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oy 얼굴을 잃어버린 소년 현북스 청소년소설 6
루이스 새커 지음, 김영선 옮김 / 현북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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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작가를 만났다. 거슬러 작가의 전작을 찾아보고 싶고 후속편을 기대하게 만든다.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얼굴을 잃어버렸다는 상징성 때문이었다. 어떤 의미일까. R.J.팔라시오의 <아름다운 아이> 표지를 연상케 해서, 장애를 가진 아이인가 하는 추측도 해보고, 슬픈 이야기면 어쩌지 하는 염려도 미리 해보면서 책을 펼쳤다. 결과적으로 <얼굴을 잃어버린 소년> 데이비드를 만나 신나게 웃었다. 유쾌한 이야기다.

 

소설의 시작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십대 소년들이 홀로 사는 할머니 집을 찾아가 할머니가 가진 지팡이를 훔쳐오는 에피소드다. 소년들은 베이필드 할머니를 엿보면서 못생겼다느니 돼지 냄새가 난다느니 함부로 말하며 웃어댄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웃는 데이비드. 할머니한테서 중국차 냄새가 나고 그게 좋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스콧에게 지질하다고 구박받을까 봐 그렇다. 랜디가 흔들의자를 뒤로 잡아당기고 스콧이 지팡이를 낚아챈다. 로저가 주전자에 든 레모네이드를 뒤로 벌렁 넘어진 상태의 할머니 얼굴에 붓는다. 같이 간 아이들이 이런 못된 짓을 하고 달아나는 와중에, 데이비드는 할머니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올린다. 할머니가 외치는 저주를 듣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데이비드는 오랜 단짝친구였던 스콧을 따라, 그 아이가 어울리는 소년들 무리에 끼고 싶었을 뿐이다. 아무리 그래도, 정말 매력적이지 않은 주인공이구나 싶었다.

 

이후 데이비드의 머릿속에서는 소년들과 함께 자신이 괴롭힌 할머니가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다. 저주를 믿지 않았지만 정말 자신이 저주받은 것만 같았다. 할머니가 외친 그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곱씹고,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든 합리화하려고 애쓰지만 소용없다. 당장 용서를 구하러 할머니를 찾아가고 싶지만 그럴 용기도 없다. 데이비드는 우연의 일치처럼 자신과 소년들이 벌인 말썽 장면들이 고스란히 자신의 일상에서 반복되는 모습에 혼란스럽기만 하다. 왜 자신에게만 그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 그저 가운뎃손가락 올린 게 뭐가 대수라고. 그런데 점차 알게 된다. 상대방이 설사 그 뜻을 모른다고 해도, 모욕의 의미로 공인된 표시를 했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어느 순간 자신은 저주받은 게 맞다는 굳은 확신으로 조마조마해진다. 좋아하는 토리 앞에서 멀쩡하던 바지가 흘러내리는 결정적 사건으로 인해, 데이비드는 할머니께 용서를 구하고 저주를 풀고자 하는데... 과연 데이비드는 소년들이 '마녀'라고 부르던 할머니 앞에서 무사할 수 있을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늦었지만 용서를 구하는 데이비드를 다시 보게 됐다. 스콧 일행이 비꼬아 부르는 '찌질이'나 '샌님'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허세로 꽉 차 있는, 비겁한 찌질이다. 할머니의 지팡이를 되찾아 돌려드리기 위해, 자신보다 덩치도 크고 싸움도 잘하는 로저와 일대일로 맞서는 장면에서는 "한 방 날려라!" 하고 응원을 하게 될 정도다. 밝혀지는 할머니의 정체, 소설의 끝부분 에피소드가 '150년 후'라는 참신한 발상까지, 읽는 내내 궁금증을 유발하게 만드는 전개 과정과 의미 있는 마무리가 좋았다. '얼굴'의 상징성은 여운으로 남는다.

 

전반적으로 유쾌하게 읽었지만, 책 속의 문제의식마저 가벼웠던 것은 아니다. 사실 또래 문화에서 뭔가 낙인찍힌다는 것은 당사자 입장에서는 너무 괴로운 일이 될 테니까. 데이비드는 소년들의 행동이 옳든 그르든 상관없이 그들과 어울리고 싶었다. 더구나 한때 단짝친구였지만 어느 순간 자신을 비난하는 데 앞장선 스콧은, 잘생기고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인기도 많은 친구다. 그런 아이가 대놓고 자신과 함께 다니기 창피하다느니, 더 멋져질 수 없냐는 둥 하는 이야기를 한다면, 마지못해 그래볼까 싶다가 서서히 자기다움을 잃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새로 사귄 친구 래리의 지적이 옳다.

 

"넌 방금 네 얼굴을 잃어버렸어. (중략) 방금 걔들이 우리 쪽으로 걸어왔을 때, 우리도 걔들만큼이나 이 길을 걸을 권리가 있었어. 근데 넌 비켜섰잖아. 그러니까 얼굴을 잃은 거지. (중략) 걔들이 너를 무시하는데 네가 아무것도 안 할 때마다 너는 얼굴을 조금씩 잃어."(164-165쪽)

 

살짝 거짓말을 얹어서 말하곤 하지만 핵심을 말해준 래리, 항상 당당해서 멋진데 남자 같다는 말에 주눅이 드는 모, 데이비드와 친해지고 싶어 먼저 다가서는 토리, 그리고 잠시 형에 대한 존경심을 잃었다가 다시 회복하게 된 데이비드의 동생 리키까지, 모두 데이비드 편이다. 굳이 얼굴을 잃으면서까지, 자기다움을 버리면서까지 유지할 친구 관계란 이 세상에 없지 않나. 또래 문화와 분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청소년 시기에, 자신의 얼굴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베이필드 할머니가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데이비드에게 했던 말은, 내가 처음에 몰라봤던 데이비드의 매력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게 얼굴만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남을 배려하고, 생각이 깊고, 사려 깊은 사람이란다. 우리가 사는 이 냉정한 세계에서는 그게 저주일 수도 있지. 너는 시인의 영혼을 가지고 있어."(3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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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마음이 소중해 - 마음 챙김 마음의 힘 4
마멘 두크 지음, 라울 니에토 구리디 그림, 윤승진 옮김 / 상수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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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시리즈다. 앞서 출간된 자존감, 사회성, 사고력에 대한 책들을 모두 읽었고 꽤 유익하다고 생각했기에, 이번 마음 챙김을 주제로 한 책도 기대감이 넘쳤다. 앞선 시리즈 모두 글작가는 스페인 심리학자였다. 그런데 이번 책의 글작가는 스페인에서 연기 전공자로서 배우로 활동했던 사람이다. 단지 이력이 여기까지라면 '마음의 힘' 작가로 동참하지 못했을 듯한데, 저자는 뉴욕의 한 요가 학교에서 아이들을 위한 요가 프로그램을 이수한 후 스페인에서 현재 어린이 요가 전문가로 활동한다고 나와 있다.

 

책을 보기 전에 저자 소개를 살피는 습관상 들여다본 것인데, 이 책의 저자 이력이 특이하게 다가왔다. 이 책의 방향성도 조금 짐작해볼 수 있었다. 요가에 대해 나오겠구나. 그림작가들은 매번 달랐기에 책마다 그림체의 다양성, 차별성이 있어서 좋았다.

 

이 책에서 글과 그림 배치는 특별하다. 그림이 대부분 양면 전체로 배치되는 구성 방식이다. 먼저 줄글을 읽은 후 그 이미지를 상상해보다가 뒤페이지에 펼쳐진 그림을 보는 방식이라,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 책을 열면 '마음 챙김'의 뜻풀이가 나오는데 이 말이 불교에서 쓰여온 명상법인 줄은 몰랐다. 저자를 따라 영화관으로 가본다. 자신의 마음을 영화관의 스크린이라고 상상해보라는 말과 함께. 이때 필요한 것은 상상력과 앉기 편한 장소.

 

영화 속 자신의 모습을 그려본다. 딱딱한 스파게티가 보글보글 끓는 물을 만나 흐물흐물해지듯이 몸이 부드러워진다. 발, 무릎, 다리, 등, 허리, 가슴, 손, 팔, 목, 머리... 그렇게 몸의 긴장이 풀려간다. 지금 저자를 따라 명상을 하는 중이다. 이번에는 넓고 푸른 들판에 앉아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본다. '걱정 나무'다. 나의 걱정을 하나씩 떠올리며 나무에 걸어본다. 기분 나빴던 일들을 하나씩. 위치를 바꾸어 이제는 해먹에 누워 있다. 아, 나비가 날아간다. 자세히 관찰해본다. 어느새 콧등에 자리를 잡고 앉은 나비. (명상 중에 딴 생각이 떠오르고 만다. <피너츠 완전판>에 나온 에피소드. 페퍼민트 패티의 콧등에 앉았다가 날아간 나비.)

 

다시 집중. 나비의 날갯짓을 보면서 들숨과 날숨을 차분하게, 그리고 느리게 내어본다. 나비처럼 날아보자. 그리고 하늘에 펼쳐진 구름을 본다. 흰 구름 몇 개를 골라 '분노'를 담아 빨간색으로 칠해본다. 그렇게 빨간 구름들을 흘려보낸다. 흰 구름 몇 개에는 '우울'을 담아 파란색으로, 또 몇 개에는 '두려움'을 담아 검정색으로 칠해본다. 초록색 구름도 만들어본다. '평온'이 실려 있다. 자, 이번에는 해변에 누워 모래찜질을 해볼까. 모래, 바닷물, 햇빛의 온기, 바람을 느껴보자. 마지막 차례는 스스로 별이 되어보는 것이다.

 

이 책은 명상과 요가를 위한 장소, 시간, 방법, 자세 등을 알려준다. 등을 곧게 펴고 책상다리 자세로 앉는 '수카사나', 바닥에 누운 뒤 양다리와 양팔을 벌린 채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는 '사바사나' 등의 용어도 나온다. 이 책의 내용대로 부모나 교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들을 이끌어주면 좋겠다.

 

한때 요가 책을 보면서 스트레칭 동작처럼 따라해본 정도였을 뿐 명상과 요가는 내게 낯설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난 후 문득 음악치료를 잠깐 경험해본 기억이 떠올랐다. 편안한 의자가 준비되어 있고 조용한 음악이 깔린다. 그리고 음악치료사가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제 마음의 긴장이 풀어집니다." 이런 식의 멘트를 한다. 10분 정도였을까. 그 짧은 시간이 어색했던 나는, 꽤 오랫동안 긴장한 채 살아왔었구나 싶었다. 명상과 요가에 관심이 없더라도, 이 책은 마음을 차분히 들여다보도록 이끌어준다. '마음 챙김'이란 어른뿐 아니라 이것저것 어른만큼 바쁜 아이들에게도 필요한 시간이기에, 아이와 함께 활용해보면 유익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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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브르가 알려주는 곤충 체험 백과 - 장수풍뎅이, 사슴벌레, 타란툴라, 전갈, 지네를 잘 키우고 싶은 어린이를 위한 생태도감 체험하는 바이킹 시리즈
정브르 지음 / 바이킹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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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브르의 유튜브를 본 적은 없다. 희귀동물 전문 유튜브 크리에이터라니 신기하다. 예상대로 저자의 이름은 곤충학자 파브르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 한다. 아이에게 보여줄 '곤충 백과'를 찾고 있었다. 관련된 책을 도서관에서 찾아보기도 했는데, 말 그대로 백과사전식의 내용은 너무 딱딱해 보였고 분량도 꽤 많아 보였다. 지식 중심의 책이 아니라 친근한 관심으로 이끌어주는 책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빼곡한 정보를 담지 않아도 각 곤충의 특성을 알 수 있도록 실제 사진과 함께 흥미롭게 구성된 책이면 어떨까 싶었다.

 

사실 '곤충 백과'의 최신작이라는 이유로 이 책을 보고 싶었던 것인데, 예상하지 못했던 '체험', '사육'이라는 단어를 접하게 됐다. 이 책은 부제에도 나와 있듯이 아이들이 장수풍뎅이, 사슴벌레, 타란툴라, 전갈, 지네, 노래기를 잘 키우기 위한 생태도감이다.

 

먼저 얼핏 보면 구분이 잘 안 되는 장수풍뎅이와 사슴벌레를 묶어서 비교, 설명해주는데, 장수풍뎅이는 호전적인 성격이고 사슴벌레는 느긋한 성격이라니 그 대조가 재미있다. 몸의 구조와 한살이를 자세히 보여주고 유튜브 영상과 연결되는 QR코드도 삽입되어 있다. 사육장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용품, 관리의 팁을 알려주고, 곤충의 먹이도 소개하는데, 곤충의 고단백 과일뿐 아니라 채집에도 바나나를 많이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장 사육을 해보지 않더라도, 그 장면을 동영상으로 관찰해보는 것으로도 곤충 공부가 되겠다.

 

이 책은 곤충을 채집하는 과정, 표본 만드는 방법과 주의사항을 알려준다. 또한 장수풍뎅이와 사슴벌레의 여러 종류들을 하나씩 각 특성과 함께 설명해준다. 사진 위주의 설명이라서 전혀 지루하지 않고, 이렇게 많은 종류가 있는지 몰랐다. 중간중간 앞서 나온 설명을 기초로 깜짝 퀴즈를 풀어볼 수도 있다.

 

이후 이어지는 곤충들의 구성도 위와 같은 방식이다. 이채롭고 흥미로운 정보도 많다. 타란툴라는 모두 독을 가지고 있고 독이 있는 털을 날려 방어하고 공격한다고 한다. 거미가 자신의 거미줄에 걸리지 않는 이유를 아는가. 그것은 거미줄을 만들 때 세로줄부터 만들고 그다음 만드는 가로줄에만 끈끈한 액을 묻히기 때문이다. '낙타거미'는 거미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거미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전갈의 종류가 이렇게나 많다니, 사진과 함께 각각의 모양을 대조해볼 수 있다. 지네의 경우, 외국의 지네와 우리나라 지네를 구별해서 만날 수 있다. 지네보다 다리가 많다는 노래기도 보여준다. 다리가 더 많을 뿐인데, 사진상으로는 지네보다 노래기를 보다가 흠칫 놀랄 때가 많았다. 나도 모르게 책에서 멀어지곤 했다.

 

부록으로는 짤막하게나마 신기한 곤충과 절지동물들 아홉 종을 소개하고 곤충 입양시 점검할 사항을 알려준다. 저자가 맺음말에서 말한 대로, 아이들이 곤충의 생태, 성장 과정, 짝짓기와 산란 등을 관찰하면서 생명의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겠다. 그동안 곤충 채집에 대해 그리 교육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곤충 입장에서도 못할 짓이 아닌가 싶었다. 아이들은 호기심으로 채집을 할 뿐이고 곤충들은 서식처를 잃고 아이들의 손 위에서 놀잇감이 되다가 쓰러져버리는 게 아닌가 싶어서. 숲속에서 잘 사는 곤충들을 일부러 가져와 생명을 잃게 만드는 노릇 아닌가 싶어서.

 

그런데 저자 말대로 곤충을 사랑하고 책임감을 가진다면, 아이들도 충분히 곤충을 사육할 수 있겠구나 싶다. "내가 사육한다면"이라는 상상을 품고 이 책을 읽는다면, 더 집중해서 보게 되는 장점도 있다. 실제로 그럴 수 있도록 저자가 이 책과 유튜브를 통해 그 과정과 주의사항을 자세히 알려주는 것이겠지. 내가 키우게 된다면 사슴벌레가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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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틀꿈틀 마음 여행
장선숙 지음, 권기연 그림 / 예미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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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속했던 교회 청년부에서 소년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나 혼자 가는 게 아니었는데도 '콩닥콩닥'이었다. 이 책에 나온 '콩닥콩닥'이 그리운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과 연관되었다면, 나는 좀 무서운 마음 때문에 그랬다. 편견이었을까. 그냥 낯선 공간,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정작 대면한 아이들은 교회 주일학교에서 보는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이후 지속적인 방문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때로부터 시간이 흐른 지금, 만약 다시 그곳에 간다면 나는 그들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

이 책은 교도관이 된 지 30년이 넘었다는 저자가 쓴 에세이다. 교도관 생활의 에피소드를 담은 책은 이미 출간된 바 있는 듯하고, 이 책은 특별하게 모양을 나타내는 우리말 의태어들로 저자의 추억, 소소한 일상과 감상을 엮어냈다.

이 책은 크게 겨울, 봄, 여름, 가을, 환절기로 구성하여, '쉬엄쉬엄'부터 '홈착홈착'에 이르는 의태어들을 선보인다. 이런 발상 자체가 매력적인 책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의태어를 끌어모아 이야기를 펴낼 생각을 했을까. 저자는 "책을 시작하며"에서 뒤척거림, 뭉그적거림, 꿈틀거림 등을 말한다. 그저 이 책으로 독자들이 편안하게 쉬고 기운을 낼 수 있기를 바란다. 각 의태어별 글마다 권기연 님의 예쁜 캘리그라피를 만날 수 있다.

먼저 한 페이지씩 캘리그라피부터 읽어나갔다. 작은 그림과 함께 캘리그라피가 마음속에 잔잔히 스며든다. 저자의 글에서 뽑아낸 글귀로 손글씨를 쓴 것이니, 글의 분위기도 살짝 짐작하게 해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라디오 방송의 조금 긴 오프닝 멘트를 읽는 느낌도 들고, 말랑말랑 감상에 젖어보기도 한다. 한 편의 글은 저자의 추억담이나 자연 묘사, 예화 소개에 그치지 않고 응원이나 격려, 제안과 권유를 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사색과 실천의 장으로 인도한다.

"아장아장 걸음마 하는 아이처럼 용기내는 오늘이길 기원합니다."(22쪽)

"아쉬움들을 다시 넘실넘실 떠오르는 해마냥 밝고 따뜻하게 가꿔보면 어떨까요?"(28쪽)

"그동안 잊고 있었던 설렘, 고마움, 충만함, 감동들을 내 마음 항아리에 다보록다보록 담아보아요."(30쪽)

저자는 우리 자신의 삶을 성찰하도록 이끌기도 한다. 삶의 목적지를 향해 잘 가고 있는지, 삶의 어떤 꽃을 피울 수 있을지에 대해. 마음이 무슨 색인지, 마음이 언제 설렌지도 묻는다. 자연스럽게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 나의 꿈을 떠올려보는 시간이 된다.

"노래를 잘 못해 아직 고백을 망설이고 계신가요?

부족한 부분은 그 사람을 향한 마음으로 꼭꼭 채워 고백하세요."(128쪽)

이 구절이 사랑고백에 한정된 것은 아니리라. 사람을 대할 때나 무슨 일을 시

도할 때, 우리는 외형과 조건을 갖추려고 애쓴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알맹이, 진심이 쏙 빠져버린 껍데기, 가식이 가득 차고 만 것은 아닐까. 또한 "스트레스를 줄이는 방법은 더 행복하게 몰입할 다른 일을 하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도 공감이 된다.

저자는 둘째로 아들을 낳은 후 "맏며느리 소임을 다한 것 같아 세상을 가진 듯한 넉넉함"이 생겼다고 말한다. '으쓱으쓱' 의태어와 관련되어 나온 표현이다. 아들 낳는 게 맏며느리 소임을 다한 것이라는 낡은 통념을 말할 뿐 아니라,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마음을 가졌다는 대목에서는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저자는 '꾸깃꾸깃' 지폐가 구겨졌다고 돈의 가치가 없어지는 게 아니듯이, 손으로 펴고 풀로 붙이면 본래의 지폐가 되듯이, 불의의 사고로 장애를 입은 사람과 한 번의 잘못된 판단과 실수로 전과자가 된 사람도 존재만으로 충분히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입장도 밝힌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 글, 한 줄 글귀와 예쁜 손글씨를 보면서 미소 지을 수 있는 책이다. 저자가 매 페이지마다 던지는 질문들에 굳어 있던 마음의 빗장이 풀리고, 제목 그대로 마음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 꿈틀꿈틀 올라오는 느낌이다. 잊고 지내던 사람, 감정, 가치가 파도 출렁이듯 밀려온다.

표지 그림이 한 발짝 내딛는 발에 주목했듯이, 마음이 움직일 때, 어떤 열망이 차오를 때, 우리의 발이 성큼 앞서나갈 터이다. 한 발자국이라도, 저자가 말했듯이 아장아장 용기를 내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다. 그러기를 소망한다. 오늘 하루, 저자의 다음 질문을 내 것으로 수용해, 나 자신에게 물어본다.

"내 생애의 최고의 순간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태어난 순간과 행복한 지금 이 순간인 것 같습니다. 그대의 생애 최고의 순간은 언제일까요?"(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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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아틀리에 - 나를 열고 들어가는 열쇠
천지수 지음 / 천년의상상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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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글을 잘 쓰는 화가도 있구나. 이 책을 읽는 내내 드는 생각이었다. 이 책은 '일러두기'에도 나와 있듯이, 저자가 2016년부터 2020년까지 5년 동안 일간지와 잡지에 연재했던 글들을 보완해서 엮은 것이다. 이 책에는 저자가 읽은 53권의 책 이야기와 거기서 얻은 영감으로 그린 그림들이 실려 있다. 모두 책과 연관된 그림이라니 신기했고, 글 속에서 화가의 상상력이 그림으로 발현된 지점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화가로서의 이력과 개인사가 압축된 머리말의 다음 표현도 너무 좋다. 


"이 책을 엮는 이유 중 하나는 창조적 영감이 사라진 존재에게 나만의 말을 건네기 위함이다. 창조적 상상이 필요한 세상 사람들에게, 책과 독서로부터 영감을 얻는, 중요한 단서를 알려주고 싶었다. 화가로서 내가 읽은 책은 배움의 대상에 그치지 않았다. 책을 보고, 씹고, 재구성해서 나만의 날개를 만들었다. 책에서 받은 창조적 영감은 나의 붓이 더 멋지게 춤출 수 있도록 안내했다."(10쪽)


책을 차례대로 읽기는 했지만, 얼마든지 자유롭게 읽어도 좋겠다. 마음에 드는 그림을 골라 거기에 해당하는 책 이야기를 읽을 수도 있고,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 글을 먼저 읽고 자신의 감상과 비교해보면서 그림까지 얹어볼 수도 있다. 그림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면서, 책 이야기와 상관없이 그림 자체로 떠오르는 감상을 적어볼 수도 있다. 이 책은 그림과 함께하는 독서 리뷰, 책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그림 모음집이다. 글 속에는 화가의 일상과 아홉 살 아들의 에피소드도 있고, 화가로서의 고민과 그림 형상화 과정, 깊이 있는 삶의 성찰도 담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혜석 관련 책을 읽고 그려낸 '붉은 정글' 이미지가 강렬했고, 노년의 독서에 대한 글과 연관된 '자유의 세계'를 그려내는 과정은 마치 꿈을 현실로 재현하는 듯했다. 호스피스 환자들을 돕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떠올린 '심장의 기억'은 심장 속 춤추는 사람들의 그림만으로 지금 이 순간의 생동감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펀치의 운동성을 담기 위해 유화 대신 목화를 택하고, 일상의 조각들이 삶의 직물을 짠다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의료용 거즈를 끈처럼 엮기도 한다. 무엇인가 화폭에 담는 한, 자유롭고 거침 없이 아이디어가 솟구치는 모습이다. 


"이리 재고 저리 생각하는 계산보다는 자신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것"(23쪽), "어른은 더 성장해서 결국은 인간이 돼야 하지 않을까"(28쪽), "아름다움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분명한 가치다"(54쪽),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도 내 계획의 일부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90쪽), "내가 부여하는 의미가 진정한 시작이다"(128쪽) 등 저자가 책을 읽고 펼쳐낸 감상의 일부만 봐도 자신만의 아포리즘을 담고 있다. 화가로서 저자는 떠오르는 영감을 화폭에 담기 위해, 부드러운 듯하나 꽤 집요하게 책을 파고드는 느낌이다. '글 다듬기'에 관한 책을 보면서 '그림 다듬는 법'으로 고스란히 적용하여 '문장그림'이라는 작품을 완성할 정도다. 


저자가 이 책으로 삶의 시야를 넓히고 화폭에 상상과 성찰을 덧입혔다면, 나는 저자가 담아낸 글과 공들인 그림으로 책 여행과 그림 감상을 했다. 나다움, 용기, 열정, 기쁨의 스펙트럼이 한 뼘 커졌다면, 이 책의 밑줄 긋고 싶은 글귀와 빤히 들여다보고 싶은 그림 덕분이다. 책을 읽고 쓰는 것, 그림을 그리고 보는 것 모두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도 일깨운다. 나는 왜 책을 읽고 부단히 생각과 감상 쓰기를 반복하고 있는가. 이제는 내가 저자의 '그림 고민'을 온전히 나만의 '글 고민'으로 적용해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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