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페넬로페의 서재 (페넬로페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4542162</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기다림. 인생. 그리고 자유!'조개 줍는 아이'와 함께.....</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Wed, 28 Oct 2026 14:29:51 +0900</lastBuildDate><image><title>페넬로페</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145421624113067.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14542162</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페넬로페</description></image><item><author>페넬로페</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인간의 굴레 - [인간의 굴레에서 2]</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585749</link><pubDate>Thu, 22 Oct 2026 01:1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58574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0122&TPaperId=1758574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1/87/coveroff/8937460122_3.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0122&TPaperId=1758574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인간의 굴레에서 2</a><br/>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1998년 09월<br/></td></tr></table><br/>다양한 소재의 소설을 읽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독자는 사건의 흐름에 따른 인물의 선택을 지켜본다. 그것은 바로 또는 끝에서야 겨우 이해 될 수도, 아님 전혀 이해와 용납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독자가 인물을 지켜보는 방법도 다양하다. 각 사건에 나를 적극적으로 개입시켜 보거나, 냉정한 관찰자로 계속 바깥에 머무는 경우다.&nbsp;노희경 작가가 집필한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마지막 에피소드는 모자관계인 옥동(김혜자 분)과 동석(이병헌 분)의 화해 과정을 담고 있다. 결코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던 동석은 말기 암 환자로 곧 죽을 옥동과 여행하며 “도대체 그때 왜 그랬냐?”고 묻는다. 남편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동석의 친구 아버지 첩살이로 들어가는 옥동을 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옥동은 그때 미쳤었다며, 자신은 개 같은 년이니 장례도 치러주지 말라고 동석에게 대답한다. 글도 못 깨친, 어릴 때부터 박복하고 가난했던 옥동은 그저 동석에게 먹고 자고, 공부할 수 있는 환경만 제공되면 그 어떤 것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었다. &nbsp;그 짧은 옥동의 말과 수몰되어 찾아갈 고향도 없는, 제주에 살면서 여태 한라산에도 못 가본 옥동을 동석과 나는 한 번에 이해하고 말았다.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자신의 처지를 돌아볼 여유도 없이 그저 먹고 사는 일만 생각해야 했던 옥동의 선택은 그렇게 지리멸렬할 수밖에 없었다고 작가는 우리를 설득시키고 있다. 시청자가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준다.&nbsp;서머싯 몸은 자신의 분신인 필립을 독자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노희경 작가와는 달리 지나치게 세밀한 설명을 하고 있다. 글과 영상의 차이를 차치하고도 읽는 내내 지루한 부분이 많았다. 각 인물의 생김새나 성격에 대한 묘사도 장황했다. 조실부모와 신체적 불구라는, 인간의 조건 중 가장 최악의 것을 둘 다 갖춘 필립은 우리가 예상할 수 있듯 어린 시절부터 힘든 과정을 지나온다. 부모가 아닌 큰아버지와 큰 어머니 아래에서 컸고, 학교에서도 온갖 수모와 놀림을 당한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보통 사람과는 다른 콤플렉스와 어느 정도의 성격적 결함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을 이해하고 그를 동정하지만 매 순간 필립이 내린 선택과 결정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nbsp;필립은 어떤 사건을 겪은 후, 매번 일기, 또는 긴 독백같이 자신을 되돌아본다. 변덕스러울 정도로 감정의 변화가 빠른 필립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끊임없이 복기한다. 그가 느낀 감정들과 후회, 회한이 쏟아진다. 서툴고 설익은 선택과 행동은 그만큼의 후회를 가져오지만, 필립은 그런 과정을 겪으며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만들어간다. 견고한 정체성으로 이어지는 그 흐름에서 내가 겪어온 많은 혼란과 패배도 볼 수 있었다. 특별한 것 같은 필립에게서 인간적이며 보편적인 정서도 발견되었다. 우리는 누구나 허술하며, 후회되는 행동을 수없이 반복한다는 사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그렇게 성장하고 있는 것 아닌가? &nbsp;우리는 공부를 하고 책을 읽으며 자신과 사회에 대해 형이상학적 고찰을 한다. 철학을 탐구하며 이성을 확립시키지만 결정적일 때 본능과 감정이 앞서며 앞의 것들을 무용지물로 만들 때가 많다. 필립은 특히 밀드레드와 얽히면 열정과 감정의 격정으로 인해 이성을 잃어버린다. “사색 끝에 확립한 적절한 작은 준칙”이 여지없이 허물어져 버린다. 밀드레드와 관련된 부분이 나올 때마다 답답했다. 밀드레드가 필립의 모든 것을 때려 부수고 사라졌을 때는 숨이 멎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밀드레드에 대한 인간적인 정을 멈추지 않는 필립을 보며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굴레에 얼마나 취약한가를 알 수 있었다. 인간에게는 각자의 굴레가 존재하며, 그것에서 벗어나기는 정말 어렵다. &nbsp;매번 인생 전체를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느냐의 고민을 한 필립은 크론쇼가 그에게 준 페르시아 양탄자에 들어있는 의미를 깨닫고, 자유를 느끼며 굴레를 내려놓는다. 인생에는 별다른 뜻이 없으며, 그저 각자의 방식으로 페르시아 양탄자의 무늬를 직조하면 된다는 것이다. “직조공이 양탄자의 정교한 무늬를 짜면서 자신의 심미감을 충족시키려는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을 갖지 않았듯이, 사람도 그렇게 산다(p,366).“ 주식 투자로 가진 돈을 모두 잃고 가난에 허덕이는 어려운 시기에 필립은 이러한 에피파니(Epiphany)를 느낀다.&nbsp;만약 젊었을 때 내가 이 책을 읽었다면 이런 필립의 깨달음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내려놓음과 회색적 삶의 경계를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회피나 나약함, 자기 합리화를 용납하지 못했기도 했다. 나이 들어 뒤늦게 이 책을 읽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제야 약간 ‘강물처럼 흘러가는 삶’이 무엇인지, 나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성자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아 필립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전부 다는 아니지만.....&nbsp;『인간의 굴레에서』의 철학은 현실주의적 관점과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p.518). 서머싯 몸에게서 프랑스의 자연주의 문학, 즉 플로베르, 졸라, 모파상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는 사건과 인물, 작가의 부연 설명이 촘촘하게 들어있다. 서머싯 몸의 생각이 담긴 철학과 예술, 삶에 대한 좋은 문장도 많다. 교양소설이라 끝이 약간 싱겁고 클리셰가 많아 아쉽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힘들이지 않고 알 수 있는 장점도 있다. &nbsp;우리가 가진 굴레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는 것은 결국 각자의 몫이다.&nbsp;[모퉁이 저편에 경찰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되,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르라. -1권, p.429&nbsp;사람의 행동이 사람의 선택을 넘어서는 곳에 있다고 믿어야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도 그렇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삶도 나름의 무늬를 짜고 있다.-2권, p.366]           <br><br>&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1/87/cover150/8937460122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18703</link></image></item><item><author>페넬로페</author><category>페이퍼</category><title>‘가능함’의 역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557191</link><pubDate>Tue, 06 Oct 2026 13:3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557191</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139247&TPaperId=1755719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81/25/coveroff/k692139247_2.jpg" width="75" border="0"></a>&nbsp;<br/><br/> <br><br><br><br><br><br><br><br><br><br><br><br>성해나 작가가 기담(奇談)을 집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기담(이상야릇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이라는 특성 때문에 너무 비틀거나 멀리 가, 개연성이 부족하고 황당해지면 곤란할 것 같았다. 그의 단편집인 『혼모노』의 내용과 문장에 반해 팬이 되었는데 혹시 실망하게 될까봐 이 책을 읽을지 고민을 많이 했다.&nbsp;기대 반, 우려 반으로 읽기 시작한 작가의 기담집은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내가 매력적으로 느끼는 작가의 문장은 여기서도 돋보였다. 감정이 절제되고 건조하기까지 한 문장은 독자의 상상력을 최대로 올리게 해주었다. 딱히 비유나 상징을 내세우지 않아도, 애써 깊이 들어가려하지 않아도 사실과 의미가 잘 이해되었다. 쉽게 읽히면서도, 점점 고조되는 감정과 팽팽한 긴장감으로 몰입할 수 있었다. 읽고 난 후에 느껴지는 서늘함, 여운, 찝찝함도 기담다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쿄 기담집』보다 더 좋았다.    &nbsp;어제, 오늘, 내일이라는 세 개의 주제에, 각 3개의 단편이 들어있는 이 기담집은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진다. 이미 지나갔지만 역사로 남아 유령처럼 계속 우리 삶에 스며있는 ‘어제’는 지금도 번성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친일로 부를 쌓은 인간들은 대를 이어 부자로 살며 애써 감추려하지도 않는다. 혜택을 누리면서도 이미 지나간 조상의 치부로만 단정하며 자손들은 죄가 없다고 읍소한다. 여태껏 편히 살았으니 자손들도 그대로 살아가길 바란다. 일본의 만행으로 고통 받은 사람들의 상처는 그대로이다. 문중과 가문만을 중시하며 내것만을 지키고자 한 조상의 얼에는 타자에 대한 연민이나 이해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nbsp;오늘의 세계는 온전히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어제는 물론이고 내일마저 반영해야 한다. 거기에 인간 각자가 짊어져야 할 무게도 만만치 않다. 현실이라는 땅에 발을 붙이고 정신 차리고 살아내야 할 하루라는 것에 질려 일탈을 꿈꾸기도 한다. 허울뿐인 것에서 탈피하기 위해 아무것도 아닌,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다른 이의 인생을 사기도 한다. 말이 안 되게 누군가를 혐오하고, 말도 안 되는 것에 중독된다. 아닌 줄 알면서도, 종이 한 장 차이밖에 없는 폭의 강을 건너자마자 그것이 진짜라고 믿어버린다. 보편적 관념은 존재하지 않고, 내가 믿어버리는 것이 정의와 진리가 되어버린다. &nbsp;미래에 호모 사피엔스 종이 남아 있기나 할 것인지? 온통 AI얘기뿐이다. 자율주행자동차를 3일만 타고 다니면 그동안 인간의 운전이 얼마나 위험했는지를 실감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사람의 기능을 가진 휴머노이드의 역할도 당연시 되고 있다. 고도의 기능성과 편리함을 갖춘 사회가 눈앞에 와있지만, 거기에 따른 인간의 소외와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는 잘 모른다. 여태껏 그래왔듯이 어떻게든 인간은 위기를 넘기고 살아남을 수 있을것이라는 막연한 희망만 가진다. 어쨌든 낙관보다 음산한 디스토피아적 느낌이 더 강하다. &nbsp;기담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우리의 문제들을 현실적인 감각으로 서술한 성해나의 『인비인(人非人)』은 생각할 것이 많다. 작가는 여러 방향으로 접근하고 서로 고민을 나누어야 할 사회적 문제를 기발하고도 재미있게, 씁쓸하고도 서늘하게 서술했다. 어렵지 않으면서도,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한 작가의 재치도 좋았다. 각 단편의 소재도 특이했고, 무엇보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보편성이 오히려 기담의 형식을 파괴한 역설인 것도 같아 신선했다. &nbsp;[역사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일 테지. 홈은 파내고 구실은 잘 덮으며. 그리고 언제까지고 내게는, 아니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 일도. -p.22,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 중에서 다들 제가 무려 1800명을 학살하고 생체 실험한 전범이라던데, 선생, 난 아직도 그 말이 이해 가지 않습니다. 전범이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그저 요시무라 교수의 조수이자 하수인이었을 뿐입니다. 제 손으로 죽인 건 가타마리 하나뿐이고, 그 죄를 달게 받겠다고 해도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습니다. 그저 나를 빤히 바라보고 비웃을 뿐입니다.-p.46, '인비인’ 중에서&nbsp;얼굴만 남은 로봇과 눈이 마주친다. 그것은 뚝뚝 끊기는 합성음을 내며 더듬더듬 말한다. 당신은..... 무사할 거야, 아미고. 야키마 H1이 바닥에 질질 끌리며 옮겨지고, 감독은 그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조급히 다음 촬영을 준비한다.........낯빛이 하얗게 질려 있던 촬영기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는 오토 모드로 작동하는 카메라로 대체된다. 주위를 둘러 보다 나는 생각한다. 이곳엔 인간이 몇이나 될까. -p.228~229, ‘아미고’ 중에서&nbsp;서둘러 문을 열려는 이익의 어깨를 그것이 지그시 잡았다. 손이 따뜻했고, 둔중한 맥까지 느껴졌다. 산 자의 것도, 망자의 것도 아닌 맥이. 긴장이 풀릴 만큼 나직하고 부드러운 투로 그것은 이익에게 말했다. 필요할 때는 언제든 찾아오라고 했잖아. 나는 네 편이니까. 그것이 이익과 눈을 맞추었다. 그것의 일그러진 한 쪽 눈에 이익이 비쳤다. 그것이 되물었다. 그래, 내가 다시 필요해진 거지?P.305~306, '고(蠱)‘ 중에서]&nbsp;&nbsp;기담집 『인비인』의 어제, 오늘, 내일 카테고리에는 각 5곡씩 작가가 선정한 플레이리스트가 들어있다. QR코드로 접속하면 들을 수 있다. 각 단편 끝에는 두 페이지 분량의 작가 코멘트도 있다. 작품을 쓰게 된 계기와 의도, 약간의 해설이 들어있다. 이 부분은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없어도 괜찮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을 읽으면서, 독자가 나름 상상하며 의미를 파악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데 굳이 작가의 해석이 필요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물론 코멘트로 여러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유익했다.&nbsp;단편 &lt;인비인(인간 아닌 인간)&gt; 코멘트에서 작가는 미술가 ’패트리샤 피치니니‘의 조각을 노트북 화면에 띄워둔 채 이 소설을 썼다고 했다. ’비인간의 형태를 담아내면서도 결국 인간으로 귀결되는 그녀의 연작이 소설 속 ‘가타마리’와 닮아서일까(p.50)‘라고 쓰여 있다. 패트리샤 피치니니의 작품이 궁금해졌다. 작품의 어떤 점에서 가타마리가 연상되는지 성해나 작가가 언급한 조각이 보고 싶었다. 검색해보니 마침 수원시립미술관에 패트리샤 피치니니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nbsp;&lt;인비인&gt;은 하얼빈의 731부대가 자행한 생체실험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1943년 히라누마 가즈오로 창씨개명을 하고 교토대로 유학간 나는 요시무라 히사토 교수를 오야지로 부르며 충성을 맹세한다. 나를 신뢰한 교수는 나를 생체실험의 현장인 하얼빈 핑팡구로 데려간다. 나는 120동안 그곳에 머물며 끔찍한 생체실험에 가담한다. 일급 실험체인 조선인 임산부에게는 온갖 균이 주입된다. 심한 고통에도 그 여자는 오래 버텼고, 결국 해산하고 죽는다. &nbsp;그녀가 낳은 생명체는 치댄 밀가루를 얼기설기 뭉쳐놓은 형태에, 눈도 귀도 없이 코와 입만 겨우 붙어 있었다. 팔다리는 물론 생식기도 없는 환형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어 덩어리란 뜻의 ‘가타마리’라고 불린다. 요시무라 교수가 떠나는 날, 동경으로 데려가 논문의 실험체로 쓸 목적의 가타마리는 그동안 내가 돌보게 된다. 짐승이기도, 사람이기도 한 가타마리를 돌보며 나는 피폐해지기 시작하지만 가타마리는 집요하게 나에게 따라붙는다. 견딜 수 없게 된 나는 결국 땅을 파고 산채로 가타마리를 묻어버린다. 그 후 한국으로 돌아와 평범하게 살던 나는 최근 하얼빈 근린공원에서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거기에 가타마리로 추정되는 뼈도 있었다.<br>지하철에서 경기도 광역버스를 갈아 타 도착한 수원시립미술관은 수원 화성행궁 광장에 위치해 있었다. 호주 멜버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패트리샤 피치니니는 실리콘, 유리섬유, 머리카락 등을 이용해 살아있는 듯한 극사실적 조각을 작업한다. 극사실적 초현실주의 작가로서, 그녀가 추구하는 예술은 독창적이다. 환경운동가로도 활동한 피치니니는 인류의 과학적 발전을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의 혜택이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과학의 발달으로 인한 진보가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닌 더불어 상생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br><br><br><br><br><br>이번 전시 제목은 ’킨쉽(Kinship)'이다. 친족, 혈연, 가족 관계의 뜻으로 해석되는 킨쉽이 피치니니에서는 ‘인간 중심의 전통적인 관계 개념에만 머무르지 않고 낯선 생명과 마주했을 때 느끼는 거리감과 불편함을 넘어, 익숙하지 않은 존재와도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여기는 태도’로까지 확대되는 개념이다. 전시회장에서 본 피치니니 조각의 모습은 새로운 생명체였고 그것은 인비인의 가타마리와 묘하게 닮아있었다. 인간에게서 태어난 가타마리가 인간 아닌 인간이라면, 피치니니의 생명체는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nbsp;환경의 변화로 인해 앞으로 우리가 맞닥뜨릴 새로운 생명체가 출현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그들을 대할 것인가가 피치니니 조각의 주제이다. 이것은 AI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만나게 될 수많은 인간 아닌 인간에 대한 우리의 대처방법과도 일맥상통한다. 꼭 인간과 모습이 다른 생명체가 아니더라도 종교, 인종, 국가, 정치 이념의 차이로 인해 생각과 행동을 달리하는 수많은 타자들을 만났을 때, 우리의 태도는 어떤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할 여지를 준다. &nbsp;메리 셸리의 괴물, 휴머노이드, 과학의 발전으로 인한 환경의 변화에서 저절로 탄생한 새로운 생명체에 대한 책임은 모두 우리에게 있다. 그러한 사실을 당연히 인식하지만, 지금 우리 역시 프랑켄슈타인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임이 명백하다. 영화를 예술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작금의 현실이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른 타자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얼마나 강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nbsp;피치니니의 조각에서 인간과 다른 부분이 많지만, 인간을 특징짓는 흰 색과 검은 색으로 구분된 눈, 말 할 수 있는 입을 가진 생명체의 눈은 모두 슬프게 표현되어 있다.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자신들의 처지를 말해주고 있다. 영화 호프가 연상되었다. 데이미언 허스트의 작품도 그렇지만 이번 전시 역시 특이했다. 현대미술 특징 중 하나가 독창성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걸 실감했다. <br>이창동 감독의 영화 &lt;가능한 사랑&gt;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울하고 무거웠다. 러닝 타임 내내 거의 모든 관객이 소리 하나 내지 않을 만큼 몰입도가 최고인 영화였다. 옆자리에 앉은 남편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걸려 내가 타박할 정도였다. 특별할 것도 없는 스토리지만 스크린을 통해 너무 현실적인 모습을 봐서인지 서늘하고도 착잡한 감정만 남아 있다.&nbsp;영화 ‘가능한 사랑’에는 여러 관점과 층위, 다양한 욕망과 메시지가 들어있지만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에 의한 계급의 극단적 양분화가 가장 중요한 소재였다. 그것으로 인해 끄떡도 없거나 또는 파괴되는 인간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절대 깨지지 않고 역전되지 않을, 신처럼 군림할 수 있는 진리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암울함도 남겨준다. ‘가능’의 여지가 없는 단단한 불가능의 세계만 있을 뿐이다. &nbsp;영화를 보고나서 패트리샤 피치니니의 전시회가 생각났다. 피치니니의 가능성의 세계가 이창동 감독의 영화로 인해 멀게만 느껴졌다. 현실에 직면한 우리가 아직 오지도 않을 가능성에 대해 과연 생각할 여지가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타자에 대한 태도는 저절로가 아닌 노력으로 유지되는 경우가 많은데, 현실의 팍팍함에 직면한 우리가 과연 시선을 돌릴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숲속에서의 호석(설경구)이 울부짖는 소리가 잊혀지지 않는다. &nbsp;성해나 기담집의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은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파에 대한 이야기다. 향이 좋고 견고한 벚나무로 짠 책상은 계속 대물림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단죄되지 못한 괴물은 점점 자라 최고의 빌런으로 진화한다. 영화 ‘가능한 사랑’에서 일제강점기에 경찰로 근무한 조부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상우(조인성)는 어떤 프로젝트를 성사시키며 이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 벌어들이는 돈의 액수는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청산되지 못한 역사로 성장한 이 땅의 상우는 벚나무 책상처럼 여전히 건재하다. &nbsp;‘가능함’의 역설은 불가능한 사랑이 아닐까.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81/25/cover150/k692139247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5812549</link></image></item><item><author>페넬로페</author><category>페이퍼</category><title>[마이리뷰] 책 읽고 싶어서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 [책 읽고 싶어서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 일의 시대는 어떻게 읽는 사람을 집어삼켰는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510126</link><pubDate>Fri, 11 Sep 2026 19:4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51012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2627124&TPaperId=1751012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20/18/coveroff/896262712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2627124&TPaperId=1751012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책 읽고 싶어서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 일의 시대는 어떻게 읽는 사람을 집어삼켰는가</a><br/>미야케 가호 지음, 서영찬 옮김 / 동아시아 / 2026년 07월<br/></td></tr></table><br/>지하철에서는 거의 모두가, 심지어 걸으면서도 스마트폰을 보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다. 당연히 책 읽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책 읽고 싶어서 회사를 그만 두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br><br>책 읽고 싶어 회사를 그만두고 그 후 독서에 관련된 일을 하는 ‘미야케 가호‘는 왜 노동과 독서가 양립할 수 없는 사회가 되었는지 분석한다. 이 책은 일본의 메이지 시대부터 2010년까지 일본 독서 경향의 흐름을 서술한다. 대부분 일본인 작가가 쓴 책을 언급하며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변화와 이유를 쓰고 있다.<br><br>저자가 고민하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이 책에 들어있는 내용이 너무 일본적이라는 것이 아쉽다. 여기서 우리가 가져올 수 있는 내용적 공유가 거의 없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부족하다. 나머지 짧게 서술한 결론은 사실 평이할 정도다. 독서 인구의 감소와 노동과 독서 양립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 든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20/18/cover150/896262712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8201806</link></image></item><item><author>페넬로페</author><category>페이퍼</category><title>큐비즘과 큐비스트</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503193</link><pubDate>Tue, 08 Sep 2026 17:5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503193</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0530050&TPaperId=1750319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94/61/coveroff/8960530050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02834164&TPaperId=1750319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1968/57/coveroff/k002834164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22835662&TPaperId=1750319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8176/27/coveroff/k422835662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큐비즘은 프랑스 출신의 조르주 브라크와 파리에 정착한 스페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 두 젊은 예술가에게서 출발한다. 이들은 다양한 영향을 흡수하는 동시에 전통적 재현의 규범을 해체하고, 기하화와 추상을 통해 새로운 시각적, 개념적 언어를 구축했다. 원근법은 투명한 무채색의 선형 격자로 대체되었으며, 양감과 모티프는 납작한 다면의 평면으로 분해되어 대상을 암시하는 형식으로 재구성되었다. 이후 파리에 거주하던 스페인 작가 후안 그리스 역시 합류하며, 그 전개를 한층 심화시켰다.&nbsp;처음에는 제한된 범위에서, 전개되었던 이들의 급진적인 실험은 곧 로베르 들로네, 알베르 글레이즈, 페르낭 레제 등 다른 그룹에 속한 예술가들에게 확산되었고, 파리의 살롱 전시를 통해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기욤 아폴리네르는 그 내부의 다양한 경향을 구분했다. 앙리 로랑스, 자크 립시츠는 조각 분야에서 큐비즘을 실험했다.(큐비스트: 시각의 혁신가들-퐁피두 한화 서울 제공)  <br> <br>&nbsp;&nbsp;&nbsp;&nbsp;<br><br><br><br><br><br><br>1907년 세잔의 회고전을 방문하고 강한 인상을 받은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는 그 후 3년 동안 실험적 작업을 한다. 브라크의 정물화와 풍경화를 본 평론가 루이 복셀은 ‘기하학적 도식, 즉 큐브(cube)로 환원되었다’는 표현을 써 피카소와 브라크는 &lt;큐비스트&gt;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br>-p.230, 조르주 브라크 ‘에스타크의 집’, 1908년&nbsp;조르주 브라크는 프랑스 남부에 있는 마을인 에스타크를 납작한 모양의 큐브로 그린 작품 ’에스타크의 집‘을 통해 대상을 단순화시킨다. 브라크의 영향을 받은 피카소도 처음엔 그와 비슷한 그림을 그리지만 나중엔 아이디어의 가능성을 더 확대시킨다. 1910년 경의 갈색과 회색톤, 기하학적 형태로 이루어진 이 시기의 그림을 ‘분석적 큐비즘(p.232)’이라고 한다. 모든 것은 파편화 되어 있고 미학적 장치는 모두 생략된 회화였다. 대상들을 쪼개며 다른 여러 시점에서 보았을 때의 형상으로 표현했다. <br>-p.233,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여인들’, 1907년&nbsp;큐비즘을 말할 때, 바르셀로나의 매춘부를 그린 피카소의 &lt;아비뇽의 여인들(1907년)&gt;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그림은 큐비즘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다. 핑크빛 누드의 다섯 여인 중, 세 명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고 두 명은 아프리카 사람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아프리카의 토속 장식품, 세잔의 ‘목욕하는 사람들’, 엘 그레코의 ‘성 요한의 계시’를 참고하여 여지껏 볼 수 없었던 획기적인 그림을 완성시킨다. 그 후 피카소의 그림은 알아볼 수 있는 형태와 선명한 색감으로 변화되며 여러 오브제를 사용한다. 피카소의 ‘파피에 콜레(종이 콜라주)’ 기법이다. &nbsp;브라크와 피카소에 의해 시작된 큐비즘은 후안 그리스, 로베르 들로네, 알베르 글레이즈, 페르낭 레제 등 다른 그룹에 속한 예술가들에게 확산된다. 아폴리네르와 그의 연인인 화가 마리 로랑생도 이 시기에 활동한다. 너무 조각나 피카소와 브라크의 작품이 조금 어렵다면 후안 그리스의 작품은 훨씬 더 알아보기 쉬워 관객에게 친근하게 다가온다. 큐비즘의 여러 실험적 태도는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었고 그곳에서 개성있는 양식으로 창조되었다. 러시아의 수프리마티즘과 레이오니즘으로, 또한 다다와 초현실주의, 20세기 조각과 건축에 까지 영향을 주었다. <br> <br>&nbsp;&nbsp;&nbsp;<br><br><br><br><br><br><br>파리의 마레 지구, 특히 보부르 지역은 낙후된 곳이었는데 이곳에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은 재생사업을 목적으로 문화센터를 만들었다. 대통령의 이름을 따 1977년에 개관한 &lt;퐁피두 센터&gt;는 현대 미술관, 도서관, 어린이를 위한 공간 등 다양한 문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은 프랑스의 메츠, 스페인 말라가, 벨기에 브뤼셀, 중국 상하이에까지 진출했고, 2026년 한국에 파트너십으로 개관했다. 에펠탑처럼 철골을 주재료로 했고, 보통 보이지 않을 내관을 외부에 배치했다. 외관의 파이프는 전기, 물, 공기가 지나가는 통로이다. 피카소, 칸딘스키, 마티스, 샤갈, 미로의 작품이 많다. 4층과 5층에 위치한 상설 전시장에는 주기적으로 전시되는 작품이 바뀌고 나머지는 세계 다른 미술관으로 옮겨가며 전시된다. 퐁피두 센터 5층엔 아방가르드 작품이, 4층은 1965년 이후의 동시대 다양한 예술 작품이 있다.  &nbsp;[흔히 사람들은 현대 미술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10년만 지나도 급변하는 세상인데 100년 전에 ‘마이웨이’를 걸은 예술가의 마음속을 이해하기란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하지만 이 시기가 존재했기에 오늘날의 대중문화가 탄생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내면의 아름다움을 연구하는 현대 미술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감정을 일깨워주곤 하지요. 다시 말해 예술가가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예술가의 삶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p.270]<br>&lt;퐁피두 센터 한화 서울&gt;이 개관했다. 개관전인  &lt;큐비스트: 시각의 혁신가들&gt;은 1907년부터 1927년까지의 큐비즘의 변화를 조망하고 여러 큐비스트의 그림을 시대별로 전시한다. 조르주 브라크와 파블로 피카소에 의해 시작된 큐비즘은 로베르 들로네, 소니아 돌로네, 알베르 글레이즈, 페르낭 레제 등으로 이어지고, 작품의 경향도 달라진다. 큐비즘의 시작(1907~1908), 분석적 큐비즘(1909~1911), 살롱 큐비즘(1910~1913), 오르픽 큐비즘(1912~1914), 종합적 큐비즘(1912~1914), 국경을 넘은 큐비즘(1912~1914)의 6개의 섹션으로 전시된다. ’오르픽 큐비즘‘은 예술가가 전적으로 창조하고 강력한 현실성을 부여한 요소들로 새로운 총체를 그려내는 것이다. ‘KOREA FOCUS'라는 이름의 특벽 섹션은 20세기 전반의 큐비즘과 아방가르드의 영향을 받은 한국의 다양한 작품을 보여준다.&nbsp;몇 년 전 파리 여행을 갔을 때, 파리에 있는 미술관 중 어디를 가고 어디를 패스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루브르와 오르셰는 무조건 가야할 것 같고, 오랑주리에서 모네의 수련을 보고 싶어 퐁피두 센터는 패스하여 아쉬웠다. 한국에 퐁피두 분관이 생긴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웠는데 드디어 개관을 해 다녀왔다. 63빌딩의 상징이었던 아쿠아리움을 없애고 그곳을 리노베이션한 전시장은 멋있고 쾌적했다. 공간이 넓고 길어 관람객들이 분산될 수 있었고 전시장 가운데에 의자가 많아 중간에 쉴 수 있어 좋았다. 전시장 안에 식당과 카페가 많아 그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셔틀 버스를 타고 지하철역까지 갈 수 있는 편의 시설도 괜찮았다. &nbsp;63빌딩은 우리나라의 고층 건물의 상징이었고, 그곳에 있는 아쿠아리움은 지방에서 친정 엄마가 오셨을 때나, 딸아이가 어릴 때 많이 다녔던 곳이다. 그 후 코엑스와 롯데 월드타워에 아쿠아리움이 생겨 63빌딩은 잘 안 가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당신이 오늘 한 일을 금방 잊어버리는 중증 알츠하이머 현상을 보이시던 엄마를 모시고 월드타워 아쿠아리움에 엄마를 모시고 간 적이 있다. 내가 한 일, 보고 들은 것을 금방 잊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생의 가장 슬픈일이 아닐까? 그래도 우리 형제들은 무조건 엄마를 모시고 다녔다. 엄마는 물 속에 있는 물고기를 보는 것을 힘들어하셨다. 조명 탓에 물이 울렁이는 모습을 보고 어지럽고 무서워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셨다. 뜬금없이 큐비스트의 작품 전시 덕분에 돌아가신 엄마를 잠시 생각하게 되었다.&nbsp;제미나이에게 아쿠아프라넷 63에 있던 수중 생물들은 다 어디로 갔냐고 질문했다. 그것들은 한화호텔앤드리조트가 보유한 다른 전국 아쿠아플라넷 지점들로 나뉘어 재배치되었다고 한다. 아쿠아플라넷 일산, 광교, 여수, 제주 등 전국 계열 지점으로 분산 이전 되었다고. 희귀 해양 표본(실러캔스 등)도 다른 곳으로 이동해 보관, 전시 중이라고 한다.  &nbsp;모든 것이 조각난 큐비즘은 한 눈에 이해하기 어렵다. 인상주의 화가 그림처럼 그냥 보기만 해도 감정이 뿜어져 나오는 것과는 다르다. 순간의 현상과 느낌으로 그린 그림답게 관객도 순간적인 감상에 사로잡힌다. 반면 큐비즘 계열의 작품은 오래보아야 하고 해설도 참고해야한다. 뭘 말하는지 잘 모르지만, 자세히 보고 해설을 참조하면 그제야 ‘아! 그렇구나!’라고 이해가 되면서 한편으로 감탄하게 된다. 사람이나 여러 가지 형상을 어쩜 이렇게나 창의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지 예술가의 위대함을 실감하며 역시나 존중하게 된다. &nbsp;이번 전시는 모든 것이 새로워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조금 알고 있었던 피카소와 브라크 말고도 다른 여러 생소한 화가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어려웠던 피카소와 브라크의 작품도 좋았지만 후안 그리스의 작품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친근하고도 더 의미있게 다가온 것 같아 반가웠다. <br><br><br><br><br>-프란티세크 쿠프카<br>-지노 세베리니<br>-장 메챙제<br>-마리 로랑생<br> <br>&nbsp;&nbsp;&nbsp;&nbsp;&nbsp;&nbsp;  &nbsp;&nbsp;&nbsp;&nbsp;&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8176/27/cover150/k42283566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81762739</link></image></item><item><author>페넬로페</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오뒷세이아 - 책잇기    - [오뒷세이아,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위대한 영웅의 여정에서 내 인생의 길을 찾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492084</link><pubDate>Thu, 03 Sep 2026 18:2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49208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49633&TPaperId=1749208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05/86/coveroff/893744963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49633&TPaperId=1749208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오뒷세이아,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위대한 영웅의 여정에서 내 인생의 길을 찾다</a><br/>김태진 지음 / 민음사 / 2026년 07월<br/></td></tr></table><br/>영화 한 편의 파급력이 얼마나 큰지 많은 사람과 여러 매체에서 ‘오뒷세이아’ 얘기를 하고 있다. 웬만큼 이름 있는 유튜버들은 각자의 채널에서 한번쯤은 영화와 호메로스 서사시를 다룰 정도다. 다들 자신이 남들과 차별되고 특별한 것 같이 말하지만 들어보면 거의 내용의 흐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영화와 유튜브만으로 ‘오뒷세이아’를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꽤 있을 것이다.&nbsp;호메로스의 원작은 내용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다만 여기에 나오는 그리스 신들과 고대 희랍 용어, 그 당시 생활 방식이 익숙지 않아 주석을 의지해 읽어야만 한다. 당연히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아 읽는 속도가 느려진다. 천천히 시간을 두고 읽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지쳐버려 중간에 포기하기 쉽다. 완독하더라도 3000년 전 고대 희랍의 생소한 이야기에서 어떤 것을 가져와야 할지 막막한 경우가 많다. &nbsp;‘오뒷세이아’의 범위는 거대하고 여기에 들어있는 의미는 다양해 사실 이 책은 여러 번 읽으면 좋겠지만 그 또한 쉽지 않으므로 번역자나 연구자의 해제나 해석을 참고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기본 개념을 먼저 알아야 자기 주도 학습이나 응용이 가능할 것이다. 이 책을 번역한 천병희, 이준석, 김헌의 개성 있는 해석도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nbsp;김태진의 『오뒷세이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원전의 구성과 달리 시간 순으로 10개의 중요한 에피소드를 선택해 설명한 책이다. 제목과는 달리 ’어떻게 읽을 것인가‘보다는 주로 내용을 서술했다. 거기에 저자의 느낌을 표현했는데 사실 깊이는 별로 없다. 각 챕터 마지막에는 ‘오뒷세이아 미술관‘이란 제목으로 내용에 맞는 그림을 소개했는데 이 부분이 좋았다.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가 서양 예술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이 그림들의 다양함으로 새삼스레 보여 진다. 또한 ’오뒷세우스의 서재‘라는 제목으로 각 에피소드에서 가져올 수 있는 의미를 다른 책으로 확대해 서술해 놓았다. 책의 첫 부분에 주요 등장인물에 대해서도 짧게 설명한다. &nbsp;저자는 오뒷세우스의 이야기가 무수한 시간을 지나 생생하게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이유로 재미와 감동, 인간적인 우리의 모습을 그리고 있어서라고 말한다.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의 말을 인용하며 오뒷세우스의 여정은 결국 ‘떠나기 전에는 알지 못했지만 모든 여정을 통과한 끝에 비로소 만나게 되는 나(p.10)’라는 것이다. 이 말이 오뒷세이아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인 것은 확실하다. &nbsp;‘오뒷세이아’는 워낙 방대해 한 번에 모든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에도 사실 일부분만 담겨 있을 뿐이다. 보통 ‘오뒷세이아’를 설명하는 기본 키워드는 김태진 저자가 언급한  부름, 의무, 망각, 우티스(nobody), 의심, 기억, 정체성, 갱생, 귀환 등이다. 여기에서 읽는 자가 지금 현재 가장 필요한 부분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어쩌면 어떻게 읽을 것인가’보다 내가 여기에서 ‘무엇을 가져올 것인지’가 더 중요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무엇이든, 그 어떤 것을 가져오든 이 이야기로 지금의 나와 우리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에 이 서사시의 위대함이 있을 것이다. &nbsp;[블리스(Bliss)는 온전히 살아 있는 느낌을 의미한다. 진정한 나 자신이 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에 몰두하는 그런 순간의 희열이다......당신의 이타케는 어디인가? 그것은 남이 그려준 지도에는 없다. 처음부터 당신의 마음속에 있었다. 무엇을 할 때 당신은 온전히 살아 있는 느낌을 받는가? 언제 현실의 시간이 사라지고 피곤함도 달아나고 평소와 다른 당신이 활짝 깨어나는가? 진정한 당신이 되기 위해 꼭 해야 하는 일에 몰두하는 그런 순간, 감당할 수 없는 희열을 안겨주는 건 무엇인가? 그런 블리스의 순간이 있다면 그 순간을 믿어라. 그 길이 향하는 곳, 그곳이 바로 당신의 이타케다.-p. 365, 368]  <br>-오뒷세우스<br>-페넬로페와 오뒷세우스, 구혼자들<br>-키르케<br>-칼륍소&nbsp; **본문의 그림을 편집했으며 페이지는 생략합니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05/86/cover150/893744963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058681</link></image></item><item><author>페넬로페</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접촉하고, 오직 연결하라” - [페루에서 온 신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467260</link><pubDate>Sun, 23 Aug 2026 18:0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46726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82130704&TPaperId=1746726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26/16/coveroff/k78213070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82130704&TPaperId=1746726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페루에서 온 신사</a><br/>안드레 애치먼 지음, 홍한별 옮김 / 비채 / 2026년 07월<br/></td></tr></table><br/>황당하기도, 우습기도 하지만 ‘질문’이란 카테고리 속에서 우리가 자주 인용하고 떠올리게 되는 것 중의 하나가 ‘당신은 전생을 믿으십니까?’이다. ‘평행이론’이란 그럴싸한 이름을 가진 전생의 존재와 생의 반복 현상에는 그것을 믿기도, 믿지 않기도 힘든 뭔가 찝찝함이 있다. 그렇다고 지금 살아가고 있는 나와 우리들을 단지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복제하여 전달하기 위한 생물학적 도구’라고 단정하기도 억울하다.&nbsp;힘들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나는 꿈속에서 집으로 오는 도중에 똑같은 장소로 길을 잘못 든다. 그곳은 내가 전혀 모르는 곳이기에 길을 잘 몰라 계속 헤매고 다닌다. 잠에서 깨기 전까지 나는 집을 찾지 못해 고통스러워한다. 이제는 아예 그 꿈이 몸속에 체득되어 꿈을 꾸면서도 내가 꿈속에 들어와 있는 사실을 인식하기까지 한다. 이런 혼란과 기시감이 들때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신비로운 ‘뭔가’를 생각하게 된다. 나와 연결된 모든 것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nbsp;이 소설에서 60대 초반의 남자, 라울은 이런 현상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지속적인 존재인 또 다른 자아(p.48)’가 있어서라고 한다. 우리에게는 다른 자아가 있고 그것은 다양하게 여러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생이나 과거의 인연뿐만 아니라 아직 일어나지 않거나 만나지 않은 자아들 역시 수없이 나를 찾아오고 끌어당긴다고 한다. 그런 그림자 자아들을 접촉하고 연결시키는 것이 삶과 사랑의 정의라는 것이다. &nbsp;안드레 애치먼의 『페루에서 온 신사』는 주술, 전생, 과거, 환생을 믿어야만 온전히 읽힐 수 있는 소설이다. 여기에 개연성이나 논리를 들이밀면 곤란하다. 위험하지만 작가가 이런 시도를 한 것은 어떤 사람이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그것에 대한 슬픔이 얼마나 크고 아픈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인 것 같다. 특히 생각지도 못한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면 한 번이라도 다시 만나고 싶은 간절함이 있을 것이다. 설사 그것이 이해되지 못한 방식일지라도 믿어보며 접촉하고 싶은 소망이 생기지 않을까.&nbsp;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서 아이네이아스는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를 떠나 고대도시 쿠마에 도착한다. 거기에 하데스로 가는 입구인 아베르누스가 있고 애도의 땅 ‘루겐테스 캄피’가 있다. 여기는 비극적 사랑을 했던 영혼이 머무는 곳이고 아이네이아스도 디도를 만난다. 라울은 루겐테스 캄피를 인용하며 마고를 통해 자신의 비극적 사랑을 다시 만나 완성하려 한다. 혼란스럽지만 마고 역시 기시감으로 자신의 전생을 믿게 되어 라울의 부탁을 들어준다. 라울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nbsp;『페루에서 온 신사』는 앉은 자리에서 바로 완독할 정도로 잘 읽힌다. 다만 소설을 읽는 내내 다른 소설과 드라마에서 수없이 많이 본 클리셰 천국이어서 당황할 정도였다. 소설과 드라마에서 이렇게나 자주 같은 소재가 반복되는 것은 그만큼 사람에게 사랑이 중요해서인가 보다. 또한 언제나 죽음을 앞둔 인간에게 미련과 불화가 없는 평화를 주기 위한 선물일 수도 있겠다. 여운이 많이 남는다.&nbsp;[나중에 자기 방으로 돌아갔을 때 라울의 머릿속에서는 이상한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기뻤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렇게 만나고 난 지금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었다. 이 순간을 그토록 오래 기다렸는데, 그 순간이 왔다가 이제 지나갔다. 왔다가 갔다. 라울은 혼잣말로 되뇌었다. 왔다가 갔다- 라울은 잠시 후 양치질을 하면서 혼잣말로 속삭이고, 왔다가 갔다-잠들기 전에 잠시 책을 읽으면서 중얼거리고, 왔다가 갔다-마침내 침대 옆 등을 끄고 자려 할 때 생각했다. 육십 년 전에 왔고, 곧 사라질 자기 삶을 생각했다. 안 될 게 뭔가, 라울은 생각했다. 그런 거지.-p.141]&nbsp;우연히 이 소설을 읽을 때 넷플릭스로 ’이번 생도 잘 부탁해‘ 드라마를 정주행 했다. 둘 다 내용을 잘 모른 상태로 선택했는데 소재가 너무 비슷해 신기했다. 평행이론은 정말 존재하는가?<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26/16/cover150/k78213070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7261622</link></image></item><item><author>페넬로페</author><category>페이퍼</category><title>뮤즈여, 노래하라, 한 인간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453773</link><pubDate>Sun, 16 Aug 2026 14: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453773</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12130359&TPaperId=1745377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68/68/coveroff/8991290159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7338861&TPaperId=1745377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2444/10/coveroff/k052935299_3.jpg" width="75" border="0"></a>&nbsp;<br/><br/>  <br><br><br><br><br><br><br><br><br><br><br><br><br>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가 개봉된다는 소식에 영화를 보기 전에 책을 재독했다. 8년 전쯤 『오뒷세이아』를 처음 읽을 때는 독서의 속도가 빠르진 못했다. 약 3000년 전의 고대 희랍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 지식이 필요했고 그것이 만만치 않아서였다. 신화와 거기에 얽힌 인물의 이야기가 워낙 복잡해 주석과 네이버 지식 백과를 참조해 읽어도 헷갈려 다시 돌아가기 일쑤였다. 그 때 이후로 호메로스의 작품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신화와 비극을 열심히 읽다보니 이제는 신과 인물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와 암기가 된 상태다. 그래서인지 이번에 재독한 ’오뒷세이아‘는 훨씬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nbsp;고대 희랍 원전의 번역자로 고 천병희 선생을 거론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다. 원전 번역이 선생 일생의 과업이었고 우리나라에서 선구자였다. 나도 천병희 선생의 2015년 숲 출판사 개정판으로 『오뒷세이아』를 읽었다. 이 책은 선생의 번역도 훌륭하지만 각 페이지 하단에 달린 각주와 부록(주요 인명, 신명, 지명, 가계도), 해설이 자세히 나와 있어 좋다. 해설은 호메로스와 고대 그리스 서사시에 대한 전반적 개념이 서술되어 있다. 책 한권으로 거의 모든 것이 해결될 정도다. ’오뒷세이아‘를 처음 읽는 독자라면 천병희의 책을 추천한다. &nbsp;이번 재독에는 이준석 역의 ‘오뒷세이아’를 선택했다. 이준석의 번역도 정말 좋았다. 두 책 모두 걸리는 것 없이 잘 읽힌다. 천병희의 역이 서술적 흐름에 집중했다면 이준석의 역은 리듬감을 살리기 위해 단어에 집중한 느낌이다. 이준석은 원작의 단어를 그대로 선택했고 그 안에 있는 의미를 최대한 살렸다. 그래서인지 간결하고 정리된 느낌을 받았고 집중력 있게 읽을 수 있었다. 다만 번역자의 직역에 대한 의도가 너무 대쪽 같아 빈번하게 사용된 어떤 단어들은 상당히 거슬렸고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nbsp;예를 들어 여기에는 ’심중(心中, 또는 深重(?))‘과 ’기백(氣魄)‘이란 단어가 많이 나온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심중은 ’마음 속, 마음에 품고 있는 것, 또는 생각이 깊고 침착하다‘로 기백은 ’씩씩하고 굳센 기상과 진취적인 정신‘으로 풀이되고 있다. 원작자인 호메로스가 심중과 기백에 해당하는 희랍어를 당연히 사용했겠지만 아무데서나 튀어나오는 이 심중과 기백이란 단어가 많이 낯설었다. 이 단어가 사용된 문장 몇 개만 가져와보자.&nbsp;심중에서 견뎌내는 오뒷세우스의 창들(1권 129행)기백에서 기쁨을 누리며(1권 311행)훌륭한 판단과 간계까지 기백으로 궁리해가며(2권 117행)당신들의 기백이 이를 분개한다면(2권 138행)기백으로 근심하였다(2권 156행)심중에서 이를 알아차리고 기백으로 경악하였으니(1권 322~323행).........&nbsp;‘심중’이란 단어는 보통 사람에게 붙는 것이지만 오뒷세우스가 거지로 변장하고 고향 이타카 섬에 귀향했을 때 그를 알아보는 늙은 개 아르고스에게도 ‘심중에서 견뎌내는(p.427)’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nbsp;심중과 기백에 대해 천병희는 이렇게 번역했다.&nbsp;참을성 많은 오뒷세우스의 창들(1권 129행)흐뭇한 마음으로(1권 311행)교활한 재치와 책략을 마음속으로 생각한다면(2권 117행)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2권 138행)마음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2권 156행)마음속으로 이를 느끼고 깜짝 놀랐으니(1권 322행)&nbsp;이준석은 심중과 기백의 뜻 차이로 두 단어를 철저히 분리시켰지만 천병희는 두 단어를 거의 하나의 의미로 해석한다. 그런 면에서 이준석의 번역이 더 직역에 가까우며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이 두 단어가 상당히 불편해 독서 초반에는 집중에 방해를 받았고 중간 분량을 넘어갔을 때에 겨우 적응할 수 있었다. 이 두 단어를 분리시키면서 한 번씩 다른 표현을 사용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nbsp;아카넷 출판사의 ’오뒷세이아‘는 주석이 별로 없어 아쉽지만 삽화가 좋았고 거기에 덧붙인 이준석의 의미 있는 해석이 감동적이었다. 책 뒷부분의 해설도 줄거리의 흐름에 대한 설명이어서 이 서사시가 상징하는 의미와 행간을 이해하기 유익했다. 천병희의 해설이 숲을 보여준다면 이준석의 해설은 거기에 있는 나무를 설명해주어 두 책을 같이 참조한다면 더 깊이 읽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nbsp;이태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이준석의 책을 추천하며 새 번역서의 의미에 대해 감사해한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워낙 천병희가 이뤄놓은 세계가 크고 단단해 새롭게 똑같은 작품을 번역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쉽지 않았을 것이다. &nbsp;추천사에서 천병희의 역이 독자들이 읽기 쉬운 의역이고 이준석의 역은 원작에 더 충실한 직역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한 문장을 예로 들며 두 번역을 비교한다. 이준석의 ’네 이빨 울타리를 빠져나온 그 말은 대체 무엇이냐.‘라는 직역을 천병희는 ’너는 무슨 말을 그리 함부로 하느냐?‘로 평이하게 옮겼다고 한다. 생소하고 낯설지만 ’네 이빨 울타리’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면 그것이 사람의 ’입‘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로 이태수는 이준석의 번역이 천병희의 번역보다 독자들이 훨씬 더 호메로스의 속뜻을 정확히 파악하고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nbsp;이준석 번역자 역시 옮긴이의 말에서 호메로스가 쓴 표현을 왜곡 없이 고스란히 옮기고 싶었다고 한다. ’미세한 뉘앙스를 결정하는 조각 말(particle) 하나까지 놓치고 싶지 않았다(p.655)'고도 했다. ’기백‘과 ’심중‘도 역자의 그런 의도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읽다 보면 심중과 기백의 차이가 확실하지 않고 둘 다 거의 ’마음‘의 의미로 혼용되어 이해된다. 그러므로 천병희 선생의 의역이 틀린 것은 아니다. 선생은 문장의 부자연스러움이 독자의 집중력을 해칠까봐 이태수가 비판한 ‘작가가 쓰지 않는 다른 말을 동원(p.7)' 했을 것이다.  &nbsp;역자 해설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하나 있었다. 이준석은 1-4권의 텔레마코스 이야기를 ‘저 세상을 향한 여행’으로 해석한다. ‘오뒷세이아’의 흐름과 관계없어 보이는 이 부분을 보통 텔레마코스의 교육과 성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역자는 ‘경계로 넘어가는 여행(p.607)‘으로 본다. 여러 문장을 인용하며 텔레마코스가 인간 세상 밖으로 여행하고 있으며 이것은 오뒷세우스의 여행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텔레마코스가 만나는 네스토르, 메넬라오스, 헬레네가 생을 넘어선 사람이고 그들이 사는 퓔로스와 스파르타도 ’저 세상‘에 속한다고 추정한다. ’오뒷세이아‘를 읽으며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사실을 역자는 조목조목 분석하고 있었다. 새롭고 환상적이었다.&nbsp;이타카의 오뒷세우스의 집이 구혼자들에 의해 점령되고 곧 결혼에 대한 답변을 해야 할 페넬로페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텔레마코스의 여행은 위태로워 보인다. 이 상황에서 잠시라도 텔레마코스가 집을 비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결론적으로 아버지를 찾아 나선 텔레마코스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고, 구혼자들은 돌아오는 텔레마코스를 죽이려고 매복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텔레마코스의 결단이 없다면 일은 더 복잡해질 수도 있다. 이 시점에서 오뒷세우스의 생사를 확인해야만 하는 당위가 되는 것이다. 나는 텔레마코스의 여행을 이렇게 받아들여서인지 별로 어색하지 않았고, 오뒷세우스 귀향의 좋은 시작이라고 생각했다.&nbsp;『오뒷세이아』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오뒷세우스의 아들인 텔레마코스의 이야기(1-4권), 오뒷세우스의 방랑과 귀향(5-12권), 오뒷세우스의 구혼자에 대한 복수와 페넬로페와의 만남(13-24권)이다. 놀라운 사실은 여기에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것이다. 거의 모든 것이 신에 의해 계획되고 신의 도움으로만 인간은 정진하고 뭔가를 성취할 수 있다. 예언자에 의해 앞날이 예고되고 그 말을 지키기 위해 온갖 유혹과 기본적 욕망마저 이겨내야 한다. 조금이라도 신의 분노를 사거나 예언의 실행이 부정되면 무수한 죽음과 고행, 슬픔과 탄식을 겪어야 한다.&nbsp;그럼에도 ‘오뒷세우스’로 대표되는 인간의 정체성은 귀향을 포기하지 않는다. 시기, 질투로 금기의 영역을 침범해 고향이 눈에 보이는 곳에서 파멸하고, 하데스로 가 죽은 사람을 만나 예언을 듣고, 괴물과 거인을 맞닥뜨리고, ‘아무것도 아닌 자(있지도 않은 자)’라고 말했다가 ‘나는 오뒷세우스’라고 밝히며 도발했다가, 신으로 살아갈 기회마저 거절하는 한 인간은 극심한 고역을 치르지만 집으로 돌아간다. 몸을 묶어도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싶은 호기심, 죽은 동료들에 대한 애도, 신께 헤카톰베를 바치며 순종하지만 한편으로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 크세니아를 지키지 않은 자에 대한 복수 등 나약하지만 강한, 복잡하고도 다양한 감정을 가진 인간은 그렇게 필연적이다. &nbsp;내가 읽은 다른 많은 책에서 오뒷세우스가 언급되고 있다. 보통 그는 고통을 당하는 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혜와 지략을 가진 사람, 영웅으로 소환된다. 나 역시 그런 인식으로 오뒷세우스를 받아들였고, 귀향의 과정이 궁금해 『오뒷세이아』를 읽었다. 처음 ‘오뒷세이아’를 읽었을 땐 많이 당황했었다. 그가 너무 인간적인 사람이었고 그저 신이나 예언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끝부분이 충격적이었다. 20년 만의 귀향을 끝으로 오뒷세우스에게 남은 생은 해피 엔딩일줄 알았건만 거기에서 그의 고행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납득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어 그땐 그의 남은 고통이 그동안의 힘듦에 대한 정신적 트라우마 일거라고도 생각했다. &nbsp;이 책을 재독하면서 다시 인식한 사실은 하데스를 찾아간 오뒷세우스에게 테이레시아스는 귀향 후의 고행과 필멸의 인간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죽음에 대해 이미 예언한다는 것이다. 결국 호메로스는 오뒷세우스를 전형적 ’한 인간‘으로 규정한다.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고통과 도전의 파도 속에 놓인 돛단배 하나에 불과하며, 그 흔들림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고귀한 것은 오뒷세우스가 귀향의 망각, 불멸의 삶에 대한 유혹을 극복하고 인간으로 남기로 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으로 한 인간 오뒷세우스는 영웅이 된다.<br>-p.567, 제임스 파커, 에칭, 1805년&nbsp;[그러자 그때 꾀 많은 오뒷세우스가 아내에게 말하였다.“여보, 우리가 모든 투쟁의 끝에 다다른 건 결코 아니에요.이후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혹독한 노역이 있을 것이고,나는 또 그 모든 것을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답니다.내가 전우들과 나 자신의 귀향을 찾아내러하데스의 집으로 내려갔던 바로 그 날,테이레시아스의 영혼이 내게 예언한 대로지요.-23권 247~253행] <br>영화 ‘오디세이’는 좋았다. 러닝 타임 172분이 금방 지나갈 정도로 스펙타클했고 집중력 있게 볼 수 있었다. 책의 여러 장면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기대도 되었다. 시인 호메로스가  읊어주는 오뒷세우스의 여정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극적인 부분이 많다. 책을 읽으며 그것을 머릿속에서 그려보면 상상의 범위가 한없이 확장되며 요동친다. 영화는 웅장했지만 호메로스의 노래를 다 담기는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책을 두 번이나 읽어서인지 그다지 재미있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오뒷세우스 역의 맷 데이먼의 연기는 너무 좋았다. 거기에 다른 배우가 절대 대체될 수 없을 정도로 멋지게 오뒷세우스의 역할을 해내었다. 페넬로페 역의 앤 해서웨이와 아테네 역의 젠데이아 콜먼도 괜찮았다. 이 영화에서 헬레네 역할로 흑인 배우 루피타 뇽오가 캐스팅 되어 논란이 많았는데, 감독의 어떤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nbsp;이 영화에서는 시종일관 신은 어떤 모습으로 인간 앞에 나올지 모르니 언제나 모든 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제우스의 법‘이 등장한다. ’낯선 손님이 오면 주인은 정성껏 대접하고 잠자리를 내주고 떠날 때는 선물을 주는 관습인 ‘크세니아’를 철저히 지킨다. 이타카의 페넬로페의 구혼자들도 이 크세니아 때문에 아무 제지 없이 오뒷세우스의 재산을 약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손님의 태도도 존재한다. 겸손하며 예의 있게 행동하며 감사함을 표시해야 한다. 구혼자들은 테미스(themis,-관습, 관행 또는 법도,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하는 바)에 대해 아테미스토스(arthemistos,-도리를 저버린, 사람의 탈을 쓰고 할 수 없는)의 태도를 행했기에 마땅히 응징 당했다. &nbsp;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전작인 ‘오펜하이머’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대의와 도덕적 인간성의 충돌을 얘기한다. 영화에서 아주 극적인 장면으로 등장한 트로이의 목마는 오뒷세우스로 대표되는 인간 지혜의 절대성으로 등장한다. 예언자 카산드라 말고 아무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은 트로이 사람들은 패배를 자초한다. 트로이 목마로 굳건히 닫혀있던 성문은 열린다. 10년 동안 기다리며 고생한 그리스 연합군은 그것으로 전쟁에 대한 승리의 기쁨만이 아닌 광기의 폭력으로 트로이 문명을 완전히 파괴한다. 오펜하이머처럼 도시의 파괴자인 오뒷세우스 역시 불타오르는 트로이를 보며 좌절하고 탄식한다. 호메로스가 한 인간을 노래하며 보편의 인간상을 보여주었다면, 놀란 감독 역시 한 인간을 노래하며 지금 우리가 당면한 현실을 보여준다. <br>가장 갈망하는 것은 가질 수 없는 것이고,&nbsp;가장 가질 수 없는 것은 이미 가졌다가 잃어버린 것이다.&nbsp;뮤즈여, 노래하라. 한 얼굴을, 한 함대를,트로이를 하루 만에 짓밟은 한 전쟁을,한 생각을, 한 자락을, 한 인간을.&nbsp; &nbsp;&nbsp;<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2444/10/cover150/k052935299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24441050</link></image></item><item><author>페넬로페</author><category>리뷰</category><title>망명객이 보내 온 노스탤지어 - [압록강은 흐른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436364</link><pubDate>Thu, 06 Aug 2026 22:1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14542162/1743636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5000&TPaperId=1743636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75/12/coveroff/893746500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5000&TPaperId=1743636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압록강은 흐른다</a><br/>이미륵 지음, 안삼환 옮김 / 민음사 / 2026년 06월<br/></td></tr></table><br/>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는 한국인이 독일어로 쓴 소설이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의 문장은 현상을 설명하며, 많이 정제되어 있다. 이것은 문학평론가 박혜진의 해설처럼, ‘담담하며 고요한 절제의 미학(p.237)'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전적 내용을 바탕으로 하지만, 경계의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봤기에 절제될 수 있었을 것이다. 몸은 독일에 있지만 영혼을 고국에만 두었다면 이미륵의 문장은 격한 울음이었을 것이다.&nbsp;감정이 절제된 채, 묵묵히 진행되는 이미륵의 글은 비슷한 시대를 자전적 내용으로 쓴 박완서의 문장과 대조적이다. 집요하고도 선득한 느낌마저 드는 박완서의 문장에 비해 그의 글은 건조하면서도 따뜻하다. 글을 읽을 대상이 그 당시 한국을 거의 모르는 독일인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작가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독일인이 아닌 나에게 이 책은 두 가지 시선으로 읽혔다. 여기에 실제 이미륵이란 사람을 넣어 읽는 것과 그를 떠나 단지 이 책을 소설로만 읽는 경우다. &nbsp;이 소설에는 구시대에 태어나 신문물과 신학문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 당시 사람들의 혼란이 있다. 시대를 잘못 만나 독일로 망명길에 올라 다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한 젊은이의 애환도 있다. 말도 생활환경도 다른 그 먼 곳에서 겪었을 서러움과 인종차별, 고향에 대한 향수는 표현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안전하다고 여기고 간 그곳이 나치의 소굴이자 제 2차 세계대전의 현장이 되었고, 거기에서 살아남아야 했을 이미륵의 고단한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언제 들어도 디아스포라의 사연은 슬프고 먹먹하다.   &nbsp;시간의 흐름에 따라 담담하게 서술된 여기에 특별한 감정을 드러내진 않지만, 고향, 가족, 지나온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다. 소설의 모든 곳에 따뜻함이 있다. 사람들의 순수와 사심 없는 태도에 감탄할 정도다. 다만 일본에 의해 식민지가 된 것에 대한 두루뭉술함과 중화사상에 젖은 그 당시 지식인의 태도가 아쉬웠다. 먼 훗날 그 시대를 바라보는 나에게 답답함이 느껴졌다.   &nbsp;딸 셋을 낳고 아들을 낳기 원하는 어머니를 위해 대신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는 여인의 도움으로 세상에 태어난 ‘나’는 미륵(彌勒)이란 아호로 불리게 된다. 5세의 미륵은 사촌 형 수암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다. 아버지가 작고한 동생의 식솔을 거둔 것이다. 남편이 죽은 고모와 그의 아들 칠성과도 잠깐 동안 함께 지낸다. 직계가족뿐만 아니라 주변 친척들도 챙겨야 했던 아버지의 고단함이 보였지만 천석꾼 집안이라 가능했을 것이다. 미륵, 수암, 칠성은 아버지가 집에 개설한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장난치며 싸우고 벌을 받으며 개구 진 어린 시절을 보낸다. &nbsp;퉁풍으로 아버지가 죽을 고비를 넘기자, 아버지는 서당을 없애고 수암 가족과 칠성 가족도 분가한다. 북적댔던 집안은 조용해지고 미륵은 아버지와 친구처럼 다정하고 친밀한 사이가 된다. 미륵은 계속 한학을 공부하고 있었지만 이미 신식학교가 들어와 서양 또는 유럽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온 신학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고민 끝에 미륵도 학교에 입학하고, 힘들어하며 과학과 수학을 배운다. 특히 영어는 미륵에게 너무 어려운 공부였다. 그곳에서 친구들은 미륵의 공부를 도와준다. 미륵의 집안은 세계정세에 대해 잘 몰랐지만 이미 미륵의 친구들은 잘 알고 있었고 공부에 대한 진도도 많이 나간 상태였다. 미륵도 운명처럼 유럽을 생각하며 새 시대가 오고 있음을 인식한다. &nbsp;일찍 한국에 들어 온 일본인은 거의 장사를 했고 사람들은 ‘왜놈들’이라 지칭하며 무시했다. 하지만 일본에 의해 나라가 합병되고 일본은 군대를 동원해 강압적으로 한국인을 통제한다. 어느 여름 날 미륵은 아버지와 옥계천변으로 물놀이를 나가 좋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 날 저녁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다. 미륵은 송림으로 가서 잠시 칩거하지만 경성의전(서울대 의대)으로 진학하기 위해 해주에서 서울로 간다. 의학을 배우고 서울 생활을 하며 미륵은 새 시대에 눈을 뜬다. 여지껏 우리나라에서 시행했던 것들이 서양의 학문에 비해 턱없이 비효율적인 것이 많았던 것을 공부를 통해 알게 된다.  &nbsp;경성의전에서의 여섯째 학기 중에 3.1 운동이 일어났고 미륵은 참가해 수배자가 된다. 미륵은 망명하기로 결심하고 일본인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압록강을 건넌다. 만주의 수도 묵덴, 천진을 거쳐 남경, 양자강을 지나 상해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몇 달 기다리다 여권이 나오자 프랑스의 거대한 여객선인 ‘폴 르카’호에 탑승한다. 사이공, 실론 섬, 싱가포르, 인도양, 지부티, 홍해, 시나이 산, 수에즈 운하, 지중해, 그리스, 이탈리아, 메시나 해변을 지나 마르세유 항에 입항한다. &nbsp;미륵은 그곳에서 독일로 가 어려운 언어를 공부하며 고향을 그리워하고 그곳을 회상한다. 어머니께 편지를 보내고 매일 답장이 왔는지 우체국에 간다. 우체국에서 집으로 돌아오며, 어느 낯선 집 마당에 피어있는 꼬리 관목에 눈이 가 한참을 그 앞에 서 있기도 한다. 해주 자신의 집 정원에서 본 꽃이었기 때문에 반가워서다. 여러 계절이 지나 드디어 도착한 누나의 답장에는 어머니가 며칠의 신고(辛苦)하신 끝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어 있다. &nbsp;&nbsp;나는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은 조부모와 부모를 두었다. 할아버지는 집안의 종손으로 존중을 받으셨고 한복을 입고 생활하였다. 지금도 기억나지만 내가 어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애도하기 위해 9일상을 했었고 시골집 마당에 차양을 치고 조문객을 받았었다. 대를 이어 종손이 된 큰아버지 역시 할아버지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았지만 차남인 나의 아버지는 도시로 나와 공부를 해 은행원이 되었다. &nbsp;한 반에 60명이 넘고 강압적이며 일률적인 교육을 초, 중 고등학교에서 받았고, 그때는 철저히 아날로그의 생활을 했다. 친지와 친구의 전화번호를 수십 개 외워 전화를 걸 수 있었다. 각 다른 대학으로 진학한 우리 친구들은 편지를 열심히 주고받기도 했다. 빠르게 컴퓨터가 세상을 점령했고 우리는 또 디지털의 세계에 입문해야 했다. 지금은 곧 대세가 될 인공지능이 고개를 내민다. 아니 달려오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난 거기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언제나 새 시대는 물밀듯이 밀려오고 나와 같이 미륵도 구시대와 새 시대의 경계, 타국에서 끊임없는 선택을 했을 것이다. 다만 거기에 아픈 역사의 반복만은 없길 바란다.&nbsp;『압록강은 흐른다』는 이미륵의 자전적 소설이며 독일에서 혼자 고독한 삶을 살아야했던 그가 고향과 가족에 대한 지독한 향수를 담은 글이다. 어떤 배경이든 노스탤지어와 디아스포라가 있다면 누구나 거기에 마음이 움직인다. 이런 내용으로 담담하고 아름답게 서술된 이국의 서사가 전후 독일인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nbsp;끝내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독일에서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미륵은 억울하고도 착잡한 심정이었겠지만, 인간 삶의 허무와 불가해함을 이해했기에 이렇게 정제된 글로 지나간 인생을 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감동과 비판의 양가감정으로 이 책을 읽었지만 미륵의 고뇌, 여정, 그의 부모님의 죽음은 애틋했다. 작가 연보에 의하면 미륵은 조혼을 해 두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아마 그들은 독일로 가지 못한 듯하다. 두 아들은 6.25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nbsp;한국인이 독일어로 쓴 소설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된 글을 읽는다는 것에 기분이 약간 묘했다. 오래 전 전혜린의 번역으로 읽었을 이 소설은 내용은 전혀 생각나지 않고 제목만 나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기대했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0번으로 이 책이 출간되지 않았다면 난 아마 재독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책도 이렇게 우연으로 다가와 인연으로 맺어지는 것 같다. &nbsp;[사라져가는 조선의 풍경과 기억을 보존하는 기록인 동시에 식민지라는 역사적 조건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이동시키고 변화시키는지 보여 주는 증언으로서 이 소설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왜 자신의 언어와 장소를 떠날 수밖에 없는지 변호한다. 조국을 떠난 뒤에야 가능해진 회고이자 타국의 언어를 선택한 뒤에야 구성할 수 있는 텍스트였다는 점에서 디아스포라 문학을 대표하는 이 작품이 독일어로 쓰인 것은 선택의 여지  없는 선택이었다. -p.240~241, 작품 해설 중에서]]]></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75/12/cover150/893746500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5751250</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