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한참 사춘기인 열 살 차이 ‘망내삼춘’방에 들어가면 내가 큰삼춘이라고 부르는 대학생 작은 삼촌의 담배냄새. 그리고 뒤통수 퉁퉁한 도스 컴퓨터.
사춘기라 의사소통을 거의 안한 삼촌이지만 그래도 조카가 오면 컴퓨터를 비켜주었다. 나랑 커뮤니케이션은 별로 안했지만 그래도 한번도 짜증낸 적이 없다. 제일 많이 한건 뿌요뿌요인데 점점 요괴들이 가차없이 나를 패기 시작하고 테트리스가 끝까지 쌓이면 나는 포기하고, ‘삼춘, 망내삼춘 나 그거 틀어줘.’했다.
그럼 삼촌은 ‘그게’ 뭔지 알았다. 그래서 잠깐의 조작으로 한메타자 같은 타자기 글씨체로 씌여진 싯구가 하늘에서 라인 바이 라인으로 내려오고 만화풍 소녀 머리가 찰랑거리고 벚꽃잎 같은 게 떨어지거나 중국 치파오 같은 거 입은 소녀만화 캐릭터 같은 사람이 그려진 핑크핑크한 다리 같은 이미지가 반짝거리는 그런 걸 틀어줬다. 그때 연애 시 보는 재미를 들였던 거 같다. 그 플레이 되는 싯구 중엔 김현승의 ‘플라타너스’. 그 외는 봐야 기억남.

한 여서일곱 살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교과서 수록작품 외의 시는 이달이나 이옥봉의 한시가 아니라면 딱 세 명 것만 봤다. 서정윤, 원태연, 류시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물론 나 자체가 사랑이 참 희박한 인간이라 고등학교 땐 거의 안 읽었지만 초중학교 때는 반짝거리는 사쿠라 겔리롤과 향기나는 미피펜 따위로 내 형광핑크 6공 다이어리를 화려하게 필사하는 것만큼은 매우 재미나서 우악 간지러워어어어억 우엑 하면서도 거의 이 세권은 다 필사한 거 같다. 제일 혼을 빼고 봤던 건 친구들이 검은 종이에 흰색 펜으로 쓴 것들. 제일 큰 원을 그려봐, 그거 뺀 만큼 널 사랑하니 어쩌니 그거를 검은 바탕에 흰 펜으로 쓴 것만으로도 엄지 척. 나도 흰 펜, 은색펜, 부푸러 펜 사고 막.
당시 원태연 시집은 진짜 민병철이나 오성식 생활영어와 이보영의 특활영어, 이익훈어학원의 ap뉴스와 양대산맥으로 내 필사 재료 중 하나였다.
한편, 서점 가서 책 사면 받는 코팅된 수제 같은 책갈피엔 늘 귀여운 그림과 함께 서정윤 시가 적혀있었다. 한때 책갈피 속 시를 쓴 시인이었는데, 제자 성추행이라니 참;; 아무튼 당시엔 서정윤 시가 쓰인 책갈피가 집에 엄청 많았다. 논리야 놀자에 꽂아서 끼고 다녔지. 세상에서 제일 ~한/운 이야기 시리즈 책이랑. 그분 시 인기 많아서 같은 제목에 2붙은 시집도 나왔었는데. 고등학생 언니들 책 살 때 받는 그 책갈피 받으면 나도 막 갈래머리 하고 단발머리한 언니가 된 거 같은 기분 들고.

원태연 시집 다시 읽는 중인데 ㅋㅋㅋㅋ
첫 시부터 왠지 필사해야 할 것 같아. 김미숙과 김완선 같은 그 아이… 를 내가 왜 애틋해 하고 아련해 하냐고.
요즘같으면 쓸 수 없는 글도 꽤 있긴 한데 그런 건 그냥 넘긴다.

동전이 되기를
영원역까지
이별역
은 제목만으로도 무슨 시인지 생각이 나고

사랑하면 공휴일이 없을걸!
둘이 될 순 없어
서글픈 바람
슬픈 대답
초라한 이별
두려워
이별 후 (2+⭐️이 이별인줄 알았는데 ㅋㅋㅋ 숫자 도형 들어가면 무조건 좋아함ㅋㅋㅋ)
경험담 등등은 읽으면 바로 떠오른다.


Q. 90년대의 연인들은 이별하면 촛불 켜고 너만은 행복하기를 눈물 흘리며 기도했나요? 근데 어떤 초를 켜는 걸까.


하긴, 너를 내게 주려고 나를 혼자 뒀거늘, 둘이 되어 버린 날 잊은 것 같은 너의 모습에 우리 여기까진가 죽어도 난 아닌가 절규하다가 너만을 느끼며 달콤한 내 사랑을 전하려고 내 눈물의 편지 하늘에 닿기를 기도하면서, 왜 하늘은 널 데려가는지 한탄하다가도 하늘에 대고 괜찮은 거니 어떻게 지내는 거야 묻는 것이 세기 말 눈물버튼이었으니 어떤 초를 켜든 그냥 이별의 키워드. 원래 사랑은 창밖의 빗물이고 이별 장면에서는 항상 비가 오는, 아무튼 슬픈 것이다.



시집 읽다보면 드는 오글오글 몽글몽글한 이런 감정 사실 시집으로만 겪어본 거 같고, 현실은 문학 경시 풍조가 있는 공대에 너무 오래 있었던 거 같다. 그림을 그려도 이과 출신들이랑 주로 모이게 되고. ㅠㅠ
나는 달고 느끼한 거 좋아하니까. 잔뜩 한 사발 가능. ㅋㅋㅋ 마냥 달고 느끼하다기 보단 시대가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좋아했던 드라마도 지금 보면 말도 안 될 걸 생각하면서 보려고 한다.

아무튼 반갑다!


내년에 삼십주년 되는 거죠? 와 벌써 삼십주년. 축하합니다. 시인님.

읽을 땐 남주희와 박선영과 김현정(다 돌려놓는 분 말고 광끼 나오셨던)과 최강희를 떠올리며 읽었는데, 책을 덮으니 왠지 채시라와 오연수와 김희애와 김혜수와 최진실과 하수빈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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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11-25 07: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는 만약 지금 원태연 시를 처음 접했다면 이게 시냐면서 막 뭐라 했을 것 같은데 사춘기 때 봐가지고 ㅋㅋㅋ 너무 좋아했네요. 크- 원태연 때문에 대학도 경희대를 가고 싶었는데... 못갔네요? 껄껄.
고등학교때는 체육 교생 쌤이 여자분이셨는데 경희대에서 오셨더라고요. 선생님 원태연 알아요? 물어보니 네 친구에요, 라고 하셔가지고 꺅꺅 거렸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Persona 2021-11-25 10:02   좋아요 1 | URL
공감해요. 지금 같으면 못 읽었을지도 몰라요. ㅎㅎㅎ 저도 경희대 목표였는데 그러고 보면 원태연 시인 때문에 진짜로 경희대 가신 분도 있으실 거 같아요. ㅋㅋㅋ
와 친구이시라는 선생님 분 장난 아니네요. ㅎㅎㅎ그때 들었음 너무 신나고 좋았을 것 같아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