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나는 또한,
당신이 없는 지금 이곳을 상상합니다. 당신의 어머니, 그러니까 나의 자매 해수가 나와 함께 정동길을 걸으며 서로가 꿈꾸었던 미래를 이야기하던 그때와 다름없이, 우리가 나란히각자의 두 발로 자기만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말입니다. 당신이 없는 그곳에서도 당신에 대한 나의사랑은 분명 다르지않으리라는 것을, 그 다른 세계에서도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분명 굳건할 것임을당신이 이해하는 날이 오기를.

조한흠이 열한 살이던 1961년 초여름 밤. 야간통행금지를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홑이불 속으로 들어가 군용 손전등을 밝힌 조한흠은 벌써 수십 번도 더 읽은 만화책 한 권을 다시 펼쳤다. 장충단공원 한구석에 책장수가 펼친 좌판에서 헐값으로 사 온 『라이파이』였다. 검은 안대를 쓰고 흰 두건을 이마에 두른 라이파이는 그날도 연두색 쫄쫄이유니폼을 입고서 광활한 초원을 누볐다. 몽골 기마병과 아메리칸인디언을 섞어놓은 초원의 무법자 이루쿳치족들이 라이파이의 돌려차기 한 방에 우르르 나가떨어졌다. 여느 때 같았다면 라이파이의 전용 비행선 제비기가 V자 구름을 그리며표표히 사라지는 마지막 장면까지 읽었을지도 모른다. - P7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멍가게 앞, 대낮부터평상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는 사람들.
한량. - P26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이렇게 밤식빵을 좋아하게 된 이유에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가 있다. 늦은 저녁, 술을 잔뜩 마시고귀가하는 아빠가 통닭이나 아이스크림, 단팥빵처럼 자신들의 입맛을 반영한 음식을 한가득 사 오는 모습이다. 미디어에서 많이접해 익숙한 모습이다. 실제로도 많은 아버지가 그런 식으로 귀갓길에 아이들의 입맛은 반영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취향으로 가득 채운 군것질을 사들고 갈 것이다. 우리 아빠도 그런 사람이다.
주 종목은 빵, 그것도 밤식빵,

여행지에서 먹은 음식은 전부 특별하겠지만 유독 더 특별하게느껴지는 음식이 있다. 그때 르뱅쿠키는 내게 뉴욕 그 자체였다.
요즘 나는 힘들 때마다 센트럴파크에서 르뱅쿠키를 먹던 때를 생각한다.

‘그래, 뭐 어떻게든 해보지 뭐.
그렇게 비닐을 열었다. 일단 씻기로 했다. 두세 배는 늘어난 김칫국물을 싹 다 버리고 한 포기, 한 포기, 찬물에 깨끗이 씻었다.
붉은 김치가 노랗게, 노란 내 손은 붉게 변했다. 고무장갑이라도끼고 할 걸 그랬다. 김치 통에 나누어 담는데 한 20포기는 되었나보다. 이사 가기까지는 3주 정도 남았을 시점, 누구에게 나눠주기도 좀 민망한 김치였으므로 스스로 처리하자면 하루에 한포기는해치워야 한다. - P29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전고운 외 지음 / 유선사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쓰기 위해 애쓰는 마음과 쓸 수 없어 쓸쓸한 시간들이 오롯이 모여 다시 쓰기를 시작하는 순간듪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은 이미 시를 알고 있습니다가을입니다. 나뭇잎 빛깔이 진해지더니 성질 급한 잎들이 가지에서 벗어나 툭 툭 떨어집니다. 낙엽을 바라보며 당신은 생각에잠기겠지요. 떨어진 잎과 떨어지지 않은 잎 사이, 그 시차에서 무언가 발견한 걸까요?
(당신은 속으로 중얼거립니다. 그건 당신에게만 들리는 말, ‘아직‘ 당신에게 속한 말이지요. 한 사람이 내면에 품었던 말을 종이위에 풀어주면 시가 되기도 하지요. 당신 곁에서, 한때 내가 품고 기르던 말을 중얼거려봅니다. - P12

혼자 무언가 끼적이는 일. 속으로 두런두런 혼잣말하는 일.
익숙하던 것에서 낯선 모습을 발견하는 일.
뻔하게 말고,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일.
슬프다고 하지 않고 "슬픔이 나를 깨운다"" 하고 말하는 일. - P13

태어나 처음 십여 년을 사는 동안 우리는 누구나 시인으로 삽니다. 상상력이 빈곤하거나 구태의연한 아이가 없다는 게 그 증거지요. 상상력의 천재인 아이들에게 시를 써보라 하면, 어른들처럼 쩔쩔매는 아이는 많지 않습니다. "시가 뭐예요?"라고 묻는 아이도 거의 없습니다. 그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쓱쓱 쉽게 써 내려갑니다. 여덟 살 꼬맹이가 제 앞에서 ‘수박‘이란 제목으로 동시를 쓰던 순간을 기억해요. 빨간 집 속에서 까만 사람들이 외친다. 불이야! 불이야!" 저는 이 놀라운 문장을 지금도 외고 있습니다. 감탄한 저를 뒤로하고 아이는 씨익 웃을 뿐 다음 문장을 써 내려가더군요. 아이들은 생각이 발랄하고 도무지 진부함을 모른 채 창의적입니다. 세상 모든 게 다 눈부신 ‘새것‘으로 보이기 때문일까요? 그들의 목소리는 별 뜻도 없이 시적입니다. - P14

시와 슬픔처음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시는 슬픔의 것이다. 그러다 생각을 고쳤습니다. 슬픔은 시의 것이다. 이게 조금 더 참말에 가까울듯합니다. 슬픔은 꼭 시를 품지 않아도 얼마든지 슬픔 수 있지만, 시는 슬픔을 노래하지 않을 때조차 슬픔에 속해있습니다. 기쁨도노여움도 냉정함도 ‘슬픔‘이란 방에서 일어나는 일이지요. 시는 쓰는 이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네 눈물 속에 네 웃음 속에 네 울음 속에날 데려가렴."
* 마르그리트 뒤라스, 이게 다에요. 문학동네 - P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