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페넬로페의 서재 (페넬로페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4542162</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기다림. 인생. 그리고 자유!'조개 줍는 아이'와 함께.....</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Fri, 21 Aug 2026 13:45:37 +0900</lastBuildDate><image><title>페넬로페</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145421624113067.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14542162</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페넬로페</description></image><item><author>페넬로페</author><category>페이퍼</category><title>뮤즈여, 노래하라, 한 인간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453773</link><pubDate>Sun, 16 Aug 2026 14: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453773</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290159&TPaperId=1745377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68/68/coveroff/8991290159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7338861&TPaperId=1745377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2444/10/coveroff/k052935299_3.jpg" width="75" border="0"></a>&nbsp;<br/><br/>  <br><br><br><br><br><br><br><br><br><br><br><br><br>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가 개봉된다는 소식에 영화를 보기 전에 책을 재독했다. 8년 전쯤 『오뒷세이아』를 처음 읽을 때는 독서의 속도가 빠르진 못했다. 약 3000년 전의 고대 희랍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 지식이 필요했고 그것이 만만치 않아서였다. 신화와 거기에 얽힌 인물의 이야기가 워낙 복잡해 주석과 네이버 지식 백과를 참조해 읽어도 헷갈려 다시 돌아가기 일쑤였다. 그 때 이후로 호메로스의 작품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신화와 비극을 열심히 읽다보니 이제는 신과 인물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와 암기가 된 상태다. 그래서인지 이번에 재독한 ’오뒷세이아‘는 훨씬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nbsp;고대 희랍 원전의 번역자로 고 천병희 선생을 거론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다. 원전 번역이 선생 일생의 과업이었고 우리나라에서 선구자였다. 나도 천병희 선생의 2015년 숲 출판사 개정판으로 『오뒷세이아』를 읽었다. 이 책은 선생의 번역도 훌륭하지만 각 페이지 하단에 달린 각주와 부록(주요 인명, 신명, 지명, 가계도), 해설이 자세히 나와 있어 좋다. 해설은 호메로스와 고대 그리스 서사시에 대한 전반적 개념이 서술되어 있다. 책 한권으로 거의 모든 것이 해결될 정도다. ’오뒷세이아‘를 처음 읽는 독자라면 천병희의 책을 추천한다. &nbsp;이번 재독에는 이준석 역의 ‘오뒷세이아’를 선택했다. 이준석의 번역도 정말 좋았다. 두 책 모두 걸리는 것 없이 잘 읽힌다. 천병희의 역이 서술적 흐름에 집중했다면 이준석의 역은 리듬감을 살리기 위해 단어에 집중한 느낌이다. 이준석은 원작의 단어를 그대로 선택했고 그 안에 있는 의미를 최대한 살렸다. 그래서인지 간결하고 정리된 느낌을 받았고 집중력 있게 읽을 수 있었다. 다만 번역자의 직역에 대한 의도가 너무 대쪽 같아 빈번하게 사용된 어떤 단어들은 상당히 거슬렸고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nbsp;예를 들어 여기에는 ’심중(心中, 또는 深重(?))‘과 ’기백(氣魄)‘이란 단어가 많이 나온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심중은 ’마음 속, 마음에 품고 있는 것, 또는 생각이 깊고 침착하다‘로 기백은 ’씩씩하고 굳센 기상과 진취적인 정신‘으로 풀이되고 있다. 원작자인 호메로스가 심중과 기백에 해당하는 희랍어를 당연히 사용했겠지만 아무데서나 튀어나오는 이 심중과 기백이란 단어가 많이 낯설었다. 이 단어가 사용된 문장 몇 개만 가져와보자.&nbsp;심중에서 견뎌내는 오뒷세우스의 창들(1권 129행)기백에서 기쁨을 누리며(1권 311행)훌륭한 판단과 간계까지 기백으로 궁리해가며(2권 117행)당신들의 기백이 이를 분개한다면(2권 138행)기백으로 근심하였다(2권 156행)심중에서 이를 알아차리고 기백으로 경악하였으니(1권 322~323행).........&nbsp;‘심중’이란 단어는 보통 사람에게 붙는 것이지만 오뒷세우스가 거지로 변장하고 고향 이타카 섬에 귀향했을 때 그를 알아보는 늙은 개 아르고스에게도 ‘심중에서 견뎌내는(p.427)’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nbsp;심중과 기백에 대해 천병희는 이렇게 번역했다.&nbsp;참을성 많은 오뒷세우스의 창들(1권 129행)흐뭇한 마음으로(1권 311행)교활한 재치와 책략을 마음속으로 생각한다면(2권 117행)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2권 138행)마음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2권 156행)마음속으로 이를 느끼고 깜짝 놀랐으니(1권 322행)&nbsp;이준석은 심중과 기백의 뜻 차이로 두 단어를 철저히 분리시켰지만 천병희는 두 단어를 거의 하나의 의미로 해석한다. 그런 면에서 이준석의 번역이 더 직역에 가까우며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이 두 단어가 상당히 불편해 독서 초반에는 집중에 방해를 받았고 중간 분량을 넘어갔을 때에 겨우 적응할 수 있었다. 이 두 단어를 분리시키면서 한 번씩 다른 표현을 사용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nbsp;아카넷 출판사의 ’오뒷세이아‘는 주석이 별로 없어 아쉽지만 삽화가 좋았고 거기에 덧붙인 이준석의 의미 있는 해석이 감동적이었다. 책 뒷부분의 해설도 줄거리의 흐름에 대한 설명이어서 이 서사시가 상징하는 의미와 행간을 이해하기 유익했다. 천병희의 해설이 숲을 보여준다면 이준석의 해설은 거기에 있는 나무를 설명해주어 두 책을 같이 참조한다면 더 깊이 읽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nbsp;이태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이준석의 책을 추천하며 새 번역서의 의미에 대해 감사해한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워낙 천병희가 이뤄놓은 세계가 크고 단단해 새롭게 똑같은 작품을 번역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쉽지 않았을 것이다. &nbsp;추천사에서 천병희의 역이 독자들이 읽기 쉬운 의역이고 이준석의 역은 원작에 더 충실한 직역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한 문장을 예로 들며 두 번역을 비교한다. 이준석의 ’네 이빨 울타리를 빠져나온 그 말은 대체 무엇이냐.‘라는 직역을 천병희는 ’너는 무슨 말을 그리 함부로 하느냐?‘로 평이하게 옮겼다고 한다. 생소하고 낯설지만 ’네 이빨 울타리’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면 그것이 사람의 ’입‘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로 이태수는 이준석의 번역이 천병희의 번역보다 독자들이 훨씬 더 호메로스의 속뜻을 정확히 파악하고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nbsp;이준석 번역자 역시 옮긴이의 말에서 호메로스가 쓴 표현을 왜곡 없이 고스란히 옮기고 싶었다고 한다. ’미세한 뉘앙스를 결정하는 조각 말(particle) 하나까지 놓치고 싶지 않았다(p.655)'고도 했다. ’기백‘과 ’심중‘도 역자의 그런 의도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읽다 보면 심중과 기백의 차이가 확실하지 않고 둘 다 거의 ’마음‘의 의미로 혼용되어 이해된다. 그러므로 천병희 선생의 의역이 틀린 것은 아니다. 선생은 문장의 부자연스러움이 독자의 집중력을 해칠까봐 이태수가 비판한 ‘작가가 쓰지 않는 다른 말을 동원(p.7)' 했을 것이다.  &nbsp;역자 해설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하나 있었다. 이준석은 1-4권의 텔레마코스 이야기를 ‘저 세상을 향한 여행’으로 해석한다. ‘오뒷세이아’의 흐름과 관계없어 보이는 이 부분을 보통 텔레마코스의 교육과 성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역자는 ‘경계로 넘어가는 여행(p.607)‘으로 본다. 여러 문장을 인용하며 텔레마코스가 인간 세상 밖으로 여행하고 있으며 이것은 오뒷세우스의 여행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텔레마코스가 만나는 네스토르, 메넬라오스, 헬레네가 생을 넘어선 사람이고 그들이 사는 퓔로스와 스파르타도 ’저 세상‘에 속한다고 추정한다. ’오뒷세이아‘를 읽으며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사실을 역자는 조목조목 분석하고 있었다. 새롭고 환상적이었다.&nbsp;이타카의 오뒷세우스의 집이 구혼자들에 의해 점령되고 곧 결혼에 대한 답변을 해야 할 페넬로페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텔레마코스의 여행은 위태로워 보인다. 이 상황에서 잠시라도 텔레마코스가 집을 비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결론적으로 아버지를 찾아 나선 텔레마코스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고, 구혼자들은 돌아오는 텔레마코스를 죽이려고 매복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텔레마코스의 결단이 없다면 일은 더 복잡해질 수도 있다. 이 시점에서 오뒷세우스의 생사를 확인해야만 하는 당위가 되는 것이다. 나는 텔레마코스의 여행을 이렇게 받아들여서인지 별로 어색하지 않았고, 오뒷세우스 귀향의 좋은 시작이라고 생각했다.&nbsp;『오뒷세이아』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오뒷세우스의 아들인 텔레마코스의 이야기(1-4권), 오뒷세우스의 방랑과 귀향(5-12권), 오뒷세우스의 구혼자에 대한 복수와 페넬로페와의 만남(13-24권)이다. 놀라운 사실은 여기에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것이다. 거의 모든 것이 신에 의해 계획되고 신의 도움으로만 인간은 정진하고 뭔가를 성취할 수 있다. 예언자에 의해 앞날이 예고되고 그 말을 지키기 위해 온갖 유혹과 기본적 욕망마저 이겨내야 한다. 조금이라도 신의 분노를 사거나 예언의 실행이 부정되면 무수한 죽음과 고행, 슬픔과 탄식을 겪어야 한다.&nbsp;그럼에도 ‘오뒷세우스’로 대표되는 인간의 정체성은 귀향을 포기하지 않는다. 시기, 질투로 금기의 영역을 침범해 고향이 눈에 보이는 곳에서 파멸하고, 하데스로 가 죽은 사람을 만나 예언을 듣고, 괴물과 거인을 맞닥뜨리고, ‘아무것도 아닌 자(있지도 않은 자)’라고 말했다가 ‘나는 오뒷세우스’라고 밝히며 도발했다가, 신으로 살아갈 기회마저 거절하는 한 인간은 극심한 고역을 치르지만 집으로 돌아간다. 몸을 묶어도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싶은 호기심, 죽은 동료들에 대한 애도, 신께 헤카톰베를 바치며 순종하지만 한편으로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 크세니아를 지키지 않은 자에 대한 복수 등 나약하지만 강한, 복잡하고도 다양한 감정을 가진 인간은 그렇게 필연적이다. &nbsp;내가 읽은 다른 많은 책에서 오뒷세우스가 언급되고 있다. 보통 그는 고통을 당하는 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혜와 지략을 가진 사람, 영웅으로 소환된다. 나 역시 그런 인식으로 오뒷세우스를 받아들였고, 귀향의 과정이 궁금해 『오뒷세이아』를 읽었다. 처음 ‘오뒷세이아’를 읽었을 땐 많이 당황했었다. 그가 너무 인간적인 사람이었고 그저 신이나 예언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끝부분이 충격적이었다. 20년 만의 귀향을 끝으로 오뒷세우스에게 남은 생은 해피 엔딩일줄 알았건만 거기에서 그의 고행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납득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어 그땐 그의 남은 고통이 그동안의 힘듦에 대한 정신적 트라우마 일거라고도 생각했다. &nbsp;이 책을 재독하면서 다시 인식한 사실은 하데스를 찾아간 오뒷세우스에게 테이레시아스는 귀향 후의 고행과 필멸의 인간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죽음에 대해 이미 예언한다는 것이다. 결국 호메로스는 오뒷세우스를 전형적 ’한 인간‘으로 규정한다.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고통과 도전의 파도 속에 놓인 돛단배 하나에 불과하며, 그 흔들림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고귀한 것은 오뒷세우스가 귀향의 망각, 불멸의 삶에 대한 유혹을 극복하고 인간으로 남기로 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으로 한 인간 오뒷세우스는 영웅이 된다.<br>-p.567, 제임스 파커, 에칭, 1805년&nbsp;[그러자 그때 꾀 많은 오뒷세우스가 아내에게 말하였다.“여보, 우리가 모든 투쟁의 끝에 다다른 건 결코 아니에요.이후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혹독한 노역이 있을 것이고,나는 또 그 모든 것을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답니다.내가 전우들과 나 자신의 귀향을 찾아내러하데스의 집으로 내려갔던 바로 그 날,테이레시아스의 영혼이 내게 예언한 대로지요.-23권 247~253행] <br>영화 ‘오디세이’는 좋았다. 러닝 타임 172분이 금방 지나갈 정도로 스펙타클했고 집중력 있게 볼 수 있었다. 책의 여러 장면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기대도 되었다. 시인 호메로스가  읊어주는 오뒷세우스의 여정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극적인 부분이 많다. 책을 읽으며 그것을 머릿속에서 그려보면 상상의 범위가 한없이 확장되며 요동친다. 영화는 웅장했지만 호메로스의 노래를 다 담기는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책을 두 번이나 읽어서인지 그다지 재미있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오뒷세우스 역의 맷 데이먼의 연기는 너무 좋았다. 거기에 다른 배우가 절대 대체될 수 없을 정도로 멋지게 오뒷세우스의 역할을 해내었다. 페넬로페 역의 앤 해서웨이와 아테네 역의 젠데이아 콜먼도 괜찮았다. 이 영화에서 헬레네 역할로 흑인 배우 루피타 뇽오가 캐스팅 되어 논란이 많았는데, 감독의 어떤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nbsp;이 영화에서는 시종일관 신은 어떤 모습으로 인간 앞에 나올지 모르니 언제나 모든 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제우스의 법‘이 등장한다. ’낯선 손님이 오면 주인은 정성껏 대접하고 잠자리를 내주고 떠날 때는 선물을 주는 관습인 ‘크세니아’를 철저히 지킨다. 이타카의 페넬로페의 구혼자들도 이 크세니아 때문에 아무 제지 없이 오뒷세우스의 재산을 약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손님의 태도도 존재한다. 겸손하며 예의 있게 행동하며 감사함을 표시해야 한다. 구혼자들은 테미스(themis,-관습, 관행 또는 법도,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하는 바)에 대해 아테미스토스(arthemistos,-도리를 저버린, 사람의 탈을 쓰고 할 수 없는)의 태도를 행했기에 마땅히 응징 당했다. &nbsp;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전작인 ‘오펜하이머’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대의와 도덕적 인간성의 충돌을 얘기한다. 영화에서 아주 극적인 장면으로 등장한 트로이의 목마는 오뒷세우스로 대표되는 인간 지혜의 절대성으로 등장한다. 예언자 카산드라 말고 아무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은 트로이 사람들은 패배를 자초한다. 트로이 목마로 굳건히 닫혀있던 성문은 열린다. 10년 동안 기다리며 고생한 그리스 연합군은 그것으로 전쟁에 대한 승리의 기쁨만이 아닌 광기의 폭력으로 트로이 문명을 완전히 파괴한다. 오펜하이머처럼 도시의 파괴자인 오뒷세우스 역시 불타오르는 트로이를 보며 좌절하고 탄식한다. 호메로스가 한 인간을 노래하며 보편의 인간상을 보여주었다면, 놀란 감독 역시 한 인간을 노래하며 지금 우리가 당면한 현실을 보여준다. <br>가장 갈망하는 것은 가질 수 없는 것이고,&nbsp;가장 가질 수 없는 것은 이미 가졌다가 잃어버린 것이다.&nbsp;뮤즈여, 노래하라. 한 얼굴을, 한 함대를,트로이를 하루 만에 짓밟은 한 전쟁을,한 생각을, 한 자락을, 한 인간을.&nbsp; &nbsp;&nbsp;<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2444/10/cover150/k052935299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4441050</link></image></item><item><author>페넬로페</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망명객이 보내 온 노스탤지어 - [압록강은 흐른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436364</link><pubDate>Thu, 06 Aug 2026 22:1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43636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5000&TPaperId=1743636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75/12/coveroff/893746500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5000&TPaperId=1743636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압록강은 흐른다</a><br/>이미륵 지음, 안삼환 옮김 / 민음사 / 2026년 06월<br/></td></tr></table><br/>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는 한국인이 독일어로 쓴 소설이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의 문장은 현상을 설명하며, 많이 정제되어 있다. 이것은 문학평론가 박혜진의 해설처럼, ‘담담하며 고요한 절제의 미학(p.237)'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전적 내용을 바탕으로 하지만, 경계의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봤기에 절제될 수 있었을 것이다. 몸은 독일에 있지만 영혼을 고국에만 두었다면 이미륵의 문장은 격한 울음이었을 것이다.&nbsp;감정이 절제된 채, 묵묵히 진행되는 이미륵의 글은 비슷한 시대를 자전적 내용으로 쓴 박완서의 문장과 대조적이다. 집요하고도 선득한 느낌마저 드는 박완서의 문장에 비해 그의 글은 건조하면서도 따뜻하다. 글을 읽을 대상이 그 당시 한국을 거의 모르는 독일인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작가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독일인이 아닌 나에게 이 책은 두 가지 시선으로 읽혔다. 여기에 실제 이미륵이란 사람을 넣어 읽는 것과 그를 떠나 단지 이 책을 소설로만 읽는 경우다. &nbsp;이 소설에는 구시대에 태어나 신문물과 신학문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 당시 사람들의 혼란이 있다. 시대를 잘못 만나 독일로 망명길에 올라 다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한 젊은이의 애환도 있다. 말도 생활환경도 다른 그 먼 곳에서 겪었을 서러움과 인종차별, 고향에 대한 향수는 표현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안전하다고 여기고 간 그곳이 나치의 소굴이자 제 2차 세계대전의 현장이 되었고, 거기에서 살아남아야 했을 이미륵의 고단한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언제 들어도 디아스포라의 사연은 슬프고 먹먹하다.   &nbsp;시간의 흐름에 따라 담담하게 서술된 여기에 특별한 감정을 드러내진 않지만, 고향, 가족, 지나온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다. 소설의 모든 곳에 따뜻함이 있다. 사람들의 순수와 사심 없는 태도에 감탄할 정도다. 다만 일본에 의해 식민지가 된 것에 대한 두루뭉술함과 중화사상에 젖은 그 당시 지식인의 태도가 아쉬웠다. 먼 훗날 그 시대를 바라보는 나에게 답답함이 느껴졌다.   &nbsp;딸 셋을 낳고 아들을 낳기 원하는 어머니를 위해 대신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는 여인의 도움으로 세상에 태어난 ‘나’는 미륵(彌勒)이란 아호로 불리게 된다. 5세의 미륵은 사촌 형 수암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다. 아버지가 작고한 동생의 식솔을 거둔 것이다. 남편이 죽은 고모와 그의 아들 칠성과도 잠깐 동안 함께 지낸다. 직계가족뿐만 아니라 주변 친척들도 챙겨야 했던 아버지의 고단함이 보였지만 천석꾼 집안이라 가능했을 것이다. 미륵, 수암, 칠성은 아버지가 집에 개설한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장난치며 싸우고 벌을 받으며 개구 진 어린 시절을 보낸다. &nbsp;퉁풍으로 아버지가 죽을 고비를 넘기자, 아버지는 서당을 없애고 수암 가족과 칠성 가족도 분가한다. 북적댔던 집안은 조용해지고 미륵은 아버지와 친구처럼 다정하고 친밀한 사이가 된다. 미륵은 계속 한학을 공부하고 있었지만 이미 신식학교가 들어와 서양 또는 유럽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온 신학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고민 끝에 미륵도 학교에 입학하고, 힘들어하며 과학과 수학을 배운다. 특히 영어는 미륵에게 너무 어려운 공부였다. 그곳에서 친구들은 미륵의 공부를 도와준다. 미륵의 집안은 세계정세에 대해 잘 몰랐지만 이미 미륵의 친구들은 잘 알고 있었고 공부에 대한 진도도 많이 나간 상태였다. 미륵도 운명처럼 유럽을 생각하며 새 시대가 오고 있음을 인식한다. &nbsp;일찍 한국에 들어 온 일본인은 거의 장사를 했고 사람들은 ‘왜놈들’이라 지칭하며 무시했다. 하지만 일본에 의해 나라가 합병되고 일본은 군대를 동원해 강압적으로 한국인을 통제한다. 어느 여름 날 미륵은 아버지와 옥계천변으로 물놀이를 나가 좋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 날 저녁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다. 미륵은 송림으로 가서 잠시 칩거하지만 경성의전(서울대 의대)으로 진학하기 위해 해주에서 서울로 간다. 의학을 배우고 서울 생활을 하며 미륵은 새 시대에 눈을 뜬다. 여지껏 우리나라에서 시행했던 것들이 서양의 학문에 비해 턱없이 비효율적인 것이 많았던 것을 공부를 통해 알게 된다.  &nbsp;경성의전에서의 여섯째 학기 중에 3.1 운동이 일어났고 미륵은 참가해 수배자가 된다. 미륵은 망명하기로 결심하고 일본인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압록강을 건넌다. 만주의 수도 묵덴, 천진을 거쳐 남경, 양자강을 지나 상해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몇 달 기다리다 여권이 나오자 프랑스의 거대한 여객선인 ‘폴 르카’호에 탑승한다. 사이공, 실론 섬, 싱가포르, 인도양, 지부티, 홍해, 시나이 산, 수에즈 운하, 지중해, 그리스, 이탈리아, 메시나 해변을 지나 마르세유 항에 입항한다. &nbsp;미륵은 그곳에서 독일로 가 어려운 언어를 공부하며 고향을 그리워하고 그곳을 회상한다. 어머니께 편지를 보내고 매일 답장이 왔는지 우체국에 간다. 우체국에서 집으로 돌아오며, 어느 낯선 집 마당에 피어있는 꼬리 관목에 눈이 가 한참을 그 앞에 서 있기도 한다. 해주 자신의 집 정원에서 본 꽃이었기 때문에 반가워서다. 여러 계절이 지나 드디어 도착한 누나의 답장에는 어머니가 며칠의 신고(辛苦)하신 끝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어 있다. &nbsp;&nbsp;나는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은 조부모와 부모를 두었다. 할아버지는 집안의 종손으로 존중을 받으셨고 한복을 입고 생활하였다. 지금도 기억나지만 내가 어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애도하기 위해 9일상을 했었고 시골집 마당에 차양을 치고 조문객을 받았었다. 대를 이어 종손이 된 큰아버지 역시 할아버지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았지만 차남인 나의 아버지는 도시로 나와 공부를 해 은행원이 되었다. &nbsp;한 반에 60명이 넘고 강압적이며 일률적인 교육을 초, 중 고등학교에서 받았고, 그때는 철저히 아날로그의 생활을 했다. 친지와 친구의 전화번호를 수십 개 외워 전화를 걸 수 있었다. 각 다른 대학으로 진학한 우리 친구들은 편지를 열심히 주고받기도 했다. 빠르게 컴퓨터가 세상을 점령했고 우리는 또 디지털의 세계에 입문해야 했다. 지금은 곧 대세가 될 인공지능이 고개를 내민다. 아니 달려오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난 거기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언제나 새 시대는 물밀듯이 밀려오고 나와 같이 미륵도 구시대와 새 시대의 경계, 타국에서 끊임없는 선택을 했을 것이다. 다만 거기에 아픈 역사의 반복만은 없길 바란다.&nbsp;『압록강은 흐른다』는 이미륵의 자전적 소설이며 독일에서 혼자 고독한 삶을 살아야했던 그가 고향과 가족에 대한 지독한 향수를 담은 글이다. 어떤 배경이든 노스탤지어와 디아스포라가 있다면 누구나 거기에 마음이 움직인다. 이런 내용으로 담담하고 아름답게 서술된 이국의 서사가 전후 독일인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nbsp;끝내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독일에서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미륵은 억울하고도 착잡한 심정이었겠지만, 인간 삶의 허무와 불가해함을 이해했기에 이렇게 정제된 글로 지나간 인생을 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감동과 비판의 양가감정으로 이 책을 읽었지만 미륵의 고뇌, 여정, 그의 부모님의 죽음은 애틋했다. 작가 연보에 의하면 미륵은 조혼을 해 두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아마 그들은 독일로 가지 못한 듯하다. 두 아들은 6.25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nbsp;한국인이 독일어로 쓴 소설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된 글을 읽는다는 것에 기분이 약간 묘했다. 오래 전 전혜린의 번역으로 읽었을 이 소설은 내용은 전혀 생각나지 않고 제목만 나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기대했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0번으로 이 책이 출간되지 않았다면 난 아마 재독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책도 이렇게 우연으로 다가와 인연으로 맺어지는 것 같다. &nbsp;[사라져가는 조선의 풍경과 기억을 보존하는 기록인 동시에 식민지라는 역사적 조건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이동시키고 변화시키는지 보여 주는 증언으로서 이 소설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왜 자신의 언어와 장소를 떠날 수밖에 없는지 변호한다. 조국을 떠난 뒤에야 가능해진 회고이자 타국의 언어를 선택한 뒤에야 구성할 수 있는 텍스트였다는 점에서 디아스포라 문학을 대표하는 이 작품이 독일어로 쓰인 것은 선택의 여지  없는 선택이었다. -p.240~241, 작품 해설 중에서]]]></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75/12/cover150/893746500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5751250</link></image></item><item><author>페넬로페</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대문호-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 장편소설 속 만남과 헤어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413057</link><pubDate>Sun, 26 Jul 2026 18: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41305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186120&TPaperId=1741305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8200/95/coveroff/897218612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186120&TPaperId=1741305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 장편소설 속 만남과 헤어짐</a><br/>윤새라 지음 / 한양대학교출판부 / 2019년 02월<br/></td></tr></table><br/>올해 들어 내내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의 소설을 읽고 있다. 내가 참여하고 있는 두 개의 독서 동아리는 보통 연말에 내년에 읽을 책을 투표로 결정하는데 이번에 러시아 소설이 거의 선택되었다. 도서관의 ‘클래식’ 독서 동아리는 주로 고전을 읽기에 당연하지만, 동네의 지인들과 함께하는 독서 모임에서도 나중에 남는 건 고전이라며 결국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상반기에 읽기로 했다. 선정된 책 모두가 3권과 4권짜리여서 한 달에 한 권씩 읽다보니 어쩌다 매달 러시아 소설을 읽게 된 것이다.&nbsp;나는 톨스토이보다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많이 읽어왔고, 나의 최애 작가 중 한 사람도 도스토옙스키였다. 하지만 이번에 ‘악령’과 ‘안나 카레니나(재독)’를 동시에 읽다보니 살짝 시계추가 도스토옙스키에서 톨스토이로 기울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악령’에서 도작가에게 실망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전개가 너무 지루했고, 이 작품에서도 여지없이 도작가가 즐겨 사용하는 여러 요소가 있어 식상했다. 작정하고 쓴 정치 소설이라 반감이 들기도 했다. 그에 비해 ‘안나 카레니나’는 너무 훌륭했다. &nbsp;평론가 신형철은 ’세상 사람들이 ‘외도를 하다 자살한 여자’라고 요약할 어떤 이의 진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톨스토이는 2000쪽이 넘는 소설을 썼다. 그것이 안나 카레니나다. 이런 작업을 ‘문학적 판단’이라 명명하면서 나는 이런 문장을 썼다. ”어떤 조건하에서 80명이 오른쪽을 선택할 때, 문학은 왼쪽을 선택한 20명의 내면으로 들어가려 할 것이다. 그 20명에게서 어떤 경향성을 찾아내려고? 아니다. 20명이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왼쪽을 선택했음을 20개의 이야기로 보여주기 위해서다.(‘정확한 사랑의 실험’ 중에서, 신형철, 마음산책, 2014)‘고 썼다.&nbsp;신형철의 글처럼 톨스토이는 기승전결의 군더더기 없는 전개로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과정을 기가 막히게 표현해 ’안나‘라는 한 인간을 이해하게 만든다. 개별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드는 문학의 역할에 잘 맞았다. 요즘 읽고 있는 ’전쟁과 평화‘에서도 톨스토이라는 대작가의 진가는 발휘된다. 막힘없이 잘 읽히면서도, 그 속에서 성장하는 인물과 전쟁의 상황을 어떻게 이렇게 잘 쓸 수 있는지 매번 감탄한다. 그렇지만 너무 세련되고 매끈한 톨스토이의 글을 읽다보면 마음 한 구석에서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그리움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감상적이지만 절절한 그의 문장이 그립다. 길을 가다 계속 자동차 방지 턱에 걸려 몸이 앞으로 숙여졌다 뒤로 갔다하는, 그런 불편함이 문학의 본질에 더 가깝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nbsp;러시아는 표트르 대제가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기 전에는 중세에 머물러 있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발전이 느렸다. 1812년 조국전쟁에서 패주하는 나폴레옹을 쫓아간 귀족 군인들이 유럽의 발전된 모습에 너무 놀라 개혁을 요구한 혁명이 ‘데카브리스트의 난(1825)’이었다. 마침 그 봉기는 니콜라이 1세 황제 취임식에서 일어났고 그 사건으로 겁먹은 황제는 집권 내내 철권정치를 시행한다. 푸쉬킨과 도스토옙스키(페트라솁스키 사건)는 강력한 니콜라이 1세 압제의 희생양이었다. 러시아에서의 개혁은 1860년대 이후 알렉산드르 2세 때에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런 영향으로 러시아 문학은 영미나 프랑스 문학이 가는 길을 순서대로 따라가지 않아 독특한 개성이 있고, 그것이 또한 큰 매력으로 작용한다. &nbsp;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다. 러시아의 메레쥐콥스키는 도스토옙스키에게, 나보코프는 톨스토이에게 더 후한 점수를 주었다. 반면 상대적으로 다른 작가에게는 낮은 점수를 준다. 메레쥐콥스키는 톨스토이의 글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나보코프는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에서 톨스토이, 고골, 체호프, 투르게네프 순으로 순위를 매겼고 도스토옙스키에게는 혐오에 가까운 혹평을 하고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감상적 글쓰기를 비판했는데, 그의 인간에 대한 연민과 순수, 고통의 숭고함에 대한 시각을 너무 간과한 것 같다.       &nbsp;윤새라의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장편소설 속 만남과 헤어짐)는 두 사람의 생애에서 시작해, 6편의 장편 소설을 두 편씩 비교하며 두 작가를 비교 분석한다. 두 작가는 같은 나라, 같은 시기에 살았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들의 작품 역시 공통점보다는 다른 점이 월등히 많다. 태어나고 자란 환경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차이가 난다.  &nbsp;메레쥐콥스키는 톨스토이는 ‘육체의 비밀을 보는 자’고 도스토옙스키는 ‘정신의 비밀을 보는 자(p.16)‘로 표현했다. 톨스토이는 몸의 작은 디테일을 자세히 서술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외모묘사를  최소화하고 나머지는 주로 대화를 통해 나타낸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각 인물에 대한 외모 묘사를 굉장히 자세히 서술한다. 환경에 따른 외모 변화에도 각별히 신경 써 표현한다. 심지어 보리스 드루베츠코이의 엄마인 안나 미하일로브나 드루베츠카야가 등장할 때마다 ‘울어서 부은 듯한 얼굴‘이란 표현을 반복해 약간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이에 반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는 대화체 문장이 많아 그것을 읽어 내기가 피곤할 때도 있다. &nbsp;조지 스타이너는 두 작가의 대립 구도를 톨스토이는 서사시의 시인이며 이교도인 반면, 도스토옙스키는 극작가이고 기독교신자로 놓고 비교한다. 톨스토이는 호메로스에 가깝고, 도스토옙스키의 글은 연극적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행동을 중심으로 사건을 펼치고, 창작의 뿌리에 살인과 같은 ’극적인 사건‘이 있다고 짚어낸다(p.23). 하지만 미하일 바흐친은 도스토옙스키의 대화는 연극에서의 대화의 역할(극적인 대화)과는 다르게 ’대화적 말‘이라고 하며 ’말‘은 연극적 요소와 다르다고 주장한다. 한 인물의 말 속에 여러 사람의 말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nbsp;바흐친은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인물들이 작가로부터 독립된 반면 톨스토이 소설은 작가의 말이 인물에 투영되어 있다고 했다. 크로노토프(chronotope)는 시간(chronos)과 공간(topos)이라는 그리스 단어 둘은 한 단어로 결합한 것으로, 그 자체로 시공간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나타낸다(p.26). 바흐친은 이 단어를 문학에 접목시켜 연구했다. 한 작품 안에 여러 크로노토프가 있을 수 있고 이것은 서로 섞이면서 충돌한다는 것이다.  &nbsp;이 책은 메레쥐콥스키와 스타이너의 비교 연구를 이어가며 발전시킨 두 작가에 대한 비평이다. 두 작가의 장편 소설을 발표순서에 따라 두 개씩 묶어(전쟁과 평화/죄와 벌, 백치/안나 카레니나, 카라마조프 형제들/부활) 시공간과 공통되는 주제에 대해 고찰한다. 먼저 두 작가의 생애를 간략히 소개하며 시작한다. 우리가 잘 알듯이 두 작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태어났고 그것은 그들의 인생 전체에 영향을 준다. 귀족 출신이자 부자인 톨스토이는 여유 있게 글을 쓰면 되었지만, 도스토옙스키는 돈을 벌기위해 전투적으로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생활을 이어갔다. 원고료도 도스토옙스키에 비해 톨스토이와 투르게네프가 훨씬 더 많이 받았다고 한다. 빚쟁이를 피해 유럽으로 가서 글을 쓴 도스토옙스키는 돈이 궁해 투르게네프에게 돈을 빌린 적도 있었다. 투르게네프는 톨스토이보다 훨씬 더 많은 농노가 있는 영지를 가질 정도로 돈이 많은 작가였다. 그럼에도 도스토옙스키는 나중에 극우주의자이면서 러시아정교의 신봉자가 되고, 톨스토이는 비록 실패했지만 진보적 개혁가가 된다. &nbsp;‘전쟁과 평화’는 1865년부터 ‘러시아 통보’에 연재되고 ‘죄와 벌’은 그 다음해인 1866년에 같은 문예지에 연재된다. 이 시기는 톨스토이가 소피아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혼 때였고,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 유형에서 돌아와 1864년 아내와 형을 동시에 잃고 난 후였다. 톨스토이는 행복의 정점에서, 도스토옙스키는 경제난에 시달리며 각 첫 대작을 쓴다. 윤새라는 이 두 소설을 조지 스타이너의 서사시와 비극에 기반해서 비교하며 분석한다. 이 두 소설에 등장하는 나폴레옹에 대한 서술도 굉장히 흥미롭고 유익했다. &nbsp;‘백치’와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그 시대의 여성 문제, 아름다움과 선에 대한 의미에 대해 서술한다. 시공간의 변화도 비교한다.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는 ‘죄와 벌’에 비해 넓어지고,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전쟁과 평화’에 비해 좁아진다. ‘죄와 벌’과 ‘백치’는 똑같이 단독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와 미시킨을 내세우지만 ‘백치’는 여자 주인공인 나스타샤도 부각시킨다. 두 작가의 마지막 장편소설인 ‘카라마조프 형제들’과 ‘부활’에서는 주로 법과 정의의 문제를 다룬다. 두 소설 다 법정장면이 있다. 공교롭게도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과 톨스토이의 ‘부활’은 끝에서 시베리아라는 공간에서 만난다. &nbsp;19세기 러시아 문학을 읽기 위해서는 작가의 생애에서 출발하여 여러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작가 개인과 소설적 배경이 구체적이고도 세밀하게 잘 서술되어 있다. 특히 두 작가의 장편 소설을 두 편씩 비교 분석해 그 차이점과 공통점을 설명해주어 훨씬 더 이해하기 좋았다. 책 전체의 문장이 딱딱하지 않고 읽기 쉬운 점도 이 책의 큰 장점이다. &nbsp;여기에 소개된 6개의 장편소설 중 4편을 읽었고, ‘전쟁과 평화’는 읽는 중이고 ‘백치’는 아직 읽지 않았지만, 이 책의 소설에 대한 해석에 대다수 공감했다. 다만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해석에서는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저자는 안나의 자살을 브론스키에 대한 복수로 본다. 레빈과 안나를 비교하며 그 둘의 차이점을 ‘삶에 대한 기본 태도’로 본다. 여러 단점과 실패에도 레빈은 노력하고 소통하지만, 안나는 질투의 화신으로 브론스키와의 사랑만을 갈구한다는 것이다. 레빈의 견실한 결혼생활을 칭찬하며 안나는 근본적인 삶의 양식을 버리고 레빈과는 정반대의 길을 간다고 한다. 물론 저자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nbsp;하지만 레빈과 안나의 비교는 19세기 러시아가 남자와 여자에게 가하는 차별이 없어야만 정당할 것이다. 똑같이 불륜을 저지르는 브론스키는 안나에 비해 훨씬 더 자유롭다. 안나와 브론스키를 대하는 사교계의 시선도 다르다. 그 시대 여성이 갈 수 있었던 영역은 사교계 아니면 연회뿐이다. ‘전쟁과 평화’의 나탸샤도 파티에 춤을 추러 가거나 집으로 초대된 손님들과 교류하는 것으로만 사회생활을 한다. 마리야 볼콘스카야는 아예 아버지가 짜놓은 시간표대로만 움직여야 한다. 안 그래도 좁은 여성의 영역에서 그마저도 거부당하고 집에 칩거해야할 안나에게 브론스키에 대한 집착과 심리적 불안은 당연한 것이다. 안나의 남편 카레닌은 이혼을 해주지도 않고 안나가 사랑하는 아들을 내주지도 않는다. 그런 면에서 사회적 제약이 너무 많은 안나에게 과연 레빈처럼 건실한 삶에 대한 기본 태도를 보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안나의 오빠 오블론스키에 비해 안나에 대한 비난과 타락에 대한 프레임도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nbsp;[이와 같이 테마로 볼 때 두 대가는 첫 번째, 두 번째, 그리고 마지막 장편소설별로 같은 관심사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두 문호가 소설을 통해 만난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같은 테마를 다루는 다른 시각, 다른 가치관, 다른 방식이다. 나폴레옹으로 상징되는 영웅주의에 비판적이면서도 그를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고, 사법 개혁으로 달라진 재판의 맹점을 드러내면서도 서술 기법이나 해결책이 다른 식이다. 그렇게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는 만나고 엇갈린다. 더 나아가 시공간 매트릭스를 매개로 살펴본 장편소설의 진화 과정은 두 작가의 만남과 엇갈림을 한층 더 뚜렷하게 드러낸다. 톨스토이는 넓게 시작해 좁아져 가고, 도스토옙스키는 반대로 좁게 시작해 점차 넓어져 간다. -p.283]&nbsp;&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8200/95/cover150/897218612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82009530</link></image></item><item><author>페넬로페</author><category>페이퍼</category><title>유영국-한국 최초의 추상미술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398667</link><pubDate>Sat, 18 Jul 2026 17:4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398667</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92536174&TPaperId=1739866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0104/55/coveroff/k492536174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32535437&TPaperId=1739866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9588/49/coveroff/k332535437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0532363&TPaperId=1739866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712/22/coveroff/8960532363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 <br><br><br><br><br><br><br><br><br><br><br><br>서울시립미술관에서 기획한 ‘한국 근대 거장전’시리즈 중, 첫 번째인 ‘유영국-산은 내 안에 있다’전시회를 다녀왔다. 며칠 간 계속 무더웠지만, 오늘은 해가 구름에 싸여있고 바람도 조금 불어 미술관 가는 길이 그리 덥지 않아 다행이었다. 전 날(14일) 비가 와, 미술관 앞 나무들이 물기를 머금은 선명한 초록이어서 운치 있었다. 이번 전시는 무료로 진행된다.&nbsp;내가 화가 유영국을 알게 된 건 몇 년 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린 이건희 컬렉션에서였다. 거기에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 정말 많이 전시되었는데 유독 유영국의 ‘산’이 내 눈에 들어왔었다. 그때 유영국 이란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게 되었다. 오늘 같이 간 언니는 어릴 때, 은행에서 근무하신 아버지가 가져 온 달력에서 유영국의 그림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nbsp;화가 유영국은 1916년 강원도 울진(지금은 경북으로 편입)에서 4남 4녀 중 여섯 번째로 태어났다. 그는 장욱진, 김환기, 이중섭과 같은 시기에 활동한 우리나라 1세대 추상 화가이다. 특히 김환기와 가까웠으며 두 사람은 모든 면에서 비교된다. 유영국은 1947년 김환기, 이규상과 함께 ‘신사실파’를 구성한다. &nbsp;[김환기와 유영국은 동시대의 작가로 비교적 같은 조건 속에서 출발하고 있으나 김환기가 비록 파란만장한 삶은 아니라 할지라도 많은 변화로 점철되어 있는 반면, 유영국은 비교적 굴곡이 심하지 않은 삶을 영위했다고 할 수 있다.김환기가 이상주의적 성향을 띤다면 유영국은 보다 현실적인 성향의 소유자라 할 수 있다. -p.13]&nbsp;1935년 유영국은 동경문화학원 미술과로 유학한다. 그 당시 한국 미술은 후기 인상파에서 입체, 야수, 표현, 미래, 구성을 받아들이고 추상미술을 수용할 즈음이었는데, 유영국은 과감히 추상미술을 선택한다. 1940년경 일본이 군국주의의 절정으로 치달아 전위적 예술 활동을 금지 시켰을 때, 유영국은 오리엔탈 사진학교에서 사진을 배우고, 주로 불상, 왕릉, 사찰, 탑 등을 찍으러 다니기도 한다. 라이카 카메라로 찍은 그의 경주 시리즈는 기하학적 형태가 부각되어 있다. &nbsp;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으로 혼란의 시기를 지날 때, 그는 고향 울진 죽변에서 양조장을 운영한다. 사업수완이 좋아 많은 돈을 벌기도 한다. 서울대에서 학생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그는 사업과 교수직을 과감히 그만 두고 전업 작가(1957년 전후)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림을 그린다. 그의 추상미술의 소재는 주로 산과 바다였다. 고향 울진의 풍경을 캔버스에 담아 거의 유화로 그려 내었다. &nbsp;죽변과 울진은 나에게 추억이 많은 장소다. 조카가 갓 난 아이였을때 서울에서 근무하던 형부는 울진 원자력 발전소로 전근을 가게 되었고 사택에 들어가기 전에 죽변에서 잠시 살게 되었다. 그곳에서 형부가 몇 년간 근무하는 동안 나는 자주 둘째 언니와 큰 언니네로 놀러갔다. 서울에서 가려면 일단 삼척이나 동해(묵호)로 가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죽변으로 가야하는데, 가는 길이 멀었지만 7번 국도의 바다를 볼 수 있어 좋았다. &nbsp;울진은 산, 바다, 계곡이 잘 어우러진 곳이라 그곳에 갈 때마다 여기저기 구경을 많이 다녔다. 사택의 다른 가족들과도 교류가 활발해 우리가 가면 초대해 밥을 먹여주기도 했고, 다같이 캠핑이나 덕구 온천을 가기도 했다. 그때 그 시절의 인정 많고 사람 냄새나는 것들이 그립다. 화가의 고향이 울진이라 반가웠다. 대부분 울진과 서울을 오가며 그려낸 유영국의 산과 바다가 그런 의미로 내게 더 친숙하게 다가왔다. <br>이번 전시는 유영국 예술 세계의 정점이었던 1964년의 작품으로 시작된다. 화가는 1964년에 첫 개인전을 열었고, 게다가 작품의 크기가 100호가 넘는 대작이 많았다. 작품의 제목은 주로 산, 바다, 작품, 무제이다. 그만큼 그에게 산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화가에게 산은 물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철학을 담아내는 그릇’이었다. 처음에 그는 칸딘스키나 몬드리안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후 자신만의 개성이 있는 독특한 추상의 길을 간다. 그는 매일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꾸준히 그림을 그린다. 지병으로 많은 수술과 입 퇴원을 거듭 했을때도 이 시간은 계속 지켜졌다.<br>-Work(1971)(부제; 랄랄라 시리즈)저절로 콧노래가 나올 정도로 경쾌하다.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br>-Work(1977)심장 수술을 마친 작가가 아내와 부석사를 여행하고 온 후 그린 그림이다. “산 속에 굽이굽이 길이 있고 그것이 인생인 것 같았다”는 화가의 말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다른 그림에 비해 이 그림은 크기가 아주 작은데 나름 좋았다. <br>-두 그림 중 오른쪽은 BTS의 RM이 소장한 것을 대여한 것이라고 한다. 그림을 보는 안목이 대단한 것 같다. 여러 사람이 인증샷을 남기기에 열렬한 팬은 아니지만 나도 한 장 찍었다.<br>추상으로 표현된 유영국의 산과 바다는 일단 색이 압도적이었다. 추상미술이라 당연히 선이 중요한 역할을 하겠지만, 색에서 받는 느낌이 훨씬 더 강렬했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큰 캔버스에 그려진 작품이 많아 더 웅장했다. 얼핏 원색으로 보여지는 것 같았지만, 자세히 보면 색깔이 너무 다양했고 붓 터치의 강약이 조화로웠다. 산 그림을 보면서 화가가 어떤 생각으로 그렸는지, 또한 직접 보는 것과 상상으로 확대되는 산의 모습이 어떻게 달랐는지도 궁금했다. 같은 소재로 매번 다르게 그린다는 것은 그만큼 자세히, 깊이 보아야 한다는 것인데 넓어진 지평의 사고가 그림에 고스란히 있는 것 같았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화가에게 배우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br>마침 전시회를 보러 간 날이 초복이라 점심은 서울시립미술관 근처에서 삼계탕을 먹었다. 언젠가부터 식당에서 삼계탕을 먹지 않는다. 태어난 지 3개월도 안 된 영계로 만든 삼계탕을 먹는것이 싫어서인데 이 날은 어쩔 수 없이 먹게 되었다. 역시나 닭은 너무 작았고, 닭다리는 뜯을 것이 없었다. 미슐랭 스타를 받은 식당인데 아마 맛이 깔끔해서 그런 것 같다.<br>서울시립미술관 뒤쪽에 서울시청 서소문청사가 있다. 그곳 13층에 올라가면 ‘정동 전망대’와 카페 다락이 있다. 그곳에서 덕수궁 전체와 정동 일대를 볼 수 있다. 광화문에 자주 나가지만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한 번쯤은 가볼 만한데 역시나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br>  <br><br><br>&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712/22/cover150/896053236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7122207</link></image></item><item><author>페넬로페</author><category>페이퍼</category><title>오베같은 사람이 필요하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385769</link><pubDate>Sat, 11 Jul 2026 13:1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385769</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D162634556&TPaperId=1738576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9037/56/coveroff/d162634556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D092735484&TPaperId=1738576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9836/74/coveroff/d092735484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6000848972&TPaperId=1738576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5948/68/coveroff/k822536969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62832578&TPaperId=1738576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1282/49/coveroff/k162832578_2.jpg" width="75" border="0"></a>&nbsp;<br/><br/> <br><br><br><br><br><br><br><br><br><br><br><br>며칠 전 마트에 가려고 집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3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한 젊은 여자가 탔다. 1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니 그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고, 3층에서 탄 여자가 내리면서 그 남자에게 “아저씨에게 얘기했어?”라고 물었다. 둘은 부부사이인 듯 했다. 그 남자는 아니라고 했다. 여자는 마침 경비실 밖에 나와 있던 관리인 아저씨께(제미나이에게 물어보니 요즘은 경비원이 아니라 관리인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다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nbsp;“안녕하세요, 아저씨3층 소화전 앞에 바퀴벌레가 있어 저희가 집에서 약을 가지고 나와 뿌려 죽여 놨어요. 지금 가서 그것 좀 치워주세요.” &nbsp;그 말을 듣고 나와 관리인 아저씨 둘 다 동시에 큰 한숨을 쉬었다.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사실 관리인은 아저씨라기보다 할아버지였다. 아니 나이를 떠나 아파트 관리인의 업무가 바퀴벌레 한 마리의 시체까지도 치워주어야만 하는 것인가이다. 부끄러움도 모른채 저렇게 당당히 얘기할 수 있는 젊은 부부의 뻔뻔스러움에 기가 찼다. 저 건장하고 멀쩡하게 생긴 젊은 남자는 도대체 바퀴벌레 한 마리도 감당할 수 없단 말인가? 그래, 그러니까 저들이 올림픽 공원에서 선관위를 규탄하며 한미공조를 외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을 우리가 해결해야지 왜 한미공조를 외치는지 몰랐는데 이제야 알겠다. 바퀴벌레 한 마리도 처리하지 못하는 모지리 들이라 그런 것이리라.&nbsp;관리인 아저씨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바퀴벌레를 치우러 가시는 것이었다. 나는 목까지 치미는 말(욕)을 삼키며 씁쓸하게 마트로 향했다. 걸어가며 ‘오베라는 남자’를 생각했다. 오베는 분명 ‘빌어먹을!’이라는 말을 하며 소설에서 늘 그래왔듯 컴퓨터만 믿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요즘의 허우대만 멀쩡한 어른을 비난했을 것이다. &nbsp;[오베와 루네 같은 남자들에게 품위란, 다 큰 사람은 스스로 자기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뜻했다. 따라서 품위라는 건 어른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게 되는 권리라고 할 수 있었다. 스스로를 통제한다는 자부심. 올바르게 산다는 자부심. 어떤 길을 택하고 버려야 하는지 아는 것. 나사를 어떻게 돌리고 돌리지 말아야 하는지를 안다는 자부심. 오베와 루네 같은 남자들은 인간이 말로 떠드는 게 아니라 행동하는 존재였던 세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p.370~371] &nbsp;뒤늦게 ‘오베라는 남자’를 읽고 있다. ‘한 여름밤의 영화 산책’이라는 도서관 프로그램을 신청했는데 강의 목록에 ‘오베라는 남자’ 영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원작을 먼저 읽고 싶었다. 단순히 영화 전체를 감상하는 것이 아닌, 영화를 통해 어떤 강의를 할지 궁금했다. 첫 날의 영화는 ‘어바웃 타임‘이었는데 강사가 생각하는 영화의 중요한 두 부분을 각 15분씩 보여주고 거기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우리에게 설명하며 주입시켰다. 심지어 영화 대사도 아닌 자신의 생각을 몇 문장으로 적어 우리에게 복창시키기까지 했다. 영화처럼 자유로운 예술을 완전 자기계발서로 만드는 마술을 부리고 있었다.  &nbsp;게다가 재미도 없는 자기 얘기를 늘어놓았다. 왜 강사들은 프로그램의 목적에 맞는 강의보다 자기 얘기를 더 많이 하는지 모르겠다. 스펙이 조금 좋은 강사는 끊임없이 자기 자랑을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인생 고통의 극복담을 늘어놓는다. 작년에 참여한 천선란 작가의 북 토크 역시 실망스러웠다. 자신의 책보다 AI와 미래에 대한 것을 계속 얘기해 지루했었다. 작가와의 질의응답 시간에 어떤 여자는 자기 아이가 고등학생인데 AI시대를 대비해 어떤 공부를 하며 준비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입시전문가가 아닌 소설가에게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할수가 없었다. ‘한 여름밤의 영화 산책’은 그 뒤로 참가하지 않았다. 혼자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서였다.&nbsp;<br>오베라는 남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원칙을 지키기 위해 오베는 융통성이 없고 까칠하며 사람들에게 싹싹하지 않다. 오베는 옳은 것은 옳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아닌 건 아닌 것이고 누구에게나 예외는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는 자신에게도 철저하며 성실하다. 사람들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오베는 자칫 이기적인 인간으로 보일수도 있지만 타인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불평 하지만 거절하지는 않는다. &nbsp;그 어떤 일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큼 오베는 능력 있는 사람이다. 만인에게 친절하며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지만, 결정적일 때 자신만 챙기고 절대 손해 보지 않으려는 사람이 너무 많기에 오베는 사실 특별한 사람이다. 실천하는 사람과 말만 하는 사람의 차이를 오베는 명백히 보여준다. 원칙을 지킨다는 것이 재미없는 삶의 다른 말일수도 있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경쟁과 강박 속에 사는 현대인은 오베를 꼰대로 보기 쉽다. 정말 그럴까? 요즘 같은 세상에 우리는 오베처럼 사는 것이 더 절실할 것 같은데....&nbsp;오베는 진정한 사랑꾼이다. ‘사랑’이란 단어의 뜻을 완벽히 아는 사람이다. ‘사랑’이란 것을 몸으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다. 오베와 그의 아내 소냐는 낮과 밤처럼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이다. 오베는 손에 쥘 수 있는 것들, 수학처럼 정답과 오답이 있는 것, 직선, 명료한 것을 좋아한다. 소냐는 책과 음악 같은 추상적인 것을 좋아한다. 오베는 전혀 책을 읽지 않지만, 소냐의 많은 책을 보관할 수 있는 책장을 뚝딱 만들어준다. 교통사고 후 소냐가 휠체어에 의지해 살아가게 되자 오베는 집의 구조를 모두 소냐에게 맞추기 위해 고친다. 장애인이 되어서도 학생을 가르치기를 원하는 소냐의 의지를 존중하고 도와준다. 오베와 소냐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임으로 사랑을 완성해 나간다.                    &nbsp;노화는 거침없는 오베에게도 어쩔 수 없는 복병이다. 예기치 않게 오랫동안 일했던 직장에서 해고당한다. 아내의 죽음 후 오베는 하루하루 견딜 수 없는 잉여의 삶을 느끼며 살아야한다. 여지껏 오베의 삶이 결코 평탄하지 않았지만, 잉여야말로 오베에게 가장 힘든 것이다. 그는 그렇게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며 자살을 시도한다. 빨리 아내 곁으로 가고 싶어한다. 하지만 매번 오베의 자살 시도는 실패한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할 때마다 누군가 원칙을 벗어나는 일을 하고, 이웃인 파르바네가 도움을 청하러 오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오베는 자살을 늦추고 사람들을 돕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러면서 오베는 소냐말고도 소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배운다. 죽을 때까지 배우고 느끼며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숙명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오베가 자살과 맞바꾼 것이었다. &nbsp;오랜만에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 &nbsp;[“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집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요.” 소냐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처음에는 새 물건들 전부와 사랑에 빠져요. 매일 아침마다 이 모든 게 자기 거라는 사실에 경탄하지요. 마치 누가 갑자기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와서 끔찍한 실수가 벌어졌다고, 사실 당신은 이런 훌륭한 곳에 살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말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러다 세월이 지나면서 벽은 빛바래고 나무는 여기저기 쪼개져요. 그러면 집이 완벽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불완전해서 사랑하기 시작해요. 온갖 구석진 곳과 갈라진 틈에 통달하게 되는 거죠. 바깥이 추울 때 열쇠가 자물쇠에 꽉 끼어버리는 상황을 피하는 법을 알아요. 발을 디딜 때 어느 바닥 널이 살짝 휘는지 알고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옷장 문을 여는 법도 정확히 알죠. 집을 자기 집처럼 만드는 건 이런 작은 비밀들이예요.”-p.410~411]<br>원작에 충실했지만 ‘오베라는 남자’ 영화에 오베의 매력을 다 담기는 역부족이었다. 오베의 나이는 59세인데 너무 나이 든 배우가 주인공인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베가 ‘전형적인 심술쟁이 늙은이‘로 비춰지는 것도 별로였다. HBO에서 제작한 드라마 ’올리브 키터리지‘도 마찬가지다. 오베와 올리브를 너무 심술긏게 부각시킨 것 같았다. 사실 두 사람은 인간적인 사람이다. 살다보면 오베와 올리브처럼 용기 있게 행동하기가 쉽지 않다.&nbsp;<br>   &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1282/49/cover150/k162832578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2824974</link></image></item><item><author>페넬로페</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소금이 바다에 있는 건 맞지만... - [소금이 왜 바다에 있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362563</link><pubDate>Mon, 29 Jun 2026 18:2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36256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22139217&TPaperId=1736256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69/74/coveroff/k12213921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22139217&TPaperId=1736256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소금이 왜 바다에 있지</a><br/>브리기테 슈바이거 지음, 박광자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6년 06월<br/></td></tr></table><br/>이 책의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 제목이 흥미로웠다. ‘소금이 왜 바다에 있지’라는, 너무 당연해 평소에는 생각지도 않던 문장에 소설의 내용도 특별할 것 같은 기대감이 들었다. 본문에서 어린 화자가 바다에 왜 소금이 있는지 물었을 때, 그녀의 아버지가 사람들이 소금을 싣고 와서 바다에 뿌렸다고 얘기해주고 어머니는 그 말에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이 문장은 상징하는 것이 많고 소설 전체의 주제를 압축해 보여준다. 바닷물에 소금이 들어있어 짜다는 과학적 사실마저 가부장적인 남자의, 말도 안 되는 농담 섞인 한 마디로 무시될 수 있다. 또한 누구나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명제를 끝까지 인정하지 못하는, 태생적으로 우울하고 창작물이 없는 예술가 기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인생과 고통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nbsp;소설의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 또는 양 대전 후의 오스트리아 린츠 부근과 빈이다. 지방 소도시에서 존경받고 꼭 필요한 존재인 의사의 딸로 태어난 화자(끝까지 이름을 알 수 없다)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살아 온 삶을 똑같이 되풀이만 하면 중산층의 기득권과 소속감이 있는 낙원의 안정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 아버지의 말과 표정으로 행과 불행을 오가는 어머니, 끊임없는 핀잔을 들으며 얌전과 순종을 강요당하는 화자는 강한 가부장제의 그늘아래에 있다. &nbsp;나치를 아무 저항 없이, 당연히 받아들이는 그 당시 중산층을 대표하는 아버지는 너무 전형적이다. 화자가 어릴 때 만나 결혼하게 된 남편 롤프도 마찬가지다. ‘남자는 싫으면 싫다고 해도 되고, 싫은 것은 안 해도 된다(p.23)’라는 사고방식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적용된다.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그것을 당연히 생각하면서도 그들의 입방아에 오르지 않기 위해 위선적인 행동을 하는 것도 가식적이다. &nbsp;롤프와 오랫동안 연애를 했지만, 결혼에 확신을 가지지 못한 화자는 떠밀려,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결혼하게 된다. 대학 졸업을 하지 못하고 비서로 일하며 타자만 칠 수 있는 화자는 잘 난 남편을 모시며 전업주부의 역할을 잘 해내야 한다. 자신이 ‘칠칠치 못하고 부당하고 고마워할 줄 모르고 쓸모없고 비현실적이며 우울하고 불만투성이에 게으르고 뻔뻔하다고(p.42)' 생각하는 화자는, 남들처럼 살 수 없는 여자다. 다른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전개하는 삶의 진행을 받아들일 수 없다. 예민하며 겉으로 보이는 내가 자신이 아닌 것 같고, 알 수 없는 슬픔에 잠기고, 창작물이 없지만 예술가 기질을 가진 그녀는 가부장적인 남자가 원하는 내조를 할 수 없다. &nbsp;그런 화자의 결혼 생활은 당연히 불행했고, 그녀는 의사인 친구 알베르트와 외도를 한다. 롤프와 화자는 알베르트와 힐데 부부와 친구 사이이다. 하지만 알베르트 역시 롤프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는 화자를 섹스파트너로 여기며 그의 아이를 임신한 화자에게 피임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며 바로 중절 수술을 해준다. 힐데는 두 사람의 외도를 알지만 아이 때문에, 관습으로 그냥 알베르트와 살아간다. 알베르트와의 관계를 롤프에게 고백하고 그들은 이혼하고 갈 곳 없는 화자는 다시 부모님의 집으로 들어간다.      &nbsp;작가 ‘브리기테 슈바이거’의 자전적 내용이 담겨있는 이 소설은 따옴표를 쓰지 않고 대화체를 서술형 문장 사이에 넣어 형식을 파괴했지만 앉은 자리에서 다 읽힐 정도로 가독성이 좋다. 화자를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읽는 내내 공감되는 내용이 많았다. 수많은 소설에서, 특히 여성 작가가 쓴 소설에서 많이 본 한 여자와 그 가족에 얽힌 이야기지만, 이런 에피소드는 읽을 때마다 새롭다. 작가가 발표할 당시 페미니즘 소설로 엄청 관심을 모았지만, 지금 사람들은 언제 적 얘기를 되풀이 하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과연 이러한 내용이 지나간 구닥다리에 불과한 것일까?&nbsp;대학 동기인 A, B와 1년에 서너 번 만난다. 서로 하는 일이 비슷해 대화가 잘 통하지만 한 가지만은 이해할 수 없는 게 있다. 싱글인 B의 전업주부론이다. 나와 A는 결혼했지만 전업주부는 아니라 B가 우리들에게 하는 얘기는 아니지만, B의 말을 들으면 거북하고 기분이 나쁘다. B는 전업주부인데 남편에게 그 역할을 다하지 않는 여자를 싫어한다. 밖에서 돈 벌기 힘든데, 집에 있는 여자가 당연히 가사일과 육아를 전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특히 퇴직한 남편을 싫어하고 귀찮아하는 전업주부도 비난한다. 평생 돈 버느라 힘든 남편이 이제 집에서 좀 쉬어야 하는데 구박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B의 말이 전부 틀린 건 아니지만 들을 때마다 반감이 생긴다. B의 생각에는 여성의 가사노동에 대한 경제적 환산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적 가치뿐만 아니라 단지 경제적인 것이 권력과 권위가 되는 것의 무시도 말이 되지 않는다. &nbsp;물론 지금의 MZ세대는 B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겠지만 젊은 남성들은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심지어 극우화 되다시피 하는 젊은 남성들이 걱정된다. 그들에게 서로 같이 간다는 의지가 존재하는지.....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준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처럼 화자에게 남겨진 삶 역시 녹록치 않아 보인다.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계속 정신과를 전전할 화자가 말한 ‘누구나 스스로 돌보아야 한다(p.156)'는 의지가 실천되지 못한 채,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기도 한다. 일요일에 점심을 먹으며, 저녁은 뭐 먹지라는 생각을 하는 나 자신도 화자와 닮아 있다. 마음이 무겁고 우울해진다.&nbsp;[내가 필요한 것을 인정하면서 당신은 왜 날 떠나려는 거야, 라고 롤프가 묻는다. 그래야 하니까…내가. 그리고 카를도 그렇게 말했다…카를이 당신을 돌봐 준대? 아니, 카를이 누구나 스스로 돌봐야 한다고 했어. 길에 관해, 여행에 관해 글을 쓰면서 카를이 그랬어.&nbsp;사람은 길을 가는 중이다. 어딘가로 여행 중이다, 라는 말을 하려고 내가 롤프를 깨운다. 도로 표시가 되어 있고 아스팔트 깔린 길을 가는 사람들이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소리치고 있어. 나는 목적지 이름도 몰라. 아는 것이라고는 나 외에 아무도 거기서 날 기다리고 있지 않다는 거야. 카를이 그러는데, 나는 예술가 타입이래. 창작도 안하는데? 일생 동안 창작하지 못하는 예술가 기질의 사람이 있다고 카를이 말했어. 정말이지 카를이 진실을 말한 것 같아. 당신도 카를처럼 되고 싶은 거야? 자유롭고 별나게 살다가 카를이 어떻게 됐는지 봤잖아. 카를이 그러는데....이제 그만 자. 롤프가 말한다.-p.155~157]&nbsp; &nbsp; &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69/74/cover150/k12213921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4697482</link></image></item><item><author>페넬로페</author><category>페이퍼</category><title>데미언 허스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312350</link><pubDate>Tue, 02 Jun 2026 01:4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312350</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0536601&TPaperId=1731235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4672/41/coveroff/8960536601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 <br><br><br><br><br><br><br><br><br><br><br><br><br>1965년 영국에서 출생한 데미언 허스트는 어머니와 외할머니와 함께 살아간다.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데미언도 성당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곳에서 미래에 자신의 주요 작품 주제가 될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앨러튼 그레인지 스쿨과 리즈 예술 대학을 거쳐 런던의 골드 스미스 대학에 진학해 그림을 배운다. 1970년대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던 시기에, 데미언과 그의 동료들은 런던 항만 구역의 창고에서 &lt;프리즈&gt;라는 전시를 연다. 자신들의 힘으로만 전시를 기획해야 했지만, 이 전시를 계기로 데미언은 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큐레이터의 자질을 배웠고, 젊은 영국 예술가 그룹인 'yBa'를 탄생시킨다.&nbsp;데미언 허스트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작품 속에서만 머물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적극적으로 큐레이팅의 전 과정에 참여한다. ‘공간, 사물 및 전시회 자체를 매체로 사용하여 자신의 아이디어와 관심사를 시각과 예술적 실천 의지에 맞춰 큐레이팅(p.35)'하는 것이다. 세계적인 컬렉터인 찰스 사치는 데미언의 작품에 관심을 가져 그를 후원한다. 남다르고 기발하며 파격적인 데미언의 작품은 사회적 관심과 함께 상대적으로 많은 비판도 받는다. &nbsp;어렸을 때부터 데미언은 돌멩이나 광물, 책 등을 수집했다. 머더미(murderme-데미언의 수집 전반을 지칭하는 용어) 컬렉션으로 포름알데히드 동물, 곤충 캐비닛과 같은 작품으로 표현했다.&nbsp;[데미언의 수집품 ’머더미‘는 그의 주된 관심사였던 과학과 예술, 자연사, 죽음과 그 죽음을 이해하려는, 또는 그것을 피하려는 인간의 염원을 수집하고 정리한 행위로 보인다. 그렇기에 그의 수집벽은 불멸의 숭고함을 추구한 인간의 욕망과 절대로 죽음을 이길 수 없는 현실 사이의 간극을 얘기하고자 한 생각을 대변한다. 이런 일관적 태도가 머더미 컬렉션으로 이어졌고 그것이 데미언의 삶의 지도를 그대로 보여준다. -p.47~48]&nbsp;데미언은 나비와 곤충, 해골과 동물 등을 이용한 작품을 만들었다. ’그는 이를 통해 ‘삶에서의 죽음‘이라는 개념을 자연의 역사에 대한 시각으로 조명하는 데 전념해 왔음을(p.52)' 보여준다. 데미언 작품의 특이성은 그가 창립한 회사인 ’사이언스‘를 통해 조직적인 차원에서 창작을 하는 것이다. 체계적 시스템이 움직이는 곳에서 예술과 돈이라는 두 개의 목표에 가치를 둔다. 약국 레스토랑 운영도 하고 비지니스 매니저를 고용하여 그의 작품의 가격을 천정부지로 올려놓았다. 이런 면에서 많은 비판을 받지만 예술 창작에 돈이 필수적이라는 사실도 간과하기 어렵다.&nbsp;데미언 허스트의 작품에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많다.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오랫동안 의지한 것이 종교였다면 현대의 인간에게는 과학이 신앙을 대체한다는 사실이 그의 수많은 작품 속에 들어 있다. 이런 작품의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데미언은 해골, 시신 머리, 약병과 각종 수술 도구, 소머리, 파리, 상어와 소를 포름알데히드에 담는 것, 박제된 나비 등을 이용한다. 그런 오브제를 통해 죽음을 직면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한다. 죽음은 외면과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삶의 일부라는 사실과 생명이 들어있는 육신은 죽으면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nbsp;’약장‘작업을 통해 현대 사회의 의학과 과학도 비판한다. 진열장 속의 수많은 약병에서 죽음을 멀리하고 생명 연장을 실현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표현한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신을 섬기면서도 약을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태도(p.75)’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약은 약 자체로의 효능도 있지만, 형태와 포장에서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데미언의 ‘스팟 페인팅’은 제약회사가 약을 제조하듯, 동그라미를 반복적으로 그리며 약을 맹신하며 죽음을 멀리하는 인간의 생각을 풍자하고 있다. 또한 약과 포장 용기의 세련됨과 심미적인 것들이 사람을 기분좋게 해 그것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는 것에 대해 비판한다. ’스핀 페인팅‘, ‘팩트 페인팅’, ‘다이아몬드 해골 작업’을 통해서도 계속적으로 죽음, 삶, 예술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한다. &nbsp;&nbsp;『내가 만난 데미언 허스트』는 국립현대미술관 김성희 관장이 집필한 책이다. 데미언 허스트의 연대기적 삶과 그에 따른 작품 세계를 설명했고, 작가와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기획한 데미언 허스트에 전시에 맞춰 먼저 출간한 것으로 보인다. 책에 실려 있는 작품이 이번에 전시된 작품에 맞춰 잘 설명되어 있다. 마로니에 북스의 여러 화가에 대한 책은 보통 번역된 것이었는데 이번엔 한국인이 집필한 책이어서 반가웠다. 한국어로 쓰여진 책이라 읽기에 어렵지는 않았지만 김성희 관장의 문장은 많이 아쉬웠다. 또한 이 책은 화가에 대한 객관성이 부족했다. 화가의 예술론과 작품에 대한 설명만 있다. 데미언 허스트가 굉장히 사회적으로 비판받는 예술가라는 언급은 그 어디에도 없다. 화가의 이름을 계속 ’데미언‘으로 표기하다 마지막 작가 소개 페이지에&nbsp;‘데미안‘으로 표시되었다.&nbsp;데미언이나 데미안이나 그 어떤 발음도 가능하다는 뜻인지?&nbsp;[데미안 허스트는 1980년대 후반부터 설치미술, 조각, 회화, 드로잉을 통해 현대사회가 의식적으로 외면하거나 놓치면서 만들어낸 고정관념/신념 체계를 고찰하며, 미술과 과학, 종교, 그리고 대중 문화의 전통적인 경계에 도전해 왔다. 그는 특히 ‘죽음’속에 있는 강렬한 생명의 아름다움과 그 일시성의 불가피한 부패 등 삶의 이면에 담긴 숭고한 관념에 주목하며, 이를 관객 개개인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물과 물질의 기발한 조합으로 표현한다. -p.222]<br>-&lt;미다스와 무한&gt;, 나비, 큐빅, p.151<br>-&lt;신만이 아신다&gt;, 유리, 양, 포름알데히드 용액, p.155<br>-&lt;신의 사랑을 위하여&gt;와 함께 한 작가, p.182<br>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전시되는 &lt;데이미언 허스트전&gt;을 보러가기 위해 작가와 작품에 대해 먼저 알고 싶었다. (이번 전시는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데미언 허스트를 ‘데이미언 허스트’로 표기했다.) 책을 읽고 인터넷 검색을 했다. 책에 비해 다른 매체에서는 이 작가에 대한 비판이 많았다. 너무 상업적이라는 것과 그것을 위한 작가의 비도덕적인 사건도 있었다. 특히 예술을 표현하기 위해 인골이나 곤충의 박제,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담구는 동물을 이용하는 것에 많은 비판이 있었다.&nbsp;이런 이유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데미언 허스트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이 맞는가에 대한 논란도 많았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관람료를 8000원으로 저렴하게 책정했고, 오디오 가이드도 무료로 제공해 다른 미술관에 비해 상업적인 것을 지양하는 인상을 주었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비용이 충당되었는지, 아니면 부족분을 국민의 세금으로 상쇄시켰는지는 잘 모르겠다.      &nbsp;데미언 허스트 작가의 작품에 대한 호기심과 너무 돈을 밝히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양가감정으로 전시회 관람을 시작했지만, 완전히 그의 작품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데미언의 창의력에 놀랐고, 그가 추구하는 예술적 의미에 공감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아이러니를 이렇게나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작가의 천재성에 감탄했다. 주제가 작가 자신에게 머물지 않고 사회적 문제와 철학으로 확대되는 것에 생각할 것도 많았다. 무엇보다 작가의 메시지가 잘 이해되는 것이 좋았다. 지난겨울 관람한 &lt;장 미쉘 바스키아&gt;의 작품은 너무 어려워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br>데미언 허스트는 현대 미술의 판도를 뒤바꿔 놓았지만, 가장 논쟁적인 인물 중 하나이다. 이번 전시의 여러 섹션 중 &lt;모든 질문에는 의심이 따른다&gt;는 그의 20대 시절에 제작한 작품을 모아 놓았다. 회화의 소재가 너무 많은 것에 길을 잃은 허스트는 콜라주 시리즈 돌파구를 찾는다. ‘스팟 페인팅’은 한 화면 안에 같은 색을 반복하지 않으며 점 사이에 똑같은 간격을 유지한다. 여기에서 나중에 알약 시리즈로 확대해 나간다. ‘스핀 페인팅’은 1994년부터 연작 시리즈로 시작했으며 모터를 이용해 캔버스를 회전시키며 그 위에 물감을 뿌린다. 스팟 페인팅이 철저히 계산된 것이라면 스핀 페인팅은 우연성과 즉흥성을 표현한다.<br>-’살아있는 자의 마음 속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이 유리 상자는 20톤이 넘고 길이 4m가 넘는 상어가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담겨있다.  <br>-’천년‘이 상자 앞에 서면 뭔가 썩어가는 냄새가 난다. 두 개로 나뉘어진 부분 중 한 쪽은 죽은 소의 머리와 피가 있고, 다른 쪽은 구더기들이 파리로 부화한다. 두 쪽의 가운데에 나 있는 구멍으로 부화한 파리는 죽은 소의 머리로 갈 수 있다. 거기에서 영양을 섭취한 파리는 빛에 이끌려 위쪽의 보라색 전기 살충기로 가 죽는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삶과 죽음의 순환을 우리는 이 상자를 통해 보게 된다. 애써 잊으려고 하는 죽음을 적나라하게 나타내고 죽음으로 인해 또 누군가는 생명을 얻으며 그 또한 허망한 죽음을 향해 질주한다. &nbsp;&lt;우리는 시간 속에 산다&gt;는 거대한 유리 상자 안에 내용물을 넣어 관객을 철저히 관찰자적인 입장에서만 작품을 감상하게 한다. 여기서는 주로 죽음에 대한 메시지를 준다. 우리는 누구나 죽는 줄 알지만 그 실체에 대해 경험하지 못한 채 마치 그것이 없는 듯 살아간다.    <br><br><br>-‘신의 사랑을 위해’18세기에 실제 살았던 사람의 두개골을 백금으로 주조하고 8601개의 다이아몬드를 붙였다. 치아는 원래의 것을 살리기로 해 전문적인 세척을 거쳐 다시 이식했다. 두 개의 상반된 이미지를 통해 죽음을 화려하게 치장했지만 결국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고 죽으면 누구나 해골의 상태로 남을 뿐이다. <br><br>-사람과 동물의 겉모습은 매끄럽고 아름답지만 피부를 한 꺼풀만 벗기면, 뼈와 혈관, 근육으로 이루어진 물리적 조직체에 불과하다. 하나의 작품에 안과 밖의 두 가지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역시 죽음을 상기시킨다.<br>-‘벚꽃 시리즈’데미언의 어머니가 좋아했던 벚꽃<br>&lt;침묵의 사치&gt; 섹션은 이전에는 종교와 신을 숭배한 인간이 현대에는 의학과 돈을 맹신한다는 의미의 작품들이 있다. 종교와 과학이 만난 인간의 욕망의 허망함을 보여준다.&nbsp;**전시 작품에 대한 설명은 ‘오디오 가이드’중 일부분을 인용했다. <br>전시회장을 나와 뜨끈한 수제비와 기름진 빈대떡을 먹었다. 데미언 허스트의 작품과 그가 말해주는 죽음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어쨌든 죽을 수밖에 없는 내가 왜 이리 온갖 감정과 고통을 가지고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는지 많이 허망했다. 그 헛헛함을 일단 따뜻한 국물과 기름으로 채워야 할 것 같았다. 돌아서면 언제 죽음을 생각했냐는 듯 다시 욕망 가득한 삶을 살겠지만, 그럼에도 전시회장에서 잠시 겸손했고 평화로웠다.&nbsp;&nbsp;<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4672/41/cover150/896053660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46724163</link></image></item><item><author>페넬로페</author><category>페이퍼</category><title>시와 가벼운 단상</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293233</link><pubDate>Sat, 23 May 2026 18:0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293233</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6606056&TPaperId=1729323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9120/56/coveroff/8956606056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0121617&TPaperId=1729323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9/84/coveroff/8970121617_1.gif"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15880&TPaperId=1729323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55/19/coveroff/8932015880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45267&TPaperId=1729323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67/80/coveroff/8932045267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 <br><br><br><br><br><br><br><br><br><br><br><br><br><br>Jtbc 드라마 &lt;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gt;에서 배우 장미란(한선화 분)은 황동만(구교환 분)의 집에 놀러간다. 술을 마시다 미란은 동만의 작업실에 가본다. 원룸 같은 좁은 집의 베란다 한 구석에 동만은 글을 쓰는 공간을 마련해 두고 있다. 난방도 들어오지 않는 추운 곳이다. 미란은 그곳 책장에서 동만의 형인 황진만(박해준 분)의 시집 &lt;어딘가 묻어 있는 잘못&gt;을 꺼내 읽는다. 무심코 읽던 미란은 눈물을 흘린다. 진만의 시에 위로받은 미란은 위스키(분명 비싼 술일 것 같다)를 사서 진만을 찾아간다. 매번 소주만 마시는 진만에게 미란의 마음이 주는 감사였다.&nbsp;오랜만에 시를 읽었다. 한 때 윤후명 작가의 소설을 거의 다 읽은 적이 있다. 제목은 알아도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소설이 쉽지는 않았다. 작가가 영면하신지 1주년이 되었다는 잠자냥 님의 글을 읽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행간과 은유와 상징을 애써 찾아보지 않고 그저 소리내서 읽었다. 그런 것을 알려고 하면 시를 어려워하는 내가 이 책을 끝까지 읽지 못할 것 같았다. 그냥 미란처럼 읽었다. 그러자 나도 미란이 되었다. 글이 이미지가 되고 나는 작가의 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강릉과 부산, 부암동, 서촌, 고흐와 테오가 잠든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무덤이 생각났고, 하얼빈, 차마고도, 둔황, 키르기스스탄의 이식쿨호, 파미르고원, 황하를 상상했다. 시에 윤후명 삶의 궤적이 있었다. 시라는 형식을 빌려와 압축만 시켰지 ‘그냥 나 여기 있소‘ 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었다. 시는 그저 짧을 글일 뿐이지, 우주처럼 크고 웅장하다.   &nbsp;강릉에서 태어난 윤후명은 19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빙하의 새’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많은 양의 시와 소설을 집필했고, 그림도 그렸다. 작가가 화가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이제야 알게 되었다. ’윤후명 시의 주된 키워드는 ‘길’이다. 더 정확하게는 떠남과 귀환이 한 몸이 되는 길, 멀리 갈수록 자기 자신의 기원과 더 가까워지는 길이다(p.107)'라는 문학평론가 허희의 해설처럼 이 시집에는 여러 장소가 나온다. 작가 자신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새아버지, 친구, 스승, 다른 작가가 지나온 장소이다. &nbsp;1998년 개봉한 홍상수 감독의 영화 &lt;강원도의 힘&gt;을 보고 나의 지인은 ‘우리는 왜 강원도란 말만 들어도 주눅 들며, 지고 마는 걸까?’라며 자조 섞인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말을 듣고 우리는 한참 웃었고 수긍했다. 지금도 난 강원도의 힘을 믿으며 그곳을 좋아한다. 언제 가도 변함없는 산과 바다가 좋다. 윤후명의 고향은 강원도 강릉이다. 이 시집에는 강릉과 연어가 거슬러 올라오는 남대천에 관한 것이 많다. 그에게 강원도는 전쟁, 가난을 거쳐 살아 온, 어머니가 계셨던 삶의 현장이다. 그곳의 모든 것이 작가와 연결된다. &nbsp;나의 시어머니는 투 머치 토커에 해당되는 분이시다.  결혼하고 어머니를 뵐 때마다 어머니는 나에게 쉴새 없이 당신이 살아 온 이야기를 해주셨다. 이야기를 들어 줄 새 대상이 생겨 좋으셨나 보다. 어머니의 말씀은 재미있었고, 난 항상 감탄하며 넉넉한 추임새를 넣어 주었다. 시댁 식구들은 강원도에 산 적이 있다. 어머니는 그 시절의 얘기도 많이 들려주셨다. 한 번은 장독을 사러 기차를 타고 장에 다녀왔는데, 집에 돌아와 장독을 보니 거기에 미세한 구멍이 있었다고 했다. 그 당시 어머니가 느꼈을 속상함과 허무함이 시처럼 아득하게 보였다.     &nbsp;어머니는 이제 거동도 잘 못하시고, 귀가 안 들려 내가 가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는다. 나이 든 시인은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를 그리워하고, 윤동주, 미당, 목월, 이상과 구보, 동리, 김춘수, 김민기, 박완서, 이미륵을 생각한다. 팔순에 이르렀지만, 아득하고 자신이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어디론가 걸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시인과 내 엄마는 떠나고 아직 시어머니는 살아 계신다. <br>윤후명의 시를 읽으려고 그랬는지 마침 지난주에 부암동에 다녀왔다. ‘오징어 배를 탄 랭보’에서 시인은 ‘시를 이해하려고 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p.49)'고 했다.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이 시집이 잘 읽히고 이해되어 시인에게 고맙다. 시 ‘두둥실 두리둥실’을 읽고 나도 오랜만에 ‘사공의 노래’를 듣고 따라 불렀다.&nbsp;[풀밭 길&nbsp;풀꽃 핀 풀밭 길로 가고 싶다노란 꽃, 파란 꽃, 붉은 꽃 흐리게나마 피어가끔 마주치는 길이기를 바란다내 발길이 그 옆에 놓여신발을 벗어놓을 길이기를 바란다그동안 멀고 먼 길을 걸어왔건만’이건 내 길‘이라고 할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렇다면 그 험한 길이 모두 ’이건 내 길‘이었던가신발을 벗어놓고 그 길로 들어가고 싶었던 길비밀의 문이 없어도아무도 몰래 들어가 언제까지 있어도 좋을풀밭 길로 가고 싶다거기서 어디론가 사라져도 좋을풀밭 길로 가고 싶다’이건 내 길‘로 어느덧 가고 싶다 -p.24]<br>   <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67/80/cover150/893204526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678011</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