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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인생 책 네 권을 어떻게 고를지 암담했고, 고민되었지만 알라딘 서재 친구들이나 작가들의 <인생네권>에 자극받아 그냥 쉽고, 가볍게, 의식의 흐름대로 골랐다.

 

페넬로페의 인생네권은~~~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은 고전의 전범(典範) 같은 책이다. 이 책에 나오는 모든 것이 인용되고, 응용되며, 다양하게 변형된다. 지금 이 시대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인간과 세상과의 관계가 소름끼친다. 특히 오이디푸스 왕은 삶이 정말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을 인식시켜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명료하게 가르쳐주는 인생의 지침서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세 번 읽은 책이다. 중학교 때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라스콜니코프가 고리대금업자 알료나 이바노브나를 도끼로 살해하는 것에 전율을 느꼈다. 그가 이 노파를 살해하는 것에 대한 당위성을 인정했고, 세상의 누군가는 그렇게 해주어야 한다는 라스콜니코프의 주장에 동의했다. 중학생인 내가 그때,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40대에 읽었을 땐, 라스콜니코프가 노파를 살해한 것이 정당한가에 대해 생각했다. 그의 자격이 의심되었다. 그 어떤 이유에도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도덕적인 면이 우선되었다. 50대를 훌쩍 넘어 최근에 다시 읽은 죄와 벌에서는 그저 <인간 라스콜니코프>만 보였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성마르게 하고, 정신적으로 힘들게 하는지.그와 환경적으로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은 것 같은 라주미힌은 저렇게도 긍정적이고 활기찬데 왜 라스콜니코프는? 엄마의 마음으로 라스콜니코프를 안아주고 위로해 주고 싶었다.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내게 세계를 보는 관점을 바꾸어준 책이다. 물론 그 전에도 세상의 불공평성과 폭력, 이기심에 관심이 많았지만, 이 책은 나를 한 발짝 더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했다.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은 나를 힘 빠지게도 했다. 아무리 아우성치고, 발버둥 쳐도 이놈의 자본주의 세계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패배감에 젖어 누군가가 희망을 얘기할 때, 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비관주의자가 된 듯하다. 언젠가 성당에서의 성경 공부 시간에, '하느님이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난 이 책을 인용했다. 이 세상에 하느님이 없는 곳이 너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ㅠㅠ

 

  

로버트 먼치의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는 딸아이가 어렸을 때 밤마다 읽어준 책이다. 아이가 이 책을 너무 좋아해 수백 번 넘게 읽었을 것이다. 아이를 낳아 기르고, 그 아이가 커 가는 모습, 그러다 엄마는 늙어가고 다시 아이가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아 기르는 모습들. 매 순간마다 존재하는 사랑한다는 말, 그리고 아! 인생, 인생, 나는 늙어가고, 늙어가고.오래된 책 냄새가 많이 나는 이 책을 다시 읽어 보니 왜 이리 슬픈지 모르겠다.

 

이번 생은 책과 함께 망했다

어쩔 수 없다. 그냥 그렇게 살다 갈 수 밖에.


알라딘 서재,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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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4-04-24 15: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번 생은 책과 함께 망했다. --> 우와아아아 짝짝짝!!!

페넬로페 2024-04-24 16:22   좋아요 1 | URL
ㅎㅎㅎ~~
서곡님께서 제 마음을 알아주시는군요^^

은하수 2024-04-24 15: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과 함께 흥한거 아니구요~~~??^^
책과 함께 하는 페넬로페님의 이번 생 쭈욱 응원할게요 ~~

페넬로페 2024-04-24 16:24   좋아요 2 | URL
책을 사랑한 반어적 표현이었지만, 한편으로 책만 읽어 아쉬운 마음도 조금 있습니다. 앞으로는 책과 함께 흥하는 인생을 살겠습니다. 은하수님,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락방 2024-04-24 16: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장 지글러의 책을 넣을까 하다 말았는데 넣었다면 페넬로페 님과 장 지글러로 만났겠네요. 제가 넣으려던 책은 [인간 섬] 이었어요.

페넬로페 2024-04-24 16:45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께서 장 지글러의 책을 좋아하신다는 거 알고 있죠~~
<인간 섬>도 읽어보겠습니다^^

stella.K 2024-04-24 17: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죄와 벌을 넣고 싶었는데 역시 저는 부활을 거부할 수 없어서...ㅠㅠ

페넬로페 2024-04-24 17:35   좋아요 1 | URL
결국 도스토옙스키냐, 톨스토이냐의 문제군요 ㅎㅎ

Falstaff 2024-04-24 1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포클레스가 제일 앞에!! ㅎㅎㅎ 고스톱 치다가 다 잃고 막판에 쓰리고, 광박 씌운 기분입니다. ^^

페넬로페 2024-04-24 18:46   좋아요 0 | URL
‘오뒷세이아‘를 선택할까 고민하다가 오뒷세이아보다는 ‘오이디푸스‘나 ‘필록테테스‘, ‘안티고네‘쪽이 더 당기더라고요.
막판에 쓰리고, 광박, 좋습니다 ㅎㅎ

새파랑 2024-04-24 2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페넬로페님의 네권의 범위가 엄청 다양하네요~!!

저도 1번, 2번 너무 좋아합니다 ㅋ

4번은 의미긴 있는 책이군요 ㅜㅜ

페넬로페 2024-04-24 21:11   좋아요 1 | URL
네 권을 저에게 의미가 있는 책으로 정했어요.
지금 다시 보니까 4번이 찡하네요^^

모모 2024-04-25 0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늘 잘 보고 있어요, 응원합니다~^^

페넬로페 2024-04-25 00:1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모모님!
저도 항상 응원하고 있어요^^

희선 2024-04-25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와 벌》을 중학생 때 처음 만나셨군요 읽을 때마다 다르게 생각하시다니... 사람 세상에서는 사람이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만,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그게 잘 안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딘가에서는 음식이 남아서 버리고 어딘가에서는 없어서 굶고... 따님한테 밤마다 책을 읽어주셨군요 그런 책 기억에 많이 남겠습니다


희선
 
엘살바도르 산타아나 이사벨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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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에 너무 많은 맛이 담겨 있으면, 맛에만 집중하게 된다. 목련, 벚꽃, 진달래, 철쭉, 서양수수 꽃다리, 조팝나무꽃이 지천으로 널려있는, 날 좋은 날에 자연을 잊게하는 커피는 어울리지 않는다. 산타아나 이사벨 커피는 지금 마시기에 좋다. 그냥 커피 본연의 맛이라 멋진 배경에 곁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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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4-04-14 14: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산타아나 이사벨...이름이 너무 예쁜데요 ㅎ 일요일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페넬로페 2024-04-14 19:36   좋아요 1 | URL
커피에 따라 이름도 다양한 것 같아요.
ㅎㅎ
요즘 날씨가 딱 좋은 것 같습니다.
서곡님!
남은 일요일도 잘 보내시길요^^

라로 2024-04-14 14: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커피 맛을 몰라요. 그냥 찐하다 약하다 정도? ‘자연을 잊게하는 커피‘ 그 부분은 커피 광고 회사가 카피로 사용해도 좋을 것 같아요! 멋진 표현! 이부분 커피 회사에 파세요.^^;;

페넬로페 2024-04-14 19:38   좋아요 0 | URL
저도 커피맛 잘 몰랐는데 마시다보니 조금은 알 것 같아요.
광고회사에서 카피로 사려나요? ㅎㅎ
라로님
반갑습니다^^

2024-04-17 0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4-17 14: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4-21 0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24-04-17 06: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커피맛 표현은 역시 페페 님.^^👍

페넬로페 2024-04-17 14:34   좋아요 1 | URL
요즘 일이 많아 책을 거의 못 읽어요.
그래서 커피 백자평이라도 썼어요 ㅎㅎ
책나무님, 잘 지내시죠?

책읽는나무 2024-04-17 15:28   좋아요 1 | URL
안그래도 오늘 새벽 문득 페페 님 글 좀 읽어보려고 들어왔다가 엥? 했어요.
많이 바쁘신가봐요?
그래도 커피 백자평이라도 남겨 놓으시니 좋네요.
커피 광고 나래이션 문구는 페페 님께 의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제가 좋아하는 공유가 광고하는 카누 커피라도 좀....ㅋㅋ
 
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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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처음부터 범인이 누구인지 알려 준다. 알려 주고 시작하기에 나중에 큰 반전이 있을 거라 예상할 수 있다. 읽을수록 계속 기대하고 기다리게 된다. 반전은 상상도 못한 것이라 좋았다. ‘헌신‘이란 말이 이해되었고, 추리 소설인데도 의외로 사랑을 생각하게 했다. 사랑한다면, 헌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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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친놈 2024-04-03 1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글 보니 다시 읽고싶어지네요 ㅎㅎㅎ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던 중딩때라 다시읽으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집니다 ㅎㅎㅎ

페넬로페 2024-04-03 14:28   좋아요 1 | URL
중학교때 이 소설을 읽으셨군요.
재독하시면 그때와는 느낌이 조금 다르실 듯 합니다.
근데 결말을 알고 있어 재미는 약간 떨어질 것도 같은데요 ㅎㅎ

책친놈 2024-04-03 14:54   좋아요 1 | URL
맞아요 아무래도 추리소설이라 결말을 알고보면 아쉬울것 같기도 해요 기회가 된다면 봐야겠어요

은오 2024-04-04 06: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히가시노게이고는 이거랑 <악의> 읽었는데 저도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너무 옛날이라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지만ㅠㅋㅋㅋㅋ(결말도요...)

앞으로도 헌신하겠습니다~!!

페넬로페 2024-04-04 08:49   좋아요 1 | URL
이 책이 2017년도에 출간되었더라고요.
좀 오래되었죠 ㅎㅎ

여기서 헌신을 더한다면~~
음, 흠흠^^

새파랑 2024-04-04 11: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예전에 영화로도 본거 같아요. 그 후에 책으로 읽고 ㅋ

히가시노 게이고 책은 재미있어서 좋더라구요~!!

페넬로페 2024-04-04 12:28   좋아요 2 | URL
네, 재미 있었어요.
소설 속에 치밀한 것을 설계했더라고요^^

서곡 2024-04-10 16:58   좋아요 1 | URL
저는 영화로만 보았습니다 원작은 안 읽었지만요...한국판 중국판 일본판 영화가 세 개나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중 두 개를 보았네요

오늘 휴일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레이스 2024-04-04 1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동안 히가시노 게이고 모으던 남편도 이제는 시들 ㅎㅎ
이 책 때문에 시작되었던 것 같아요.

페넬로페 2024-04-04 12:29   좋아요 1 | URL
저는 <나미야~~>보다 더 좋았어요.

희선 2024-04-06 0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히가시노 게이고 알고 얼마 안 됐을 때 이 책 봤군요 그때는 이런 소설 안 지 얼마 안 돼서 제대로 못 본 듯합니다 탐정 갈릴레오도... 한국에서도 영화 만들고 이 책 다시 나왔던 것 같아요


희선

페넬로페 2024-04-06 15:36   좋아요 1 | URL
탐정 갈릴레오가 ‘유가와‘이더군요.
이 사람만 없었으면 완전 범죄가 될 뻔 했는데 ㅎㅎ

stella.K 2024-04-12 13: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영화로 보니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하더군요. 얼마 전 중고샵에 구판이 있길래 살까 하다가 선수를 뺐겼어요. 요즘엔 봄을 타는지 모든 게 시큰둥 하더군요. ㅋ

페넬로페 2024-04-12 18:36   좋아요 1 | URL
stella님께서는 영화를 보셨군요.
이미 결말을 알고 책 읽으면 재미 없을 것 같은데요.
책은 계속 결말을 향해 추리해 나가거든요~~
봄이라 그런지 저도 영 독서 진도가 안 나가네요~~
요즘 꽂이 정말 예뻐요^^
 














산책을 하다보면 유모차에 누워있는 갓난아기나, 엄마 아빠와 놀러 나온 아이들을 만난다. 얼마 전에 아기를 낳은 조카가 가족 단톡 방에 아기의 동영상을 자주 올려준다. 아기는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고 옹알이를 하며 잘 웃는다. 아이들을 보면 예쁘고 귀여워 저절로 마음이 환해지는 미소가 지어지지만, 한편으로 왠지 슬프기도, 씁쓸하기도 하다. 저 아이들이 헤쳐 나갈 세상이 아득해 보여서이다. 별것도 없는 세상에서 버티고,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많이 쓸모없는 것들에 최선을 다하고 그것을 지켜내야 하는지 그들은 아직 모를 것이다.

 

<윌리엄 스토너>의 삶에도 반짝했던 순간은 몇 번 되지 않았다. 아무 희망 없이 노동만으로 농사를 지으며 근근이 살아가는 집안에서 자란 스토너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머리가 좋아 공부를 잘해서일 것이다. 4년간 농과대학에서 공부하고 스토너가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부모와 척박한 땅이 있는 고향이었다. 대학 2학년 때 그는 교양 과목인 영문학 개론수업에서 아처 슬론 교수가 읽어주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에 온몸으로 불안하게 흐르는 피가 느껴져자신의 진로를 바꾼다. 그는 대학에 남아 영문학을 공부하기로 한다. 처음으로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

 

[그대 내게서 계절을 보리.

추위에 떠는 나뭇가지에

노란 이파리들이 몇 잎 또는 하나도 없는 계절

얼마 전 예쁜 새들이 노래했으나 살풍경한 폐허가 된 성가대석을

내게서 그대 그날의 황혼을 보리.

석양이 서쪽에서 희미해졌을 때처럼

머지않아 암흑의 밤이 가져갈 황혼

모든 것을 안식에 봉인하는 죽음의 두 번째 자아

그 암흑의 밤이 닥쳐올 황혼을.

내게서 그대 그렇게 타는 불꽃의 빛을 보리.

양분이 되었던 것과 함께 소진되어

반드시 목숨을 다해야 할 죽음의 침상처럼

젊음이 타고 남은 재 위에 놓인 불꽃

그대 이것을 알아차리면 그대의 사랑이 더욱 강해져

머지않아 떠나야 하는 것을 잘 사랑하리.]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는 죽음을 말하고 있다. 살아있음에도 죽음을 인식해야 우리는 더 지혜롭게 살 수 있다. 스토너는 너무 어린 나이에 이 소네트에 감동받았다. 이 시가 그에게 공부에 대한 열정을 주었을지는 몰라도, 삶에 미리 죽음을 끌어당겨 섞어버린 것처럼 스토너는 평생을 살아간다. 아내 이디스와 딸 그레이스, 부모님, 그가 사랑했던 캐서린에게 한 번도 진정으로 책임이란 걸 지지 않았다. 피하고 견딤으로, 사회에서 벗어나기 좋은 대학이라는 곳에 매몰되어 숨어 지낼 수 있었던 게 그의 삶이었다.

 

평론가 이동진은 이 소설을 “‘스토너패배한 자의 변명과 후일담을 담은 소설이 아니다. 삶에는 근원적인 고독이 엄존하고 그 고독에는 영광과 상처가 공존한다고 말하는 소설이다. 삶의 가치가 삶 자체일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작품이다. 그 가치가 사랑과 우정이라도 그렇다. 가치가 훼손되고 목적이 좌절되며 소망까지 상실되어도, 책장을 넘길 때마다 한 사람의 단순한 세월이 꼬박꼬박 묵직하게 흘러간다. 미련하지만 끝내 위엄을 잃지 않은 인간에 대한 성실하고도 위대한 문학이다.” 라는 감상을 남겼다.

 

이동진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하지만 이 책을 읽을 때, 순간순간 치받는 분노와 속상함도 많았다. 스토너가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가 한 선택과 체념이 분명 불행을 가져올 것인데도 무심하고 무기력한 스토너가 이해되지 않았다. 스토너는 자신의 전공인 문학속의 세계에서 세상이 변화되는 것을 지켜볼 뿐이다.

 

스토너에 대해 그런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이 책을 읽는 내내 스토너가 바로 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먹먹하기도 했다. 남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떻게 해야 잘 되는지가 보이지만 사실 내 인생은 그렇지가 않다. 나또한 용기를 내지 못했고, 나를 먼저 생각했으며 기회 있을 때마다 세상에 등 돌리는 일이 많았다.

 

죽음을 앞둔 스토너가 회한에 빠지지 않고 그가 그 자신이었음을 느끼고 자신이 쓴 책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 좋았다. 남들 눈에 실패작으로 보이는 삶도 괜찮다. 그것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저 온전히 자기의 느낌과 생각만이 중요할 따름이다. 삶보다 죽음에 더 가까운 나이가 된 나는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에게 점점 더 관대해진다. 이러면 안 되는데이렇게 물러지면 안 되는데, 라고 생각하지만 난 스토너를 이해하며 삶이 별것 아니라는 여유와 냉소를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다시 생각했다.

기쁨 같은 것이 몰려왔다. 여름의 산들바람에 실려 온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실패에 대해 생각했던 것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런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제는 그런 생각이 하잘 것 없어 보였다. 그의 인생과 비교하면 가치 없는 생각이었다.

팔다리에 나른함이 조금씩 밀려들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감각이 갑작스레 강렬하게 그를 덮쳤다. 그 힘이 느껴졌다. 그는 그 자신이었다. 그리고 과거의 자신을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유쾌한 소설을 읽었다. 읽는 내내 웃음이 나오고 기분이 좋아졌다. 뭉클함도 있어 숙연해질 때도 있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단순화시켜 쿨하게 사는 순례 씨가 부러웠고 존경스러웠다. 이 소설 여기저기에서 툭 튀어나오는 유머코드도 의미심장했고 통쾌했다.

 

유능한 세신사였던 75세 순례 씨는 땀 흘리지 않고 버는 돈을 불편해한다. “순하고 예의바르다는 뜻의 순례(順禮)에서 지구별을 여행하는 순례자라는 마음으로(p.13) 살고 싶어 순례(巡禮)라고 개명했다. 그녀는 자기 소유의 4층 건물인 순례 주택을 싼 값에 사람들에게 임대해주고 있다. 남자 친구 박승갑 씨의 외손녀인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오수림을 잘 키워주었다. 순례 주택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순례 씨를 닮아 있다.

 

순례씨와 수림은 가족보다 더 서로를 잘 알고 이해하는 나이를 초월한 친구 사이다. 그들은 서로를 최측근이라 여긴다. 가깝고 정이 깊지만 그들은 절대 선을 넘지 않는다. 지켜야 할 것과 허용되는 것이 분명하고 아주 독립적이다. 순례 씨는 어른이다. 그런 어른이 키운 중학교 3학년인 수림이는 영민하고 단단하며 감사할 줄 안다.

 

[“수림아, 어떤 사람이 어른인지 아니?”

순례 씨가 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

글쎄.”

막연했다.

자기 힘으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야.”

순례 씨 생각 동의.” -p.53]

 

정말이다. 사람은 나이가 많다고 다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어른이 되기도, 어른답게 살기도 어렵다.

 

 

스토너와 순례 씨의 삶을 잠깐 들여다본다. 그들은 똑같이 열정을 가졌고, 자신의 의지대로 인생을 선택해서 살았다. 하지만 더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순례 씨다. 누군가 나에게 누구처럼 살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난 머뭇거리지 않고 스토너가 아닌 순례 씨처럼 살고 싶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제부터 나의 롤 모델은 순례 씨이다.

 

[“수림아, 이 지구에 내 최측근이 딱 한 명 있는데 누구지?”

오수림.”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행복하게 살아야 해.”

순례 씨는 감사라는 말을 잘 한다. 순례 씨가 좋아하는 유명한 말관광객은 요구하고, 순례자는 감사한다가 떠올랐다. 나도 순례자가 되고 싶다. 순례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내 인생에 관광객은 되고 싶지 않다. 무슨 일이 있어도. -p.9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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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3-31 0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장 가까운 사람 자기 편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한사람 있다니 좋을 것 같네요 그런 사람은 한사람이면 되죠 소설에 나온 사람이지만 부럽네요 소설이라고 해서 꼭 현실과 다른 건 아니기도 하겠습니다 소설 속 사람과 같은 사람이 현실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죠


희선

페넬로페 2024-03-31 09:15   좋아요 1 | URL
소설 속 이야기이지만 현실에서도 저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분명 현실에서도 있을거예요.

hnine 2024-03-31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은실 작가를 어린이, 청소년책들로만 읽어 알고 있었는데 순례주택은 꼭 그런 것 같지 않아요. 오랜만에 작가의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우리 인생은 어떻게 보면 스토너의 삶을 닮은 시기가 있고 또 어느 시기는 순례씨의 생각과 삶과 비슷하기도 하고, 그렇게 복잡하게 진행되기도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

페넬로페 2024-03-31 10:25   좋아요 0 | URL
이 소설이 청소년 소설로 분류되어 있더라고요. 오히려 청소년보다 어른들이 더 많이 읽어야 할 것 같았어요.
네,
hnine님 말씀처럼 인생은 여러 시기를 거치는데 스토너의 삶을 닮은 시기가 훨씬 더 많지 않나 생각했어요. 이제부턴 순례 씨처럼 살고 싶어졌어요. 巡禮하는 자세로요 ㅎㅎ

새파랑 2024-03-31 1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순례씨 보다는 스토너~!! 심심해 보이고 무난해 보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인생이 그렇지 않을까란 생각이 듭니다. 특별할건 없지만 유일한 나의 인생~!!

페넬로페 2024-03-31 14:56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은 스토너~~
근데 스토너처럼 너무 쉽게 사랑하는 여자를 보내시면 안됩니다 ㅎㅎ
 
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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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많이 보았던 미국 서부 영화의 주된 배경이 텍사스였다. 사람이 전혀 살지 않을 것 같은 황량한 곳, 마을 한가운데에 어김없이 있는 술집, 문을 열면 언제나 거친 사람들이 가득하고, 항상 그곳을 혼자 찾아오는 주인공 남자, 관을 끌고 다니는 으스스한 분노의 추적자인 장고, 악을 몰아내고 결국 마을을 지켜내는 보안관 존 웨인, 선인장 하나만 달랑 있는 그곳에서 벌어지는 총격전과 마지막 결투그 시절의 내게 텍사스는 영화에서만 존재하고, 내가 사는 세상과는 완전 다른, 단 하루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척박한 땅이었다. 내가 가졌던 텍사스에 대한 이미지는 분명 틀렸을 것이다.

 

미국 텍사스 주, 샌안토니오와 주도인 오스틴의 지도를 찾아본다. 내가 사는 곳과 텍사스의 정서가 약간 다르겠지만, 세상 어디서나 인간이 사는 모습은 비슷할 것이다. 소설 <사라진 것들>의 등장인물은 거의 텍사스에 산다. 주로 예술가이거나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친다. 그들은 불안하고 혼란스러워 와인을 많이 마신다. 어느 누구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내가 사는 세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결혼한 부부에게 아이는 언제나 부담감을 준다. 아이가 주는 감동과 행복은 잠시뿐이다. 책임을 지고 성인이 될 때까지 아이를 잘 키워내야 한다. <오스틴>에서의 나, <담배>에서의 나, <숨을 쉬어>에서의 나, <>에서의 나는 모두 아이를 가진 아빠지만 그들은 똑같이 고독하고 위태롭다. 아이는 어른의 상황이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다. 그들은 어른도 자기와 똑같이 힘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아이는 부부사이를 멀어지게도 하고 각자의 세계로 침잠하게 만든다.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오히려 안전하지 못하다. 가족을 지키려는 마음과 그들로부터 떨어져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공존한다. 이 단편들, 특히 <>을 읽으며 숨이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부부와 친구가 된다는 건 모호하다. 부부 사이에 끼여 있어 어중간한 느낌도 들고, 소외되고 이용당할 수도 있다. 그들이 필요로 할 땐 환영받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애물단지가 되기 쉽다. 주책맞은 사람이라고 오해받기도 한다. <라인벡>에서의 나와 <히메나>에서의 히메나가 그렇다. 친구인 부부와 우정을 나누지만 약간의 아슬아슬함도 있다. 문제는 이들 부부 사이가 그리 탄탄하지 않다는 것이다.

 

<넝쿨식물>에서 나의 아내 마야는 화가이다. 이웃에 사는 나이든 예술가인 라이어널을 포식자라 부르지만 자신의 작품을 위해 정황상 라이어널의 누드 모델이 되어 주고 그의 도움으로 전시회를 열게 된다. 아마 사랑을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거의 그랬을 것이다. 결국 이들 관계는 헤어짐으로 끝난다. 라인벡의 나는 그들을 따라 떠나지 않고, 히메나는 다른 곳으로 떠나고, 마야도 떠나 다른 곳에서 재혼해 아이들도 낳지만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있고, 엄청나게 돈도 많은 <사라진 것들>의 대니얼은 옐로스톤과 알래스카, 조슈아트리로 혼자 여행을 다닌다. 가본 적은 없지만 그곳은 내가 상상도 못할 만큼 광활하고 웅장할 것 같다. 대니얼은 조슈아트리 국립공원의 포티나인 팜스 오아시스 트레일(길기도 하다.)’에서 실종된다. 대니얼 스스로 선택한 실종이든, 아님 사고로 인한 실종이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죽어간다는 사실은 너무 외롭고 쓸쓸하다. 완벽한 삶을 살 것 같은 사람에게 오는 위기가 언제나 부족함을 느끼는 사람에게 실감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이틀 동안 와 대니얼의 여자 친구인 앙투아네트가 대니얼의 물건을 정리하면서 그의 부재를 느끼고 그와의 추억을 공유하지만, 그들에게 보여 지는 것은 불안이다. 소설 <사라진 것들>뿐만 아니라 나머지 소설에 나오는 거의 모든 내용도 사라짐에 관한 것이다. 어떤 종류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감정, 추억, 물건은 사라지기 마련이고 그 사라짐의 의미는 점점 퇴색된다. 나중에 무엇이 남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40대 주인공들이 앓고 있는 정신적 방황과 공황, 현실의 무게감이 버거워 보여 마음이 무겁다. 견디며 그저 그렇게 살아내는 것이 삶이라는 사실이 슬프다.

 

인생에서 어려운 시기는 항상 있겠지만 난 30대에서 40대로 넘어갈 때 가장 힘들었다. 몸이 아프고 마음이 피폐해졌다. 이 시기가 이렇게 힘든데 50은 어떻게 넘길 수 있을까, 미리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50은 즐겁고 행복하게 잘 넘어갔다. 40대에 비해 형편이 나아진 것도 아니었고, 나를 둘러싼 환경이 거의 똑같은데도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공자가 말한 불혹(不惑)이 뭔지 잘 모르겠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도 생각한다. 어느 나이가 되면 흔들리지 않을까? 그때가 오기는 할까? 어쩌면 40에 인간은 사춘기를 다시 겪고, 육체가 재배치된다. 삶에 대해 처음으로 되돌아보며 내가 늙어갈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비로소 자신의 부모가 이해되기도 한다.

 

이 소설을 읽으며 와인을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계속 했다. 마침 봄 미나리에 오징어를 듬뿍 넣어 미나리 전을 부친 날, 집에 오래된 와인이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어디 두었는지 몰라 한참을 찾았다. 식탁을 차리며 남편에게 와인 뚜껑을 열어 달라고 했다. 평소 와인을 잘 마시지 않아 와인따개도 여기저기로 찾아다녔다. 와인이 오래되어서인지, 남편이 미숙해서인지 결국 와인 병의 코르크 마개는 중간쯤 올라오다 와자작 부서지고 말았다. 코르크조각이 와인 속으로 많이 들어갔다. 이 소설속의 라면 지하저장고로 내려가 새 와인을 가지고 오겠지만 나는 컵에 올이 촘촘한 얇은 면포를 올리고 와인을 부었다. 코르크조각은 완벽하게 제거되었고, 적당히 알코올 도수가 높은 와인의 맛은 좋았다. 나는 이렇게 인생을 살고 있다.

 

[“가끔은 과거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생각에 매달려 너무 애쓰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가 있어. 알아? 그걸 놓아버리기가 너무 힘들어.”

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실 넌 그다지 다르지 않아.”

더 성공한 사람으로 변하지 않은 건 확실하지.” 나는 말했다. “혹은 현명한 사람으로.”

……

모르겠어.” 나는 말했다.

어쩌면 참을성이 더 많아졌겠지. 나 자신에게 거는 기대는 확실히 낮아졌고.”

자신에게 더 관대해졌다고 생각해?”

아니.” 나는 말했다. “그냥 기대가 낮아진 것뿐이야.”

-p287~288, ‘히메나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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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4-03-30 17: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ㅡ작중 화자 ˝나˝ 느낌이.비슷해서 저는 단편모음인줄로 모르고 이상하다.하며 읽었는데.페넬로피님께서.ㄱ ˝나˝들의 공통점 정리해주시니 확.이해가 ^^

페넬로페 2024-03-30 20:25   좋아요 0 | URL
이 소설의 ‘나‘가 처한 상황들과 느낌이 거의 비슷하게 느껴지죠? 저도 그랬어요. 그렇기도 하고, 약간 일기같은 느낌도 들어 별점 하나 뺐어요. 얄라님의 감상, 기다리겠습니다^^

새파랑 2024-03-31 1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나리전에는 와인보다

막걸리 아닌가요? ㅋㅋ

이 책은 제목을 너무 잘 지은거 같아요. 사라진 것들이라니~!!

40대가 된 후부터는 뭔가가 생기기 보다는 계속 사라지는 느낌이 듭니다. 전 그래서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이 남애기 같지 않더라구요~~!!

페넬로페 2024-03-31 14:54   좋아요 1 | URL
미나리전엔 막걸리인데 이 책의 인물들이 계속 와인 마셔서 저도 마시고 싶더라고요.
새파랑님 말씀처럼 제 얘기 같기도 해서 좀 씁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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