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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스러운 세상 속 혼자를 위한 책 - 혼자가 좋은 나를 사랑하는 법 INFJ 데비 텅 카툰 에세이
데비 텅 지음, 최세희 옮김 / 윌북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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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타고난 자신의 성격으로, 생긴 대로 사는 경우가 다반사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도 사람마다 다르며, 그것 또한 바꾸지가 쉽지 않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격 중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으며, 그것을 고치기 위해 노력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것은 약점이 되어 자존감을 깎아내리고 자신의 콤플렉스가 된다.

 

소란스러운 세상 속 혼자를 위한 책은 낯가림이 심해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작가, 데비 텅의 자전적 카툰 에세이이다. 재미있기보다 진지한 내용이 많은 이 에세이는 내향적인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나와 있다. 이 책의 원제목은 ‘Quiet Girl in a Noisy World-An Introvert's Story’ 인데, 이 원제가 훨씬 더 책의 내용에 맞는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워낙 내향적인 성격을 가진 데비는 수업 시간에 궁금한 것이 있어도 질문을 잘 못하고, 말수도 적다. 팀 플레이나 세미나를 할 때도 적극적인 참여가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책임감이 없거나 일을 회피하는 성격은 아니다. 자신이 계획한 일을 잘해내고 성실하다. 다만 그것들을 혼자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내향적인 사람이 거의 그렇듯이, 데비는 책읽기와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이해해주는 사랑하는 사람도 만났다. 외향적인 성격을 가진 데비의 남편은 그녀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결혼의 장점은 많겠지만, 그 중에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것이 어쩌면 가장 좋은 것일 수도 있다. 이 책에는 데비의 남편이 일방적으로 그녀를 다 이해해주는 걸로 나와 있지만, 아마 데비도 외향적인 그녀의 남편을 잘 이해하고 많은 것을 허용해줄 것 같다.




 


타고 난 성격 탓에 혼자 있기를 좋아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필수적으로 사회생활이 필요하다. 학교와 직장을 다녀야하고, 사람을 만나야 한다. 데비는 자신의 성격 때문에 사회화의 피곤함에 힘들어 한다. 또한 끊임없이 세상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려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어려서부터 선생님이나 부모님에게 들은 여러 가지 말들도 그녀에겐 상처가 된다.

 

너는 왜 친구가 없니?

이렇게 수줍음이 많아서 어떡할래?

도대체 뭐가 문제니?

너 괜찮은 거야?

정말 슬퍼 보여.

이렇게 말이 없으면 안 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뭔가 문제가 있어. -p49

 

데비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역시 무척 소심하다. 자신의 본심을 잘 얘기하지 못하고, 밖에서와 집에서의 그녀의 모습이 다르다. 외향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은 데비 같은 사람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특히 여러 사람이 함께 일하는 곳에서는 더 그럴 수 있다. 그녀는 계속해서 자신의 성격과 취향에 대해 고민하고 스트레스를 받지만 결국 그냥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가능한 한 가장 주체적인 방식으로 스스로의 삶을 바꿔 나가기로 한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의 삶을 선택했는데, 지금 한국에서까지 그녀의 책이 번역되어 나온 걸 보면 일단은 성공한 셈이다.






세상엔 여러 다양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산다. 그 성격 중에 당연히 나쁜 것이 있다성격의 색깔 역시 모두 다르다. 그렇기에 나와 다르다고, 남들과 다른 행동을 한다고 무작정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은 나와 색깔이 다른 사람일 뿐이니 말이다.

 

이 책은 한자리에서 가볍게 금방 읽을 수 있는 카툰 에세이지만 생각할 것이 많다. 한 사람이 자신의 성격에 대해 고민하고 걱정하지만 결국 자기만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을 서술했다. 그런데 그것이 오직 작가인 데비 텅만의 얘기는 아닐 것이다. 책의 여러 에피소드에서 나의 어릴 때의 모습들과 지금 어른으로서 살아가는 고민들이 많이 겹쳐 공감되는 내용이 많았다. 타고난 성격과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마음에 안들 때가 많은 우리들이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그냥 나대로 살아가는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알고 보면 누구나 조금씩은 멋지고 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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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6-01 22:3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수전 케인의 <콰이어트>느낌인걸요?아직 읽진 않았는데 김영하작가 팟케스트에서 듣기론 페넬로페님의 리뷰와 같은 느낌 이었어용~♡ 두 사람이 함께 책을 좋아해도 예뻤겠지만 달라서 배려하는 것도 보기 좋았겠어요♡(*•ᗜ•ฅ*)♡

han22598 2021-06-01 23:23   좋아요 6 | URL
맞아요. 콰이어트랑 비슷한 느낌의 책인 것 같아요 ^^ 갠적인 생각인데, 콰이어트는 내성적인 성향에 대해서 좀 defensive 한 느낌이고, 이 책은 수용적인 느낌인 것 같더라고요. 둘다 모두 의미가 있고 좋았어요 ^^

페넬로페 2021-06-01 23:29   좋아요 3 | URL
콰이어트도 읽어 보고 싶어요~~
김영하 작가의 팟케스트는 듣지 않았는데 이 책의 느낌들은 다들 비슷할듯 해요^^
저는 두사람이 좀 달라야 한다는데 한 표 입니다**

미미 2021-06-01 23:30   좋아요 4 | URL
둘 다 읽어보고 싶네요!!*^^*

새파랑 2021-06-01 22:3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는 내향적인지 않지만 책읽기랑 비오는 날을 좋아해요. 비오는 날은 전과 막걸리 아닌가요? ㅎㅎ 이 책도 그림하고 글이 너무 좋네요 ^^

페넬로페 2021-06-01 23:32   좋아요 4 | URL
저도 무조건 책읽기와 비오는 날 좋아해요^^앞으로 비가 오는 날이 많을텐데 맥주 대신 막걸리 한 번 마셔 보겠습니다 ㅎㅎ
이 책은 부담없이 읽을 수 있어서 좋아요^^

han22598 2021-06-01 23: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과거에는 지나치게 외향적인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내향적인 성향도 많이 가진 사람으로 변한 것 같았요. 가장 큰 변화의 원인은 미국으로 오면서 언어의 장벽, 환경의 변화로 인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적응이 되어진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성격이라는 것...변하기도 하고 상대적인 의미가 강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누구랑 함께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기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보다 외향적인 사람 곁에서 나는 비교적 외향적인 사람이 되기도 하고요. ㅎㅎ 그리고 사람과 함께 어울려 잘 지낸다는게 성향의 다름, 같음으로 정의될 수 있는 부분은 적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서로를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 머 그런게 중요한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데비랑 데비남편 두 사람의 모습 좋았어요 ^^

페넬로페 2021-06-01 23:37   좋아요 4 | URL
네, 맞아요^^han님의 말씀에 백퍼 동의합니다. 무엇보다 환경이 그렇고 주변 사람들의 영향도 커죠^^그 사람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가느냐가 중요한데 그냥 그대로 인정해줄수밖에 없을듯 해요^^

붕붕툐툐 2021-06-01 23:2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딱 하나만 선택하라면, 책>의 저자와 동일하네요~ 두 권 다 읽고 싶어요~!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 만난 거 진심 부럽네요~ㅎㅎ지금은 없으니, 책에 나온대로 나 자신에게 든든한 지원군 되어주기로~ㅎㅎ

페넬로페 2021-06-01 23:41   좋아요 5 | URL
네 그 책이 마음이 들어 이 책도 읽었어요~~자기 자신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다는 말 넘 좋아요^^오늘부터 저 자신에게도 실천해야겠어요**

scott 2021-06-02 00:5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카툰 넘 좋네요
첨엔 글은 안읽고 카툰 만 봤는데
어쩜 이런 이상적인 커플이 ㅎㅎㅎ
각자가 좋아하는걸 진정으로 존중해주는

우리 모두 끊임없이 세상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려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죠.
부모가 바라고 고대하는 ‘나‘
사회에서 필요한 부속품이 되기 위해 고군 분투 하고 있는 ‘나‘

이책의 저자 데비보다 페넬로페님의 코멘트가 더 좋은데요
[알고 보면 누구나 조금씩은 멋지고 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럼요 ㅎㅎ
❤*.(๓´͈ ˘ `͈๓).*❤


페넬로페 2021-06-02 08:53   좋아요 3 | URL
정말 이 커플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것 같아 참 보기에 좋았어요~~scott님 말씀처럼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나갈까 고민을 많이 하고 살아가고 있는것 같아요^^
나이가 들어가니 조금 나에 대해 맘 편하게 되어가고 있는데 그래도 여전히 그 고민들은 쉽게 풀리지는 않을 듯 해요 ㅎㅎ

hnine 2021-06-02 08: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제목 밑에 써있네요 ‘INFJ 데비 텅의 카툰에세이‘라고.
(저도 INFJ인데...^^) 비슷하다 했어요.

페넬로페 2021-06-02 09:04   좋아요 3 | URL
네, 데비 텅의 작품의 표지엔 이름 앞에 INFJ 가 적혀 있어요^^
책의 끝부분에 이런 내용이 나와 있어요. ‘INFJ는 아주 드문 성격으로, 전체 인구의 1퍼센트 미만에 해당합니다‘라고 쓰여져 있거든요~~이 부분에 대해서 작가가 자세히 서술하고 있어요^^
hnine님도 같은 유형이니 작가에 대해 공감을 많이 하셨으리라 생각되네요~~
근데 이 유형이 똑같이 나오지는 않더라도 우리 모두 조금씩은 비슷한 모습들이 있을 듯 해요**

바람돌이 2021-06-02 11:1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 마지막 그림 좋아요. 저는 나이 들어서 저렇게 공원에 남편과 앉아서 따로 각자 하고 싶은걸 하면서 앉아 있는거 하고 싶어요. 그러면 남편이가 커피를 사다 주는거까지 완벽합니다. ^^
저기 저자가 들었던 걱정 중에 어떤 것은 제가 아이들에게 한 걱정도 섞여 있어서 살짝 찔리기도 해요. 그런 말 자체가 듣다보면 도리어 스트레스가 될 수 있겠구나 또 깨달음을 얻습니다.

페넬로페 2021-06-02 11:30   좋아요 3 | URL
책이 나한테 좋다 아니다는 제가 그 책에 빠져 공감할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도 나눠질 수 있을것 같아요~~
저는 작가의 모습에서 딸아이의 성격도 볼 수 있었어요.
저는 외동아이를 키우다보니 더 걱정이 많아요^^그래서 작가도 이해했고 편견을 가지지 않고 타인을 보려고 노력중이예요^^

서니데이 2021-06-05 17: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페넬로페 2021-06-05 18:16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께서도 편안하고 즐거운 주말 보내시기를 바래요♡♡

yka525252 2021-06-07 10: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보 공유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서니데이 2021-06-07 23: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분은 infj네요. i가 e보다 내향적인가요.책속의 소심한 모습은 낯설지 않은 걸 보니 저도 i라서 그런 것 같아요.
페넬로페님 좋은밤되세요.^^

페넬로페 2021-06-08 09:50   좋아요 2 | URL
저도 mbti에 대해서는 자세히 몰라서요~~저자가 자신의 성격에 대해 고민하다가 자신이 이런 유형이라는걸 알게 되거든요.
우리 모두 조금은 이런 성향이 있을것 같아요^^
서니데이님,
날씨가 점점 더워지고 있어요
건강하게 오늘 하루도 잘 보내시기 바래요^^

독서괭 2021-06-10 10: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조용히 가서 커피사다 주는 남편 넘 좋네요~>ㅁ< 전 어릴 땐 작가처럼 질문해야지 해야지 하며 심장만 쿵쿵대다가 결국 못하는 그런 아이였어서 내향적이라고 생각했는데 20대 후반쯤부터는 남 앞에서 말하거나 질문하는 게 별로 어렵지 않아지더라구요. 여전히 내향인에 가깝지만 외향성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고민하는 아이들에게 읽히면 참 좋을 것 같은 책이네요!

페넬로페 2021-06-10 15:46   좋아요 2 | URL
독서괭님의 말씀이 모두 저한테 해당되는것 같아요. 이 책에서 저의 어린시절을 발견했고 그런 성향의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고 생각해요. 데비의 남편은 정말 좋은 사람인것 같아요. 아내의 성격이나 취향을 그대로 존중해주는것 같아서 보기에 참 좋았어요^^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 어느 포로수용소에서의 프루스트 강의
유제프 차프스키 지음, 류재화 옮김 / 밤의책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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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된다. 이때 소련군은 폴란드 장교 및 지식인을 대거 수용소에 가둔다. NKVD(내무인민위원회-스탈린의 통치 기간동안 행해진 정치적 숙청의 직접적인 실행 기관)는 포로들의 성향을 철저히 파악하여 소련 체제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은 모두 제거하자고 스탈린에게 제안했고, 스탈린도 이를 수용한다. 1940년 봄, 카틴 숲에서 수천 명이 학살된다(카틴 숲 대학살). 카틴 외에도 하리코프, 칼리닌 부근 수용소의 포로까지 합치면 당시 목숨을 잃은 폴란드인은 총 2만여명에 이른다. 결국 그 지역에 살아 남은 포로는 그랴조베츠 수용소에 있던 400여 명의 장교와 군인들 뿐이었다.(서문과 옮긴이 미주에서)

 

 

우리는 지적 노동을 해서라도 무너지지 않아야 했다. 우리를 잠식하는 쇠약과 불안을 극복하고 뇌에 녹이 스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그리하여 우리 중 몇 사람이 군사학과 역사학, 문학 강의를 시작했다. -p10

 

영하 45도까지 떨어지는 추위 속 노역으로 완전히 녹초가 된 채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의 초상화 밑에 다닥다닥 붙어 않아, 당시 우리는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주제에 대한 강의를 열중해 듣던 동료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이 같은 각고의 지성적 노력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우리의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던 정신의 세계를 생각하고 그것에 반응할 수 있었다. -p12~13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동료들을 보며, 항상 죽음의 문턱에 서 있던 그들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정신의 세계만이라도 붙들고 있어야 하는 상황은 위태롭다. 인간의 육신은 그들의 지성과 정신을 위해 희생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오히려 집요하게 유기적인 작동을 하고, 그 결과를 인식시키려 한다. 그러한 현실에서 안간힘을 쓰며 정신을 지키려하는 그들의 모습은 숭고하다. 필요한 책을 구할 수 없고, 가진 것이라곤 프루스트 작품에 대한 기억만으로 강의를 하며, 육신의 피곤함 속에서도 모여 앉아 강의를 듣는다. ‘교외수업이라고 일컬어지는 그 순간들의 시간은 그들에게 기쁨이었고,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로 남아 있다고 한다. 왜 아니겠는가.

 

폴란드 출신의 화가이자 작가인 유제프 차프스키무너지지 않기 위하여는 그랴조베츠 포로 수용소에서 동료들을 위해 마르셀 프루스트를 주제로 강의한 그의 노트 일부를 옮긴 것이다. 이 책의 서문을 통해 알게 된 그들의 숭고한 이야기에 내가 더 기대한 것은, 수용소의 현실과 강의를 듣는 그들의 느낌과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짧은 배경에 불과하고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차프스키의 프루스트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한 강의의 내용이다. 그것에 대해 살짝 실망했지만, 곧 그의 강의에 빠져들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세 번 정도 도전하고, 곧 포기해버린 책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내가 꼭 읽어야 할 책이기에 차프스키의 강의는 나에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한 좋은 입문서였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프랑스의 문화적인 배경을 시작으로 프루스트에 대한 개인적인 소개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내용에 대해. 비록 조각조각, 자신의 기억만으로의 강의이지만 무척 훌륭했다. 이 책을 전혀 읽지 않은 미래의 독자인 나에게 흥미를 주었으며, 스완과 오데트의 사랑에 대한 구절에서는 재미있기까지 했다. 10권이 넘는 대하소설의 내용을 기억하며, 생각을 꺼낼 수 있다는 것은 저자의 프루스트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한 열정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만약 내가 그러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난 우리의 정신을 위해 무엇을 얘기할 수 있고, 읽은 책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 수 있을지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매일 매 순간, 책을 읽지만, 읽은 내용에 대해 정리하고, 깊이 생각하는 것이 부족한 나이기에, 자신있게 기억으로만 얘기해줄 수 있는 책이 별로 없음을 실감한다. 이 책은 나의 책읽기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하게 만든다.

 

내가 가진 것이라곤 프로스트의 작품에 대한 기억뿐이어서 어떻게든 그것을 정확하게 떠올려 보려고 정말로 애를 많이 썼다. 사실 이것은 문학 에세이가 아니다. 내 인생에 언제 다시 만나볼 수 있을까 싶은 책, 내가 정말 많은 빚을 진 어느 작품에 대한 추억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서문에서)

 

책을 읽다 보면, 어떤 책은 내가 기대하지 않던 전혀 다른 방향에서 나의 고민을 해결해주기도 한다. 출판사를 바꿔가며 두 번이나 꼬박 읽은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좋은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했다. 아니 나에게좋은 소설이란 무엇인가가 맞는 표현일 것이다. 이때까지 내가 생각한 좋은 소설이나 고전은 시대적인 상황과 작가의 이력을 배제하고(물론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냥 글을 읽음(글 속에서)으로써 특별하고도 보편적인 느낌을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울프의 소설은 그러한 느낌에서 살짝 빗나갔다. 서사를 거의 배제하고, 자신의 경험에서 온 것들을 의식의 흐름속에서 계속 내뱉는 그 말들은, 작가의 배경을 잘 모르고서는 이해하기가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등대로는 나에게 좋은 소설인지, 아닌지가 잘 판단되지 않았다. 차프스키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처음 읽었던 시기는 프랑스어에 대한 실력이 그렇게 대단한 편이 아니었을 때이다. 문학적 소양도 많지 않아 내용을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책에서 주는 뭔가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때 나를 사로잡은 것은 프루스트가 다루는 이야기와 그것에 담긴 의미였지 문학적 질료나 형식이 아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들의 조합으로써 심리를 해석하는 예지가 곧장 내 가슴을 밀고 들어왔다

이 문장을 읽으며 내가 생각한 울프의 글에 대한 나의 느낌이 굉장히 편협적이고, 결국 나의 독서는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학과 예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형식을 파괴하고, 내 안의 굳은 덩어리같이 뭉쳐있는 아집과 벽을 파괴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가가 얘기하는 것들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그 이면의 것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궁극적으로 그렇게 해야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차프스키의 문장에서, 지극히 당연한 것들을 뒤늦게 깨닫는다.

 

프루스트는 나이가 들면서 어떤 냄새나 어떤 향기도 참을 수 없게 되어, 생애 마지막 몇 해 동안 전체를 코르크로 덮은 방에서 생활했다. 영하 45도까지 내려가는 곳에서, 노역에 시달리며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수용소의 삶 역시 사방이 코르크로 막힌 것처럼 단절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극단적인 곳에서, 프루스트와 살아남은 자들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글을 쓰고, ‘정신을 위한 강의를 듣는다. 그들은 그렇게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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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5-05 15:5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런 이유를 잘 알았기 때문이겠죠? 지식인들을 우선적으로 잡아가고 죽인걸 보면요. 정신적 의지란 전염성도 강한것 같습니다.제목부터 뭉클해요!🥲

페넬로페 2021-05-05 18:12   좋아요 3 | URL
철저하게 자신들의 하수인으로 민들기 위해 지식인부터 죽이는것이 참 잔인하죠? 이 책의 제목과 짪은 서문에서 참 가슴 뭉클하고 숙연해져요^^

coolcat329 2021-05-05 16:05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프루스트 입문서로 읽으면 좋군요. 기억에 의존한 강의라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한 작가의 열정이 대단했네요.
저는 방금 읽은 책도 선뜻 말하기 힘든데 말이에요.

페넬로페 2021-05-05 18:13   좋아요 4 | URL
네, 이 책이 제가 기대한대로의 서술로 이어지진 않지만, 프루스트에 대해서는 좋았어요~~

scott 2021-05-05 16:18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유제프 차프스키가 카틴 숲 대학살 사건에서(소련이 2만2000명의 폴란드 군 장교와 엘리트들을 카틴 숲에서 집단 학살시킴) 살아남은 79명중 한 사람입니다.
수용소 영하 40도 이하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면서 오로지 기억에 의존해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강의 한것 그자체도 믿기 힘들 정도네요 온전하게 살아 움직이는것 조차 힘든 상황이였을텐데
극한의 상황속에서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성 마저 무자비하게 짓밟히고 있는 상황 속에서 ‘나‘라면, 우리 라면,,,,

저도 지금 프루스트와 울프 여사의 책 번갈아 가며 읽고 있어서 인지 페넬로페님의 이 리뷰 읽고 또 읽고,,,
[문학과 예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형식을 파괴하고, 내 안의 굳은 덩어리같이 뭉쳐있는 아집과 벽을 파괴해야만 하는 것이다.]
페넬로페님의 이 문장에 깊이 동감!
카프카가 ‘책이란 우리 안의 꽁꽁 언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여야 한다‘ 라는 말을 남겼죠.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살아남아서 이런 글을 남긴 작가에게 무한의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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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1-05-05 18:16   좋아요 3 | URL
scott님께서도 울프 읽고 계시는군요~~저는 이 책 읽으며 scott니의 페이퍼에 올려주신 프루스트에 대한 글들이 많이 도움됐어요~~차프스키가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79명이라 살아남은 자의 고뇌도 많을것 같았어요 ㅠㅠ

새파랑 2021-05-05 17: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으면 프루스트의 책을 읽을 수 있는건가요? ㅎㅎ ‘정신‘이 무너지지 않기 위한 강의라는게 엄청 인상적인 것 같아요. 페넬로페님에게 반성과 성찰을 하게 만든다니 꼭 읽어봐야 겠네요^^
(저도 반성과 성찰을 할 수 있게 ~~!)

페넬로페 2021-05-05 18:18   좋아요 3 | URL
확실히 이 책으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의 접근은 좀 쉬울것 같아요^^책을 그냥 읽는데 급급한게 아닐까하는 반성을 했어요 ㅎㅎ

레삭매냐 2021-05-05 21:1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니 결말에 가서는 이렇게
심오한 각성이 등장하게 될
줄이야.

저는 도저히 그 경지에 이르
지 못할 듯하여, 기존에 하
던 대로 편협하고 자기만족
적인 그런 독서를 하는 것으로.

쿨럭.

페넬로페 2021-05-05 22:41   좋아요 2 | URL
ㅎㅎ
제가 잘하는 것이 반성이고 각성이라~~
레삭매냐님은 충분히 독자적인 독서를 할 수 있는 분이시죠~~
그저 저는 중간중간 각성하며 따라가겠습니다^^

그레이스 2021-05-05 21:15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이책 읽어야겠군요.
우리의 일상에서도 무너지지 않기위해 책을 펼쳐드는 순간이 많지 않을까요?
저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겠지만...
저의 경우는 그런데...^^
마음이 너무 힘들때는 아주 어려운 책을 읽어요^^

페넬로페 2021-05-05 22:44   좋아요 3 | URL
그레이스님의 말씀이 맞아요~~
우리의 일상, 특히 여기 알라디너들은 거의 그렇다고 볼 수 있을것 같아요~~
조만간 같이 프루스트 읽어요^^

mini74 2021-05-05 21:2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 읽은 책에 정신적 비상식량인 말이 있더라고요. 절박한 순간 필요한 건 인간다움을 잃지 않을 ㅠㅠ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리뷰 고맙습니다 ~

페넬로페 2021-05-05 22:46   좋아요 5 | URL
그 절박한 순간을 상상만 해도 가슴 벅차고 뭉클하더라고요~~
정신적 비상식량으로 더 치열하게 책 읽고 쟁여놔야겠어요^^ㅎㅎ

scott 2021-06-04 20:2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유제프 차프스키!!
페넬로페님에게 땡 TO날린 리뷰

이달의 당선작!
제예감 적중 함요 ㅎㅎ
추카~*추카~*٩(๑❛ᴗ❛๑)۶

페넬로페 2021-06-04 23:21   좋아요 3 | URL
scott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땡 to도요^^

그레이스 2021-06-04 20: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축하드려요~♡

페넬로페 2021-06-04 23:22   좋아요 3 | URL
에휴.감사드려요^^

미미 2021-06-04 20: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축하드려요~♥

페넬로페 2021-06-04 23:22   좋아요 3 | URL
미미님, 이렇게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딩 2021-06-04 22:5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 페넬로페님 5월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페넬로페 2021-06-04 23:23   좋아요 2 | URL
초딩님, 제 서재에 방문해 축하해주셔서 감사해요^^

서니데이 2021-06-04 23:0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축하드립니다^^

페넬로페 2021-06-04 23:24   좋아요 3 | URL
서니데이님,
감사드려요^^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바래요^^

새파랑 2021-06-04 23: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한번 더 축하드릴께요^^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이정호 그림 / 알마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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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에 병이 생기면, 그것은 나를 지배하는 주체이며 일부가 된다. 어쩌면 전체가 되기도 한다. 그 병을 치료하고자 병원에 가면, 그것은 객체이자 대상화가 된다. 이때부터 병은 나에게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줄 뿐만 아니라 불편하고 외로움을 주는 것이 된다.

 

인간이라는 주체 즉 고뇌하고 고통받고 병과 맞서싸우는 주체를 중심에 놓기 위해서는 병력을 한 단계 더 파고들어 하나의 서사,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무엇이?‘뿐만 아니라 누가를 알게 된다. 병과 씨름하고 의사와 마주하는 살아있는 인간, 현실적인 환자 개인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p11(들어가는 말 중에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첫머리에 나오는 이 문장은 병을 앓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듣기를 원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말일 것이다. 대상화된 병엔 개인의 서사가 빠져있기 일쑤이며, 그것은 오로지 수치로만 판단되기 쉽다. 이 책의 들어가는 글은 의사인 올리버 색스가 병과 환자를 대하는 생각 그 자체이다. 저자가 신경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라 더 그렇겠지만, 병리적 기술뿐 아니라 환자를 인간 자체로서 대단히 중시한다. 본문을 읽기 전에 들어가는 글을 읽으며 저자의 생각에 많이 공감했다.

 

이 책은 상실, 과잉, 이행, 단순함의 세계라는 네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신경 기능의 장애나 불능으로 인해 생기는 증상에 대해 서술해 놓았다. 저자의 표현대로 이 책에 실린 기묘한 이야기들은 보통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세계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난 제목인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가 어떤 상징인 줄 알았다. 설마 아내를 모자로 착각하다니? 그러나 진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가 있었고 그 사람은 자신의 질서를 가지고 나름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나의 육체를 제어할 수 없다면 그건 엄청난 불행이다. 우리는 아무도 우리 몸의 제육감의 기능에 대해 의식하지 않는다. 그냥 저절로 내 육체가 움직여지기 때문이다.

 

자기 몸을 통제하고 움직이는 것만큼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이 우리에게 또 있을까? 그러나 그런 일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데다 아주 익숙한 일이기 때문에 정작 우리는 그것에 대해 관심도 갖지 않는다.-p86

 

하루 아침에 몸의 고유감각을 잃은 크리스티너의 이야기를 읽었을 때, 난 마음이 너무 먹먹해져 며칠 동안 우울했다. 인간에게 주어진 너무나 당연한 것들을 어떤 사람은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 존재의 무거움을 준다. 이 책에 나오는 여러 가지 증세들은 사실 별다른 이유없이 생기는 것들이라 더 고통스럽고 불행하다.

 

우리 몸의 어떤 기능의 상실이나 결손으로 인한 병도 힘들지만 과잉으로 생기는 증세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이다. 투렛 증후군이나 흥분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에너지가 많아 활기차고 힘이 넘치는 듯 보이지만 그것 역시 고통이다.

 

위험하리만치 좋은 몸 상태병적인 특출함’, 그것은 기만적인 행복감이다. 그 밑에는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다. 그것은 과잉이 놓은 무시무시한 함정이다.........자아가 병과 제휴를 맺고 한 몸이 되어 결국에는 독립된 존재이기를 포기하고 병의 산물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p161

 

쇼스타코비치의 비밀이란 것이 있다. 그의 왼쪽 내실 관자 뿔 부분에 금속 파편인 탄환 부스러기가 있는데, 그것이 머릿속을 선율로 가득차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에 그는 그것을 제거하기 꺼려했다고 한다. 간질 증세가 있었던 도스토옙스키도 환영으로 인해 황홀감에서 나오는 아우라를 자주 경험했다고 한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병적인 생리적인 현상이 예술가에게는 영감을 받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병으로 인해 고통받지만, 한편으로 그것이 창작의 원천이 될 수도 있으니 삶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단순함의 세계로 표현된 지적 장애인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올리버 색스는 조금 모자란 이들의 세계의 특징을 구체성으로 보고 있다.

 

그들의 세계는 생기 있고 정감이 넘치고 상세하면서도 단순하다. 왜냐하면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추상화를 통해 복잡해진 것도, 희박해진 것도, 통일된 것도 없다......신경학자들은 구체성, 구체적인 사상을 열등하고, 고려할 가치가 없고, 통일성이 결여되었고, 퇴보적인 것으로 간주한다....그러나 나는 정반대라고 생각한다. 구체성이야말로 기본이다. 현실을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것으로, 개인적이며 의미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 구체성이다. 만일 이 구체성을 상실하면 모든 것을 잃는다.-p291

 

저자는 그들의 결함보다 능력을 찾아내야 한다고 한다. 지능이 낮은 사람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까닭은 그들에게 창조적인 지성이 있기 때문이고 그 지성을 소중하게 키워주어야 한다고 했다.

 

나의 지인 중에 아들이 자폐아인 분이 있다. 그 아들은 30살이 넘었다. 그 분은 아들이 어렸을 때, 자폐 판정을 받고 난 후, 아들의 지능과 사회성을 위해 하루에도 몇 번 씩 이름난 교육 센터를 다니고, 병원을 오갔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그 분은 모든 것이 소용없었다고 말씀하신다. 자신이 죽을 때까지 아들은 보호해줘야 하는 대상일 뿐이라고 하셨다. 나의 지인이 이 책을 읽는다면 무엇이라 말할지는 모르겠다. 병원에서 환자를 대하는 분들 역시 올리버 색스의 주장을 온전히 다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인 나, 언제 내 몸에 병이 들지 모르는 나약한 육체를 가진 나는 이 책으로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끼고 위안을 받는다. 혹시라도 병에 걸리면 난 올리버 색스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의사를 만나고 싶다.

 

몇 년 전,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읽었을 때, 그 기묘한 이야기들이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마음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불행한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했다. 이번에 다시 읽은 이 책은 나에게 두려움을 준다. 그동안 난 나이를 먹었고, 늙음에 더 다가와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신경학적인 많은 전문용어들이 나오고 병에 대한 메커니즘적 설명도 있지만 그리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작가의 문장이 그만큼 뛰어나다. 인문학적이며 철학적인 접근도 돋보인다.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올리버 색스라는 인간에도 관심이 간다. .

 

겉보기에는 건강하지만 사실은 병에 걸린 상태라면 그것은 하나의 패러독스다......특히 예술을 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기에 매료되어 왔다. 이것은 디오니소스적이면서도 비너스적이고, 동시에 파우스트적인 소재이다. 또한 토마스 만의 소설에 되풀이해서 나오는 소재이기도 하다.-159

 

이 문장은 올리버 색스의 자서전인 온 더 무브를 읽을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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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4-19 22:3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어보니 병력을 하나의 서사로 만든다는것, 병리적 기술보다 환자를 인간 자체로 중요시하는게 환자에게 있어서 큰 위안이 될 것 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럼 정신적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텐데... 이런 생각을 하시는 의료인이 대다수일 거라 생각합니다~!

페넬로페 2021-04-19 23:50   좋아요 3 | URL
병력을 하나의 서사로 보고, 인간 자체를 들여다보는게 참 위로가 되고 따뜻했어요.그래서 이 책이 너무 좋았어요^^

mini74 2021-04-19 22:4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올리버 색스의 글엔 환자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랑 관심이 깊이 담겨 있어 참 좋았어요 페널로페님 리뷰 참 좋아요 *^^*
저는 색맹의 섬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이 책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고 선생님께 이야기했더니 작가가 누구냐고 물으셨는데 올리버만 외치고 말았다는 아이들 이야기도 생각나네요 ~ 편한 밤 보내세요 *^^*

페넬로페 2021-04-19 23:52   좋아요 4 | URL
올리버 색스의 색맹의 섬이란 책도 있군요. 전 잘 몰랐어요. 그 책도 읽어봐야겠어요. 저자의 이름에 대해선 저도 ㅎㅎ. 글 쓰며 철자법이 맞는지 계속 확인했어요~~

미미 2021-04-19 22:5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김영하 작가 팟케스트에서 이 소설 일부를 듣고 올리버 색스 작가님 책 다 읽고 싶었어요. 페넬로페님 리뷰 읽고나니 다음 책 구매때 얼른 사야겠습니다. 아 이곳은 장서가 양성소인건가요?
🙄🥲굿밤되세요~♡

페넬로페 2021-04-19 23:54   좋아요 3 | URL
안그래도 미미님 읽을 책 쌓여 있을텐데 책 추가시켜 드렸네요. 그래도 이 책 읽으시면 좋겠어요.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이 또 달라지거든요^^

scott 2021-04-20 00: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엉클 텅스텐]이라는 자전적 성장 이야기 읽고 색스 박사에 홀딱 빠졌어요.

페넬로페님이 올려주신 이책을 토대로 이와 관련된 질병을 다룬 영화들이 꽤 만들어졌는데
혹시 페넬로페님 시간 나실때면 보삼 333
[카드로 만든집-엘리펀트 맨-셔터 아일랜드-지상의 별처럼]

페넬로페님이 다음번에 읽으실 ‘온 더 무브’‘ 이책 번역자 김명남!
믿고 보는 번역가 ^ㅎ^

페넬로페 2021-04-20 08:41   좋아요 1 | URL
와, 영화로도 이렇게 많이 만들어졌군요. 꼭 봐야겠어요.
감사해요^^


라로 2021-04-20 01: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모든 것은 그자리에> 읽고 흠뻑 빠졌어요!! 이 책도 당근 넘 좋구요!!!

페넬로페 2021-04-20 08:46   좋아요 0 | URL
‘모든 것은 그 자리에‘도 꼭 읽어보겠습니다. 미미님 말씀처럼 여기 북플은 장서가 양성소~~
감사해요^^

han22598 2021-04-21 0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어디서 읽은 구절인데, 인생은 생(1)과 죽음(0)처럼 이분법적이지 않고, 그 사이에 무한의 간격이 존재한 다는거. 인간의 몸이란 어떠한 전문적인 지식과 소견으로 질병이 있다와 없다라고 판단되어지는 것이 아닌 무병과 질병의 무한대의 간격이 존재하는 것이 우리의 몸,삶이지 않을까요? 올리브 색스는 그 간격을 좀더 치밀하고 촘촘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페넬로페 2021-04-21 08:43   좋아요 0 | URL
네 정말 그런것 같아요~~생과 죽음, 무병과 질병의 ‘무한의 간격 ‘이 삶을 이루고 존재의 깊이가 되죠. han님의 말씀을 듣고 올리버 색스에 더 관심이 가요^^

2021-04-27 1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27 2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28 1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ott 2021-05-07 15: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페이퍼+리뷰 2관왕!!
축하해요 ^ㅎ^

페넬로페 2021-05-07 18:33   좋아요 2 | URL
에휴, 감사해요♡♡

새파랑 2021-05-07 16: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우 페넬로페님 2관왕 축히드립니다~!!★★

페넬로페 2021-05-07 18:34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1-05-07 17: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페넬로페 2021-05-07 18:34   좋아요 3 | URL
축하해 주셔서 감사해용♡♡♡

미미 2021-05-08 11: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2관왕 축하드려요!!^0^♥

페넬로페 2021-05-08 11:35   좋아요 2 | URL
진짜 몸둘바를 모르겠어요~~
감사합니다^^

초딩 2021-05-08 18: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 ㅜㅜ 넘 읽고 싶은데, 불을 제대로 질러 주십니다 ㅎㅎㅎㅎ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페넬로페 2021-05-08 19:4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이 책 읽고 인간의 육체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감정의 혼란 - 지성 세계를 향한 열망, 제어되지 않는 사랑의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서정일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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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보면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작가가 있다. 내가 읽은 책을 기준으로 볼 때, 그 중의 한 명은 슈테판 츠바이크. 작가들이 즐겨 인용하는 작가라면 그 명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오랫동안 그 이름만 듣고 슈테판 츠바이크를 흠모해 왔지만, 정작 그의 책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늦어도 너무 늦은 셈이다.

 

이 책을 3분의 2 정도 읽었을 때, 책의 내용과 제목이 정말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 시대 작가들이 거의 그렇듯이 슈테판 츠바이크도 많은 비유와 고전의 인용으로 이루어진 격정적인 문장으로 인물의 감정과 내면을 서술한다. 그러나 롤란트(이 책에서 유일하게 나오는 이름이다), 교수, 교수의 부인과의 얽힌 관계가 시작되자 혼란스러운 감정뿐만 아니라 인간의 육체적 욕망에 대한 것도 생각하게 했다. 육체의 욕망이란 감정의 산물인지, 아님 욕망으로 인해 복잡한 감정이 생기는지 결정하기 어렵지만 서로 깊은 관계가 있음에 틀림없다.

 

감정의 혼란60살이 된 주인공 롤란트의 회고로 시작된다. 베를린에서의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작은 도시에 있는 대학으로 공부하러 간 롤란트는, 영어영문학 첫 수업에서 자신의 인생에 거의 전부일 정도로 영향을 끼치는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선생님의 부인과의 만남을 계기로, 선생님은 그에게 강렬한 지성의 세계를 열어주었다면 그 아내는 건강한 신체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반면 미묘한 관계에 있는 선생과 그 부인은 롤란트를 육체의 대상으로 보며, 서로에게서 롤란트가 벗어나기를 원한다.

 

사상이나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적 욕망의 발산 역시 시대의 영향을 받는다. 자신의 성의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며 방황하는 교수의 삶은 지극히 불행하다. 그 아내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결정되는 운명은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한 번씩 소설을 읽으며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부분에 감동하기도 한다. 롤란트가 작은 도시에 있는 대학의 영어영문학 첫수업에서 들은 강의는 셰익스피어에 관한 것이다. 작년에 집중적으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으며, 그의 작품이 훌륭한 것은 알지만 온전히 빠질 수는 없었다. 아마 셰익스피어의 언어가 바로 나에게 전달되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의 작품이 인간의 원형을 적나라하게 말해준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의 감흥은 없었다. 그런데 감정의 혼란을 읽으며 롤란트가 첫수업에서 들은 강의의 감동을 나도 고스란히 받았다. 사람들이 셰익스피어에 열광하는 이유를 잘 알게 되었다. 책을 읽으며 예상치 못한 곳에서 얻는 기쁨이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교수가 롤란트에게 한 키스를 생각해본다.. 그리고 나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감정의 혼란은 그의 격정적인 문체와 함께 나를 소설 속으로 끌어당기며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아마 끝까지 한마디로 정리되지는 않겠지만,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고 이해하고자 읽는 소설의 목적은 달성된 것 같다. 다음엔 평전으로 유명한 그의 문장을 읽어야겠다

 

그때까지 나는 그 사람 이외에 그토록 감격에 빠져 진실하게 마음을 끌며 강의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나는 라틴어로 ‘랍투스(순간적으로 밀려오는 황홀한 심리적 상황을 의미하는 단어)라고 부르는 것, 즉 한 인간이 자신의 경계를 초월해 이끌려가는 상태를 체험했던 것입니다. - P38

셰익스피어는 한 시대의 가장 강력한 표현인 동시에 모든 세대의 정신적 진술이자, 열정적으로 변모한 시대의 감각적인 표현이었음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잉글핸드의 그 위대했던 시간을 단 한 번뿐이었던 황홀의 순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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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4-05 00:0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책 마지막 부분에 츠바이크 유서도 들어 있나요??그렇다면 더더욱 결말이 슬퍼지네요 ㅜ.ㅜ 츠바이크는 평전! 평전을 꼭 읽으셔야 합니다. ^.^

coolcat329 2021-04-05 09:03   좋아요 4 | URL
정말 정말 동감입니다!

페넬로페 2021-04-05 10:50   좋아요 3 | URL
네.유서가 있더라구요~~
집의 책장 보니까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이 세 권이나 있네요^^그의 평전을 빨리 읽어야겠어요**

미미 2021-04-05 00:0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페넬로페님~♡ 읽으셨군요!!
저 자려고 누워서 북플 들어왔다가 이 리뷰읽고 또 소름요! 셰익스피어에 관련된 표현들 저도 다 밑줄쳤어요ㅋㅋ
리뷰 볼때마다 계속 감동이 살아납니당ㅋㅋ!

페넬로페 2021-04-05 10:53   좋아요 2 | URL
미미님 덕분에 이 책 읽게 되었어요. 생각은 많은데 글로 쓰기가 너무 어렵네요 ㅠㅠ
결국은 셰익스피어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읽은 셈인데 참 좋았어요^^

새파랑 2021-04-05 00:0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처음부터 끝까지 나에게 감정의 혼란을 준 책인데 ㅋ 전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 이번주에 목표로 준비중입니다 ㅎㅎ 페네로페님의 리뷰 마지막 부분의 소설을 읽는 목적에 완전 공감합니다^^

페넬로페 2021-04-05 10:56   좋아요 3 | URL
저 역시 마찬가지예요.
제목처럼 감정의 혼란을 느꼈는데 결말은 예상한대로 흐르더라고요^^

바람돌이 2021-04-05 01:0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자려고 누워서 잠시 마지막으로 댓글보다가 이 글을 보네요. 세익스피어 강의 저도 참 강렬하던데 문제는 제가 새익스피어에 도저히 공감이 안간다는... 원어로 읽으면 다르겠지만 그건 저의 능력밖이니.... ㅠㅠ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는 소설읽기에 저도 공감합니다.

페넬로페 2021-04-05 10:59   좋아요 3 | URL
정말 그렇죠! 저도 셰익스피어를 어렵게 읽었어요. 영어 전공한 분 도 그의 작품에 고어가 많아 읽기 쉽지 않다고 하더라구요~~그냥 스토리와 느낌을 따라갈수밖에요^^

coolcat329 2021-04-05 09:02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요즘 이 책 많이들 읽으시네요~^^

페넬로페 2021-04-05 11:01   좋아요 4 | URL
슈테판 츠바이크의 작품을 읽어야지 하면서도 다른 책에 계속 밀렸는데 미미님 리뷰보고 그냥 시작했어요 ㅎㅎ~~그의 다른 책도 읽어보려 해요^^
 
시간
홋타 요시에 지음, 박현덕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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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타 요시에시간은 일본인 작가가 난징 대학살을 소재로 1955년에 출간한 소설이다. 그 정도로만 알고 이 소설을 읽기 시작했는데 글의 첫부분에 등장한 화자가 중국인이어서 의아했다. 난 당연히 이 소설의 주인공이 일본인일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다시 책표지로 넘어가 작가를 확인했다. 역시나 작가는 일본인이었다. 전쟁이 끝난지 얼마되지도 않은 시기에 피해자의 입장에서 일본인 작가가 글을 썼다는 것에 많은 용기가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를 생각했다. 이 책의 끝부분에 실린 헨미 요의 해설에서 극동국제군사재판이 열리던 1940년대 후반의 시대 상황이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문학을 집필할 수 있었던 시기라고 한다. 오히려 1990년대에 들어서 일본은 난징 대학살은 없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국내외 반일 세력의 음모라고까지 주장하는 세력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는 설명을 듣고 어느정도 납득이 되었다. 시대의 상황이 자유로웠다고 해서 작가의 의도를 폄하할 생각은 없다. 작가의 국적을 떠나 피해자의 입장에서 서술한 이 소설은 뛰어나다.

 

시간(時間)19371130일에서 1938103일까지, 중국 지식인인 천앙디의 일기 형식으로 서술된 소설이다. 일본군이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으로 점점 전진해올 때 정부와 유력 인사들은 한커우로 떠나고 나, 천앙디는 비밀리에 난징의 동향을 알려야하는 임무를 맡고 난징에 남는다. 임신 9개월의 만삭인 아내, 5살된 아들 잉우, 일본군을 피해 난징으로 들어온 사촌 여동생 양양과 함께 였다. 1937,1213, 마침내 일본군이 난징으로 입성하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살인, 방화, 강간, 약탈이 시작된다.

 

일기 형식으로 서술된 이 소설은 관념적이고 철학적이다. 사실적이고 연속적인 사건과 더불어 사람의 심리와 배경, 생각을 잘 묘사했다. ‘일기라는 연대기적인 형식에 바탕을 두면서도 시간의 흐름보다 순간적인 느낌과 감상에 더 몰입하게 만든다. 그런 까닭에 이 소설은 빨리 읽히지 않았다. 한 페이지마다 멈춰 화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 상황과 마음을 함께 느껴야했다.

 

일본군이 입성하기 전의 상황을 나타낸 이 소설의 초반부에서 일기는 6개월을 훌쩍 넘어 다시 서술된다. 가족들의 생사를 모른 채 천앙디는 기리노라는 일본군 중위의 집사로-노예로-일하며, 집의 지하실에 설치된 무전기로 비밀 요원의 임무를 수행한다. 이 시점에서 지난 6개월을 회상하며, 동시에 시간은 앞으로 나아간다. 예상했던대로 아내와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고, 사촌 동생 양양은 매독에 걸렸으며 아편중독자가 되었고, 그 사이에 임신을 했으며, 아이를 지웠다는 사실도 안다. 6개월 동안에 그런 엄청난 일들이 일어난다. 일본의 폭력은 직접적으로 사람을 능욕하며, 그것도 모자라 아편이나 헤로인까지 유통시켜 피폐하게 만든다.

 

양양은 뼈만 남은 손가락으로 종이를 접어 코를 풀었다. 얇은 종이에는 피가 묻어 나왔다....

정말로 고독하고 완전히 말라비틀어진 병든 나무, 그렇게 보였다. 불쌍하다고도 말하지 못했다. 눈은 가뭄에 드러난 호수 바닥처럼 말라 있었다.-p223

 

어수선한 시국엔 꼭 부정적인 예언자가 나타난다. 그들은 우리가 나약하고 허둥지둥 우왕좌왕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고 말한다.

 

이 논리를 따르자면 일본군의 폭력을 야기한 것은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 되고 만다.

이런 숙명론자가 민중 속에서 끊이지 않고 생겨나는 이상, 전쟁은 사라지지 않으며 그 어떤 평화도 결코 평화가 아니다.-p109

 

부정적인 예언자는 이 시대에도 존재해 일본군 위안부를 만든 것은 우리들의 잘못이라고 말한다.

 

자살시도까지 한 양양은 결국 자신이 처음 강간당한 진링 대학의 병원으로 가 치료받기로 한다. 괜찮아지기 위해 도망가지 않고 그 현장으로 돌아가 뿌리를 움직이겠다고 한다. 작가는 전쟁에서 가장 고통받는 여자, 양양을 통해 치유와 희망을 얘기한다. 현장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이 투쟁의 첫걸음인 것이다. 하지만 그 시대의 중국은 일본이 떠난 그 다음도 녹록지 않다. 정부냐 공산당이냐의 선택이 그들에게 남아있다.

 

홋타 요시에의 시간은 길지 않은 소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거의 모든 페이지의 문장에 밑줄을 그었으며, 작가가 묘사한 순간의 배경과 에피소드에 감탄했다. 여러 가지 생각들의 확장(가령 중국인들은? 무수한 그들의 역사는 죽음으로 점철되었고, 또 그들은 우리에게 어떠했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태평 천국의 난을 운운한 그 일본인 중위와 내가 뭐가 다를까?)을 애써 막으며 그냥 소설로서 이 책을 읽었다. 중일 전쟁중의 난징에만 집중해 그곳에서의 사람들의 죽음과 치유, 희망을 생각했다. 우리는 누구나 내가 겪는 시간의 한복판에 있다. 그 시간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인간이 인간다워야 그 시간은 존재한다.

 

수백 명의 사람이 죽었다.-하지만 얼마나 무의미한 말인가. 숫자는 관념을 지워버리는 건지도 모른다. 이 사실을 색안경을 끼고 봐서는 안 된다. 그리고 사람이 이만큼이나 죽어야만 하는 수단을 사용해야 하는 목적이 불가피하게 존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죽은 사람은, 그리고 앞으로 계속해서 죽을 사람은, 수만 명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죽는 것이다.-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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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3-30 17: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홋타 요시 작가가 학살에 대현장에 목소리를 담은 책이네요 난징 그리고 미얀마,, 끊임없이 반복되는 끔찍한 죽음 앞에 침묵하고 있는 대다수의 우리들 [ 우리는 누구나 내가 겪는 시간의 한복판에 있다. 그 시간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인간이 인간다워야 그 시간은 존재한다.]페넬로페님에 이 구절에 깊이 공감합니다. 코로나로 전세계가 이동의 제한이 되는 시기에 어디서 누가 누구에게 무고한 죽음을 맞게 되는지,,, 페넬로페님 리뷰 읽으며 죽음-치유- 희망,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하게 되네요 ,

페넬로페 2021-03-30 20:35   좋아요 3 | URL
이 책 읽으며 난징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전쟁과 죽음을 생각했어요. 어디 난징만 그렇게 아수라장이었을까요?
지금 현재도 여전히 학살이 자행되니 세상은 그다지도 변하지 않는건지 허탈해져요^^

미미 2021-03-30 18:0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꼭 읽어볼래요♡ 제가 모르는 부분이 참 많다는 걸 또 느낍니다. 빨리 읽기
힘든 책들이 많이 있더라구요.
표지도 인상적이예요! 머리 맞죠?😳

페넬로페 2021-03-30 20:37   좋아요 3 | URL
문장이 일기형식이라 굉장히 관념적이예요.그것을 하나하나 생각해야하기에 읽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것 같아요. 표지의 그림이 굉장히 여러 모양으로 보이는데 머리 맞는것 같아요^^

새파랑 2021-03-30 19: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모든 페이지에 밑줄이라니~리뷰 보니 읽어 보고 싶어집니다~!

페넬로페 2021-03-30 20:38   좋아요 3 | URL
저는 좋게 읽었는데 새파랑님도 이 책에 대해 좋은 감동 받으시면 좋겠어요^^

감은빛 2021-03-30 23: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일본인이 중국인 화자의 입장에서 쓴 소설이라니!
정말 독특학 작품이네요.
덕분에 또 새로운 작가와 책을 알아가네요. 고맙습니다!

페넬로페 2021-03-31 00:34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이 부분이 흥미로웠어요~~
생각해보니 감은빛님께서 한번씩 올려주시는 일기같은 글과 홋타 요시에의 문장이 무척이나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레삭매냐 2021-03-31 15: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의 뒷부분 갈수록 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었는데... 역시나
였습니다.

홋타 요시에 작가의 책들이 좀 더 많이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페넬로페 2021-03-31 17:54   좋아요 1 | URL
네, 이 책 읽으며 너무 많은 생각을 했어요^^
저 역시 이 작가의 다른책을 읽고 싶어서 도서관에 가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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