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 불능 - 인간과 기계의 미래 생태계
케빈 켈리 지음, 이충호.임지원 옮김, 이인식 감수 / 김영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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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매트릭스에는 서기 2199년 인공 지능 컴퓨터가 지배하는 세계가 나온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인공자궁 안에 살면서 오직 가상의 현실이 실제라고 믿으며 살고있다. 그들이 인식하고 있는 전부는 가상이고 그마저도 컴퓨터의 개입으로 조작되거나 지워진다. 컴퓨터는 인간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면서 그들의 육신을 이용할 뿐, 사람을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경험할 수 없는 무의미한 존재로 만든다. 인공지능의 진화가 결국 디스토피아가 되고 말 것이라는 예상은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대부분 큰 차이가 없다. 영국의 유명한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는 "완전한 인공지능의 개발이 인류의 멸망을 불러 올 수 있다."고 경고했고, 엘런 머스크도 "인공지능 연구는 악마를 소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한 바 있다.  


인공지능은 적어도 엔터테인먼트 쪽에서는 여전히 흥미로운 존재이지만 냉정히 생각할 때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니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강력한 인공지능이 존재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들이 악의적인 방법으로 인류를 절멸 시키려 한다면 인간의 힘은 미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연산속도를 따라갈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강력한 네트워크나 개발 능력을 압도할 수도 없다. 하지만, 거기에는 항상 한 가지 의문이 드는데 그것은 바로 인공지능이 새로운 것을 생성할 수 있느냐이다. 이 책은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매우 흥미로운 책이었다. 주어진 정보를 취합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인공지능이라고 생각했고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활용하는 것이 더 뛰어난 인공지능이라고 생각했던 내 생각은 '통제 불능'을 보면서 조금 다른 관점을 보게 됐다. 엄밀한 의미로 단순히 주어진 자료를 취합하고 아웃풋을 생산하는 것은 인공지능이라고 보기 어렵다. 대신 저자는 비비시스템을 이야기 한다. 


나는 만들어진 것이든 태어난 것이든 생명과 유사한 특징을 갖고 있다면, 그와 같은 시스템을 '비비시스템'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비비시스템 가운데 상당부분은 '인공적'인 것이다.그 비비시스템에는 전 지구적 통신 시스템, 컴퓨터 바이러스 인큐베이터, 로봇 원형, 가상 현실 세계, 합성된 애니메이션 캐릭터, 다양한 인공 생태계, 지구 전체의 컴퓨터 모형 등이 있다. 그러나 야생 자연이야말로 비비시스템에 대한 명확한 통찰을 돕는 중요한 원천이다. (p19)

인간이 만든 것은 모두 인공적인 것으로 생산 시스템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데 어떤 말인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뒤이어 나오는 여러 사례들은 어디까지가 인간이 주어주는 조건이고 어디서부터 인공 지능이 스스로 진화하는 단계인지를 보여준다. 토머스 레이의 이야기를 보자. 그가 처음 컴퓨터에 손으로 만든 작은 생물을 풀어 놓았을 때만 해도 그들은 번식속도만 빨랐을 뿐 큰 위협은 되지 못했다. 그가 처음 만든 것은 80바이트로 만들어 '80'이라 명명했는데 10% 변이를 설정해 놓자 자연스레 79나 81이 생겨났다. 여러 숫자가 번갈아 가면서 컴퓨터에서 개체수를 반복했고, 45라는 기생충 버그까지 탄생했다. 기생충과 숙주가 공진화 하는 과정에서 면역력이 있는 개체가 증가하면 또 거기에 기생하는 버그 개체가 증가하기를 반복했다. 22바이트 생물도 생겨 났는데, 이전까지 아무리 코드를 줄이려고 해도 가능한 최소는 31바이트였기 때문에 매우 놀라운 사실이었다. 또한 스스로의 크기를 과장되게 하는 코드, 유성 생식을 하는 코드까지 생겨났다. 


인간이 만들 수 없는 것조차 진화를 통해 만들어 낸다는 사실은 조금 섬짓한 이야기이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인공지능이 우리의 손을 벗어날 것이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만들어낸 다윈칩은 스스로의 성능을 개선하며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 낼것이다. 단순히 산술적으로 생각하자면 우리가 주어지는 선까지 발전하는 것이 기술이다. 스스로 성장하는 것은 생물이 아니라면 불가능 한 것이었다. 하지만, '만들어 진 것'과 '태어난 것' 사이에는 교집합이 존재하며 이 영역에서 인공적인 특징과 생물학적 진화를 갖춘 시스템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에는 인형사에게 단순한 자기 보존 프로그램에 불과하지 않는다는 말에 이런 답을 한다. 


그렇게 말한다면 인간들의 DNA 또한 자기 보존을 위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이란 정보의 흐름 속에서 태어난 결접점과 같은 것이다.

이 말을 다시 생각할 때 나는 이 책이 공각기동대에도 어떠한 영감을 주지 않았을까 싶었다. 워쇼스키 남매가 공각기동대에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적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서로 연관이 없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컴퓨터가 자신들이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인간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이런 말을 실제로 들을 수 도 있을 것이다. 어짜피 인간 또한 DNA를 보존하는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기적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정보의 보존 혹은 그 이상의 목적을 위해 구축된 시스템 또한 우리와 공존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책은 그동안 인공지능에 대해 가졌던 개인적인 회의적 시각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면서 신선하게 느껴졌지만, 어두운 미래를 언뜻 본 것 같아서 무거운 짐을 진 듯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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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각의 여왕 - 제2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이유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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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있다. 마주보고 이야기 하고 있는 사람에서, 눈앞에 있는 사물에서 초점이 흩어지고 멀리 보이는 배경이 선명해지는 순간. 그 순간, 어떤이는 떠나고, 어떤이는 남는다. 그들을 떠나게 하는 마법은 선명한 것을 따르려는 본능보다 더 강한 광기이다. 오직 보이는 것은 그것 뿐이니 그들은 결국 떠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허파에 바람이 든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한 번 터진 웃음이 멈추지 않듯이, 한 번 궤도를 벗어나면 멈추지 못하는 방황을 반복하는 것이다. 디즈니랜드의 반짝이는 회전목마를 보면서 허파에 바람이 들었다는 할아버지의 유전병처럼, 아버지는 이트륨이라는 희귀한 금속에 빠져 허파에 바람이 들고 만다. 초점이 먼곳을 향하면 주변의 사물이 흐려지는 것은 세상의 이치. 아버지는 물려받은 고물상에 관심이 사라지고 대신 희귀 금속을 추출해 내는 거대한 기계에 빠져든다. 그리고 그의 딸 해미는 아버지가 버려둔 고물상과 유품정리의 바통을 쥐고 이어 달린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삶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쓸모 없는 것들에서 가치를 찾아내는 삶, 사라진 것들에서 관계를 복원하는 삶. 모든 것을 소각하면서도 그것의 가치를 마지막으로 '되물어주는' 삶이다. 고물상이 세상에 버려진 모든 것들에서 남아있는 가치를 찾아내 값어치를 매기는 작업이라면, 유품정리를 하는 해미의 일은 주인이 사라져버린 사물에 세상과의 관계를 복원시키거나 사라지게 하는 작업이다. 우리의 삶이 생태계라면 폐기물을 분리해서 다시 복원시키는 작업은 '분해자'의 역할이다. 분해자는 유기물의 시체나 배출물에서 에너지를 끌어 쓰고, 유기화합물을 무기물로 바꿔준다. 이들은 다시 유기물에게 소비되어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이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은 결국 '흩어지는' 과정이다. 사물의 부분을 구성했던 과거에 얽매인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소멸되고 말것이지만, 각각의 개체로 분리된다면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 


때문에 그들에게 '집합'은 의미가 없다. 오직 개체로서 존재해야만 가치를 인정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희귀금속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파지는 파지대로, 병은 병대로, 그리고 인간은 인간 자체로서만 존재해야 한다. 고유의 본질을 놓친 사물은 영원히 사라지는 수밖에 없다.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이 반복될 수록 개체성은 더 확고해지고, 어디에 속해 있는 것으로서가 아닌 오직 그 자체로서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소각의 여왕'이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면서도 우리에게 사물의 의미를 되묻는 희한한 이야기인 이유가 여기 있다. 


눈 앞에 있는 것들의 의미를 찾는 일은 도무지 어렵기 때문에, 소각하는 과정은 그 공백을 느끼게 해주는 특별한 절차가 된다. 사물과 인간의 관계가 사라지면 그들은 의미 없는 존재가 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런 과정에서 그들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의미를 각인시킨다. 유일하고 특별한 사물로서 인정 받던 순간에서 주인의 부재로 인해 쓸모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 순간이 모든 사물의 전부의 순간이다. 인간의 경우라면 다른 것들과 섞여 있을 때 개인의 꿈이란 희미해지는 것이고, 개별적 자아가 될 때 이상이 가까워 오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환상의 영역에서 돌아오기에 그들은 너무 거친 삶을 살고 있었다.


펠릭스가 고통을 겪고 있다면 큰일이었다. 그런 상태로 코마에 들어갔다간, 고통에 찬 육신으로 돌아오기보다 빛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염려가 있었다. (타나토노트, p.214)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타나토노트'에는 위 장면이 나온다. 처음으로 영계 탐사를 앞두고 있는 펠릭스가 살을 파고든 발톱 때문에 영혼계에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염려하는 뤼생데르의 생각이다. 현실을 벗어난 이가 현실로 돌아오기 싫은 때는 현실에 지독한 고통이 도사리고 있을 때이다. 결국 그녀의 아버지 지창씨는 허파에 든 바람을 꺼뜨리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그녀가 그의 죽음 앞에서도 크게 울지 않은 것은 그가 좇았던 꿈과 돌아오지 못하는 현실의 간극에 극복할 수 없는 고통이 있음을 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허파에는 금새 바람이 들었다가도 꺼져버리곤 하지만, 언젠가 또 그의 아버지처럼 바람든 가슴으로 훌쩍 떠나버릴 것임이 분명하다. 우리 삶이란 가슴 모퉁이에 비현실적인 꿈을 하나 안고 살다가 한 번쯤 날아가 버리거나 혹은 끝내 못하거나, 두 가지의 길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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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6-02-11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작 덕분에 두 번 읽는다는~ 추카추카. 나는 이번에 떨어졌..
당선작으로 들어와서 보니 오호 리뷰가 더 멋져~

고군분투 2016-02-11 19:14   좋아요 0 | URL
신기한 것은 게스님이 칭찬한 글은 항상 뭔가 좋은 일이 생겼다는. 그게 더 대단함.
 
심리부검 - 나는 자살한 것을 후회한다
서종한 지음 / 학고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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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자살 때문에 모인 장례식장에서 으레 망자와 친하지도 않던 어떤 이는 이런말을 꺼내기 마련이다. '죽을 용기로 살지.' 


가끔 죽을 용기가 생길 때 나는 그 말을 가만히 떠올려 본다. '죽을 용기보다 어려운 용기는 없다는 것', 그리고 '사는 것은 아무리 힘들어도 죽는 것보다 낫다는 것'. 을 전제하는 그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 말인가 하고 말이다. 자살은 삶을 더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어려워졌다는 마지막 표현인데도, 남은 사람들은 여전히 죽는 것보다는 사는게 나은데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망자의 입장에 우리는 서지 못하고, 어쩌면 그것은 단순한 실수에 불과할 지 모른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내가 이 책을 고른 이유 중 하나는 심리부검이란 제목 밑에 쓰인 부제 '나는 자살한 것을 후회한다'였다. 자살하기 전에 손목을 여러번 그은 흔적이 남는 주저흔처럼 자살하는 사람이 죽기 전에 수천번 고민 했을 것을, 그리하여 어찌하지 못하는 그 짧은 찰나에 후회했을 것을 나는 믿고 싶었다. 그래야만 잊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래야만 나 또한 더 열심히 살 수 있을테니까.


내가 특히 좋아하지 않는 말이 있는데, '신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통만 준다'라는 말이다. 이 말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증거가 나는 자살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곤 한다. 견딜 수 있을만큼의 고통을 결국 견뎌낸 사람들은 살아 남아서 여전히 그 믿음이 옮음을 증명하고, 그것이 아님을 증명할 사람들은 전부 신의 곁으로 갔으니 더 이상 증명할 방법은 없는 셈이다. 이 책에는 견딜 수 있을만큼의 고통을 견뎌내지 못하고 자살을 택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쓰여 있다. 심리부검이라는 것은 죽은 이의 사망전까지 행적과 주변인의 면담을 통해 죽음에 이르게 된 원인을 밝혀 내는 작업을 뜻한다. 이는 좁게는 자살의 이유를 밝혀 내는 것에서, 자살인지 타살인지의 여부를 가늠하는 것, 크게는 주변인들의 심리적 치유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심리부검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사건은 1958년 LA 부둣가 추락 사건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살의지(intention)를 밝혀내는 것인데 이 사건에서 죽은 이는 자살을 할 정황이 전혀 없어서 실족사로 판명이 났다. 그렇다면 정황이란 무엇일까. 죽은이의 삶을 중심으로 이전에 자해를 시도 했거나 트위터나 일기장에 남긴 기록, 죽음을 암시하는 행동, 약물 복용, 큰 충격을 준 사건 등을 전부 정리해 보는 것이다. 여기에는 발생시점에만 영향을 미치고 만 사건에서부터 오래전에 벌어졌지만 죽기 전까지 영향을 미친 사건들이 있다. 


또한 유서에서 쓰이는 단어와 형태도 대체적으로 유사한 형태를 띤다. '죄송합니다. 미안하다. 아들. 열심히. 살아. 좋은. 여보. 싶다. 행복하게. 사람. 용서. 눈물이. 마세요.' 같은 단어들이 순서대로 많이 쓰인다. 특히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가 '엄마'였다는 사실이 듣는 이의 마음을 참 아프게 하기도 한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유서를 남기지 않으며, 한국은 특히 열 명에 한 두명이 남기는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의외로 준비된 종이에 유서를 남기지 않고 신문지, 포스트잇, 벽지 같은 데에 남긴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유서를 분석해 반복적으로 발견한 주제 세 가지를 설명한다. 그것은 외로움, 짐, 무기력이었다. 스스로가 혼자라는 생각과, 남에게 짐이 되고 있다는 판단,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리력함이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누구든 절망의 끝에 서 본 사람이라면 그 세가지가 왜 그토록 그들을 무겁게 짖눌렀는지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심리부검이 남겨준 가장 큰 숙제는 망자가 하고 싶었던 말을 우리이게 들려준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영영 못듣고 지나쳤을 메시지에 초점을 맞추면 우리는 다시 한번 그를 상기하고 우리 삶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책에서는 자살처럼 보이지만 그럴 이유가 없는 사건, 타살처럼 보이지만 자살의 징후를 보였던 사건, 그리고 자살할 것이 예견되었던 사건 등 많은 케이스가 나열되어 있다. 보험회서에서 근무했던 하인리히는 대형 사고를 분석하다가 대형 사고가 한번 있기 까지 29번의 경상자, 300번의 잠재적 부상자가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사고가 나는데도 이렇듯 수많은 징후를 보이는데 하물며 사람의 일이 어찌 아무런 징후가 없을 수 있겠는가. 다만 우리가 그것에 눈을 감고, '괜찮겠지, 견디겠지' 하면 외면했던 것은 아닐까. 나는 그런 징후를 그냥 넘겼던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한번쯤 읽어봤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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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물어주마 - 왜가 사라진 오늘, 왜를 캐묻다
정봉주 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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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든 타의든 정봉주는 이제 매우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그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BBK 주가 조작 사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일로 결국 공직선거법 위반 및 허위사실 유포 등의 혐의로 1년의 실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그가 상징적 인물이 된것은 어떤 발언을 했느냐나 어떤 처벌을 받았느냐의 문제 아니라 단순히 표현의 자유 때문에 실형을 받았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우리사회는 시간이 갈수록 그런 판결이 이상할게 있냐는 분위기로 바뀌는 중이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의 입은 틀어막아야 정상이라는 생각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중이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기준은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절대적인가, 아니면 권력자의 손을 들어주는 상대적인 것인가.  


과거 포리송이라는 프랑스 리옹대학 교수가 독일의 아우슈비츠와 가스실이 단순히 루머일 뿐이라는 표현을 해서 큰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이 때 미국의 진보 지식인 촘스키가 그의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탄원서에 서명을 해 함께 매도 당한 사건이 있었다. 촘스키의 주장은 그의 발언에 대한 지지가 아닌, 표현의 자유에 대한 견해 표시였다. 그럼에도 촘스키는 반유태주의자로 낙인이 찍히며 큰 비난을 받았다.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래의 말에 잘 드러나 있다. 


거듭 말하지만 내게 중요한 것은 표현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들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허락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는 생각만을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정직하다면, 괴벨스와 즈다노프의 주장까지도 수긍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 드는 표현만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그들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p. 46)


정봉주 지금 팟캐스트 '전국구'를 진행하고 있다. 권력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만큼 당했으면 조용할 법도 한데 잡초처럼 참 질기기도 하다. 오히려 더 신나서 소리를 질러대는 모습에 오히려 어이가 없을 수도 있겠다. 피선거권까지 제한되어서 이제는 뭘 해볼수도 없을텐데도 책 제목처럼 끝까지 물어뜯고 놓지를 않는다. 끝까지 물어준다는 말이 한편으로는 물고 놓지 않겠다는 의미이면서 한편으로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권력에 끝까지 반문하겠다는 의미이다. 끝없이 질문하는 사회, 질문이 제지 받지 않는 사회, 다른 편이라고 해서 무시당하지 않는 사회가 민주주의이다. 자기편은 끝까지 지켜주고 상대편은 말살시키는 것은 결코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기준에 미달하다고 해서 무시될 수 없는 것처럼, 뛰어난 능력을 가진다고 해서 절대적일 수도 없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다. 절대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믿음은 상대에 대한 배척과 탄압의 전제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상식이 위협받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인물이 정봉주이다. 과하게 싶을정도로 밝은 모습이 다행스럽게도 여겨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을 찡하게 하는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책에서는 정봉주가 전국구를 진행할 때 큰 이슈를 다뤘던 것을 정리해 놓았다. 국사 교과서 국정화, 전세문제, 세월호, 쌍용자동차, 국정원 해킹, 일본, 그리스 문제 등 우리가 특히 관심 있어할 만한 주제를 10개 골라 정리했다. 어느것 하나 놓칠 수 없는 주제이면서, 민감하고 첨예하게 대립하지 않는 주제가 없다. 보수쪽에서 볼 땐 지나치게 편향된 이야기들의 연속이고, 진보에서 보자면 시원스런 대화들을 모아놓은 책이 될 것이다. 답은 시간이 지나 훗날 우리 자손들이 내리겠지만 여전히 진실은 존재한다고 믿고 싶다. 진실이 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마지막으로 리영희 교수님의 유명한 한마디를 옮겨보고 싶다. 


내가 종교처럼 숭앙하고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려고 하는 것은 국가가 아니야. 애국 이런 것이 아니야....  진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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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 내 삶의 주인이 되는 문화심리학
김정운 글.그림 / 21세기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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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생각이 좋다. '노는 만큼 성공한다'는 생각도, '멍하게 있을 때 가장 창의적'이라는 기발한 발상에도 기꺼이 동감한다. 우리는 마치 브레이크가 튕겨나간 사람들처럼 조금만 정신을 차리지 않고 있으면 속도에 날아가 버릴 지경이 되어버리려는 중이다. 바이올린도 켜지 않을 땐 현을 느슨하게 해야 하는 법인데, 우리는 쉬는 것이 죄악이라도 되는 것처럼 스스로를 감시하는 사회를 만들어버렸다. 그럴 때 한번씩 나오는 김정운 교수의 책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을 토닥이며 잘하고 있다고 말해준다. 이번에 저자는 '외로워지라'고 말한다. 뭐 '아내와 결혼을 후회한다'라고까지 했던 발언의 강도에 비하자면 양호한 편이라고 봐야겠다. 


김정운 교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제목을 보고 어떤 의미에서 한 말인지 대충은 짐작할 것이다. 사실 우리 중에 격하게 외롭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다만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고, 연기할 뿐이지. 우리는 온 종일 내가 속한 대열에서 이탈할 것 같은 두려움, 매일 같이 군집에서 도태될 것 같은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사실은 그 속에 있다고 해서 외롭지 않은 것도 아니면서도, 외롭지 않은 척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 중 누구도 내가 '혼자'라는 사실만큼은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토록 부정하고 싶더라도 실제는 외로운 것이라면 그 사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저자의 말은, 타인 혹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으로는 더는 버틸 수 없으므로, 이제는 차라리 그것을 인정하고 거기서 답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가끔은 격하게 외로운 것이 정상이라고 말하면서 그 현실을 즐겨보자는 말이다. 


이제 혼자가 되는 것을 인정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문제는 뭘까. 그것은 내가 혼자가 되었을 때 뭘 할지를 모른다는 사실이다. 저자 또한 자신의 적성과 양심에 도무지 맞지 않는 교수직을 때려치우고 가장 처음한 생각이 '이제 뭘하지?'였다. 우리는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을 벗어날 용기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다음에 뭘 할지에 대해서 선뜻 자신있는 답을 내기 힘든 삶을 살고 있다. 저자는 일본으로 건너가 하고 싶었던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이 책에서 나온 그림은 전부 저자가 그린 것인데 그의 자유분방함과 에로틱함, 그리고 나름의 그림 실력이 어우러져서 꽤 괜찮은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글도 기발하고 그림도 독창적이어서 미술은 모르지만 나름의 고유한 영역이 있어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현실에서 한 발 떨어지고,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면 절반 이상은 성공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나는 올해도 사이버 대학교의 어느 한 과를 서성이고 있다. 매번 생각은 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은 마음에 포기만 했었던 공부인데도 여전히 과감한 결정은 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내가 당장 지금의 직장이나 가정을 소홀하게 해야할 정도의 일이 아닌데도 매번 주저하게 된다. 더 우스운 사실은 그런 후에 당장 3~4년만 지나도 이 우유부단함을 후회할 것이란 사실을 안다는 것이다. 그럴때 나는 더 우스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구도 현실을 쉽게 벗어날 순 없다. 다만 조금만 노력하며 스스로의 삶에 여유 공간을 줄 수는 있다. 그러니 저자는 격하게 외로워져보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것이다. 


그는 수용소나 정신병원의 삶이 고통스러운 이유로, 무대 뒤의 공간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혼자 쉴 수 있는 공간이 없는 삶, 모든 것이 공개된 유리방 같은 삶이란 얼마나 고단한가. 배후공간이 없는 삶에 익숙해지는 것만이 방법일까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어 외로워지라고 하는 것이다. 한국 중년 사내들이 골프에 환장하는 이유가 어쩌면 열여덟번이나 새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도, 농담처럼 들리지만 뭔가 찡한 느낌이 있다. 우리는 누구든 새로 시작하고 싶은 것이다. 좀 더 여유있고, 좀 더 집중하고 열심히 하는 홀을 다음 번에야말로 해내겠다고 기대하는 것이다. 다음 홀을 더 잘 할 수 있는 것도 천천히 걸으면서 지난 번 홀을 상기한 덕분이고, 바둑을 더 잘할 수 있는 것도 승부를 끝내고 편한 마음으로 복기를 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곧 우리가 더 잘 살 수 있는 것도 격하게 외로운 순간에 스스로를 마주하면서 공상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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