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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
김현아 지음, 유순미 사진 / 호미 / 2008년 3월
평점 :
기막히게 맛깔스런 답사기를 만났다. 여행기인지 에세이인지 헷갈리게 감수성 풍부한 문장들이 '그 곳에 있는 그 여자'들을 더욱 아름답게 비췄다. 책을 읽는 내내, 참 좋다~ 나도 그 곳에 가고 싶어 그녀들의 발길이 한없이 부러웠다. 이 책은 선생님들이 읽으면 좋겠고, 여자들에게 굉장히 호평 받을만한 책이다. 답사기를 읽으며 이렇게 감정이입 된 책도 없었던 듯하다.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유홍준/창작과비평사)'가 감흥보다는 교과서 같은 안내서라면, 이 책은 어여 훌쩍 떠나서 '그 여자'를 만나고픈 갈망을 일으키는 책이었다. '그 곳'으로 달려가면 오롯이 '그 여자'가 나를 맞아줄 것 같은 환상으로 달뜬 책읽기였는데, 받은 감동만큼 리뷰를 잘 풀어내지는 못하겠다.ㅠㅠ 내가 문화유산해설사로 멋지게 늙고 싶은 사람이라 감동이 더 크지 않았나 싶다.^^
많은 여자들이 훌훌 털고 불쑥, 나만의 호젓한 여행을 얼마나 꿈꾸는지 아는 저자는 여행길에 독자를 동행시킨다. 사진작가 류와 친구 봉소와 동행하면서 주고 받는 대화나 수다가, 독자가 불쑥 끼어 들어도 좋을 분위기다. 같이 깔깔거리거나 고즈넉한 분위기에 취해 '그 여자'를 만나는 즐거움이 더했다. 그 여자와 동행하며 시대를 초월한 정서의 교류와 소통을 느꼈다. 여자를 폄하하고 부정했기에 받은 상처를 어루만지고 자긍심을 북돋아 준 느낌이다. 저자가 여자라서 여자를 잘 이해하는 것일까?
신라와 조선, 근대와 현대 여성에 이르기까지 그녀들의 흔적을 찾아 떠난 여행에 가슴 뛰는 설레임이 좋았다. 감수성이 풍부한 글쓰기로 '그 곳'에서 '그 여자'를 만나는 행복과 적절하게 배치된 사진으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글을 쑥 자르고 불쑥 들이민 사진은 다소 책읽기의 맥을 끊기도 했지만 작은 사진으로 여백의 미를 살린 편집이 좋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신화와 전설에 역사적인 기록을 근거로 안내하므로, 내 짧은 역사지식을 확인하며 뿌듯했다.
선도산의 치술령이 되고 망부석이 되었다는 박제상 부인과 선덕, 진덕여왕의 이야기는 100쪽이 넘도록 조곤조곤 전한다. 사람들의 관계와 시대상을 짚어주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개연성에 수긍이 간다. 저자의 사소한 기억이나 감성을 끌어내어 옛날 '그 여자'로 박제된 것이 아니라, 오늘에도 살아 있는 '그 여자'를 자연스럽게 전한다. 학창시절 시험때마다 헷갈렸던 이야기의 출전이 '삼국사기'인지 '삼국유사'인지 머리 아프게 암기하지 않아도 좋다. '삼국사기'를 남긴 김부식을 대단하게 여겼었는데, 어쩌면 사실과 진실을 왜곡하고 폄하한 쪼잔한 남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50여년의 간격을 두고 강릉 땅에 태어난 두 여자 난설헌과 사임당이 당대 여자들이 누리기 어려운 교육을 받은 것은 그녀들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축복이었다. 당시 조선사회는 왕실의 공주에게도 한글 외의 글을 가르치지 않았다는데, 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은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않고 공부시켰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 덕에 난설헌은 오빠 허봉이나 동생 허균과 학문을 익히며, 천재시인의 기량을 닦았다. 난설헌은 조선보다는 중국에 더 알려진 천재시인으로 최초의 한류스타였던 셈이다. 사임당 역시 좋은 환경에서 교육받았기에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사임당 자매들의 유적이던 오죽헌 한가운데 율곡의 사당이 자리잡은 것이나, 작품보다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인식된 사임당도 박정희가 저지른 문화유산에 가한 폭력이었다고 읽혔다.
"결혼하고도 친정에서 살았던 사임당의 어머니 이씨 부인은 당대의 주류이던 삶의 방식을 벗어나 자신의 형편에 맞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간 여성일수도 있다.(152쪽)" 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저자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다. 내 짧은 역사지식으로 근거를 대긴 어렵지만, 2007년 12월 8일 방송된 'KBS 한국사전- 난설헌편'에 의하면, 사임당은 결혼한 남자가 신부집에서 생활하는 '남귀여가혼'이 일반적인 시대였고, 16세기 이후는 결혼 후 신부가 바로 시댁에 들어가 생활하는 풍습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래서 친정에서 살았던 사임당과 다르게 난설헌은 시댁생활로 재능을 가두고 살아야 할 '조선 여성'으로 시대의 불운을 만났으니, 이것은 난설헌과 우리의 불행이기도 했다. 강릉 사임당과 난설헌 편에서 저자는 시적 감수성을 더 펼친 것 같다.
경주와 강릉은 수학여행으로 주르륵 훑어본 곳이라면, 매창의 고장 부안은 최근에도 여러번 갔던 곳이라 더 반가웠다. 채석강이나 적벽강의 변산반도를 둘러보며 감상에 젖었고, 빗줄기에 물안개로 감싸인 부안팔경을 드라이브 코스로 달려도 봤다. 비록 매창뜸은 가볼 기회가 없었으나 이제 부안을 찾는다면 바로 매창뜰로 달려갈 것이다. 매창은 신분을 한탄하지 않고 스스로 '매창-창가의 매화'라 이름 짓고 당당하게 살아간 듯하다. 그녀가 유일하게 마음을 주었다는 유희경이 그럴 만한 가치의 사람인지 모르지만, 매창의 시문과 모든 것을 사랑한 부안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허균과 십년이 넘는 우정도 놀랍다. 조선 최고의 지식인이자 문객이었던 허균은 시대를 거역한 자유인이자 반항아로 기록되는데, 매창과 난설헌의 시문을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도 허균의 덕이라 치하할만하다.
식민지시대 '신여성'으로 자리매김한 김일엽과 나혜석, 그녀들 삶의 궤적을 추적한 수덕사와 수원에서도 '그 여자'를 만날 수 있다. 시대가 따라주지 않았던, 혹은 시대보다 앞섰던 여자의 삶을 살았던 그녀들은 과연 행복했을까? 애잔한 마음이 여운으로 남는다.
경주 강릉 수덕사를 거쳐 땅끝마을 해남으로 고정희 시인을 만나러 가자. 소외와 저항의 땅이며 시인의 고장인 해남에서 7~80년대 혁명적인 시를 쓴 고정희 시인은,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늦잠 한번 늘어지게 자는 것이 소원이었던 시인은 지리산 등반 사고로 우리 곁은 떠났다. 친구이자 동료인 '또하나의 문화' 동인들이 '고정희청소년문학상'도 제정하였고, 해마다 6월이면 해남에 모여 무덤도 손질하며 그녀를 기리는 아름다운 우정도 알 수 있다. 작년에 해남 시인의 생가를 다녀온 지인에 의하면, 김남주 생가는 관리가 안되어 마음 아팠고, 고정희 생가는 깨끗이 관리되어 보기에도 흐뭇했단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답사 경력 30년에 가까운 지인 부부가 생각났다. 그분들이라면 우리 고장 답사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책을 충분히 내겠다 싶어 선물로 찜했다. 국어나 사회과 선생님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아 알라딘의 선생님들이 생각났다. 한반도 남쪽 '그 곳'에서만 '그 여자'를 만났는데, 2편이나 3편이 나온다면 휴전선 넘어 북쪽의 '그 여자'도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하며,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멋진 기획을 하고 책을 쓴 작가와 출판사에 고마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