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석과 철학하기 - 흔들리지 않는 삶을 위한 12가지 행복 철학
김광식 지음 / 김영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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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가수의 노래는 오직 그 노래 자체만으로 철학적이다대표적으로 고인이 된 신해철이나 실력있는 싱어송라이터 이상은의 노래가 그렇다오직 가사와 멜로디만으로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무한정 남겨둔다그에 반하면 김광석의 노래는 그 자체로 철학적인 노래는 아니다사실 우리가 잘 아는 노래도 그가 직접 작사한 노래가 그렇게 많지도 않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김광석의 노래에 우리 인생이 담겼다고 생각한다왜 그럴까그것은 김광석의 노래가 오직 '노래'로서 따로 생명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김광석의 노래'로서 생명력을 가지기 때문이다그의 삶과 그의 행동과 말투그리고 노래를 부르는 톤과 목소리 전체가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낸다.

 

김수희의 '애모'나 나미의 '슬픈인연'을 떠올릴 때 나는 가수들을 떠올리지 않고 종종 그 곡 자체로만 생각할 수 있다하지만,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떠올리면 난 단 한순간도 김광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비극적인 죽음이 예술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는 잔인한 생각은 좀 버려두고서라도김광석은 항상 뭔가에 고뇌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기억된다삶의 무게에 짓눌려 금방이라도 탈선해버릴 것 같은 불안한 열차처럼질식의 끝에서 부르는 그의 노래는 우리에게 절실함으로 기억된다. '김광석과 철학하기'라는 책이 어울리는 이유는 아마도 그의 노래가 담고 있는 은유적 메시지가 우리의 무의식에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김광석의 노래 12곡과 그에 어울리는 철학자 열 두 명(마지막은 저자)의 철학 이야기가 담겨 있다솔직히 말하자면 김광석과 철학하기는 김광석의 노래보다 철학에 방점이 찍혀있다.개인적으로는 노래 가사 하나 하나에 담긴 철학적 의미를 좀더 깊이 파고 들어 철학자들의 주장과 연결시켜 보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하지만 이 책은 큰 틀에서 철학적 주제를 잡고 끄집어 내서 이를 중심 주제로 해서 철학사와 연결시키고 있다예를 들면,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 바람의 철학을 이야기 하기 위해 플라톤의 '이상의 철학'을 인용하거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에서 창의 철학을 이야기 하기 위해 데카르트의 '이성의 철학'을 이야기 하는 식이다그렇다보니 안타깝게 매 챕터마다 나뉘어 있는 1악장과 다음 2악장 사이에 미묘한 캡이 존재한다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3악장에서는 두 악장의 조화를 시도하지만 다소 아쉬운 면이 있다하지만 바꿔 말하면 철학이라는 다소 껄끄럽고 부담스러운 주제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책을 보는 사이 개념에 푹 빠질 수 있게 쓰여진 책이다.

 

트랙 3 '나무'라는 노래의 철학 이야기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나무'라는 노래는 김광석의 노래 중에서 크게 알려지지 않은 은은하고 차분한 노래이다. '한결같은 빗속에 서서 젖는 나무를 보며눈부신 햇빛과 개인 하늘을 나는 잊었소 누구 하나 나를 찾지도 기다리지도 않소동적인 쾌락이 아닌 정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나무의 모습이 연상 시키는 것은 에피쿠로스 학파이다쾌락보다 절제와 금욕이 중시되던 사회에서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이 좋은 것이라고 선언했다그들은 필연적인 법칙이나 운명에 따른 삶을 부정하고 '우연'과 '우발성'의 존재를 인정했다특별한 기준이나 운명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생각은우리가 유동적이과 끝없이 변화하는 우주에서 존재 그자체로 살 수 있는 논리의 토대가 되었다이러한 점이 '이데아'라는 외적 기준을 정해 놓고 이를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소크라테스 사단에게서는 얻을 수 없는 깨달음이 에피쿠로스 학파에서 가능하게 했다나무처럼 바라지 않고 주어지는 대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삶은우리가 우리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도록 이끌고 격려한다가끔 이런 마음이 인문학이 우리에게 바라는 삶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밖에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에서 들어보는 헤겔의 '자유의 철학'이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에서 보여주는 하이데거의 '아픈 사랑의 철학'도 읽을만 했다가끔 믿기지 않는 일들이 있다죽고 나서야 우리가 겨우 그 가치를 알게된 것인지그전부터 알았지만 그것이 더욱 올라간 것인지 알 수 없지만김광석이 그 시대를 살아온 이들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과 고민을 남긴것만은 사실이다. '음미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말했던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고민하지 않고 듣는 음악은 들을 가치가 없다'라는 생각을 늦은 밤 그의 노래를 다시 들으면서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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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불감증 - 유동적 세계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너무나도 소중한 감수성에 관하여
지그문트 바우만.레오니다스 돈스키스 지음, 최호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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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가정폭력에서 자란 아이는 커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그에게 숨겨져 있는 유전자의 영향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그가 폭력적인 상황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서 폭력에 대한 내성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폭력이 일상이 된 아이에게는 폭력적 상황은 special 한 것이 아닌 default 값이 된다. 그것이 단순히 한 아이의 성장에 관련된 이야기라면 그나마 나을 수도 있겠다. 지그문트 바우만과 돈스키스 두 지성이 지적하는 바는 이러한 불감증이 사회전체에 만연해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사람들은 경외의 대상이든 두려움이나 비난의 대상이든 외부의 거대한 권력에 의미를 두었다. 오랜 시간을 '신'에 대해 생각했으며, 중세가 지나고 나면서 '이성'에 눈을 돌렸다. 그것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어떻게든 우리 삶이 옳지 못한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자본이 그 자리를 대체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현세에서 즉각적이고 명료한 보상을 주는 자본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자로 등장한 것은 주변인들이었다. 사회 구성원끼리 경쟁하고 배신하면서 개인은 파편화 되고 공감이나 소통이 설 자리를 잃었다. 


이 책의 두 저자가 지적하는 개인주의와 유대의 파편화 등은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뒤로 하고 있다. 이는 그들 뿐 아니라 누구라도 알 수 있는 현재의 어두운 자화상이다. 이런 현상의 문제는 결국 아이히만 같은 실재하는 '악'에 대한 비판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아이히만이 사실은 '아주 평범한' '옆집 아저씨' 같은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충격에 빠뜨렸다. 지금 시대에는 멀리가 아니고, 정치인도 아닌, 내가 옆사람에게, 그들이 나에게 무관심을 무기로 고통을 전가하고 있다. 한때는 아이히만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경종을 울렸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아니고 그런 권력을 가질 정도의 사람이 아닌 아무런 힘도 없는 이들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단테는 지옥에서 가장 뜨거운 곳은 '격변의 시기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비워져있다'는 말을 한 바 있다. 저자들 또한 '악은 독재자가 아니라 익명의 가면을 쓰고 있다'고 말한다. 내가 당사자가 아닌 상황에 대해서 무감각할 수 있는 능력은 현대인의 기본 소양이 되었다. 무관심과 방관으로 타인의 상황을 지나치면서도, 가끔은 태연하게 상대의 심장에 비수를 꽂아댄다. 이러한 도덕적 불감증의 상황을 지적하는 것조차도 조금 당연스레 여겨질 정도로 우리에게는 익숙해졌다.  


과거의 거대한 권력이나 정치의 힘이 아닌 우리 자신이 그러한 권력의 일부로 존재하게 되면서 이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도덕성에 관심이 모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기술의 발전이 새로운 대중 권력의 형성을 가져왔다 하더라도 그 새로운 조류가 긍정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런 도덕적 성찰이 동반되지 못하는 이러한 현상은 결국 우리 사회 전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술이 정치력을 뛰어 넘으면서 새로운 형태의 아고라가 형성되었지만 그곳은 윤리적 성장이 뒤따르지 못하는 덩치 큰 아이일 뿐이다. 영화 프로메테우스에서 인류의 기원을 찾아가는 인간에게 인조인간이 묻는다. 왜 저를 만드신거죠? 인간의 대답은 무성의하다. '그냥 만들수 있으니까.' 이는 기술의 진보가 윤리의 발전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지금 우리시대가 겪는 공동체의 붕괴, 구성원의 개체화, 느슨한 유대의 등장은 우리에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의무감을 덜어주는 대신 공감의 부재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는 결국 어떠한 연대도 가져오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단결된 힘으로 사회를 발전시키던 과거의 모습은 사라졌다. 이들이 그리는 현재와 미래의 모습은 당연히 디스토피아를 연상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대안으로 제시된 것은 우정, 사랑일 수밖에 없다. 뚜렷한 대안을 제시해서가 아닌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스스로를 성찰하게 하는 의미에서 읽어본다면 의미가 특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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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란 무엇인가
김경욱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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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야구'처럼 생긴 '인생'의 이야기이다. 사실 야구 뿐만 아니라 모든 스포츠는 인생의 축소판이다. 당구의 의외성, 탁구공의 역회전, 축구의 사회성처럼 모든 스포츠는 인생을 담고 있다. 


그중에 야구라니..


야구가 이 책의 소재인 광주민주화운동과 연결되는 이유는 너무 많다. 모두가 알다시피 야구는 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시행한 3S정책의 대표적인 선봉주자이다. 광주 사람들은 야구에 열광 했지만 그것은 단순히 광주일고, 군산상고를 응원하는 마음의 연장선상이 아니라, 광주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마음에서였다. 이는 축구 한일전에서 우리가 일본만큼은 이기고 싶어하는 억울함과 처절함의 마음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타이거즈는 열악한 자본으로도 곧잘 우승을 이끌어 내며 그들의 한을 잠시나마 씻어줬다. 


주인공 사내는 어머니의 죽음 소식을 접하고 광주로 내려간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생각한다. 박하사탕의 설경구 처럼.. 

'내 인생 이렇게 조진놈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는 5.18 당시 동생을 죽였던 계엄군 '염소'를 떠올린다. 그것은 오래 전에 이뤄졌어야 할 복수이지만, 현실적인 이유를 핑계로 미루고 미뤘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 거둬줄 곳 없는 아들을 눈 앞에 둔 막다른 골목에서 다시 염소가 떠오른 것이다. 


승부의 중심은 복수


스포츠에 감정이 실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9회말 투아웃 만루에서도 져도 그만이고 이겨도 그만이라면, 7:8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등장한 타자가 쳐도 그만 안쳐도 그만이라면 그것은 그냥 장난일 뿐이다. 어떻게든 스토리가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그 순간부터 진정한 승부인 것이다. 지역감정은 정치인들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이었지만 어찌됐건 타이거즈는 라이온스를 이겨야만 했다. 그것은 이기고 싶은 맘이 아닌, 처절한 절박함이었다. 


사내는 염소를 찾아내서 죽여야만 했다. 그걸로서 그의 스토리는 완성되는 것이다. 한 번 받았으니 응당 다시 돌려줘야만 이야기는 완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의치 않다. 30년을 미뤘지만 여전히 그를 가로막는 현실은 그의 편이 아니다. 


주사위, 칼.. 그리고 청산가리


그가 길을 떠나면서 챙긴 세 개의 물건. 주사위, 칼, 청산가리... 어찌보면 칼과 청산가리는 연결이 되지만 주사위는 좀 의외다. 어떤 조합일까. 

이 세 개의 조합은 바로 '죽음'과 직결되어 있다. 

주사위는 과거에 동생을 죽음으로 몰고간 복수의 상징물이다. 칼은 당연히 동생을 죽음으로 몰고간 염소의 죽음을 가져올 것이며, 청산가리는 마침내 동생의 복수를 마친 내가 취할 죽음의 종류를 알려준다. 그는 염소에게 복수하기 위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바로 서울로 올라간다. 


야구는 결국 홈(home)으로 돌아오는 경기


그의 염소를 찾기위한 여정은 어색한 관계인 아들과의 동행 때문에 복잡성을 띤다. 다소 자폐의 성향이 있는 그의 아들은 노란색에 집착하며, 지도를 비정상적으로 잘 보고, 시간을 과할정도로 정확하게 지킨다. 결국은 9회가 끝나야 야구는 종료되지만, 중요한 것은 1회부터 8회까지를 어떻게 보내느냐이다. 그래서 작가는 아들과 한 팀이 되어 싸우는 사내의 이야기에 더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파울라인을 다시 긋는 모험에 아이는 기꺼이 동참한다. 파울라인을, 주루 선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다시 긋는다는 즐거움에 손전등을 앞장 세우고 깡충거리며 1루로 향한다. 사내는 희미해진 석회가루 위에 염소를 조금씩 뿌린다. 3루를 돌아 홈으로 간다. (p250)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부자는 잠실야구장에 들어선다. 그들은 1루를 돌았고, 2루를 밟았으며, 3루를 찍고 홈으로 기어들어가는 중이다. 그 목적이 주심을 방망이로 때려 눕히는 것인지, 상대 투수를 공으로 내리 찍는 것인지, 홈에 안착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결국 야구는 홈으로 들어가는 게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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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랭 레몽 지음, 김화영 옮김 / 비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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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들렌을 한 입 깨어 물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감각적이다. 마들렌의 맛과 홍차의 향을 좇으면 언제든 주인공은 과거의 한 시기로 여행을 하게 된다. 내가 살던 집을 통해 과거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어떨까. 이 여행은 투박하면서도 허전한 그리움을 동반한다. 이미 누군가가 차지해 버려서, 그것은 한 때 나의 것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증명할 수 없는 일이다. 증명해 주는 흔적은 오직 나의 기억과, 함께 시간을 보낸 가족들. 그 뿐. 그렇다 그것이 전부다. 이 이야기는 그 흔적을 따라 잔잔하게 이야기 하는 알랭의 자전적 소설이다. 


트랑에 들렀던 이브는 알랭이 살던 집을 지났왔었다고, 그 집엔 누가 사는 지 아느냐고 묻는다. 무심한듯 집에 대해서는 잊은척 하던 알랭의 기억은 순식간에 과거를 거슬러 오른다. 주인이 바뀐 집을 이야기 하는 것은 다시 말하면 나는 더이상 과거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더는 과거로 돌아 갈수도 없을 뿐 아니라, 설사 내가 그 집에 다시 들어가 산다고 하더라도 그때와 같지 않다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하루하루가 작별인 나날을 살아가고 있다. '오늘이 내 남은 인생의 첫날'이라는 그럴듯한 문구는, '오늘은 내 살아온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는 말로 대치되어야 한다. 남은 날이 얼마인지도 모르면서 처음을 생각하는 것은 근사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무책임하다. 과거의 일들을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으로 지금을 기억하는 것이 나와 기억을 공유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진실한 예의이다. 하나 둘 떠나는 트랑의 집, 그리고 어느 순간엔 마지막 남은 가족마저도 머물수 없게 되어버린 그 집에 그들이 놓고 온 것은 집이 아니라, 인생의 한 부분이다.


유년의 한 축이 집이라면, 알랭의 나머지 한 축은 아버지였다. 그것은 덮어놓고 좋은 의미의 것만은 아니다. 열남매를 두고도 매일 밖으로 다니던 아버지, 돌아가시는 순간이 될 때까지 따뜻한 말한마디 건네지 못했던 아버지는 좋은 축이 될 수 없다.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나를 지탱하는 한 축이었지만, 비중이 크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긍정적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죽음을 마주하고, 이제 내가 그의 나이가 되어 옆에 앉아 있는 듯한 당신을 보니 이제 이해할 것도 같은 느낌이 든다. 신해철의 노래 '아버지와 나'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거대한 짐승의 시체처럼 껍질만 남은 권위의 이름을 짊어지고 비틀거린다. 집안 어느 곳에서도 지금 그가 앉아 쉴 자리는 없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내와 다 커버린 자식들 앞에서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한 남은 방법은 침.묵.뿐.이.다. -신해철, 아버지와 나-

우리가 과거를 이해하는 방법은 그 기억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의 영향을 축소시키고, 내 방식으로 그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제 알랭은 아버지를 이해한다. 아련한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항상 악역으로 존재했던 아버지를 이제 행복의 영역에 옮겨 놓고 비로소 아버지와의 화해를 시도한다. 이 책은 작가가 말한 바와 같이 아버지와의 평화로운 종전을 위한 조용한 평화 선언문이다. 알랭은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생각한다. 아기들의 무덤에서 아기천사상을 수집하곤 했던 그곳에서 그는 아버지를 보낸다. 항상 뭔가 얻어가는 곳이라 생각했던 보물창고에서 보물을 놓고 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훌쩍 성장한다. 


그러나 지금 나는 아버지의 무덤 앞에 서 있다. 나는 놀이의 비밀을 잃어버렸다. 나는 어린 시절을 잃어버렸다. 모든 날들이 작별의 나날인 것이다. (p.95)

2006년 과학 학술지에는 '과잉기억증후군'을 앓고 있는 미국 여성의 사례가 처음 발표되었는데, 그녀는 모든 날의 모든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잊지 못한다는 말인데, 가끔 그것은 매우 큰 축복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아픈 기억과 힘든 순간도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지면서 우리는 그것을 극복해 나간다. 특정한 순간의 기억과 괴로움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는 것은, 행복한 일을 잊지 않으면서 얻는 기쁨에 비해 더할 수 없는 고통이다. 


모든 것에는 입구와 출구가 있기 마련이다. 뭐든 들어왔다면 나가야 한다. 그것이 삶이고 우리가 성장하는 과정은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의 모음이다. 특히 감정에 있어서는 그것이 절실하다. 슬픔이 들어왔다면 그것은 어디론가 반드시 나가야만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사람은 서서히 죽어간다. 하루하루가 작별인 나날들은 잊혀지지 않았으면 하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면서, 이제는 그것을 놓아주어야 하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이름을 불러보는 예쁜 강아지 같은 느낌이다. 다시 한번 그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른다. 그리고 이제는 그 기억은 내게서 서서히 빠져 나간다. 마치 모든 것이 잊혀지기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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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적 글쓰기 - 열등감에서 자신감으로, 삶을 바꾼 쓰기의 힘
서민 지음 / 생각정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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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더럽게 어려운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어려운 이론은 어려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려운 것일까, 어렵게 설명하려고 해서 어려운 것일까. 어려운 단어를 써야 해서 어려운 것일까. 이도 저도 아니면, 잘난척 하고 싶어서 어렵게 쓴것일까. 아마..'

 

물증이야 없지만 심증적으로는 '더럽게' 어렵게 쓰는 사람이 '졸라' 잘난척 하려는 욕심만 줄일 수 있다면, 좀 더 대중적인 글이 써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자신의 글을 읽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분야에서 그보다는 못할터인데 그 간극을 줄여줄 생각은 없이 꽁무니만 보여주고 내빼기 일쑤다. 대중적인 글을 써주는 친절한 작가는 무식한 독자에게 늘 환영 받기 마련이다. 대표적 인물이 유시민, 강신주, 최재천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그들의 전문분야를 평균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해줘서 읽어본 사람이라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서민' 교수도 그런면에서 친절한 저자이다. 혹자는 얼굴이 친근해서 글이 편한거 아니냐며 말도 안되는 음모를 제기 하기도 하는데 저자는 그런 사실은 꿈에도 생각해봤을리 없지 않겠는가.   

 

처음 딴지일보에서 '마태우스'를 봤을 때 그야말로 딴지에 어울리는 글이라고 생각했었다. 본인은 그야말로 쓰레기인 책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에 볼 땐 전문적인데다 웃기기까지 해서 꽤 즐겨봤던 기억이 난다. 당시 오인용에서 '중년탐정 김정일'이 나오고 있었는데 컨셉이 눈앞에 뻔히 보이는 모든 증거를 싸그리 무시하고 심증으로 진범을 놓치는 개 유능한(?) 탐정이다. 나는 그 당시에 그에 필적할 만한 탐정은 마태우스 뿐이라고 나름 세계 랭킹을 매기고 있었다. 그때는 물론 재미있게 봤지만 그 사람이 지금 나오는 '서민'이라곤 쉽게 연상시키지 못했다. 경향신문이나 한겨레의 칼럼을 한두번 보긴 했겠지만 봤더라도 같은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칼럼(http://seomin.khan.kr/)에 가보면 여전히 위트 넘치고 편한 글을 여럿 볼 수 있다.

 

 

글을 읽으면서 자꾸 밟히는 단어가 하나 있다. 그것은 '지옥훈련'이라는 단어였다. 뭔들 그리 갖다 붙이면 지옥훈련이 아니겠냐만 10년의 지옥훈련은 왠지 엄살 같이 들린다. 활자로 볼때도 놀라운데 강연회에 가면 꼭 지옥훈련을 언급하면서 방청석의 나까지 화끈거리게 만든다. 유리겔라가 숟가락 오그라 뜨리는 능력을 보였다면, 서민 교수는 손가락을 오그라 뜨리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옆에 있었다면 '아 쫌, 제발요 교수님. 지옥훈련 말고 다른 단어 좀 쓰시면 안되요?'라고 했을 것이다. 보통 생각하는 지옥훈련이란 눈을 뜬 순간 애니(미저리 주인공 여자)가 버티고 서 있고, 원하는 글이 나오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으며, 원하는 글이 나와서 하산을 할라치면 망치로 다시 다리를 부러뜨리는 정도는 되야지 않은가 싶단 말이다. 책 많이 읽고 글 계속 쓰고 하는 건 그냥 글 잘 써보려고 맘먹은 사람은 다 하는 것이잖은가. 이건 굳이 비교하자면 나 살찔거야 하는 사람이 '밥만 먹고 똥을 참았어요.'라든가, 영어를 잘하려는 사람이, '이태원에 가서 시비걸고 영어로 매일 싸웠어요.'라는 비결보다 더 하찮다.  

 

 

그런 오바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좋은 이유는 이 책을 읽고 나면 바로 글을 써보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글쓰기가 별것 아니라는 느낌을 줘서이다. 매일 써보고 책 읽고 하면 되는구나. 그냥 친구한테 말하듯이 쓰면 되는구나. 내 이야기를 내 방식대로 남한테 말하듯 하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서울대 생의 고시 합격기를 보면 좌절하지만, 지방대 생의 합격기를 보면 의욕이 샘솟는 원리랄까. 아 그래서 글을 좀 써보자 하고 작가 이력을 보면. 이런 망할. 서울대 의대 출신. 의욕이 식도를 역류하는 기분이다. 이 때문에 글 곳곳에는 의사는 글을 못쓴다며 또 말도 안되는 떡밥을 던진다. 서울대생 중에 자기 머리 좋단 사람은 본적이 없는 나로서, 여기서 왠지 속았다는 느낌도 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민적 글쓰기는 분명히 괜찮은 책이다. (이쯤에서 블로그 글의 마지막을 어떻게 쓰라는 지 한번 뒤적였다) 

 

결론 부분에서 신경 써야 할 점은 보다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게 좋다고,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말을 하면 잘 쓴 글이 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p216)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결론을 내리라는 말처럼,

좋은게 좋으면서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말이 어디있단 말인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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