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델은 불완전성의 원리를 발표했다. '적어도 하나의 자연수 이론이 포함된 형식적 체계의 무모순성은 해당 체계 안에서는 증명될 수 없다'를 증명했다. 이 말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증명되어도, 우주 자체가 증명되는지는 알 수 없다는 의미다. 한 마디로 안에서는 결코 증명될 수 없고, 벗어난 다음에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현실너머 편>

















‘이 명제는 증명될 수 없다’는 문장은 불확실한 진술이다. 괴델 말처럼 이 문장은 증명될 수 없다. 그 문장이 참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논리 도구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 문장이 거짓말쟁이 패러독스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에게 관한 진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자기 연관성(self-refrence)이 개입된 문장이다. 자기와 관련된 것은 종종 풀 수 없는 모순을 낳는다.



자기 연관성이 초래하는 많은 결과 중 가장 놀라운 점은 우리가 자신을 꿰뚫어볼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스스로의 행동을 예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스로 행동을 예언하려면 스스로 생각을 추월해야 하기 때문이다.<우연의 법칙>


















업력(業力)을 간직한 무의식적 심층 마음이 곧 근본식인 아뢰야식이다. 그런데 아뢰야식은 개인  자신이 행한 과거의 업(業)에 의해서일 뿐만 아니라 다른 개인들과 더불어 함께 살게 되는 공통적 환경세계의 모습을 형성하는 식이기도 하다. 이처럼 공적 세간을 개인의 업의 결과로 간주한다는 것은 곧 불교가 독립적 객관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세계가 우리 자신과 분리된 별개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 심층에서 우리 자신과 본질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물질세계는 그렇게 인식하는 개인의 식에 대해 그 식의 경계로서만 존재하는 것이지, 그 식을 떠나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가 아닌 것이다. 인간이 인식한 대로의 이 세계는 그렇게 인식하는 인간에 대해서만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 아닌 다른 존재, 예를 들어 개나 곤충, 천사에게도 바로 우리에게와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동일한 사물도 그것을 인식하는 자에 따라 다르게 인식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인식하는 자의 인식을 떠나 객관적 세계 자체를 논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불교에서는 흔히 ‘일수사상(一水四相)’의 비유를 제시한다. 말하자면 같은 물이라 해도 아귀에게는 그것이 피고름으로, 물고기에는 삶의 터전이나 길로, 천인에게는 보석의 땅으로, 인간에게는 마시는 물이나 바다 등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대상의 상대성에 대한 자각을 유식은 ‘유식무경(唯識無境)’의 깨달음으로 간주한다. pp. 82-83.



인간 의식은 동물적 본능 또는 사회 경제적 권력에 의해 지배받고 규정되는 수동적 산물이다. 개인적 욕망과 그 욕망이 지향하는 사회적 권력이 서로 얽힌 관계에서 인간의 무의식적 본질을 규정하고, 인간의 일상적인 표면적 의식이란 단지 그 무의식이 최종적으로 표면화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이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자가 그 대답을 자기 자신 안에서, 즉 자신 의식 안에서 찾아내려고 하면, 그것은 이미 빗나간 길을 가는 것이 된다. 내가 나 자신을 어떤 존재로 자각하고 인식하는가, 내가 나 자신의 삶을 어떤 방식의 삶이 되도록 결단하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떤 의식적 생각이든 어떤 의지적 결단이든 그 안에 작동하는 무의식적 메커니즘이 들어 있으며, 바로 그 무의식적 메커니즘을 밝혀냄으로써만, 그 생각과 결단의 본질, 한마디로 인간 본질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된다. pp. 110-111. 



대상 세계와 접하여 생겨나는 상(像)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생겨나는 느낌이 바로 수(受)다. 그 다음 그러한 상을 능동적으로 마음에 취하는 것이 바로 상(想), 즉 생각이다. 경계의 상을 취하는 과정에서 각종 명언(名言), 즉 언어를 시설하게 된다. 그 다음 행(行)이란 마음의 조작을 뜻한다. 마음이나 말이나 몸으로 짓게 되는 각종 업(業)이 바로 이 마음의 조작인 행에서 비롯된다. 마지막으로 식(識)이란 세계를 이러저러하게 분별하여 인식하는 과정이다. 우리가 자아라고 생각하며 아끼고 집착하는 것, 자기 자신을 그 안에서 발견하며 자신과 동일시하는 그런 것들이 바로 이러한 몸이나 느낌, 생각, 의지, 인식들에 다름 아니다. pp. 141-142.



불교에 따르면 우리 자아에 대한 집착은 곧 상일주재(常一主宰)적 자아에 대한 집착이다. 다시 말해 변하지 않고 항상되며 단일한 상일(常一)의 자아, 그리고 바로 나 자신이기에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주재(主宰)적 자아가 존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신체나 느낌, 생각이나 의지, 인식 등 그 모든 것은 처음부터 나의 본질로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니라, 나의 유전적 조건들 그리고 나를 둘러싼 사회 문화적 쪼는 자연적 환경에 의해 그렇게 형성된 것이며, 따라서 환경 변화에 따라 항상 바뀌어갈 수 있는 그런 것들이다. 그러므로 그 어느 것도 절대적으로 나 쪼는 나의 것이라고 집착할 이유가 없다. 이와 같이 집착할 만한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의 깨달음이 바로 해탈로 나아가는 지름길이 된다. 아집을 극복케 할 무아의 깨달음이 어느 정도 심각하게 받아들여져야 하는가는 다음 비유가 잘 말해 주고 있다. p. 145.



어떤 사람이 남의 심부름으로 멀리 가서 빈방에 혼자 있는데, 밤 중에 귀신이 송장 하나를 메고 와서 그의 앞에 던진다. 이내 뒤를 이어 다른 귀신 하나가 따라와서 앞의 귀신을 꾸짖되 "이 시체는 나의 것인데 어째서 네가 메고 왔느냐?" 하니, 앞의 귀신이 답하기를 이 것은 나의 것이므로 내가 메고 왔다" 하였다. 그러나 나중의 귀신이 말하기를 "이 시체는 실로 내가 메고 왔다"고 하여 마침내 두 귀신이 서로 시체의 팔을 하나씩 잡고 다투다가 먼저 귀신이 이렇게 제의를 했다.

"여기 인간이 하나 있으니 그에게 물어보자"

이 말에 따라 나중의 귀신이 물었다.

"이 시체는 누가 메고 왔는가?

그 사람이 생각하기를 "이 두 귀신은 힘이 센데, 사실대로 말해도 내가 죽음을 당할 것이요. 거짓을 말해도 죽음을 당할 것이다. 어차피 죽음을 당할 것이라면 거짓말을 해서 무엇하랴" 하여 사실대로 "그 시체는 앞의 귀신이 메고 왔다"고 하였다.

그러자 나중의 귀신이 화를 내어 그 사람의 팔을 뽑아 땅에 던져 버리니, 먼저 귀신이 시체의 팔 하나를 뽑아다가 그에게 붙여주어 멀쩡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두 팔, 두 다리, 머리, 허리 등 온몸을 모두 시체의 것과 바꿔놓은 뒤에 두 귀신은 뽑아 버린 사람의 몸을 다 먹고 입을 닦으면서 어디론가 가 버렸다.

이 때 그 사람이 생각하였다. "나는 지금 어머니가 낳아 주신 몸을 몽땅 두 귀신에게 먹히고, 나의 이 몸은 몽땅 저 시체의 것이니, 나는 지금 몸이 있는 것인가, 몸이 없는 것인가? 몸이 있다고 하자니 모두 귀신에게 먹히었고, 몸이 없다고 하자니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걱정하기를 마치 미친 사람 같더니, 이튿날 아침에 길을 떠나 가다가 목적한 국토에 이르렀는데 불탑과 스님들이 있었다. 그는 찾아가서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몸이 있는가, 없는가?"만을 물었다. 비구들이 도리어 묻기를 그대는 누구인가?" 하니, 그는 "나도 사람인지 사람이 아닌지 모르겠소"라고 하면서 지난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비구들은 그 사람이 무아의 도리를 잘 알아서 제도하기 쉬울 것을 알고 그에게 말했다. 그대의 몸은 본래부터 항상 나가 없었다.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다만 사대가 화합하기 때문에 내 몸이라는 생각을 내었을 뿐이니, 그대 본래의 몸이 지금의 것과 다름이 없다." 비구들이 제도해 주니, 도를 닦아 번뇌를 끊고 곧 아라한을 이루었다. 이것이 때로는 남의 몸에 대하여 나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너와 나를 구분하여 나가 있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도리이다. pp. 146-147.



이러한 자아관은 어찌 보면 상일주재적 자아개념을 더 이상 간직하고 있지 않은 현대적 인간 이해를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공공연히 “주체는 죽었다’를 선언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유에 따르면 항상된 자기 동일적 자아정체성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는 생물학적 요인들 및 사회 문화적 관계 안에서 형성되고 만들어지는 것일 뿐이다. 자아 또는 인간이란 것 자체가 자연적으로 사회적으로 진화되고 발전되어 온 것이며, 따라서 자아란 그러한 자연적, 사회적 법칙과 관계들을 통해 규정되고 형성된 것이다. pp. 148-149.

<동서양의 인간 이해>






기독교는 신 자신과 그 신에 의해 창조된 일체의 피조물들과의 질적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 ‘신으로부터의 창조가 아닌 무로부터의 창조’를 역설한다. 일체의 피조물은 무로부터의 존재이며, 자체 안에 신과 자신을 구분짓게 하는 무성을 지닌 것이다. 피조물의 하나에 불과한 인간 역시 신에 의해 창조되었지만 무로부터 창조되었기에 존재와 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결국 기독교적 우주 창조론에 있어 우주 창조를 설명하는 기본 축은 신과 무라는 양 원리다. 이 이원성 안에서 우리는 다시금 희랍적 형상과 질료, 정신과 물질의 이원적 사고방식을 발견하게 된다. 창조에 전제된 무가 정말 순수 무라면, 무로부터의 창조와 신으로부터의 창조가 과연 구분될 수 있겠는가? 우주와 신, 피조물과 창조자, 인간과 신 가의 절대적 구분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겠는가? pp. 102-103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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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소성은 인간 욕망이 무한하고 달성하고픈 목적은 끝이 없는데 수단이 부족할 때를 말한다. 하지만 적게 일하고 적게 먹고 많이 노는 사회”에서도 희소성 원리가 적용될까? 하고픈 일도 없고 되고픈 것도 없는 사람들이 사는 사회에서도 희소성 공리는 보편적으로 적용될까?” 우리는 “인간 운명이 희소성과의 투쟁이라고 선언한 뒤 불철주야 경제 행위에 매진하다 일 중독증이나 과로사에 봉착하고 마는 근대형 인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어떤 목적이 욕구의 무한함을 불러일으킬 만큼 추상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 수단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냐에 따라 항상 부족을 일으키진 않는다. 고대 아테네 폴리스처럼 ‘잘 사는 생활’이란 인생 목표가 ‘폴리스에 헌신하는 것’ 혹은 ‘폴리스에 헌신을 위한 여가’와 같은 것이라면, 이 무한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온종일 극장에서 소일하는 것’ ‘배심원이 되는 것’ ‘선거운동을 하여 공직을 맡는 것’ ‘성대한 제사에 감동을 하여 고상한 기분이 드는 것’과 같이 사용해도 부족해지지 않는 수단들이 필요할 뿐이다.” 따라서 “주어진 상황에서 ‘희소’라는 말이 수단에 알맞은 말인가 아닌가는 사실의 문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진부한 ‘희소성’ 격언을 여러 현상 이면에 작동하는 경제 법칙인 양 취급함으로써 경제에서 ‘실제적인 것’의 의미는 무시되고 결국 잊혀버리게 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논리가 사실을 훈육한다.”<칼 폴라니, 反경제의 경제학>

















신체적 쾌락을 좇는 욕망은 왜 저급하고, 정신적 만족을 좇는 욕망은 왜 고급한가? 신체적 욕망과 정신적 욕망 차이는 무엇인가? 신체적 쾌락을 좇는 욕망이 저급한 욕망으로 해석되는 까닭은 그 욕망이 개체적 욕망이고 인간 상호간에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식욕을 채워줄 수 있는 음식물은 내가 먹거나 네가 먹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러므로 그러한 욕망에 무제한적으로 충실하다 보면, 인간 상호간의 배려인 도덕성 여지가 들어설 수 없게 된다.



이에 반해 이성적 만족을 좇는 욕망이 고급한 욕망이 되는 것은 그것이 보편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나의 지식욕을 충족시키는 것은 그대로 너의 지식욕도 채워준다. 그것은 서로 나눌 수 있는 것이며, 개체성을 떠난 것이다. 즉 사적이지 않고 보편적, 공적인 것이기에 보다 높은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다. 보편적이고 공적인 원리에 더 높은 가치가 부여되는 것은 그것만이 만인이 더불어 살 수 있는 이성적 사회를 건립할 수 있는 원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개체 아닌 보편, 사 아닌 공을 생각할 수 있는 이성적 인간만이 이성적 사회를 형성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동물도 숫놈 아닌 암놈이 새끼를 돌보니 자식을 돌보는 것은 당연히 에미 몫이다.’라든가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니 자연적 방식의 삶이 가장 바람직하다’라든가 또는 ‘자연에서도 강자만이 살아남고 약자는 도태될 수밖에 없으니 강자의 생존전략을 좇을 수밖에 없다’라는 식으로 인간 사회 질서의 원형을 동물사회에서 구하는 것은 인간과 동물 차이를 간과한 동물적 주장일 뿐이다. pp. 126-127



플라톤은 인간을 신체라는 감옥에 갇힌 영혼으로 이해한다. 인간이 이 생애에 있어 부자유한 것은 신체를 가졌기 때문이다. 신체를 먹여야 하고 입혀야 하기에, 신체의 욕구를 충족시켜야만 살 수 있기에, 인간은 부자유하며 무수한 비도덕적인 것들도 행하게 된다. 인간 자유는 신체적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뜻한다.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는 것 등의 신체적 욕망에서 야기되는 자연필연성의 강제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로움이 곧 인간 영혼의 자유다. 이는 곧 신체적 욕망을 벗어나 이성 그 자체로 존재하게 됨을 뜻한다. 하지만 영혼이 신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신체를 벗어남으로써만 가능하다. 영혼이 육체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 그것은 곧 죽음이다. 철학이란 아직 죽지 않은 상태에서 죽어서나 가능한 자유를 최대한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즉 이성적, 보편적으로 사유하며 이성적 원리대로 살아가는 것을 훈련하는 것이다. 인간의 개체적 욕망을 넘어서며 욕망의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이란 한마디로 죽음의 연습이 된다. pp. 128-129. <동서양의 인간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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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와 로마 사회에서 시민들 모임에서 내려진 결정은 개인적 검토를 전혀 허용하지 않았다. 개인 권리라는 개념은 아직 없었다. 사회적으로 종속된 사람들은 어쨌든 완전히 이성적인 존재로 여겨지지 않았다. 고전적 공화주의 전통이 찬양하는 고대 시민 자유는 우리 현대인이 생각하는 자유 개념과 거리가 아주 멀었다. 고대 자유는 곧 도시 통치에 어떤 역할을 맡는 것이었다. 고대 자유는 의회에 출석하고, 토론장에서 의견을 발표하고, 논쟁에 대한 판을 내리고, 어느 한 쪽 편을 들면서 투표할 특권과 의무로 이뤄져 있었다. 아울러 행정관으로 봉사하거나 필요한 경우에 배심원으로 일할 가능성도 고대 자유에 속했다. 고대 자유는 정치 과정에 대한 무관심을 허용하지 않았다. 공적 일이 가장 중요했다."<개인의 탄생>


















"자유, 즉 리베르타스(libertas)는 먼 고대에 생긴 낱말이며, 자유를 지키고 실현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정치철학을 처음 시도할 때부터 주요한 목표였다. 서구 정치 전통의 근간을 이루는 문헌들은 특히 폭정의 충동과 주장을 어떻게 제약하느냐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고, 폭정 유혹에서 벗어나는 핵심 방안으로 덕성 함양과 자치를 꼽았다. 특히 그리스인은 자치가 개인 차원에서부터 정치제 차원까지 이어진다고 생각했고, 어느 차원에서든 절제, 지혜, 중용, 정의 같은 덕목들이 서로를 지탱하고 증진할 경우에만 자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달리 말해 자치라는 덕목이 시민들 영혼을 다스릴 경우에만 도시 자치가 가능하고, 시민권 자체를 법과 관습을 통해 덕성을 몸에 익히는 일종의 지속적인 습관들이기로 이해하는 도시에서만 개인들 자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스 철학은 파이데이아(paideia), 즉 덕성 교육을 폭정을 미연에 방지하고 시민 자유를 보호하는 주된 방안으로 강조했다.



그렇지만 이제 자유라는 단어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해도 그 내용은 근본적으로 새롭게 인식되었다. 근대의 현저한 특징은 이 오래된 정치관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사회적, 정치적 합의는 효력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자유주의 뿌리는 사회 병리의 원천 – 즉 분쟁 근원이자 개인 자유를 제한하는 장애물 -으로 치부되기에 이른 다양한 인간학적 가정과 사회 규범을 뒤집으려는 노력에 있었다. 자유주의 토대를 놓은 사상가들의 주요 목표는 국내 평화를 위해 비합리적이라고 결론 내린 종교와 사회 규범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안정과 번영을 증진하고 궁극적으로 개인 양심과 행동 자유를 증진할 것으로 그들은 내다보았다.”<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

















"그리스의 실천철학은 도덕이 아닌 윤리 형태를 띠었다. 도덕이 마땅히 따라야 할 초월적인 규준을 상정하는 사유라면, 윤리는 현실적인 인간들의 좋은 관계 맺음을 추구하는 사유다. 전자는 스토아철학, 기독교를 거쳐 칸트 등에 의해 대변되고, 후자는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스피노자 등에 의해 대변된다.



이렇듯 소크라테스 사유는 ‘좋음과 나쁨’을 사유하는 윤리학이지 ‘옳음과 그름’을 사유하는 도덕이 아니었다. 비록 아테네 사람들에게 이 두 가지가 그리 명확하게 구분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좁은 의미에서 옳음과 그름, 선과 악, 의무 같은 가치들은 기독교가 도입한 가치다. 소크라테스에게는 무엇인가가가 좋기 때문에 옳은 것이지 옳기 때문에 좋은 것은 아니다. 그리스인들에게 좋지만 그르다든가 나쁜지만 옳다는 개념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자기에게 지는 것, 쾌락의 유혹에 빠져 좋음과 나쁨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을 의지 문제보다는 무지의 문제로 본다. 나쁜 것을 올바로 인식하면서도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덕과 지혜를 일치시킨다. 덕=지혜가 소크라테스 윤리학의 근간을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 모르기 때문에 나쁜 짓을 한다는 소크라테스 생각은 ‘의지박약’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알면서도 나쁜 짓을 하는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너무 단순화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으나, 달리 보면 ‘안다’는 말에 일상적인 의미 이상의 의미를 넣어서 사용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볼 때 그런 인간은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닐 터이니 말이다.“<세계철학사 1>

















현대 자유주의의 공공철학에 내포된 원천은 바로 좋음(the good)보다 옳음(the right)을 우선시하는 자유주의다. 즉 자유주의 정치 이론의 중심은 서로 다른 시민이 좋은 삶을 규정하는 도덕적 관점이나 종교적 관점에 대해 정부가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발상이다. 삶을 살아가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기에 정부는 좋은 삶의 특정한 형태를 법률로 단정해선 안 된다. 그 대신 정부는 각 개인을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로서 존중하고 각자의 가치관과 목적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의 틀을 제공해야 한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특정한 목적보다 공정한 정차를 중요하게 여기기에 이것이 일러주는 공적 삶을 ‘절차적 공화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관용을 강조하고 개인 권리를 존중하는 사상적 전통, 즉 존 로크와 임마뉴엘 칸트에서부터 존 스튜어트 밀과 존 롤스에 이르는 사상적 전통을 뜻한다. 우리가 하는 토론이나 논쟁 대부분은 이 범위 안에서 이뤄진다. 하지만 이런 자유주의를 고취한 자발주의적 자유관은 해방의 전망, 즉 권력이 집중된 조건에서도 실현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주체성의 약속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P. 265.



1940년대 초부터 대법원은 오늘날 익숙하게 보이는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개인 권리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보호하고 또 좋은 삶을 규정하는 문제에서 중립을 지키도록 강제하는 역할이었다. 1947년에 처음으로 대법원은 정부가 종교에 대해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 뒤로 수십 년 동안 대법원은 자발주의적 자유관에 기대서 이 중립성을 정당화했다. 판결문에서 “존중할 가치가 있는 종교적 믿음은 신자들이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선택의 결과물이다”라고 밝혔다. 같은 기간에 법원은 자치보다 지기표현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 아래에서 언론의 자유로 보호받을 수 있는 영역을 넓혔다. 예컨대 “자기표현의 선택권이 보호를 정당하게 만들어주는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그리고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일련의 판결에서 대법원은 자율성과 선택의 자유라는 근거를 내세워 정부가 피임과 낙태 문제와 관련된 도덕적 사항을 법률로 규정하려는 시도를 차단하며 사생활 권리를 강력하게 보호했다.



좋음보다 옮음을 우선시하는 자유주의 버전은 헌법 영역에 국한되지 않았다. 뉴딜 시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으로 부상한 복지국가라는 개념을 정당화하는 데서도 자유주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언뜻 봐서는 자유주의가 어떻게 그런 역할 할 수 있었을지 분명하지 않다. 복지국가의 시장경제 개입은 중립성을 지키려는 시도와 상반되는 듯 보일 수 있다. 게다가 모든 시민에게 특정 재화를 공적으로 제공한다는 것은 상호 의무와 공유된 시민의식이라는 강력한 윤리, 즉 고도로 발달한 연대감과 공동 목적을 전제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pp. 267-268.



루스벨트 관점에서 복지국가 관념을 정당화하는 것은 강력한 공동체적 의무감아 아니라 “가난한 사람은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다”라는 발상이었다. 즉 개개인이 자기 목적을 스스로 선택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으려면 반드시 물질적 전제조건들이 필요하다는 인식이었다. P. 270. 존슨은 1964년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직을 수락하면서 경제적 안정이야말로 개인의 자유를 위한 젠제조건이라는 루스벨트 주장을 되풀이 하면서 “굶주린 사람, 일자리가 없는 사람, 자식을 학교에 보내지 못하는 사람, 결핍에 굴복당한 사람, 이런 사람들은 온전하게 자유롭지 못하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개인이 자기 목적을 스스로 선택하고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서 자유주의적 개혁 사업을 옹호했다. pp. 273-274.



자유주의 버전은 1970년대에 온전한 철학적 진술을 확보했다. 특히 존 롤스의 <정의론>이 가장 대표적이다. 롤스는 20세기 대부분 기간에 영미 철학을 지배했던 공리주의적 가정들에 대해 반대하면서 특정한 개인적 권리는 워낙 중요해 사회 구성원 일반을 대상으로 하는 복지나 다수의 의지보다 우선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정의에 따라 확보된 권리는 정치적 흥정이나 사회적 이익이라는 계산에 의해 좌우될 수 없다”라고 했다.



롤스의 정의로운 사회는 바람직한 덕목을 함양하려고 노력하거나 시민에게 특정 목적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바라봤다. 정의로운 사회는 오히려 상반되는 여러 가지 목적 사이에서 중립적 권리 체계를 제공하며 사람들은 그 체계 안에서 타인의 유사한 자유와 충돌하지 않는 한 얼마든지 자신이 가진 견해를 추구할 수 있다고 바라본 것이다. 이것은 좋음보다 옳음을 우선시하는 주장이자, 절차적 공화주의의 자유주의를 규정하는 주장이다.



옳음이 좋음보다 우선한다는 주장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 바로 자발주의적 자유관이다. 롤스가 설명했듯이 사람들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이며 저마다 자기 목적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으므로 목적 중립적 권리 체계가 필요하다. 정부가 시민의 바람직한 덕목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시민의 도덕적 성격을 형성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특정한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가치관과 목적을 선택하는 개인 능력을 존중하지 않는 의미다. 자발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언론의 자유나 종교의 자유와 같은 권리를 보장하는 이유는 각 권리가 보호하는 활동이 특별히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 신념과 견해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부가 제각기 다른 목적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의 밑바탕에 해방적 전망을 전제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 대해 롤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도덕적 인간은 자기가 선택한 목적을 가진 주체이며, 또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자유롭고 평등한 이성적 존재로서의 자기 본성을 드러낼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자기 의지대로 조직할 수 있는 조건을 근본적으로 선호한다.” 옮음이 좋음보다 우선하듯이 자아는 자의 목적보다 우선한다. “기본적으로 우리 본성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가 가진 목표가 아니라” 우리가 자기 목표에서 이끌어낼 수 있다면 존중하겠다고 동의할 수 있는 권리다. “자아는 자아가 확인하는 목적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무리 지배적인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여러 가능성 가운데서 선택된 것일 뿐이다.” pp. 276-278.



한편 공화주의 이론은 자유가 시민의 자치(self-governing) 참여 여부에 달려 있다는 발상을 중심에 두고 있다. 즉 공동선(common good)에 대해 동료 시민과 함께 깊이 생각하고 또 정치 공동체 운명을 만들어나가는 데 힘을 보탠다는 뜻이다. 어떤 개인이 공동선을 깊이 생각할 수 있으려면 자기 목적을 선택하고 다른 사람 권리를 존중하는 데 필요한 능력보다 더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공적인 일에 대한 지식, 공동체 소속감, 전체를 생각하는 관심, 위태로운 운명의 공동체에 대한 도덕적 유대감 등이다. 따라서 어떤 시민이 자치에 참여하려면 특정한 인격적 특성이나 시민적 소양(시민적 덕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말은 공화주의 정치가 시민들이 옹호하는 가치관과 목적에 대해 중립적일 수 없다는 뜻이다. 공화주의적 자유관은 자유주의적 자유관과 달리 자치에 필요한 소양과 덕목을 시민에게 적극적으로 심어주는 형성적 정치를 요구한다. pp. 29-31. 자유에는 자치가 필요하고 거꾸로 자치는 시민적 덕목에 의존한다는 발상이 공화주의 이론의 핵심이었다. p. 41.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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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는 영국식 의회민주주의를 최선의 사회 체제라고 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선거란 시민의 권리인 동시에 약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영국인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그들은 의회 의원을 선거할 동안에만 자유로울 뿐이다. 의원들이 선출되는 즉시 시민들은 곧바로 노예가 되어버린다.’<누구나 한번쯤 철학을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에 관해서 어려운 질문을 던져보라고 요구한다. 그는 선거가 결국 가장 뛰어난 인물을 뽑는 것이 목적이기에 귀족정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만약 민주주의의 진짜 의미를 다수가 통치하는 제도라고 간주한다면, 미국식 체제는 오늘날 일부 정치학자가 판단하듯 과두정에 가깝다.”<처음 읽는 정치철학사>

















“사람들은 의회가 국민 의지를 실행하는 '공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사정은 그렇지 않다. 헤겔 지적처럼 의회는 관료들 판단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마치 사람들 자신이 결정한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장이다. 즉 의회민주주의는 실질적으로 관료 내지 그와 유사한자들이 입안한 것을 국민이 스스로 결정한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정교한 절차다.“<세계사의 구조>

















위브는 대중의 참정권은 시민이 “개인의 자유의지를 토대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권력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듦으로써 자발주의적 자아상을 강화했다고 설명한다. “보통선거권과 다수결이라는 규칙은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개인이 국가를 형성한다는 이미지를 사람들 상상력 속에 불어넣었다.” 그 결과 다른 한편으로는 한층 더 심각하고 복잡한 현실이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 숨어버렸다. 결국 ‘자유로운 인간’이 자기가 살아갈 정치 형태를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 투표장에 가는 장엄한 모습’은 그저 환상에 불과했다. 전통적 공동체의 장악력을 해체한 바로 그 기술 및 산업의 세력들이 개인 선택이나 동의 행위 범위를 넘어 사람들 삶을 지배하는 권력 구조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P. 152.



1980년대 중반 이후로 미국에서 상원의원이나 하원의원이 되는 데 들어가는 실질적인 비용은 두 배 넘게 늘어났다. 당 지도부는 초선에 성공한 의원들에게 하루 중 서너 시간은 선거구 유권자를 만나 투표를 독려하거나 소위원회나 창문회에 참석해 의원으로서의 활동을 하되 나머지 다섯 시간은 모금 행사에 참석하거나 정치 후원금을 낼 사람에게 전화해 자금을 긁어모으라고 조언한다. 대통령 선거운동에도 막대한 자금이 흘러든다. 2010년에 선거 후원금 상한제를 폐지한 미국 대법원 결정이 크게 작용한 결과다. 2012년에 연방 차원에서 이뤄졌던 모든 선거에 사용된 돈의 40퍼센트 이상을 최상위층 부자가 지불했다. 여기서 최상위층은 상위 1퍼센트나 0.1퍼센트가 아니라 0.01퍼센트를 말한다. 미국에서는 대통령 후보 경선(예비선거) 과정이 길기에 선거 초기 자금이 특히 중요하다. 2016년 대통령 선거운동이 공식적으로 시작될 때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선 후보들에게 기부된 돈의 거의 절반이 불과 158개의 부유한 가문에서 낸 돈이었다. 대부분 금융과 에너지 부문에서 재산을 모은 가문들이었다. pp. 366-367.



대의정치가 과두정치에 사로잡힌 것이 부패의 증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바람에 정부가 공공선에서 멀어지고 또 시민들로서는 자신들이 통치를 받는 방식에 대해 의미 있는 발언을 할 기회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일반적 대중과 부유층이 정부에게 바라는 것이 확연이 다르다. 예를 들어 미국인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87퍼센트는 ‘공립학교를 정말 좋게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것’에 정부 예산이 지출되길 바라지만, 백만장자 가운데 35퍼센트만이 여기에 동의한다. 전체 국민의 3분의 2가 ‘모든 사람이 일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정부가 노력해야 한다’라고 생각하지만, 백만장자들은 다섯 명 중 한 명만 그렇게 생각한다. 대중은 대기업 규제가 강화되길 바라지만 부자는 그렇지 않다. pp. 367-368.



대중과 부자 의견이 갈릴 때는 부자 의견이 채택된다. 정치학자 벤저민 페이지와 마틴 길렌스는 이익집단, 부유한 미국인, 일반 시민 중에서 미국의 공공정책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는 집단을 측정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두 사람은 1981년부터 2002년까지 기간에 일자리와 임금, 교육, 건강보험, 시민권, 경제 규제, 문화 관련 쟁점, 외교 정책 등의 분야에서 제안된 약 2,000개의 정책 변화를 분석해 세 집단 중 어떤 집단이 최종 결과에 영향을 미쳤는지 살폈다. 그들은 “일반 시민은 연방정부 정책에 거의 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라는 불안한 결론을 얻었다. 조사 결과 일반 시민 중 3분의 1정도만 자기 뜻을 관철했다. 하지만 이조차도 그들의 견해가 이익단체나 부자 견해와 일치할 때에만 가능했다. 더 나은 학교 환경, 최저임금 인상, 기후변화에 대한 조치 등에서 압도적 다수 시민이 정책 변화를 선호하든 소수 시민만이 정책 변화를 선호하든 간에 정책 변화에 사실상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일반 시민은 정책 수립 과정에서 의미 있는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그들 목소리는 부유하고 조직적인 이익집단, 특히 기업의 목소리에 묻혀 아예 들리지 않는다.



이 연구를 통해 미국인 대부분이 느끼는 사실, 즉 자기 목소리는 중요하지 않으며 일반 시민은 자기가 통치되는 방식에 대해 의미 있는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깊어진 개인의 자치 권한 박탈 현상이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의 핵심이다. 이것은 수십 년 동안 금융 주도의 세계화가 낳은 소득과 부의 엄청난 불평등이 시민의식 차원에서 초래한 부정적인 결과들 가운데 하나다. pp. 368-369.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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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 -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불편한 공존
마이클 샌델 지음, 이경식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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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많은 미국인은 임금노동(wage labor), 즉 임금을 받을 목적으로 수행하는 노동은 자유라는 개념에 부합하지 않다고 여겼다. 당시와 시대적으로 멀리 떨어진 지금 관점에서 보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임금을 놓고 논쟁을 벌일 때는 주로 최저임금이나 일자리에 대한 접근성, 임금 격차나 작업장 안전성 등이 쟁점이다. 오늘날 임금노동이라는 개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19세기에 많은 미국인이 이의를 제기했다. 공화주의적 자유 개념에 따르면 임금을 받을 목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자유로운지는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과 임금의 교환에 당사자가 자발적으로 동의한다는 점에서 보면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부당한 압력이나 강요만 없다면 임금노동은 자발적으로 계약을 맺는다는 의미에서 자유노동이다. 하지만 노동을 임금과 교환하는 자발적 합의조차도 자유노동에 대한 공화주의적 개념을 충족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경제적 독립성이 시민의식에 필수적 전제조건이라는 오랜 공화주의의 신념을 갖고 있었다. 유럽의 무산계급인 프롤레타리아처럼 고용주가 지급하는 임금만으로 생계를 꾸려야 하는 사람들은 자유 시민으로서 어떤 문제를 스스로 판단할 도덕적, 정치적 독립성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한때 제퍼슨은 오로지 자작농이라는 신분만이 견실한 공화주의 시민에게 필요한 덕목과 독립성을 길러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9세기 초 수십 년 사이에 공화주의자 대부분은 농장에서뿐만 아니라 공장의 작업장에서도 시민적 기본 소양이 배양된다고 믿게 되었다. pp. 96-97.



임금노동을 둘러싼 논쟁은 노예제와 관련된 투쟁 때문에 한층 더 첨예해지고 복잡해졌다. 노동운동과 노예제 폐지운동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두 운동 모두 일과 자유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제기했지만, 양측 진영은 서로에 대해 크게 공감하지 않았다.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반대하는 임금노동을 남부 노예제와 동일시함으로써 자기주장을 극대화했다. 실제로 그들은 임금노동 체계를 ‘임금노예제(wage slavery)’라고 불렀다. 임금노동은 노동자를 가난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공화주의적 시민의식에 반드시 필요한 경제적, 정치적 독립성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노예제와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브라운슨은 “임금은 노예 소유자가 감당해야 하는 온갖 비용과 말썽과 증오 없이도 노예제의 모든 이점을 별다른 양심의 가책 없이 누일 수 있게 해주는 교활한 악마의 장치다”라고 규정했다. 임금노동자는 남부의 노예보다 더 극심한 고통을 겪는 것은 물론, 나중에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자본가가 될 가능성도 거의 없었으므로 노예보다 자유롭다고 할 수도 없다는 말이었다. 브라운슨은 임금노동이 자유와 양립하고자 한다면 독립성 확보를 보장하는 일시적 조건의 임금노동을 만드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우리의 동료 시민 가운데 그 누구도 임금노동자로 평생 힘들게 살아가는 운명을 짊어지는 계층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임금노동을 용인해야 한다면 반드시 조건 하나가 전제돼야 한다. 어떤 노동자가 인생의 어떤 연령대에 도달해 자기를 잡아야 할 때, 자기가 가진 돈으로 농장이든 가게든 간에 자기 소유의 작업장을 마련해 독립적 노동자가 되기에 충분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다.” pp. 101-102.



하지만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임금노예제라는 개념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노동 옹호론자들과 달리 시민적 자유관이 아니라 자발주의적 자유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예제도가 도덕적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한 이유로 노예들의 경제적, 정치적 독립성의 부족을 거론하지 않았다. 그보다 노예가 자기 의지에 반해 노동하도록 강요받는다는 것을 문제 삼았다. pp. 103.



토지 개혁을 주장했던 조지 헨리 에번스는 노예제 폐지론자들이 개혁의 전망을 한층 넓게 확장하도록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에번스는 “빈곤과 질병, 범죄, 매춘 등을 몰고 오는 임금노예제는 노예를 재산으로 여기는 남부에 존재하는 제도보다 삶과 건강과 행복에 훨씬 더 파괴적이다. 그러므로 노예제를 임금노동제로 대체하려는 사람들이 기울이는 노력은 방향 자체가 매우 잘못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에번스는 두 가지 형태의 노예제를 해결할 방법으로 공공 토지에 주택을 지어 정착민에게 무료로 나눠주는 정책을 제안하고 촉구했다. 무료로 제공하는 토지는 빈곤을 줄일 뿐만 아니라 임금노동이 만들어낸 시민의 종속성도 줄여줄 것이라면서 “이 정책은 한 형태의 노예제를 다른 형태의 노예제로 단순히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형태의 노예제를 완전한 자유로 대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pp. 104-105.



남부 노예제의 선도적 이론가였던 조지 피츠휴는 북부 노동 지도자들이 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북부의 임금노동자는 남부 노예보다 자유롭지 않다면서 “노예주가 노예를 부리듯이 자본이 노동을 부린다”라고 주장했다. 단 하나 차이가 있다면 남부의 노예주는 노예가 늙고 병들어도 이들을 책임지고 보살피지만 북부 자본가는 이런 책임을 전혀 지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가진 자본 덕분에 노동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한 노예 소유주다. 그런데 노예주이면서 노예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노예주에 불과하다. 당신을 위해 일하고 당신 소득을 창출하는 사람은 당신 노예다. 그것도 노예가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한 노예다.”



피츠휴에 따르면 끊임없는 가난과 불안 속에 살았던 북부의 임금노동자는 남부 노예보다 실제로 자유롭지 않았다. 남부 노예는 적어도 나중에 늙고 병들 때 노예주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유노동자는 일을 하든가, 굶어 죽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자유노동자는 흑인 노예보다 더 노예처럼 살아간다. 노예보다 돈도 적게 받으면서 더 오랜 시간을 더 힘들게 일해야 하고, 또 노동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자기를 돌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은 인간 노예주가 노예를 대하는 것보다 한층 더 강력하고 완벽하게 강제력을 행사한다. 자유노동자는 일하지 않으면 굶어야 하는 일상을 살아가지만, 노예는 일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노예주가 먹여살리기 때문이다. 비록 자유노동자 각자에게 특정한 주인이 따로 있지는 않지만, 그들 자신은 가진 것 없이 가난한데 다른 사람이 자본을 가지고 있는 상황 때문에 노예가 된다. 이 노예는 주인이 없는 노예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주인이 너무도 많고 심지어 주인이 없는 것만큼이나 상황이 나쁜 노예이기도 하다.”



피츠휴는 북부의 토지 개혁자들과 같은 주장을 하면서 자본가가 재산을 독점함으로써 북부 노동자에게서 자유를 빼앗는다고 비난했다. “자유 사회라는 거짓 이름으로 불리는 것의 정체는 매우 최근에 발명된 것이다. 이것은 약하고 무지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소수가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세상에서 자유롭게 만들겠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재산이 없는 사람은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단 하나의 권리도 누리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좁은 방과 축축한 지하실 그리고 혼잡한 공장에서 더러운 공기를 마실 수밖에 없도록 방치된 사람은” 머리를 누일 곳조차 없다. “사유재산이 토지를 독점했으며 가난한 사람의 자유와 평등을 모두 파괴했다. 가난한 사람은 삶을 안전하게 이어갈 안전판이 박탈됐다. 고용과 충분한 임금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데, 그 누구도 이 사람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고용을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피츠휴는 만일 누군가가 노예라면 노동자로 살 때 못지않게 의존적 삶을 살겠지만, 적어도 의식주는 걱정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또 노예제 폐지론자들의 주장에 반박하면서 사실상 노동운동의 자유 개념을 인용했다. 예컨대 “자유노동자라는 잘못된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살아가기에 충분한 재산이나 자본을 줘서 그들을 실질적으로 자유롭게 만들어라. 그런 다음 우리 남부에 흑인을 해방하라고 요구하라”라면서, 그렇게 하기 전까지는 북부의 임금노동자가 남부의 노예보다 자유롭지 않다고 주장했다.



다른 남부 사람들도 비슷한 논리로 노예제를 옹호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상원의원 제임스 헨리 해먼드는 전 세계에서 오로지 미국 남부에만 노예제가 남아 있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그렇다, 명칭 자체는 폐지됐다. 하지만 실상은 그대로다”라고 지적했다. “날품팔이 노동으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 자신의 노동을 시장에 팔아 자기가 얻을 수 있는 최대치를 얻는 사람, 이런 사람은 여전히 현실에 존재한다. 요컨대, 육체노동을 하며 돈만 주면 뭐든지 하는 사람 또는 이른바 ‘직공(operative)’은 본질적으로 노예다. 그런데 당신들의 노예와 우리 노예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우리의 노예는 평생 고용이 보장되고 보상도 잘 받기에 굶주릴 일도 없고 구걸할 일도 없다. 하지만 당신들의 노예는 하루 단위로 고용되고 보살핌을 받지 못하며 쥐꼬리만큼밖에 보상받지 못한다.” 이는 북부 도시 거리마다 늘어선 거지 행렬이 증명한다. pp. 106-109.



남북전쟁이 끝나고 임금노동 체계의 옹호자들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자유노동이라는 시민적 개념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겠다는 시도를 포기하고 자발주의적 개념을 채택한다. 그들은 임금노동이 도덕적이고 독립적인 시민을 길러내는 수단이 아니라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에 맺어진 자발적 계약의 산물이기에 자유 개념과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로크너 시대의 대법원이 헌법과 일치한다고 판단한 것이 바로 이런 자유 개념이다. 미국 역사에서 1897년경에서 1937년에 이르는 시기에, 1895년 뉴욕주는 제과점 점원의 근무시간을 1일 10시간, 1주 60시간으로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3년 후 로크너라는 제과점 주인이 해당 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벌금형을 받았다. 로크너는 종업원들에게 노동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상호 합의에 따라 노동시간을 정했다고 항변했다. 즉 그 법률이 ‘계약의 자유’라는 대원칙에 어긋나기에 무효라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해 미국 연방대법원은 근무시간 제한이라는 수단이 공공복리 증진이라는 목적과 합리적으로 연관되지 않고, 오히려 제과점 점원과 주인 사이의 계약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그 법률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이 전환을 계기로 시민의식의 정치경제학에서 경제 성장과 분배 정의의 정치경제학으로, 공화주의적 공공철학에서 절차주의적 공화주의의 등장을 알리는 자유주의적 버전으로 바뀌었다. pp. 100.



공화당의 핵심적 이념은 자유노동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공화당의 한 대변인은 “공화당은 노예제에 반대하는 정당일 뿐만 아니라 자유노동을 대변하는 정당으로서도 국가 앞에 서 있다’라고 선언했다. 1830년대에 공화당이 수행하던 노동운동에서 규정한 자유노동은 영구적 임금노동이라기보다 경제적 독립이라는 궁극적 목표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거칠 수밖에 없는 노동이었다. 노동의 존엄성은 고용주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는 수준으로 지위를 높일 기회가 보장된다는 데 있었다. 공화당은 북부 사회가 이러한 사회적 이동성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칭송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청년은 자기 소유의 농장을 살 돈을 모을 때까지만 돈을 받고 일한다. 또는 당신이 원하는 표현을 쓰자면 ‘노동’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고서 그는 고용주가 된다.”



링컨도 임금노동을 비판하는 남부의 비판자들이 바로 이런 자유노동 체계의 특성을 간과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자신이 부리는 노예들이 북부의 자유인보다 훨씬 더 잘 산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북부의 노동자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들은 노동자가 영원히 노동자 계층으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계층은 없다. 작년에 남에게 고용돼 일하던 사람이 올해는 독립해 일하고 내년에는 다른 사람을 고용할 것이다.” pp. 117.



링컨은 평생을 임금노동자로 보내는 사람은 노예나 마찬가지라는 발상에 의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유노동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은 임금을 받고 일하겠다는 노동자의 동의가 아니라 임금노동자라는 지위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자영업자 지위로 올라설 수 있는 가능성과 기회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자유노동 제도의 개방성을 확신했기에 자립에 실패한 사람들은 “의존적 성격의 소유자이거나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거나 또는 드물게 있는 불운한 사람”일 뿐이라고 했다. 반면 열심히 일해 가난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신뢰를 받으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만큼이나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pp. 117.



그렇지만 1870년을 기준으로 생산에 종사하는 미국인 중 3분의 2가 자기 생계를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임금노동자였다. 독립성과 자영업을 찬양하는 나라였던 미국에서 자기 농장에서 일하거나 자기 소유의 가계를 운영하는 사람 비율은 세 명 중 겨우 한 명뿐이라는 말이었다. pp. 120.



임금노동에서 비롯되는 문제는 임금노동이 키우는 가난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시민적 역량에 미치는 피해, 즉 그것이 만들어내는 “비굴한 어조와 비굴한 사고방식”이다. 노동운동 해결책은 과거의 농업사회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노동에 따른 이익을 분배하고 스스로 통치하는 협동조합 방식으로 임금 체계를 대체함으로써 산업 자본주의를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그는 노동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촉구했다. “임금체계 또는 노예적 굴종의 체제라고 불러야 옳을 이 체제가 노예제나 농노제처럼 완전히 소멸할 때까지, 돈만 주면 무엇이든 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때까지 여론 환기의 선동과 단결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pp.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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