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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식당 개성밥상 - 고려의 맛과 멋이 담긴
정혜경 지음 / 들녘 / 2021년 2월
평점 :
개성 음식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 책을 펼쳤다. 그런데 화수분처럼 흥미로운 이야기가 이어져, 처음 제목에서 느꼈던 약간의 딱딱한 이미지, 508쪽의 방대한 분량과 무게감에 바짝 긴장하던 마음이 스르르 풀어진다. 저자는 통일된 한반도에서 마주할 밥상은 서울도 평양도 아닌 '개성'밥상이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이 책을 읽어가다 보면, 그 해답과 만날 수 있다.
개성은 고려 왕조 500년의 수도였기에, 저자는 1부에서 먼저 고려의 음식 문화를 소개한다. 2부에서는 어떤 개성 음식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3부에서는 일상 속에서 만나볼 수 있는 개성 음식의 흔적을 찾아보며, 마지막 4부에서는 맞춤형 개성밥상의 사례를 보여준다. 식품영양학과 교수인 저자의 음식 연구서라 할 만한데, 그 내용이 학술적인 동시에 충분히 대중적이다. 고려시대 식기를 비롯한 관련 사진 자료, 음식 소개를 하면서 곁들인 그림과 역사적 문헌, 문학작품과 전통요리서 등에 나와 있는 구절 등 읽을거리가 풍성하다. 한마디로 '개성밥상'에 관한 백과사전 같은 책이다.
학창 시절 배웠던 고려가요 '쌍화점'을 기억하는가. 이 책에 따르면, 쌍화점은 쌍화를 파는 회화아비, 곧 무슬림 위구르족이 운영하는 술집이다. 이 작품이 만들어진 고려 충렬왕 시기는, 원을 비롯한 이슬람권 문화와 교류가 활발하던 때다. 쌍화는 만두의 일종으로, 나중에 개성편수로 발전하는 데 영향을 준 셈이다. 이 외에도 고려시대 음식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문인들, 특히 이규보, 이색의 시가 꽤 많이 인용되어 있다. 송나라 사람 서긍의 <고려도경>을 통한 객관적 기록과 더불어, 당시 황궁인 만월대와 강세황의 <송도기행첩>에 실린 개성 풍경도 실어놓았다.
개성 만두인 편수, 보김치(보쌈김치와 다름), 장땡이(장떡), 절창(순대), 조랭이 떡국, 홍해삼(홍합과 해삼) 등에 대한 유래, 만드는 법을 소개하면서, 고기구이의 여러 형태, 북한의 다양한 국수 이름, 인삼을 주재료로 하는 음식도 알려준다. 처음 이 책을 보고 싶었던 이유가 사실 이 부분이었는데, 한 음식에 얽힌 역사적 유래를 알게 되어 흥미로웠다. 또한 설렁탕, 닭도리탕, 숙주나물 등 우리 일상에서 친숙한 음식들 안에도 개성 음식의 연원이 있다는 것이 새삼 새롭게 다가왔다.
이 책에서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두 가지였는데, 먼저 박완서 작가의 <미망> 속에 나타난 음식 문화를 연구한 내용이었다. 소설은 작가의 고향이기도 한 개성을 배경으로 한 거상 일가의 삶을 그렸다. 저자는 소설 속 음식들을 도표로 보여주기도 하고, 소설 문장을 통해 개성 음식에 담긴 철학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저자는 크게 정성껏 마음들인 정갈함, 화려한 웃고명 장식, 상업 발달에 따른 음식 차림의 실용성 등을 제시한다. 두 번째로 인상적인 부분은 4부 전체이기도 한데, 이규보와 이색, 쌍화점의 주점 주인, 기생 황진이, 박완서 작가를 위한 밥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저자의 의도는 다음과 같다.
"이 5인을 대상으로 스토리텔링과 창작을 더해 재구성한 개성밥상은 그저 단순한 '밥상'의 개념이 아니다. 나는 이 음식들이 현대에도 만들어지고 확대, 재생산될 수 있도록 과거 고조리서나 근대 조리서를 바탕으로 하여 레시피를 제시하겠다. (중략) 이 밥상은, 상을 차리는 것이 아닌 그들을 기억하고자 제시하는 각각의 음식들을 이야기하는 것임을 밝혀둔다."(392쪽)
이 책에서 저자는 통일에 대한 열망을 여러 번 강조한다. 실향민의 딸로서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내비치기도 했다. 한 시대의 음식을 들여다보는 것은 결국 그 시대의 문화와 생활상을 엿보는 것이구나 싶다. 이 책은 단절되거나 동떨어진 역사의 한 장, 생소하거나 낯선 특정 지역의 음식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 속에 이어진 삶과 문화, 그 속에 음식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과연 한식 고유의 맛은 어떤 것일까. 개성 음식은 한반도 중간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도 있겠지만 중용에 해당하는 "짜지도 심심하지도 않은 중간 맛"이라고 하는데, 오늘날 매운 맛 혹은 '단짠'의 맛을 한식의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지... 시대에 따라 맛도 변하는 것이지만, 건강에 좋은 맛이 대표성을 가지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