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후, 한국
공병호 지음 / 해냄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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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쟁의 의미가 사라져갈 때 글로벌이란 이름은 독이 되는 것이다. 불균형을 없앤다는 명목의 글로벌이란 평준화될 때 의미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곳에 남는 것이란 지독한 죽이기와 독점과 카르텔(기업간의 제휴)일 것이다. 경쟁의 자본주의가 아니다. 독점이 목적인 자본주의인 것이다. 독점이 목적인 그곳에서 치고 올라오는 싹들은  죽어주어야할 풀들이다. 그 죽어주어야 할 풀들이 바로 중소기업과 서민들인 것이다. 이들의 죽음으로해서 살아남는 것은 과연 누구일지는 분명한 것이다. 글로벌화란 이렇게 거대자본을 가진 대기업을 위한 잔치상이 되어가는 것이다. 평등한 경쟁의 토대를 잃어가게 만드는 조건. 성공의 가능성을 부풀리지만 바늘귀보다 작은 길을 제시하는 거짓의 토대. (부자들이) 한없이 빈자들로부터 이탈되어가는 기하학적인 동선 속에서 저 멀리 떨어져가는 빈자를 향해 미소를 짓는 것은 오히려 정부이다. 즐기고 있는 것이다. 서민들에게 악수를 하면서 경제를 살려준다고 하던 그의(정부와 이명박의) 속마음인 것이다. 당신의 언발에 잠시나마 오줌을 누어주리라. 라며 고용을 확대하지만 미봉책인 인턴과 서민들을 위한 일용직의 확대들이란 무너진 미국의 이데아가 아니었던가. 08년에 무너져버린 신자유주의의 길을 흠모하고 있는 것이다. 서비스업의 확대란 그렇게 적은 임금을 말하는 것이므로 딛고 올라와야할 시민들의 굴레는  깊어져만 가는 것이다. 결국 자신을 딛고 올라올 숨은 더욱더 차 오르는 것이다. 이렇게 이명박은 웃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 가난을 상징하는 당신의 엄마를 당신은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가난이란 버려야할 따라서 증오의 대상으로서 그 증오의 대상으로서인 시민들에게 그는 사디스트인 것이다. 너희도 올라오렴. 너희도 나처럼 성공할 수 있다. 지독한 가난을 딛고서 웃으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속으로 그 구멍이, 그 계단이 얼마나 좁은지. 점점 더 좁아질테니. 미안하게도 올라오렴. 너희들은 올라올 수 있단다. 역사를 통틀어 언제나 미해결로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고용의 문제와 빈부를 향해 웃으면서, 그렇게 빈부와 고용의 질의 한없는 추락을 보면서 거대한 자본가와의 와인한잔.  

    공병호가 바라는 이데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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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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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공과 작가사이에 놓여진 틈은 그래서 칭찬받아야 하는 것이다. 인물과 작가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지질수록 모럴의 공간은 열리고, 객관적인 시선은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잣대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오로지 현상에만 기대지 않은 작가에게 한표를 보낸다. 당대의 인물에 달라붙어 있는 오늘날의 작가와는 달리 옳고그름을 슬그머니 꺼내놓으려는 그녀의 가치관은 본능적인 게 아니라 오히려 지성적인 것이다. 그녀의 지성이 부디 그녀의 단편 제목에 나오는 마지막 단어처럼 '사회'성을 띄기를, 그리고 부디 자신의 본능에 살짝 걸쳐 있는 비판적 의식이 상업성에 물들지않고 담대해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다양성을 요구하는 자본주의가 아니 듯이, 그로인해 개성없이 하나가 되어가는 출판사들 속에서, 그리고 자신과 세상을 더이상 다원적 시선으로 볼 수 없는 짧은 작가들 틈에서 피어나야만 하는 호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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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 1 - 상 - 정치경제학 비판 경제학고전선집 7
칼 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 비봉출판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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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의 극은 인문학이다. 작가의 창조에 견제된 자본주의는, 스스로의 속죄(희생양으로서의 인문학)의식으로 인해 발전해가는 동인이 된다.  

    출판업이 유일하게 반자본주의적인 양식이라는 것은 거짓말이다. 작품은 이미 이미지를 위한 봉사를 시작한 것이다. 평준화(획일화)는 이미지이다. 시각으로 이루어진 매체의 이미지가 기득의 체계에 봉사하게 된 이유는 이것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미지가 지닌 일반성이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고가 멈춰진 곳에서 이미지가 웃는 이유이다. 자본주의는 언어를 배척하고, 오히려 이미지를 선택했던 것은 필연이 되어버린다. 

   이미지가 사고를 동결시키고, 기득권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동시에 평준화된 대중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수단으로서 쓰인다는 것은, 다시 말해 부흥해야할 출판산업(자본주의아래)이 도리어 쇠퇘해져가고 이미지를 위한 자리에 자신을 넘겨버려야 운명이라는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통제하기 힘든 언어인 것이다.  이미지로 상상한다는 경우에도,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이미지와 이미지의 결합으로 인해서라고 해도 사고는 언어에 의해서만이다. 분열된 언어로 인간은 차이를 경험한다. 섬세해진 언어만이 통제를 와해시킬 수 있는 것이다. 레지스탕스가 자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언어는 다양성을 부활시키고 차이가 자라는 곳에서 드디어 통제의 시스템(문화적)은 신자유주의의 교리로부터 이완된다. 빈부는 협소해지고 복지에 대한 인식이 인자해지며 나뉘어진 국지적인 문화들은 서로의 반사적(찌그러진 거울처럼) 의식으로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선과 악은 나뉘어지고, 악당은 폭력으로(합법적인 폭력으로 비합법적인 폭력을 제거하는 아이러니) 퇴치되어야 하고, 민족주의는 강화되고, 범죄자는 사회적인 인과(유기성)를 무시당한 채 응징당한다. 감동은 기계적인 문화산업의 노리개가 되고(타인을 위한 희생이 일으켜주는 이 감동), 죽음은 비극이 아닌 한 영웅적 희생으로 감동화된다. 사랑은 대중적이고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산업성을 띄고 낭만성을 전파시킨다. 현실로부터의 이 도피는 기득논리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활용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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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에이티브의 길을 묻다
김병희 지음 / 살림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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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비를 위해서 의식을 닫아두려고 할 때, 소비자들의 맹목적인 충동을 위해서 억압을 위한 (성과 죽음의) 심리를 이용하려고 할 때 결국 당신에게서 우리는 예술이라는 이름을 박탈해야한다. 광고란 감수자들의 의식을 닫기 위해 창조를 하고, 반대로 의식을 열기 위해서 현실에 제공된 메뉴얼을 지각시키는데 예술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소비를 유용한 목적으로 한다는 것에 의해서 예술과 대별된다는 모호한 상황을 설정하지 않아도, 크리에이티브들의 좋아하는 감수자들이 소비에 대해 맹목적이면 맹목적일 수록 그들의 소비가 늘어난다는 것과 광고가 차원이 높아지지 않아도 되는, 그러니까 창조자들에게 그들을 위한 고도의 두뇌플레이가 요구되지 않는 편의가 제공된다는 것에서 예술과 광고는 이미 소원한 관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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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정명환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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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완성된 글은 무기가 되고는 했다. 작품에서 떨어져나온 작가의 마음은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논리와 미의 정당성이 당신의 자리 위에서 웃음을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또한 수많은 논리와 미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당신은 그래서 돌아서서 당신의 명예를 지고 세상에 대한 힘을 찾아 떠날 테지만, 그래서 또다시 작품은 스스로 당신에게 분열을 요구하고 있을 테지만, 당신이 알고자 하는 것은 힘인가요? 진실인가요? 

   당신의 글이 만들어지는 시점에서 우리는 알고 있다. 글이 당신에 의해 문장으로 나오기 전 당신의 펜 위에서 수없이 부서지는 의식 속의 불안을.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진실이 아니었노라, 우연한 조합일 수도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안다. 당신은 그렇지 않기 위해서 춤을 추고 있지만 당신은 논리와 미를 찾아가지만, 찾아오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단어는 저절로 당신을 찾아왔노라. 당신이 말에게 건넨 명령어는 오로지 연역인 것이다. 연역 속에서 당신의 모든 글은 우리의 모든 글은 그것을 위해서 조립되어지는 것이리라. 무엇을 써야 할지를 알고 있는 당신에게 당신의 캔버스는 불안인 동시에 오락인 것이다. 무엇을 써야할지를 모르고 있는 당신에게 당신의 캔버스는 또한 유희일 것이다. 

    힘이 깨지는 것은 그렇게 미완의 순간이다. 사르트르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오히려 권위의 책이 아니라 이 것이다. 모든 권위를 지닌 문장과 개념의 창조될 시기의 그 불안하고도, 희열에 들떠있고도, 미숙한 작가의 의식을 말이다. 그것은 결국 아래의 문장을 향해 질문을 요구하고 있다.

    당신이 글을 쓰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뜨끔하다. 자신의 살이 없는 문장은 글이 아니듯 화려한 수식어구를 제쳐버리고 나에게 와서 묻고 있는 문장은 이 말이다. 사르트르가 나에게, 당신 글쟁이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왜 작가들이 세기를 거치면서도(17, 18, 19세기) 결국 부르조아에 머물고 싶었고, 노동자들의 편에서서 그들의 요구를 향해 함성을 지르지 못했나. 왜 작가들은 핍박받고 억압받고 소외되고 있는 노동자를 위한 글을 쓸 수 없이 귀족과 부르조아 계급을 위한 바람막이 역할을 수행하는 꼭두각시로 밖에 될 수 없었는가. 글이 개인의 유용한 출세의 수단일 때, 그것이 개인적인 명예를 위한 도구가 될 때. 이 문장은 결국 누가 들어야만 하는가. 정치성이란 바로 작가의 양심이라고 그는 요약하여 내게 속삭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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