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율리시스 2 ㅣ 동서문화사 세계문학전집 38
제임스 조이스 지음, 김성숙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6년 9월
평점 :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는 10년 동안 트로이전쟁에 참가한 오뒷세우스가 전쟁이 끝나고 다시 10년에 걸쳐 고향 이타카로 힘들게 귀향하는 여정을 다룬 서사시이다. 세계문학전집이나 서울대가 선정한 100대 고전의 앞부분을 차지하고, 많은 다른 문학작품에서도 언급되어 누구나 언젠가는 꼭 읽겠다는 결심을 하게하는 책이 ‘오뒷세이아’이다. 얼마나 대단하기에, ‘귀향의 아이콘’이 된 지혜로운 오뒷세우스가 그 어떤 고난에도 굴복하지 않고 온갖 모험을 펼치며 고향으로 돌아가는지 나 역시 궁금했고 기대했었다.
하지만 ‘오뒷세이아’에는 그런 나의 기대와는 다른 황당하고도 기괴한 이야기가 많았다. 오뒷세우스의 귀향은 위대한 인간의 의지보다는 여러 신들의 이해가 얽힌 결정이었다.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 거인들, 머리가 여섯, 다리가 열둘인 바다 괴물인 스킬라,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뱃사람을 잡아먹는 세이렌, 키클롭스, 오뒷세우스의 부하를 돼지로 변하게 하는 키르케, 오뒷세우스의 아내인 페넬로페에게 구혼하기 위해 모여 있는 술 마시고 노닥거리는 남자들 등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들어 있었다. 마치 김구 선생이 젊었을 때 욱하는 성질에 일본인을 죽이고 감옥에 갇혔다가 탈옥했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읽은 기분이었다. 서양문학의 출발점으로 간주하는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라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적잖이 당황했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역시 마찬가지였다.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의 구성을 가져와 하루 동안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라는 딱 한 가지만 이 소설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한 읽기 어려운 소설이지만 너무나 유명해 역시나 언젠가는 넘어야 할 산으로 생각했었다. 제임스 조이스는 ‘오뒷세이아’의 어떤 부분을 가져와, 어떻게 변형하고 발전시키며 소설을 썼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드디어 이 소설을 읽는다는 들뜨고 기쁜 마음은 잠시, 소설을 읽어나가며 당혹감을 느꼈다. 모더니즘 문학이라는 간판을 내 건 이 소설은 다양한 문체실험을 통한 도무지 알아들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문장이 가득했다. 현실과 환상이 공존한 내용과 조이스가 만들어 낸 언어유희와 패러디가 잘 정리되지 않았다. 아일랜드 밖에서 그곳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하지만 동시에 아일랜드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도 여전히 존재했다.
1904년 6월16일(이 날은 조이스가 그의 아내 노라와 첫 데이트를 한 날이다), 하루를 담고 있는 ‘율리시스’는 1914년 말 또는 1915년에 집필을 시작해 1922년 2월2일에 출간된다. 거의 8년 동안 조이스는 이 글을 연재했고, 미국 ‘리틀 리뷰’지에 연재한 4개의 호는 선정성의 이유로 소각되기도 한다. 스티븐 디댈러스, 레오폴드 블룸, 마리온 블룸 등 세 명의 중요인물이 축을 이루지만, 이 소설에는 수많은 인물이 실제로 또는 그 이름만으로 등장한다. ‘율리시스’와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는 그 구성과 인물의 성격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소설에 오뒷세이아라는 서사시의 골격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조이스의 문장들은 균형을 잃고 중구난방으로 흩어졌을 것이다.
세 주인공인 블룸, 스티븐, 마리온은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분신 같다. 특이하고 뛰어난 스티븐이 아일랜드의 평범한 시민인 블룸을 정신적인 아버지로 두고자 하는 것이 조이스가 원하는 아일랜드일 수 있다. 이 소설의 전반에 흐르는 외설적인 내용의 맨 앞에 서 있는 마리온은 작가 자신의 욕망과 자유로운 영혼의 표상이다. 다만 조이스가 표현한 여성의 생각과 행동은 상당히 왜곡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당시 쉽게 드나들었던 사창가나 창녀들에 대한 서술도 남성적인 시각에서만 표현되어 아쉬움을 준다. 그렇지만 이 소설을 도덕적인 잣대로만 평가한다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못마땅한 점이 있더라도 소설은 소설로써 우선 판단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조이스의 작품의 배후에 있는 호머의 작품은 나름대로 전자에 공헌하는 바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독자들이 조이스의 작품을 읽을 때, 강박관념을 가지고 호머의 작품과의 상응관계에 집착함으로써 견강부회적인 의미를 끌어내거나 호머의 작품이 조이스의 작품을 해석하는데 필수 불가결의 도구라고 생각할 때 발생한다. 작가가 그의 설계에 따라 책 속에 의미를 숨겨두었고 독자의 할 일은 오로지 그것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독자의 역할을 축소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또한 이러한 선입견으로 조이스의 작품을 대할 때 독자는 끝내야 할 숙제, 정확한 답을 찾아내야 할 과제가 많은 학생처럼 중압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조이스는 작품을 쓰면서 호머의 작품을 받침대로 사용했지만, 완성된 작품은 받침대에 의지하지 않고도 그 나름대로의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p.70~71,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민태운, 전남대학교 출판부]
조이스가 만든 어렵고도 복잡한 설계도를 해석하며 따라가기는 쉽지 않다. 6월 16일 하루 동안 블룸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물론 개연성을 찾을 수는 있지만, 이 소설은 ‘핍진성’이 훨씬 더 두드러진다. 수많은 문체의 변화 속에 들어있는 다양한 에피소드야말로 작품을 풍성하게 하며 재미있고 유머러스하게 만든다. 리듬감과 경쾌함도 느낄 수 있어 어렵지만 그래도 잘 읽어낼 수 있는 소설이 되는 것이다. 율리시스에 들어있는 수많은 것들로 다양한 변주와 해석이 가능해 다른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율리시스를 읽기 시작했을 때, 내가 이때껏 읽어온 것들로 이 책을 읽을 준비를 많이 했다고 생각하며 내심 나 자신이 뿌듯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내가 읽은 것들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오뒷세이아, 그리스 로마 신화, 신곡, 파우스트, 베르길리우스 등을 읽었지만 조이스의 현란하고도 깊은 문장들 속에서 내가 읽은 것들은 확실함을 주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런 책을 읽어왔기에 조이스가 나타낸 문장의 출처는 알 수 있었다. 율리시스도 그럴 것이다. 읽어도 여전히 잘 모르지만, 어디선가 율리시스에 대한 것이 나오면 내가 읽었으므로 적어도 그것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판단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이 책을 읽으며 여러 해설서를 참조했다. 물론 도움도 많이 받았지만 한편으로 수학 개념서를 읽는 느낌도 들었다. 해설서를 통해 소설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배경과 맥락을 이해해야하지만 결국은 텍스트 안에서 내가 읽어내고 느껴야만 한다. 율리시스는 한 번 읽어서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 책을 읽으며 내 살갗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 책에 대해 많은 얘기들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아마 해설서나 유튜브를 통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일 거다. 다시 재독해야겠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가 20세기 모더니즘의 3대 걸작이자, 읽기 어려운 소설로 꼽히고 있다. 그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했고, 조이스와 프루스트는 만난 적도 있다. 활동 시기가 비슷하기에 조이스의 ‘율리시스’ 중 에우마이오스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민음사판)에는 같은 소재의 글이 있다. 조이스는 중국으로 프루스트는 일본으로 표현했지만 알약이나 종잇조각들이 물에 적셔지면 여러 모양으로 변하는 것을 서술했다.
-'율리시스 연구', 김종건, 고려대학교 출판부 중에서
[소설은 또한, 아일랜드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및 지리적 특성에 대한 수많은 인유들을 함유한다. 조이스는 만일 더블린이 지상에서 사라지는 날, 작품 속의 서술에 따라 그것을 재건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세기의 전환기 아일랜드 문화의 거의 백과사전적 표현 속에, 조이스의 소설은 독자를 그것의 성격을 형성하는 요소들에 순응시킨다.
-p.208, '제임스 조이스 문학 읽기‘, 김종건, 어문학사]
《율리시스》가 모더니즘 또는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로 분류되지만, 사실주의 소설에도 들어갈 만큼 더블린을 자세하게 나타내고 있다. ‘더블린이 지상에서 사라지는 날’에 이 책을 토대로 그대로 재건할 수 있을 거라는 조이스의 자신감은 당연할 정도이다. 뜬금없는 생각이지만 더블린을 이렇게나 자세하게 서술한 조이스라는 작가를 가진 아일랜드가 부러웠다.
동서문화사판 ‘율리시스’는 조이스의 어려운 설계도에서 독자들이 길을 잃지 않게 노력해준 책이다. 번역자의 번역도 친절하고 책의 아래 부분에 있는 주석도 상세하고 읽기에 편하다. 각 장의 시작에 줄거리가 있어 대충의 내용도 알 수 있다. 책의 중간 중간에 더블린의 여러 장소에 대한 사진이 있어 이해하기 좋고, 마지막 거의 100페이지에는 해설이 있어 유익했다. 독자를 위해 잘 만들어진 책이다. 무엇보다 어문학사의 율리시스에 비해 책값이 저렴하다. 그러나 이 책 1권의 100~101페이지에 레오폴드 블룸이 등장하는 날을 ‘1904년, 6월 18일’로, 그를 ‘1966년’ 생으로 잘못 표기하고 있다. 율리시스의 그 유명한 날(상징하는 날)인 ‘블룸스데이’가 1904년, 6월16일이라는 것은 엄청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인데 하필 그 날을 잘못 표기했다. 다음 개정판에서 꼭 고쳐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