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 성수동에 있는 서울숲에 갔을 때,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진을 찍고 있는 곳이 있었다. 멀리서 볼 때 대나무 숲 같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곳은 은행나무 숲이었다. 나무를 촘촘히 심어(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대나무처럼 기둥이 가늘고 하늘로 곧게 뻗어 있었다. 새삼스레 생명을 가진 것들이 얼마나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지 실감했다.

 

하루하루 평범하고 되풀이되는 일상을 지내는 나에게 책은 가장 재미있고 스펙터클함을 준다. 책은 아무리 많이 읽어도 지겹거나 힘들지 않다. 좋아하기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꾸준하게 읽는다. 책을 읽을 때마다 이 세상에 어찌 이리 다양한 이야기가 있는지 감탄한다. 그 많은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쌓여있다는 생각을 하면 행복하다.

 

이제 책은 나를 둘러싼 단단한 환경이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내 나이가 노년이라고 분류되는 곳에 다다르지만 책은 여전히 나를 성장하게 한다. 은행나무가 대나무처럼 자라듯 나 역시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변화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엇이든 기대된다. 책은 나를 완고하지 않고 세상에 등 돌리지 않게 해 줄 것이다. 프랑스 화가 라울 뒤피의 말처럼 삶이 나에게 미소 짓지 않아도 내가 언제나 삶에 미소 짓는 사람이 되도록책이라는 환경이 나를 성장시켜 줄 것이라 믿는다.



 

 

 

 

 

 

 

 






올해 읽었던 책 중 가장 좋았던 소설이다.

 

한강 작가는 우리가 지나온 세상을 외면하지 않는다. 고통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아무리 이해해도 내가 겪어보지 못한 고통은 나에게 온전하게 다가 올 수 없다. 작가는 섣부르지 않게 우회적으로 그들의 얘기를 들려주었지만, 내 몸이 찔리는 느낌을 받았다. 프랑스 메디치 문학상 수상을 축하한다.

 

윌리엄 트레버 작가의 단편들을 읽으며 계속 먹먹한 감정이 들었다. 나는 슬픈 것보다 먹먹한 것이 더 아프게 느껴진다. , 지나온 인생, 상처와 고통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외롭게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모습들이 서글펐다. 그렇지만 내면의 단단함과 삶을 관조할 수 있는 힘이 좋았다. 이래저래 인생은 공평하다.

 

올해 처음 안톤 체홉 작가의 단편 소설과 희곡 작품을 읽었다. 트레버의 단편이 성실하고 정중한 느낌이 난다면 체홉의 단편은 역동적이었다. 악동의 이미지도 있었고, 유머러스했으며 정치적이기도 했다. 이쪽과 저쪽, 경계를 넘나들며 인간 심리를 절묘하게 묘사했다. 한 작가의 작품을 읽으며 이렇게나 다양한 감정이 들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새로운 작가와의 만남은 언제나 멋있다.


2023년의 마지막 날에 가족들과 영화 노량(마침 무대인사도 있었다.)을 보았다


무엇을 위해 인간은 저렇게 전쟁을 일으키고 서로를 죽여야 하는지....

이 세상에 평화만 있으면 좋겠다.

 

2024년에는 알라딘 서재의 친구들처럼 나도 하루 36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집중하겠다.

 

여전히 똑같은 결심도 한다. 집에서 잠자고 있는 책을 읽고, 죽을 때까지 책을 읽을 수 있도록 건강에 신경 쓰며, 책을 읽는 만큼 좋은 사람이 되는 것.

 

알라딘 서재 친구 분들께 감사드리고, 2024년에도 열심히 배우고 따라가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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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1-01 05: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햐 복 많이 받으세요!!

페넬로페 2024-01-01 09:49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루피닷 2024-01-01 05: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페넬로페 2024-01-01 09:53   좋아요 2 | URL
루피닷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독서괭 2024-01-01 0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는 의미에 관한 멋진 글이네요! 페넬로페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페넬로페 2024-01-01 09:55   좋아요 1 | URL
독서괭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귀여운 두 꼬맹이들도 건강하고 행복한 2024년이 되도록 기원하겠습니다^^

거리의화가 2024-01-01 0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평화로운 2024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페넬로페 2024-01-01 09:57   좋아요 0 | URL
거리의화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언제나 평화를 빕니다.
올해 화가님의 하루는 48시간이 되는 거 아닙니까? ㅎㅎ

cyrus 2024-01-01 1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 서울에 가게 되면 서울숲에 가보고 싶군요. 페넬로페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

페넬로페 2024-01-01 13:18   좋아요 0 | URL
서울숲이 사람 친화적이고 아기자기하더라고요.
cyrus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2024년, 만사형통하십시오^^

미미 2024-01-01 11: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일이 되니 저도 이런저런 다짐을 하게되고 설레네요. 페넬로페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페넬로페 2024-01-01 13:19   좋아요 2 | URL
1일의 다짐이 365일이 되도록 열심히 노력해봐야겠어요.
미미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하시길요^^

2024-01-01 12: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올해의 소설 중 체호프의 책에 대한 평이
제일 끌리네요. 나중에 읽어봐야겠어요.
페넬로페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페넬로페 2024-01-01 13:20   좋아요 2 | URL
쥬 님에게도 체호프의 작품이 좋았으면 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감 하십시오^^

서니데이 2024-01-01 18: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오늘부터 2024년입니다.
새해에도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한 시간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새해복많이받으세요.^^

페넬로페 2024-01-01 22:59   좋아요 2 | URL
네, 2024년이 시작되었어요.
올해도 열심히, 즐겁게 살겠습니다.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은오 2024-01-01 2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향한 페넬로페님의 사랑이 듬뿍 담긴 연말 페이퍼...🥹
저는 올해 윌리엄 트레버를 꼭 읽어보려고요 >.<
페넬로페님! 한 해 동안 감사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내년에도 페넬로페님 따라서 열심히 읽겠습니다. 헤헤. 계속 같이 놀아주실거죠? 😍😍

페넬로페 2024-01-01 23:02   좋아요 1 | URL
작년에 멋지고 풋풋한 은오님 덕분에 즐거웠어요.
올해도 우리 신나게 놀자고요, ㅎㅎ
은오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원하는 일 다 이루시기 바래요.
알죠?
계속 응원하고 있다는 것요!

은오 2024-01-02 21:44   좋아요 1 | URL
네!!!!! 😘😘😘😘😘

책읽는나무 2024-01-01 22: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페페 님.^^

페넬로페 2024-01-01 23:11   좋아요 1 | URL
제가 책나무님 안부를 먼저 여쭈어야 하는데 늦어서 죄송해요.
책나무님께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평안하세요.
친정 아버님께서도 얼른 쾌차하시길 기도 드리겠습니다.
만복, 만희 자매들도
만복과 만희하기를 기원합니다^^

희선 2024-01-02 0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 님 식구들과 영화 보셨군요 이순신 이야기 마지막 <노량>... 전쟁은 인류가 생겼을 때부터 했을까요 그랬을 것 같네요 평화로운 세계가 되면 좋을 텐데...

페넬로페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24년에 만나고 싶은 책 많이 만나세요 몸뿐 아니라 마음 건강도 잘 챙기세요


희선

페넬로페 2024-01-02 05:44   좋아요 1 | URL
영화 <노량>은 이순신 3부작 중 마지막 이야기인데 약간 실망되는 부분도 있더군요.
희선님 말씀처럼 몸과 마음 둘 다 잘 챙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4-01-02 06: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이 꼽으신 세 작품 다 제가 너무 좋아하는 작품들이네요 ㅋ 왠지 뿌듯합니다~!! 페넬로페님 24년에도 화이팅 입니다~!!!

페넬로페 2024-01-02 12:13   좋아요 2 | URL
알라딘 서재에서 독서취향이 비슷한 친구를 만난다는 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행복한 것 같습니다.
올해도 새파랑님을 잘 따라가겠습니다^^

자목련 2024-01-02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널로페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좋은 책과의 만남도 이어가시고요^^

페넬로페 2024-01-02 12:15   좋아요 0 | URL
자목련님, 감사드립니다.
올해도 더불어 열심히 책을 만나겠습니다.^^

레삭매냐 2024-01-02 1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집 읽다 말았는데
다시 도전을 !

페넬로페님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페넬로페 2024-01-02 13:05   좋아요 1 | URL
레삭매냐님, 감사합니다.
<마지막 이야기들> 좋았습니다.
작가들은 왜 이리 글을 잘 쓰는지요 ㅎㅎ

얄라알라 2024-01-02 20: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께서 올려주신 서울숲 사진 예술인데요.
몇 번 가본 적은 있어도 울창하다는 생각을 별로 안 해봤는데 사진의 느낌은 꽤 달라요^^

페넬로페님의 36시간, 그리고 꽉 차고 풍성한 2024년을 응원드립니다

페넬로페 2024-01-02 21:26   좋아요 2 | URL
서울숲에 가는 계절과 시간에 따라 달라 보일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루 36시간이 되도록 열심히 살겠습니다.
얄라알라님께도 건강하고 행복한 2024년이 되시면 좋겠어요^^

그레이스 2024-01-02 20: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기 물안개 끼면 정말 환상적이죠!^^

페넬로페 2024-01-02 21:26   좋아요 1 | URL
물안개는 어느 계절에 잘 끼일까요?
그때 같이 가요, 그레이스님!

그레이스 2024-01-02 22:27   좋아요 1 | URL
네!
사진 찾아보니 겨울이었던듯 하네요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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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먹고, 입고, 자고 쉴 수 있는 공간, 사람이라면 해야 할 당연한 행동, 예컨대 주머니에 남아있는 잔돈 정도는 가난한 사람에게 주저하지 않고 줄 수 있는 마음,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것에는 화내고 맞서야하는 용기, 웬만하면 나와 관계를 맺는 사람들과 척을 지지 않고 사는 것-은 중요하지만 너무 당연해 사소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사소하게 보일 정도로 기본적인 것을 일상적으로 유지하기가 쉽지 않고, 많은 사람들은 이 조차도 갖지 못해 매번 허덕이며 살아간다.

 

빈주먹(p.15)으로 태어났지만 운 좋게 석탄목재상으로 빚 없이 그럭저럭 살게 된 빌 펄롱은 아내와 다섯 아이를 둔 가장으로, 가정을 굳건히 지키기 위해 주위의 모든 것을 모른 척하며 눈을 감고 살아야 한다. 1985, 아일랜드의 경제가 혹독하게 힘들었을 때, 자칫하면 모든 걸 다 잃을 수 있는 시기였을 때, 그나마 따뜻하게 살고 있는 펄롱이지만 그의 마음은 언제나 편치 않다.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며 그에 따른 가책을 느낀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강제 세탁소(수용소)’를 소재로 했지만 그 내용보다는 빌 펄롱이라는 인물의 마음과 생각을 함께 따라가고 느끼며 읽게 된다. 매 페이지마다 멈춰 사람 사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하게하며, 거기에서 오는 수많은 상념과 심란함으로 한숨이 쉬어졌다. 밤마다 잠에서 깨어 자신을 돌아보고 고민하는 펄롱의 양심, 별로 잘나지도 않은 인생에, 자신에게 주어진 더 나아질 것 같지도 않은, 보잘 것 없는 딱 그만큼조차 잃지 않고 지키기 위해, 침묵하고 모른 척 하며 살아야 하는 삶에 대한 회한이 나의 고민과 다르지 않았다.

 

펄롱의 딸들이 다니는, 다른 딸들도 앞으로 다니기를 원하는 세인트마거릿 여자 중학교와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직업 여학교와 세탁소는 선한목자수녀회가 운영하는 곳이다. 말이 여학교이지 사실 이곳은 교화를 목적으로 들어 온 가난한 어린 미혼모들이 갇혀서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더러운 세탁물에서 얼룩을 씻어내는 노동을 하는 수용소에 가까운 곳이었다. 이들이 낳은 아기는 미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로 돈을 받고 보내진다. 선한 목자라고 이름 붙여진 곳에서 아이를 팔아먹고 돈을 버는 것이었다.

 

종교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하루 세 번 울리는 종소리에 일손을 멈추고 드리는 삼종 기도에 사람들은 하느님께 무엇을 기도하는가? ‘너희 가운데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에게 해 준 것이 내게 해준 것이다라는 그리스도의 말을 뉴로스의 사람들은 무시한다. 아일랜드 모자 보호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았으면서도 그들은 침묵했으며 자신들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미시즈 케호가 말했다.

하지만 자네 정말 열심히 살아서, 나만큼이나 열심히 해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 딸들도 잘 키우고 있고, 알겠지만 그곳하고 세인트 마거릿 학교 사이에는 얇은 담장 하나뿐이라고.”

-p.106]

 

얇은 담장 하나처럼 삶을 떠받치는 것이 불안정한 사람들에게 그 얇음은 언제라도 깨지기 쉽다. 그나마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뒤를, 주위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권력자의 눈 밖에 나서도, 알고 보면 다 한통속(p.117)’인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서도 안 된다.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하찮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을 쉽게 비난할 수도 없다. 그것이 거의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펄롱은 나랑 같이 집으로 가자, 세라.(p.116)”라고 하며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했지만 확신하지 못하고 마음의 갈등을 느낀다. 사람들의 싸늘한 태도에 신경 쓰고, 최악의 상황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며 고생길을 예상하며 그냥 그만 두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그럼에도 신발도 신지 않은 세라를 데리고 나오는 그의 마음은 편해진다. 펄롱의 선택에 나는 무조건적인 응원을 보내지는 못했다. 펄롱이 자라오면서 받은 도움과 그것에 대한 빚을 갚고자 하는 그의 선택이 가져 올 좋지 않을 대가가 고스란히 그의 가족에게 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펄롱이 먼저 함으로써 세상이 서서히 달라질 것임을 믿는다.

 

[펄롱은 차를 세우고 노인에게 인사를 했다.

이 길로 가면 어디가 나오는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이 길?” 노인은 낫으로 땅을 짚고 손잡이에 기댄 채 펄롱을 빤히 보았다.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p.54]

 

우리는 모두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

어디로 갈 것인지, 어떤 길을 선택할지는 각자의 몫이다.

 

작가 클레어 키건의 하지만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소녀와 여성이 수감되어 강제로 노동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거의 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질문(경향신문, 2023, 12, 08)”에 대한 답과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p.24)’ 마음이 불편하고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침묵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조그만 것이라도 용기 내어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펄롱을 나락에 빠뜨리지 않는 것이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p.119]


-사진 출처(경향신문, 2023.12.08., 임지선 기자),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세탁소(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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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12-25 15: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페넬로페님...성탄절의 참된 의미가 새삼 무겁습니다 오늘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페넬로페 2023-12-25 16:05   좋아요 2 | URL
마침 이 책의 배경도 크리스마스이고 지금 우리도 성탄을 맞이하고 있어 그 의미가 새로웠습니다.
작가가 주는 메시지가 의미 있어 좋았어요
서곡님께서도 남은 연휴, 잘 보내시길 바래요^^

꼬마요정 2023-12-26 00: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아프네요. <맡겨진 소녀>도 맘이 좀 아팠지만 이 책은 더 아플 것 같아요. 읽어보고 싶네요.

페넬로페 2023-12-26 05:10   좋아요 2 | URL
네, 짧은 분량이지만 의미가 많이 담긴 책이라 좋았어요.
맡겨진 소녀와도 통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서니데이 2023-12-26 06: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연휴 잘 보내셨나요.
클레어 키건의 이 책 출간 소식은 들었는데, 이번에는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거군요. 아일랜드가 지금은 소득이 높은 나라지만, 예전에는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운 시기가 있었다고 들었어요. 크리스마스 시기가 등장해서 그런지, 연말에 읽으면 좋을 것 같기도 합니다.
잘읽었습니다. 따뜻한 연말 보내세요.^^

페넬로페 2023-12-26 10:30   좋아요 2 | URL
지금 아일랜드의 경제가 엄청 좋다고 하는데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것 같은 느낌도 들고요.
실제 사건을 소재로 했는데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할 수 있어 좋았어요.
서니데이님!
따뜻한 연말 인사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얼음장수 2023-12-26 1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수영의 시도 떠오르고 여러가지를 생각나게 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페넬로페 2023-12-26 10:33   좋아요 1 | URL
김수영의 시 구절이 떠오르네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었습니다^^

자목련 2023-12-26 10: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짧은 분량이라 읽는 건 바로 읽었는데 리뷰는 못 쓰고 있어요. 어쩌면 쓰지 못할 것 같기도 하고. 아직은...

페넬로페 2023-12-26 10:34   좋아요 1 | URL
짧은 분량인데 저도 이 글 쓰는데 며칠 걸렸어요.
그래도 자목련님의 리뷰 읽고 싶어요^^

페크pek0501 2023-12-26 15: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완독까지는 하겠는데 정말 리뷰를 완성하는 건 힘든 작업입니다.
페넬로페 님의 리뷰 완성을 응원하는 바입니다.^^

페넬로페 2023-12-26 17:54   좋아요 2 | URL
정말요.
책을 읽기는 쉬운데 매번 리뷰 쓰기가 너무 힘들어요.
페크님의 응원으로 더 열심히 읽고 글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독서괭 2023-12-26 17: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으아 쉽지 않은 소설이군요. 여학교를 빙자한 세탁소라니 으 ㅜㅜ 얼마전 읽은 <바람의 열두 방향> 속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 생각나네요. 모른 척 하고 지내는 편안함을 버리고, 어려운 길로 나선 펄롱이 대단합니다.

페넬로페 2023-12-26 17:57   좋아요 1 | URL
읽기는 쉬운데 매 페이지마다 얼마나 많은 의미가 들어 있는지, 클레어 키건 작가가 대단해 보이더라고요.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과 의미가 통하네요.
우리들을 대신해 누군가가 희생해 주는 것이 이 시대에도 많은 거겠죠 ㅠㅠ

미미 2023-12-26 18: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공감가는 대목들이 여럿 보입니다.
어제 용기에 관해 책에서 읽는 문장들도 떠오르고요. (하워드 진) 페넬로페님 별5개 주셨으니 저도 내년에 꼭 읽어보고싶네요~♡
연말 웃음가득하시길 바래요🙆‍♀️

페넬로페 2023-12-26 21:21   좋아요 2 | URL
책을 읽으면 주먹을 불끈 지지만 막상 용기를 내야 할 때엔 숨기 바쁜 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책을 읽으며 매번 달라져야 할텐데요 ㅠㅠ
미미님의 덕담으로 더 한층 웃음짓는 페페가 되겠습니다^^

희선 2023-12-28 0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일랜드에서는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하고는 수녀원 같은 데서 일을 시키고 낳은 아이는 다른 나라로 입양 보내기도 했더군요 그걸 종교라는 이름으로... 막달레나 강제 세탁소는 실제 있었던 곳이기도 하군요

그런 곳이 있으면 있는가 보다 하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 살기도 바쁠 테니... 펄롱은 그런 걸 아주 모르는 척하지 않았네요 그런 거 쉽지 않을 듯합니다


희선

페넬로페 2023-12-28 17:41   좋아요 1 | URL
보수적인 생각이 사람을 구속시켰고, 비참하고 폭력적으로 변질된 것 같습니다.

모른척하고 살지 않는 것, 정말 쉽지 않죠^^

캐모마일 2023-12-30 2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일랜드 막달레나 수용소 영화로 만들어지고 역사, 미스터리 유투브로도 많이 봤습니다. 소설 제목이 낯익지만 그 내용일 줄은 몰랐네요. 장바구니에 넣어둡니다.

페넬로페 2023-12-31 00:49   좋아요 1 | URL
캐모마일 님께서는 벌써 알고 계셨네요.
저는 이 소설을 통해 알게 되었고
‘필로미나의 기적‘이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어요.
다른 영화도 있는 건가요?
유튜브로도 봐야할 것 같아요^^

책친놈 2024-03-20 1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첫문단 부터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너무 당연해서 사소하다고 생각하는것들을 되짚어보게 하는 책이었어요. 저는 책의 후반부에 ‘왜 가장가까이있는게 가장 보기 어려운걸까?‘라는 부분에서 <이처럼사소한것들> 이라는 제목과 맞물린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덕분에 책에대한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이라 잘 보고갑니다. 읽고서 리뷰 쓰는걸 미뤄와서 반정도만 쓰고 저장해놨는데, 페넬로페님 리뷰보고 오늘 꼭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ㅎㅎㅎ

페넬로페 2024-03-20 12:13   좋아요 1 | URL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라는 제목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더라고요.
펄롱을 통해 저의 삶도 한 번 되돌아 볼 수 있었고, 사회적 이슈들과 약자들에 대해 회피하고 무관심한 것에 대한 반성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다 이처럼 사소한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더라고요 ㅎㅎ,ㅠㅠ
책친놈 님의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원인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20세기 근대화 과정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아닌 서구 주도로 이루어진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의 문화적 유산은 과거의 진부한 것으로 치부되며 단절되었습니다. 반면 서구의 문물은 새롭고 진보된 것으로 여겨지며 적극적으로 수용되는 현상이 20세기 내내 일어났죠. 그런 근대화 현상은 서구에서 만든 것이 우리가 만든 것보다 좋다는 착오를 만들었습니다.
그런 근대화의 잔재는 현재까지도 사회문화 전반에 남아 있으며, 미술에 대한 인식에도 역시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미술하면 (이상하게도자꾸만) 서양미술을 먼저 떠올리고, (이상하게도 자꾸만) 서양미술만 즐기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비판적으로 판단해볼 겨를 없이 문화적, 예술적 편식이 생기고 만 것입니다. - P6

뛰어난 미술가는 현재가 아닌 내일의 시대정신을 예리하게 감각해작품에 담아냅니다. 고로 뛰어난 미술가의 작품은 내일을 선취하고 또예견합니다. 오늘날의 미술이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세계 역시하나가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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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23-12-24 1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따뜻한 이웃을 만난 2023년을 기억하겠습니다. 청안하시길 바랍니다.

페넬로페 2023-12-24 12:40   좋아요 0 | URL
무한냥님, 감사드려요.
‘청안‘이라는 말을 항상 기억하겠습니다.
크리스마스 즐겁고 행복하게 잘 보내십시오^^

페크pek0501 2023-12-26 15: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뛰어난 저술가들은 미래를 예언하더군요. 소로우의 <월든>을 읽으면서도 한 생각입니다.^^

페넬로페 2023-12-26 17:58   좋아요 1 | URL
그것이 예술가의 위대함 같습니다~~

서곡 2023-12-31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오늘 밤 안녕히 주무시고 내일부터 새해 잘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4-01-01 03:29   좋아요 1 | URL
서곡님!
감사드립니다.
2024년에도 책을 통해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건강 기원하겠습니다^^
 














사마천의 사기 세가(史記世家) 중 진 세가(晉世家)뽕나무 아래의 굶주린 자에 의해 목숨을 구하다에 나온 내용이다. 조순(趙盾)은 양공과 영공(靈公) 때에 정권을 잡았다. 조순이 사냥을 나갔을 때, 뽕나무 아래에 굶주린 사람(시미명)이 있는 것을 보고 밥과 고기를 주었다.

 

사치스럽고 성정이 나쁜 영공은 간언하는 조순을 근심거리로 여겨 조순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병사를 매복시켜 죽이려고 했다. 영공의 주방장이 된 시미명은 조순이 떠나가게 해 화가 미치지 않도록 했다. 병사들은 조순을 죽이려고 맹견을 풀어 놓았는데 시미명이 개를 묶어 죽였다. 병사들이 조순을 뒤쫓아 죽이려고 했지만 시미명이 반격을 가하고 조순은 탈출했다. 조순은 그제야 그를 도와 살려준 사람이 뽕나무 아래에서 굶주리고 있던 시미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도망간 조순은 국경을 벗어나기 전에 사촌동생 조천으로 하여금 영공을 시해하게 하고, 영공이 죽자 양공의 동생 성공(成公)을 추대하였다. 조순은 다시 돌아와 국정을 맡게 되었다.

 

 

사기 세가 중 조 세가(趙世家)아이 울음소리에 종족의 존망이 달려 있다에 나온 내용이다. 조순이 죽고 그의 아들 조삭(趙朔)이 뒤를 이었다. 삭은 성공의 누이와 결혼하였다.

 

성공이 죽고 그의 아들 경공(景公)이 왕이 되었다. 경공 3, 대부 도안고(屠岸賈)가 조순이 영공을 시해했다는 이유로 그의 아들 조삭을 주살하려고 했다. 한궐은 반대하고 조삭에게 달아나라고 했지만 조삭은 조씨 가문의 제사를 끊어지게 하지 않기만을 당부하고 죽었다. 도안고는 조삭의 씨족을 모두 죽였다. 임신하고 있었던 조삭의 아내는 그때 아들을 낳았는데 도안고가 아이를 찾아내려고 했다.

 

[조삭의 아내인 공주는 갓난아이를 속바지 가랑이 사이에 넣고는 축원하여 말했다.

조씨 종족이 멸망하려면 네가 큰 소리로 울고, 멸망하지 않으려면 아무 소리 내지 마라.”

{아이를} 찾아내려 했을 때 아이는 결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p.477, 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사기세가, 진세가, 민음사]

 

다행히 울지 않아 아이는 살아났지만 도안고는 포기를 모르고 아이를 찾아 죽이고자 했다. 조삭의 문객 중 공손저구(公孫杵臼)는 조삭의 친구 정영(程嬰)에게 고아를 부탁하고 다른 사람의 아이를 조씨의 고아라 속이고 아이와 함께 죽었다. 정영은 진짜 조씨 고아와 산 속에 숨어 있었다.

 

15년이 지나고 경공이 병이 들어 점을 쳐 보니, 후대가 제사를 제대로 지내지 않아 재앙이 생긴다고 해서 한궐과 의논하여 이름이 무()인 조씨 고아를 데려 온다. 여러 장수들은 정영, 조무와 함께 도안고를 쳐 그 종족을 멸한다. 정영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조무는 정영을 위해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대대손손 끊어지지 않게 했다.

 

(*사기 세가의 내용은 민음사 판 사기세가진세가(p.315~327)’조세가(p.474~481)’에서 발췌, 정리하였습니다.)

 

 

 

중국 원나라 희곡 작가 기군상(紀君祥)의 작품인 조씨 고아는 사기의 진 세가와 조 세가의 내용을 토대로 한 비극 작품이다. 조씨 고아의 주인공은 정영이다. 이야기는 배경을 생략한 채, 도안고가 사이가 좋지 않은 조순을 해치려는 것으로 시작한다. 도안고는 조순의 삼백 명이나 되는 일족을 모두 죽인다. 조순의 아들 조삭은 부마였는데, 임신하고 있는 공주에게 아이의 아명을 조씨 고아라 지어주고 원수를 갚아 달라 유언하고 죽는다. 공주는 떠돌이 의원인 정영에게 조씨 고아를 맡기고 자살한다.

 

조씨 고아는 복수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나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 복수 비극인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과는 결이 다르다. 동양의 정서가 많이 가미되어 있는 이 희곡에는 자신의 욕망보다는 한 집안의 복수를 위한 씨앗 하나를 살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해할 수 없는 희생이 주를 이룬다. 한 아이를 살리기 위해, 단지 조씨 집안의 복수를 위해 정영을 비롯해 모든 사람이 죽음을 불사하고도 아이를 살리려고 한다.

 

기군상은 사기 세가에 없는 내용을 절절하고도 절묘하게 희곡에 넣는다. 정영은 마흔 다섯이 되어서야 귀한 아들을 보았는데 그 아들을 조씨 고아라 속여 대신 죽게 하고 자신은 20년 동안 조씨 고아를 돌본다.

 

조씨 고아(정발)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정영은 예전에 억울하게 죽었던 충신과 명장을 한 권의 두루마리에 그려 내 그동안의 일을 정발에게 자세히 알려 준다. 정발은 이러한 사실을 주공에게 알리고 왕은 도안고의 집안 일족 가운에 어린 아이 하나 남기지 말고 다 죽이라고 한다.

 

[정발이 노래한다.

 

<탈포삼(脫布衫)>

저놈(도안고)을 형틀에 목 박아 형장에서 끌어내되,

바로 목을 치고 가슴을 쪼개지는 말라!

저놈을 다지고 다져 한 움큼

고기즙으로 만든다 해도,

내 가슴 가득한 이 울분은

결코 지워 버릴 수 없으리라!

p.112]

 

도대체 복수가 무엇이기에 저렇게 많은 무고한 사람이 죽어야만 하는가? 정영이 무엇을 위해 자신의 아이를 희생하면서까지 조씨고아를 살려야 했는지 이해가 잘 안 된다. 조씨 고아가 장성해 행한 복수는 결국 도안고 일족 전체를 죽이는 것이었다. 조씨 고아 또한 나머지 삶을 사는 내내 그들에게 또다시 복수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해야 하고, 그들에게 남겨진 마지막 씨앗이 있는지를 계속 의심해야 할 것이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그것은 끝이 없다.

 

기군상의 희곡은 셰익스피어나 고대 그리스 비극보다 훨씬 가독성이 좋았고, 많은 것이 생략되고 절제되어 있지만 거기에 들어있는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어 좋았다. 설자(楔子)가 있어 계속 내용을 복기시켜 주었고, 고대 그리스 극의 코러스 역할과 비슷한 노래()가 배우의 마음을 표현해 주었다.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 조씨고아의 연출가 고선웅의 연출과 각색은 너무 좋았다. 고선웅 연출가는 기군상의 원대(元代) 희곡 내용 중 현대인이 잘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을 거의 완벽에 가까운 수준으로 각색해 관객을 이해시켜 주었다.

 

또한 기군상이 정영의 자식을 등장시켜 사기 세가의 내용을 뛰어 넘는다면, 고선웅은 거기에 더해 정영의 아내를 등장시켜 훨씬 더 절절하고 먹먹하게 기군상을 기절시켜 버린다. 정영이 조씨 고아와 자신의 아들을 바꾸기 위해 집으로 왔을 때, 그의 아내는 정영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말 억울해 한다. 그런 마음을 담은 정영의 아내의 절규, 남편에 대한 실망과 원망, 그럼에도 기어이 아이를 데리고 나가 죽임을 당하게 할 때, 모든 관객이 울었다. 내 옆의 남자 분은 정말 많이 울더이다.

 

20년 동안 조씨 고아를 길러내고 도안고에 대한 복수가 마무리 되었을 때, 정영은 이제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구나라고 말한다. 늙어빠진 왕은 조씨고아에게 도안고 일족 모두를 죽여주겠다고 하고, 남은 뿌리조차 없도록 하겠다고 할 때 정영은 허탈하게 왕을 바라본다. 권력과 욕망, 인간의 삶 모두가 부질없고, 인생은 잠깐뿐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느끼게 해주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끊임없는 전쟁이 생각되는 순간이었다.


이번 연극에서 하성광배우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드라마 며느라기에서 약간 얄미운 작은 아버지역으로 나온 분이었다. 정영을 연기한 하성광 배우는 연기를 신들린 것처럼 했다. 딱 정영이었다. 그가 아내에게 자신의 아들을 기어코 빼앗아 오는 장면, 자기 아들의 무덤에서 뼛가루(의견이 분분하다)를 칠하는 모습, 조씨 고아에게 두루마리를 펼쳐놓고 그 간의 사연을 얘기하는 연기를 넋을 잃고 보았다. 커튼콜 때 나를 포함한 관객의 기립박수는 그의 연기에 대한 아낌없는 칭찬과 감탄이었다. 심지어 나는 아이돌 가수의 팬처럼 큰 소리로 환호했다.

 

조씨고아마지막 장면에서의 그의 대사가 묵직하게 마음에 남는다.

 

[이 세상은 꼭두각시의 무대

북소리 피리소리에 맞추어 놀다보면

어느새 한 바탕의 짧은 꿈

갑자기 고개를 들어 보니 늙었네

이 이야기를 거울삼아 알아서 잘들 분별하시기를

우환을 만들지도 당하지도 마시고

부디 평화롭기만을

금방이구나 인생은

그저 좋게만 사시다 가시기를]


연극을 보고 나오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한 감정의 카타르시스의 실현이 떠올랐다. 어떤 씻김굿을 하고 나온 기분도 들었다. 사람 사는 것이 늘 거기서 거긴데, 왜 매번 내 마음엔 미움이 싹트고, 분노와 욕망이 생기는지....다 부질없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부터라도 마음에 담고 있는 타인에 대한 미움을 없애고, 용서하고 용서받고, 욕심내지 말고 살기로 결심했다.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설치된 저녁 어스름의 명동은 활기찼다. 나를 포함한 그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지금 전쟁을 하고 있는 세상의 모든 나라가 전쟁을 멈추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복수는 그저 허무한 복수를 낳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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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12-14 18: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선웅 연출 믿고 본다고^^ 저는 2019년 오페라를 봤었습니다. 조씨고아전 정말 재밌겠어요. 원작과는 다른 각색을 보는 것이 연출의 힘인 것 같습니다!

페넬로페 2023-12-14 18:52   좋아요 1 | URL
고선웅 연출가가 뮤지컬도 연출했군요. 좋았을 것 같아요. 조씨고아는 원작도 괜찮았는데, 연극이 넘 좋았어요.
먹먹하고 재미있고~^
연출과 배우의 연기가 잘 어우러졌더라고요.

Falstaff 2023-12-14 18: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조씨고아>는 을유세계문학전집 78번으로 나온 <원잡극선>에 나옵지요. 물론 여러가지 판본이 있겠으나 어느 것을 읽어본들 원래 텍스트가 조금 낡았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을 거 같습니다.
그래도 중국의 현대극이 부러운 건 계속해서 과거 행적을 지양하려고 다양한 모색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민음사 <사기세가>는 조심해서 읽으셔요. 역자 김원중이 설마 그랬겠습니까만 의심스러운 곳이 하필이면 중요한 곳에 있더라고요. 교정/교열할 때 잘못한 거겠지요.

페넬로페 2023-12-14 18:58   좋아요 1 | URL
을유판 조씨고아도 있군요. 찾아봤더니 무려 836페이지네요.
번역자가 다르니 한 번 읽어봐야 겠어요.
원작의 내용은 현대인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죠. 그냥 그것이 주는 의미가 무언지 생각하고 배워야 될 것 같아요.
제가 사기세가를 읽을 때, 번역가의 진의를 알 만큼의 소양을 갖추지 못했어요 ㅠㅠ
그저 주는대로 받을 수밖에요.
그러니 폴스타프님께 언제나 의탁하고 있습니다.
잘 이끌어 주십시요^^

꼬마요정 2023-12-14 19:12   좋아요 1 | URL
<사기세가> 어떤 부분인가요? 요새 조금씩 읽고 있습니다. 혹시 <사기본기>에는 없나요? 좀 반항심이 드는 부분이 있긴 했거든요...

Falstaff 2023-12-15 05:51   좋아요 2 | URL
페넬로페 님: 을유판 읽으실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836페이지에 달하는 원나라 시대 곡曲 대본입니다. 원곡이 베이징 오페라라고 하는 북경 경극의 원류라고 하지만 천년 전의 뻔한 스토리라서 읽어보시라고 권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도서관에서 보신다면 좋을 듯합니다.
꼬마요정 님: 민음사에서 한문을 배우지 않은 세대, 중국사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이 교정, 교열에 참여한 거 같습니다. 나라 이름이 비슷비슷한데요, 진나라 만 해도 천하를 통일하는 秦만 있는 게 아니라 晉도 있고 陳도 있고 그런데요 이걸 헷갈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을 했더니 인정은 하는데 그렇다고 수정을 하지는 않더군요.

꼬마요정 2023-12-15 12:42   좋아요 2 | URL
폴스타프 님 고맙습니다^^ 전 가끔 동북공정 때문에 화가 나서요ㅠㅠ 다행히 진 나라들이군요. 근데 솔직히 너무 헷갈립니다. <본기> 읽을 때도 진 나라 표기 잘못된 거 있었어요.

꼬마요정 2023-12-14 1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씨 고아> 연극 보고 싶었는데, 결국 못 봤어요. 전 처음에 기군상의 희곡과 역사가 일치하는 줄 알고 기겁했답니다. 진짜 정영이 자기 아들 바꿔치기 한 줄 알고... 조씨 고아가 진짜 말 그대로 조씨의 고아란 뜻인 것도 한참 있다 알았죠... 중국은 나라도 크고 사람들도 많아서 이야기들도 참 많습니다. 자기들 것이 좋은 건데 그들은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하구요.

마지막 대사 좋네요... 제발 전쟁이 모두 끝나기를...ㅠㅠ

페넬로페 2023-12-14 19:42   좋아요 1 | URL
조씨고아의 의미가 넘 직접적이죠? ㅎㅎ
기군상의 원작을 읽을 때, 사실 조씨고아가 바로 복수를 감행한다는 게 이해가 잘 되지 않더라고요. 근데 한편으로 그 시대에는 또 그럴 수 있지 않나 생각도 들더라고요.
연극이 주는 의미가 좋더라고요.
마지막 대사도 좋고요.

그레이스 2023-12-14 2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기 읽었던 기억이 이제는 가물가물하네요^^

페넬로페 2023-12-14 22:43   좋아요 1 | URL
아마 거의~~

호시우행 2023-12-14 2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사일생으로 한 생명을 구출한 의미가 처절한 복수로 이어진다는 게 정말 참으로 허망하네요.ㅠㅠ

페넬로페 2023-12-15 00:16   좋아요 0 | URL
네, 그것이 이 희곡이 전하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부질 없고, 허망하고요^^

희선 2023-12-15 0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도 아니고 한 집안에 하는 복수라니... 그렇게 사람을 다 죽이면 뭐가 좋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이죠 그런 걸 보여주고 그걸 보는 사람은 복수할지 말지 생각하라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희선

페넬로페 2023-12-15 10:10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그게 맞는데 사람 사는 것이 그렇지 않나봐요.ㅠㅠ
그때나, 지금이나요^^

새파랑 2023-12-15 07: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첨들어본 작품인데 연극으로도 있고 유명한가 보군요~! 조씨 고아라라고 해서 성이 조씨인 고아에 대한 이야기? 인가 생각했습니다 ㅋㅋ 동양의 특성이 가미된 비극적 이야기라니 이건 재미가 없을수가 없겠네요 ^^

페넬로페 2023-12-15 10:11   좋아요 2 | URL
저도 처음 들어보는 작품이었어요.
연극 보러 가기 위해 책을 읽었는데 사연이 절절했고 먹먹했어요.
서양의 비극과 약간 달랐어요^^

cyrus 2023-12-15 10: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공연 보고 싶은데 일정과 시간이 맞지 않네요. 서울에는 보고 싶은 공연이 너무 많아요.. ^^;;

페넬로페 2023-12-15 10:26   좋아요 1 | URL
공연 보려면 시간 맞추고 일정 조절하기가 쉽지 않죠.
또 예매하기도 어렵고요.
기회 되시면 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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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립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때, 처음엔 상큼한 과일 맛과 아주 적은 산미가 느껴지지만, 뒤에는 얼그레이의 여운이 남는다. 지금까지 마셔 본 알라딘 커피 중 가장 로스팅 의도와 맞는 맛이다. 에티오피아 커피이지만 산미가 많지 않아, 산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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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12-22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오늘도 춥네요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요 ㅎㅎ 연말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페넬로페 2023-12-22 15:59   좋아요 1 | URL
서곡님! 감사합니다^^
날씨가 엄청 추워요.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시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