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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전사, 마법사, 연인 - 어른이 되지 못한 남성들을 위한 심리 수업
로버트 무어.더글러스 질레트 지음, 이선화 옮김 / 파람북 / 202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남녀 차이와 그에 따른 대화법을 알려주는 심리학 책, 남녀 차이를 넘어 차별의 양상을 보여주는 페미니즘 책, 가부장제나 왜곡된 남성성이 가지는 문제의 배경을 서술하는 사회학 책을 통해, 남자들의 심리나 성향 등을 읽은 적이 있다. 그 결과 뭉퉁그려서 '남자들은 다 그래.'로 귀결되는 감상이 남았다. 어떻게 보면 편협한 독서였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남자들의 여러 유형에 대한 책은 접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책의 내용이 궁금했다.
이 책은 성인 남성 심리의 기본 구성요소로 네 가지 원형이 있다고 전제한다. 제목에 나와 있듯이 그 원형은 왕, 전사, 마법사, 연인이다. '어른이 되지 못한 남성들을 위한 심리 수업'이라는 부제가 없었다면, 도무지 어떤 책인지 짐작조차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은 칼 융을 계승하는 정신분석학자로서 정신분석치료와 심리상담을 해왔던 로버트 무어, 신화학자이자 목회 상담가인 더글러스 질레트의 공저다.
서문에서 저자들은 20세기 말 남성 정체성이 위기에 봉착한 것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그 원인을 두 가지로 분석한다. 정체성을 형성시키는 '성년의식'의 실종과 여성성뿐 아니라 남성성에도 위협이 되는 '가부장제'다. 특히 가부장제에 대해, 소년 심리의 표출이고 남성성의 어둡고 광적인 면을 부각시킨 미숙한 단계의 남성성의 표현으로 규정한 부분이 새롭게 다가왔다.
나아가 저자들은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처럼 남성성의 약화가 필요한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강한 남성성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때의 남성성은 소년을 벗어난 성숙한 남성성을 의미한다. 이 책은 이런 기본 입장을 바탕으로, 남성 안에 가진 소년의 모습을 하나씩 살펴보는데 소년기의 원형은 성숙한 남성의 원형으로 이어진다.
성장 단계에 따라 소년기의 첫 원형은 신성한 아이, 그다음이 조숙한 아이와 오이디푸스적 아이, 마지막 원형은 영웅이다. 이 원형들은 성숙한 남성의 원형으로 이어질 때 각각 왕, 마법사, 연인, 전사가 된다. 여기서 잠깐,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나오게 될 '원형'에 대한 의미 파악을 해볼 필요가 있겠다.
칼 융과 그의 학파는 사람들의 심리가 '집단 무의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발견했고 이것은 인류의 오랜 본능적 패턴과 에너지로 구성된 것이다. 집단 무의식을 이루는 원형들은 우리 행동의 근원이고 이미지를 창조한다. 소년기의 원형 중 오이디푸스적 아이의 그림자 원형을 소개해보면 마마보이와 몽상가다. 마마보이는 자기애가 강하고 자위행위와 포르노의 강박적 사용에 심취한다. 반면 몽상가는 고립감을 느끼고 인간관계에서 단절되며 상상의 세계에서 살고 부정직하다.
이 책은 소년기의 원형을 피라미드 구조와 함께 하나씩 서술한 이후, 본격적으로 왕, 마법사, 연인, 전사를 다룬다. 왕 원형은 가장 중요하면서 다른 원형들의 바탕이 되지만 마지막으로 작동된다. 선량하고 생산적인 왕은 훌륭한 전사이자 마법사, 연인이 된다.
왕의 원형에서, 저자들은 고대의 신화, 설화, 전설에 나타난 왕을 살피고 그 속에 있는 에너지가 무엇인지 알려주며 두 가지 그림자 원형인 폭군과 나약한 왕을 서술한다. 현실 속에서 폭군 유형은 비판에 매우 민감하고 겉으로는 위협적인 모습을 보이나 실제로는 쉽게 무력감을 느낀다. 나약한 왕 유형은 내면의 중심이 없고 안정적이지 못하며 피해망상을 가진다. 핵심은 자신의 자아를 왕 에너지와 동일시하지 않는 '인지적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책의 표현에 따르면 "내재된 왕 에너지에 하인 된 자세"를 가질 때, 선량하고 정당하며 충만한 왕의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다.
전사의 전통은 전쟁으로 채워진 인류 역사, 모든 문명을 봐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전사의 특징 중 하나인 '공격성'을 삶에 대한 자세를 일깨우고 행동의 동기를 부여해주며 전진하는 동력으로 의미 부여한다. 어떤 때 공격성을 가져야 할지, 명확하고 분별 있는 사고가 필요하다. '파괴' 이미지도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하는데, 전사가 파괴되어야 하는 것, 가령 부패, 독재, 억압, 불의 등을 부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관점이다.
전사 에너지는 인생의 덧없음을 알고 자의식에 빠지기보다 적극적인 삶과 행동으로 이어진다. 저자들은 전사 에너지를 다른 성숙한 남성 에너지와 결합했을 때 어떤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는지도 적고 있다. 한편 전사의 그림자 원형은 새디스트와 매저키스트다.
마법사는 지혜로운 사람이며 첨단 기술을 잘 아는 사람으로서, 이 책에서는 성경에 나온 나단 선지자를 다윗왕의 마법사로 예를 들거나 전통 사회의 주술사, 고대 영지주의자, 중세 유럽의 연금술사로 이어지는 마법사의 자취를 언급한다. 지식과 기술 양면의 역할을 한다는 점이 이채롭다. 심층 심리학이 현대 물리학과 상통하는 지점은 모두 사물이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라는 점이다.
마법사 원형은 사려 깊음과 심사숙고의 원형으로, 내향성 에너지다. 이때 내향성이란 "내면과 외부의 폭풍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내면의 깊은 진실과 사고의 원천에 접목"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법사의 그림자 원형으로는 조작자와 '순진한' 사람인데, 순진한 사람의 숨겨진 동기를 타인에 대한 질투로 본다.
마지막으로 연인 원형은 외부 환경에 대한 감수성 에너지다. 이런 감수성은 열정을 수반한다. 이는 삶의 즐거움뿐 아니라 타인과 세상과의 일체감에서 오는 고통도 느낀다. 연인의 모습은 넓은 의미의 예술가, 심리학자나 심령사의 방식으로 나타난다. 모든 예술적 혹은 창조적 일들은 연인의 에너지와 관련된다.
연인의 그림자 원형으로는 중독자와 무력한 연인이 있다. 연인은 다른 남성 에너지를 인간적이고 애정 넘치게 서로 연결시키며 험난한 세상에서 잘 적응하도록 한다. 물론 연인도 다른 남성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저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내면의 연인을 억압하며 살아서 열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감정이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취급되고 만다.
"고대 왕의 자비심과, 고대 전사의 용기와 결단력, 고대 마법사의 지혜와 연인의 열정을 가지고 우리에게 던져진 세상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도전에 응하는 위대한 개인이 되자."(222쪽)
결론에서, 저자들은 위와 같은 선포와 함께 네 가지 원형을 접하기 위한 기술 몇 가지, 일종의 심리훈련을 추가적으로 서술한다. 간략하지만 실제적인 적용 방법이 될 수 있겠다. 또한 남성과 여성은 서로 적이 아니라면서, 그들의 적은 "유치한 허세와 거기에서 비롯된 자기분열"이라고 덧붙인다. 이 책 안에는 테스트가 별지로 첨부되어 있어서, 성격 테스트처럼 남자들의 심리적 원형이 무엇인지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에 제시된 남자들의 네 가지 원형처럼, 고대 인류로부터 기인한 여자들의 원형들은 무엇이 있을까. 이런 궁금증이 들었고, 저자들이 오늘날 더 강한 남성성이 필요하다고 말한 부분에서는 다른 학문 혹은 사유와의 통합적 이해가 필요한 대목이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네 가지의 그림자 원형들이 출몰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역사적, 신화적, 심리적 차원에서 접근한 남자들의 원형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적어도 가족의 성향에 대해 모든 남자들의 특성으로 퉁치듯 대하지 않고 디테일하게 바라볼 수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