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기를 지나버린 건축가들의 다시 불타오르는 장인 정신의 모습과 해체된 가족들이 그 상처를 딛고 서로를 다시 알아가는 과정은 참 기가 막히게 좋았다.
후지미야 하루코라는 한 사람의 인생이 이야기 한 축의 소재로 쓰였는데, 따로 빼서 소설을 하나 더 지어도 좋을 정도였다. 마치 미술계의 에밀리 디킨슨. 그러나 가공의 인물.
묘사도 무척 뛰어나서 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는 거 같은데, 아닌가? 원제목 정말 감탄했는데 시종 ‘높빛’의 은은한 분위기가 눈에 선하다. 노스라이트라고 하면 북쪽 빛, 북에서 온 빛? 뭐 딱 입에 붙는 느낌이 없다. 그러다 생각났다. 마파람 높새바람 하늬바람 이런 거 처럼 북을 상징하는 높 쓰면 되잖아? 그런데 높빛을 한자어로 바꾸면 고양시 되네.
다 읽고 나니 타우트의 의자가 꽤 중요했다. 그런데 책 표지의 소파는 편안해보이지만 타우트의 의자 느낌이 또 아니었다. 원서 표지가 더 못생겼는데 거기 의자가 타우트의 의자에 좀더 가까웠던 거였다. 그래도 다시 고르라면 한국어판이다. 이 표지가 좀더 예쁨.
추리소설로 보면 별로일 수도 있지만 나는 재미있었다. 그러나 초반에 집주인이 사라지고 아오세가 그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지루하게 느껴지는 거 같다.
전성기가 가버린 아오세와 오카지마. 거기다 각자 부인이랑 갈등이 있고 그게 각자 트라우마에 가까운데 그게 또 장인 혼을 불태우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살게 하기도 한다. 그 가운데 타우트의 의자와 후지미야 하루코의 삶이 배치되고 예술과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한다.
한편으로 무엇이 ㅇㅇ(국가) 예술이고 무엇이 아닌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브루노 타우트는 독일인이다. 그가 일본 건축을 업그레이드 해준 느낌으로 나오는데 타우트는 일본에서 가구를 팔았던 것으로 나온다. 일본의 건축에 한번 따봉해줬고 자기 집을 일본식으로 짓고 살았다.
여기에서 독일인이 만들었어도 일본에서 건축했으니 일본 건축인 건지, 일본에서 살았던 어떤 건축가의 존재만으로도 그 건축가의 다른 나라에서 만든 건축이 일본 건축이 되는 건지 뭐 이런 거까지 확장해서 예술의 국적을 생각해보았다. 물론 책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한편 후지미야 하루코는 일본이 아닌 프랑스에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럴 때 보통 나는 일본인이 한 프랑스 미술이라고 보았는데 이 책에선 후지미야 하루코의 기념관을 놓고 건축가들이 경합을 벌인다. 그러니 후지미야 하루코의 작품은 일본인이 만들었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일본 미술의 측면으로 책에 묘사가 되어있었다. 항상 궁금하다. 속지주의인가 속인주의인가. 타우트의 의자는 속지주의적인 느낌이었고 후지미야 기념관 건립 관련해서는 속인주의적인 느낌이었던 게 흥미로웠다.
그리고 장인 하면 떠오르는 건 전통적인 방식을 잘 살려서 만드는 사람, 예컨대 만들 때 사용하는 접착제도 여전히 밥풀을 사용하는 그런 느낌, 아니면 나만의 독창적인 걸 혼까지 갈아 넣어 만드는 그런 사람이 떠오르는데 타우트의 의자 장인은 그런 사람이 전혀 아니어서 잔잔한 충격이었다. 타우트의 애제자가 되어 타우트가 의자 설계도를 너 만들라고 준다. 남이 준 도면의 물건을 정성을 다해 만드는 장인이라… 장인이지.. 장인인데 그간 생각해온 이미지랑 좀 다른 장인이었다.
2 26 사건과 2차 세계 대전 때 학도병으로 출병한 할아버지 이야기 할 때 잠깐 조마조마했다. 타우트가 일본의 건축을 진정으로 사랑해서 좋다고 하는 것도, 약간 조심스러웠고. 가장 일본적인 게 무엇인지 담아내려고 한 듯한 책인데 일본적임이 외부의 시선이나 평가에 의한 그런 느낌에 약간 새끼발가락을 걸친듯한 그런 느낌이 아주 조금 들었다. 책 내용상의 반전은 그다지 크지 않아서 끝까지 잔잔했는데 어딘가 아슬아슬한 느낌은 계속 들었다.
그리고 음 이 책 나름 장점이 기존의 일본 번역서랑 다르게 번역이 되게 괜찮다. 일본스러운 느낌에 거부감이 종종 드는데 그런 거 없었다. 일본적인 도코노마나 이로리같은 게 등장하는데도, 일본 이름과 지명이 나오는데도 일본 문학인 걸 잊고 읽었다.
이거를 몇년간 잡지에 연재했다가 7년간 대대적인 퇴고를 했다고 들었다. 다 뜯어고쳐 연재물이랑은 다른 느낌이었다고. 어쩐지 매 챕터마다 긴장을 놓지 않고 있어서 연재물 읽듯이 계속 잔잔한 긴장감이 들어 다음 이야기가 궁금했다. 사실 이야기는 하나 긴박한 것도 없고 그냥 좀 아름답고 잔잔한데 왜 다음 챕터가 궁금하냐고. 되게 잘 쓰인 책이라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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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12-29 13: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목도 표지도 사랑스러운 책인데 추리소설이었군요^~

Persona 2021-12-29 16:03   좋아요 2 | URL
건축가가 혼신을 다해 지어준 집이 훌륭한 건축물로 회자되는데요. 정작 그 집엔 의뢰인이 살지 않고 어디로 증발해버려요. 건축가는 그게 의뢰인이 자기를 기만하는 건지 아니면 집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건지 무슨일이 있는지 찾아가는 내용이긴 한데요. 본격 추리소설이랑은 좀 다른 느낌이어서 추리라고 생각하고 읽으면 실망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형사도 그럴듯한 추리도 없거든요. 다만 기자 출신이라 그런지 참고문헌이 엄청 많고요. 그런 거에 반해서는 조사해서 쓰는 작가들 특유의 대화문 속에서 썰로 풀어버리는 설명 좔좔좔은 없어서 그런 점이 상당히 괜찮아요. 정보량이 많은 작가들 글은 읽다 보면 피곤한데 이 책은 그렇지 않아서 완급조절 잘하는 작가 같고 자기가 아는 거가 아니라 필요한 썰만 푸는 작가 같았어요. 저도 말랑말랑 할 줄 알고 읽었는데 좀 긴장하게 되더라고요. ㅋㅋㅋ

그레이스 2021-12-29 16:06   좋아요 2 | URL
친절한 설명 감사드려요~
읽어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