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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옷장 ㅣ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는 며칠동안 늦은 밤, 방 불을 끄고 스탠드의 불빛에만 의존해서 이 책을 읽는 그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책을 읽는 그 순간만은 '드니즈 르쉬르'가 살던 시간과 공간에 빠져들어 마치 내가 그녀가 된 것처럼 그녀가 느끼는 감정을 고스란히 느꼈다.
불법 낙태 수술로부터 시작하는 과거 회상. 두 번째로 접하는 아니 에르노는 충격적이면서도 어쩐지 '음.. 그래 역시 아니 에르노의 글이구나' 따위의 생각을 하게 했다.
'내가 아는 것은 풍족뿐이다... 식료품점은 카페 다음의 두 번째 세계로, 풍요롭고 다양하며 쾌락이 넘친다.'(p.33)라고 말하던 드니즈는 사립학교에 입학하고 그곳에서는 쓰는 언어부터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으며 학교와 그 밖의 세계를 구분짓기 시작한다. 선생님의 말, 그 껍데기 뿐인 언어를 들으며 집에서의 언어와 비교하고 혼란을 느낀다. 사립학교 여자애들의 여유로움, 이 세계와 나의 세계의 다름, 그것에서 느껴지는 수치심, 모멸감, 비참함... 이런 것들을 아니 에르노는 날것으로 적확하게 표현한다.
아니 에르노는 언제나 자신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글을 쓴다고 했다. 하지만 이 책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작가 자신의 체험이고 거짓이고 허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녀는 어떻게 이렇게 생생하게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어린 시절 자신이 느꼈던 수치심과 비참함을 어떻게 이렇게까지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었을까 생각해본다.
누구에게나 그런 경험이 한번 쯤은 있지 않을까? 부끄러움을 넘어선 수치심을 느꼈던 경험. 뒷목부터 온 얼굴이 시뻘게지고 뱃속에서는 분노와 이름모를 감정이 뒤섞여 속이 홧홧해지는 경험. 나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고, 나는 내가 이것을 극복했다고 생각하고 오랜 시간을 살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그것을 전혀 극복하지 못했고 그저 내 마음 속 어느 구석에 처박아둔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에 절망했고 다시 일어설 수 없다고 생각했다.
'수치스러웠다'고 뭉뚱그린 그 경험을 들춰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때의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다시 더듬어 보는 과정은 고통스럽고 불편했다. 그때의 그 수치심과 모멸감, 비참함을 다시 느끼는 것은 끔찍하고 역겨웠다. 하지만 글로 쓰고 눈으로 읽고 말로 곱씹는 과정에서 나는 어떤 후련함과 희열을 느꼈던 것도 같다. 이 책의 드니즈 르쉬르도, 작가 아니 에르노도 그렇기 때문에 울퉁불퉁한 그 기억을 다시 꺼내든 것은 아닐까. 나는 감히 생각해본다.
*해당 서평은 리뷰어로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 받고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