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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격언집 -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ㅣ 잘난 척 인문학
김대웅.임경민 지음 / 노마드 / 2021년 5월
평점 :
오래전 나만의 아포리즘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얼마 동안, 내가 생각하기에 그럴듯한 구절을 기록해두거나 한글 파일로 정리해두기도 했다. 그러기를 멈춘 이유는, 여러 책 속에서 방대한 아포리즘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마 내가 기록해둔 문장과 비슷한 내용을 어느 책에서 읽은 이후였을 것이다. 해 아래 새것이 없으니, 모든 생각과 말은 그전 시대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들이리라. 속담이나 격언, 명언, 책을 읽다가 오래 머무는 문장들을 만날 때면, 나를 돌아볼 수 있어서 좋다. 이 책도 격언집이라서 읽고 싶었던 것뿐인데, 라틴어 격언집이라고 하니 뭔가 새롭고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으니 재미있다.
이 책을 엮은 이가 있는데, 그전에 원작이 있다. 네덜란드의 인문학자 에라스뮈스의 <아다지아>를 바탕으로 했다. 이것은 그리스로마의 철학자, 작가, 정치가의 명언을 모아 <고전 격언집>이라는 제목으로 선보인 바 있고, 증보판을 펴내면서 최종적으로 4,151개 항목을 수록한 모음집이 되었다고 한다. 본문에 앞서 엮은 이가 쓴 <아다지아>의 배경 설명이 나오고, 크게 열두 장에 걸친 차례에서 주제별 구성을 확인할 수 있다. 각 주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시기심과 우둔함, 허세와 위선, 사랑과 우정, 가족과 행복, 희망과 미래, 신과 운명, 순리와 원칙, 처세의 지혜와 분수, 사리판단과 선택, 통치와 권모술수, 부와 거래, 전쟁과 애국심이다. 부록에서는 많이 쓰이는 라틴어 관용구와 격언을 담고 있다. 전체적으로 라틴어 문장, 영어 문장, 우리말 번역이 함께 실려 있다. 책 표지를 펼치자마자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잡으라는 뜻)이 눈에 들어온다.
이 책을 볼 때, 각자 끌리는 주제를 골라 찾아 읽을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처세의 지혜와 분수, 사리판단과 선택 분야가 마음에 든다. 이 글에서는 공유해볼 격언을 뽑아 소개하면서, 이 책의 특징도 함께 서술해보겠다.
'공중누각'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다. 내용 없는 문장이나 쓸데없는 의론, 진실성이나 현실성 없는 일, 근거 없는 가공의 사물 등을 가리킬 때 쓰이는데, 비슷한 뜻인 '신기루'와 '사상누각'이 서술된다. 이 대목에서는 성이 붕 떠 있는,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피레네산맥의 성>도 같이 볼 수 있다. 책 전반에 그림, 인물, 책 등의 사진 자료가 실려 있다.
"귀게스의 반지"는 로마 시대 작가 루키아노스가 언급한 말이다. 의롭지 못한 사람이 정의로운 것처럼 행동하는 것 혹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마치 마법의 바람이 가져다주듯 모두 얻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 격언은 플라톤의 <국가> 제2권에서 기인하는데, 플라톤은 이 이야기를 제10권에서 다시 서술하고 키케로는 <의무론> 제3권에 실었다. 헤로도토스는 <역사> 제1권에 이야기를 수정해서 싣는다.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나는 <반지의 제왕>을 떠올렸다.) 이처럼 특정 격언의 유래와 관련 책들이 소개되기도 한다.
"사시사철 친구"는 기쁜 일이든 괴로운 일이든 모든 상황에 잘 적응하는 다재다능하면서도 편안한 성격을 지닌 사람을 일컫는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티포스가 그런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그는 "모든 색깔에 어울린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책에서 자세한 부연 설명이 덧붙여 있지는 않지만, 이 말은 그저 성격이 좋다는 의미보다 때와 장소를 가려 처신하는 지혜를 의미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우리가 젊을 때 기뻐하자"는 말은 고대 독일의 학생들 노래에서 비롯됐고,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가 쓴 <흑해에서 온 편지>에 나오는 말이다. 이처럼 우리가 많이 들어왔거나 당연한 진리처럼 받아들이는 말들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신이 불합리하기에 믿는다", "늑대는 털은 바꿔도 마음은 못 바꾼다" 등 아무런 설명 없이 격언 문구만 나오기도 한다. '신과 운명'이라는 같은 주제 아래, 앞서 인용한 내용과 비슷한 맥락인 "여우는 털을 바꿀 수 있지만, 버릇은 못 고친다"도 제시된다. '순리와 원칙'에서 "쐐기로 쐐기를 뽑다"는 악을 또 다른 악으로 몰아낸다는 뜻으로, 이 대목에서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등의 언급이 이어진다. "진실의 언어는 단순하다"는 세네카의 말은, 진실에는 많은 치장이 필요 없다는 것으로, 애초에 단순 명백하게 전달했다면 되었을 말을 다양한 수사를 동원해 진실을 호도하려는 사람들을 겨냥했다.
그 외에 "중도를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쥐는 한 구멍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끝보다 처음을 고치는 게 낫다", "지나친 친밀감 속에 경멸이 싹튼다", "복종에 익숙하지 않은 자는 통솔할 줄도 모른다" 등의 격언에서 자기만의 생각을 견주어볼 수도 있고, 읽어가는 중에 자신의 상황과 감정에 부합하는 격언을 만날 수도 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책이라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아폴론 신전 기둥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는 문구를 마음속에 새기게 되지 않을까. 그렇기에 사람들과 대화하는 중에 이런저런 격언들이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아주 작은 변화에 불과할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