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불평등 기원론 펭귄클래식 85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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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통해 인간의 시작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 '평등'한 상태에서 어떻게 불평등이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과학적인 견해보다는 논리적 추론과 사고를 통해서 이야기를 진행시켜 나간다. 물론 1700년대 중반의 역사와 인류의 기원에 대한 인식과 지금의 인식은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큰 차이가 있다. 아무리 당대의 천재였던 루소였던들, 지금 평범한 20대의 삶을 살아가는 내 기본 상식보다도 훨씬 못한 역사, 과학의 상식을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 책에서 루소가 밝히는 인류의 역사적 진행에서 루소가 잘못 알고 있는 과학적 사실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가치가 없다. 이 책은 그런 맞지 않는 사실을 제외하고, 오직 논리적 추론으로만 밝혀내고 있는 인류의 기원과 불평등의 생성과정을 좇아가기에도 벅차며 루소와 함께 고민해볼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인간.기원.

최초의 인간은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루소는 이 책에서 인간들이 최초로 발생했을 시기를 떠올린다. 루소는 그들이 각자 따로 떨어져 동물과 같은 삶을 영위했을거라고 짐작한다. 루소는 과연 어떻게해서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그는 왜 인간이 무리지어 살기보다는 '처음엔 혼자 살아갔으리라고 생각했을까. 과연 인간은 어떤 상태로 그 기원을 맞이하게 되었을까. 물론 루소가 책에서 말한대로 아무도 그 정확한 시작을 모른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루소가 말한것과 같이 개인 대 개인으로의 삶보다는 애초부터 씨족 중심 이상의 집단을 이루어 생활했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동물의 삶을 보자. 인간이라는 과가 생겨나기도 전에 이미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동물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동물들 가운데에서 인간이 진화해나와 따로 떨어져나오게 되었다. 즉 이미 인간이 태어났을때 다른 동물들은 그들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각자의 방식에 맞게 체화되고 발전된 상태였을 것이다. 그 와중에 인간이라는 새로운 이웃이 그들 주변에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를 경계했을 것이다. 초식동물은 그들이 자신들을 잡아먹지 않을까 경계했을 것이고 육식동물은 그들이 자신보다 상위포식자일지, 아니면 내가 잡아먹어도 되는 동물일지 알아내기 위해 경계했을 것이다. 이 상태에서 인간들은 어떤 삶(삶이다)을 살아야 했을까. 물론 애초 상태를 개별적인 상태로 본다고 할지라도 인간이 개별상태로 존재했을 시간은 극히 짧았을 것이다.(인류의 총 역사를 보았을때) 그들은 집단을 형성할 정도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가족단위의 모임은 형성해야 나름대로의 생존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마련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 안에서 어떤 역할은 있었겠지만 그 역할에 따른 서열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들 서로의 생존을 위해서 각자의 역할을 맡았고, 그것들 중 어느것 하나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서로를 지켜줄 수 없기에. 그들은 생존의 필수적인 최소단위로써 운명공동체적인 삶을 공존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명이라는 것이 생기기 전에도, 마치 여러 동물들이 집단 생활을 하듯이 최초의 인간 역시 다른 동물들에 맞서기 위해, 오로지 살기 위해 최소한의 인원수 이상으로는 모여서 생활했을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루소는 왜 인간이 개별상태를 오래도록 유지했다고, 인간이 서로 모이고 모이게 된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문명이라는 것이 발아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루소가 태초의 자연상태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그리고 사회화,집단, 문명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조금은 답을 유추할 수 있다. 루소에게 태초의 자연상태에 놓여있던 인간은 완벽한 인간이었다. 신체적으로 강건하고 질병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다른 동물들과 같이 자연이 준 무한한 치유력으로 다친 곳도 금세 낫게 되었다. 또한 오로지 본능만이 존재하고 지식과 욕심이 없으니 그 자체로 소박한 스스로의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존재였다.

"어린시절부터 혹독한 날씨와 가혹한 계절에 익숙해지고 피로에 단련되었으며, 벌거벗은 채 무기도 없이 자신의 생명을 방어하고 사냥감을 다른 맹수들로부터 방어하거나 아니면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인간들은 강건하고 거의 불변하는 체질이 된다.....(중략)....매기인의 신체는 자신이 아는 유일한 도구이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신체를 다양하게 사용한다. 하지만 우리의 신체는 연습부족으로 그런 다양한 사용이 불가능해져 버렸다."

 

하지만 이것은 꼭 개별상태로 인간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인간은 전능하지 않다. 하나일때보다 둘이 있을때, 둘이 있을때보다는 서넛이 있을 때 내가 살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짐은 지식과 이성과는 무관하게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집단을 이룬채 살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이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집단과 루소가 말한 인간사이에는 루소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를 그대로 따라가는데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루소가 그들 인간을 개별상태로 상정한 이유는 그들에게 아직 사회가 존재하기 이전의 태초상태를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최초의 인간들이 집단을 이룬것은 루소가 말한 '사회'가 아니다. 다만 루소가 사회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동물들의 집단과 같은 그저 무리지음 그 뿐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루소의 인간 개개인의 개별상태를 이해함에 있어서 문명의 시작이 아닌 단순한 생존을 위한 필수단위 정도로 인간이 모여있는 상태를 생각하면 될일이다. 물론 바로 그 생존을 위한 필수단위에서 인류가 문명으로 나아갔음은 자명한 일이지만, 이 책은 그와 같은 과정으로 나아가기 위한 수천,수만년의 세월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 책에서 말하는 자연상태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그다지 무리가 가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인간.사회화.질병.나약함

 

그토록 강건한 신체를 가지고 자연의 품 안에서 살아가던 인간은 사회화를 거치면서 나약해지기 시작했다.

"생활방식에서의 극도의 불균등, 이를테면 저마다 다른 지나친 나태나 지나친 노동, 식욕과 관능성의 자극 및 만족에서의 용이성,...(중략)... 온갖 정염의 무절제한 발현, 육체적.정신적 피로, 온갖 상태에서 겪에 되는 끊임없이 영혼을 좀먹는 비애와 고통.이런 것들은 우리의 불행 대부분이 우리 자신의 작품이며, 만일 우리가 자연이 명령한 단순하고 단조로우며 혼자 사는 생활 방식을 유지했더라면 그 모든 것을 거의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한 우울한 증거들이다."

 

루소는 이와 같은 내용을 통해 문명사회에서 벌어지는 병들의 원인이 자연상태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문명사회에서만 생길수 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들과 인간의 무절제와 탐욕에 기인한 고통, 즉 지금으로 표현하면 스트레스라고 이야기한다. 즉 자연상태에서는 병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루소의 주장이었다. 그렇지만 (사전적인 의미의)병의 원인이 오로지 이러한 문명사회에 근저에서 자리잡은 것이라는 것은 그다지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인간이 병에 걸리는 요인들 중에는 분명 사회적인 요인이 아니라 자연때문에 생기는 병들또한, 특히 그러한 것일수록 치명적인 것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소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다. 문명이 생기고 계급이 생겨난 이래 하위계층의 열악한 삶, 비위생적인 삶은 항상 질병의 원인이 되어온 것 또한 사실이다. 그들이 앓는 배앓이나 전염병등은 분명 비자연적인 요소에 의해 생겨났음은 분명하다. 또한 그리고 루소가 살았던 시절보다 더욱 복잡다단해진 삶을 살아가는 현대초문명사회에서는 '스트레스'라는 것이 병의 주 원인으로 급격히 떠오르고 있음 또한 주지의 사실이다. 아무리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보아도 별다른 이상을 발견할수 없지만 분명 통증을 느끼고 호소하는 환자가 점점 늘어난다는 점은 인간의 몸에서 스트레스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루소가 말하는 문명때문에 생기는 질병은 루소의 시대보다도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우리에게 더욱 큰 영향을 끼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루소가 인간의 질병에 관한 이야기를 편 다음에 나오는 가축이야기 또한 그와 궤를 같이 한다. 루소는 가축들이 원래의 야생상태보다 가축이 된 이후 힘과 활기를 잃는다는 것을 예로 들면서 인간 또한 자연상태에서의 강건한 상태에 비해 집단을 이루고 사회화를 이룩하면서 동물이 가축이 되면서 약해지듯 인간 또한 나약해졌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앞서 말한 문명과 질병에 대한 상관관계를 이야기하면서 연이어 인간이 사회화를 통해서 결국 인간은 자연상태에 비해 약해지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왜 인간은 나약함의 수렁으로 스스로를 옭아매게 되었을까?

 

 

 

인간.개선가능성.천형(天刑).

인간은 왜 스스로를 나약함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게 되었는가. 루소는 그것을 흡사 천형과도 같은 인간의 개선가능성 때문이라고 보았다. 개선가능성. 한마디로 인간의 호기심, 창의력, 추론능력 등의 지적능력과 그 의문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행동력을 포괄한 개념일 것이다. 자연상태의 인간들이 시간이 흐르자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점차 하나 둘 깨닫기 시작했다. 하늘의 불과 자연상태의 불의 차이점을 느낄 수 있었으며 스스로 불은 만들어보기 위해 평생을 바쳤을 것이다. 그리고 동류의 인간들과 점진적인 의사소통을 하기 시작했고 언어라는 것도 만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루소는 탄식했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이 천형의 무게 앞에서.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짓게 하는 거의 무한한 그 능력이 인간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라는 것을, 그 안에서 평화롭고 순진무구한 세월을 보내게 될 그 원초적 상태로부터 세월의 흐름과 함께 인간을 끌어내는 것이 바로 그 능력이라는 것을, ...(중략)...결국에 가서는 자기 자신과 자연의 폭군이 되게 하는 것도 바로 그 능력이라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하니 우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드디어 루소가 하고자 하는 말의 실체를 조금 파악했다. 인간이 지금과 같은 불평등의 불행을 겪는 이유는 바로 개선가능성. 즉 인간의 이성때문이라는 것. 이 무궁무진한 개선가능성의 가능성 앞에서 인간은 수천,수만년의 시간동안 불을 피우고 언어를 만들고 사회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다시 유구의 세월이 흐르고 인간은 이제 미개인으로 돌아갈 수 없는 문명인이 되었다.

 

다만 이 부분에서 루소의 시대에 흔히 보이는 스스로 그렇게 비판하는 인간,인간이성의 오만함이 엿보인다. 루소는 인간의 언어의 생성과정을 설명하면서 역시 인간을 개별적인 상태에 놓여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한 상태에 놓여있던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원초적인 언어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전제조건 자체가 맞지 않는다. 그는 인간과 동물은 다르다고 생각했을까? 이미 우리는 오늘날 동물들의 원초적인 의사표현 방식에 대해 알고 있다. 울음을 통해, 행동을 통해 동물들은 그들 동류의 동물들에게 간단한 의사표현을 할 수 있다. 자연상태의 인간들 역시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해 최소한의 집단생활을 했을 것이고 동물들과 비슷한 의사소통의 수단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루소가 밝힌대로 자연의 외침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즉 인간은 개별적인 상태에서 언어를 '알아서 스스로' 만들어내지 않았다. 인간 역시 다른 동물들과 다를 바 없이 그 시작은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개선가능성이 빛을 발했을 것이다. 인간들은 동물과 다르게 조금씩 더 표현하기 시작했고 그만큼 더 관념들이 자라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표현과 관념은 서로가 서로에게 자양분이 되어주며 스스로 자라갔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정확한 분절로 된 의사표현, 언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을 것이다.

루소는 그 스스로 인간의 개선가능성을 그토록 미워하고 안타까워하고 지금의 불평등을 만들어낸 그것을 저주했을지 모르지만 결국 루소 역시 인간의 개선가능성에 대해 무한한 신뢰와 찬사를 금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개선가능성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능력이 아니다. 인간의 개선가능성은 그말 그대로 주위에서 본 것들을 조금 더 그들의 몸에 맞게 개선시키는 능력이었을 것이다.

 

 

 

루소.인간. 무지. 무위. 동정심

그렇다면 루소는 미개인과 문명인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을까. 미개인은 문명인에 비해 악한 존재였을까. 인간은 애초에 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문명의 힘을 빌려 사회속에서 선한 존재로 거듭나야 하고 통제해야 하는 존재인가. 자연상태의 미개인을 무지하다고 하여,미덕을 모른다고 하여 악하다고 할 수 있는가. 루소의 인간관은 이 부분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루소는 자연상태란 자기 보존의 노력이 타인의 자기 보존에 가장 덜 해로운 상태, 즉 서로 어떤 영향력도 주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가장 평화로운 상태였다고 생각하였다. 의존적인 인간일수록 약하다. 그리고 자연상태의 인간은 의존적이지 않았다. 결국 자연상태의 인간은 의존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같은 인간에게 해를 끼칠 필요도 없었으며 이용할 필요도 없었다. 이것이 루소가 자연상태의 인간성(性)에 대해 말하고 싶은 핵심이었을 것이다. 즉 인간은 애초부터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선과 악의 개념이 존재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루소는 한가지 비장의 카드를 꺼내든다.

동정심. 선과 악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을 마음.

"나는 우리처럼 약하고 불행을 많이 겪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에게 부합하는 자질인 동점심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 미덕은 모든 반성의 습관에 앞서는 만큼 인간에게 더욱 보편적이고 유익하며 너무도 자연적이어서 동물조차도 때로 그에 대한 뚜렷한 표시를 보인다." 

 

루소가 자연상태를 설명하기 위한 마지막 비장의 카드다. 무지하고 무위했기에 인간들간에 어떠한 상호 연관성이 없었던 그 순수한 자연상태에서 인간에게 가장 공통적이고 근본적으로 남아있었던 마음, 동정심의 존재는 자연상태의 인간들이 어떠한 삶을 영위했을지 결론내리게 해준다. 그에게 이성과 문명, 그에 따른 탐욕과 무자비가 존재하지 않았던 자연상태는 인간의 시작이었고 또한 지향점이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자. 즉, 일도 언어도 집도 전쟁도 서로 간의 교류도 없이 숲 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미개인은 다른 동료 인간의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았을 것이고, 해칠 욕구도 없었을 것이며, 그들 중 누구도 개인적으로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정념에도 거의 지배받지 않고 자족하면서 그 상태에 알맞은 감정과 지식만을 가졌으며, 자신의 진정한 필요만을 느꼈고, 보는 것이 재미있다고 생각되는 것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연상태의 인간들에게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그 루소가 말하는 완벽한 평등을 이루고 있던 자연상태의 끝 무렵에 도착하게 되었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루소는 이 책에서 인간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하나씩 하나씩 정리하면서 내려온다. 그리고 마침내 인류가 평등했던 시간이 거의 다 저물어가고 불평등의 기원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루소는 2부의 시작부분에서 드디어 인간의 불평등, 그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뿜어낸다. 자연상태의 끝무렵, 다시 말하면 불평등으로 치닫기 위한 극한의 시대에서 시작하여 사회와 법이 만들어지기까지를 적나라하면서 웅장하게 살피고 있는 약 20페이지에 달하는 이 부분은 이 저작의 가장 핵심이다. 1부의 그 어렵고도 어려운,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위대한 정리와 가설과 시간의 흐름은 단지 이 20여 페이지를 위한 서론에 불과하다고 할 정도로 이 내용은 책의 압권을 이룬다.

 

 자연상태의 시간들이 흐르고 흐르자 인간의 개선가능성이 슬슬 본성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우연히 불을 인지했고 드디어 불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물론 불을 처음으로 인지한 사람과 처음으로 만들어낸 사람사이에는 우리는 알 수 없는 수백,수천년의 시간이 존재했을 것이다. 어쨌든 인간은 불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불 뿐만 아니라 차츰차츰 도구라는 것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을 것이다. 우연히 발견한 날카로운 것들에서 이제는 점점 스스로 그러한 것들을 깎아내고 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수천년,수만년의 세월동안 이루어낸 이정도의 진보 속에서 인간은 이제 생존을 위한 필수단위의 모임이 아니라 그 이상이 모일 수 있는, 그것이 더 안정적임을 인식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러한 집적효과는 그동안 낳은 진보를 더욱 가속화시킬 수 있었다. 인간이 많이 모이다보니 자연의 외침 수준의 언어가 아닌 더욱 세분화되고 구체적인 언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시나 그 언어를 타고 인간의 머리도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불의 발명과 언어의 구체화는 수만년동안 이룩했던 태초 인간들의 생존노력의 정화였다. 이제 인류의 진보는 우리의 손에 곧 잡힐 수 있는 정도까지 오게 되었다.

 

 

감정.존경심.가치

 

인간이 느낀 최초의 감정은 생존의 욕구였다면, 인간이 군락을 이루게 된 이후 점점 부성애와 모성애 등의 감정들을 알아갔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부분은 처음부터 말한대로 생존을 위한 필수단위가 존재했을 시절부터 조금씩 진전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서 결속을 다져갔을 것이고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의 감정은 자연스레 나타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생물이라면 본능적으로, 아니면 살기 위해서라도 좋고 싫음을 기본으로 한 기본적인 감정은 당연히 자연상태에서의 인간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인간이 점점 군락을 이루면서 기본적인 감정 이외에 조금 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들은 생겨났을 것이다. 그것들 중에 주목해야 할 것들이 바로 존경심이다. 존경심의 시작은 루소의 말대로 그리 대단한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조금 더 사냥을 잘하는 사람, 조금 더 도구를 잘 만드는 사람, 그리고 조금 더 인간들간의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잠깐. 갈등이라고? 분명 자연상태에서는 갈등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서로 싸워서 얻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들이 필수적인 수가 아닌 필요한 정도의 수 이상으로 모이자 자연스레 갈등은 일어나게 되었다. 그것의 이유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니 중요하다. 그러나 알 길이 없다. 그 갈등의 시작이 살아있는 것들 특유의 본능인 것인지, 아니면 루소의 말대로 배려를 받고 싶어하는 스스로의 자존심들 때문이었는지는. 어쨌거나 인간들이 필요 이상으로 모이자 갈등은 생겨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갈등을 중재하는 것은 처음에는 그들보다 조금 더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었을 것이고 나중에는 싸움을 잘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점차 그 갈등을 효과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을 것이다. 어쨌든 인간들이 모이자 갈등이 생기고 그 과정에서 중재를 할 사람이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들 속에서 존경심이 나타났고 가치(value)의 개념이 생겨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물론 물질적인 가치는 그 이전에도 존재했을 것이다. 살기위해서는 어떠한 것들이 더욱 중요한 것인지 판단하는 것이 가치의 시작이었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생존을 위한 가치에서 시간이 흐르고 군락이 형성되면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가치가 점점 발견되고 중요하게 자리잡았을 것이다. 생존을 위한 필수단위에서 아주 기초적으로 행해졌던, 특별한 서열이 정해지지 않았던, 설령 서열이 존재하였더라도 그 서열로 인한 차등이 존재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서, 이제는 점점 차등을 위한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소유. 갈등. 법.

생존을 위한 최소의 단위에서는 소유가 존재할 수 없었다. 물론 저장이라는 개념은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최소단위의 구성원 각각의 몫이 아닌 최소단위 전체를 위한 저장의 개념이었을 것이다. 말그대로 그들은 생존이 지상최대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들이 이러한 생존을 위한 최소단위의 모임이 아니라 점차 더 많은 수의 무리를 이루기 시작했을 때, 즉 우리가 아닌 나와 남으로 인간의 머리에 인식이 시작되었을 때 소유는 생겨났을 것이다. 또한 집단생활을 통해 내것과 너의 것의 구분이 조금 어려워지기 시작하자, 그리고 필요 이상의 소유물이 조금이라도 '존재'하게 되는 그 순간 갈등은 점차 격화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소유에 대한 갈등은 인간이 점차 수렵에서 농업과 경작으로 생활양식이 변화함에 따라 절정을 맞이했을 것이다. 순간순간 이동하는 사물의 소유문제보다, 한 해, 혹은 한평생 고정되어 있는 토지의 소유문제는 인간들의 갈등을 잉여생산물간의 꼭 필수적이지 않는 것들의 소유권 갈등문제속에서 다시 한번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소유권 갈등문제를 촉발시킬 수 있는,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결국 마침내 갈등을 중재하던 사람으로부터 갈등을 중재하는 원칙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원칙은 보다 많은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주도하에 생겨났을 것이다. 왜냐하면 루소의 말대로 무엇이던 처음에 생겨나는 것은 그것이 꼭 필요한 사람들로부터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미 땅을 많이 가지고 있고, 그 땅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로부터 원칙은 생겨나고 그 사람들로 인해서 지켜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시대에 이미 땅을 많이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건, 전에 언급하였던 존경심, 그 존경심을 받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드디어 거의 다 왔다.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출발하여 법이라고 하는 제도를 잉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은 이제 계급제도라는 사생아를 낳게하였다.

 

 

법.신분.부.

법이 있으면 그것을 지키는 사람과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람, 그리고 법 자체를 지켜내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 법을 지키는 사람과 만들고 지키는 사람, 처음 그 두부류의 사람들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그들이 모인 사회에서 조금 더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시간이 흐르고 흐르자 점차 고착화되기 시작하였다. 더이상 인간은 각자가 가진 능력에 따라 존경심을 드러내기 보다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신분에 따라 혹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잉여재산의 크기에 따라 존경심이 발휘되기 시작하였다. 존경심을 받는 인간은 점점 그 스스로를 드러냄이 심해졌을 것이고 마침내 법을 통한 인간의 사적소유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더이상 존경심이 존경심으로만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 존경심은 권위를 낳았으며 권위는 욕망을 낳고 욕망은

권력을 낳았다. 그리고 그 권력을 통해 물건의 소유 뿐 아니라, 나를 존경해주는 사람들을 법의 울타리 안에서 강제로 가지고 싶어졌다. 그렇게 인간의 평등상태는 사회를 통해서, 토지를 통해서 고착화되고 경직화되었으며 결국 부의 분배와 법을 통해서 신분을 만들어 인간들을 스스로의 불평등한 세계로 몰아넣었다. 이젠 드디어.

 

이미 너와 내가 가진것이 불평등할 뿐 아니라 너와 내가 이미 그 자체로 불평등한 시대가 마침내 도래하게 되었다.

 

 

 

 

사회.진행.흐름.방향.

처음 이 단락의 키워드는 사회.발전.방향 이었다. 그러나 곧 발전은 진행으로 바뀌었다. 그것이 루소의 의견에도, 내 생각에도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회는 점점 발달하였는가. 인간이 발생한 태초 이래로 인간은 점점 발전되어 왔는가. 루소는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루소는 태초의 자연상태. 자연이 우리에게 준 권리, 즉 하늘이 우리에게 준 권리가 지금 침해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루소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은 태초의 자연으로 돌아간 만민의 평등한 상태였다. 정념이 존재하지 않고 고뇌가 존재하지 않으며 탐욕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 각각의 인간이 서로의 권리를 가지고 서로에게 종속되지 않으며 자유로움을 향유할 수 있는 상태였다. 즉 루소에게 있어서 인간이 태어난 이래 인류는 점점 퇴보하여 왔다. 애초에 서로 평등하고 서로에게 권리를 가지지 않았던 인간들은 시대가 흐를수록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부가 있는 사람에게, 권력이 있는 사람에게 점차 종속되어 왔으며 그만큼 불평등이 커지는 사회로 진행되어 왔다고 보았다. 루소에게 인간사회는 100점 만점의 시대에서 처음으로 불평등이 생기는 순간 0점의 시대가 되었으며 그 이후 급속하게 마이너스로 진행되어 왔다.

루소의 이야기대로 루소가 살던 절대왕정시대까지 유럽의 사회는 점점 불평등이 심화되는 사회로 진행되어왔다. 중세시대 왕과 교황으로 양분되었던 국가의 권력은 이제 오로지 하나. 왕에게 오롯이 집중되었다. 또한 식민지의 개발로 인하여 유럽인들 밑에 더욱 불평등과 차별을 받게된 식민지 백성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루소가 보아온 것은 여기까지. 그는 오히려 중세사회보다도 더욱 불평등의 스펙트럼이 넓혀진 시대에서 불평등의 극을 보게 되었다. 따라서 루소는 과거의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으로 다시 환원될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다시 흐르고 흘러 사회는 더이상 자연의 품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지경으로 이르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평등이 루소의 시대보다 심해지지는 않았다. 루소의 시대 이후로 역사는 조금씩 진행이 아니라 '발전'이 되어갔다.

 

 

 

다시 법.제도.인간.

 

루소는 결국 발전이 아닌 그저 세월의 흐름 속에서 평등이라는 절대의 가치로 산정한다면 절대적으로 퇴보만 가득했던 시대까지 살았다. 그래서 결국 루소는 다시 자연상태로 돌아가자고 제창했다. 태초의 상태로. 모든 인간이 스스로 만족할 줄 알고 스스로 강건했던 그 시대로 돌아가자고. 그렇다면 그때까지 극으로만 치달았던 불평등은 모조리 해소될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의 주장은 당시 기득권들에게 철퇴를 맞았을 것이고 평생을 가난한 상태에서 삶을 마감해야 했을 것이다. 당연하다. 이미 세상은 기득권의 것인데 그들에게 그것을 버리고 다시 태초의 상태로 돌아가자고 했으니 그것은 어쩌면 그의 숙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불행하고 쓸모없는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그의 사상은 결국 프랑스 대혁명을 일구워냈다. 모든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받은 인권이 있다는 사실, 모든 인간은 태초부터 불평등하지 않았다는 사실, 지금의 불평등은 세상이 만들어냈다는 그의 논리는 그 당시 혼미했던 인간의 개선가능성에 다시 새로운 공기를 불어넣어주었다. 루소의 시대 이전까지 점차 마이너스의 시대를 걷던 세상은 인간의 개선가능성에 루소라는 촉매제가 결합하자 다시 새로운 발전가능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다시 인간은 물질적인 것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무형의 자산을 만들어내며 발전하기 시작했다. 모든 인간이 태초에 평등했다는 사실, 그 사실의 환기는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불평등의 인위적인 시대에 도달한 이래 수만년의  세월동안 잠들어 있던 인간의 이성과 인권에 대한 본능을 자극했다. 결국 인간은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루소의 말은 반만 옳고 반은 틀렸다. 다름이 아니다. 옳고 그름이다. 인간은 더이상 태초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태초의 상태로 돌아가기에는 이미 너무 깊고 넓은 강을 건너버렸다. 어쩌면 바다를 건너 다른 대륙으로 넘어온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제 다시 강 건너 저편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이제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그토록 루소가 경멸해마지 않았던 법과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불평등의 시계를 다시 조금이라도 평등의 시간으로 돌려놓기 위해서.

루소는 제도 자체를 악의 근원으로 보았다. 물론 어떠한 제도든지간에 그 제도라는 것이 존재하는 자체만으로 사람은 둘로 갈라지게 된다. 그 제도를 만들고 수호해야 하는 사람과 지켜야 하는 사람. 그러나 지금까지 그 제도를 만들었던 사람은 그 제도를 통해 이득을 보거나 지킬 필요가 굳이 없었던 인간들이었다. 그러나 루소를 통해서 세상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제도를 만드는 사람도 형식적이나마 제도의 울타리를 넘어서서는 없게 되었다. 제도 그 자체의 본질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 없지만, 그 본질에 속하는 사람들의 성질을 바꿔버린 것이다. 이제는 더이상 제도의 위에 다른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형식적일지언정. 그러나 세상은 그 형식적인 것에서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인간은 개선가능성이라는 세상 초유의 능력을 통해 이곳. 불평등의 끝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그 끝으로 오기 시작한 시작에는 원칙, 제도, 법이라는 형식이 존재했다. 결국 지금의 불평등을 만들어낸 처음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던 세상에서의 맨처음의 형식이었다. 그 겨자씨 같던 형식하나에서 인간은 여기까지 진행 혹은 발전되어왔다. 그렇다면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자그마한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그리고 루소가 건드린 인간의 개선가능성과 인권에 대한 자의식은 자그마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은 수만년에 걸친 불평등의 세월을 불과 수백년의 세월동안 상당부분 돌려놓았다. 물론 아직 돌아가야 할 시간이 많다. 루소가 그렇게 바라마지 않던 자연상태의 평등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기엔 수백, 수천년의 세월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시작되었다. 루소가 그렇게 경멸하였던 제도라는 것으로부터. 제도는 다시 인간들은 모두 태어날때부터 평등하다는 인식을, 우리가 1000년전에 태어났다면 전혀 새로운 제도와 인식으로 채워졌을 우리의 머리와 감정과 본능과 몸속에 집어넣고 있다. 수만년의 세월을 거스르기에는 아직 '루소의 시대'가 너무도 짧다. 인류는 루소의 시대부터 다시 발전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사이사이 다시 그 세월을 역행하려는 시도 또한 존재하였다. 그러나 루소의 말대로 인류의 시간은 무구하다. 수만년의 세월속에서 그런 일들은 티끌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인류는 다시 발전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간 그토록 루소가 그리던 자연상태에는 도달하지 못할지언정, 그때의 평등을 향해서 조금씩 다가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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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사람들 펭귄클래식 96
제임스 조이스 지음, 한일동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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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이스. 더블린 사람들.

이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이름만으로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호기심과 희망,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가 과연 읽어낼 수 있을까? 라는 좌절감을 동시에 안겨줄만한 이름이다. '율리시스'라는, 역시나 너무도 유명하고, 사실 읽어본 사람이 거의 전무하기에 왜 유명한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모두들 유명하다고, 20세기 소설을 꼽으라면 무조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그 이름값으로,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이 시도하지만 결국 다들 포기하고 만다는 그 작품의 압도적인 이름값 앞에서 그 작품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라는 이름 역시 가까이 하고 싶지만 다가가기에 너무 먼 당신같은 존재가 되어왔다.

제임스 조이스라는 너무 먼 존재와 그나마 한발자국이라도 가까이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나마 조금 쉽게 접근해볼만 한 책이 보인다. 더블린 사람들.

작가가 가장 처음 내놓은 산문작품으로 더 유명한, 제임스 조이스가 자신의 문학적 세계관을 완성시킨 그 곳의 이야기. 15편의 단편소설들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우리에게 나도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을 '완독'했다는 기쁨을 비교적 쉽게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작품으로 보인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여기고 시작했다.

 

 

단편소설,장편소설. 중독

더블린 사람들은 단편소설의 모음이다. 15편의 10페이지 남짓한 작품부터 60페이지에 가까운 소설들의 묶음이다. 보통 이런 소설집은 각각의 주제를 담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그 소설 모음집의 이름 또한 그 중 대표할 만한 것의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이 <더블린 사람들>은 그냥 오롯이 더블린 사람들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15개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이 15개의 작품이 하나로 모여 따로놀던 변신로봇들이 합체하여 더욱 크고 멋진 하나의 로봇을 이루듯이, 따로 또 같이 움직이며 하나의 세계와 작품을 구성한다. 첫 작품 '자매'에서 플린 신부의 '죽음'으로 시작한 작품은 작품 동안 한 인간의 성장을 다루듯이, 소년기부터 청년기, 장년기를 다루고 마침내 '죽은 사람들'로 마침표를 찍는다.

유기체 라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전체와 부분이 절대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각각의 작품은 더블린 사람들 하나하나의 모습을 파헤치고 끄집어낸다. 그 끄집어낸 이야기들은 밋밋하고 허무하기도 하며 소소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의 나열과 조합은 결국 더블린 사람들의 둔탁하고 침울한 분위기를 이루어낸다. 결국 단순히 집합체라고 하기엔 끈쩍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더블린 사람들>의 분위기는 그 하나하나의 작은 작품들의 총합 이상을 담아내고 있다. 그리고 그 <더블린 사람들>이 만들어낸 분위기의 총합은 결국 각각 하나의 작품과 일맥상통하며 다시 하나의 작품안에서 환원될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단편소설로 이루어진 장편소설을 만들어낸다.

 

이 작품의 묘한 중독성은 여기에서 나온다. 분명 이 소설은 그렇게 큰 재미를 담아내고 있지는 않다. 물론 소설은 재미로만 읽지는 않기에. 그렇다고 페이지를 넘길때마다 조금씩 몸을 굳게 만들고 이성을 마비시키는 작가와 작품의 전형적인 카리스마나 압도감 역시 그다지 느끼지 못한다. 그다지 재미있지도, 어쩔 수 없이 페이지를 넘길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전형적인 카리스마를 풍기지 않음에도, 분명 다음 이야기가 이어지는 내용이 아님에도 이 작품은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면 곧장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고 싶게 만든다. 이 묘한 이끌림은 결국 작가가 배치하고 유도해낸 유기적인 장편소설이 만들어낸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생긴 중독의 발로이다. 한 작품 한 작품 따라가다보면 우리는 어느새 더블린 사람들이 쳐놓은 끈끈한 그물에 걸려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가지 제임스 조이스의 마수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허무

얼마전 화제에 끝난 시트콤 '지붕뚫고 하이킥'의 결말을 가지고 많은 말들이 있었다. 절정부분의 치솟는 긴장감을 맥없이 흐트려놓은 다소 허무하고 뜬금없는 결말은 시청자들 사이에서 많은 찬반 논란을 일으켰다. <더블린 사람들>도 조금 이와 비슷한 결말을 이끌어내지만 약간 느낌이 다르다. 지붕뚫고 하이킥의 결말이 황당한 느낌이었다면 더블린 사람들 각 이야기들 결말의 느낌은 '허무'로 표현할 수 있다. 마치 현대소설이 발달하기 전 재미없는 고전소설의 느낌과 흡사하다. 발단과 전개에서 갈등과 절정이 없이 갑자기 결말로 휘몰아 가는 느낌. 그런데 또 고전소설과는 다르다. 고전소설의 결말이 작가가 벌려놓은 일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급하게 뒷정리를 하고 결말은 확실하게 내고 끝을 냈다면, <더블린 사람들>의 결말은 일이 시작되고 독자가 느끼기에 이제 막 중반정도 왔다 싶을 때 결말자체를 매조지하지 않고 끝나버린다. 분명 그 뒤에 어떠한 일이 더 있어야 할 것만 같은데 작가는 거기서 뚝! 흐름을 끊어버린다.

 

이 허무함은 <애러비>에서 가장 잘 느낄 수 있다. 첫사랑에 빠진 소년은 그녀에게 줄 선물을 사기위해 어렵게 바자에 가지만 결국 거의 모든 가게가 문을 닫은 이후에 도착하고 아무것 하나 사지 못한다. 사지 못했다. 사지 못했으니 이제 소년은 어찌해야 할까. 어떻게 사랑에 빠진 소녀에게 마음을 전해야할까. 그 둘은 어떻게 될까....우리가 이미 저만치 앞서서 생각하고 있는 그 순간. 이 짧은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 어둠 속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노라니 나 자신이 허영에 쫓겨 농락당하는 한 마리 짐승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나의 두 눈은 번민과 분노로 불타올랐다."  라는 문장으로.   마치 그 다음 일을 궁금해하고 앞서나간 나에게 허영심 가득하다고 하는 듯하는 투로, 조이스는 끝을 맺는다.

<더블린 사람들>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기저의 침울하고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는 이러한 허무함에서 기인한다. 분명 무언가 더 있음직한 이야기를 서둘러 끝내는 것도 아니라 그냥 중간을 무자르듯 끊어버리는 이 허무함은 딱히 슬픈 이야기, 암울한 이야기를 담아내지 않더라도 작가가 더블린에서 느낀 불안하고 가라앉아 더 이상 팽창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분위기를 작품을 읽는 내내 한밤의 안개처럼 살며시 우리몸을 적셔준다.

 

 

불안.초조.억눌림.

<더블린 사람들>의 각 이야기에서 다루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더블린을 이끌어가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이끌려가는 소시민들이다. 더블린이라는 도시가 침체되자 그 곳의 사람들, 특히 소시민들의 삶은 더욱 곤궁해졌다. 하루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 1실링, 1펜스가 소중한 사람들, 선물을 두고 왔다는 안타까움보다 2실링 4펜스를 낭비했다는 것에 더욱 슬픔을 느끼는 사람들이 주인공(진흙의 마리아)이니 만큼 그들이 삶을 이어가면서 느끼는 애한 또한 더블린의 무거운 분위기만큼이나 크고 침중했을 것이다. 그들의 삶은 불안하다. 언제 직장에서 짤릴지 모르고, 언제 자신이 성공하고 빚을 갚아나갈지 모른다.(작은 구름 한점의 꼬마 챈들러) 할 일 없고 시간많고 능력없는 한량들이 할 것이라고는 어수록한 하녀들을 꼬셔내어 동전하나 얻어내는 것이 전부다.(두한량)

억압받고 무시당하며 불안한 삶을 지속하는 그네들. 이들의 삶을 보고 있노라면 더블린의 그 당시 모습과 분위기가 어떠했을지, 그 안에서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삶과 생각을 이어왔을지, 제임스 조이스는 적나라하게 그들을 해부하여 우리의 눈 앞에 들이민다. 

 

그리고 그 불안과 초조함,억눌림의 한계가 그 끝을 참지 못하고 <작은 구름 한점>과 <분풀이>에서 격렬하게 터져나온다. <작은 구름 한점>의 꼬마 챈들러는 전형적인 소시민의 상징이다. 그는 더블린에서 자신보다 훨씬 못하던 자신의 친구가 런던에 가서 성공하고 돌아온 모습을 보며 자신에게 한없는 자괴감을 느끼다가 그 분풀이를 자신을 옭매고 있는 자신의 갓난아들에게 퍼붓고 망연자실해 한다. <분풀이> 역시 마찬가지다. 직장에서 항상 무시당하고 업신여김 당하며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패링턴. 그가 결국 그 억눌림을 터트릴 수 있는 곳은 자신에게 대항하지 못하는 부인과 자식들 뿐이 없다. 그것도 맨정신에는 차마 하지 못하여 술에 취해있을 때에만 그는 자신을 무겁게 짓눌렀던 것들을 토해낼 수 있다. 그리고 결국 다시 패링턴은 다음 날 납보다 더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시 회사에 미적미적 출근할 것이다.

이 외에 자신이 어떤 길을 향해 가야할지 확신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이블린>의 '이블린'이라든지, 직장을 잃을까 두려움에 앞서 결국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게 될 <하숙집>의 도런처럼. 제임스 조이스는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자신을 둘러싼 시류속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하며, 자신의 꿈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도시 하층민들의 삶을 포착하고 가감없이 그려내면서 그들의 삶과 그들의 불안을 더블린 자체의 불안과 몰락으로 확대시키고 동일시한다.

 

 

애증.

불안해하고 억눌려 있으며, 동전 한푼에 벌벌 떨던 더블린 사람들. 그들을 바라보는 조이스의 시선은 어떠했을까. <분풀이>를 다시 떠올려보자. 패링턴은 자신의 울분을 얼마나 풀 곳이 없었으면 술에 취해 돌아와 집에서만 그 한을 풀어낼 수 있을까. 언뜻 보면 딱하게 보이는 패링턴. 그러나 작가가 패링턴에게 보내는 시선은 그렇게 가엾고 애처로운 시선이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패링턴에게 혐오에 가까운 시선을 보낸다. 패링턴이 회사에서 보이는 행태는 실로 가관이다. 근무시간에 몰래 나가 펍에서 시원한 흑맥주 한잔 들이키는 것은 물론이요, 자신이 맡은 일을 다 못끝내자 후에 벌어질 일은 생각하지 않고 당장의 입막음을 위해 자신이 처리해야할 문서들을 몰래 버린다. 그리고 항상 재무담당자에게 가불을 받아 거나하게 술 마실 궁리만을 한다. 제임스 조이스는 절대 패링턴이 당하는 무시와 업신여김을 소시민으로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하는 숙명이 아니라 자신이 자초하고 있는 것임을 꾸준하게 상기시킨다. <분풀이>에서 그가 더블린과 더블린을 바라보는 따끔한 시선을 극명하게 느낄 수 있지만 다른 작품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예외는 아니다.

<경주가 끝난 뒤>의 흥청망청한 부자집 젊은이들의 모습, <하숙집>에서 건실한 젊은이를 반강제로 꼬여내어 자신의 딸과 결혼시키려는 하숙집 주인의 속물근성, <위원실의 담쟁이 날>에서 나타나는 시의원 선거의 모습과 선거사무실의 풍경너머로 만날 수 있는 풍자, 딸의 성공을 위해 시류에 편승하고 치맛바람이 한창인 <어머니>까지. 조이스는 더블린의 많은 사람들-대부분 도시의 하층민을 중점적으로 다루긴 하지만-과 많은 곳에서 벌어지는 한심한 모습들을 가타부타 설명하지 않고 그대로 담아내는 것 같지만, 그가 고른 소재부터, 그리고 쇠락을 상징하는 무기력한 도시의 모습을 재연하는 그 과정부터 이미 더블린을 바라보는 우호적이지 않은 시선을 자아낸다.

<두 한량>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두 한량의 하루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그들의 마음속까지 들어가보지만, 결국 그의 관찰은 호기심으로 가득한 우호적 시선이 아닌- 이것들이 어떤 짓을 벌이는지 한번 지켜나보자에 가까운- 경멸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담아낸다. 

 

한 때 아일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였지만 급속하게 몰락해가고 있는 도시와 그 도시의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의 집안이 몰락하는 과정을 보면서 제임스 조이스는 결코 그것들을 애처로운 시선만으로 바라보지는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는 집안의, 도시의 몰락을 바라보면서 그 몰락의 책임이 어느정도 아버지와 도시와 사람들에게 있음을 말하고 싶어한 것은 아니었을까. 열심히 살아도 분명 좋아지지 않는 살림살이 앞에서 좌절하는 소시민의 삶이 아닌, 소위 당해도 싼 소시민들의 애환을 그려내면서 제임스 조이스는 자신이 더블린과 허영심 가득한 아버지를 바라보는 비판어린 눈초리를 그대로 담아낸 것은 아닌지. 그들의 쇠락과 삶의 힘겨움을 모두 그들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겠지만, 그들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주는 제임스 조이스의 시선을 통해서 그가 자신을, 아버지를, 집안을, 더블린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조금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그는 더블린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간절했을 것이다. 그의 관찰. 조이스는 이미 관찰할 대상을 고르는 과정부터 더블린을 바라보는 자신의 불편한 감정과 시선을 드러내었지만, 역설적으로 그러한 사람들을 고른다는 것 자체에, 그리고 그들의 삶을 자세하고 찬찬히 지켜보는 행위 자체에 아직도 더블린에 남아있는 미련과 사랑, 안타까움을 확인해 볼 수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 자신이 따르던 신부의 죽음을 슬퍼하고 가끔 수업을 몰래 도망나와 우정어린 모험도 하고 첫사랑을 위해 늦은시간 헐레벌떡 바자에 뛰어갔던 그 아이는. 이제 하루를 탕진하는 한량이 되었고, 직장을 위해 마지못해 원치않는 결혼을 해야하는 젊은이가 되었으며, 삶의 분풀이를 다른 곳에 쏟아부어야 하고 시의원 선거사무실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들의 모든 바라봄은 이미 그 시선자체로 그들에 대한 관심이며 안타까움의 발로이다. 그래서 조이스가 더블린을 바라보는 시선은 애증. 그 자체이다.

 

 

 

 

현실. 종교. 죽음.

조이스가 더블린의 사람들, 특히 하층민을, 애증어린 시선으로 -그나마 연민에 조금 더 가까운 시선을 담아- 그들에게 향했다면 그는 더블린의 공기 자체에는 증오에 가까운 시선을 보낸 듯 하다. 더블린의 공기는 무엇으로 채워져있었을까. 그 음울한 붉은 공기속에는 포기와 좌절, 경직과 마비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공기를 만들어 낸 원인을 그는 더블린의 현실정치와 종교에서 찾아내었음이 분명하다.

더블린 사람들의 첫 작품 <자매>에서 주인공 아이가 플린신부에게 보내는 따듯한 시선과는 상관없이 세상과 주위의 어른들은 그를 성직매매로 기억한다. 첫 작품부터 시작한 종교에 대한 차가운 눈빛은 <자매>부터 <죽은 사람들>까지 흘러가는 내내 종교와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언뜻언뜻 내비칠 때마다 싸늘하게 유지된다. 구교와 신교와의 갈등, 그 안에 자리잡은 힘을 합쳐도 모자랄 사람들끼리의 배타적인 모습, 그리고 이와 판박이인 현실정치의 모습, 아일랜드 부흥운동과 그들의 배타성을 조이스는 그리 호의적인 눈으로 바라보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적의 가득한 시선은 <은총>과 <위원실의 담쟁이 날>에서 절정을 이룬다. <은총>을 통해서는 아일랜드를 좀먹고 있는 종교의 경직성과 구교와 신교의 갈등(종교 뿐 아니라 현실정치까지로도 그대로 이어지는), 그 속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날카롭게 풍자하며, <위원실의 담쟁이 날>에서는 이미 패배주의가 가득하여 더이상 아일랜드의 미래를 보여줄수 없는 무기력한 현실정치의 현장을 낡은 시의원 사무실의 말만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또한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이러한 현실앞에서 스러지고 있는 그들의 어두운 미래를 소설 전반에 아울러 '죽음'으로써 은연중 내비치고 있다. 더블린은, 아일랜드는 이미 그 기력을 다했다. 사람들에게 믿음과 화합, 신념을 전해주고 당장의 고통을 감내할 수 있게 해야 하는 종교는 초라한 현실과 함께 주저앉아버렸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전해주고 고통을 분담해야 할 정치는 이제 그 기력을 다하고 언제 죽음을 맞이 할지 모른 채 어두운 관속에 들어갈 날 만을 기다리고 있다. 결국 <더블린 사람들>의 근저를 이루는 허무와 억눌림, 애증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더블린과 다름이 아니다.

 

 

 

 

제임스 조이스. 더블린 사람들.

 

결국 같은 곳으로 돌아왔다. <더블린 사람들>과 같이. <더블린 사람들>의 처음은 플린 신부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마지막 역시 가브리엘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같은 죽음이되 그 처음과 끝은 다르다. 내가 처음 제임스 조이스와 더블린 사람들이라는 단어의 자판을 칠때와 지금의 자판이 다르듯이.

플린신부의 죽음으로 시작한 <더블린 사람들>은 극중 인물들과 이야기를 허무와 무력함, 좌절과 애환, 불안과 억눌림, 비판과 경멸, 배타와 경직으로 밀어뜨린다. 작품을 읽는 내내 우리는 그 당시 더블린 사람들이 느꼈던 그 공기와 냄새를 고스란히 맡아볼 수 있다. 처음 우리가 맡았던 죽음의 냄새는 더블린 사람들 전반에 흐르는 그 공기와 분위기의 전조에 불과하다. 조이스는 그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더블린을 마치 그레타가 자신의 옛 죽은 정인을 가슴 속 깊이 묻어두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머리와 가슴속에 묻어두었다. 그레타가 '오그림의 처녀'를 듣기 전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레타는 우연히 '오그림의 처녀'를 듣게 되고 옛 정인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타의적으로 떠올리고 마침내 자의적으로 끄집어내고 풀어내었다. 조이스는 <더블린 사람들>을 쓰는 내내 자신의 정체성을 풀어내었을 것이다. 더블린을 보면서 자신을 보았고, 더블린을 그리면서 자신을 그려보았을 것이다. 그는 죽은 사람들을, 더블린을 추억했다. 자신과 더블린을 지배했던, 그리고 소설 내내 흐르던 '죽음'. 하지만 가브리엘의 깨달음과 관용이 죽음으로 연결되는 순간, 죽음은 더 이상 무기력, 우울, 허무와 동의어가 아니다. 가브리엘의 죽음은 결국 조이스의 깨달음이다. 그는 결국 <더블린 사람들>을 쓰는 내내 그토록 밉게만 바라보았던 더블린을 자신이 사랑하고 있었음을, 단지 그레타처럼 그 추억을 가슴 속 한켠에 자신도 모른채 묻어두고 있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더블린 사람들>을 지배하는 패배의식과 억눌린 감정을 조이스의 시선을 통해 우리가 오롯이 받아내었음에도 그 마지막은 결코 허무하고 음울하지 않다. 가브리엘의 죽음을 보면서 결국 우리는 조이스가 더블린을 바라보는 시선엔 결국 관용과 사랑이 남았음을 우리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책장을 덮을 때 남아있는 것은 더블린의 음울한 초상보다는 '더블린 사람들'을 향한 조이스의 따듯한 시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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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집권플랜 -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하다
조국.오연호 지음 / 오마이북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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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진보세력이란 어디를 의미하는가부터 시작해보기로 하자. 통상적인 개념에서 민주당을 진보라고 하기는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다. 민주당이 지금까지 보여준 정책이라든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보여주었던 정책들은 진보라기보다는 중도 보수 혹은 보수에 어울리는 부분이 더욱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두 분의 대통령이 보여준 정도의 정책들도 줄곧 빨갱이들의 정책으로 저급한 비난을 받아왔으며, 그것은 기존의 수구 기득권 세력의 야합에 의한 결과임이 자명하다.

책에서도 밝히지만 친일파 청산의 부재와 수구 기득권 세력의 독재, 남.북한의 대치 상황 등의 특수한 상황이 대한민국에서의 진보,보수의 개념을 조금 많이 바꾸어놓았다. 덕분에 우리나라에서는 우파의 정책을 지향하는 민주당이 친숙한 빨갱이정당이 되었으며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등의 진보정당은 상종도 못할 친숙하지도 않은 빨갱이 정당이 되어버렸다. 어쨌든 대한민국에서 개혁/진보세력이란 조중동과 한나라당으로 상징되는 수구 기득권 세력에 반하는 모든 집단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이 책 역시 현재의 정치지형을 그대로 담은 책이므로 이 개념을 차용하고 있다. 언제고 이 개념이 바뀌는 날이 진정으로 진보가 집권하는 그날이겠지만 그날이 언제나 오려는지 상상조차 되지 않으므로 일단 진보의 개념을 반수구세력으로 정의하고 책을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책은 오연호 기자와 조국 교수의 대담형식으로 이루어져있다. 오연호 기자가 질문을 이끌어 나가고 그에 조국 교수가 답하는 식으로 쓰여있는 이 책은 조국교수가 생각하는 현 정치상황과 진보/개혁세력이 나아가야 할 방향 정도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조국교수는 그 명성에 걸맞게 현 정치상황에서의 진보진영의 역할과 반성에서부터 시작하여 사회.경제, 교육, 통일문제, 검찰과 권력형비리 문제등 사회 전반적인 부분에 걸쳐서 자신의 내공을 뽐내고 있다. 특히 기존의 어려울것만 같고 우리네 생활과 관계 없을 것만 가득한 빨간 냄새 자욱한 책과는 달리 현실적인 이야기들, 특히 6.2지방선거까지의 최근의 사회적 현안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진행하기 때문에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는 강점이 잘 살아있다.

 

이 책에서 조국교수와 대담자 오연호 기자가 강조하는 부분이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진보/개혁진영의 자기성찰과 반성, 그리고 준비성이다. 책은 투사에서 영주가 되어버린 386세대의 기성정치인들을 철저히 비판한다. 그들은 더이상 사회정의를 위해 뛰어온 지난날의 불굴의 의지와 집념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들은 어느덧 계파를 관리하고 자신의 텃밭을 관리하며 굳이 집권하지 않아도 자신의 세력을 지킬 수 있는 영주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고 이 책은 얘기한다. 그와 동시에 지난날 운동권에 몸담았던 그 시절의 관성대로 살다보니 시민들을 가르치려고 하고 이끌어나가려고만 하며 그에 걸맞는 정책제시에 매우 소홀했다고 지적한다. 충분히 개혁/진보 세력이 선도할 수 있는 여러 현안들을 수구세력에게 빼앗긴 것은 이러한 부분때문이라고 통렬히 비판하며 오히려 지금의 시기를 잘 활용하여 앞으로는 보다 정책을 선도할 수 있는 진보/개혁세력으로 거듭날 것을 촉구한다. 진보/개혁 세력이 다시 집권하기 위해서라면 왜 통일이 민생에 도움이 되는지, 왜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을 키우는 것이 민생에 도움이 되는지, 왜 부자를 감세하는 것이 아니라 서민들을 감세하는 것이 민생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 국민들과 함께하고 정책으로 제시하고 눈으로 보여주어야 한다고 강력히 이야기한다.

우리는 흔히 진보/개혁 세력의 정책을 현실성이 없다고 비판하거나 충분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진보/개혁진영의 사람들은 그러한 비난과 비판에 대해 국민들이 잘 몰라서 그렇다는 말로 대꾸하기 일쑤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태도를 호되게 비판한다. 이제 더이상 국민들은 기존의 운동권 학생들이 하자는 대로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이상은 국민과 함께가고 국민과 같이 고민하고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학생운동하던 그대로 우리가 옳고 우리만 따라오면 된다는 식의 논리는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진보/개혁세력이 집권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반성하고 다가가야 할 부분은 민생문제에 대한 보다 절실한 대안과 국민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법이라고 이 책은 이야기하고 있으며 흔히 자신을 진보/개혁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고 진보/개혁진영이 집권하길 바라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도 왜 서민들이 서민들을 위한 정책을 펴는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지, 국민들이 문제라는 식으로만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국민들에게 어떻게하면 더 이러한 정책들을 알리고 보다 정교하게 가다듬어야 한다는 생각은 국민들이 문제라는 안일한 마음속에서 그저 사그라졌을 뿐이다. 이 책은 이러한 부분을 한번 환기시킨 것만으로도 충분히 진보/개혁세력이 집권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한번 즈음 읽어봐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다만 이 책에 대해 아쉬운 점이 두가지가 있다. 한가지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을테고 한가지는 조금 미진한 부분이다.

일단 첫번째는 개혁/진보세력에서 문제가 되는 종북세력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은 모든 진보/개혁 세력이 연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최소한 종북단체들은 연대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북한의 3대 권력 세습은 충분히 비판받아야 할 일이다. 그렇지만 개혁/진보세력의 극히 일부분은 북한의 권력세습은 어쩔 수 없는 일이며 그것을 비판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라고까지 말한다. 이것은 잘못된 일이다. 누가보아도 잘못된 북한의 잘못은 내팽겨치고 남한 정권에만 서슬퍼런 비판을 가하는 것은 수구세력에게만 좋은 먹을 거리를 주는 일이다. 물론 책에서도 이러한 부분을 분명하게 짚어내고 있으며 민주노동당의 새 대표가 된 이정희 의원이 이러한 일들을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할지 귀추가 주목된다고도 이야기했다. 물론 북한은 감싸주어야 한다. 목숨이 아닌 돈으로 평화를 살수 있다면 우린 기꺼이 그것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북한의 잘못에는 잘못이라고 이야기를 해야한다. 무조건적인 북한 찬양과 그러한 세력까지 연대해야한다는 말은 수구언론의 좋은 먹잇감이 될 뿐이다. 진보/개혁세력의 연대는 집권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그 연대를 어디까지 함께할 것이냐에 대해서, 특히 북한문제와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책에서 이부분을 조금 더 짚었으면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가지 어쩔 수 없는 아쉬운 점은 이 책의 '내공'이다. 조국교수는 전방위적인 질문에 좋은 이야기를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사회 현안에 관심있는 사람들이보기에는 조금 쉬운 감이 없지 않다. 이 책을 통해 진보가 집권하기 위한 '진짜' 플랜을 보고 싶었을 독자에게 이러한 부분은 아주 약간의 서운함이 남았을 부분이다. 그러나 이부분은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분명 이 책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쉬운 이야기들을 주로 담고 있다. 하지만 그래야 진보가 집권할 수 있다. 이 책의 목적은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진보/개혁 세력이 집권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이 책은 쉬운 이야기이지만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 당장 취업이 급한 사람들은 신경쓸 수 없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는 것 같지만 정확히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조금의 실마리를 잡아가고 무언가가 구체화되고 조금의 생각이라도 바뀐다면, 그것이 진보가 집권하는 한걸음일 것이다.

 

결국 이 책의 아쉬움은 이 책의 강점이 된다. 누구나 보아도 어렵지 않고 관심을 환기시키며 사회적 현안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도와주는 책. 먹고 살기가 힘들어 정치에는 신경쓸수 없는 사람들에게 먹고살기 위해 정치에 신경써야 함을 다시 한번 자연스레 알려줄 수 있는 책. 이것이 <진보집권플랜>의 강점임과 동시에 진정 진보/개혁 세력이 다시 한번 집권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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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튼
케이트 모튼 지음, 문희경 옮김 / 지니북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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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이라는 시대를 제외하고

다시 태어난다면 언제로 가보고 싶은가?

혹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을 떠나본다면 어느 시대, 어디로 가보고 싶은가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20세기 초반의 유럽을 가장 가보고 싶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초중반으로 이어지는 유럽은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역동성과 광기, 폭발력과 그 이상의 잠재력이 어우러진

한마디로 형언할 수 없는 시대일 것이다.

 

지난 수세기동안 이어져오던 신분제가 점점 해체되어나가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의 바람.

수구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할 것 같지만 리버튼에 나오는 귀족들은 절대 인정하지 않을 전통과 보수.

그리고 산업혁명 이후로 폭발적으로 늘어난 생산력을 바탕으로 점점 그 세를 확장해가는 신흥 사업가와 중산층.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의 유럽, 특히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나 이 작품 <리버튼>에 나오는 이 시기의 영국은

흡사 대한민국이 해방 후 부터 지금까지 겪고있는 전통과 파격의 혼란을 겪고있는 듯 언제 어떤 파도가 휘몰아칠지 모르는 격동의 모습을 담고있다.

 

귀족이 있고, 하인이 있으며, 남녀간의 전통과 엄격한 규율, 영국과 미국간의 권위의식이 있으면서도

자동차가 지나다니고 전기가 있고, 전화가 있고 비행기가 있는, 그런 세상.

 

지난 수천년간의 역사를 지난 수십년의 진보가 뛰어넘으려하는 그 새로운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가 충만하다 못해

광기로 진화해버린 그 시절의 이야기와 모습은 누가 보아도 매력이 철철넘칠 수 밖에 없는 세상의 모습이다.

 

그리고 <리버튼>은 그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해내고 있는 간만에 본 작품이다.  

 

<리버튼>은 두가지의 재미를 동시에 선사하고 있다.

 

첫번째는 위에 말한대로 우리에게 매력을 넘어 마력으로 다가오는 20세기 초반의 유럽사회, 특히 그 당시 세계를 지배한다고까지 할 수 있었던, 그러나 점차 그 지위를 미국에게 넘겨주고 있었던,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영국사회의 모습을 우리에게 충실히 보여주고 있다.

<리버튼>은 하녀 그레이스의 눈을 통해 당시에도 여전히 영국사회에 존재하고 있던 귀족과 하인의 모습, 귀족들의 권위의식과 남여차별, 미국에 대한 우월감과 교묘하게 드러나 있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두려움 등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러한 와중에 발달한 기술을 통해 마차대신 자동차가 굴러다니고 영국 최초로 전화가 놓이고 전기가 들어오는 격정적인 시대의 발전 또한 나란히 보여줌으로써 그 시대의 상황과 매력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세계1차대전에 참전하는 영국의 모습과 함께 전쟁의 두려움과 맞물려 그 시대의 광기를 전쟁후유증을 앓는 알프레드와 로비 헌터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그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 얼마나 매력적어있으며 그와 동시에 얼마나 끔찍한 시대였는지에 대해 독자에게 은연중 이야기하고 있다.

약 700페이지에 달하는 긴 이야기 동안 작품이 하나의 사건을 향해 천천히 꾸준히 달려가면서도 그 동력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에는 이 매력적인 시대를 정말로 충실하고 넘치게 그려낸 작가의 필력과 그 시대 자체의 매력 때문일 것이다.

 

 

두번째의 재미는 역시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해너와 로비헌터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랑에 빠졌지만 그것이 사랑인 몰라 생채기를 낼 수밖에 없었던 해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결혼해버린 해너를 사랑하게 된 젊은 보헤미안 로비헌터.

그레이스의 눈을 통해 해너를 쫓아가다가 결국 해너의 이야기와 함께 폭발적으로 흘러버리는 이 둘의 사랑은

어떤 특별한 사건 없이도 독자들의 눈을 책에서 떼어내지 못하고 긴장감 가득 책장을 넘기게 하는 일등공신이요,

그것을 빛나게 하는 건 역시 작가의 솜씨다.

 

 

둘 중에 하나만 제대로 그려내었어도 충분히 매력적인 작품이 될 수밖에 없는 두가지 요소가 그럴싸하고 이쁘게 결합했다.

그러니 이 작품은 그 두꺼운 페이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손에 책을 잡을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이 매력이 뚝뚝 뭍어나오는 시대가 과연 둘의 사랑을 어떻게 방해할 것인지,

세상의 눈을 피해 그들이 어떻게 할 것인지 점점 결말이 다가오는 순간,

독자들은 작가의 솜씨에 의해 책을 한페이지 한페이지 넘기다 못해 두페이지, 세페이지 넘기며 결말을 궁금해 할 것이다.

그만큼 작가는 그 두가지 요소를 잘 버무려내었다.

 

 

잘 쓴 작품이지만 그래도 역시나 아쉬움이 남기는 어떤 작품을 보고도 남기 마련이다.(물론 그렇지 않은 작품도 간혹 존재하지만 그런 건 정말 별로 없다)

이 작품은 철저히 하녀 그레이스의 눈을 통해서 진행된다.

그녀가 오래도록, 20세기 한 백년을 모두 받아내면서 겪은 이야기들.

컴퓨터와 인터넷과 핸드폰을 들고 다니는 시대에 적어내는 불과 몇십년전의 수백년 전같은 이야기는 모두 그레이스의 성장과 그 궤를 같이한다.

그런데 이 그레이스의 역할이 어느 순간 맥이 뚝. 끊겨버리고 만다.

그레이스의 역할은 해너가 로비와 사랑에 빠지는 순간 어느덧 주인공같은 관찰자가 아닌 주변인이 되어버린다.

이미 이야기는 해너의 손과 눈으로 넘어가고 만다.

그러면서 이미 그레이스의 리버튼 집안 이야기는 단순히 해너와 로비의 비극적 이야기로 주저앉고만다.

그레이스가 자신의 출생의 비밀과 함께 더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가면서 힘을 주었어도 좋았을테고

차라리 그레이스의 존재를 조금 더 처음부터 희미하게 해 놓았어도 좋았을테다.

이야기의 결말과 미스터리를 그레이스와 연관시켜놓을 요량이었다면

이야기의 중반부분 그레이스의 역할이 조금은, 아주 조금은 아쉽다.

 

또한, 이 부분은 나 혼자만 이해가 안되는 부분일 수도 있겠지만, 파국으로 치달은 그 사건에서 해너가 로비한테 무슨 일을 한건지,

로비와 해너와 에멀린 사이에서 정확히 어떠한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작가가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개인적으로는 혼란스러운 부분이었다만, 이것은 아쉽다기보다는 작가의 취향일테니.

 

 

안타까운 마음에, 이부분만 내 맘에 조금 더 들었다면 정말로 만족했을 것만 같은 마음에

옥의 티를 끄집어내는 부분이 조금 길어졌다.

 

하지만, 그 옥의티가 너무도 아쉬울만큼

<리버튼>은 간만에 그 시대 이야기를 그 시대만큼 재미있게 풀어낸 작품이다.

 

언제 들어도 귀가 쫑긋 솟아오를 매력적인 사랑이야기가

타임머신이 존재한다면 꼭! 가서 한번 같이 살아보고 싶은 시대상에 아주 잘 버무려져서

무엇과 무엇이 서로 어떻게 혼합하여 작용하는지도 모를만큼 어우러졌다.

 

오랜만이다.

이미 검증된 고전이 아니라, 요즈음의 소설을 보고 이렇게 흐뭇하게,

그 둘의 사랑에 매몰되어 안타깝게 책장을 덮은 기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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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영화를 만나다
김영욱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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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림책
얼마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담고 있는 말인가.
그림만으로 책이 될수 있고
글로써 이야기를 진행하고 그 위에 그림이 깔려있을 수도 있고
그림만으로 말하고 싶은 바를 다 보여주지 못할 때 글로 조금조금 보충해줄 수도 있고
그림만으로도 좋고 글로도 좋은데
그것이 함께라니 더 없이 좋고 또 좋은게 그림책일 것이다.

 
그림이라는 글자에 '책'이라는 글자 하나만 더해졌을 뿐인데,
그림과 그림책은 엄청난 간극을 불러온다.
미술전,그림전시회에는 관심을 기울이는 많은 사람들도
그림책이라는 단어에는 무언가 아이들 취향, 애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인식이 많이 깔려있다.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림책이라는 건 어린 시절, 엄마와 아빠가 읽어주던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초등학교시절 그림일기의 영향인 걸까?
그림일기를 더이상 그리지 않게 되면서 우리는 그림과 글의 결합은 나와는 더이상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림책, 영화를 만나다>는 이런 우리들에게
그림책이 어린아이들만의 권리이자 의무인 것은 아니라고 얘기해주는 책이다.
어려워서라기보다는 너무도 쉬울 것 같아서 그림책을 멀리했던 우리들에게
그림책도 충분히 우리들과 친숙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작가는 <그림책, 음악을 만나다>에 이어
두번째 에세이 <그림책, 영화를 만나다>로 우리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기 위해 찾아왔다.
 

철학이 누구를 만나고, 문학이 누구를 만나고, 경영이 누구를 만나는 책의 제목들이 봇물터지듯
넘실넘실거리는 때에 사실 이 제목은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제목의 식상함은 책의 앞면을 장식하는 표지사진으로, 그 사진이 말하는 느낌으로 모두 잠재워버렸다.
 

지금은 더이상 실생활에서는 볼 수 없는 타자기와 전축, 초인종까지.
우리의 어린시절을 함께했던 전축과 타자기는,
더이상 우리의 추억과 유년기의 기억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이제는 누군가를 부르기 위해 벨을 사용하지 않고,
컴퓨터의 발명으로 아무도 타자를 치지 않으며,
전축보다는, 걸어다니며,지하철에서,공부하면서도 항상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더이상 어린시절의 추억으로만 남아있는 것들을 이 그림은 우리의 기억에서 끌어내고
잠시나마 우리를 그때 그시절로 돌아가게 해주었다.
이 책이 그림책의 추억을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끌어내는 것처럼.

 
이것이 그림책의 묘미일 것이다.
글로는 떠올라지지 않는 것, 그림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것이
둘의 만남으로 우리를 단숨에 추억으로 빠지게 만들고 글의 느낌을 전달해준다는 것.
이 만남의 느낌을 작가는
책 속에서 영화와 그림책의 만남을 통하여 더욱 구체화시키고 있다.
영화를 만난 그림책은 왜 이제야 자신을 보아주느냐는 듯이 자신의 매력을 뽐낸다.
어린아이들이 좋아할만한 그림부터 어른들이 더욱 좋아할 그림책까지.
영화와 만난 그림책들은 영화보다 더욱 빛을 발하며 자신들을 부각시킨다.

 
매년 여름이 되면 항상 기대하게 되는 영화 스튜디오가 있다.
픽사스튜디오.
토이스토리를 시작으로, 업, 월-E, 니모를 찾아서, 몬스터주식회사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어른이 되어야 그 진가를 인정해줄 수 있을만한,
애들도 볼 수 있는 어른들을 위한 애니메이션들이
이 책을 덮은 이후에 떠오른다는 것은
나도, 우리도 그림책과 충분히 친해질 수있다는 방증이리라.

 
<그림책, 영화를 만나다.>
굳이 영화를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그림책을 만난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글이 있고, 따스한 그림이 있고,
둘이 만난 책이 있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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