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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 세트 - 전2권
말런 제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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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잠이 들어버렸다. 꿈에서 나는 갱단의 일원이 되어 아드레날린 터지는 총질과 모험을 했고 잠에서 깬 후에도 그 잔상이 계속 남았다. 온통 노란빛으로 그려졌던 내 꿈속의 세계는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의 장소인 코펜하겐시티였고, 에이트레인즈였다. 이 책에 대한 인상이 강렬했던 것은 비단 19, 아니 39금적인 욕설과 높은 수위로 쉴새없이 몰아치는 대사들 때문만은 아니다. 평소에 생각해 본적이 거의 없는 자메이카라는 나라의 속살을 다 보여주어서만도 아니다. 화자만 13명에 달하는 처음 보는 소설구조에 정신을 바짝 차려서 읽어야 하는 긴장감 때문만도 아니다. 이 책을 이끌고 가는 밥 말리 살해시도라는 모티브는 그저 수단이었을 뿐 말런 제임스는 독자들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들려준다.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는 표면적으로는 자메이카의 정치 이야기, 그 가운데서 평화를 외치는 밥 말리의 활약 같지만 이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만은 아니다. 1976년 냉전의 한복판에서 1991년 냉전의 종식까지 세계사를 관통하는 테마에 자메이카의 복잡한 정치상황과 CIA의 활약(?)을 통한 미국의 입장까지 여러 주제가 담겨있다. 영화 스크린을 문자로 구현한 듯한 저자의 현란한 말발에 취해 저자가 곳곳에 심어놓은 신랄한 조롱과 풍자를 놓친다면 이 책을 다 이해했다고 보기 힘들 것이다.

 

이 책에서 인상적인 몇 가지 중에서 먼저, 이 책의 특이한 구조를 들고 싶다. 독자를 긴장시키는 여러 화자들은 돌아가면서 자기의 경험, 생각, 대사를 읊는다. 이들은 죽어서도 계속 말을 하고, 말하면서 생각하기도 하는, 말그대로 프리스타일로 이야기한다. 자메이카 스타일로, 라스타 식으로, 영어도 스페인어도 아닌 파투아로..생각해보면 점잔빼는 여느 책들보다 훨씬 우리의 생각구조를 그대로 활자화한 것이 아닌가 싶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중간중간에 욕도 섞어가면서 생각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저자식 화법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터뷰 형식의 소설 구조가 더욱 진실성을 갖추게 된다.

 

또한 이 책의 주인공 같지만 한 번도 제대로 등장한 적은 없는 우리의 가수밥 말리를 중심으로 엮인 사람들이 방사형 구조로 인터뷰를 함으로써 우리에게 가수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독특한 형식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저자는 가수와 그날의 일에 대해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준다. 그런데 분량은 왜 이렇게 긴 것일까. 제목은 분명히 간략한’(brief) 역사인데..물론 그날의 살해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래도 역사의 한 페이지는 끝나고 개개인들의 삶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실제 역사적 사실은 정말 간략하다. 신문 한 귀퉁이로 요약이 가능할 정도로..그 간략한 사건을 중심으로 개개인들의 삶은 뻗어있고 지속되며 그에 대해 느끼고, 그로인해 벌어지는 일들이 연속해서 꼬리를 물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관점에서 여러 인물들이 인터뷰를 해야 잠시나마 그 사건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실체적 진실에 다가갔다고 볼 수는 없을 만큼 간략한 수준인 셈이다.

 

다음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자메이카의 추악한, 한편으로는 불쌍한 현실이다. 게토 지역에서의 살인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파파로에서 조시 웨일스로 이어지는 권력과 여러 죽음들이 태생부터 영국과 스페인의 지배를 받아왔던 자메이카의 비극을 잘 보여준다. 맨리 수상이 밥 말리를 이용해 평화콘서트를 기획하는 것도 우매한 자메이카 대중을 이용하려는 술수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책을 읽어 내려갈수록 자메이카의 뒷골목 현실 뒤에는 강대국들의 이기적인 면모가 깃들어 있음을 보게 된다.

 

그중에서도 저자는 자메이카를 통해 세계의 패권이라는 미국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들여다본다. 냉전의 한가운데에서 지독한 공산주의 포비아에 걸린 미국이 CIA 등 어둠의 경로를 통해서 한 나라의 내정에 개입한 (자메이카 뿐만 아닌 니카라과, 쿠바 등) 역사적 실례 들은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한결과를 낳았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소련에 대한 대항마로 70년대에 아프가니스탄을 원조하고 30년 후에 ‘9.11 테러로 보답받은 것, 이란 팔레비 왕조를 지원하고 지금은 악의 축으로서 적대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자메이카도 마찬가지이다. 노동당을 지원하려던 미국의 의도는 정권교체에 실패하고 오히려 마약상의 유입이라는 역효과를 낳게 된다. 또한 니나 버지스가 도카스 파머가 되어 그토록 그리던 미국에서 겪는 차별의 삶을 통해 미국의 이중면모를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다. 저자는 고국 자메이카를 통해 미국을 위시한 강대국들의 정치논리를 신랄하게 꼬집는다. 각 당의 당수들, 갱단 두목들이 싸웠다가 평화 제스처를 취하다가 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 세계의 축소판일지도 모른다. 작금의 우리나라에도 적용될 수 있고 현재의 국제정치상황에도 적용될 수 있는 그런 이야기이다.

 

위험한 거지, 평화라는 건. 평화는 사람을 멍청하게 만드니까.~평화는 사람을 부주의하게 만들거든.’(2201p)

 

‘이 평화 어쩌고 하는 게 자네를 그토록 오랫동안 따라다닌 것 아닌가. 나 역시 놓여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일세. 심지어는 평소 최악의 상황만을 기대하는 사람들조차도 그랬어. 겨우 두세 달이지만 평화에 대해 조금씩 생각하기 시작하더니 그다음에는 많이 생각하게 됐고,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거라고는 평화밖에 없었다네. 마치 비가 오기 전에 불어오는 바람에서 그 맛을 느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야.’(2496p)

 

마지막으로 저자가 이야기하는 평화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궁극적으로 이 책은 평화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모든 난리통 속에서 결국 평화는 이뤄졌을까? 저자는 각각의 화자들의 삶을 통해 열린 결말을 제시한다. 평화는 위험한 거라고 하면서도, 그럼에도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저자의 말처럼 가랑비에 옷 젖듯가수의 평화 캠페인에 어쨌든 사람들이 젖는다는 점에서다. 한 편의 갱스터 무비를 본 듯한 독서 후에 평화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끔 만드는 저자의 역량에 감탄하며, 책의 화두가 시대를 막론하고 현대에도 통용될 수 있다면 대작으로 인정받기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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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4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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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때의 일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떠난 바다여행에서 난 수영을 못하는 친구를 데리고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조금 수영을 할 줄 안다고 하는 오만에서 비롯된 자신감이 화근이었다. 부표 있는 곳까지 헤엄쳐간 우리에게 커다란 파도가 덤벼들었고, 그 과정에서 내 친구는 튜브를 놓쳤고 물에 뜨기 위해 나를 짓눌렀다. 그 숨 막히는 순간에 든 생각은 이래서 바다에서 죽을 수도 있는 거구나하는 생각이었다. 그 후로 무사히 인명구조요원에게 구조되긴 했지만, 나는 해수욕장과 바다를 볼 때면 그 기억이 떠오른다. 존 밴빌의 <바다>를 읽는 내내 나의 경험이 같이 떠올랐다.

 

이 책은 아내를 잃은 한 남자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상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喪妻傷處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어릴 적 바닷가 마을에 있던 시더스를 방문한 맥스는 뜻밖에도 다른 상처와 조우한다. 어린 시절 자신에게 영향을 미쳤던 클로이와 마일스의 익사. 이 잔인한 고통은 맥스의 삶에 보이지 않게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후반부에 맥스가 술을 마시고 바닷가에서 정신을 잃었듯 맥스의 무의식속에 항상 잠재해있었다. 그럼에도 맥스가 구조되고 다시 보살핌을 받는 과정에서 치유의 가능성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저자는 기억을 통한 치유를 나지막이 반복해서 독자에게 들려준다.

 

아내 애너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과 주인공 맥스의 유년시절의 기억이 겹겹이 이어진다. 마치 파도처럼 이 한편의 기억이 다른 한편의 기억을 덮고, 그러고 나면 다른 기억이 밀려온다. 인간의 기억은 얼마나 정확한가. 밴빌은 <바다>를 통해 기억의 불완전성과 완전성을 동시에 이야기한다.

 

기억은 움직임을 싫어한다. 사물을 정지된 상태로 유지하는 쪽을 더 좋아한다.’(206p)는 맥스의 말처럼 기억은 하나의 그림이 되어 계속 재생되어지고 이미지화되어 사람들의 마음속에 각인된다. 시더스에서 자신을 돌봐주던 배버수어양이 바로 로즈였고,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이 그레이스 부인이었다는 놀라운 사실은, 기억은 사실여부와는 무관한, 철저히 주관적인 관점으로 개개인에게 저장된다는 점을 뒷받침해준다. 그에게서 쌍둥이는 신이었고,(104p)’ 클로이는 세계가 클로이에게서 처음으로 하나의 객관적 실체로 나타났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158p) 때문에 중요한 존재였다. 그래서 이들의 죽음도 맥스에겐 바다로 떠났다’(11p)는 인식을 남기는 것이다. 원래 그들이 있던 곳, 신과도 같던 이들이 그들이 원래 있던 자궁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이미지로 남아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저자는 맥스가 자신의 기억을 반추하면서 상처를 치료하는 과정을 통해 기억의 완전성을 이야기한다. 기억이란 늘 다시 찾은 과거의 사물이나 장소에 자신을 매끈하게 일치시키려고 열심이니까.(140p)’정말이지 기억하려는 노력만 충분히 기울이면 사람은 인생을 거의 다시 살 수도 있을 것 같다.’(151p)라는 말들은 기억을 통한 마음의 재생(再生) 과정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복기를 통한 상처와의 조우가 어쩌면 그 사람의 남은 인생을 완성시켜주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맥스에게 중요한 두 가지의 이 사건들은 바다라는 모티브를 통해 연결된다. 유년시절 벗들인 쌍둥이가 죽은 곳과 아내인 애너가 죽음을 맞이한 순간을 들을 때 맥스의 기분이 마치 바다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 같았다’(243p)는 데서 바다는 주인공의 상처와 기억을 연결하는 중요한 연결고리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바다의 이미지는 신들이 자리하는 곳인 동시에 차마 자신은 도달하지 못한 미지의 곳이다. 내가 동경하는 존재들이 잠든 반면, 내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기억이기도하기 때문이다.

 

읽는 내내 생사의 갈림길에서 들었던 바다에 대한 무한한 공포심이 밀물과 썰물처럼 드나들었다. 멀리서 본 바다는 평화롭고 아름답고 조용하기만 하지만, 막상 그 무서움을 경험해 본 사람에게 바다는 경외심마저 드는 범접할 수 없는 곳이 된다. 마치 맥스에게 그러했듯이..그렇게 내 기억 속에 자리하던 바다는 밴빌에 의해 다시 끄집어졌고 또 다시 맥스의 바다의 기억을 덧입힌 또 다른 이미지로 뇌리에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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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
하퍼 리 지음, 공진호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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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

-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의 여운과 감동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하퍼리의 20년만의 신작 '파수꾼'에 대해 많은 기대를 품고 읽었을 것이다. '앵무새 죽이기'의 영웅 애티커스 변호사는 인종차별과 백인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70대 노인이 되어있고, 젬은 죽었으며, 스카웃은 변해버린 아빠의 모습에 환멸과 혼란을 느낀다. 독자들 역시 스카웃에 감정이입이 되어 애티커스의 변절을 충격과 슬픔으로 접하게 될 것이다.

 

이 '파수꾼'이란 책은 '앵무새죽이기'보다 먼저 쓰여졌다고 한다. 저자의 금고에서 50년 후에 찾아내 출판한 것이라고 하는데 내용은 '앵무새 죽이기'의 속편처럼 시작한다. 성인이 된 스카웃은 뉴욕에서 생활을 하다가 고향인 메이콤에 들려 아버지와 남자친구 헨리의 변화를 알게 된다. 그것은 kkk같이 급진 인종차별주의자들의 발언이나 행동을 용인한다는 것이다. '앵무새죽이기'의 톰 로빈슨 사건의 변호를 하던 아빠는 사라지고 현실과 타협하는 실망스러운 아빠만이 남았는데 스카웃이 이를 직면하면서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과정이 이 소설의 주된 내용이다. 그러다가 잭 삼촌의 설명과 가르침으로 아빠를 이해하게 되고 자신만의 파수꾼을 세우는 스카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처음에는 스카웃처럼 '왜 아빠가 이렇게 변했지?' '그간 무슨일이 있었던거지?'라는 생각 등등을 했었는데 읽으면서, 잭 삼촌의 말을 들으면서 '파수꾼'은 '앵무새죽이기'의 또다른 한 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앵무새죽이기'의 영웅 애티커스를 똑똑히 기억하고 그를 추앙한다. 그는 흑인 인권과 인종차별철폐의 선구자로 여겨졌고 백인 중심적인 남부 앨러배마 주에서 평등을 구현하기 위한 첫발을 내디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 인물에 대한 인상이 너무도 강렬하여 하나의 고유명사화가 되려는 순간 우리는 스카웃처럼 '또다른 애티커스'와 마주해야 한다. 너무도 올바른 하나의 善이 절대선이 되어가는 과정을 깨부수는게 바로 '파수꾼'의 역할이다. 여기서 잭은 경계를 설정해주는 파수꾼이 각자인 자기 자신이라고 이야기 한다.

 

각자의 섬은 말이다, 각자의 파수꾼은 각자의 양심이야. 집단의 양심이란 것은 없어.372p

 

그리고선 스카웃이 형성한 절대적 가치를 자신만의 가치로 바로세울 것을 종용한다.

 

~너는 정서적 불구자였어, 아버지에게 의지하고 항상 네 답이 곧 아버지의 답일 거라 가정하고 답을 구해 왔지. ~너는 너 자신을 죽여야만 했는데, 네 아버지가 너를 독립된 실체로서 살아가게 하려고 너를 죽여야만 했던 거야. ~네 아버지는 너 스스로 우상들을 하나씩 부수도록 내버려 둔 거야, 네가 스스로 아버지를 인간의 신분으로 떨어뜨리게 만든 것이지. 372p

 

이 부분에서는 니체의 '우상파괴'가 연상된다. 니체는 신이나 절대적 가치를 설정해놓고 거기에 얽매어있는 인간들에게 과감하게 '우상을 파괴할 것'을 주장하며 '신은 죽었다'고 외친다. 이처럼 우리는 인종차별이 철폐되어야 하고 흑인도 백인과 동등해질 것을 주장하는 절대선을 설정해 놓고는 거기에 얽매인다. 그래서 스카웃처럼 그 기준에 조금이라도 어긋나기라도 하면 타락했다고 치부하며 경멸하기 시작한다. 이 시점에서 이 소설은 나에게 그러한 답을 주었다. 저자는 애티커스를 설정하면서 동시에 애티커스가 꼭 정답일 필요는 없다고 다시 이야기한다. 애티커스는 사회문제에 대한 하나의 대안, 해결책일 뿐 절대적인 해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애티커스를 절대선으로 치부하고 경계 지어버릴때, kkk나 대다수 남부 백인들의 가치관과 기준은 악이 되어버리는 모순점이 생겨날 수 있다. 그래서 삼촌이나 아빠, 헨리 등은 타협점이라든지 자기만의 기준을 설정한 것이다. 여기서 스카웃이 느끼는 좌절은 스카웃이 홀로서는 성인이 되기 위해서 겪어야할 성장통인 것이다.

 

나는 물론 내 딸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물러서지 않았으면 했지. 가장 먼저 내게 맞섰으면 했어. 390p

 

저자는 우리가 둘중의 하나의 입장을 취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가치에 맞서 싸우는 것과 타협하는 것 중 어떠한 것이 정답이라고 제시하지도 않는다. 단지 절대적 가치를 설정하는 파수꾼에 의존하지 말고 나만의 파수꾼으로 나만의 가치를 정립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실망한 독자들에게 나는이렇게 말하고 싶다. '파수꾼'은 '앵무새 이야기'와 동전의 양면과도 같으며, '앵무새이야기'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꼭 읽어야할 작품이라고.. 저자의 다른 두 목소리를 통해 기존의 가치관이 깨지는 통렬한 경험을 하게 되어 즐거웠으며, 나만의 파수꾼을 세운 것 같아 만족스러웠던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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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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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영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인 '앵무새죽이기'의 배경은 1930년대 미국 앨러배마 주의 메이콤이란 마을이다. 당시 대공황이란 시대적 배경과 함께 미국 사회, 특히 남부 주에 만연한 인종차별을 주제로 다루었다. 주인공인 스카웃은 네살위 오빠와 변호사인 아빠와 함께 살아가는 다소 톰보이 기질이 있는 여자아이이다. 스카웃의 학창시절은 아빠인 에티커스 변호사가 흑인 톰 로빈슨의 변호를 맡기 시작하면서 놀림을 당하게 되어 곤란해지게 된다. 당시는 아직도 인종차별이 만연하여 톰 로빈슨에게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백인인 유얼의 편을 들기 위해 강간죄를 인정하여 배심원들은 유죄평결을 내리게 된다. 이에 오빠인 젬과 스카웃은 낙담하게 되지만 동시에 훌륭한 아빠의 인격도 보게 된다. 이와 함께 자신에게 망신을 주었다고 생각한 유얼이 앙심을 품고 젬 남매에게 위해를 가하려던 위기의 순간 젬과 스카웃이 항상 두려워하며 조롱했던 래들리 아저씨가 구해준 것에 따른 감사표시로 이 소설이 끝난다.

 

흑인 대통령이 TV에 나오는 요즈음에서 불과 1세기도 안 되었는데 어떻게 1930년대와 현재의 인식이 이렇게 다를까 싶기도 하다. 흑인이건 백인이건 여자이건 남자이건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명제가 우리 삶에 적용되기까지의 과정이 참 길고도 지난한 것 같다. 책에 나오는 스카웃의 담임 선생님의 경우, 유대인을 차별했다는 이유로 히틀러를 증오하면서도 흑인을 경멸하는 이중잣대를 가지고 있고 메이콤 마을의 대부분의 백인들도 그러하였다. 배심원들이 로빈슨이 무죄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유죄평결을 내린 것도 그런 맥락이다. 흑인 민권운동의 역사가 오래되었고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미국에서 경찰의 흑인 진압 등의 경우 흑백 대립과 시위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 아직도 갈등은 존재하는 것 같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처럼 여성대통령의 등장이 여성의 인권신장으로 바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 같이 미국에서 흑인대통령의 등장이 흑인 인권의 비약적인 성장으로 바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이 책에서는 흑백과 함께 혼혈들의 문제도 약간 다루고 있다. 혼혈은 다문화시대인 현재 그렇게 주목받는 요소는 아니지만 당시에는 흑인과는 또 다른 어떠한 차별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주인공의 눈으로 관찰된 혼혈은 불쌍하면서도 긴 대화를 나누긴 힘든 어떠한 기이한 '종족'으로서의 존재였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도 혼혈과 외국인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던 옛날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아주 그러하지 않다고 할수는 없지만 일단 신기해하는 단계는 넘어섰다는 것이다. 나와 다르다고 생각하고 신기해 하는 것, 이것이 '차별'의 첫 단계가 아닐까.

 

이 소설에서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는 바로 소외된 이의 재발견인데, 바로 이웃집 래들리씨이다. 스카웃과 젬, 친구 딜은 학창시절 비행으로 줄곧 집안에 갇혀 지내는 아서 래들리에 대한 공포와 호기심으로 어린시절 무모하게 도전하기도 또한 조롱하기도 해가며 멀리해왔다. 그러나 나무위에 소중한 것들을 놓아두는 것이나 자신의 집에 침입한 젬의 바지를 수선해준 것 등 의외로 따뜻한 면모를 보여왔던 래들리는 결정적으로 유얼의 해코지에 맞서 젬 남매를 구해준다. 이를 계기로 스카웃의 마음속에 드리워있던 래들리에 대한 편견이 해소되고 화해의 국면을 맞게 된다. 이렇듯 겉모습만 보고, 소문만 듣고 지레 판단해버리는 우리들의 나쁜 편견에 대해 진실을 보라고, 진면목을 볼 것을 종용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아빠의 말이 정말 옳았습니다. 언젠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래들리 아저씨네 집 현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514p

 

또한, 이 소설에서 인권운동의 선구자로 보여지는 애티커스 변호사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판사가 이 불공정한 재판에서 변호를 맡길 정도로 진솔하며 '정의'의 원칙을 구현하는 인물이다. 정의를 알고, '평등'을 몸소 실천하는 그래서 같은 백인들 사이에서 모진 말과 모욕을 듣지만 포기하지 않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저자는 미친개를 쏘아죽이는 애티커스의 모습에서 아이들이 비로서 아버지가 '명사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애티커스의 여러 훌륭한 면모들이 '절제'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힘이 없어서 약자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힘과 능력이 있지만 약자편에 서는 인물임을 암시한다.

「하지만 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기 전에 나 자신과 같이 살아야만 해. 다수결에 따르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건 바로 한 인간의 양심이다.」 200p.


 마지막 장면에서 항상 원칙과 정의를 앞세웠던 애티커스 변호사가 애들을 구해준 사람까지 법정에 세워서는 안된다는 보안관 테이트의 말에 말없이 동의한 장면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한편, 이 소설은 9살 스카웃의 시선에서 전개되고 있는데 길머 검사가 로빈슨에게 함부로 대하는 장면에서 딜이 우는 것 등은 아이들의 순수함을 이야기해준다. 어릴때 순수한 눈으로 세상을 보지만 조금만 커져도 차별과 억압에 대해 당연시하는 어른이 되어 간다는 사실에 씁쓸해지지만, 에티커스 같은 비범한 사람이 있기에 희망도 있는것 같다.

 

「아직 저 애의 양심은 세상 물정에 물들지 않았어. 하지만 조금만 나이를 먹어봐. 그러면 저 앤 구역질을 느끼지도 않고 울지도 않을 거야. 어쩌면 세상에서 옳지 않은 일을 봐도 울먹이지 않을 거야. 앞으로 몇년만 나이를 더 먹어봐, 그렇게 될 테니.」372p 

 

애티커스의 변호가 비록 실패로 끝나고 톰이 탈옥하려하다 죽음을 맞았지만, 그렇다해도 그 시도는 전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마을사람들의 가슴에 미묘한 변화가 일었고 이러한 변화처럼 다른 마을에도, 다른 주에도, 뒤이어 미국 전역에도 '평등'과 '차별철폐'의 바람이 일게 된 것이다. 이처럼 무언가를 '변혁'하는데에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린다. 반대자들도 많고 좌절도 겪을 것이다.  

애티커스 핀치는 이길 수 없어, 그럴 수 없을거야, 하지만 그는 그런 사건에서 배심원들을 그렇게 오랫동안 고민하게 만들 수 있는 이 지역에서 유일한 변호사야. 그러면서 나는 또 이렇게 혼자서 생각했지. 우리는 지금 한 걸음을 내딛고 있는 거야. 아기 걸음마 같은 것이지만 그래도 진일보임에는 틀림없어. 399p 

그래도 이렇게 흑인 편에서 친구가 되고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는 시도가 역사를 만들고, 진전을 일궈낼 것이라는 희망을 본다. 이 소설은 소녀 스카웃이 성장하면서 겪는 성장소설인 동시에 사람들의 인권의식 성장과정을 보는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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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전장에서 돌아온 남편을 죽이고', '아들은 그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를 죽인다.' '한 여인이 자신을 배신한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아이들을 죽인다.'어느 막장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이런 자극적인 이야기들은 바로 우리가 늘 칭송해 마지않는 희랍(그리스) 비극의 소재이다.(아이스퀼로스의 <아가멤논>,<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 누구나가 희랍 비극을 읽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희랍 비극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이런 부담스러운 소재들 때문에 읽는 것이 꺼려지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희랍 비극을 읽고, 또 <비극의 비밀>같은 해설서를 통해 그 의미를 찾아가보면, 왜 희랍 비극이 인류의 고전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을 따라 읽으면서 새로이 발견해 낸 희랍 비극의 특징들이 세 가지가 있다. 먼저, 이 책을 읽고 나서 깨진 편견 중 하나는 바로 '비극'이라는 용어에 관한 것이다. 단순히 '슬픈 극'이 아닌 '인간에 대한 성찰에 관한 극'인 것이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다시 읽으니 그제서야 비극의 의미가 잘 와닿았다. 그래서 해피엔딩인데도 비극으로 분류되어진 여러 작품들에 대해서도 다시한번 고찰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보통 비극이 슬픈 극'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등장인물에게 닥친 불행의 크기와 거기서 비롯된 고통의 깊이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희랍 비극이 강조하는 것은 불행과 고통보다는 그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다시 일어서는지이다. 109p

 

 

두번째로, 희랍 3대 비극 작가들의 작품에는 각각 시대별로, 작가별로 다른 특성이 있다는 점이다. 같은 소재를 두고 이 세 비극작가가 어떻게 해석하여 자기만의 작품을 창조해냈는지 비교하는 것은 좋은 감상법이다. 아이스퀼로스의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과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 에우리피데스의 <엘렉트라>는 오레스테스가 아버지 아가멤논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어머니 클뤼타임네스트라를 죽이는 소재를 다른 작품들이다. 먼저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스는 주저하고, 신의 명령에 마지못해 복수를 감행한다. 그러나 소포클레스의 오레스테스는 복수를 다짐하고 어머니에게로 돌아왔으며, 소포클레스는 아이기스토스보다 클뤼타임네스트라를 먼저 살해하게끔 배열함으로써 이를 보여준다. 확실히, 소포클레스는 아이스퀼로스 때보다 절대적인 '신의 뜻'에서 조금씩 빠져나와, 인간의 의지를 확대해 나가는 과정중에 있다. 한편, 에우리피데스의 <엘렉트라>에서는 선악의 경계가 모호하고 인간의 영역 비중이 커진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를 반영한다.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가 어머니를 죽이는 장면도 결행에 찬 것이 아니라 살인 후 자책과 후회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페르시아 전쟁 등을 거치며 인간성의 상실과 혼란, 허무를 경험한 에우리피데스 당대인들의 신조를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희랍 비극의 주인공들에게서 인간에게 잠재되어 있는 '영웅적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의 해설을 따라가다 보니 그간 수없이 접했던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보지 못한 면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전에 읽었을 때에는 그저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운명' 내지는 '오이디푸스의 휘브리스가 부른 비참한 결말'로만 여겼었는데, 하나하나 문맥과 그 의미를 곱씹다보니 '오이디푸스'의 영웅적인 면모가 들어왔다. 진실을 외면하는 凡人들과 달리 오이디푸스는 파국으로 치달을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진실을 추구했고, 그에 합당한 벌을 자신에게 내렸다. 또한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도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그의 영웅적 기개를 볼 수 있다. <오이디푸스 왕>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덫'이 아닌 '인간의 욕구와 행동에 따른 결과'를 강조한다는 것도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또다른 의미이다. 즉,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우리가 생각했던것 만큼 운명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율적 의지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어찌보면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작품이었던 것이다.

 

신들이 미리알고 있는 사건들을 이루는 것은 바로 인간의 욕구와 자발적 행동이다. 어떤 이해 못할 외적인 힘이 인간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바라는 대로 결정해서 행동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 결과가 신들이 예언한 것과 일치했을 뿐이다. 199p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 에서도 어머니로서의 한 여자가 감행하기 힘든 친자살해라는 주제를 놓고 메데이아 내부의 영웅적 기질이 승리한 것이라는 해석을 하는데, 이 역시 비극을 다르게 보는데 중요한 요소이다. 이처럼 비극은 인간이 불행에 빠진 것을 보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단순한 차원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고통받던 인간이 어떻게 역경에서 다시 일어서고 어떠한 비범한 자질로 극복해나가 한 차원 더 높은 단계로 자신을 끌어올리는지를 지켜보는 과정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는 여러 '비극의 비밀' 중 가장 의미있는 것은 바로 '파테이 마토스'(고난을 통해 지혜를 얻는다)가 아닐까 한다.

 

그 불행 속에서 더욱 빛나는 내면의 힘, 그 재앙속에서 인물들이 도달하는 어떤 높이를 보여주는 것, 이것이 비극의 목적이 아닌가 싶다. 210p

 

 

결론적으로, 꼼꼼히 원전과 비교해 보며, 이 책을 완독하고 나니 왜 희랍 비극이 고전인지, 이 작품들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의미없이 지나칠 수 있는 대사들, 지문들이 다 교묘하게 극의 구성에 필요한 것임을 알고는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불필요한 것처럼 보이던 것들이 다 의미있게 짜여져 있으니 니체의 말처럼 '있는 것은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도 좋은 것이란 없다'가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다다른 사고의 깊이와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해 낸 방식을 보면, 과연 인류가 지난 2500년 동안 진보하긴 한 것인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374p)는 저자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수 없다.

 

읽는이의 배경지식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읽히는 만큼 자신만의 '비극의 비밀'을 발견하는 것이 독자의 바른 자세일듯 하다. 희랍 비극에 대한 해설서가 많지 않은 척박한 환경에서 열혈독자로서 다른 작품과 희극에 대한 명강의가 또 나오기를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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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ggil 2015-08-05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해요. 당장 사러가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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