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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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앉은 자리에서 책 한 권을 다 읽었다. 읽으면서 여러 감정이 교차했고, 읽고 난 뒤에도 책의 내용에서 받은 복잡한 감정과 여운이 많이 남아 있다. <연수>, <미라와 라라>는 내가 경험한 것과 추구하는 것이 들어있어 생각할 것이 많았고, <라이딩 크루>는 하도 기가 차 소리 내어 웃었으며, <동계올림픽>에선 방송사 인턴인 선진이 너무 짠해 눈물이 나왔다.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는데도 우리는 늘 다른 사람에 비해 뒤쳐져있다고 느낀다. 죽을 만큼 노력하는데도 타고난 머리와 눈부신 외모를 가진 사람을 따라갈 수 없다. 언제나 돈이 부족해서 허덕이며 살지만, 남들은 비싼 호텔 빙수가 만만한 듯 너도나도 먹어봤다는 사진을 올린다. 순간적 기지와 말발로 넌지시 남을 누르며 자신을 부각시키는 얄미운 사람이 승진도, 결혼도 잘한다. 세상은 용납될 수 없는 불평등과 이해할 수 없는 부당함으로 가득 차 있어 한번쯤은 망하기를 바라지만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잘만 돌아간다. 분명 좋은 성격으로 태어났지만, 이런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마음은 꼬이고 질투가 생기고, 상처투성이로 변해간다.

 

장류진 작가의 소설집 연수에 실린 6개의 단편은 적나라한 삶의 현장에서 힘들게, 인내하며 살고 있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 학기만 마치면 졸업을 하게 되는 취준생인 딸아이도 그 현장에 있는 느낌이 들어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많았다. 어떤 장면에선 딸아이가 앞으로 가게 될 세상이 시베리아 벌판 같아 기분이 서늘하기도 했다.

 

이 소설의 표제작인 <연수>는 처음에 사람 이름인줄 알았다. 제목 연수밑에 한자 硏修가 있어 어떤 연수인지 궁금했는데 자동차 운전 연수에 대한 내용이었다. 운전은 머리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몸도 같이 사용해야 하는데, 이것이 또 올림픽 경기처럼 내가 잘해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도로위의 변수에 시시각각 빠르게 대응을 잘 해야만 한다. 운전을 무서워하는 빅 폄의 구년 차 회계사인 주연은 자가 운전의 필요에 의해 외제차를 사고, 운전 연수를 신청한다.

 

주연은 유능한 강사의 실용적인 매뉴얼에 따라 차근차근 운전을 배우지만 여전히 자신감이 없다. 강사는 주연이 운전을 잘한다고 하지만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주연은 강사에게 추가 연수를 신청하지만 강사는 거절한다. 운전은 결국 혼자 하는 것이라고, 연수만 받을 수는 없다고 한다. 운전이든 다른 것이든 연수(硏修)라는 말 아래 놓여 진 것들은 모두 혼자 해내야만 하는 것이다그래서 최소한의 응원과 가르침이 필요하다.

 

 

<공모>에서의 모든 것은 모호하다. 김 부장이 천사장이 운영하는 호프집인 천의 얼굴만 회식 장소로 고집하는 것도, 천사장의 클리비지의 역할도, 현수영이 천사장과 천의 얼굴을 불편해 하는 이유도 딱히 명확하지 않다. 현수영은 마음에 들지 않은 회사를 다니며 어쩌면 모든 것을 삐딱하게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닌 건 아닌 거라고 여기며 나름 정확하고 깔끔하게 정리했다고 생각한 것이 나중에 또 다른 모호함을 가져오며 이것 역시 아닐 수도 있다고 느낄 때가 많다. 무엇이 옳은지, 내가 보는 것이 정확한지, 나의 판단이 모두를 위한 것인지에 대해 항상 흔들린다. <공모>의 마지막 장면인 천사장과 김 상무(예전 김 부장)의 포옹까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다. 수영이 천사장의 딸인 세원에게 갖는 희망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다 어느 날, 호되게 뒤통수를 맞을지도 모른다.

 

 

<라이딩 크루>는 영화 곡성의 유명한 대사인 뭣이 중한디?’가 생각나게 했다. 무엇이 중요한가? 어느 순간 목적과 객관성이 사라지고 맹목적인 것에 홀려 거기에 말려들 때가 있다. 감정에 치우쳐 내가 잃어버릴 것을 미처 보지 못한다. 나중엔 이유조차 생각나지 않고 그냥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라는 회한만이 남는다. 질투와 불신, 꼬임과 자존심이 한꺼번에 표출되어 내가 나를 그르치고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된다. 한밤중, 두 남자가 알몸으로 자전거 경주를 하고 그것을 옆에서 인정하는 또 한 사람의 바보를 보며 정말 많이 웃었다. 웃으면서 혹시 내가 두 남자 중의 한사람은 아니었는지를 생각했다. 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무런 준비도 해주지 않고 무조건 가서 성과를 내라는 명령, 그 결과로 인턴 사원에서 정식사원으로 전환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협박, 자식이 힘들게 번 첫 월급을 봉투째 받아 기분이 좋은 부모, 두 번째 월급에서 핸드폰과 발렌타인 삼십년을 사달라는 부모.<동계올림픽>에서의 어른들은 이렇게 선진의 어깨를 짓누른다. 한파가 닥친 날에도 변변한 패딩하나 없이 청카바 하나만 입고 다니는 선진의 현재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선진은 꿈속에서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상상 한다. 잠깐 좋은 어른들도 만난다. 그들에게 따뜻한 보살핌과 패딩을 얻어 입고 나온 선진은 여전히 추운 바깥에 서 있다. 선진이 만난 잠시 동안의 온정이 지속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녀에게 그나마 힘이 되었을까?

 

 

그 길로 가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 길로 꼭 가야하는 사람이 있다. 능력이 안 되지만, 그것을 해야만 행복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미라와 라라>에서 미라는 소설을 쓰고 싶어 32세의 나이에 국문과에 다시 들어온다.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이과형 인간이 소설을 쓰기란 쉽지 않다. 어쩌면 아예 쓰지 못할 수도 있다. 미라는 이과형 세계에서 이미 성공도 했고 돈도 많이 벌었지만, 그녀는 미라보다는 소설을 창작하는 라라 로 살기를 원한다. <펀펀 페스티벌>는 원하는 세명 그룹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다른 중견기업에 취업했다.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가는 것과 원하는 대로 가지 못해 다른 길로 갈 수밖에 없는 것에 똑같이 좌절과 힘듦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들에게 내 쪼대로가 존재했으면 좋겠다.

 

작가의 말에서 장류진은 글을 쓰는 동안의 자신의 여러 어깨 모습을 얘기했다. 그만큼 이 글들이 고통 속에서 힘들게 나왔다는 말일 거다. 힘들게 나온 만큼 여기에 실린 소설들이 좋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내가 희망을 절망으로 오독했는지는 모르지만 읽고 난 후에도 여운이 많이 남아있다.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인 일의 기쁨과 슬픔은 읽다가 말았다. 그가 쓴 문장이 너무 깍쟁이 같아 정이 들지 않았다. 꺼내 다시 읽어야겠다.

 

[어쩌면 당연했다. 너무도 오래전 일이었다. 한 사람의 입맛이 변할 정도로 오래된 시간, 내 기억이 실제를 왜곡했거나 아니면 과장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뒤이어 그게 아니라 내 모든 기억이 사실이라고 해도....그게 뭐 어때서?라는 생각이 이어졌다. 고작 그 음영 하나에 시시덕거리고 십수년간을 들락날락하며 법인카드 갖다 바친 놈들이 한심한 놈들일 뿐. 애초에 거기까지만 싫어했으면 될 일이었다.

-p.153, ‘공모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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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4-08-29 2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리뷰 제목이 마음에 꼭 듭니다!!! 어차피 인생 마이웨이......이제 곧 팔월도 끝이네요 좋은 밤 되시길요~~

페넬로페 2024-08-29 21:45   좋아요 1 | URL
맞아요.
인생은 마이웨이인거죠~~
날씨가 그나마 쬐금 시원해져서 다행이네요^^

클로드 2024-08-29 2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가 생각나네요.
“인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어. 의학, 법률, 경제, 기술 따위는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해. 하지만 시와 미,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인거야.“

우리 모두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아요.

페넬로페 2024-08-29 23:18   좋아요 0 | URL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온 대사가 정말 뭉클하네요.
시와 미, 낭만, 사랑~~
이 단어들 잊지 않고 살아야겠어요.
그래도 여기 알라딘에서 책 읽고 글 쓰는 우리들은 그나마 삶이라는 걸 느끼며 살고 있다며 위로해 봅니다^^

희선 2024-08-30 0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신이 살고 싶은대로 사는 게 가장 좋기는 하죠 그게 쉽지 않다 해도... 그렇게 사는 사람이 더 멋지게 보일 듯합니다 <미라와 라라>는 한사람인가 봅니다 미라가 라라가 되는... 이과라고 해서 소설을 못 쓰는 건 아닐 텐데, 이과여도 소설 잘 쓰는 사람 있는 듯합니다 자신이 쓰고 싶은 소설을 쓰기를... 이런 무책임한 말을... 저도 못 쓰는데 말이죠


희선

페넬로페 2024-08-30 08:53   좋아요 0 | URL
책 읽고 난 후의 감상을 적으려 해도 그게 쉽지 않은데 소설을 쓰려면 얼마나 힘들지요.
그래서 미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려고 이름 바꾸기를 원했다고 생각해요. 본래 자신이 가진 아아덴티티로는 글이 잘 안 나오니까요.
이과 출신도 소설을 잘 쓰는 사람이 많지만 아무래도 통계적으로는 문과쪽이 많을 듯 해요.
일단 뇌의 구조가 좀 달라요 ㅎㅎ

페크pek0501 2024-08-30 1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장류진 작가의『일의 기쁨과 슬픔』만 읽었는데 괜찮았어요. 작가치고 문학적이지 않다고 느꼈으나 그것대로 좋았어요.^^

페넬로페 2024-08-30 15:12   좋아요 1 | URL
‘일의 기쁨과 슬픔‘ 책이 집에 있는데,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레삭매냐 2024-09-02 1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을 라디오를 통해 알게
되었지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역시나 <라이딩 크루>였답니다.

이런 미ㅊㄴㄷ하고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답니다.

페넬로페 2024-09-02 16:22   좋아요 1 | URL
<라이딩 크루> 읽으면서 웃지 않은 사람 없을 거예요.
마가 끼인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게 바로 여기 인물들의 경우가 아닐까 했어요^^

젤소민아 2024-09-07 0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소설집을 한번에 완독하긴 쉽지 않은데 말이죠. 하나 끝나면 쉬거나 일단 접게 되죠. ㅎㅎ
장류진작가 소설을 제가 읽지를 않았네요~. 이참에 카트에 넣습니다~

페넬로페 2024-09-07 11:01   좋아요 0 | URL
네, 장편소 설에 비해 단편은 더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데,
한국 작가의 단편은 다 좋더라고요.
이 책은 요즘의 현실을 바탕으로 한 글들이 많아 좋았습니다^^
 
셰익스피어 - 런던에서 아테네까지, 셰익스피어의 450년 자취를 찾아 클래식 클라우드 1
황광수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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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년 전에 집필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지금까지도 많이 읽히고, 끊임없이 원작 그대로, 때론 변형되어 무대에서 연극으로 상연되는 것은 그의 작품이 그만큼 위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잔뜩 기대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으면 바로 감동을 느끼기가 힘들고, 왜 그토록 위대한가에 대한 납득이 쉽게 되지는 않는다.

 

그의 글은 약강 오보격에 맞춰 써진 영어로 된 희곡이라 한국어로 그대로 번역되기 힘들다. 어떤 번역자는 영어 문장의 운율에 한글을 그대로 들이밀어(물론 번역자의 노고에 감사한다.) 문장이 억지스러울 때가 많다.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운문을 거의 산문처럼 의역한 경우도 있다. 그런 이유로 논리적이지 않은 앞 뒤 맥락이나 급작스런 장면 전환을 연결시키는 것에 애를 먹는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뿐만 아니라 어떤 문학 작품을 읽어도 선행되어야 할 것은 작품의 배경에 대한 이해이다. 소설은 작품 안에 배경이 잘 설명되어진 것이 많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연극으로 상연되는 것을 목적으로 쓴 희곡이라 독자가 직접 찾아야 한다. 르네상스 정신을 바탕으로 한 글을 썼지만, 작품마다 검열을 받아야 했고 지체 높은 사람들의 눈치도 봐야했던 셰익스피어의 글에 자신의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만큼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을 땐 행간을 읽는 노력을 해야 한다. 지금 읽어도 현실적으로 공감될 수 있는 동시대성이 그의 작품을 가치 있게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산 시대의 전근대성을 작가 역시 가지고 있는 한계도 분명 존재한다.

 

셰익스피어 x 황광수는 셰익스피어 작품의 무대가 되는 스트랫퍼드와 런던, 파리에서 빈에 이르는 중서부 유럽, 이탈리아에서 그리스에 이르는 지중해 지역을 저자가 차례로 직접 여행하며 적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대한 완벽한 설명서이다. 철학과 여행자의 감상이 공존한 훌륭한 여행기이기도 하다. 이 책엔 셰익스피어의 많은 작품이 각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공간(저자의 여행지)에 맞게 잘 설명되어 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책에 인용된 희곡 문장들이 모두 ‘Oxford University Press’에서 발행한 ‘The Oxford Shakespeare’ 시리즈를 통해 저자가 직접 번역했다는 것이다. 저자가 번역한 인용문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고 싶게 하는 마력이 들어 있을 정도로 훌륭하다.

 

저자는 어린 시절부터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읽어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셰익스피어 작품에 대한 저자의 조예가 엄청나다. 오랫동안 음미하고 반복해서 쌓아 온 흔적이 이 책에 가득하다. 프롤로그에서부터, 셰익스피어 문학의 일반적 특징을 알고 싶어 하는 독자들을 위해 쓴 마지막의 셰익스피어 문학의 특징과 현재적 의미까지 어디하나 버릴 것이 없다. 무엇보다 이 책은 이미 읽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재독하고, 아직 읽지 않은 그의 작품을 읽고 싶게 한다. 작가 셰익스피어의 매력을 계속 피력해 나를 완전 셰익스피어의 광팬으로 만들어버렸다.

 

책 속에 책이 들어있는 책을 읽기 힘든 것은 그 속에 내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설명이나 감상이 있어서이다. 읽지 않아 그 해석이 지루할 수도 있고, 혹시 다음에 그 책을 읽을 때, 온전한 나의 느낌이 아닌 설명되어진 것의 프레임에 갇힐 우려 때문이기도 하다. 황광수의 <셰익스피어>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나는 그의 해석을 듣지 않으면 아직 읽지 않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할 능력이 없다.

 

황광수의 해석은 깊이 있고 철학적이며 신랄하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찬양과 비판이 동시에 있어 셰익스피어를 객관적으로 보는 데 도움이 된다.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4대 비극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좋았다. 어릴 때 동화로 읽었던 베니스의 상인에서 권선징악적인 면만 봤지만, 나이 들어 다시 읽고 재해석된 베니스의 상인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지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런 느낌을 이 책의 다른 작품에서도 받았다. 셰익스피어를 떠나 단지 여행자가 되어 느끼는 저자의 감상도 공감되었다.


-헨리 4의 배불뚝이 술고래 폴스타프의 동상-P75

 

저자의 폴스타프에 대한 설명이 재미있다. 셰익스피어는 실제 인물인 로버트 그린을 모델 삼아 영국 문학사에서 가장 빼어난 희극적 인물인 폴스타프(P.73)’를 만들었다. 알라딘 서재의 폴스타프 님덕분에 이 부분이 더 흥미로웠던 것 같다.

 

[그는 추잡한 사기꾼이면서 동시에 날카로운 비판자이다.

폴스타프의 진면목은 비대한 몸과 재기 발랄한 언어에 있다.

폴스타프의 신체적 과잉과 언어적 방종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최근에 다시 읽은 햄릿, 맥베스, 리어왕에 대한 설명도 좋았다. 셰익스피어 시대의 런던 브릿지에는 효수된 머리가 쇠장대 끝에 걸려 있었다. 그 시대엔 태어나는 사람보다 죽는 사람이 많고, 흑사병이나 역병으로도 많은 사람이 죽었다. 민중은 여전히 살기 힘들었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그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단점이 있다.

 

셰익스피어가 집필한 사극의 특징에 대해서 저자는 이렇게 서술한다.

 

[셰익스피어는 먼저 역사가 덧씌운 영웅의 허울을 벗겨버렸다.

셰익스피어는 권선징악의 틀을 해체했다.

셰익스피어는 역사적 인물들의 언어를 현실의 토대 위에서 심문했다.

셰익스피어는 왕족들의 역사를 평민들의 삶과 의식에 투사했다.]

 

셰익스피어는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원칙으로 희극을 집필했다. 개인적으로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많은 갈등과 우여곡절이 극 중간에 있음에도, 또는 선한 것보다 악한 것이 더 많을 때에도 얼렁뚱땅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식으로 끝맺음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법에는 법으로의 법에 대한 고찰, 시와 소네트에 대한 설명, 사랑과 셰익스피어의 남성 우월주의에 대한 옹호에 대한 비판으로 그의 작품을 새롭게 볼 수 있었다. 특히 베니스의 상인에 대한 서술은 우리가 가진 견고한 편견과 법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셰익스피어는 기독교 사회의 편견 속에서 끝없는 모욕과 무시에 시달린 샤일록의 내면에서 영혼의 신음 소리를 들었다.

 

(샤일록과 안토니오의 말에서)두 종류의 언어 층위에 미묘한 차이를 심어놓았다. 하나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은 자의 절규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의 고통을 오락거리로 삼는 자들의 잔인성이다.]

 

저자는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에서 괴테가 해석한 햄릿을 서술한다. 이 부분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소설의 주인공인 빌헬름은 햄릿을 읽고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듯한 느낌에 제정신을 잃었을 정도로 감동받았지만, ’햄릿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각색하는 과정에서 이 작품의 구성상의 느슨함을 지적한다. 그래서 그는 개작에 가까울 만큼 본격적으로 수정한다.(P.163~170)


-햄릿을 연기하는 프랑스의 전설적인 배우 사라 베르나르(P.157)

 

프랑스의 배우 사라 베르나르는 여성 배우임에도 남성 햄릿을 연기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초연된 해로부터 약 430년 후인 20247월에, 한국의 여배우 이봉련햄릿왕자가 아닌 햄릿공주를 연기한다. 당연히 오필리어는 남자가 된다. 해군 장교 출신인 공주 햄릿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지만 그녀에게 복수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햄릿 공주 또한 왕이 되고 싶은 권력욕도 있다. 무대 가운데에 물이 있는 커다란 공간을 두고 수시로 천장에서 비가 내리는 가운데에서 연극 햄릿의 배우들은 자주 물에 들어가고, 비를 맞아가며 셰익스피어의 텍스트를 따라 간다.

 

사라 베르나르이봉련도 연극의 마지막에 레어티즈와 결투를 하며 죽는다. 그녀들이 연기한 햄릿에는 셰익스피어의 햄릿과는 분명 다른 해석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 그들의 햄릿은 셰익스피어와 연결된다. 다양한 해석은 있지만 완벽한 변용은 있을 수 없을 만큼,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대단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셰익스피어가 사용한 언어는 끊임없이 재인용되고 있다. ‘허공으로 사라져 버렸다.’ ‘멋진 신세계’, ‘소리와 분노’, ‘Petious spectacle!’스펙터클등 수없이 많다. ‘광대무변한 텍스트의 세계(p.318)’를 바탕으로 한 연극 또한 계속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황광수 저자는 이것의 원인을 셰익스피어가 빚어내는 대중성과 예술성의 조화’, ‘동시대성’, ‘현대성에 두고 있다. 충분히 납득이 간다.

 


오랜만에 풍부하고도 깊이 있는 책 속의 책을 읽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평론이 자신이 서술한 작가를 부각시키며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듯, 황광수 저자도 마찬가지였다. 셰익스피어 자신과 그의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충분히 공부했고, 저자의 지성에 감탄했다. 몇 년 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읽을 때 이 책을 사두었지만 이제야 읽은 것이 후회된다. 그때 읽었더라면 셰익스피어 읽기가 훨씬 더 재미있었을 것이고, 연속해서 그의 작품을 읽었을 것 같다. 뒤늦게 찾아 본 황광수 저자의 이력에 그가 2021년 암으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렇다. 그의 작품들은 지금도 진귀하고 신기한 것으로끊임없이 되살아나고 있다. 그래서 2014년에 스트랫퍼드 주민들은 그를 ‘450년 젊은 셰익스피어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에 그의 문학의 영원성을 꿰뚫어 본 이는 그 자신도, 스트랫퍼드 주민도 아니었다. 그를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던 벤 존슨이었다. “셰익스피어는 한 시대가 아니라 모든 시대를 위해 존재했다.” 나는 셰익스피어 문학의 불멸성에 관해 이 말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알지 못한다. -p.321]


-작자 미상, <셰익스피어> (1610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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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8-11 07: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으쓱으쓱!

페넬로페 2024-08-11 08:57   좋아요 1 | URL
시간되시면 알라딘의 폴스타프 스토리도 한 번 들려주세요.

독서괭 2024-08-11 1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 찜해둡니다~~ 책으로 읽을 때 그 맛을 잘 모르겠더라고요 오디오북으로 들으니 재미를 느꼈는데 깊이있는 해설을 곁들이면 더 많은 걸 느낄 수 있겠죠! 페넬로페님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4-08-11 15:33   좋아요 1 | URL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천천히 읽어야 하는데 저도 그게 잘 안되더라고요.
네, 해설을 곁들이면 그 의미를 더 잘 알게 되어 확실히 도움이 많이 돼요^^

희선 2024-08-12 0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 읽히는 건 지금 읽어도 오래된 느낌이 들지 않아서겠습니다 그 시대 배경을 알면 셰익스피어 희곡을 잘 이해하기도 하겠네요 희곡 조금 보기는 했는데, 그저 읽기만 한 듯합니다 페넬로페 님은 이 책을 보시고 다시 보신 셰익스피어 희곡이 더 좋으셨나 봅니다 다른 희곡도 곧 만나시겠네요

이 책 2018년에 나왔는데, 저자는 세상을 떠났군요


희선

페넬로페 2024-08-12 14:21   좋아요 1 | URL
셰익스피어의 작품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의 희곡 또한 읽기가 쉽지는 않은 듯 해요.
시간을 들여 읽어야 하는데 현대인들이 다 바쁘다 보니 그 의미를 찾기가 어려운가봐요.

저자의 글이 좋아 이력을 찾아봤더니 그렇게 나오더라고요.

그레이스 2024-08-13 1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르떼 시리즈를 기다리게 된 첫번째 책! 이죠.
다시 봐야해요^^

페넬로페 2024-08-13 17:26   좋아요 0 | URL
이 책이 아르테 시리즈 처음 이더라고요.
제가 읽은 아르테 시리즈 중에서는 제일 좋았어요.
아직 읽지 않은 셰익스피어의 작품도 읽고 싶어졌어요~~

서니데이 2024-08-13 14: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소개를 조금 더 읽으려고 보니, 아르테에서 나온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에는 좋은 책이 많은 것 같은데요. 셰익스피어는 너무 유명해서 연구자도 많고 나온 책도 많겠지만, 시대별 재해석과 새로운 시도도 좋은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페넬로페님 더운 날씨 건강 조심하시고, 시원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페넬로페 2024-08-13 17:30   좋아요 1 | URL
저자가 셰익스피어에 작품에 대한 조예가 깊어 넘 좋게 읽었어요.
작품을 따라 간 곳도 많았어요.
시리즈 중 첫 번째라 그런지 심혈을 많이 기울였더라고요.
날씨가 계속 더워요.
서니데이님께서도 건강 잘 챙기셔요^^

젤소민아 2024-08-20 1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관심 급땡깁니다~~소개 감사해요~~

페넬로페 2024-08-20 13:09   좋아요 1 | URL
제가 좋았던 만큼 젤소민아님께도 감동이 되기를요^^
 
맥베스 열린책들 세계문학 155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권오숙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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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인생살이가 힘든 것은 뭔가 거저 얻어지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기회의 신인 카이로스는 앞쪽 머리카락은 길지만, 뒤쪽 머리카락이 없다. 순식간에 다가오는 기회를 잡기도 힘들고, 그것을 알아채는 순간 이미 카이로스는 저만치 가버려 우리에겐 뒤쪽의 민머리만 남아있을 뿐이다. 설사 기회를 잡았다고 해도 그것을 활용하기가 쉽지 않다.

 

수없이 많은 고전과 막장 드라마가 보여주는 것은 인간에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들이 행하는 똑같은 행동이다. 탐욕스러워지고 광폭해진 그들은 자기에게 방해되는 것을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제거하며 목적을 위해 그냥 앞으로만 나아간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한다는 믿음으로 악행을 저지른다. 목적, 특히 자본과 권력은 끝이 없기에 사실 목적의 끝은 존재하지 않는다. TV에서 보여 지는 정치인들의 인상이 갈수록 안 좋아지는 것은 끝이 없는 목적을 향해 계속 가야하는 운명 때문일 것이다.

 

 

작가 셰익스피어는 그 당시 위계질서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맥베스에서 제임스 1세의 체제 옹호를 한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마녀가 뱅쿠오에게 그의 후손이 왕이 된다고 예언했지만, 극 중에서는 던컨(스코틀랜드의 왕)의 아들인 맬컴이 왕이 되는 모순도 있다. 결국 뱅쿠오의 후손은 제임스 1세를 가리킨다. ‘제임스 1세가 극 중 인물인 뱅쿠오를 전설적 조상으로 삼는 스코틀랜드 스튜어트가() 출신이기 때문이다.(p.148, 역자 해설)’

 

그럼에도 맥베스는 끊임없이 회자되고 활용된다. ‘목적에 눈이 먼 전형적 인간의 모습을 맥베스가 보여주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통한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을 마녀의 예언 한마디로 맥베스는 바로 실행하려고 한다. 어리석고 생뚱맞기조차 하다. 그때부터 맥베스의 생각은 작동을 멈추고 주위와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 그렇지만 맥베스가 그냥 그대로 자신의 목적을 향해 갔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든 크게 불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잘못 든 길이었다.

 

하지만 맥베스는 계속 남이 아닌 자기 자신과 싸운다. 지옥은 죽고 나서 우리가 가야할 곳이 아닐 수도 있다. 살아생전에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이 바로 지옥이다. 끝없는 상상과 환영, 트라우마, 의심과 불신, 자기모순에 빠진 인간은 괴롭고 자폭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맥베스의 양심이라고 말해질수도 있지만, 그것보다 인간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라는 것이 어쩌면 더 맞을 것이다.

 

[이 불가사의한 것들의 유혹은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야.

만약 나쁜 것이라면, 내게 진실을 먼저 말함으로써

성공의 확신을 왜 주었겠는가?

그들의 말대로 난 코더 영주가 되었다.

또 만약 좋은 것이라면, 왜 그것을 생각하면

무서운 생각이 떠올라 머리카락이 뒤엉키고

평온하던 가슴이 자연의 순리에 맞지 않게

갈빗대까지 방망이질한단 말인가?

무서운 상상에 비하면 눈앞의 공포는 아무것도 아닌 법.

시역(弑逆)은 아직 상상에 불과한데도

그 생각이 나의 미약함을 흔들어 대고

모든 기능이 추측 속에 질식해 헛것만 보이는구나.

-p.23~24]



황정민의 <맥베스>는 대사와 전개를 거의 원작을 기본으로 했지만, 맥베스가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관객이 지루할 수 있기 때문인지, 나머지 것들엔 현대적인 장치를 한 연극이었다. 맥베스가 칼과 동시에 총을 사용했고, 왕과 영상통화를 했으며, 장면의 변화에 신디사이저 음악도 나왔다. 다른 관객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나에게 그런 장치가 나쁘지 않고 신선했다.

 

2층 가운데 끝줄에 앉아 관람한 탓인지 배우들의 얼굴은 전혀 알아볼 수 없었고, 그들의 움직임과 대사만 들을 수 있었다. 배우의 표정을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좋은 것은 오롯이 배우의 목소리와 대사에 집중할 수 있는 점이었다. 역시 황정민 이었다. 연기력은 물론이고 다른 배우에 비해 딕션이 월등히 좋았다. 대사 하나하나에 다른 감정과 강약이 있어 맥베스의 심리적 변화와 인간적인 모습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레이디 맥베스의 김소진 배우도 좋았다. 맥베스와의 어우러짐이 자연스러웠다. 맥베스5막의 첫 부분에 레이디 맥베스가 몽유병에 걸려 돌아다니며 정신이 온전치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극의 중간에 레이디 맥베스의 심리적 변화는 나타나 있지 않고 갑자기 5막에서 그런 모습이 보인다. 고전 비극의 그런 부분이 항상 아쉽다.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여성 등장인물을 갑작스럽게 죽음으로 끝을 맺어버린다.

 

악의 동조자역할을 맡은 레이디 맥베스 역시 인간의 양심과 도덕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타인(비록 남편일지라도)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마음은 당사자보다 더 집요하고 거리낌이 없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그런 욕망의 분출을 보아왔고, 그 결과가 비극적임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맥베스의 내용 전체에는 역설이 가득 차 있다.

아름다운 것은 추한 것, 추한 것은 아름다운 것.”,

왕이 되지는 못하나 후손이 왕이 되리니.”,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야.”,

속임수는 쓰고 싶지 않아 하면서 속여서라도 얻고 싶어 하십니다.”,

안 하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여자가 낳은 자 맥베스를 해하지 못하나니.”

 

역설의 어려움은 그것이 애매모호하고, 지극히 반대적인 것 같으면서도 종이 한 장처럼 미세한 차이만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무수히 이러한 선택적 상황에 놓여 있고 그것이 각자의 삶과 운명을 결정한다.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이자 딜레마이다.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고전이 위대한 것은 이러한 것을 계속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 경각심을 준다는데 있다. 맥베스와 정반대의 삶을 산 고 김민기가 보여준 인생의 모습 또한 그러하다.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는 삶, 그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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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7-25 02: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을 보시고 연극도 보셨나 봅니다 연극이 시대가 지금과 같은 것 같기도 하네요 맥베스가 지금 사람이라면 하는 걸로 연출했나 봅니다 그렇게 하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고전은 지금 봐도 괜찮은 거니...

사람은 자기 중심을 잡아야 할 텐데, 다른 사람이 한 말에 쉽게 흔들리기도 하는군요


희선

페넬로페 2024-07-25 09:59   좋아요 2 | URL
이번에 연극을 보러 가기 전에 재독을 했어요. 맥베스의 시대는 그대로인데 그냥 현대적 장치를 했더라고요. 내용도 그대로이고요.
정말요.
자기 중심을 잡아야하는데
시대가 사람을 그렇게 두지 않잖아요!
그때도, 지금도 그런 것 같아요^^
 
나목 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 1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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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박완서의 노란집이 있는 구리 아치울 마을에 간 건 201410월이었다. 딸아이가 중학생 이었을 때, 다니는 학교에서 주관한 학부모 독서 모임에서 만난 우리는 그 해 봄부터 계속해서 박완서 작가의 소설과 에세이를 읽고 있었고, 선생이 사신 곳에서 박완서 읽기마무리를 하고자 간 것이었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지만 온통 단풍과 낙엽으로 둘러싸여 가을 그 자체였던 그곳은 조용한 마을이었다. 이미 선생은 계시지 않았지만, 우리는 노란집주위를 몇 바퀴 돌고 낙엽이 깔린 벤치에 앉아 박완서 집중 읽기의 소감을 나누었다.

 

박완서의 작품 중 몇 권을 필독서로 선정해 열심히 책은 읽었지만, 정작 한 달에 한 번 돌아오는 독서 모임 때는 책에 대한 감상을 깊이 나누지는 못했다. 그때 우리 모두에게는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이 있었고, 그들의 갑작스런 이유 없는 반항에 뒤통수를 맞은 상태에서 내 존재마저도 부정당한 것 같은 슬픔과 암담함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아이가 생소해 보이기까지 한 시기였다.

 

독서 모임 날, 시작은 선생의 소설을 읽고 난 느낌을 가볍게 주고받는 것이었지만 곧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비관하는 물꼬를 트고, 우리는 거기에 공감하며 같이 눈물을 흘렸다. 우리에게 그 달의 필독서가 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독서 모임은 독서보다도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위로하고, 그 순간만큼은 내가 존재하고 있다고 인식할 수 있는 공간의 역할을 더 많이 해주었다.

 

불쑥 찾아와 나를 혼란에 빠뜨린 것이 사춘기 아이만은 아닐 것이다. 20대부터 계속해서 박완서의 소설을 거의 읽어 왔지만 내 인생을 침범하는 종류도 다양한 많은 것들과 싸우느라 선생의 소설에 온전히 빠져들 여유가 없었다. 그의 문장에서 매번 느껴지는 차가운 도도함도 싫었다. 세상에서 조금 비껴난 곳에서 안쪽을 바라보며 가차 없이 날리는 그의 펀치가 조금 불편했다. 내가 바깥에서 선생과 함께 안을 바라보든, 아니면 안쪽의 중심에 나를 놓아두든 상관없이 작가의 글을 읽는 순간 몸으로 바로 체득되는 서늘한 날카로움에 어떤 반발심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한 사람이 써낸 글을 바로 또는 그대로 받아들일 만큼 단순한 것이 될 수 없다. 작가의 문장과 함께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기운과 온갖 말들, 생각들이 합쳐져 내 속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똑같은 책이라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 다를 것이다. 이번에 다시 읽은 박완서의 나목은 한 번도 박완서의 소설을 읽지 않은 것처럼 나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나목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같이 읽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도 마찬가지였다. 시대가 주는 무거움과 거기에서 우왕좌왕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삶이 아닌,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위해 분투(奮鬪)하는 한 여자가 보였다. 노오란 은행잎으로 뒤덮인 융단 같은 낙엽더미에 누운 채로 발버둥 치며 살아있고, 살아내고 있으며, 살고 싶다고 외치는 이경(李炅)이 있었다.

 

이경에게도 불쑥 혼란스러운 것들이 찾아온다. 전쟁, 오빠들의 죽음, 뿌연 회색 속에 웅크리고 있는 엄마, 상상도 하지 못했을 미군 PX에서의 근무.한쪽이 보기 싫게 일그러져 나간음산한 집에서 엄마와 같이 견디며 정을 나누고 살고 싶지만 그마저도 녹록지 않다. ‘내부에서 무엇인가 자꾸 균형을 잃으려 하는 것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심술궂게도, 꾀바르게도 살지만 그의 마음속에 있는 슬픔을 지울 수는 없다. 자기 때문에 오빠들이 죽었다는 죄책감과 죽은 영혼만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는 엄마에 대한 애증에 이경은 견디며 버틸 방법을 찾는다.

 

남들과는 다른 우직한 옥희도에게 아버지와 오빠의 부재에서 오는 결핍을 보상받는다. 이경 역시 옥희도의 결핍을 상쇄시켜준다. 미치지 않기 위해 그들은 서로를 붙들고 있다. 딴 여자들과는 좀 달라야 한다고 대놓고 자기 생각을 말하는 평범하고도 뻔뻔한 젊은 황태수는 이경에게 현실을 보여준다. 황태수는 자꾸만 세상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자신을 땅에 단단히 붙들어 매줄 사람이기에 이경은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그와 결혼한다. 사랑이 아닐지는 몰라도 이경이 지켜야 할 어느 한 쪽만은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황태수는 준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 지나온 사람에게 기대하고 기댈 수 있는 것, 그것도 일종의 사랑인지도 모른다.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완전히 허의 세계에 빠져있는이경의 어머니는 그녀가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면 밥상을 차려준다. 시금털털한 멀건 김칫국이나 김치뿐인 밥상이지만 어머니에게는 매번 치러야 하는 의식 같은 행위이다. 이경은 아들들은 몽땅 잡아가시고 계집애만 남겨 놓았다는 어머니의 말에 분노하고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억울함에 부연 회색 속에서 안간힘을 쓰며 밥상을 차려내는 어머니의 마음은 끝내 알지 못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난 이 부분에서 눈물이 나와 조금 울었다. 눈앞에서 자식의 죽음을 목격한 어머니가 꾸역꾸역 밥상을 차려내는 그것이 숭고하기도, 신산스럽기도 했다. 이경이 옥희도의 집에서 자고 온 날 밤 내내 어머니는 이경을 기다렸을 것이다. 표현할 힘이 없을 정도로 허의 세계에 빠져버렸지만, 이경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기에 어머니는 그 날 밤 마지막 정신 줄을 놓아 버렸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목전체에 깔려있는 선명한 색깔의 묘사는 이경의 생각을 드러낸다. 노오란, 뽀오얀, 비췻빛, 부연 회색, ‘순백의 홑청에 붉게 물들인 처참한 핏빛을 따라가며 그의 내면의 변화를 온전히 느꼈다. 고가를 해체하면서도 후원의 은행나무만은 그대로 두어 자신의 존재만은 지키려 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 옥희도 유작전에서 이경에게 한발 속의 고목(枯木)’이 나목(裸木)으로 변하고, 그 앙상함이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온 것은 그녀의 완벽한 살아냄 때문이었다. 과거를 털어내 버리지 않고 그것을 잘 간수 할 수 있는 힘이 이경에게 남아있다는 것이 반가웠다. 비비언 고닉이 끝나지 않은 일에서 다시 읽기나를 저 멀리 다른 세계로 훌쩍 데리고 가주는 이야기의 쾌감도 좋지만, 한편으로 지금 헤쳐 나가고 있는 이 삶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어떤 의미를 끌어내야 할지 알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고 말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년 째 와상환자로 누워있는, 자신의 의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이경과 똑같이 1932년에 태어난 나의 엄마를 생각한다. 이경이 지나온 길에 나의 엄마를 데려 간다. 그 길에 닿는 순간 내 엄마는 활기차게 걸어 다니며 즐겁게 웃고, 당신이 그렇게나 소중하게 여긴 가족들과 행복하게 지낸다. 일제 강점기와 육이오 전쟁 속에서 엄마 역시 힘들었을 것이다. 병약한 남편과 자식 네 명을 온 몸을 다해 보살핀다. 자식들을 출가시키고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치매를 앓으면서도 결혼하지 않은 딸의 아침 출근을 위해 밥을 하고 계란을 부쳐 밥상을 차려줄 수 있는 정신 줄만은 놓지 않는다. 이제는 그것마저도 하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있는 엄마의 부연 눈을 들여다본다. 그 눈으로 모든 것을 말하고 감정을 표현해 내는 엄마에게도 이경과 같은 젊음과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독서 모임엔 5명만 남아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거의 모임을 떠나고 남은 우리는 그것을 잃지 않고자 열심히 책을 읽고 또 다른 아치울 마을에 간다. 우리에게 이젠 사춘기 아이들이 없다. 다 자란 아이들은 각자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삶은 조금 편해졌지만 우리에게는 나목과 같은 앙상함과 황량한 늙음이 기다리고 있다. 이경의 전쟁은 누구에게나 재난을 골고루 나누어주고 끝나리라.”고 한 심술궂은 말이 떠오른다. 전쟁이란 말 대신에 인생을 넣어본다. 우리는 누구나 골고루 슬픔과 기쁨, 앙상함을 얻을 것이다. 매번 광적이고 앙칼진 열망과 모순에 자신을 찢기고살지라도 여태껏 살아낸 것만으로, 그것이 쌓아 올린 융단 같은 노오란 낙엽더미가 어디엔가 있다고 믿는다. 나도, 독서 모임의 사람들도, 내 엄마도 감긴 태엽이 풀어질 즈음이면 언제든지 가서 뒹굴 수 있는 그 희망적이고도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노오란 것들 말이다.


[내가 지난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발 속의 고목(枯木),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김장철 소스리 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의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닯도록 절실하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p.376] 


-2014년, 아치울 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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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4-06-24 08: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2014년이면 십년전...며칠 안 남은 이 달 잘 보내시길요 이제 올해의 후반기가 오네요

페넬로페 2024-06-24 09:27   좋아요 1 | URL
벌써 10년이 훌쩍 지났더라고요.
그래도 그 날의 느낌이 생생해요 ㅎㅎ
6월부터 덥더니만 이제 장마가 시작되려나 봐요.
서곡님!
남은 6월도 잘 지내시기를 바래요^^

다락방 2024-06-24 11: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페넬로페 님 나목 이벤트 참여하시나요? 이 글 백만원 탈 것 같습니다!!

페넬로페 2024-06-24 12:04   좋아요 1 | URL
오!
백만원~~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ㅋㅋ

서니데이 2024-06-29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희집에도 박완서 선생님의 ˝노란집˝ 책이 있어요.
2014년이 벌써 10년 전의 일이 되었네요. 그 책을 산지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 않은데요.^^;
페넬로페님, 즐거운 주말 보내시고, 좋은 밤 되세요.^^

페넬로페 2024-06-30 10:10   좋아요 1 | URL
‘노란집‘을 읽었는데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네요.
세월이 정말 후딱 지나갔어요.
그래도 그동안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고 싶어요^^

젤소민아 2024-07-06 0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당선, 축하드립니다~

페넬로페 2024-07-06 08:2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젤소민아님^^
 
끝나지 않은 일 비비언 고닉 선집 3
비비언 고닉 지음, 김선형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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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비비언 고닉의 끝나지 않은 일은 처음 부분의 작가노트가 거의 완벽할 정도로 모든 것이었다. ‘날 때부터 책을 읽어온 느낌이란 문장이 반가웠고, 주변의 배경보다 책에 더 많이 빠져있던 경험들이 생각났다. 그냥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이라는 단어만으로 고닉과 내가 서로 공감하며 손을 잡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론과 실천의 괴리와 내가 읽어 온 책에서 얻은 교훈이 바로 내 인격이 되지 않는 모순이 고닉에게도 있어 위로도 받았다.

 

그러나 똑같이 작은 아씨들에서 출발했지만, 그 뒤 본문에서 고닉이 언급한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나에게 고닉의 말들은 어려웠고, 읽지 않은 책에 대한 긴 줄거리의 나열은 지루하기도 했다. 설사 내가 그 책들을 읽었다 해도 고닉이 들여다보는 책 속의 삶과 내가 보는 것들이 많이 달랐을 것이다. 주어진 것들과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니 그건 당연한 것이지만, 고닉이 계속해서 다시 읽기를 하며 치열하게 책이 말하려는 것을 찾는 열정만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세월이 흘렀고 인생이라는 것을 살아왔지만, 모든 것이 생략되고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내가 그냥 여기 서 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한 내 정체성이나 성향도 잘 모르겠다. 여전히 바쁘고 , 어수선하게 계속 앞으로 나가야 할 것 같아 언제쯤 고닉처럼 삶을 돌아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나도 80세쯤 되면 그처럼 인생 초년에 중요했던 책을 다시 읽으며 그것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알아낼 수 있을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 모두 출발하거나 거쳐 간 작은 아씨들로부터 나름의,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펼쳐 지금까지 자신의 의미를 첨삭해 오고 있다는 것.고닉이 말한 대문자 L로 적힌 Life, 삶의 압력을 느끼고 체감하며 사는 내가 어느 자리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믿는다. 



책은 다 그렇다. 그 무엇도 책에는 비길 수 없다. 문학작품에는 일관성을 갈구하는 열망과 어설프고 미숙한 것들에 형태를 부여하려는 비상한 시도가 각인되어 있어, 우리는 거기서 평화와 흥분, 안온과 위로를 얻는다. 무엇보다 독서는 머릿속 가득한 혼돈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며 순수하고 온전한 안식을 허한다. 이따금, 책 읽기만이 내게 살아갈 용기를 준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다시 읽기‘를 시작한 건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 후론 내밀한 벗이 된 책들로 계속 돌아가고 또 돌아가곤 했다. 나를 저 멀리 다른 세계로 훌쩍 데리고 가주는 이야기의 쾌감만으로도 마냥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 헤쳐나가고 있는 이 삶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어떤 의미를 끌어내야 할지 알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내 독서의 목적은 한결같이, 오로지 단 하나였다. 나는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힘에 얽혀드는 주인공의 행보를 통해(짜릿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대문자 L로 쓰인 Life, 그 삶의 압력을 느끼려고 책을 읽었다.

단연코 태생적 사실이 아니다, 라는 생각. 관념은 문화에 봉사하며 우리 모두의 삶이 취하는 형태에 핵심적으로 간여한다. 드디어 나는 깨달았다. 일하는 인간이라는 자아 관념을 일차적으로 떠올리지 못하는 무능력, 이제 보니 그것이 바로 여자라는 존재의 핵심적 딜레마였다.

성찰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통찰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음을 똑똑히 깨달았다....위대한 안톤 체호프가 우리 기억에 또렷이 새겨둔 표현을 빌리자면, "타인이 나를 노예로 만들었[을지 모른]다해도, 나 자신을 쥐어짜서 내 안의 노예근성을 한 방울 한 방울 뽑아내야 할 당사자는 바로 나"였다.

어떻게 해야 안에서 밖으로, 내면을 외재화하며 자아을 구축할까, 그것이 문제였다.

나는 내가 뉘앙스를 받아들이고 복잡성을 음미하고 재고를 환영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 비교적 상처 없는 인생을 살아야 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뉘앙스 없는 자유는 절대 자유가 아니다. 우리가 문명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때조차 문명인처럼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뉘앙스다. 뉘앙스를 없애버리면 동물의 삶만 남는다. 바꿔 말해, 전쟁이다.

비비언 고닉을 읽는다는 것은, 문장들로부터 모든 욕망과 뉘앙스를 학습한 작가가 텍스트화된 세계를 읽어내는 비범한 의식 그 자체를 읽는다는 의미다.

기억은 불완전하고, 우리는 한 시절 우리가 서 있던 자리의 한계 안에서만 책과 사람을,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변하며, 그래서 훌륭한 문학작품이 품은 세상의 넓이와 깊이를 만나려면 시공간의 여정을 거쳐 돌아오고 또 돌아와야만 한다.

고닉의 의식은 흔들리고 착각하고 왜곡과 오독을 거듭하면서도 오랜 세월에 걸쳐 천천히, 단단히, 깊이를 확보하고 경계를 확장하며 진화한다. 이 아름다운 진화는 인간으로서 우리 삶을, 그 시간과 축적된 경험의 의미를 궁극적으로 긍정한다. 시간을 두고 다시 읽고 또 읽어도 고갈되지 않는 훌륭한 문학의 풍요함은, 우리 삶의 풍요함으로 다시 긍정된다.

‘끝나지 않은 일‘은 작정하고 읽는 자는 늙지 않고 영원히 성장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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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6-13 04: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 님은 어릴 때부터 책을 보셨군요 저는 어릴 때는 책을 안 봐서 늘 왜 안 봤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읽은 책을 다시 보고 자신을 돌아보기 쉽지 않겠습니다 누구나 하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지금도 잘 못 읽지만, 예전엔 책을 더 못 읽기도 했네요 잘 읽으려고 해야 하는데, 그러지도 않고... 공부하듯 책을 보려고 하기도 했는데, 그런 생각은 어쩌다 한번 하는군요 책을 만난 게 일찍은 아니었다 해도 앞으로도 볼 테니, 그건 괜찮겠지요


희선

페넬로페 2024-06-13 07:33   좋아요 2 | URL
책을 읽기는 읽는데 다시 보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매번 새로운 책이 보고 싶어 이 책, 저 책 기웃거리기만 하는것 같아요. 희선님께서는 공부하듯 책을 보려고 하시는군요.
그러한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청아 2024-06-18 1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작은 아씨들>도 읽지 않았어요ㅜ.ㅜ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읽다가 책 목록이 나오면 강박적으로 ‘꼭 읽어내야지‘ 하는 편인데 고닉의 목록, 걱정됩니다.ㅎㅎㅎ

사람이 죽을 때 지난 세월들이 한꺼번에 파노라마처럼 스친다는 말이 있더라고요. 아득하면서도 찰나같은 삶을 살면서도 ‘소설‘로 타자의 삶을 경험해 볼 수 있다는 건 인생을 다른 시각에서 볼 기회인 것 같아요. 오늘도 한 토막, 생각꺼리를 던져주신 페페님! 행복한 하루 되시길요^^

페넬로페 2024-06-18 12:48   좋아요 1 | URL
고닉의 목록은 한국에 번역 안된 것도 있어 다 읽기는 좀 힘들겠더라고요.
고닉의 의도가 분명 전부가 아닐텐데 저한테는 서양 작가들의 정념이 조금 버거워 더 접근하기가 힘들었던 것 같아요 ㅎㅎ
요즘 ‘찰나‘라는 단어가 많이 와 닿아요. 지금 쓰고 있는 페이퍼에서도 그 단어를 쓰고 있어요. 그러니 그냥 지금 현재에 몰입하며 잘 살아내야 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 생각들 중에 책이 성찰할 기회를 주어 너무 좋아요.
날씨가 더워요
직장인, 미미님!
점심 맛있게 드시고
오늘 오후도 화이팅 하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