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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 고전 살롱 : 가족 기담 - 인간의 본성을 뒤집고 비틀고 꿰뚫는
유광수 지음 / 유영 / 2020년 6월
평점 :
우리 고전에 대해서 얼마나 정확히 알고 있을까?
구전으로 들은 것 외에는 풀버전으로 읽은 적은 없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도 현재적 관점에서 고전을 다시 읽는다면 아주 재미있을 듯하다는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면서 가졌다.
많은 사랑을 받는 고전이라 하더라도 새로운 비판과 해석은 가능한 일이다.
당대의 시점에서 사회 비판과 현재 시점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눈은 다를 수 있기에 우리는 각각의 모순을 짚어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고전이 문학의 범주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문학은 풍자, 비틀기, 그리고 때론 야유를 통해서 우리가 읽지 못했던 가치를 만들어 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춘향전>을 신분을 초월한 순수한 사랑, 신분제도를 타파하려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는 것으로 배웠다.
그러나 춘향과 몽룡의 사랑이 정말 순수한 사랑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은 현재 관점에서는 던져 볼 수 있는 질문이다.
아무리 통신 수단이 발달되지 않았지만, 몽룡은 자기 때문에 춘향이 옥에 감금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과거 급제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다.
남원에 내려와서 옥에 갇힌 춘향을 면회하지만 그 자리에서도 파락호의 모습만 보일뿐 급제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그럼 춘향은 지고지순한 사랑녀인가?
저자 유광수 교수는 춘향이 몽룡에게 '자신을 잊지 않고 꼭 찾겠다는 맹세'를 한 불망기(不忘記)를 받는 행위를 이렇게 바라본다.
'온갖 상상이 춘향의 머릿속에 오갔을 것이다. 그냥 이몽룡을 쌀쌀맞게 내쫓을 수도 있다. 하지만 평생 다지 오지 않을 기회다. 몽룡을 보니 얼굴도 괜찮다. 재력도 있다. 영특해 보이는 게 관직에 나설 가능성도 높다. 버리기 아까운 카드다. 이 궁리 저 궁리 아무리 돌려봐도 자신이 놓인 처지에서 선택할 카드가 많지 않다. 그래서 억지로 찾은 카드가 불망가다.'
<춘향전>을 가지고 현재적 관점에서 춘향과 몽룡의 사랑을 살짝만 비틀어도 재미있게 이야기 나누어볼 수 있는 소재가 된다.
<홍길동전>의 길동이를 향한 작가의 시선 또한 그동안 보지 못했던 내용이라 독특했다.
길동이 율도국을 정벌하고 왕이 된다. 그리고 당연히 길동의 아버지처럼 처와 첩을 거느리고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여기에 의문을 던진 적이 없다. 하지만 작가는 길동이가 어머니 춘섬의 고뇌를 조금이라도 이해했던 거라면 그런 행동을 했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결론 내린다.
'길동은 자기 울분과 자기 앞길만 생각한 것이다. 정말 괘씸한 녀석이다.'
적서 차별에 대한 시선으로만 홍길동전을 바라보지 않고 현재의 모순과 병폐를 가지고 대담하게 대들며 따지며 읽는다면 고전 그 자체가 주는 텍스트의 매력은 상당하다.
이 책은 '고전 큐레이션의 대가'라고 불리는 유광우 교수가 '가족'을 주제로 고전을 현재적 시점에서 재해석한 것이다.
저자의 소개를 보니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유광수의 은밀한 고전'이라는 코너에 출연 중이며, '우리가 알아야 할 고전, 감동의 울림을 찾아서' 주제로 기업체, 학교에서 강연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은 강의를 듣는 듯한 느낌이어서 지루할 틈 없이 금방 읽게 된다.
흥부전, 심청전, 변강쇠가, 장화홍련전, 해와 달이 된 오누이 그리고 최고운전 등을 가지고 '무능 열전', '은폐된 패륜', '자식 사랑 패러독스' 그리고 '가족의 재탄생'이라는 의미로 썼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 등장하는 떡장수 어머니를 현재 자식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하는 어머니로 본 관점도 고전이 재해석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호랑이에게 떡도 다 내주고 더 줄 것이 없어서 팔 다리를 내주다 죽고마는 떡장수 어머니.
'호랑이가 입시가 되고, 호랑이가 대학이 되고, 그야말로 호랑이 목구멍이 된 우리 사회'라는 시각을 가지고 읽는다면 어떨까?
어린 시절 읽는 동화는 그냥 권선징악이었다.
그렇지만 동화나 우화에 입체적 상상력을 더하고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체험을 더한다면 작가처럼 고전에서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지 않을까.
톨스토이가 말년에 <전쟁과 평화>보다 여기저기서 수집하고 다시 꾸민 민담을 사랑했다는 것 또한 그 안에서 발견하는 삶의 가치 때문이지 않았을까.
상상력과 통찰력을 더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동화보다 더 좋은 소재가 없을 듯하다.
<장화홍련전>에 대한 작가의 해석도 새롭다.
배 좌수가 혼기에 찬 딸들을 왜 시집보내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하여 미심쩍은 배 좌수의 행동에 성적 학대의 가능성으로 해석을 하는 ...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2003년 영화 <장화 홍련>을 다시 봤다. 김지운 감독은 어떤 해석을 했을지.
원작과는 차이가 있지만 원작에 대한 멋진 비틀기다.
<장화홍련전>을 은폐된 패륜으로 읽는 것과 새엄마를 중심으로 가족 괴담을 펼치는 것과의 차이를 보는 것 또한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이야기를 잘 읽으면 새로운 장르가 만들어진다.
코로나바이러스에 지쳐 있는 일상이라면 고전을 통해서 당신만의 비틀기와 해석을 시도해봐라.
멈춰 있던 삶의 시간들이 생동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