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시대 황금이 차츰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그 원인은 무제 때 서역과의 교통과 무역이 열리고, 이 방면을 통해 중국 내지의 황금이 교역에 의해 유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문명의 선진국과 후진국이 접촉할 때 선진국의 공예 제품이 후진국으로 수입되고, 이것과 교환해 후진국의 화폐가 선진국을 행해 유출된다.
중국과 서역을 비교할 때 뭐라 해도 서역은 오랜 문명을 가진 선진 지역이다. 물론 중국에도 비단과 같은 특산품이 있었지만 이것은 오히려 일차 생산품에 가깝다. 이에 대해 서역으로부터 수정과 유리 같은 고도의 기술에 의한 유리 제품이 수입되었다. 물론 교통이 불편한 시대이니 황금이 유출되었다 해도 한 해의 수량을 보면 미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그 무렵은 경제 또한 저변이 알아서 몇 십 년, 몇 백 년 동안 같은 경향이 계속되면 그것이 가져오는 효과는 무시할 수 없다. 중국의 고대 사회는 일변해 오늘날의 수입초과국과 같은 불경기의 바람이 거세게 불게 되었던 것이다. pp. 56-57. - P56

중국 춘추시대 도시국가 사회에는 노예가 존재했는데, 남자를 신(臣)이라 부르고 여자를 첩(妾)이라 했다. 특히 군주는 많은 신첩을 소유했고, 군주권이 점점 커짐에 따라 그 수가 더욱 증대했다. 그런데 군주를 도와 정치에 참여하는 관료들은 처음에 군주에게 봉사하는 노예에 비견되면서 발달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후세에 관료 집단의 통솔자를 재상(宰相)이라고 부르지만, 재(宰)란 요리 담당이고 상(相)이란 주인의 기거를 도와 시중드는 자로서 모두가 노예의 임무이다. 또 역사 사실이 보여주는 바로도 제 환공의 폐업을 도운 재상 관중은 일단 환공을 적대했다가 포로가 된 자이므로 사형수로서 사면받은 노예이다. 또 진(秦)의 목공을 보좌한 백리해는 자신을 양 다섯 마리의 대가로 팔았다고 하니 이 또한 노예이다. 훨씬 더 고대의 설화에 나오는 부열은 노예 노동을 하고 있던 처지에서 은의 천자가 발탁해 등용했다고 하는데, 그 성인 부(傅)는 아이 돌보는 역으로서 이것도 노예의 일이었다.
이로써 보면 먼저 군주의 측근에 노예 무리가 있고, 그중 유능한 자가 정치 고문이 되어 군주를 돕고 군주의 총애를 받아 지위가 높아지고 권력이 강대해지자 몸은 노예이지만 세상에서도 존경심을 갖고 대우하는 지위를 갖게 된다. 그러면 자진해서 그런 무리에 투신하는 자도 나타나 그것이 관료군을 형성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래서 이 관료들은 군주에 대해 스스로 신(臣)이라고 자칭했다. 군신의 관계가 여기에서 성립된 것이니, 그것은 원래 군주와 인민 간의 관계와는 다른 것이었다. pp. 113-114. - P113

진나라 이후 한과 초는 큰 전투 70회, 작은 전투 40회로 천하 인민의 간과 뇌가 땅에 가득하고 부자(父子)가 벌판에 해골을 드러내는 것이 이루 헤아릴 수가 없으며 곡소리는 끊이지 않고 부상자는 일어날 수 없다고 했다. 그래도 간신히 항우는 멸할 수 있었지만 인민은 생업을 잃고 일터가 없는 데다 대기근이 일어나 쌀 한 석(石)의 가격이 5천 전(錢)으로 오르니 인민이 서로 잡아먹어 인구가 반감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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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주원장이 숙청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몽골 이상으로 싫어했던 강남의 유력자들입니다. 만 명 단위의 처형은 대부분 강남 사람들을 상대로 이뤄졌습니다.
명은 역대 중국 왕조 중에서 유일하게 강남 지역에서 흥기한 왕조입니다. 강남은 경제가 발전하여 화북에 비해 지주나 유력자가 많았고, 주원장은 이러한 세력을 잘 활용해 위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런 강남을 왜 탄압했을가요?
주원장이 염두에 둔 것은 남북의 경제 격차 해소입니다. 원 말기의 혼란으로 정부에서 발행한 지폐가 휴지조각이 되자 그 영향은 생산력이 낮은 화북에서 더욱 심각했습니다. 화북과 강남은 12세기 전반에 금과 남송이 대립한 이후 오랫동안 분리 상태에 있었습니다. 몽골 정권 또한 강남의 경제력으로 회복을 지탱하는 정치 체제를 취했기에 남북의 통치는 일률적이지 않았고 달리 행해졌습니다. 그 결과 화북은 강남보다는 오히려 유목민 정권과의 연계가 깊어졌습니다. 강남에서 흥한 명이 자신의 정권을 ‘중화’라고 표방하려면 이 분리된 화북과 강남을 하나로 묶어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외이를 몰아내는 것만으로는 남북을 통합할 수 없었습니다. 남북 통합에는 양자 사이에 있는 막대한 경제적 격차를 해소해야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격차를 해소할 수 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어느 한 쪽을 다른 한 쪽 수준에 맞추면 됩니다. 이상적으로야 경제력이 낮은 쪽을 높은 쪽 수준으로 끌어올려서 합치시키는 것이지만, 낮은 쪽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일단 불가능합니다. 높은 쪽을 낮은 수준으로 끌어내려 맞추는 것은 쉽지는 않아도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주원장이 단행한 것이 ‘현물주의’를 중국 전역에 적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현물주의’란, 화폐를 배제하고 재정 활동을 수행하는 것을 망합니다. 경제에서 후진적인 화북에서 그때 나타났던 현물거래, 물물교환 현상을 항구화, 제도화한 것입니다. 이 정책을 전국적으로 실시해 세금은 현물로 징수하고, 정부는 모은 현물을 그대로 소비했습니다.
현물주의를 단행하면 왜 강남의 경제력을 빼앗는 결과가 될까요. 답은 현물주의에 근거하여 재정 운영을 실시하려면 구체적으로 무엇이 필요할지 생각하면 나옵니다. 물자와 노동력을 직접 확실하게 징수하려면 과세 대상을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과세 대상자가 몇 명이고, 그 사람들이 얼마만큼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지 조사하고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조사하고 작성한 것이 ‘어린도책’과 ‘부역황책’이라고 불리는 두 종류의 장부였습니다. pp. 225-226.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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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중국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지금까지 개별 역사로 보고 따로 논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이 유라시아 대륙 양 끝 지역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의 경과가 내용상 흡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3세기에 시작된 지구 전체를 덮친 한랭화로 인해 유목민이 남하하면서 동아시아에서는 한나라가 멸망하고 서쪽 유럽에서는 로마제국이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유럽에서는 게르만인이, 중국에서는 유입된 유목민들(오대십국)이 둘 다 정주화하면서 군벌로 성장해 최종적으로는 자신들의 나라를 세운 것입니다.
두 지역 모두 한랭화로 인구가 크게 감소하지만, 유럽에서는 온난화와 철제 농기구 개발로 생산성이 향상됨에 따라 9세기에서 13세기까지 인구가 3배로 늘었습니다. 거의 같은 시기(당나라~원나라)에 중국에서도 온난화와 기술혁신, 강남개발이 진전되어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과 서쪽 끝에서 역사는 나란히 병행하여 진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pp. 140~141. - P140

몽골제국은 유목민의 제국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실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몽골-튀르크계의 유목 군사력과 이란-이슬람계의 상업 경제력이 중앙유라시아의 초원 오아시스 지대에서 융합, 일체화된 정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거래를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치안입니다. 치안이 악화되면 상품을 강탈당하거나 속아 넘어갈 위험이 커집니다. 따라서 상인들이 무력을 지닌 권력이 뒷배를 얻으려고 자신들의 이익 일부를 제공하는 형태로 양자가 결합되었던 것입니다.
시장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산발적 연결 고리를 유라시아 전역의 규모로 완성한 것이 몽골제국입니다. 몽골은 자신의 군사력과 기동력을 최대한 활용해 인접한 농경 세계를 차례차례 자신의 통치 아래로 편입시키는 방법으로 마침내 유라시아 전체를 통합한 대제국을 이룩했습니다. P. 155. - P155

송나라 시절 ‘송전’으로 불리는 화폐의 증산이 있었습니다. 화폐가 보급된 배경에는 당시 정권의 의도가 따로 있었습니다. 그 의도란 ‘세금 징수’를 동전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세금은 물품이나 노역으로 지불되었는데, 무엇으로든 교환 가능한 동전으로 대체하면 세금 징수가 간편해질 뿐 아니라 징수한 곡물을 용병 급여로 지불할 대 발생하는 손실도 없어져서 효율이 좋아지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또 급여를 받는 측도 현물보다 동전으로 지급받는 편이 훨씬 편리했으므로 화폐경제는 단번에 사회에 보급되었습니다. P. 178.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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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는 동료 작가들과 식사를 하다가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을 써보자는 내기를 했다. 그때 헤밍웨이가 썼다고 알려진 소설이 바로 다음과 같은 짧은 문구다.



For Sale : baby shoes, never worn.

(팝니다 : 아기 신발, 사용한 적 없음)



고작 여섯 단어로 이루어진 소설이지만, 내용을 해석하려면 이렇게 저렇게 추론하고 상상해야 한다. 아기 신발이 왜 사용되지 못했는지, 왜 아기 신발을 파는지, 아기 엄마는 누구인지 그런 것을 추론하고 상상하면서 이야기를 추측해야 한다.



좋은 문장을 쓰고 싶다면 독자의 이 같은 해석 방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짧고 간결한 문장을 쓰려면 무엇보다 중복되고 불필요한 어휘를 버리고 핵심적인 어휘들만 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문장을 이렇게 간략히 정리하면 기본적인 문형이 드러나고, 어법에 맞지 않은 비문이 나올 확률이 줄어든다. 아울러 문장에 여운이 남고, 생각은 깊어진다.



초고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지우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중복되는 의미나 어휘를 지운다.

2. 불필요한 부사나 형용사를 지운다.

3. 긴 문장을 줄여 여러 문장으로 나눈다.

4. 필요하면 간단히 보충 문장을 넣어준다.

5. 이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한다.



예시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제각기 여러모로 다양한 꿈을 가지고 열심히 산다. 그 꿈은 단지 취득하고 싶은 물건부터 자신이 이룩하고 싶은 미래의 직업까지 온 갖가지 모양의 다양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려는 과정에서 아무런 갈등 없이 평탄하게 이루어진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학업에 열중하던 때부터 자신이 간절하게 바라던 대학에 마침내 들어온 이후까지, 꿈으로 인한 여러 갈등이 지속적으로 벌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그런 갈등의 요소가 다양하게 들어 있고 해소 상황을 잘 보여주는 영화 <빌리 엘리어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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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꿈을 가지고 산다. 그 꿈은 갖고 싶은 물건부터 미래의 직업까지 다양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그 꿈을 아무런 갈등 없이 평탄하게 이룬 사람은 없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자신이 간절하게 바라던 대학에 마침내 들어온 이후까지, 꿈을 이루기 위해 많은 갈등을 겪게 된다. 여기에 그런 갈등의 요소와 해소 상황을 잘 보여주는 영화 <빌리 엘리어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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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시절의 경치를 수십 년이 지나서 다시 보게 되니 지나간 세월이 모두 사라진 게 아니, 그 풍광 속에 그대로 저축되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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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시절의 경치를 수십 년이 지나서 다시 보게 되었. 지나간 세월이 모두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 풍광 속에 그대로 저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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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산길을 올라가서는 전기도 욕실도 화장실도 불편한 나무집 숙소에서 잠을 자는 일정이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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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나는 산길을 올라가서는 전기도 없고 욕실도 화장실도 불편한 나무집 숙소에서 잠을 자는 일정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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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나중에 훈련소에 가서 불빛 하나 없는 산속에서 훈련을 한 뒤 “그때 겪어보아서인지 하나도 무섭지 않더라”고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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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나중에 훈련소에 가서 불빛 하나 없는 산속에서 훈련을 했다. 편지에 “그때 겪어보아서인지 하나도 무섭지 않더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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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칠흑 같은 어둠, 별빛을 보고 길을 찾아가던 시대의 행복을 알려주는 일은 자기 직전까지 누워서 스마트폰을 밝히는 요즘으로선 아주 불가능한 일이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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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 같은 어둠, 별빛을 보고 길을 찾아가던 시대는 행복했다. 아이들에게 그런 행복을 알려주는 일은 스마트폰만 보는 요즘으로선 아주 불가능한 일이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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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생물학자들은 중세 과학자 갈릴레오가 “지구는 둥글다”라는 이론을 발표했던 과거 플로렌스의 명성에 걸맞은 새로운 과학이론을 제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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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플로렌스에서 중세 과학자 갈릴레오가 “지구는 둥글다”라는 이론을 발표했다. 이런 플로렌스의 명성에 걸맞게 이탈리아 생물학자들은 새로운 과학이론을 제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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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도쿠가와 시대 내지 그 이전 시대가 ‘정체’되었다가거나 ‘폐쇄적’ 혹은 ‘쇄국적’이었거나 ‘봉건적’이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소리다. 1853년 페리 제독의 내항이 일본을 ‘개국’시켰다는 주장이나 1806년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은 도쿠가와의 유산과 급격한 단절을 이루었다는 주장은 수정되어야 한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 일본도 하루아침에, 아니 한 세기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일본 도시화는 획기적이었다. 1550년 이후 한 세기 반 동안 일본에서는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도시가 하나에서 다섯으로 늘었다. 18세기에 이르면 일본 도시 인구는 중국이나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많았다. 오사카와 쿄토, 에도(토쿄) 인구는 각각 적어도 100만을 넘었다. 특히 에도 인구는 130만에 육박했다. 일본 인구의 6~13%가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도시에 살았다. 반면 당시 유럽의 도시인구는 2%에도 미치지 못했다. 일본 인구는 세계인구의 겨우 3%였지만, 10만 이상이 거주하는 도시에 거주하는 비율은 무려 8%나 되었다."<리오리엔트>

















"메이지 유신 이전 도쿠가와 시대에는 전국적으로 260여 개의 지방마다 영주가 있었다. 이 지방 영주를 다이묘, 또는 번주라고 하고, 그들이 다스리는 봉건국가를 번이라고 한다. 이처럼 반독립적인 번이 다수 존재했다는 점은 막말기의 변혁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각 번들 간의 경쟁의식이 강했다. 다수의 정치에서 생존을 위한 부국강병의 경쟁, 생존의 경쟁 의식을 갖고 치열하게 노력했다는 점이 대내외 위기에 민감하고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였다.”<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일본의 정치와 사회 체제의 분권화와 다양성이 중국에서 나타난 것보다는 훨씬 다채로운 대응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러한 다양성 덕분에 시행착오 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성공적으로 대응하였다. 예를 들면, 번 대부분은 효과적으로 대응하기에 너무 작거나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지만, 충분한 수의 번들이 다양한 대응을 할 수 있었다. 엄격한 계급 구분도 영향을 끼쳤다.”<동양문화사(하)>
















"일본의 봉건제는 유럽의 봉건제와 유사한 면도 있지만 몇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우선 센고쿠(戰國)시대 이후 일본의 봉건제는 쇼군과 다이묘가 주종 관계에 있지 않았다. 유럽의 왕-제후 관계와 달리 일본의 쇼군은 가장 강력한 무가(武家)일 뿐이다. 천황 위임을 정통성의 근거로 하지만, 그 위임은 힘에 기반한 것이었고, 결국 통치 근원이 되는 것은 무력이고 실력이었다.



제한적 권위의 통치자로서 쇼군은 다이묘들에게 세금을 징수할 수 없었다. 다이묘들의 충성 서역은 전시에 쇼군을 군사적으로 지원할 군역만을 의무화하였다. 일반적으로 중앙 권력이 강성해지면 지방의 사적 무력 보유를 억제하는 방향으로 통치체계가 정비되지만, 일본은 그럴 수 없었다. 군역이 계약의 기초이므로 다이묘의 무력 보유를 금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극상이 난무하는 센고쿠시대를 거치면서 충성 맹서는 약속의 무게를 잃은 지 오래다. 쇼군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군역 의무가 쇼군 안전을 위협할 수도 있는 패러독스 상황에서 쇼군은 다이묘들을 견제하기 위해 군역을 다른 형태로 부담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쇼군이 군역의 연장선상에서 성곽 축성, 제방이나 도로 건설 등 전쟁 기간시설 관련 공사에 다이묘가 인력과 자재 등을 제공하도록 의무를 부가한 것이 천하보청(天下普請)이다.



이에야스는 쇼군 자리에 오른 후 바로 천하보청을 발령한다. 히비야이리에 매립사업을 비롯하여 소토보리(에도성 바깥쪽 해자) 조성, 에도성 축조, 고카이도 정비 등에 전국 다이묘를 동원한 것이다. 천하보청은 쇼군 통치의 상징이자 다이묘 견제책이기도 했다. 이에야스는 다이묘들의 천하보청에 대한 순응 정도를 다이묘의 충성심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 저항 가능성이 높을수록 더 많은 의무를 부과하고 순응할수록 의무를 경감하였다.



각 다이묘는 천하보청에 따른 재정 압박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라도 정해진 기일 내에 높은 완성도로 사업을 완료할 수 있도록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에 실패할 경우 신임을 잃는 것은 물론, 더 큰 부담이 되어 돌아오거나 처벌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이묘들이 천하보청의 명을 받아 공사에 임하기는 하지만 공사 완료에 필요한 자재와 기술을 보유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각자 부족한 자재나 기술을 번끼리 거래하거나 전문가들을 인력 시장에서 구해야 했다. 기존에 없던 자본이나 자재, 전문 인력에 대한 수요가 생겨나고 시장에서 거래되기 시작했다. 



천하보청은 각 번의 통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천하보청 수행을 위해서는 번의 자원 동원력이 향상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다이묘가 천하보청의 압박을 견디기 위해 행정력 강화와 세수 증대를 위한 새로운 땅 개간 등 통치체제 정비에 힘을 기울여야 했다.



천하보청의 묘미는 국가에서 거둔 국부가 고스란히 인프라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만약 쇼군이 중앙의 군주로서 징세, 즉 화폐나 현물 형태로 생산량의 일정 부분을 거두어 갔다면 그 과정에서 많은 비효율과 왜곡된 자본 축적이 발생했을 것이다. 일본은 천하보청에 따라 세금 징수가 아니라 ‘결과물’ 형태로 의무를 부과했기에 관리비용 등의 매몰비용이나 착복으로 인한 증발 없이 모든 투입이 실물 인프라로 이어졌다. 



일본으로서는 쇼군이 다이묘를 견제해야만 하는 정통성 딜레마를 겪고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행운이었다. 전근대 유럽과 동아시아 국가들은 소수의 중앙 지배층을 정점으로 하는 다단계의 착취적 구조를 기본으로 한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하고 통치에 민주성이 결여된 전근대이기에 세금은 비효율성도 높고 생산력 확대를 위한 재투자에도 사용되기 어려웠다. 세금은 누군가의 금고로 들어가 사치로 낭비되거나 다 쓰이지도 못하고 소멸되는 국부의 무덤이었다.



일본은 중앙의 징세권이 없었다는 사정이 천하보청과 맞물려 전혀 예기치 못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우선 천하보청에 동원된 자원은 중앙 지배층에 이전되어 축적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지방 지배층인 다이묘들은 자본 축적의 기회는커녕 악몽 같은 상황에 처했다. 번 정부는 동원 인부들에게 노임을 지급하고 자재를 구매하기 위해 끊임없이 재정을 지출해야 했다. 천하보텅 비용 마련을 위해 빚을 내야 하는 다이묘도 있을 정도였다. 말단에서 세금 형태로 걷히는 생산물은 천하보청을 거치면서 노임이나 자재 대금 형태로 제분배되었다. 이러한 직접적인 자원 투입 결과로 높은 수준의 공공인프라가 창출되자 한층 더 경제활동이 촉진되고, 이는 다시 말단 세금 납부자의 생활 개선으로 이어졌다. 천하보청이 의도치 않은 국부 인큐베이터가 된 셈이다.<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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