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무엇이 되려 하는가 - 진화의 욕망이 만들어가는 64가지 인류의 미래
카터 핍스 지음, 이진영 옮김 / 김영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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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진화'를 '진보'라고 착각하게 된 것, 생존은 진보의 결과라고 생각하게 된 과정에는 어떤 원인이 있었을까. '강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자'라는 말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오랜 시간을 거쳐 인간처럼 완벽히 살아남은 개체가 없으니 인간은 위대하게 진보했다는 결론을 역으로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경이 급변해서 지구의 공기 구성 비율이 단 몇프로만 달라진다거나, 기온이 급강하하거나 운석충돌로 인해 분진이 하늘을 덮었다 해도 인간은 멸종했을 수 있다. 진화를 진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우리가 가진 특성이 환경에 우연히 잘 들어맞았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것이지 완벽한 적응력을 가져서는 아닌것이다. 물론 다른 종에 비해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역량이 진보한 것은 확실하지만 이또한 지금의 상황에서 하는 말이니 절대 자만할 일은 아니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지구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 다시 진화가 진행된다면 그 끝에 인류가 있을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고 말했다. 이는 인류의 발생이 필연이 아닌 우연에 가깝다는 의미이다. 


이에 비하면 이 책의 저자의 생각은 조금 다른듯하다. 인류는 진화의 결과이면서 필연적인 발생 개체라는 것이다. 진화의 결과에 다소 감상적인 결말이 와서 붙는 것은 얼핏 듣기엔 창조와 진화의 대립에서 타협점을 찾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처럼 보인다. 한 때 '지적설계론'이 등장한 이유는 다윈의 '진화론'이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그 실체를 증명했기 때문이다. 지적설계론은 과학적 근거라고 주장하는 이유 중 하나는 '돌이킬수 없을 만큼 복잡하므로 그건 엄청난 지적존재가 설계한 것이다'라는 것도 있었다. 그 대부분은 진화가 그 증거를 갖듯 창조론 또한 증거를 찾자면 무한히 많다는 점에서 출발했지만, 사실 그 증거는 이렇게 복잡한 게 어떻게 혼자 될 수 있느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화와 창조 사이에는 건널래야 건널수 없는 무한한 거리가 생길수 밖에 없다. '인라이튼 텍스트'의 전 편집장이자 이 책의 저자인 카터 핍스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진화 과학자, 생물학자, 우주학자, 영성 철학자(?), 초인간주의자까지 만나서 인터뷰를 했다. 그만큼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면서 글을 썼다는 것인데, 몽테뉴는 '모든 곳에 있다는 것은 아무데도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지 않은가. 


신과 과학의 교차점에서 새롭게 시작해보겠다는 저자의 의도는 이 책의 곳곳에 과학적 결론처럼 쓰여있다. 엄밀히 하자면 과학과 종교의 영토싸움은 제로섬 싸움이라고 봐야한다. 어느 한쪽이 영역을 넓혀 간다는 것은 한쪽의 땅이 확실하게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과학이 발을 넓히면 넓힐수록 종교가 미지수로 남겨두려는 영역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이를 막기 위해 반대의 방법으로 맞대결을 시도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지자 이제는 타협을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진화론의 취약한 부분을 공략하며 단계를 차츰차츰 올리는 것인데, 그 부분이 바로 진화에서 발생하는 '이기적'인 행동들이다. 이러한 행동들은 우리가 비록 생존에 성공하더라도 동족의 실패나 좌절을 밟고 올라섰다는 불편한 승리감에 솔깃한 논리를 들이댄다. 이를 통해 '통합'의 시작을 모색하고 사실은 인간이 그렇게 이기적이지도 않았으며 오래전의 유전자에서 우리가 협력적 개체임을 발견했다라며 영적인 안정을 도모한다. 결국 진화의 사이클은 경쟁과 협력의 구도가 되는데, 이것이 어느 순간 물질과 영의 조화로 발전해버린다.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서 방대한 양의 정보를 담고 있어 흥미로운 면이 분명히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위험한 부분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얽혀버리는 지점이 책을 보다보면 모호해지면서 어디서 어디까지 경계인지 애매해진다. 바로 그 점을 저자는 말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이들은 결코 경쟁하는 개념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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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 테리 이글턴의 아주 특별한 문학 강의
테리 이글턴 지음, 이미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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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는 법을 배운다는 생각은 내키지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글이란 단순한 문맥의 함의를 파악하는 것을 빼자면, 내가 생각하는 내 기준으로 해석되는 것이지 않은가. 얼마전 아이유의 노래 중 '제제'에 대한 해석에 대해, 다른 곳도 아니고 출판사에서 공식 멘트를 한 적이 있었다. 출판사는 아이유의 작품 해석이 틀렸다는 것이었다. 이는 꽤 놀라운 사건이었다. 개인이 개인의 생각을 말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 책을 출판한 출판사에서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기 때문이었다. 아이유의 해석이 옳고 그르고의 문제 이전에 작품의 해석에 답은 없다는 기본 전제는 모두가 공유하는 원칙이다. 그것을 출판사에서 직접 나서서 틀렸다고 말했다는 것은 뭔가 씁쓸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내 안에서 그 씨앗이 어떻게 피어나는지, 그리고 무슨 열매가 생겨나는 지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누구도 가이드 라인을 정할 수 없고, 가부를 결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문학 비평가 테리 이글턴의 이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할 지 생각해 봐야 한다. 단순히 남의 생각대로 책을 읽지 않으려면 오직 내 방식대로 읽어야 하는 것일까. 그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우리가 힘주어 읽어야 할 부분, 어떤식으로 접근해야 하는가를 알고 본다면 진짜 문학의 재미를 느낄수 있다는 것이다. 비평가들이 훌륭하다고 평가하는 지점과 일반인들이 재미있다고 평가하는 지점에 교집합은 있지만 분명 차이가 있다. 아무래도 일반인의 시선은 단편적이거나 자극적인 것에 맞춰져 있을 것이다. 대신 비평가들은 수많은 문학작품 속에서 기본적인 장치들을 기본값으로 간주하고 이전의 기준과 다른 점, 다른 작품에서 진일보 한 점에 시선을 고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들의 수준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써 놓은 책을 보고 왜 우리는 뛰어나지 않다고 생각하는 작품에게서 의미를 찾는 일이 어려운 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도입부, 인물, 서사, 해석, 가치라는 5개의 큰 챕터로 구성된 이 책은 각 분야에서 이를 설명할 수 있는 고전들을 예시로 들며 알기 쉬운 설명을 붙여 놓았다. 특히 구체적인 문장과 단어 구조들을 예로 들어가며 어떤 의미를 갖는지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어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읽은 고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는 쉽게 이해되다가도 생소한 작품에서는 다소 어렵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우리가 문학을 읽을 때 어디에 방점을 찍어야 할지 알아가는 데는 최적의 교재가 될 것이다. 책을 덮고 나면 뭔가 비평이라는게 손에 잡힐듯 말듯 만만해 보이기도 하고, 더욱 대단해 보이기도 할 것이다.  


형식을 통해 내용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시도는 가끔 위험한 순간에 봉착하기도 한다. 그것은 모든 형식이 완벽하고 문학의 모든 요건을 완벽하게 구성했음에도, 주제가 모호하고 본질이 사라진 문학의 경우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치자면 사실적으로 잘 표현했거나, 아카데미에서 배운 그것을 완벽하게 구현하고서도 아무것도 담지 못한 그림의 경우가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구현했다고 해서 그것이 완벽한 작품이 될 수 없고, 우리가 모든 부분을 완벽하게 체크하고 문학을 읽어 나간다고 해도 그것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단순히 필요조건일 뿐이고 그 속의 본질을 놓친다면 그것은 무의미하다. 무엇보다 '주제가 결정적이라는 사실과 비극적이고 무시간적인 주제만이 타당하다는 사실'(마크로스코 중)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비평가의 눈으로 형식과 주제에 대해 섬세하게 접근해 가는 방법은 문학을 즐기기 위해서라면 절대 잊지 말아야 할 방법론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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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카뮈 - 삶의 의미를 찾는 시지프스의 생각 여행 Meaning of Life 시리즈 5
이윤 지음 / 필로소픽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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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인 살만한 것인가라는 질문은 삶의 모퉁이마다 불쑥 불쑥 나타난다. 설사 인생을 걸었을만한 숭고한 가치를 위해 살아온 사람이라도 달성된 후의 허무감은 피해갈 수 없다. 하물며, 객관적 가치라곤 만들어 내지 못하는 여타의 삶이란 또 어떠하겠는가. 철학자 미첼 헤스먼은 무려 1900장의 문서에 인생의 무의미함을 남겨 놓고 하버드 대학교 도서관에서 자살했다. 그의 자살은 모든 다양한 시도에도 결국 의미를 찾지 못하는 패배자의 자살이라기보다, 차근 차근 쌓아올린 철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도달한 귀납적 결론이라는 편이 더 맞을지 모르겠다. 때문에 저자는 이를 종교적 이유를 갖고 분신하는 베트남 승려의 모습에 가깝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저자는 과연 그의 말처럼 인생이란 무의미한 것이며 자살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허무한 것인지 철학적으로 밝히고자 했다. 


무의미를 가장 설득력 있고 일관되게 주장했던 작가는 '카뮈'이다. 그의 글들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허무주의의 제1명제를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점에 비하면, 카뮈의 삶이 무척 가치 있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그는 노벨상을 받을 정도로 문학사에 길이 남았으며, 레지스탕스 운동 등으로 신념을 위했고, 미모의 여배우들과의 관계에서도 큰 행복을 맛보았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허무주의의 대표적인 카뮈의 작품 '시지프스의 신화'를 분석해본다. 알려진 바와 같이 고린도의 왕이었던 시지프스는 신들을 노하게 한 어떤 죄로 인해 매일같이 큰 바위를 정상까지 올리는 벌을 받는다. 정상에 다다르면 그 바위는 다시 시작점으로 내려가고 시지프스는 다시 이 일을 반복한다. 이는 흡사 지금 우리의 삶과 거의 일치한다고도 보여진다. 그렇다면 시지프스의 삶이 무의미 한 것이라면 우리의 삶 또한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테일러의 저서 '선과 악'의 마지막 장에서 시지프스 신화를 다룬 부분을 통해 이 신화를 분석한다. 사람들은 시지프스의 노동이 힘들다는 것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어려움을 설명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몸체만한 바위가 아니라 주먹만한 돌을 정상으로 옮기는 것이라면 괜찮아져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시지프스의 고통은 경감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의 고통의 근원이 노동의 강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 노동에 대한 진정한 두려움은 공허함에서 나온다. 


시지프의 과제가 주는 공포는, 그것이 쉽건 어렵건 간에 시지프스가 실패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제에 아예 성공이라 간주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있다. (우주에서 철학하기 p.40)

설사 신들이 노동의 과정에서 시지프스가 기쁨을 느끼도록 만들었다고 해도 그는 아무 의미없는 행위에 행복을 느낀 채 맹목적 노동을 반복하는 퇴행 환자 같은 인간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욕구의 주체가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행위는 더욱 무의미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주관적 의미가 아닌 객관적 의미를 부여한다면 어떨까. 돌을 굴리는 행위가 하나의 신전을 건설해 나가는 과정의 일부라고 상상해보는 식이다. 이 과정은 조금 달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결국 세월의 풍화에 의해 사라지는 것은 돌이 떨어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설사 신전이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 자리에는 영원한 권태가 자리 잡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의미로의 귀결을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인가. 이에 대해 우리가 어떠한 가치나 목적을 갖고 행위를 할 때를 생각해 보자. 아무리 가치 있고 중요한 일이라 할 지라도 일년, 십 년이 지나면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사소해진다. 이것이 허무주의의 한 맥락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행위를 하는 당시에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사실 중요한 것은 행위를 할 당시의 감정일 뿐이다. 무의미 하다는 것은 시선을 외부로 향했을 때 나타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것은 사태를 내부의 시선이 아니라 외부의 시선으로, 지금의 시점이 아니라 먼 훗날의 시점에서,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우주의 관점에서, 유한의 관점이 아니라 무한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에만 발생하다는 사실이다. (p.62) 


결국 허무주의의 근간에는 외부의 관점을 내부의 시선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있다. 우리는 매미 유충이 17년 동안 기다린다는 사실을 하찮게 여길지라도 매미 유충에게는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생존의 과정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달성하려는 신념이나 목표도 사회전체, 국가전체로 볼 때 나아가 지구 전체로 볼 땐 지나치게 무의미한 행위인 것이다. 결국 우리 관점이 어디에서 존재하느냐는 허무주의 극복의 중요한 키가 된다. 이를 바탕으로 인생이 의미를 갖기 위해 객관적 가치 생산을 위한 주관적 만족이 가능해야 한다. 말초적인 욕망이나 단순한 행복감이 아닌 객관적 가치를 지니는 행위를 통해 존재완성의 과정은 달성될 수 있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삶을 자살로 마감한 이도 있지만,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삶에서 생의 존재를 발견하는 많은 사람이 있다. 저자가 카뮈에게 안녕을 고하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을 알고 깨닫는 것에서 결론을 내리기 보다, 삶 이면의 무의미를 알면서도 현재의 하루에 충실할 수 있는 자세를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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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후감 - 대중문화의 정치적 무의식 읽기
김성윤 지음 / 북인더갭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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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나 'specialist' 같은 표현에 비하면 '덕후'에서는 왠지 저급한 이미지가 느껴진다. 사실 전문가보다 더 전문가스러운 '오타쿠'라는 단어는 1970년대 일본에서 등장한 신조어이다. 이 단어가 우리나라에서는 '오덕후'라고 불리면서 뭔가 소외된 외골수의 광기를 부르는 말처럼 그 의미가 폄하되었다. '덕후'라는 단어는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우호적인 단어는 아니다. 하지만, 조금만 관심을 갖고 본다면 소위 '덕후'라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지식과 전문가다운 통찰, 다양한 접근방식에 놀라게 될 것이다. 저자는 의도적으로 '덕후감'이라고 썼다고 밝혔지만 이 책은 대중문화의 '덕후'만 쓸 수 있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특히 어떤 현상에 대해 몇십년을 오가며 논할 수 있다는 것은 오랜시간동안 그 분야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과거 문화평론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식이다. '허무개그'가 대중들 사이에서 만연하고 있다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단절되고 그로 인해 사회가 건조해 지는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라거나, '만득이 시리즈'가 인기를 끈다는 것은, 컴퓨터 등 첨단문화에 짓눌린 신세대들이 귀신이야기를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 같은 식이다. 이 말은 얼핏 듣기에 그럴듯 해 보이면서도 억지스러운 면도 많다. 그래서 우리는 무슨 무슨 평론가라고 하면 으레 '하나마나한 소리를 어려운 단어를 들먹이며 특별한 척 포장해 본인만 알고 있는 사실처럼 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이런 말을 미리 하는 것은 물론 이 책이 기존의 그런 선입견과는 달리 '대중문화의 정치적 무의식 읽기'라는 부제를 얼마나 충실히 수행했는가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I show not your face, but your heart's desire(p.9)


대중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때 해리포터의 이 한 문장처럼 적절한 말도 없을듯 싶다. 대중들의 소망이 담겨 있는 것, 그리하여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믿는 것, 그럼에도 사실은 자신들이 끌려가고 있는 것이 대중문화이다. 저자는 크게 6부로 나눠 '대중문화'라고 하면 떠올릴만한 컨텐츠들을 끌어모아 이 책을 구성했다. 당연히 그 첫번째는 아이돌 문화가 빠질 수 없고 다음으로 명품 문화, 이데올로기와 문화, 신자유주의 시대의 문화 같은 내용들이 순서대로 실려 있다. 대중문화는 개인적으로 무척 관심있는 분야라 내 생각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읽기 시작했는데, 그 독창성과 색다른 접근법에 고쳐 앉아 읽게 된 책이다. 아이돌 문화에서 '성(性)'적인 코드를 읽는 정도야 예상 가능하지만, 팬덤문화에서 시작된 동생애 코드를 비롯한 다양한 성적 판타지의 발견, '삼촌팬'이라는 용어에서 내포하는 '성적욕망의 금지'를 공식화 한 채 감춰진 내밀한 욕구처럼 생각지 못한 디테일이 흥미를 끌었다. 또한 재범사건에서 등장하는 '애국주의'의 한계, 실제의 욕망을 감춘 채 그것을 다른 것으로 포장해버리는 대중의 공격, 그것을 방어하면서도 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팬들의 어쩔수 없는 한계와, 이를 통해 보는 SM과, JYP, YG의 확연히 다른 대처 방향과 색깔도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여러 장이 재미 있었지만 특히 재미있게 본 장은 5장이었다. '정치의 소실점으로서의 신자유주의적 윤리'를 다룬 이 장은 캠퍼스 드라마로부터 시작한다. 1987년을 기점으로 캠퍼스 드라마의 재현은 그 이면의 지향점을 이전과 달리하는데 이는 다분히 정치적이면서 경제적 의미를 담는 변화였다. 홍학표의 첫사랑 배종옥이 위장취업으로 감옥에 다녀온 문성근을 사랑한다는 설정은 그 당시까지 남아 있던 정치적 메시지가 다소 잔존함을 보여주는 출발점이었지만, 그 마지막에 가서는 소비지향적 대학생의 재현으로 막을 내린다. 이 바통을 이어 받은 '내일은 사랑'은 아예 대학생 문화에서 크게 위축된 정치적 포지션을 배제한 채 시작되고, 이는 '카이스트'에서 경쟁과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지극히 현실적인 메시지로 완전히 정착한다. 신자유주의 스토리는 영화에서도 드러나는데 그 시작을 알리는 것은 '공각기동대'였다. 특히 철학적인 메시지 해석에 열을 올리던 나는 이러한 접근 방식이 처음에는 다소 무리라고 느껴졌지만, '어벤저스', '아이언맨'으로 넘어가는 그의 논리를 따르다 보니 매우 근거있는 주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흐름은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선악 대결 구도에 골몰하던 관객에게 새로운 시사점-시스템을 위협하는 것은 무조건 악인가-를 제시한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아쉬운 점은 이 책이 과거의 기고문을 모으다 보니 최근 문화에 대한 분석글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다행히 마지막 장에서는 '국제시장'과 '변호인'이라던가 '케이팝 스타', '무한도전'에 대한 분석이 실려 있어서 괜찮았지만 최근의 문화를 중심으로 후속편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하지만, 여기 실려 있는 문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대중문화를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준 것 같아서 지금에 대입해도 충분히 무방할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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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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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영혜는 '채식'을 선언한다. 그것은 밥상머리에서 '나 내일부터 술 끊을거야'라거나, '내일부터는 좀 열심히 살아야겠어.' 같은 방식으로 하는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 남편은 어느 새벽에 냉장고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영혜를 발견한다. 다음날 영혜는 냉장고의 고기를 모두 버리고 채식을 선언한다. 그저 한 순간의 바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채식이 길어지자 부모님까지 나서서 그녀를 말리려고 한다. 언니네 집들이에 온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그녀의 아버지는 고기를 먹으라고 입을 강제로 벌리다 뜻대로 안되자 뺨을 때린다. 영혜는 아버지의 손아귀를 벗어나 과도로 자신의 손목을 긋는다. 몇일이 지나고 치료가 어느정도 된 영혜는 병원 벤치에서 상의를 벗고 햇볕에서 자신의 상처를 핥고 있다. 남편은 생각한다. 


'나는 저 여자를 모른다.'


두번째 연작에서는 화자가 영혜의 형부로 바뀐다. 비디오 작가인 그는 예술가들이 으레 그렇듯 자신도 모르는 예술적 허기의 근원을 찾으려 노력중이다. 우연히 부인에게 처제(영혜)의 몸에 남아 있는 '몽고반점' 이야기를 듣고 묘한 욕정을 느낀다. 그것은 단순한 성적 욕망이라기 보단 순수를 향해 무작정 덤벼드는 예술혼 같은 것이었다. 몽고반점은 어린시절에 있다가 나이가 들면서 거의 대부분 사라진다. 우리가 세상에 영합하면서 순수함이 바래지듯이 몽고반점도 색을 잃는다. 그것을 간직하는 그녀를 그는 생각한다. 그녀의 몸에 물감으로 꽃을 그리고 그것을 원래의 자리에 돌려 놓듯 태초의 모습으로 환원시킨다. 그리고 그 마지막 완성을 위해 자신도 몸에 꽃을 그리고 그녀와 교합한다. 그것은 조금도 에로틱하지 않은 예술의 완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부인에게는 그렇지가 못했다.


'이건 말이야.... 어쩌면 꿈인지 몰라.'


언니 인혜는 생각한다. 왜 아버지가 영혜에게 고기를 억지로 먹이려 했을 때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했을까. 왜 내 동생은 갑자기 미치고 말았을까. 왜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죽으려고 하는 것일까. 저렇게 불쌍한 아이에게 내 남편이란 인간은 어떻게 그런짓을 한 것일까. 의문은 그치지 않는다. 마지막 화자로 인혜가 등장하는 이유다. 그녀는 소설에서 가장 많은 의문을 품은 채 어려운 것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역할에 충실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녀는 과거를 생각한다. 동생이 개에게 물렸던 날, 먹고 싶지 않은 개고기를 먹어야 했던 동생의 모습, 여전히 자라서도 아버지의 폭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존재,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미쳐버린 동생. 아빠를 강하게 말리지도, 그렇다고 집을 뛰쳐나가지도 못했던 그녀는 사실 그 고통을 동생이 받아내는 것을 방임하며 그 뒤에 숨어 있었다.


'기껏 해칠 수 있는 건 네 몸이지. 네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게 그거지. 

그런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지.'


아버지의 폭력과 육식에 대한 공포는 영혜의 삶에서 한 순간도 사라지지 않고 표출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어느날 꾼 악몽을 계기로 영혜의 심연에 숨겨 있던 분노가 일시에 표출되었고, 그 시작은 '채식'의 선택이었다. 채식은 단순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의미를 넘어,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 대한 거부였다. 당연히 그런 선택은 억압하려는 주변의 폭력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때 그들이 선택하는 방법은 오직 스스로를 공격하는 것 뿐이다. 그것이 초식동물이 살아남는 법이다. 오직 스스로에게서 해결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 그것이 극에 달해 자해하는 방식으로 고통의 정도를 표현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영혜는 마침내 내장이 쪼그라들어 편하게 나무가 되는 편을 택했다. 아무것도 먹지 않다 보면 어느 순간 물만 먹고 광합성만 하면 되는 나무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조차 맘대로 하지 못하는 영혜를 지켜보던 언니는 자신이 영혜를 위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또다른 방식의 폭력이었음을 생각한다. 


'꿈속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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