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에 대한 책임이 오롯이 나에게 있다는 결론을내렸다. 행복과 불행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 그저 나에게 달려있었다. 이를 깨닫는 데 무려 육십 년이나 걸리다니. 나는 버림받았고, 고독하고, 당신을 너무나도 그리워한다는 사실을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당신은 나의 정신적인 지주다.  - P11

그는 타인을 돕고 교회에 봉사하고 싶은 깊은 갈망에 이끌려 도미니크회 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이야기했다. 무엇도 그 결심을 막을 수는 없지. 다만 실질적인 방법으로 교회에 봉사해야 해. 케케묵은 문서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고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면서 …….. 그는 잠시 멈추었다가 덧붙여 말했다. 등등등. 둘은 동시에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순간 처음으로 카롤리나가 곁을 지나갔는데 둘 중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 P31

정오를 알리기까지 십 초가 남았다. 베르사유에서는 몇몇 풋내기들이 종전을 선언했다. 그들은 온갖 생색을 내며 정전에서명하면서 몇 년 후의 영광스러운 새 전쟁을 위한 장치들을조심스럽게 심어 두었다. 더욱 많은 피를 부르고 더욱 악에 가까워질 그 전쟁을 신이라면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펠릭스 아르데볼 이 기테레스는 초록색 상자를 열었다. 그는멈칫하며 붉은 리본을 걷어 냈다. 첫 번째 종소리가 울렸다. 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 (라틴어)) 그는 울음을 터뜨렸다.
- P45

다시 말해 나는 영재성을 발굴하고자 하는 열성적인 부모로부터 관찰당하는 외동아들이었다. 내 어린 시절을 요약하자면 마치 높은 허들을 넘는 것과 같았다.  - P85

입회를 위해 문을 두드렸을 때 그는 이미 안전지대를 떠나 도망자의 충실한 동반자인 공포의 세계로 깊이 들어간 지 오래였다. 자신이 실수를 저지르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었다. 예수는 우리에게 사랑과 신의를 이야기했는데 자신은그것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이를 수행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종교재판장인 니콜라우 에이메리크3) 신부가 상관이었고, 신의 이름과 교회의 번영, 진실한 믿음을 위해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나에게 너무나도 먼 존재였기 때문에나는 그렇게, 그렇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미켈 수사,
감히 멍청한 세속 수도사 주제에 예수의 거처를 묻다니? 우리주님은 우리의 아무런 조건 없는 완전한 복종 속에 존재하십니다. 주님은 나와 함께 계세요. 미켈 수사.
- P102

한번은 아버지가 스토리오니를 손에 쥐고서 나에게 말했다. 다소 망설이는 듯했지만 악기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정확히 모른 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조심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물건이야. 내 손에 들어온스토리오니는 마치 살아 있는 듯했다. 부드럽고 친밀한 심장박동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 바이올린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월을 거쳐 왔단다.
우리도 모르는 콘서트 홀, 그 누군가의 집에서 소리를 울렸을것이고, 악기를 섬기던 모든 연주자의 환희와 고통을 함께했을 거야. 이 악기가 목격했을 대화의 순간들, 이 악기가 경험했을 음악들.……. 아마도 수많은 사연을 우리에게 들려줄 수있을 테지. 아버지는 당시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어마어마한 비관주의로 설명을 마무리했다.
- P126

이 소식에 아드리아는 가장 먼저 안도감을 느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더 이상 나한테 잔소리할 사람은 없겠군. 하지만곧 이런 생각을 한 자체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또 하늘나라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비참한 죄인 같은 마음이 들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내 탓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카르메 보스크 데 아르데볼 부인은목이 잘린 펠릭스의 신분을 확인하는 고통스럽고 괴로운 절차를 견뎌야 했다. 모반이 저기에…… 네, 그 모반이 맞아요. 네, 점이 두 개가 있어요.
차가워진 시신은 더 이상 누구에게도 잔소리를 할 수 없었다.
- P207

나는 아직도 그장면들을 마치 호퍼의 그림처럼 떠올릴 수 있다. 유년 시절 그 집에 관한 모든 기억은 호퍼의 
그림처럼 불가사의하고 
질척한 외로움으로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어질러진 침대,앙상한 의자 위에 널브러진 책들 사이에서 창밖을 내다보거나 말끔히 정리된 책상 옆에 앉아 벽을 멍하니 바라보는 사람들과 마찬가지 모습을 한 내가 그 가운데에 있었다. 집에서는 모든 것이 속삭임으로 해결되었고, 가장 분명하게 들리는소음은 내가 바이올린으로 연음을 연습할 때를 제외하고는 어머니가 외출을 위해 굽 높은 구두를 신을 때였다. 그리고 호퍼가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기에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면 나는 글을 쓴다. 나는 그림을 볼 수 있지만 그릴 수는 없기때문이다. 나는 항상 호퍼처럼 광경을 본다. 완전히 닫히지 않은 창문 혹은 문을 통해서 말이다. 또한 몰랐던 것을 결국에는 알게 된다. 알 수 없는 것은 이야기를 지어내고, 그럼 그것이진실이 된다. 당신은 나를 이해하고 용서하리라고 믿어. - P219

아드리아는 어쩌면 바이올린 연주를 할 줄 아는 게 인생, 고독이라는 수수께끼, 자신의 욕망이 절대 현실과 합치할 수 없다는 분명한 증거, 아버지의 죽음이 무엇 때문인지를 밝혀 대고자 하는 갈망을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 P307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 (라틴어) 비록 푸생이 그림을 그릴때 이문장의 주어는 죽음이며, 따라서 도처에 죽음이 
있고,심지어 행복의 공간에도 죽음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언제나 문장의 주어가 ‘나‘로 해석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나는 아르카디아에 있었으며, 아드리아는 자신의 아르카디아가 있었다고 말이다.  - P357

곧 비가 오기 시작해 그들은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거리 한가운데에서 아무개 씨에게 수고비를 지급한 후 헤어졌다. 수백만 명의 사망자가 나오고 도시가 파괴되었을 뿐 아니라전쟁의 잔혹함은 사람들을 평소 예절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오래된 골목길 구석에서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는 데 익숙해졌다. 그게 한 명 이상의 생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거래라도 말이다.  - P383

기차표를 손에 쥐었을 때 학업을 위해 튀빙겐으로 떠나는게 미래를 그리는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 유년 시절과의 작별이었다. 나의 아르카디아에서 멀어지는 것이었다. 그랬다. 나는 외롭고 불행한 아이였다. 부모는나의 재능과 관련된 것 이외에는 무신경했고, 내가 동전을 넣으면 사람처럼 움직이는 로봇을 보러 티비다보 놀이동산에가고 싶은지 물어볼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오염된 진흙 속에서 빛나는 꽃을 찾아 냄새를 맡을 줄 알았다. 그리고 마분지로 된 모자 상자를 바퀴 다섯 개짜리 큰 트럭이라고 상상하며 기뻐할 줄 알았다. 슈투트가르트행 표를사며 나는 이러한 순수의 시절이 끝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 P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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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10-15 1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읽으시는군요!

페넬로페 2021-10-15 13:24   좋아요 1 | URL
네,, 시작했습니다
생각보다 배경지식이 많이 필요한 책이네요~~
이 책으로 또 많이 배울것 같아요^^

서니데이 2021-10-15 2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첫번째 인용문, 첫문장이 좋네요.
잊어버리고 있다가 가끔씩 생각날 것 같은 느낌이예요.
페넬로페님, 바람이 많이 차가워졌어요.
즐거운 주말과 기분 좋은 금요일 보내세요.^^

페넬로페 2021-10-15 22:16   좋아요 1 | URL
이 문장이 이 책의 첫페이지의 문장인데 아마 이 책의 주제가 아닐까해요^^
날씨가 갑자기 왜이리 추워지는지 모르겠어요~~
서니데이님, 감기 조심하세요^^

레삭매냐 2021-10-16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중고서점에 이 시리즈가 중고
서점에 출현하기만을 학수고대하
고 있는 중이랍니다. 사냥꾼의 마음
으로다가.

페넬로페 2021-10-16 21:32   좋아요 0 | URL
좀 지나면 중고로 나올것 같아요^^
이 책 초반 지났는데 아유 완전 초집중해서 읽어야 하네요~~
몇 번 앞으로 돌아갔어요^^

서니데이 2021-10-17 22: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 날씨 일기예보에서 말한 것처럼 차갑네요. 이런 날이 책 읽기는 더 좋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따뜻한 오후가 조금 더 있었으면 좋겠어요. 주말 잘 보내셨나요.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밤되세요.^^

페넬로페 2021-10-17 23:15   좋아요 2 | URL
아무래도 추우니 문 꼭 닫고 책읽기 좋은 계절이 되었나봐요.
낼은 마트에 가서 귤을 좀 사야겠어요, 귤 먹으며 책읽기 ㅎㅎ
서니데이님!
시작되는 한 주도 행복하시길 바래요^^

han22598 2021-10-19 0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페넬로페님도. 드뎌 이책을 영접하셨네요 ㅎㅎ

요 책. 저는 사실. 다 읽긴 읽었고 잘 읽었는데,
먼가...100프로 소화해내지 못한 느낌이 들어서.
독서 내공을 좀더 쌓고 난후에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더라고요.

페넬로페 2021-10-19 08:59   좋아요 0 | URL
네, 1권 다 읽었어요.
1권의 내용만으로도 워낙 방대해서 나머지 내용은 무엇으로 채워질지 궁금해요^^

서니데이 2021-10-19 1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낮에는 조금 덜 추웠는데, 저녁이 되니 다시 공기가 차가워집니다.
내일 아침도 기온이 많이 낮다고 해요.
일교차가 큰 차가운 날씨 조심하시고 따뜻하고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페넬로페 2021-10-20 01:11   좋아요 1 | URL
며칠간 추워 밖에 나가지 않았는데 오늘은 멀리까지 산책을 다녀왔어요.
좀 추운데 땀이 안나서 좋았어요^^
점점 추위에 적응해 가나봐요*
서니데이님,
오늘도 즐거운 하루가 되시길 빌어요^^
 

이런 것들은 ‘타자‘라는 관념에서 절대적인 의미를 없해고 그 상대성을 명백히 나타낸다. 따라서 좋든 나쁘든 개인이나 단체나 그들 관계의 상호성(相互性)을 인정하게 된다. 그런데 왜 남녀 사이에는 이런 상호성이 인정되지 않는가. 어째서 그 중 한쪽만이 자신을 유일한 본질로서 긍정하고, 그 상호관계의 상대에 대해서는 일체의 상대성을 부정하며, 상대를 순수한타성으로 정해 버리는 것인가? 왜 여자들은 남성의 지배에 항의하지 않는가?
어떤 주체도 자발적으로 단번에 비본질적인 개체로 변화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자기를 "타자‘로 정하는 ‘타자‘가 ‘주체‘를 정하는 것이 아니다.자기를 ‘주체‘로서 정립하는 ‘주체‘에 의하여 ‘타자‘가 ‘타자‘로서 정의되는 것이다. 그런데 타작ᆢ 주체로 변화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타자가 상대의 그러한 관점에 복종하고 있음을 뜻한다. 여자의 이런 복종은 어디에서 왔는가? - P20

사실 자기를 주체로서 확립하려는 개인의 윤리적 충동과 더불어, 자유를 포기하고 자기를 사물화하려는 유혹 또한 모든 개인에게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불행한길이다. 왜냐하면 수동적이고 소외되고 자기를 상실한 사람은 초월에서 이탈하고 모든 가치를 상실하여, 다른 사람의 의지의 제물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편안한 길이기도 하다. 그 길에서는 저마다 마땅히 감수해야할 실존의 고뇌와 긴장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자를 ‘타자‘로만들어 버리는 남자는 여자 속에서 뿌리 깊은 공범 기질을 발견한다. 이와 같이 여자는 구체적인 수단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서로에게 평등한 남녀 관계를 인정하지도 않으며 자기가 남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필연적이라고 느끼기때문에, 또는 ‘타자‘라는 자신의 역할에 만족하기 때문에, 자기가 주체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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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하늘이 펼쳐놓은 그물망 속에서 산다. 달리 말하면 시대적 제약이다. 역사상 위업을 이룬 인물들은 이 그물망의 한 부분을 뚫고 나간 사람들이다. 이들의 영웅적 활약에만 흥미 본위로 집중하다 보면 영웅사관에 빠지거나 궁중사극의 재판이 될 것이고, 그물망 분석에만 치중하다 보면 역사에서 인간의 주체성은희미해질 것이다. 이 책은 이 양자 간의 긴장관계를 항상 염두에 둘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 먼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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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1-10-08 2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소개 읽어보았는데, 괜찮네요. 강의실에서 수업으로 들었다면 외울 것 많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교양수업은 다양하게 듣는게 좋은 것 같아요. 학교의 강의를 책으로 접할 수 있는 시리즈도 좋은 것 같습니다. 페넬로페님, 즐거운 주말과 기분 좋은 금요일 되세요.^^

페넬로페 2021-10-09 00:22   좋아요 1 | URL
네, 쉽게 이해 잘되게 이 책이 쓰여져 있어 하루에 조금씩 읽고 있어요. 교양수업처럼 책도 다양하게 읽고 싶은데 잘 안되는것 같아요^^
서니데이님,,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어요.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주말 되세요^^

레삭매냐 2021-10-09 1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또 메이지 유신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이 책
도 읽어보려고 생각하고 있
습니다. 일단 동영상부터 한
번 본 다음에...

책 소개를 보니 유신삼걸로
알려진 캐릭터들이 주인공인
가 보네요.

페넬로페 2021-10-09 19:45   좋아요 0 | URL
이 책이 쉽게 잘 읽혀요.
메이지 유신에 영향을 준 4명이 소개되어 있어요^^
 

이 가난하고도 서로를 지극히 사랑하는 소스케와 오요네!
가을에 읽기엔 너무 쓸쓸하고 마음이 울적해진다.
그들에게 어떤 문이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다.
























구두만이 아니군그래. 집 안까지 젖고 있네‘ 하며 소스케는 쓴웃음을 지었다. 오요네는 그날 밤 남편을 위해 이동식 고타쓰에 불을 넣고 모직 양말과 줄무늬 모직 바지를 말렸다.
이튿날도 마찬가지로 비가 내렸다. 부부도 다시 같은 일을 반복했다. 그다음 날도 개지 않았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에 소스케는 눈살을 찌푸리고 혀를 찼다.
"언제까지 내리는 거야? 구두가 축축해서 도저히 신을 수가 있어야지 원"
"작은방도 난감해요, 저렇게 새서는."
부부는 의논하여 비가 그치는 대로 집주인에게 지붕을 고쳐달라고말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구두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소스케는 축축해서 잘 들어가지도 않는 구두를 억지로 신고 나갔다.
- P88

그러나 그 비극이 또 언제 어떤 모습으로 자신의 가족을 덮쳐올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이따금 그의 머릿속에 
안개처럼 드리워졌다.
세밑에 무슨 일이 벌어지기를 바란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일부러 짧은 해를 밀어내고 싶어 안달하는 모습을 보면서 소스케는 더욱더 그 막연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만은 음침하고 어두운 섣달 안에 혼자 남아 있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드디어 차례가 되어 차가운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그는 문득 이자는 대체 어떤 자일까 하며 
바라보았다.  - P151

소스케는 그 임신을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의 힘에 일종의 확증이 될 만한 형태를 부여해준 것이라고 혼자 해석하며 적잖이 기뻐했다. 그리고 자신이 생명을 불어넣은 살덩어리가 눈앞에서 춤출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태아는부부의 기대를 저버리고 다섯 달째에 돌연 유산되고 말았다. 그 무렵부부의 생활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소스케는 유산한 오요네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이것도 필경 살림이 궁핍해서생긴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애정의 결과가 가난 때문에 무너져내려 아주 오랫동안 손에 쥘 수 없게 된 것을 안타까워했다. 오요네는하염없이 울었다. - P159

소스케의 능력으로는 실내에 난로를 설치하는 것만도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부는 시간과 돈이 허락하는 한에서 정성을 다해 갓난아기의 생명을 지켰다. 하지만 모든 것은 허사로 돌아갔다. 일주일 후 두 사람의 피를 나눠 받은 사랑의 덩어리는 끝내 차가워지고말았다. 오요네는 죽은 갓난아기를 껴안고,
"어떡해요 하며 흐느껴 울었다. 소스케는 두 번째 충격을 남자답게받아들였다. 차가운 몸뚱이가 재가 되고 그 재가 다시 검은 흙이 될때까지 푸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언제부터인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있던 그림자 같은 것도 점차 멀어졌고 머지않아 거의 사라져버렸다.
- P160

해산도 의외로 수월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아이가 자궁에서 넓은 곳으로 나오기만 했올 뿐 세상의 공기를 단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산파가 가느다란 유리관 같은 것을 
작은 입 안에 넣고 강한 숨을 연신 불어넣었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태어난 것은 살덩이뿐이었다. 부부는 이 살덩이에새겨져 있는 눈과 코와 입을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목구멍에서 나오는 울음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

- P161

태아는 나오기 직전까지 건강했던 것이다. 하지만 제대권락( 帶)이라는 흔히 말하는 탯줄이 목에 감기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런 이상이 발생한 경우에는 물론 산파의 기술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경험이 풍부한 산파라면 아기를 꺼낼때 목에 감긴 밧줄을 제대로 풀고 꺼냈을 것이다. 소스케가 부른 산파도 나이를 꽤 먹은 만큼 그 정도의 일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태아의목을 감고 있던 탯줄은 이따금 있는 경우처럼 한 겹이 아니었다. 그좁은 곳을 지날 때 가느다란 목을 두 겹으로 감고 있는 탯줄을 미처풀어내지 못해 아기는 숨통이 막혀 질식하고 만 것이다.
잘못은 산파에게도 있었다. 하지만 절반 이상의 책임은 오요네에게 있었다. 제대권락이라는 이상 징후는 오요네가 우물가에서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은 5개월 전에 이미 스스로 만들어낸 것으로 판명되었다. 오요네는 산후 조리 중에 그 일의 자초지종을 듣고 그저 가볍게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피로에 쑥 들어간눈을 적시며 긴 속눈썹을 자꾸만 움직였다. 소스케는 위로하면서 손수건으로 빰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 P162

하지만 두 사람의 생활 이면에는 그 기억으로 인한 쓸쓸함이 물들어 있어 쉽사리 지워질 것 같지 않았다. 때로는 서로의 
웃음소리를 통해서도서로의 가슴에 그 이면이 어렴풋이 비치는 일이 있었다.  - P163

오요네는 소스케가 하는 모든 행동을 누운 채 보거나 듣고 있었다.
그리고 이불 위에 똑바로 누운 채 그 두 개의 작은 위패를, 눈에 보이지 않는 운명의 실을 길게 빼서 서로 묶었다. 그러고 나서 그 실을 더멀리 늘여 위패도 없이 떠내려간, 처음부터 형태가 없이 아련한 그림자 같은 죽은 아이 위에 던졌다. 오요네는 히로시마와 후쿠오카와 도코에 남은 하나씩의 기억에서 움직일 수 없는 운명이 엄숙하게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 엄숙한 지배 아래에 서 있던 몇 달
며칠의 자신이 신기하게도 똑같은 불행을 되풀이하도록 만들어진 어미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귓가에서 때아닌 저주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이불 속에서 삼칠일 동안의 안정을 탐할 수밖에 없도록 생리적으로 강요당하는 사이 그 저주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그녀의 고막을울렸다. 오요네가 삼칠일 동안 편안히 누워 지낸 시간은 정말 비할 데없는 인내의 3주일이었다.
- P164

하지만 그 외에는 일반 사회에 기대하는 바가 극히 적은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사회라는 존재를 일상의 필수품을 공급하는 곳이상의 의미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서로의 존재뿐이고, 그들은 또 그 서로의 존재만으로 족했다. 그들은산속에 있는 마음으로 도회에 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생활은 단조롭게 흘러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복잡한 사회의 번잡함을 피할 수 있었고 동시에 그 사회의 활동에서 나오는 다양한 경험에 직접 접촉할 기회를 스스로 막아버려 도회에 살면서도 도회에 사는 문명인의 특권을 버린 듯한 결과에 이르렀다. 그들도 자신들의 일상에 변화가 없다는 것을 이따금 자각했다.  - P168

소스케는 아주 짧았던 그때의 대화를 일일이 떠올릴 때마다 그 하나하나가 거의 무색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담백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렇게 투명한 목소리가 어떻게 그렇게 두 사람의 미래를새빨갛게 뒤덮었는지를 신기하게 여겼다. 지금은 그 붉은색도 세월이흘러 옛날의 선명함을 잃어버렸다. 서로를 불태운 불꽃은 자연스럽게변색되어 까매졌다. 두 사람의 생활은 이렇게 어둠 속에 가라앉았다.
소스케는 과거를 돌아보며 일의 경과를 거꾸로 되돌아보고는 그 담백한 대화가 자신들의 역사를 얼마나 짙게 채색했는지 가슴속으로 철저하게 음미하면서 평범한 사건을 중대하게 변화시키는 운명의 힘을 두려워했다.
소스케는 둘이서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을 때 그들의 그림자가 구부러져 절반쯤 토담에 비친 것을 기억하고 있다.
- P184

소스케는 당시를 떠올릴 때마다 자연의 흐름이 거기서 뚝 멈추고자신도 오요네도 순식간에 화석이 되어버렸다면 차라리 괴롭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은 겨울 밑에서 봄이 머리를 쳐들 무렵에 시작되어 벚꽃이 다 지고 어린잎으로 색을 바꿀 무렵 끝났다. 모든 것이 생사를 건 싸움이었다. 청죽(靑竹)을 불에 찍어 기름을 짜낼 정도의 고통이었다. 
아무 준비도 안 된 두 사람에게 돌연 모진 바람이 불어 둘을 쓰러뜨렸던 것이다. 두 사람이 일어났을 때는 이미 어디나 온통 모래뿐이었다. 그들은 모래투성이가 된 자신들을 발견했다. 하지만 언제 바람을 맞고 쓰러졌는지도 몰랐다.
- P189

폭로의 햇빛이 정통으로 그들의 미간을 비추었을 때 그들은 이미 도의적으로 경련의 고통을 이겨내고 있었다. 
그들은 창백한 이마를순순히 앞으로 내밀고 거기에 불꽃과도 같은 낙인을 받았다. 그리고무형의 쇠사슬에 묶인 채 손을 잡고 어디까지나 함께 보조를 같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부모를 버렸다. 친척을 버렸다. 친구를 버렸다. 크게 보면 일반 사회를 버렸다. 혹은 그들로부터 버림을받았다. 물론 학교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다. 다만 표면적으로는 자퇴한 것으로 하여 형식상 인간다운 흔적을 남겼다. 이것이 소스케와 오요네의 과거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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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0-02 01: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문]
저도 재독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 꼬옥 ✌번 읽으세요 ^ㅅ^

페넬로페 2021-10-03 00:42   좋아요 3 | URL
저는 ‘문‘이 개인적으로 참 좋은것 같아요^^
마지막 장면이 기대되네요^^
네, 꼭 두번 읽을께요**

행복한책읽기 2021-10-05 00: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 유일한 소스케에요. 소스케 덕후들 앞이라 아우 민망민망 ^^;;;

페넬로페 2021-10-05 00:45   좋아요 3 | URL
저는 이 책이 다섯권째인데 그 중에 ‘문‘이 젤 좋아요. 책읽기님이 유일하게 읽온 작품이 제가 좋아하는거라 더 좋아요^^

행복한책읽기 2021-10-05 01:08   좋아요 3 | URL
아. 저는 일어를 모르는데요. 이 작품 읽으면서 원서로 읽고프다는 생각이 들 만큼 문체가 좋았어요. 그럼에도 다른 작품을 더 읽지는 않았다는 ㅋㅋ

scott 2021-10-05 21:17   좋아요 1 | URL
원서로 읽어 보겠습니다
^♡^

행복한책읽기 2021-10-05 23:44   좋아요 1 | URL
scott님 부럽부럽.^^

새파랑 2021-10-05 21: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문> 좋은 책일거 같아요. 저도 곧 읽어보겠습니다. 울적해진다니 완전 제 스타일일듯 하네요 ^^

페넬로페 2021-10-05 21:08   좋아요 2 | URL
울적하고 세상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고, 문장도 아름다워요^^
새파랑님께도 이 책이 좋으면 좋겠어요^^
 

‘일본인이 갤리언선을 건조한다.
먹이를 찾아 웅덩이를 건너는 까만 개미떼 이미지가 다시 뇌리에 떠올랐다. 일본인은 멕시코와의 무역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 결국 까만 개미떼가 웅덩이를 건너 태평양을건너려 하고 있다. 하지만 선교사는 포교를 위해 이런 일본인의 탐욕을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이익을 주고 우리는 포교의 자유를 얻는다.
그 거래를 능숙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베드로회 사람들이
아니다. 도미니크회나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수도사들도 아니다. 디에고 같은 무능한 수도사들도 아니다. 선교사에게는 자신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렇게하기 위해서는 일본인들의 편견을 없애야 한다. 베드로회가 범한 잘못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 P41

사무라이는 이로리 옆에 앉아 농민들을 바라보았다. 농민들의 얼굴은 그와 마찬가지로 눈이 쑥 들어가고 광대뼈가튀어나왔으며 흙냄새가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오랜 세월동안 눈바람과 거친 음식과 노동을 견뎌온 얼굴이었다. 인내하는 것과 포기하는 것에 익숙해진 얼굴이었다. 그는 이 농민들을 통해 큰 바다를 건너 꿈에서도 본 적 없는 멕시코로 데려갈 종자를 뽑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성 안에서 내려온지시로는 사절들은 각자 종자를 네 명까지 데려갈 수 있게허락되었다.
- P76

"남만의 나라에서는" 하고 시라이시는 대뜸 이상한 말을
했다. "그 생활도 일본과는 다를 거네. 임무를 위해서라면
일본의 관습을 끝까지 관철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거야. 
일본에서 하얀 것이 남만에서는 검은 것이라면 검다고 생각하게. 마음속으로 납득이 가지 않더라도 납득한 얼굴을 하는것이 이번 소임이네."

"버리는 돌이지요. 우리는." 마쓰키는 바다에 눈길을 준채 자조하듯이 "평정소의 버리는 돌이 된 겁니다."
"버리는 돌?"
"원래 중신 중 누군가가 이 큰 소임을 맡아야 하는데 메시다시슈인 우리가 뽑힌 것은- 신분이 낮은 메시다시슈라면 도중에 바다에 빠지고 생판 모르는 남만의 나라에서 병들어 쓰러져도 영주님께도 평정소에도 전혀 지장이 없기 때문일 겁니다."
사무라이의 안색이 변한 것을 보고 마쓰키는 그 동요를
즐기듯 말했다.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 사절이라고 해도 그저 벨라스코 한 사람을 의지하고 서한을 전해야 하는 파발에 지나지 않습니다. 영주님이나 중신에게는 멕시코와의 교역을성취하고 남만의 배가 시오가마, 게센누마의 항구에 들어오기만 한다면 우리가 어느 바다. 어느 땅에서 헛되이 죽든 상관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 P111

하지만 지금 사무라이의 마음속에서는 조금씩 미묘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막막한 불안과 희미한 공포를 가져다주었다.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의 마음을 지탱하고 있던 것에 금이 가고, 모래가 떨어지는 것처럼 그것이 무너지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이었다.
- P135

사무라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다. 그에게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한 것은 채찍이 아니었다. 형벌이 집행되는 동안 갑판에 서서 안개 속에서 채찍 소리가 울릴 때마다 태연하게 응시하고 있던 벨라스코의 입상 같은
 모습이뇌리에 남았다. 그리고 벌이 끝나자 기절하기 직전인 사내의 피를 자신의 옷으로 닦고 선실로 데려간 이 남만인의 얼굴이 마쓰키가 말한 것처럼 섬뜩했다. 사무라이에게는 그런 벨라스코와 요조에게 의복을 준 벨라스코가 
도저히 같은 인물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 P144

타국을 정복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포교도 외교처럼 술책을부리고 흥정을 하고 위협을 하고 때로는 타협도 해야 한다.
나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라면 그러는 것이 꼭 꺼림칙하고 지저분한 행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포교를 위해서라면 눈을 감아야 하는 일도 있다. 이곳 멕시코에서도 1519년에 정복자 코르테스가 상륙하여 소수의 병사로 무수한 인디오를 잡아 죽였다. 그 행위가 하느님의 가르침에서 볼 때 옳은 행위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하지만 그런 희생이 있었기에 수많은 인디오가 우리 주님의가르침을 접하고 그 야만스러운 풍습에서 구원받아 새로운길을 걷게 된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악마의 풍습에 빠져사는 인디오들을 그대로 내버려 둘지, 다소의 악에 눈을 감고 하느님의 가르침을 그들에게 전할지는 아무도 경솔하게판단할 수 없는 문제다.
- P176

물론 다나카의 그런 말을 나는 총독에게 통역하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생각했다. 이 여행의 목적은 일본에서의 포교 권리를 베드로회가 아니라 우리 회가 독점하는 것과 내가 그 주교로 임명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나는 스페인까지 갈 필요가 있다. 나를 주교로 임명할 수 있는 사람은 스페인 추기경뿐이기 때문이다.
- P188

"신부님들의 진정한행복이란게 일본에는 지나치게 
독합니다. 
강한 약은 어떤 사람의 몸에는 독으로 변합니다. 신부님이 말하는 더없는 행복은 일본에 그런 독입니다. 멕시코로 와서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이곳 멕시코도 스페인 배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조용히 살았을 텐데 말이지요. 신부님들의 더없는 행복이 이 나라를 흐트러트렸습니다."
- P208

 사무라이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이 여행이 자신의 운명에 도전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골짜기밖에 몰랐을 때는 거기서 살아가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는 이제
자신이 변한 것을 깨달았다. 작은 골짜기, 숙부, 이로리 옆에서 되풀이되는 숙부의 말, 평정소의 지시, 그는 멕시코시티에서 출발한 후 처음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서 주어진 그런 운명에 거역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 P229

벨라스코의 귓가에 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지금 하려는 것은, 주님을 믿지 않는 자에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세례를 받게 하는 신성 모독이 아닐까. 세례 성사로 믿지 않는 자의 죄까지 주님에게 짊어지게 하는 오만한 행위가 아닐까..
벨라스코는 귓가에 들려오는 그 목소리를 지우려고 했다. 그는 성서에 쓰인 주 예수의 한가지 말을 그 방패로 삼았다. 그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 자가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여 병자를 낫게 하는 것을 본 요한이 화를 냈을 때 주님이한 말이었다.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니 막지 마라."
- P276

하지만 주 예수는 정말 나를 내버린 것일까. 회색으로 펼쳐진 하늘을 보며 나는 주님 또한 아버지인 하느님에게 버림받은 것 같은 고독을 맛보았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그렇다. 주 예수는 평생 결코 영광과 축복에 가득 찬 여행을 해온 것이 아니었다. 주님은 사람들의 오해와 비난 속에서 쫓기는 자로 트란스요르단을 걷고, 티레와 시돈을 돌아다닌적도 있었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 슬프게도 그때 주님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옛날에 나는 주님의 그 비참한 말에 그리 깊은 인상을 받지못했다. 하지만 지금 일본인들과 함께 바르셀로나로 가면서그때 주님의 괴로웠을 마음을 생각했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어떻게 그런 절망을 견디는 걸까. 한순간의 기쁨은 송두리째 무너졌고 그들은 다시 긴 여행을 계속하여 낯선 나라를 방문해야 한다. 일본인들이 내게 환멸을 느끼고 원한과 증오를 지닌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 P354

지금의 나는 하느님이 무엇을 바라셨는지 알 수가 없다.
오랫동안 내게는 하느님이 일본에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를 바라셨고, 그런 이유로 내게 인생을 주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랬기에 어떤 괴로움도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자신이 없을 뿐 아니라 끔찍한 일이지만 하느님에게
농락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인간의 역사는 하느님이 계획한 역사로 이어진다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그러나 하느님의 역사는 내 생각이나 의지와는 별도로 존재했음이 틀림없다.
- P394

언젠가 이곳 베라크루스에서 가까운 바나나 숲의 움푹 팬 곳에서 나는 상처 입은 인디오의 손을 잡고 똑같은 기도를 했다. 그러나 그 인디오와 달리 다니카는 자살이라는 교회에 결코 용서받지 못하는 큰 죄를 범하고 죽은 것이다. 교회는 자살한 자에게 장례식을 허릭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때 내게는 교회의 그런 규칙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다나카가 겪은 여행의 고통을, 다나카나 하세쿠라나 니시가지금까지 어떤 마음으로 방랑해왔는지를 너무나 잘 알았다.
다나카가 왜 이 작은 칼로 배를 갈라야 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나는 젊은 인디오 청년의 죽음을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처럼 다나카의 죽음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죽은 자에게 평안한 안식을 주시옵소서."
나는 인생의 마지막 문을 닫는 것처럼 크게 뜬 다나카의
눈을 감겨주었다. 그러는 동안 종자들과 출입구에 선 
하세쿠라와 니시는 내 기도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구석에 모여 움직이지 않았다. - P407

이 황야를 일본인들과 묵묵히 나아가며 나는 죽음을 결의하고 예루살렘을 향해 역시 이런 황야를 걸어가신 주님을 생각했다. 주님은 그때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세상에는 죽음으로 완성하는사명이 있다. 다나카 다로자에몬의 자결은 내게 그것을 가르쳐준 것 같다. 하지만 다나카의 죽음과 주님의 죽음은 한가지 점에서 확실히 다르다. 그 일본인은 사절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것을 속죄하기 위해 자살했다. 하지만 주님은 많은 사람을 섬기기‘ 위해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 P411

"저도… 옛날에 같은 의문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분이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초라하게 살았기 때문에 믿을 수 있습니다. 그분이 추하고 말라빠진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이 세상의 슬픔을 너무나도 잘 알았습니다. 사람의 비탄이나 괴로움에 눈을 감을 수 없었지요. 그래서 그분은 그렇게 마르고 추해졌습니다. 만약 그분이 저희 손에 닿지 않을 만큼 고상하고 강하게 사셨다면 이런 마음이 들지않았겠지요."
사무라이는 전 수도사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분은 평생 비참하게 계셨기 때문에 비참한 자의 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초라하게 돌아가셨기 때문에
초라하게 죽은 자의 슬픔도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결코 강하지 않았습니다. 아름답지도 않았습니다." - P421

이따금 이 인디오들 안에서 예수의 모습을 봅니다."
그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이 일본인의 수명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부은 얼굴이나 거무칙칙한 안색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아마 숨 막힐 듯 더운 늪 주위에서 숨을 거둘 것이다.
그리고 옥수수밭 구석에 묻힐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자네처럼 그 사내를 생각할 수가없네."
사무라이는 미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당신이 그분을 마음에 둘 수 없어도… 그분은 당신을 늘
마음에 두고 계십니다."
"그 사내를 생각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네."
"정말 그럴까요?" - P423

주여, 주님이 제게 무엇을 바라시는지 알려주시옵소서.
주여, 주님의 뜻이었으면 좋겠나이다.
주여, 지금 제 마음에 싹트기 시작한 것이 주님의 의지라면그것을 알려주시옵소서.
- P428

사무라이는 무릎이 떨리는 것을 감췄다. 분노의 목소리와
신음이 목구멍으로 나오는 것을 억눌렀다. 분함과 슬픔이
복받쳐 오르는 것을 손을 꽉 쥐고 참았다. 쓰무라는 자신들의 그 여행이 아무 의미가 없고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히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자신들은 멕시코의 한없는 황야를 가로지르고 스페인을 돌아다니고 로마에까지 갔던 것일까. 베라크루스의 숲속에서 쓸쓸하게 묻힌 다나카 다로자에몬, 다나카의 죽음. 그것은 대체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 P442

"그리고 우리는 살아 있는 한 이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어둠 속에서 중신은 중신, 고이치몬슈는 고이치몬슈, 주군은 주군, 저 같은 메시다시슈는 평생 메시다시슈로 살아가겠지요."
"우리는 봐서는 안 되는 것을… 보고 만 것이겠지."
그렇다. 이것이 일본이었다. 총구멍처럼 작은 창밖에 없는 벽, 창은 오는 자를 감시하기 위해 있는 것일 뿐 넓은 세상을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 P446

골짜기의 밤은 깊었다. 골짜기의 밤을 모르는 사람은
진정한 어둠과 어둠의 침묵을 모른다. 정적이란 소리가 
나지않는 것이 아니다. 정적이란 뒤쪽 숲의 초목이 스치는 소리,때때로 들려오는 새의 날카로운 울음소리, 그리고 가만히 이로리의 작은 불꽃을 향하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다.
세계는 넓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사람을 믿을 수없게 되었습니다." 사무라이는 이로리의 불꽃을 응시하며 니시 규스케의 말을 음미하고 있다. "앞으로는 죽은 듯이
눈에 띄지 않게 살아가야 한다. 그는 이시다의 말도 생각한다. 오늘 밤 니시와 이시다가 지금 자신과 마찬가지로 잠자코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도 떠올렸다.
- P463

사무라이는 테칼리의 움막 안에서 변발을 한 그 사내가
이 종이에 글을 쓰는 모습을 상상했다. 테칼리 늪의 밤은 이곳 골짜기의 밤과 마찬가지로 칠흑같이 어두울 것이다. 변발한 그 사내가 왜 이런 것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이제 사무라이는 막연하게 알 것 같았다. 그 사내는 자신만의
‘그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멕시코의 교회에서 풍요로운사제들이 말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버림받은 자신과 인디오들 옆에 있어 주는 ‘그 사람‘ 을 원했던 것이다. "그 사람은우리 옆에 계십니다. 그 사람은 우리의 괴로운 탄식에 귀 기울이고, 그 사람은 우리와 함께 눈물짓고.…"  사무라이에게는 이 변변찮은 글자를 적어나간 그 사내의 얼굴이 보이는것 같았다 - P465

"나는 형식적으로만 기리시탄이 되었다고 생각해왔네.
지금도 그런 마음에는 변함이 없어. 하지만 정치가 뭔지를알고 나서 이따금 그 사내를 생각해. 왜 그 나라들에는 어느집에나 그 사내의 가련한 상이 놓여 있는지 알 것 같은 기분도 들어, 사람의 마음 어딘가에는 평생 함께해줄 사람, 배신하지 않을 사람, 떠나지 않을 사람을 ㅡ 설령 그것이 병들어 쇠약한 개라도 좋아 ㅡ찾고 싶은 바람이 있는 거겠지. 그 사내는 사람에게 그런 가련한 개가 되어주는 거야."
사무라이는 자신을 타이르듯 되풀이했다.
- P469

넓은 세계, 수많은 나라, 드넓은 바다, 하지만 사람은 어디서나 다르지 않았다.
어디에도 전쟁이 있고 흥정이나 술책이 작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영주의 성 안에서도, 벨라스코 등이 살아가는 종파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무라이는 자신이 본 것이 수많은 땅, 수많은 나라, 수많은 도시가 아니라 결국 인간이 어떻게 해볼도리가 없는 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인간의 그 업 위에 말라빠진 추한 사내가 손발이 못 박히고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우리는 슬픔의 계곡에서 눈물을 흘리며 
당신에게 매달립니다." 테칼리의 수도사는 그 책자의 마지막에 이런 말을 썼다. 이 가련한 골짜기와 넓은 세계는 어디가 다를까.
골짜기는 세계이고 우리 자신이라고 사무라이는 요조에게말하고 싶었으나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 P471

이제 와 생각하면 나의 모든 좌절은 주님이 내게 이 현실을 직시하게 하려고 주신 것 같다. 나의 자만, 나의 자존심,
나의 오만, 나의 정복욕이 어느새 미화했던 것을 분쇄하고지상의 진정한 모습을 보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주님의 죽음이 그 현실을 빛으로 관통한것처럼 나의 죽음이 머지않아 일본을 관통하기 위해….
바스케스 신부는 불에 타 재가 되고 그 재는 바다에 버려질 것이다. 선교사 몇 명도 일본인에 의해 모두 똑같이 되었으니까. - P488

"지금, 시시각각 최후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있네, 일본 - 바위투성이의 이 불모의 땅에 사랑의 비를 퍼붓는 하느님에게 축복 있으라. 그리고 당신들도 내 죄를 용서해주기를, 나는 평생에 걸쳐 너무 많은 죄를 범했네, 효과를충분히 말할 수 없는 사람이 한꺼번에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처럼 나는 지금 순교를 기다리고 있네. 하늘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일본의 길 없는 땅에도 뜻이
이루어지기를, 사제로서 하느님이 주신 소임을 충분히 완수하지 못했던 것을 용서해주었으면 하네. 나의 허영심, 나의오만함 때문에 자네들에게 여러 번 상처를 준 일도 잊어주기를 바라네. 자네들이 주님의 밀밭 일꾼으로서 성과를 올리고 우리 모두를 천주의 영광 안에서 하나로 묶어주기를.."
- P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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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09-05 1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엔도 슈사쿠, 나쓰메 소세키....요즘 페넬로페님..제 마음을 설레게 하시기로 작정하신듯 ....ㅠㅠ

페넬로페 2021-09-05 17:39   좋아요 0 | URL
가을이라 그런것 같아요 ㅎㅎ

레삭매냐 2021-09-08 2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싸무라이 짱 !@

페넬로페 2021-09-08 22:06   좋아요 0 | URL
다 읽었는데 너무 많은 의미가 담겨 있어 리뷰쓰기 너무 어려워요^^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