여지없는 제품인 거죠. 아니라면, 작품이라면 왜 예술가들과 협업을 하겠어요? 이미 작품인데요? 배우들은 시장에서 산 옷을 뒤집어 입어도 배우예요. 사진가들은 싸구려 똑딱이 카메라로도 기가 막힌 걸 찍어내요. 예술가들은 명•품이 별로 필요하지 않지만 명품들은 늘 예술가들이 필요하다못해 매 시즌마다 갈아치우기까지 하죠. 작품인 척해야 하니까•요. 너무나 제품이고 상품이라서 항상 새거여야 하고 남다른 척해야 하니까요. - P420

같은 얘기잖아. 결국 그것 때문에 우리 결혼이 영향을 받는거잖아! - P450

지난번 해줬던 말, 여러 번 생각했어. 서로에게 최악이 되지않고 다만 최악을 지워 주는 사람이 된다는 것. 그게 사랑하는사람이 사랑하는 사람한테 해 줄 수 있는 최선인 것 같아. 사랑은 기꺼이 두 번째가 되어 주는 거니까. 더는 어떤 이유가 남아있지 않을 때 마지막 이유가 되어 주는 게 사랑이지. 해원이 이미 내게 그런 사람이고 나도 해원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 P455

두 사람의 영상을 보고 나면 나는 노트북 컴퓨터를 열어젖히고 새벽 2시고, 3시고 뭔가를 써 내려갔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방화기획서, 그걸 쓰는 동안에는 즐거웠으니까. 증류소를 삼키는 화염, 승리의 트럼펫 소리처럼 울려 퍼질 시커먼 연기를 떠올리면 내 괴로움들이, 불안함과 두려움, 수치스러움과 열패감이 모두 증발하고 산화하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무거운 머리로 눈을 뜨면 망상이라는 생각과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냐는 자괴감에 시달렸지만. 한동안은 계정까지 지워 일부러 영상을 안 보려기도 했다. 하지만 영상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 P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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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선 비슷한 냄새가 나요. 무언가를 태울 때 나는 냄새. 옷에 스며든 불과 재의 기운. 그런냄새를 맡을 때마다 나는 은밀하게 부풀어요. - P58

물빛은 물과 빛의 포개짐이지만물은 물에게로, 빛은 빛에게로 돌아갈 뿐이죠. - P59

다만 나의 잎은 뾰족하여 악몽을 터트리기 좋고흙은 비밀을 감추기에 적당한 재료인 것입니다 - P61

근사한 여행이었죠?
여독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그가 묻는다. - P70

손가락을 움직이면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곳이너의 나라이구나. 사월이 끝났을 뿐인데 세상이 끝나버린기분이 들어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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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시계는 자정 90초 전을 가리키고 있다. - P273

내가 허공에 손을 저어본 게 한 번은 아니다. - P273

첫째와 둘째는 한몸 같기도 하고 나는 밥그릇도 부모도 버릴 수 없다. 사실 버리기 싫은 것이지 버릴 수 없는 건 아니다. - P275

만약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다" 같은 주문이 포함되어야 한다면 어떨까. ‘사랑하다‘는 ‘잘 살다‘
만큼이나 모호해서 다시 여러 하위 주문을 요구한다. - P282

지구 종말 시계가 자정 90초 전을 가리키는 2024년은 슈퍼선거의 해‘로 불린다. 76개국에서 대선 혹은 총선이 시행되어,
인류의 절반에 가까운 사십억 명이 참여한다. 그중 약육퍼센트인 이억삼천만 명만이 미국 대선 투표권을 갖고 있으며 실제로투표하는 이는 더 적다. - P283

이러한 관점에서 이차세계대전을끝낸 폭발 이후 현재까지의 시대를 핵에 의한 평화, 즉 ‘팍스아토미카 Pax Atomica‘라 부르기도 한다. - P292

"당신은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어요."
뒷부분은 1997년 작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줄거리다. 잭 니컬슨이 강박장애를 겪는 베스트셀러 소설가로, 헬렌 헌트가 활기차고 너그러운 싱글맘 웨이트리스로 출연했다.
저 대사가 유명하다. 즐길 만한 로맨틱 코미디임에도 ‘괴팍하지만 본성은 선한 나를 그녀만이 알아보고 치유한다‘는 줄거리는 신뢰할 수 없다. 누구도 누구를 치유하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마음의 상호확증파괴다.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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