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운하, 축복일까 재앙일까
박진섭.장지영 지음 / 오마이뉴스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어머니독서회 6월 토론도서라서, 어제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러나 경부운하 찬반 토론을 벌인게 아니라, ’경부운하가 얼마나 웃기는 짬뽕’인가를 성토하는 편파적인 토론이었다. ㅎㅎ독서회원들과 4월에 ’식코’를 감상하고 의료보험 민영화의 허상을 알았다면, 이 책을 통해서는 우리나라에서 운하를 만든다는게 가당치도 않다는 걸 새삼 확인했다.

이 책을 토론도서로 선정한 이유는 세상사에 민감한 촉수를 갖지 못한 평범한 주부들이 눈을 열고, 경부운하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반대하자는 의도였다. 그야말로 조중동 주장처럼 2MB가 당선돼야 경부운하도 만들며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 창출한다는 말에 동의했다면, 이제는 그 허상을 보는 눈도 생겼을거라 믿는다. 이 책을 읽고 경부운하가 추진되면 절대 안된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 며칠전 발표한 '경부운하 안한다'는 대통령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다면, 다시 2MB를 성토하는데 핏대를 올려야 하리라.

자~ 책 속으로 들어가서 내용보다 편집에 딴지를 걸자면, 책은 보통보다 큰 사이즈인데 글자가 작아서 읽기가 힘들었다. 또한 사진이나 자료를 설명하는 글자는 더 작고 연파랑이라 알아보기 엄청 힘들었다. 나처럼 눈이 침침해질 연배라면 포인트 작은 글씨가 '쥐약'이라는 걸 알리라.^^ 그래서 별 하나 감점이다. 또한 조목조목 짚으면서도 앞에 거론한 이야기가 자꾸 반복되어, 확실히 인식하는 장점은 있었지만 또야? 하는 약간의 짜증도 묻어났다. 풍부한 자료 사진이나 도표와 지도가 도움되었지만, 필요 이상으로 삽입되어 친절한 금자씨(?)가 된 느낌이라 별하나 더 감점했다가, 경부운하의 허상을 조목조목 짚어준 책이라 별하나는 기분 좋게 돌려줬다.^^

경부운하는 내륙주운(강이나 호수 운하 등을 이용하여 화물을 운반하는 것)으로 일정한 수심을 유지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강은 상고하저라 하천의 물이 빠르게 바다로 흘러들어 가고, 산악지대에서 발원하여 구불구불 구비쳐 흐르기 때문에 강폭이나 수심이 일정치 않다. 따라서 주운의 역할을 하려면 인공으로 수심 6~9미터를 유지하고 가급적 직선코스로 만들어야 한다. 결론은 우리나라는 기후조건과 하천의 특성상 연중 일정한 수량확보와 수심유지가 기본조건인 내륙주운에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기본적인 조건을 갖추지 못한 하천에 운하를 만들려면 강과 하천을 인공적으로 개조해야 되고,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생태계가 살아있는 강이 아니게 된다. 강의 생태적 기능은 사라지고 배만 다니는 수로의 기능만 남게 된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무수히 저지른 폭력의 결과를 새만금이나 시화호, 청계천을 통해 알면서도 전국을 들쑤셔 환경을 파괴한다는 발상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거기다 시설을 건설하는 비용은 물론이고 유지관리하는데 드는 비용도 감당할 수 없다.

그들이 주장한 불류비용 절감을 위해 측정한 물동량도 맞지 않고, 설사 물동량이 많다 해도 가장 빠른 운송을 원하는 화주들이 한시간 30노트 미만의 주운에 맡길리가 없다. 그리고 운송비용을 절감한다는 근거로 제시한 자료가 화물을 싣고 내리는 비용을 제외한 주운 운송비만 산출했기에 현실적으로 절약도 아니다. 물동량과 교통혼잡 비용은 과다하게 부풀렸고, 물류비 절감효과의 경제성도 과대포장된 것이다. 그들도 이런 사실을 아는지라 은근슬쩍 화물운송이 아닌 관광코스로 개발하려는 것이다.

최고 웃기는 짬뽕은 골재를 팔은 8조 3천억의 수익금과 민자로 운하를 건설한다면서, 골재가 팔리지 않으면 직접 나서서 수출하겠다니 소가 웃을 일이다. 아마 정말 골재를 수출한다면 기네스북에 오르는 대통령이 될거라나?ㅎㅎㅎ 골재의 부존량을 조사해 부존량의 1/2 수준만 개발할 수 있고, 개발된 골재가 다 경제성이 있는 것도 아니며, 생산지에서 30킬로만 벗어나도 경제성이 없다는데 해외로 수출한다는 말은 논쟁의 가치도 없다고 밝히고 있다.

골재채취와 강바닥의 수심을 유지하기 위한 준설도 생태계에 심각한 위협을 주며, 수위차를 해결하기 위해 설치되는 수중보도 생태계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물의 흐름이 차단되기 때문에 수온이 상승하고 용존산소가 감소하며, 자연하천에서 보이는 세찬 물 흐름의 저하나 차단으로 퇴적물과 영양물질이동을 방해하고 오염물질에 대한 자연정화기능을 현저히 저하시킨다. 또한 어류및 수중생물의 상.하류 이동을 저해, 단절시켜 전반적으로 하천생태계에 악영향을 미치고, 홍수와 집중호우식 수해피해를 가중시킨다고 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독일운하도 경제성이 떨어져, 부두는 텅 비었고 도로나 철도 운송이 주류를 이루기에 점점 운하를 폐쇄하고 있단다. 또한 네덜란드 운하도 해수유통을 하지 않으므로 수질이 현저하게 떨어져 문제가 심각하다. 그가 우습게 여기는 무식한 국민의 한 사람인 나도 이 책을 읽으니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웃기는 짬뽕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정말 그는 이런 오류를 몰라서 고집하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 잘못된 정책이란 걸 알면서도 순 오기로 밀어부치려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 2MB 밖에 안돼서 도저히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그의 뇌를 해부하고 싶다는 말이 공감되는 독서였다.

거두절미하고 경제의 논리로 따지기 이전에 강은 국민의 생명수다. 인류가 집단생활을 시작하면서 하천 주변에 생활 터전을 잡아, 그 물을 마시고 농사를 지었다. 강은 인류의 시작과 더불어 문명의 발상지가 되고 생명의 근원이 된 것이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높은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며 만물을 고르게 이롭게 한다. 그 생명의 강이 잠시 정권을 위임받은 자에 의해 파헤쳐지고 파괴된다면 자연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강은 자연 그대로 구비구비 흘러야 한다.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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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06-24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필요한 친절과 배려의 부족으로 별점 감점이군요. 사진 올라오면 다시 와서 봐야겠어요^^ 학교 잘 다녀오셔요~

순오기 2008-06-24 16:51   좋아요 0 | URL
흐흐~ 불필요한 친절과 배려의 부족을 생각하면 별 두개 감점이지만...그래도 경부운하의 허상을 잘 일러주니까 하나 더 추가!ㅋㅋㅋ

권오상 2008-06-24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담양에서 뵈었던 권오상이라는 청년입니다. 그날 여러모로 챙겨주셔서 너무나 고맙습니다. 알라딘 서재에 들어와서 보니 글들을 너무 잘쓰시는것 같아요^^ 조금 주눅이 들긴 했지만 이기회에 더 열심히 독서하고, 글짓기도 해보아야겠다는 욕심이 드네요. 제가 컴퓨터를 잘 못해서 당장 서재를 만들지는 못하지만 자주와서 글도 읽어보고, 인사도 드리고, 서재를 만들수 있도록 많으 노력을 해볼게요

순오기 2008-06-24 16:53   좋아요 0 | URL
오호~ 알라딘 신규 총각이 드디어 방문했군요, 반가워요~ 권오상씨!
광주이벤트 글들은 읽어봤나 봐요~ 그렇다면 이젠 알라딘 서재를 열 수 있도록 도와야겠군요.ㅋㅋㅋ

마노아 2008-06-24 23:07   좋아요 0 | URL
우와, 행운의 총각님! 반가워요! 남도 여행은 잘 마쳤나요? 차차 서재도 만들고 여행 후기도 쓰고 그러면 좋겠어요. 후훗, 자주 놀러와요^^

bookJourney 2008-06-24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랫것이라 그런지, 윗분(!)의 아무거나 '하면 된다'고 밀어부치는 그 방식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30년 동안 별나라에 다녀와서, 70년대의 앞뒤 안본 개발이 어떤 문제를 일으켰는지를 모르는 걸까요? 아집을 뚝심이라고 믿고 있는 건지도 ... ㅠㅠ

순오기 2008-06-24 22:26   좋아요 0 | URL
저도 무식한 국민인지라 밀어부치기 생리에 안 맞아요~~ 점검하고 또 짚어보고 꼼꼼히 살펴봐도 시행착오가 있는 법인데...21세기에 버려야 할 명바기의아집!!
 
어머니의 노래 - 노래를 통해 어머니는 詩이고 철학이고 종교가 된다!
고진하 외 지음 / 시작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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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라는 부름만으로 우리의 눈시울을 젖게 하는 어머니는 영원한 눈물샘의 원천이다. 내 살아 온 일생을 책으로 쓰면 소설 몇 권은 되리라고 말씀하시던 우리들의 어머니. 자식을 위해서라면 당신 몸을 다 바쳐서 끝없이 퍼주기만 하시던 어머니. 우리에게 아로새겨진 어머니가 바로 이 책에 나오는 어머니들의 한결같은 모습이다. 누구 어머니라고 조금 덜하거나 더할 것없이 모성애의 표본이신 이땅의 어머니들이 여기 계시다.

삶의 질곡에서 위로를 받고자 흥얼거렸던 어머니의 노래, 끝내 가슴에 묻어야만 했던 아픈 사연을 대신하던 그 노래들이 어머니의 기도였고 한이었음을 깨닫는다. 우아하게 가곡을 부르거나 돌아오라 쏘렌토로나 매기의 추억이 아니어도 좋은, 우리의 트롯트를 부르시던 어머니.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단장의 미아리고개나 성주풀이면 어떠리~ 그 어떤 노래든지 어머니의 시가 되고 기도가 되어, 당신의 한을 달래주고 어루만지며 삶의 힘을 얻었으면 족하리라.

주말이면 아들 딸, 며느리 사위와 어울려 남한산성을 오르며 막걸리 한 사발에 기분이 좋아, "발끼이를 돌리려고 바람 부는 대로 걸어도 돌아써어지 안는 거어쓴 미련인가 아씨움인가아...... " 부르시던 소설가 서하진님의 시어머니 사연은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그래도 당신이 끝내 발길을 돌리지 않았기에 노년에 자손들과 행복하게 사시는 모습으로 위로가 되었다.

진주 시장통에서 지짐이를 부치며 혼자 웅얼거리는 '군담'으로 마음을 풀어낸, 아기공룡 둘리의 만화가 김수정님의 어머니. 한밤중 자식들의 다리를 쓰다듬으며 "이놈들아 어서 빨리 커라, 언제 클래, 어서 커라 어서"라고 중얼거리신 그 모습에 촉촉이 눈시울이 젖었다. 

'와도 그만 가도 그만 방랑의 길은 먼데 충청도 아줌마가 한사코 길을 막네~' 충청도 아줌마를 즐겨 불렀다는 개그맨 이홍렬님의 어머니. 바느질로 밤을 새우며 자식들 거두어야 했던 그 어머니의 고단한 삶이 내 어머니와 겹쳐져 기어이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런 어머니가 계셨기에 성실하게 살아낸 자식이 존재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부끄럼이 많아 사람을 두려워 한다고 생각하신 어머니가, 친척들의 부추김에도 노래 한자리 못 부르는 자식에게 용기를 주려고, 오직 할 수 있는 구절이란 '아모레 아모레 아모레 아모레 미오~'뿐인 노래를 부르셨던 소설가 김다은님의 어머니도 뭉클한 감동이었다.  

감정의 절제와 조절이 가능한 고단수 화술로 아들 며느리를 제압하는 이바구의 달인이셨다는, 극작 연출가이신 이윤택님의 어머니. '누가 뭐래도 너는 이율곡 같은 선생님 될 수 있다'는 흔들리지 않는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믿음이, 함부로 살지 않도록 지탱한 의식의 힘이었다고 고백한다. 아들이 쉰이 넘도록 끊임없이 읊어대는 어머니의 잔소리가 자신을 키운 어머니의 노래였다는 멋적은 고백도 공감이 됐다.

수녀가 된 두 딸을 위해 늘 선물을 챙기고 편지를 쓰신 어머니가 '작은 하느님'이었다고 고백하는 이해인 수녀님의 사연도 잔잔한 감동을 전한다. "엄마가 안 계신 세상 쓸쓸해서 눈물겹지만 그래도 엄마를 부르면 안 계셔도 계신 엄마, 사랑합니다...... 그립습니다" 라는 고백은, 바로 나의 고백이 되기 전에 한번이라도 더 뵙고 잘 해드려야겠다 다짐하게 했다.

내가 아는 분을 먼저 찾아 읽으면 좋을, 스물 다섯 분의 명사들이 풀어내는(아주 짧았던 두세 편 빼고) 어머니의 노래가 깊은 울림으로 남는다.  나는 내 어머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내 어머니 삶의 한 자락을 담은 노래와 사연을 기록하겠단 생각이 절로 들었다. 6월 21일이면 일흔일곱이 되시는 어머니의 생신도 거리가 멀다 핑계대고 안 가려고 했는데, 이 책을 덮으며 어찌나 부끄럽고 송구하던지...... 앞으로 몇 번의 생신을 더 맞이할지 모르는데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다녀오리라 마음 먹었다.

어머니, 내 눈물샘의 원천이신 어머니~~ 당신에게 바치는 시 한수 쓰고 싶었던 30년 전 내 마음 사그라지기 전에 기어이 시 한수 지어 당신께 바치렵니다. 충청도 시골 고된 밭농사에도 밤마다 성업중인 우리집 노래방에서 소리 높여 불렀던 어머니의 18번, '알뜰한 당신, 아내의 노래,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이번 생신엔 제가 당신께 불러 드리렵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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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
김현아 지음, 유순미 사진 / 호미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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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막히게 맛깔스런 답사기를 만났다. 여행기인지 에세이인지 헷갈리게 감수성 풍부한 문장들이 '그 곳에 있는 그 여자'들을 더욱 아름답게 비췄다. 책을 읽는 내내, 참 좋다~ 나도 그 곳에 가고 싶어 그녀들의 발길이 한없이 부러웠다. 이 책은 선생님들이 읽으면 좋겠고, 여자들에게 굉장히 호평 받을만한 책이다. 답사기를 읽으며 이렇게 감정이입 된 책도 없었던 듯하다.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유홍준/창작과비평사)'가 감흥보다는 교과서 같은 안내서라면, 이 책은 어여 훌쩍 떠나서 '그 여자'를 만나고픈 갈망을 일으키는 책이었다. '그 곳'으로 달려가면 오롯이 '그 여자'가 나를 맞아줄 것 같은 환상으로 달뜬 책읽기였는데, 받은 감동만큼 리뷰를 잘 풀어내지는 못하겠다.ㅠㅠ 내가 문화유산해설사로 멋지게 늙고 싶은 사람이라 감동이 더 크지 않았나 싶다.^^

많은 여자들이 훌훌 털고 불쑥, 나만의 호젓한 여행을 얼마나 꿈꾸는지 아는 저자는 여행길에 독자를 동행시킨다. 사진작가 류와 친구 봉소와 동행하면서 주고 받는 대화나 수다가, 독자가 불쑥 끼어 들어도 좋을 분위기다. 같이 깔깔거리거나 고즈넉한 분위기에 취해 '그 여자'를 만나는 즐거움이 더했다. 그 여자와 동행하며 시대를 초월한 정서의 교류와 소통을 느꼈다. 여자를 폄하하고 부정했기에 받은 상처를 어루만지고 자긍심을 북돋아 준 느낌이다. 저자가 여자라서 여자를 잘 이해하는 것일까?

신라와 조선, 근대와 현대 여성에 이르기까지 그녀들의 흔적을 찾아 떠난 여행에 가슴 뛰는 설레임이 좋았다. 감수성이 풍부한 글쓰기로 '그 곳'에서 '그 여자'를 만나는 행복과 적절하게 배치된 사진으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글을 쑥 자르고 불쑥 들이민 사진은 다소 책읽기의 맥을 끊기도 했지만 작은 사진으로 여백의 미를 살린 편집이 좋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신화와 전설에 역사적인 기록을 근거로 안내하므로, 내 짧은 역사지식을 확인하며 뿌듯했다.

선도산의 치술령이 되고 망부석이 되었다는 박제상 부인과  선덕, 진덕여왕의 이야기는 100쪽이 넘도록 조곤조곤 전한다. 사람들의 관계와 시대상을 짚어주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개연성에 수긍이 간다. 저자의 사소한 기억이나 감성을 끌어내어 옛날 '그 여자'로 박제된 것이 아니라, 오늘에도 살아 있는 '그 여자'를 자연스럽게 전한다. 학창시절 시험때마다 헷갈렸던 이야기의 출전이 '삼국사기'인지 '삼국유사'인지 머리 아프게 암기하지 않아도 좋다. '삼국사기'를 남긴 김부식을 대단하게 여겼었는데, 어쩌면 사실과 진실을 왜곡하고 폄하한 쪼잔한 남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50여년의 간격을 두고 강릉 땅에 태어난 두 여자 난설헌과 사임당이 당대 여자들이 누리기 어려운 교육을 받은 것은 그녀들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축복이었다. 당시 조선사회는 왕실의 공주에게도 한글 외의 글을 가르치지 않았다는데, 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은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않고 공부시켰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 덕에 난설헌은 오빠 허봉이나 동생 허균과 학문을 익히며, 천재시인의 기량을 닦았다. 난설헌은 조선보다는 중국에 더 알려진 천재시인으로 최초의 한류스타였던 셈이다. 사임당 역시 좋은 환경에서 교육받았기에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사임당 자매들의 유적이던 오죽헌 한가운데 율곡의 사당이 자리잡은 것이나, 작품보다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인식된 사임당도 박정희가 저지른 문화유산에 가한 폭력이었다고 읽혔다.

"결혼하고도 친정에서 살았던 사임당의 어머니 이씨 부인은 당대의 주류이던 삶의 방식을 벗어나 자신의 형편에 맞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간 여성일수도 있다.(152쪽)" 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저자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다. 내 짧은 역사지식으로 근거를 대긴 어렵지만, 2007년 12월 8일 방송된 'KBS 한국사전- 난설헌편'에 의하면, 사임당은 결혼한 남자가 신부집에서 생활하는 '남귀여가혼'이 일반적인 시대였고, 16세기 이후는 결혼 후 신부가 바로 시댁에 들어가 생활하는 풍습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래서 친정에서 살았던 사임당과 다르게 난설헌은 시댁생활로 재능을 가두고 살아야 할 '조선 여성'으로 시대의 불운을 만났으니, 이것은 난설헌과 우리의 불행이기도 했다. 강릉 사임당과 난설헌 편에서 저자는 시적 감수성을 더 펼친 것 같다.

경주와 강릉은 수학여행으로 주르륵 훑어본 곳이라면, 매창의 고장 부안은 최근에도 여러번 갔던 곳이라 더 반가웠다. 채석강이나 적벽강의 변산반도를 둘러보며 감상에 젖었고, 빗줄기에 물안개로 감싸인 부안팔경을 드라이브 코스로 달려도 봤다. 비록 매창뜸은 가볼 기회가 없었으나 이제 부안을 찾는다면 바로 매창뜰로 달려갈 것이다. 매창은 신분을 한탄하지 않고 스스로 '매창-창가의 매화'라 이름 짓고 당당하게 살아간 듯하다. 그녀가 유일하게 마음을 주었다는 유희경이 그럴 만한 가치의 사람인지 모르지만, 매창의 시문과 모든 것을 사랑한 부안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허균과 십년이 넘는 우정도 놀랍다. 조선 최고의 지식인이자 문객이었던 허균은 시대를 거역한 자유인이자 반항아로 기록되는데, 매창과 난설헌의 시문을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도 허균의 덕이라 치하할만하다.  

식민지시대 '신여성'으로 자리매김한 김일엽과 나혜석, 그녀들 삶의 궤적을 추적한 수덕사와 수원에서도 '그 여자'를 만날 수 있다. 시대가 따라주지 않았던, 혹은 시대보다 앞섰던 여자의 삶을 살았던 그녀들은 과연 행복했을까? 애잔한 마음이 여운으로 남는다.

경주 강릉 수덕사를 거쳐 땅끝마을 해남으로 고정희 시인을 만나러 가자. 소외와 저항의 땅이며 시인의 고장인 해남에서 7~80년대 혁명적인 시를 쓴 고정희 시인은,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늦잠 한번 늘어지게 자는 것이 소원이었던 시인은 지리산 등반 사고로 우리 곁은 떠났다. 친구이자 동료인 '또하나의 문화' 동인들이 '고정희청소년문학상'도 제정하였고, 해마다 6월이면 해남에 모여 무덤도 손질하며 그녀를 기리는 아름다운 우정도 알 수 있다. 작년에 해남 시인의 생가를 다녀온 지인에 의하면, 김남주 생가는 관리가 안되어 마음 아팠고, 고정희 생가는 깨끗이 관리되어 보기에도 흐뭇했단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답사 경력 30년에 가까운 지인 부부가 생각났다. 그분들이라면 우리 고장 답사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책을 충분히 내겠다 싶어 선물로 찜했다. 국어나 사회과 선생님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아 알라딘의 선생님들이 생각났다. 한반도 남쪽 '그 곳'에서만 '그 여자'를 만났는데, 2편이나 3편이 나온다면 휴전선 넘어 북쪽의 '그 여자'도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하며,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멋진 기획을 하고 책을 쓴 작가와 출판사에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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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08-05-27 0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과거와 현재를 잇는다는게 어려운 일일텐데 그런 의미에서 높이 평가할 책이죠.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의 운명이 그리 바뀌었군요. 만약 허난설헌도 친정에서 살 수 있었다면 그리 허망하게 꿈을 접지는 않았으려나요?

순오기 2008-05-27 09:06   좋아요 0 | URL
새벽에 올려놓고 수정하러 들어왔더니 벌써 댓글이 달렸네요. 난설헌은 정말 안타깝지요~~~ 그랬다면 천재성을 다 발휘했을텐데요.ㅠㅠ
읽으면서 좋다고 감탄했던 것만큼 리뷰는 잘 풀어내지 못해서 안타까워요. 그래도 수정을 하니 좀 나은것 같기는 하지만...

마노아 2008-05-27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전선 너머 북쪽의 그 여자에 찡~했어요. 좋은 책 소개해주어서 고마워요~

순오기 2008-05-27 20:57   좋아요 0 | URL
음, 이 작은 한반도가 나누어져 있으니...북한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북쪽에서 만날 수 있는 그여자는 누가 있을까요? 황진이, 최승희...그리고 고구려와 고려의 여자들을 만날수 있겠죠!

글샘 2008-05-27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름 방학쯤 시간 내면 꼭 읽어 볼게요. ^^ 제 생각도 하셨죠? ㅎㅎㅎ

순오기 2008-05-27 21:21   좋아요 0 | URL
예~ 당근이죠. 마노아님과 글샘님, 바람돌이님, 클리오님, BRINY님, 책향기님... 또 누가 있죠?^^
 

내 아이의 천재성을 살려 주는 엄마표 홈스쿨링 - 표현력 훈련 엄마표 홈스쿨링
진경혜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자녀를 모두 서울대에 보냈다든가 외국의 명문대에 보낸 부모들의 저서가 심심찮게 나오는 세상이다. 그때마다 평범한 부모들은 '우리 아이도 이렇게 키워야지' 야무진 꿈을 꾸며 열심히 책을 읽는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 '음매~ 기죽어, 이런 부모는 나와는 다른 탁월한 사람이구나. 아~ 부럽다!'를 연발하며 한발 물러나게 된다.(음냐음냐ㅜㅜ)

전세계가 주목한 '리틀 아인슈타인 남매'를 키운 진경혜씨가 노하우를 알려주는 '내 아이의 천재성을 키워주는 엄마표 홈스쿨링' 시리즈. 1권 읽기 훈련과 2권 글쓰기 훈련에 이은 세번째 '표현력 훈련'은 이런 의미에서 좀 만만하고 술술 쉽게 읽히는 책이라 반갑다. 학자들의 교육이론을 장황하게 설명하거나 들이대며 한 수 가르치려 하지 않아 좋다. 잘난 엄마의 자기 자랑이 아니라, 평범한 부모들처럼 시행착오나 잘못했던 사례를 들어 독자의 공감을 얻는다. '아~ 이런 대단한 사람도 나와 똑같은 잘못을 했구나!' 연대감을 느끼며 입가에 살짝 웃음도 흘릴 수 있다. '그래, 자식 키우는 일이 뉘집이라서 다를쏘냐? 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으며 고쳐가는 거지' 라는 생각에 편하게 읽었다.

저자는 평범한 부모와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천재적인 남매의 학습뿐 아니라 일상적인 생활에서 표현력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점은 높이 살만하다. 책을 읽은 감동으로 부드러운 말씨의 관대한 엄마가 되는 것은 불과 며칠, 결국 작심삼일로 끝내니까 뛰어났을 내 아이를 평범하게 방치했다는 착각으로 급 반성도 했다.^^ 그럼에도 이 책의 장점은, 제대로 표현하는 아이가 행복하다는 서문에 걸맞게 챕터별로 표현력을 키우는 방법을 친절하게 조목조목 설명한다. 이제 책에서 일러준대로 실천만 한다면 저자의 아이들처럼 제대로 표현하는 아이로 키울 수 있겠다.(흠흠^^)

초록 바탕에 넣은 챕터의 그림이나 소제목은 독자를 배려한 편집이라 느꼈다. 한 단락이 끝날때마다 요점을 정리하고 공간을 두어 숨가쁘게 따라가지 않고 피드백 할 수 있는 여유가 좋았다. 개인적으로 초록을 좋아하는지라 눈의 피로도 덜고 상큼한 나뭇잎 향기를 맡는 느낌이었다.

나를 가장 반성하게 한 것은, 세번째 챕터 '아이의 표현력을 키워주는 11가지 매직대화법'이었다. 나도 삼남매의 유아기나 유년기엔 나름대로 교양과 우아를 유지하려고 애썼는데, 아이들이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거침없이 상말이나 육두문가 튀어나왔으니 엄마의 품위는 와장창 무너지고 말았다. 그렇게 된 원인이 아이들의 감정에 공감하고 어루만지는 반응보다는 반작용을 먼저 했기 때문이란 걸 깨닫고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내 아이에게 뿐 아니라 학교 아이들한테도 반응보다는 반작용을 먼저 보이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아차하는 성급함에 후회를 하면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이런 교육도서를 자꾸 봐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책을 읽으며 공감하고 반성하며 나를 정화시키는 노력이 조금이라도 좋은 엄마와 훌륭한 선생님이 되도록 이끌어 줄 것이라고 믿는다. ^^

어린이 심리를 알고 교육적 이론을 알아도 실생활에 적용하는 건 쉽지 않다. 탁월한 부모들이 어떻게 했는지를 알면서도 지속적인 실천 또한 만만치 않다. 뛰어난 자녀를 키워내는 부모가 많지 않은 이유가, 이런 실천의 문제일거라고 생각된다. 이 책은 저자 본인의 경험과 사례를 들어, 독자들이 적용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 같다. 아이들 공부를 전적으로 책임지는 홈스쿨은 무리지만, 생활속에 세심한 노력으로 표현력을 키울 수 있다면 얼마나 매력적인가! 복잡하거나 머리 아픈 교육이론서가 아니고, 저자의 체험에 바탕을 둔 단계별 사례와 지침을 두어 쉽게 읽고, 나도 이렇게 해봐야지 만만한 생각을 들게 하는 편안한 책이다. 나도, 20년이나 되는 엄마 경력에 나름대로 교육도서를 많이 읽었다고 자부하는데, 중요한 건 책에서 배운 걸 얼마나 실천하느냐의 문제라는 걸 다시 새긴다. 이 책을 읽는 사흘 동안, 중학생 남매와 객지에 있는 대학생 큰딸에게도 감정에 공감하고 반응하는 우아하고 품위있는 엄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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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5-10 0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술 읽으면서 내가 발견한 오자는 따로 남겨요^^
103쪽 아래 셋재줄, 아이들의 => 아이들을
125쪽 첫줄, 엔제가 => 언젠가
140쪽 첫줄, 마주보고 앞아 => 마주보고 앉아
*인터00엔 첫번째 리뷰로 등록되고, 어머니독서회 카페에도 올렸어요.^^

bookJourney 2008-05-10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의 감정에 공감하고 반응해야 하는데 ,,, 그렇게 하자고 맘먹고 30분을 못가서 다시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고 있는 저를 반성하곤 합니다, 에휴.
저도 이 책 읽으면서 마음을 다잡아보아야겠네요. ^^;

순오기 2008-05-11 04:48   좋아요 0 | URL
맞아요 30분...그래도 요즘 이 책 읽은 덕에, 오늘도 아들이랑 제법 긴 대화를 나눴어요. 아들한테는 일일이 잔소리하기보단 넓은 틀안에서 스스로 계획하고 실천하도록 마음을 어루만지는 중이에요.
이 책 읽는 동안 녀석이 아령도 들고 줄넘기를 해서 엄마 맘이 흡족했어요.^^움직이기 싫어하는 녀석이라~ 촛불집회도 사람이 많아서 가고 싶지 않대요~ㅜㅜ

L.SHIN 2008-05-11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요~
왠지 오기님 서재에 오랜만에 댓글 다는거 같아서 흔적 도장 쾅- ^^
헤헷,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납니다. 오기님 처음 제 서재에 댓글 달 때 제가 그랬잖아요.
"이미지가 또 바뀌었네요?" 그랬더니 오기님이 "이미지 넣는 법 몰라서요."
(그 때 랜덤이미지 사용했었죠) 그런데 어느 날 너무 이쁜 꽃 사진으로 오신거에요,
그 모습이 아직도 인상에 남습니다. 물론, 지금의 이미지도 좋지만요.(웃음)

순오기 2008-05-11 04:50   좋아요 0 | URL
맞아요, 오랜만에 흔적을 남기셔서 겁나게 반가워요!ㅎㅎ
저는 꽃으로 주욱~ 밀고 나갈 작정이에요. 요새 보랏빛 매발톱으로 할까 분홍 철쭉으로 할까 고민하고 있어요. 사진 찍을때 서재이미지로 쓸려고 작정하고 찍었거든요.^^ 많이 발전했죠!ㅋㅋ
 
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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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막 나왔을 때, 읽어보기도 전에 ’박완서’ 작품이니까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거란 믿음 하나로, 세살 위의 내 언니와 이웃 언니에게 생일선물로 주었다. 하지만, 정작 내 책은 지인에게 선물을 받고도 두달이나 지나서 읽었다. 지난 주부터 밤참을 먹듯이 단편 하나씩 야금야금 먹는 그 맛이 참 좋았다. 단편집은 한번에 쭈르르 읽어버리면 제목과 내용이 헷갈리기 때문에, 단편집을 읽어내는 내방식은 매번 이렇다.

지난 월요일, 아이들 중학교에서 방과후학교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화요일 집에 돌아와오니, 중3 아들녀석이 아무것도 신청하지 않았다며 게임을 하고 있었다. 삼남매 중에 특히 아들에게 믿음을 덜가진 나는 대뜸 뚜껑부터 열렸다. "니 알아서 신청한다더니~ 아무것도 안 했단 말야?" 자기발전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지, 왜 그런 기회를 그냥 보내는지 안타까웠다. 아들녀석은 해봐야 별로 득되는 것도 없고, 배우고 싶은 것도 없노라고 항변했다. 이 녀석의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이 딱히 없다는게... 3년간 장래희망에 '한의사'라고 써서 내긴 하지만, 그닥 공부에도 열심내지 않는다. 그날 모자간에 엄청난 설전이 오갔고, 분이 충천한 녀석은 이를 뿌드득 갈아대며 "시험에서 성적 올리면 될 것 아니냐? 중학교때 그렇게 열심히 안해도 된다고 담임샘도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내가 바닥을 기는 것도 아닌데..." 라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런 녀석을 놔두고, 나는 꾸역꾸역 밥을 먹었다. 내 눈물을 씹어 삼키는 밥을......

이런 진통을 치르고 나면 한동안 살맛이 나지 않는다. 그날 밤, 나는 저녁밥상을 차리지 않았다. 그냥 누워서 내가 아들을 너무 못 믿고 몰아세우나 반성도 하고, 지가 웬만큼 했으면 이렇게 불신할까? 눈물과 반성이 교차되면서 텅 비어버린 것 같은 공황상태가 지속되었다. 녀석도 한숨 자고 났는지 배가 고팠는지 제방에서 나와, 모른척 밥상을 차려주지 않아도 주섬주섬 꺼내어 밥을 먹었다. 미운 마음에 밥도 주기 싫었지만, 그래도 짠한 맘이 들어 치나물을 내어주고 비벼먹으라 일렀다.

그날 밤, 곱게 잠이 올리 없어 한밤중까지 뒤척이다 '친절한 복희씨'와 벗하려고 책을 펴 들었고,  세번째 단편인 '마흔아홉 살'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며 나는 울었다.

   
 
 그 여자는 요새 부쩍 더해진 식탐이 걷잡을 수 없이 도지는 걸 느꼈다. 조금씩 같이 먹을 줄 알았는데 김밥과 순대는 거의 그냥 남아 있었다. 그 여자는 그 소박하고도 느글느글한 것들을 짐승 같은 식욕으로 먹어치우고 인삼차를 한 잔 더 시켰다. 금년부터 치수를 28로 늘려 입었는데도 바지 허리는 만복을 이기지 못해 짤룩하게 뱃살과 허릿살을 갈라놓고 있었다. 명치가 등에 붙을 듯이 날씬하다가도 생명만 잉태했다 하면 보름달처럼 둥글게 부풀어오르던 배는 이제 두꺼운 비계층으로 낙타 등처럼 확실한 두 개의 구릉을 이루고 있었다. 허리의 후크를 풀자 역겨운 트림이 올라왔다. 자신이 비곗덩어리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지면서 메마른 설움이 복받쳤다. (107~108쪽)
 
   
아~ 여자 나이 '마흔아홉 살'이면 이렇게 꾸역꾸역 밥을 먹을 수 있는거구나, 분에 겨워 길길이 날뛰는 녀석을 두고 꾸역꾸역 밥을 먹은 내가 용납되지 않았는데, 여자 나이 마흔아홉 살이면 다들 그러는구나, 그럴 수 있구나! 그럴 수 있구나! 수없이 되뇌이며 100% 절대 공감으로 위로가 되었다. 

이 책은 중년, 혹은 노년의 여성 화자 - 박완서의 모습이라 생각되는 - 들이 등장해 삶을 풀어낸다. 공선옥의 작품에 등장하는 구질구질한 삶에 치인 여자들이 아닌, 그럭저럭 살만하거나 그런대로 유복했다 여겨지는 여자들의 삶이 펼쳐진다. 작가가 추레한 생활을 하지 않았으니 신산한 삶을 그리진 못할거란 생각도 살짝 들었다. 마흔아홉의 나는 노후를 위한 연금도 없고 재테크는 꿈도 못 꾸는 상황인지라, 노년에 자식들이 주는 용돈 몇푼으로 살겠구나 생각하니, 소설속의 여자들은 팔자 좋은 여편네일지도 모른다는 삐딱한 심사도 좀 생겼다.

내 나이 마흔이 넘어서면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니까, 마치 박경리가 그려낸 '토지' 속의 '임이네' 같아서 스스로 혐오스런 감정을 한동안 갖고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어쩜 이렇게 깍쟁이 같은 속내를 술술 잘 풀어내는지, 작가의 맛깔나는 수다에 빠져 들며 공감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기막힌 상황에서도 꾸역꾸역 밥을 먹듯, 어떤 상황도 이해 못하거나 용서 못할 것이 없는거구나 생각되었다. 노년을 맞는다는 것, 노년을 누린다는 건 작가나 작품속 주인공처럼 체면이나 허위를 벗어버리고, 제 나름대로 삶의 철학과 지혜를 갖는 거구나 짐작해본다. 

이 책에 수록된 '마흔아홉 살'뿐 아니라, '대범한 밥상'에서도 외동딸 내외를 졸지에 잃고, 세살, 여섯살 외손주가 남겨진 상황에서 '그 끔찍한 참척을 겪고도 눈이 초롱초롱해서 밥을 아귀아귀 먹은 것' 을 흉보는 동창들의 수다가 나온다. 그 외에도 그리움을 위하여, 후남아 밥 먹어라를 비롯한 거의 전편에서 밥 이야기가 나온다. 며칠 전 걸려온 큰언니의 전화에, 아들녀석과 있었던 이야기를 풀어내며, 내가 꾸역꾸역 밥을 먹었다고 토로하자, 쉰여섯이나 된 언니는 "그래, 그럴 수 있어. 그렇게 살기 위해 꾸역꾸역 밥을 먹는거야. 너도 이제 그 나이가 되었구나!" 위로하였다. 7남매의 장남에게 시집 간 언니는, 장애와 모자람까지 있는 시동생과 얍삽한 시동생까지 그 형제들의 일에 치여 참으로 힘들게 살아왔다. 그러니, 꾸역꾸역 밥을 먹는 일이 사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표제작인 '친절한 복희씨'가 남편이나 자신에게 느끼는 살의를 충족시켜 줄 죽음의 고약덩어리를 강물에 던져버림으로, 생에 친절한 복희씨가 되어 반신불수가 된 남편이나 자신을 위해서 이후에도 꾸역꾸역 밥을 먹었을거라 짐작한다. 이 책을 다 읽고 며칠 숙성시킨 결론은, "삶은 밥이구나!" 내 나이 마흔아홉 만큼의 어설픈 철학으로 마무리하며, 여든이 되어가는 작가의 건강을 기원하며 존경과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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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9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4-10 0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08-04-09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님의 리뷰에는 언제나 '삶'이 묻어 있어요. 그래서 더 마음에 와 닿고 깊이 공감해요. 꾸역꾸역 밥을 먹어가면서 억척스럽게 이어가는 모진 삶을, 우리 함께 경배해요.

순오기 2008-04-10 05:35   좋아요 0 | URL
억척스럽게 살아낸 우리 어머니들의 삶을, 우리도 이어가야겠지요?
부끄럽지만 저렇게 쓰고 나니 마음이 많이 녹아졌어요.^^ 알라딘은 해우소!

웽스북스 2008-04-10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도 계속 손이 안가 못읽고 있는 책이에요 이책
얼마전에 명랑한 밤길 다 읽으면서 순오기님 생각 했어요
그리고 어제 식코를 다시 보면서
자꾸만 식코를 보고 일어나지 못했다는 순오기님 독서모임 회원 분이
계속 마음에 밟혔어요

휴일 잘 보내셨지요?

순오기 2008-04-10 05:38   좋아요 0 | URL
어제 새벽에 이 리뷰 쓰고는 늦잠 잤어요.ㅠㅠ
빈둥거리다 오후 늦게 투표하고..결과 보다가 살맛 안나서 그냥 자버리고, 다시 새벽에 일어나 알라딘 즐기는 중이에요.^^
지역영화관 사이트에 투표하기 전에 '식코'보라고 후기 올렸는데, 많이들 봤으려나?~~~ 이동네야 식코 안봐도 녹색동네지만...^^

프레이야 2008-04-10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뜨거운 가슴의 소유자 순오기님, 쉰여섯의 언니에게도 경배를 보냅니다.
꾸역꾸역 밥을 먹는 나이, 삶을 제대로 살아내는 나이인 것 같아요.

순오기 2008-04-10 17:33   좋아요 0 | URL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머리가 되어야 하는데, 머리가지 뜨거워서 문제랍니다.ㅠㅠ 꾸역꾸역 밥을 먹는 나이가 제대로 사는 삶이어야 하는데 그도 아닌 것 같아서 착잡했어요.

희망찬샘 2009-02-17 0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편이 사서 읽고는 책꽂이에 고이 꽂아 둔 책... 꼭 읽어야 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