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에서 정한 청년의 커트라인인 만 삼십오 세에 딱 걸리는 나이였다. 신청 서류를 작성하다가 사업 계획을 쓰는 칸에서한참을 망설였다. - P162

승호가 애써주었지만 이번에도 잘해볼 수가 없었다. 나는 신청일 기준으로 생일이 보름 정도 지나버려 더는 만 삼십오 세가 아니었던 것이다. 담당자를 붙들고 공고일 기준이 아니었느냐고 거의 울다시피 물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하여튼 쉬운게 없었다. 그래도 식당은 계획대로 열기로 했다. - P163

그건 실패했다는 뜻이었다. 그 장면을 떠올리자니 해피 트리가 시들지 않도록 잘 가꾸어야만 식당도망하지 않을 거라는 이상한 믿음이 생겨났다. - P165

정말 좋지는 않겠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만. 가족들이 지나치게맘 아파하며 걱정하는 꼴을 보기 싫어서 괜찮은 척 약을 파느라하는 헛소리겠지만 우리가 불행을 극복하는 방식은 태연해지는것이었다. 낫는다는 것을 믿고 그 미래가 이미 도래한 것처럼 굴기. 그렇게 하면 반복되는 불행을 점점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있었다. - P167

- 미안. 그거 진심 아니었다.
-안다. - P181

하지만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는 미래만 기다리며 현재를 견디는 것은 오래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제는 미래 쪽에서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미래는 내가 어서빨리 지쳐 낙오되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 P183

아무려나, 그 모든 걸 다 합한 것이 화영이었다. - P192

"화살표를 따라가시면 돼요."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젓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거기서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해야만 하는 일이 많았다. 원하든 원치 않는 삶은 오랫동안 계속될 것이고 거기엔 아주많은 공을 들여야만 한다.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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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자주 종이컵 전화기를 만들곤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긴전화를 만들겠노라고 떵떵대면서요. 같이 놀자는 전화도 수줍게집 전화로 걸던 시절이었으므로 그때 그 종이컵 전화기는 제게 소중한 장난감이었습니다.

매일 라디오 문자창에 모르는 이의 문자가 도착합니다.
생일입니다. 축하해주세요!
오늘은 이유 없이 기분이 좋네요.
오늘 너무 힘이 듭니다.
힘이 든다는 말에서 마우스를 멈춥니다. - P17

라디오로 보내준 어떤 분의 사연이 마음에 오래 남아있습니다. 유리컵에 꽂힌 노란 소국 사진을 보내며 생각보다 오래 버텨주는 꽃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내년에는 꽃을 마음껏 살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라는 한 줄도 덧붙였지요.
맞습니다. 꽃을 사는 일은 어찌 보면 꽤 어려운 일입니다. 이분말씀처럼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하고, 꽃을 살 수 있는 경제적 여유도 따라야 합니다. 꽃이 밥은 아니니까요.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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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계셨나요? 하하. 이거 다 들통나버렸네요. 사실 표지 색깔은 저도 몰랐습니다. 1980년대에 출판된 어린이책이라고 하면사용하는 색이 몇 가지 안 되니까요. 인쇄기술도 지금에 비하면 형편이 어려웠잖아요. 《꽃들에게 희망을》 같은 경우 나비 이야기니까 표지가 노란색이죠.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주인공이 나무니까 초록색. 그렇게 직관적으로 색을 썼어요. 제목이나 내용에서 색을 유추하기 모호한 경우는 보통 노란색이라고 생각하면 얼추 맞더라고요. 지금은 딱히 그렇지 않지만 오래전엔 ‘어린이는 노란색‘이라는 등식 같은 게 있었잖아요? 니콜라 책도 그렇게 유추해본 겁니다." - P44

책을 받아든 C씨는 아직 그게 뭔지도 모를 아기에게 책을 보여주었다. 아기는 그 안에 무슨내용이 들었는지, 게다가 그 사연까지 다 아는 것처럼 표지를 보자마자 까르르까르르 웃으며 손을 뻗어 책을 잡으려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모두 다 같이 아기를 따라 큰 소리로 웃었다. 책방은 한순간 개구쟁이 초등학생들이 모인 교실처럼 떠들썩한 웃음소리로 가득해졌다. - P49

책 한권을 40년 만에 다 읽은 사람이 있다. 종교 경전이 아니다. 그것은 한때 흔하게 사람들 손에 들려 있던 대중소설이다. 몇십년 전에는 유명했지만, 지금도 그 책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겐 아주 소중한 책이다. - P50

"그 친구가 말하길, 처음에 책 이야기를 하면 어쨌든 호감을 살 수 있다고 그러더군요. 상대 이름이 영자라고 하니까 잘됐다고하면서 《영자의 전성시대》 이야기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보라고 그랬습니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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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임자의 대담함도후임자의 참을성도 갖지 못했던 나는 그럴 때마다 체했다. - P166

그 애착은 과연 찰나적이었지만, 나를 실망시키거나 공허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관계의 밀도가 영원히 동일하지 않다고 해서 기억들이 휘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P167

매일 밤 현관문을 열면 고양이가 잠결에 반쯤 감긴 눈으로 달려 나온다. 그 순간의 애틋함은 그해 여름 전까지 몰랐던 종류의 감정이다. - P171

왜 그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가 내가 될 수 없는 건지 그땐 알지 못했다. 자신은 나보다 더복잡하면서 왜 단순한 사람을 편안해하는지, 나보다 더 어두우면서 왜 화사한 사람을 바라보는지.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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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어본 조세희 작가의 소설집은 《난장이가 쏘아올린작은 공》한 권이다. 이후에 사진 산문집과 단편집을 냈지만적어도 ‘그런‘ 작품은 다시 쓰지 않았다(혹은 쓰지 못했다).
짐작하건대 그에게 그 한 번의 소설 쓰기는 지섭이 단 한 번사용했던 지식인의 언어와도 같았을 것이다. - P121

사용언젠가 인터뷰에서 왜 작품 활동을 계속 하지 않느냐는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 바 있다. "글 쓰는 것은 늘 싸우는느낌이라, 침묵은 싸움에서 패배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죠. 작가에게 제일 어려운 것은 좋은 글을 쓰는 것이고, 그다음에 어려운 것이 안 쓰는 것, 세 번째로 어려운 것이 침묵인것 같습니다. 난 침묵을 즐겁게 받아들였습니다." - P121

말하자면 그것은 ‘담아냄의 윤리‘가 아닐까. - P126

나는 기쁘지 않았다. 거대한 간판 뒤에 가려진 부서진판잣집들이 떠올랐다. 아름다운 도시라는 것은 어떤 삶들을감추고 치움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구나. - P134

대학 시절, 모교에서 ‘부르주아 동아리‘의 양대산맥으로 거론되던 것이 스키부와 관현악단이었다. 이들에관한 짓궂은 유머가 난무했다. 가령 스키부는 막걸리 대신찹쌀동동주 마시고, 관현악단은 여름 합숙 가면 아침 식사로염소치즈와 크루아상을 먹는다는 식이었다. 경사진 눈길에서 왜 굳이 긴 신발 신고 미끄러지나 싶어 스키부는 부럽지않았으나 오케스트라는 남몰래 동경했다. 염소치즈 때문은아니었고, 여러 악기 소리들이 모여 선율을 만드는 것이 멋져 보였다. - P137

그래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정치 관련 기사를 읽고, ‘법과
‘사회‘를 공부하고, 그들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려고 노력했다. 그러한 작은 하루, 몇 시간이 나에게는 잊지 못할 일이 되었고, 그때 자신 있게 촛불을 들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하며 지금 열심히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역사 속에서 내가 바뀌며, 결국에는 이러한 미시사를 가진 개인 하나하나가 모여 역사를 바꾼다고 생각했다. - P136

관계의 밀도가 영원히 동일하지 않다고 해서기억들이 휘발되는 것은 아니다.
즐거움은 즐거움으로,
고마움은 고마움으로 영원히 남는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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