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내의 장례는 공영장례로 치러졌다. 전용 빈소에서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아 간소하게 예식을 치렀다. 참석한 사람은 숙분과 기연, 미리내의 직장 상사와 동료 둘이 전부였다.
장례식이 끝나고 숙분은 사십구재가 되는 날까지 매일 302호의 현관문을 열어두고 향을 피웠다. 미리내의 유품은 상자에 담아 4층에 올려놓았다. 혹시 나중에라도 누군가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버릴 수가 없었다. 사십구재 날에는 302호 안방에 조촐한 제사상을 마련했다. 그날은 단심도 일찍 가게를 접고 따로 부쳐두었던 전을 싸 들고 숙분을 만나러 갔다. 사위에 어둠이 내리자 빌라의 세입자들과 주변 이웃 몇이 302호를 찾아왔다. 고인의 명복을 빌고 제삿밥을 먹고 돌아갔다.
사십구재를 지내고 나서야 숙분은 벽지와 장판을 새로 갈았다. 처음에는 단심이 들어올 계획으로 집을 내놓지 않았는데, 단심이 살던 집과 20년 가까이 해오던 백반집도 정리하기로 하면서 이사가 계속 미뤄졌다. 숙분과 단심은 상의 끝에 일단 302호에 세를 놓기로 했다. 그해 가을, 302호로 나경이 이사를 왔다.

71/9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의 완벽함을 찬양하고 인간의 부족함을 기억하기 위해 일부러 실수를 남겨둔다는 아미시 사람들에 대한 오마주라고 둘러대는 게 최선이다.

113/166

대신 내가 뜨개 선생님에게 바라는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다른 뜨개 강사나 디자이너를 비방하지 않을 것, 다른 하나는 수강생을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둘 것. 이 두 가지를 갖춘 선생님을 만나기만 한다면 그의 커리큘럼이 몇 년 과정이든 함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학교를 졸업한 뒤 이런저런 교육기관을 꽤 기웃거린 편이다. 수채화와 데생, 인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터, 출판 기획과 마케팅, 시나리오와 번역까지 꽤 많은 강의를 들으며 다양한 강사들을 봐왔다. 그중에는 깊이 있는 강의를 하면서도 수강생과 친구처럼 소통하는 강사가 있는가 하면, 강의실을 자신의 왕국처럼 꾸려가는 강사도 있었다. 그 둘 사이에는 수강생의 심리 상태까지 알고 싶어 하는 강사, 자신이 가르친 대로 단축키를 쓰지 않으면 히스테리를 부리는 강사, 의대에 진학했다는 자신의 딸과 딸의 남자친구 이야기를 하느라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강사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이 존재했다. 첫 강의를 듣고 강사가 어떤 유형인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된 건 다년간의 수강 경험이 쌓인 덕분이었다. 그리고 저 두 가지 조건은 몇 차례 뜨개 강의를 경험한 뒤 갖게 된 나만의 수강 기준이었다.
126/166

고등학생 시절, 당시 여대생들이 닮고 싶은 여성상에서 늘 높은 순위를 차지했던 어느 기자가 쓴 수필집에 이런 글이 있었다. 사회에서 활약하는 여자 선배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여자 후배에게 들려주는 몇 가지 조언을 적은 것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첫 번째와 두 번째 조언은 기억이 안 나고 내 머릿속에는 세 번째 조언만 생생하게 남아 있다. 자신이 몸담은 분야의 잡지를 한 권 반드시 구독하라는 것.

140/16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이분 역사를 안다.
인강으로 에브라임 국사를 들었으니까. 그래서 잠깐 공무원 준비 할 때 선생님이 말씀 세게 하시는 게 적응이 잘 안 됐다. 대학생이 되어 이후 사촌동생이나 학생들에게 추천해주면 내 말에 설득력이 없었는데 그건 전한길 선생님 암흑기 때여서 그랬던 거 같다. ^^;;



‘가난해져 보면 착한 아내가 생각나고,
나라가 어려워져 보면 충신을 알게 되고,
세찬 바람이 불어오면 강한 풀을 알 수 있다.’
 46/229
이건 하락장에서도 통하는 논리 같다. 나는 상승장보다 하락장에서 더 종목 보기가 쉬운데, 하락장에 주가 안 빠지고 버티는 애들에 상승장에선 날아갈 가능성이 커서 하락장을 좋아한다. 물론 떨어지는 칼날은 잡지 않는 게 좋지만 요즘같은 하락장에선 버티는 애들 몇개 갖고 있으면 참 든든하다. 상승장보다 하락장에서 종목고르는 게 참 좋다.

명절 때 카페에 올라온 이야기다. 설날 큰집에 갔는데 큰아버지가 너 요즘 뭐 하냐 해서 공무원 공부한다 하니까 "야, 너 안 돼. 너는 떨어져"라고 했다더라. 큰아버지의 그 이야기를 듣고 부글부글해서 바로 집으로 왔는데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거다. 내가 댓글로 그러면 니 생각이 옳고 큰아버지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그랬다. 큰아버지한테 멋지게 복수하라고.
누구든 나보고 안 된다고 말하거든, 한번 보여주는 것이다. "큰아버지 이게 뭔지 아십니까?" 합격증 딱 들고 다음 명절 때 가서 해냈다는 것을 보여주어라. 큰아버지가 뭐라고 하겠나? "그래. 너 참 훌륭하다. 고생했다. 멋있다"라고 할 거다. 내가 잘되는 것이 최고의 복수다.
42/229

수능 강사 시절, 나는 소위 잘나갔다. 대구 지역 출신 강사 최초로 EBS 방송 강사가 되고, 강의 평가도 EBS 강사 전체에서 1등을 했다. 강사와 직원을 합쳐 100명이 넘는, 대구에서 가장 큰 학원인 유신 학원 이사장도 했다. 내가 집필한 교재도 전부 베스트셀러였다. 『에브라임』이라고 당시 EBS 방송 교재보다 이 책이 더 많이 나갔다. 그러니까 나는 베스트셀러 작가, 인기 스타 강사, 이사장, 출판사 대표이사를 하고는 그 뒤로 다 실패했다. 학원 실패, 출판사 부도, 인기 강사 추락. 메가스터디 꼴찌 강사까지 갔다. 어떤 사람이 캡처해둔 게 아직도 인터넷에 돌아다니고 있다. ‘전한길 메가스터디 꼴타’ 잘나가던 30대 초반 전한길은 엎어지고 부도나고 25억 빚더미에 앉았다. 나와 친했던 사람들 중 내가 실패한 걸 기뻐한 애들도 많았다. 내가 망한 걸 가지고 저희들끼리 수근거렸다. "야, 전한길이 망했대. 아이고 어떡하냐?" 그러면서 자기들 위안으로 삼기도 하고.
43/229

긍정적으로 받아들여라. 항상 최선을 다하되 무조건 목숨 걸고 해라. 그랬는데도 떨어질 수 있다. 떨어지고 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또 하면 된다. 모든 것은 생각에 달렸다. 마인드 컨트롤.

‘가난해져 보면 착한 아내가 생각나고,
나라가 어려워져 보면 충신을 알게 되고,
세찬 바람이 불어오면 강한 풀을 알 수 있다.’
 46/229

여러분한테 드리고 싶은 메시지는 딱 하나다. "자기 자신한테 실망하지 마라"는 것이다. 나도 책도 내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강의도 하고 덕분에 명성도 얻게 되었지만, 여전히 내가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실망하지는 않는다. 지눌 스님이 이야기했지 않나. 깨닫고 노력하고 작심 3일, 또 노력하고 또 작심 3일, 노력하고 돈오(깨닫고)하고 점수(노력)하고 돈오하고 점수하고 깨닫고 실천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업그레이드 해가면 되는 거다. 절대 스스로에게 실망하지 말자.
64/229

고 3 때 나는 대학을 가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고, 공부도 안 했다. 대학에 안 가고 시골 가 있다가 우리 아버지께서 등록금 마련해놓고 우시는 것 보고 충격 받아서 나왔다고 했잖은가. 그 재수할 때는 집에 1년간 안 들어갔다. 그동안엔 친구 다 끊고 그냥 1인 1실 고시원에 처박혀서 공부만 했다. 모의고사도 1년간 한 번도 안 쳤다. 자가 진단 해보면 안다. 단원마다 문제 평가가 있는데 다 풀리면 되는 거다. 그렇게 혼자 독하게 했다.
점심 저녁에는 만둣국만 먹었다. 소화가 잘되니까. 만둣국만 먹으며 미친 듯이 공부했더니 수학을 제외하곤 모든 과목에서 거의 100점이 나오더라.
69/229

나는 경영하는 사람들을 참으로 존경한다. 내가 못하는 일을 잘하시는 분들이니까. 그게 구멍가게든 작은 식당이든 쉽지가 않다. 몇몇 사람들은 늘 적대적으로 경영자와 근로자의 갈등을 부추기려고 한다. 그런 의식을 가진 사람은 경영 못 한다. 근로자가 없으면 경영자가 있을 수 없고 경영자가 없으면 근로자가 있을 수 없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존재하니까. 이렇게 서로 존중하고 챙기는 문화가 필요한데, 이 사회에는 꼭 갈등을 부추기는 조직이나 단체들이 있다. 어쨌든 좋은 문화 만들면서, 열심히 경영하시는 분들 보면 존경심이 생긴다. 실제로 망해보니 잘 알겠다.
수업료를 너무 비싸게 냈다. 한 10년은 또 다 날아갔으니까. 월세 생활에 신용불량 생활에 아주 바닥 생활을 또 했지 않은가? 그러다가 다행히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학생들 수강료 낸 거 아깝지 않도록 항상 몇 배를 내가 돌려주겠다 생각하면서 더 많이 더 열심히 더 열정적으로 수업한다. 내 성격하고도 딱 맞아떨어진다. 퍼주는 자. 많이 주면 이걸 무조건 학생들이 알아준다. 나한테 딴 게 있나?

73/2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영어도 그렇고 한국사도 그렇고 그냥 개념을 이해하고 반복하면 수험이 너무 쉽다는 거다. "공무원 한국사 공부는 암기입니까? 이해입니까?" 공부가 곧 암기다. 5급 행정고시도 전부 암기다. 옛날에 공자왈 맹자왈 전부 다 외우는 거 아닌가? 내가 판서를 왜 하는가? 하나하나 스토리텔링으로 여러분을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반복만 하면 암기가 되는 거다. 두문 글자, 정말 유치하고 좀 간지럽지만 생선 먹듯이 가시는 발라내고 살코기만 받아들여 자기 유리하도록만 받아주기를 바라본다.
33/229

그래서 여러분을 합격시키는 것이 바로 내가 잘되는 길이다. 여러분이 합격하고 나면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가족, 가장 친한 친구, 몇몇 친척밖에 없다. 나머지는 다 배 아파 한다. 겉으로는 축하한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배 아파 한다. 경쟁에서는 이기고 봐야 되는 거다. 지고 나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나처럼 부도나서 10년 가까이 바닥 생활, 신용불량 생활하고 그 많은 빚쟁이들 찾아오는 굴욕을 당해봐야 이해할 텐가.

38/2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가씨. 숙분이 부를 때마다 나경은 속으로 되뇌었다. 나경은 가끔은 아가씨로 또 가끔은 아줌마로 불렸지만 둘 다 자신에게 딱 맞는 호칭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저 아가씨 아닌데요, 라고 대꾸하지도 않았다. 그다음 벌어질 상황이 더 귀찮을 것 같아서였다. 나경은 숙분이나 동네 어르신들이 혼기가 꽉 찬 아가씨로 자신을 오해하도록 놔두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됐다. 아가씨로 알고 중매를 서겠다고 하면 어쩌지? 재취 자리지만 사람이 참 좋으니 한번 만나나보라며 불쑥 낯선 사람의 사진을 내밀면 어쩌지? 집 앞 골목이나 계단에서 마주친 숙분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설 때면 나경의 머릿속에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스쳐 갔다. 스스로 판단하기에도 앞서가도 너무 앞서 나간 우려였지만 자신도 모르게 급발진해버리는 망상을 멈춰 세우기가 힘들었다.

47/93

나경은 당장 이사 갈 상황이 아닌데도 틈만 나면 부동산 시세를 알아봤다. 재개발 아파트, 주택 청약을 검색해보다가 자신의 처지에는 무엇도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재차 깨닫고는 주변 빌라나 다세대주택, 회사 부근 오피스텔 전월세 시세를 살펴봤다. 초역세권 오피스텔의 월세와 관리비를 내며 살 수 있을까. 감당하려고 하면 못 할 것도 없겠지만 아무래도 너무 비쌌다. 그래도 오피스텔에 살면 주인집 간섭은 안 받겠지? 풀 옵션 9.3평형 오피스텔 내부 사진을 확대해 보면서 나경의 마음은 번번이 조금 기울었다가 현재로 돌아오곤 했다.
48/93

잠깐 기다려보라며 숙분이 밖으로 나갔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지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지만 내용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엉겁결에 생시를 말해놓고 나경은 뒤늦게 어리둥절해졌다. 세입자 생시는 알아서 뭐 하나? 그런 건 왜 물으시냐고 물어볼까? 나경은 공연히 소파 옆에 놓인 금전수의 새로 돋은 잎사귀를 만지작거렸다.
52/9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