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할례’라고 불리는 여성 성기 절제는 잔혹하고 위험하며 수백 년 전부터 이어져내려 온 현재의 습속입니다. 대체로 아프리카 북부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이 시술은 면도날로 여자 아이나 청소년의 음핵이나 포피, 음순 같은 성기 중 일부나 전부를 도려내는 악습입니다. 극단적으로 외과수술을 통해 질 입구를 좁히거나 아예 막아버리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이 악습은 여성 순결을 보장해 적합한 혼인 상대로 만들기 위한 수단입니다. 할례를 받지 않은 여아와 청소년은 매력적인 결혼 상대가 아니며 부도덕한 존재로 취급받습니다. 심지어 해당 소녀뿐 아니라 가족의 미래까지도 위협받는 일로 간주됩니다. 이집트의 어느 조사에 따르면, 할례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엄마일지라도, 결혼 적령기 딸이 할례를 하지 않았을 경우 혼인 상대로 꺼려질까봐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엄마들은 딸의 건강과 생명을 걸고서라도, 딸의 미래를 지키고자 할례를 시킵니다. 

















지금 북아프리카 지역의 할례가 순결의 상징이라면, 원시사회에서는 순결이 바로 악덕이었습니다. 원시시대 처녀는 애를 못 낳는다는 말이 돌까봐 두려웠지, 순결을 잃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혼전 임신은 애를 못 가질 거란 의구심을 단번에 잠재우고 아이를 잘 낳을 거란 보장이기에, 남편감을 찾는데 해보다 득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처녀인 여자는 인기가 없어 멸시 당했습니다. 캄차달족(러시아 동부 캄차카 지방의 원주민족) 신랑은 신부가 처녀인 사실을 알게 되면 장모에게 ‘딸을 막 키웠다’고 호되게 화냈습니다. 순결이 결혼에 걸림돌이 되는 곳은 상당수 달했습니다. 그래서 결혼에 방해가 되는 이 금기를 깨고자 아가씨들이 낯선 이방인에게 스스로 몸을 맡기는 경우도 더러 있었습니다. 티베트에서는 엄마들이 자기 딸을 처녀에서 벗어나게 해 줄 남자를 찾았으며, 인도 말라바르에서는 아가씨들이 스스로 지나가는 행인에게 간청하기도 했습니다.



원시 사회에서는 혼전 관계를 맺는 게 다반사입니다. 그래서 성생활을 절제하느라 욕망이 쌓이는 일이 없고 따라서 아내를 선택할 때도 욕망은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원시 사회엔 성적 욕구가 생기면 지체 없이 바로 충족할 수 있었기에 미의식이 그다지 강하게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사물이 아름답게 보이는 건 상당 부분 상상력에서 비롯되는데, 성적 대상을 상상력으로 미화시킬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근대 이후 젊은이들은 욕망을 지체 없이 충족하지 못하기에 사랑을 이상화하고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게 되는데, 원시 사회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원시부족에게는 사랑에 관한 노래를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애정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할례나 순결 같은 습속은 사회적인 성(性)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성은 생물학적인 성(sex)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문화적인 성, 곧 사회에서 창조되는 성(gender)으로 ‘구현’되거나 ‘강요’됩니다. 정치철학자인 아리스 마리온 영(1949~2006)은 『계집애 같이 던지기』(1980)에서 남녀 몸동작이 왜 서로 다른지 설명해줍니다. 여성이 공이나 돌을 던질 때 흔히 취하는 ‘썩 마음 내켜 하지 않는 듯 보이는 몸동작‘은 생물학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여성이 어려서부터 자신 신체를 ‘다른 사람, 즉 나중 아기를 위한 몸’으로 여기도록 만드는 담론이나 관습에 물든 산물이라고 영은 주장합니다. 여성에게 부여된 규범이 여성 몸동작이나 움직임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구현됩니다.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대다수 여성이 ‘육체적으로 불리한’ 존재가 됩니다. 



신생아 때부터 습득하는 젠더 학습은 무의식에서 일어납니다. 아이가 스스로 사내아이 아니면 여자아이로 규정하기 전에 다양한 형태로 암시를 받습니다. 가령 신생아에게 남녀 성인은 서로 다르게 인식됩니다. 아기는 여성과 상호작용하면서 맡게 되는 화장품 향내를 남성 냄새와 다르게 연상합니다. 부모나 의사의 머리 모양 등에 나타나는 차이가 신생아의 양육과 학습 과정에서 암시로 작용합니다.



두 살 무렵이면, 아이는 젠더가 무엇인지 부분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아이가 접촉하는 장난감이나 그림책, 텔레비전 프로그램 같은 모든 것에서 기존 고정 관념인 남성과 여성 차이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쯤 되면 아이는 자신이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인지를 파악하게 되며, 또한 주변사람을 정확히 성별로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분명한 사실은 젠더 사회화의 위력이 아주 막강하다는 사실입니다. 젠더에 대한 도전은 현실을 뒤엎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일단 젠더가 ‘주어지면’, 사회는 우리 각자 개인이 ‘여성’ 또는 ‘남성’으로 행동하길 기대합니다. 
















원시시대에는 너무 말라 몸이 나약한 여성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경제적인 자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결혼 자체를 아예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남성과 여성이 결혼을 해 힘을 합쳐 일하면, 각자 혼자 일할 때보다 더 부유해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원시 사회에서 남성은 값싸게 여성이라는 노동력을 얻고, 양육의 덕을 보고, 때맞춰 밥을 먹기 위해 결혼했습니다. 애정은 결혼과 전혀 별개였습니다. 



결혼은 단지 상업적인 거래일 따름입니다. 배우자를 고를 때 감정을 누르고 실용적인 면을 더 강조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실용성보다 감정을 우선시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일 수 있습니다. 남녀가 찰나의 성적 욕구에 사로잡혀 한평생 서로 옭아매며 사는 우리 관습을 원시인들이 본다면 왜 그렇게 사는지 우리에게 설명을 요구할 지도 모릅니다. 체스터필드 경(1694~1773)의 지적처럼 “사랑의 행위에 있어서 기쁨은 순간적이고, 입장은 우스꽝스럽고, 비용은 지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개 지구상 어디서나 결혼은 가족이 상업적으로 계약한 매매혼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여겼습니다. 경제적인 토대를 기반으로 하는 결혼이 가장 건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딸은 일의 대가로 제공되는 존재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성경 <창세기>(29:20)를 예로 들면, 야곱은 라헬과 결혼할 생각에 7년 동안 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랑은 결혼예물이나 돈을 여자에게 보냈고 신부 아버지는 딸의 혼수금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매매혼 흔적이 우리 결혼반지에 남아있습니다. 결혼할 때 반지를 주는 풍습은 로마에서 시작됐는데, 아내를 돈으로 사는 매매혼 때문에 결혼할 남성이 대금결제 증거로 철제 반지를 주었습니다. 

 















인도 역시 근래까지도 연애결혼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당사자들이 서로 선택한 결합에 ‘간다르마 결혼’이라고 이름을 붙이고는 ‘욕망의 열매’라고 낙인찍었습니다. 그런 결혼이 허용은 되었으나 존중받지 못했습니다. 서로에 대한 감정은 변하기 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결혼이란 변덕스러운 개인적인 선택인 낭만적인 사랑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가 열정에 빠져 결국 환멸과 쓰라린 마음으로 끝나게 될 결합에 이르기 전에 서둘러 결혼을 주선해야 했습니다. 

















우리나라 조선 또한 혼인은 개인 뜻이 아니라 집안 이해관계로 결정되었습니다. 부모는 충분히 숙고한 뒤 환경이 비슷한 사람과 혼인을 맺어주었습니다. 부부는 경제적, 문화적인 배경이 유사했기에 근대 이후처럼 감정으로 대립하거나 갈등하는 경우가 적었습니다. 



조선에서는 남성 집안과 여성 집안이 비교적 대등하게 혼인했기에 남성이 여성 집안에 의존하기도 했습니다. 남편에게 아내는 단순한 아내가 아니었습니다. 처가의 대표자였습니다. 조선에서 여성들이 혼인 후에도 자신 성(性)씨를 유지한 것도 바로 여성 집안의 대표자라는 표시였습니다. 강력한 중국 영향 아래 있었지만 조선에 전족이 없었던 이유도 비슷합니다. 조선 여성은 남편 애정에 따라 위치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집안에서 안정적인 지위를 확보한 조선 여성은 성적인 이미지에 집착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조선 시대 여성은 중국과 달리 집안 공동 운영자의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남녀 사이 일어나는 사랑의 감정은 시대에 따라 달라집니다. 18세기 이전 유럽에서조차 사랑이란 우발적인 일이라고 굳게 믿었기에 이 불안정함을 기반으로 하는 남녀 결합을 거부했습니다. 사랑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너무 강했던 나머지 남녀 관계에 사랑이 우선시되지 않았습니다. 유럽 중세뿐 아니라 로마법도 결혼 목적이 아이를 출산하기 위한 것이라 명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결혼할 남성은 여성을 부양할 만큼 부유하다는 사실만 진지하게 증명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18세기 후반기에 이르자 열애에 빠지는 일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 상태에서 비롯되는 경험이며, 낭만적인 사랑에 빠진 커플이라면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리고, 가족으로서 사적인 만족을 지속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인간 성향이라는 생각이 생겨나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인류 발명 중 하나입니다. 



낭만적인 사랑이란 그 대상을 이상화함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설명할 수 없는 게 되었습니다. 누구하고든 사랑에 빠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또한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부추겨져 사랑에 대한 모든 전제 조건이 철폐되었습니다. 낭만적인 사랑은 이를 다루는 소설의 대중화와 연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소설의 저변이 확대되면서 너나할 것 없이 낭만적인 사랑이 우리에게 각인되었습니다. 

















역사학자 존 보스웰(1947~1994)은 오늘날의 낭만적인 사랑이 얼마나 ‘자연스럽지’ 못한지 언급합니다. 예전에 혼인은 집안 재산을 세습하려는 경우 아니면, 집안 농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얻고자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낭만적인 사랑이란 잘해 봐야 약점으로 치부되거나, 최악의 경우 질병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 태도와는 정반대입니다. 

 


오늘날 우리 대다수에게 당연히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지는 낭만적인 사랑은 일상적인 관행이 아닙니다. 낭만적인 사랑에 기반 한 관계는 매우 최근까지 유럽 사회에서 보편화되지 못했으며, 물질적이고 실용적인 이유가 우선시되는 그 밖 문화권에서는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관행입니다. 예전엔 거의 경제적인 목적으로 부모나 일가친척이 소개한 맞선 형태로 결혼하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지금이 예외적인 시기입니다.



낭만적인 사랑은 만남 초기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사랑에 빠지는 일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할 경우 미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시간을 두고 발전하고 변해갑니다. 시작할 때 느낌만으로 발전하고 변하는 사랑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우리가 ‘원시인’보다 미성숙하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낭만적인 사랑은 감정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이제 낭만적인 사랑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삶의 선택지가 다양해졌습니다. 예전에는 이혼하기가 어렵거나 불가능했지만, 낭만적인 사랑에 빠져 결혼한 남녀는 혼인 생활이 원만하지 않을 경우, 더 이상 삶의 동반자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랑’ 같은 추상적인 단어가 뜻하는 애정 유형이 항상 같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일을 단어 하나로 표현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있다고 가정하려 듭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1889~1995)은 이런 가정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사랑’이라는 욕망은 관계나 애정 유형이 너무나 다양해 단일하고 공통된 속성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사랑’이라는 말이나 관념을 가지고 있는 민족은 흔하지 않았습니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비슷한 말은 있지만 남성과 여성 간의 특별한 관계와 감정을 뜻하는 개념은 거의 없습니다. 한자의 애(愛)도 원래 고전 용례에서는 ‘아끼는 마음’, 가령 백성을 아끼는 마음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었습니다. 일본어에서 근대 이전에 많이 등장하는 이로[色]라는 말은 게이샤나 유녀들과 관계를 이르는 말로 지금 ‘사랑’과는 아주 다른 뜻이었습니다.
















사랑은 대상에 대한 욕망이나 볼 때 느끼는 행복이나 각별한 감성, 상대에 대한 배타적인 의리, 보호하고 싶은 소망 등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런 다양한 현상이 사랑입니다. 여러 가지 현상을 제외하고 사랑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통된 속성을 정의하려는 목표 자체가 아예 잘못된 일일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사랑’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실체를 다루는 생물학에서조차 공통된 특성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거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꽃’ 같은 정도는 아주 간단하게 그 정의와 특성을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꽃은 그 크기나 모양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아주 다양합니다. 꽃을 피우는 식물을 속씨식물이라고 하는데, 종의 수는 대략 26만여 종이나 됩니다. 나비나 나방, 딱정벌레, 벌, 베짱이, 메뚜기 같은 곤충은 100만 종이 훌쩍 넘습니다. 딱정벌레만 해도 그 종류가 4만5,000종이 넘고 지금도 매일매일 새로운 종이 발견되는 실정입니다. 생물은 무척 광범위하고 다양하기에 한 가지 이름으로 불릴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작가 룰루 밀러의 책 제목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2020)처럼 말입니다.
















자연이나 인간 삶은 보편적인 이름 하나로 단순화하기엔 너무나 구체적입니다. 세상은 추상적인 무엇인가로 채워져 있는 공간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으로 가득합니다. 자연과 인생은 지극히 넓은 데다 깊고 오묘합니다. 어떤 것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현상으로 ‘한정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삶의 다양성과 해석의 주관성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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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당시 정치가였던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1748~1836)는 시민이 자신 경제 활동에 대부분 시간을 보내는 근대 산업사회에서 각 시민이 공적 업무에 지속적으로 참여할 시간을 마련하기 쉽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게다가 공공 업무가 날로 전문적인 식견을 요구하게 된다는 점에서 대의제가 바람직하다고 보았습니다. 시이예스는 대의제란 선거로 권한을 위임받은 전문가 집단이 공공의 관심사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시간을 바치도록 구성된 정부 형태로서, 근대 사회 조건에 적합하다고 보았습니다.



시이예스 지적처럼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모든 평의회위원이나 판사 뿐 아니라 대부분 행정관도 전문가가 아니라 보통 시민이 맡았습니다. 실상 아테네인은 대의제를 모르진 않았으나 거의 대의제를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시이예스 논거와는 달리 아테네인들은 비전문가가 정치를 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테네인은 명성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 지배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실제 정치에서 모든 ‘보통’ 시민의 확인을 얻는 걸 중요시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의 주요 관심은 통치의 능률보다 시민 의사를 존중하는 민주주의에 있었습니다. 어떠한 행정이나 입법, 사법 문제에서도 최종 책임은 시민에게 있었습니다. 가령 민회 법령도 ‘민회’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민’에 의해서 통과된다는 공식용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전문성을 중시하지 않은, 아마추어 중심이었습니다. 민주주의가 발달할수록 정책결정에 특별한 전문성을 필요하다는 관점에서 다수의 일반적인 상식에 바탕을 둔다는 관념으로 옮겨갔습니다. 이것이 추첨제나 윤번제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모든 관리 선출이나 법정 구성은 추첨제로 결정되었습니다. 추첨에 따라 가난한 사람도 취임하여 보수를 받을 수 있으며 재판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추첨은 기회 균등을 의미했습니다. 
















아테네인이 내린 가정은 만약 전문가가 정부에 관여하면 불가피하게 그들이 지배하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테네인들은 집단의 정책 결정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없는 지식과 기술을 가진 것 자체가 권력의 근원이 된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지식과 기술을 가진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이점을 갖게 된다고 판단한 듯합니다. 전문가로 이루어진 평의회, 즉 전문 행정관이 민회를 좌지우지할지도 모르고, 법정에서 전문가들은 다른 판사들의 중요성을 축소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문제가 헤아리기에 너무나 복잡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에 정치는 수많은 싱크탱크와 법률가, 회계사, 대학교수들이나 감당해야 할 문제라고 여깁니다. 시민이 바로 정치 주체라고 상상하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이 정치 주체라는 사실을 잊은 우리는 자신을 대표하지 못한 채 오직 전문가들이 내린 처방에 따라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만 셈하게 됩니다. 이런 생각이 옳다고 여긴다면, 차라리 가장 똑똑한 정책 전문가들이 모인 싱크탱크에 아예 정치를 외주 주면 되지 않을까요? 
















전문가에 의지하는 일은 민주주의 정신에 어긋납니다. 민주주의란, 세부적이고 기술적인 문제는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할 수도 있지만, 일반 시민이 사회의 중대한 결정을 직접 내릴 능력이 있다는 생각에 기반 합니다. 일반 시민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그 어느 전문가보다도 명확히 이해하는 만큼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전문가에 대해 잘못된 가정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문가가 일반 시민과 같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기에 우리를 대변해줄 거라 믿고 맡겨두어도 괜찮다는 가정입니다. 우리는 전문가는 객관적이고 사심이나 편견이 없이 판단을 내릴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인간 마음이란 부자인지 가난한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권력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더욱이 전문가들은 자신이 내린 결론의 타당성을 지나치게 확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각 분야 전문가는 다른 분야 전문가의 조언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 전문가가 함께 결정해야 하는 문제는 각 전문가의 목소리가 너무 커져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한 분야만 파고든 전문가보다는 전문 지식을 조금씩 공부해가며 자신 견해를 개발한 일반인이 종합적인 시각으로 문제를 더 잘 해결할 수 있습니다(전문교육을 받으러 입학한 대학에서 교양교육까지 시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전문가들이 인간의 새로운 상상이나 행동, 능력을 제약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과거 원리에 갇혀 있는 전문가들은 세상에서 가장 상상력이 부족한 자들이거나 상상에 금기를 부여하고 차단해야만 자신 지위를 보존할 수 있는 자들이다.” 그는 자신 분야를 빗대어 이렇게 말합니다. “경제학은 경제학자들이 연구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경제적인 이익이라는 동기가 절대화되어 버린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러한 잘못된 믿음을 다시 상대화할 정신적인 능력을 잃어버리고 상상은 우매한 제약에 갇혀버렸다.” 

















마이클 샌델은 고대 아테네 같은 사례뿐 아니라 최근 사례를 보더라도 “최고의 인재들이 저학력자 시민들보다 통치를 잘한다는 생각은 능력주의의 오만에서 비롯된 신화”일 뿐이라고 지적하며, 영국 사례를 듭니다. 1945년 윈스턴 처칠(1874~1965)의 보수당을 눌렀던 영국의 클레멘트 애틀리(1883~1967) 내각은 장관 가운데 일곱 명이 탄광 갱부 출신이었습니다. 매우 유능하다고 평가받은 외무장관 어니스트 베빈(1881~1951)은 전후 세계질서의 설계자 중 한명이었습니다. 그는 열한 살 때 학교를 중퇴하고 노동조합 지도자로 성장했습니다. 하원 의장과 부수상을 지낸 허버트 모리슨(1888~1965)은 열네 살 때 중퇴하고 지방정부에서 일하며 명망을 쌓았는데, 런던의 대중교통 시스템을 개발한 공로가 컸습니다. 보건부 장관 어나이린 베번(1887~1960)은 열세 살에 중퇴한 뒤 웨일스에서 광부로 일했고, 장관이 되어서는 영국 국민의료보험 제도를 수립했습니다. 



20세기 영국에서 가장 개혁적인 정권으로 평가되는 애틀리 정부는 노동계급에 힘을 실어주었으며, 애틀리 전기 작가는 “영국의 새로운 사회계약에 쓰일 윤리 언어를 마련했다”고 평가했습니다. 마이클 샌델은 “정책 결정이 ‘스마트하냐 우둔하냐’ 문제로 여길수록 ‘스마트한 사람(전문가나 엘리트)’이 결정하고, 일반 시민이 토론과 결의를 하는 일에서 배제하는 게 옳다고 여겨지지 마련”이라며, ‘정치 엘리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정치인이나 기업가와 같이 제너럴리스트가 필요한 영역에서조차 스페셜리스트가 득세함에 따라, 우리 사회는 나아갈 방향을 상실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좁은 분야를 다루는 전문가는 전체를 다룰 수 있는 지성인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도 전문가가 사회 전반에 과도하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전문가 특유의 분열적인 사고가 오늘날 우리 사회 위기의 근본 원인이 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참여하는 시민이 주도하는 민주주의에는 직업 정치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정치철학자 클로드 르포르(1924~2010)는 ‘정치’(politics)와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을 구분했습니다. 그가 말한 ‘정치’는 오직 주어진 현실이 전부라는 생각을 가리킵니다. 이런 생각에 이르면 이미 주어진 세계 너머를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정치의 유일하고 정당한 대표/대의 장소는 의회일 따름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가 정당화하려고 애를 써도 일부 시민에게 오직 열등한 권리만이 부여되고 있는 게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온갖 불평등이 사라지는 ‘위험한 사태’가 벌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이 대의 민주주의의 DNA 자체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반면 ‘정치적인 것’은 이미 주어진 세계를 우연한 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정치’와 구분됩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전부라고 알고 있는 세계가 시작되고 또한 끝나는 계기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이는 주어진 현실을 넘어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이나 불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것’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원리와 규칙을 새롭게 창안하는 실천으로서의 정치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민주주의에 대해 전혀 다른 전망을 낳게 합니다.



현재 삼권 분립을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훌륭하고 지혜로운 인물이 대통령이 된다한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삼권 분립이란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잡더라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도록 막는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가 훌륭한 인물을 뽑아 옳은 일을 하도록 시키는 체제라고 오해할 경우, 선거는 ‘매번 실망하기 위해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하는 이벤트’밖에 될 수 없습니다. 훌륭한 사람을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뽑는 일보다 민주주의 제도를 제대로 발전시키는 게 훨씬 중요합니다. 사람이란 요소보다 제도라는 구조가 우선합니다. 

















민주주의를 ‘선거’라는 현존하는 방식에만 한정하여 규정하면, 부정투표 방지 등 절차상의 문제만 고민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정적이고 중요한 민주주의 본질은 이 한계 밖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한계를 깨닫지 못한다면, 기존 이데올로기만이 강화됩니다. 민주주의를 선거로 한정하여 우리가 희생당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선거는 귀족과두정입니다. 공자와 달리 노자는 ‘귀족과두정’을 반대했습니다. 공자와 노자 정치철학의 핵심 차이는 ‘귀족들의 존재 여부’에 있습니다. 공자 세계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귀족들, 아니 공자 기대치로 보면 ‘군자’ 개념입니다. 공자는 윤리학적 상상력이 풍부했지만 정치학적 상상력은 그만큼 풍부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노자가 꿈꾼 세계는 성왕과 성인이 국가를 통치하는 세계이며, 따라서 이 세계에서는 중간 귀족 계층 – 노자 용어로는 ‘현자들’ -이 존재하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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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이외 다른 분야라면 시대나 문화에 따라 서로 다른 ‘진리’가 있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과학은 회의주의(상대주의)를 거부합니다. 과학은 객관적입니다. 엄밀한 탐구 방법과 증거에 기초합니다. 과학자들은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검증합니다. 같은 결과가 반복해서 나오고 방법상 어떤 오류도 없다면 가설은 이론으로 살아남습니다. 이 규칙은 엄격히 적용됩니다. 따라서 과학에서 진리를 찾는 데는 특별한 변명거리가 필요치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어떤 진리를 말하는 것일까요? 같은 진리일지라도 시대마다 서로 달라 보였습니다. 과학사를 살펴보면 결국 잘못되었다고 판정되는 이론들이 널려 있습니다. 평평한 지구나, 천동설, 에테르, 우주상수 같은 오류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과학은 이런 오류를 인식하고 수정하면서 나아가지만, 시간이 지난 뒤 수정된 이론조차 오류로 판명되곤 합니다. 이처럼 과거에 완전무결해 보이던 과학 이론도 결국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기에 오늘날 이론들 역시 언젠가는 오류임이 밝혀질 수도 있습니다.



물리화학자 마이클 폴라니(1891~1976)는 과학이 계속 수정 가능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안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새로운 관찰과 실험이 과학의 발견 과정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대개 과대평가되어 있다.” 과학을 발전시키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라기보다는 알려진 사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 내지는 알려진 사실을 의미 있게 설명해주는 새로운 체계의 발견입니다. 이런 발전은 “종종 게슈탈트적 성격을 갖는 것이어서 전에는 아무 의미가 없던 무언가가 갑자기 ‘눈에 확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과학에 적용되는 이러한 관점은 정치나 경제, 법, 종교, 교육 같은 모든 분야에 적용됩니다. 삶의 어떤 측면이든 한 세대 진리가 다음 세대에 이르면 오류로 밝혀지는 일이 워낙 많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개인 삶에도 적용됩니다. 우리는 모두 나이가 들면서 자신 신념 중 일부를 버립니다. 우리는 이론을 세웠다가 어느 순간 그것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확신할 수 없는 감각이나 제한된 지적인 능력, 들쑥날쑥한 기억력, 복잡한 주변 환경 때문에 우리는 지속적으로 잘못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사실 과학이란 사물의 본질을 발견하려는 시도가 아닙니다. 현상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발견하려는 노력입니다. 곧 과학의 목표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 사이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실재는 그 관계뿐이다”라고 수학자 푸앙카레(1854~1912)는 말했습니다. 과학에서 제기되는 질문은 ‘왜’가 아니라 ‘어떻게’입니다. 우리는 열과 빛, 전기 그 자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관찰과 인식된 범위 안에서 발생하는 조건과 법칙을 알 따름입니다. 예컨대 우리는 전자가 질량과 전하가 있는 실체라고 생각하지만, 전자는 전자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일 뿐입니다. 전자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전자장 일부분에 해당하는 형상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전자의 물리적 속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과학자는 전자 같은 외부 대상을 연구하지만, 그들이 다루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닙니다. 과학자는 전자의 속성 같은 순전히 인위적인 수학 법칙만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 과학에서 말하는 자연 법칙이란 자연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자연을 이해는 과정에서 만들어 낸 ‘모델’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는 게 더 타당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매일 매순간 접하는 에너지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에너지가 정말로 무엇인지 오늘날에도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에너지는 우리가 관찰하는 외부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관찰한 것에 질서를 부여할 때 사용하는 하나의 개념일 수도 있습니다. 
















유전자 역시 구체적인 실체라기보다 상당히 추상적인 개념이며, 인간이 만들어낸 ‘모델’에 가깝습니다. 생명체 정보를 암호화한 디지털 코드, 즉 DNA 염기 서열 형태로 압축하여 세대에서 세대로 전달한다는 생각은 하나의 모델일 뿐입니다. 모델과 사실은 일치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인류가 구상한 가장 멋진 ‘이야기’ 중 하나일 뿐입니다. 물질의 참된 본질은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갈릴레이는 “낙하하는 물체에 가속도가 생기는 이유를 찾는 일이 연구에 필수가 아니다”라고 밝혔습니다. 과학 탐구는 궁극적 원인을 찾는 형이상학과 분리되어야 하며, 물리적 원인을 찾는 일은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과학자 임무는 원인을 캐는 게 아니라 현상을 수량화하는 것입니다. 뉴턴에게도 근본 원인을 설명하는 대신 수학을 강조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의 천체 역학에서 중요한 물리 개념은 중력인데, 중력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빈 공간에서 수백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두 물체가 서로 끌어당긴다는 설명은 신뢰할 수 없어 보였습니다. 중력의 물리적 실체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뉴턴에게 중력은 인력(引力)인 반면, 아인슈타인에게 중력은 공간의 휘어짐입니다).



과학은 근본 원리를 이야기하지 않을 뿐 아니라, 수학으로 서술하는데도 한계가 있습니다. 뉴턴 역학에서 행성 궤도 같은 이체(二體)문제는 멋지게 서술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삼체(三體)문제에서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립니다.*** 궤도를 도는 물체의 운동은 물리법칙으로 완전히 결정되지만, 우리는 결코 초기 조건을 충분히 알 수 없기에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긴 시간에서는 초기의 위치와 운동이 조금만 달라져도 현재의 태양계에서는 엄청난 차이를 만듭니다. 수학자들은 삼체문제를 풀려고 수백 년 몸부림쳤고, 일부 진전이 있긴 했지만 완전히 푸는 데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베이컨이 지적했듯 자연의 정교함은 인간의 꾀를 훨씬 넘어섭니다.



사람들은 날씨 같은 거대한 복잡계는 예측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중력으로 상호 작용하는 삼체처럼 단순한 복잡계도 마찬가지로 예측을 못 한다는 점입니다. 결정론과 예측 가능성을 순진하게 믿었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우주와 지구 영역을 떠나 생명과 인간 영역으로 넘어오면 우연은 더 만연하고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경제와 사회, 세포 행동에서부터 면역계와 유전자, 뇌, 의식 작용에 이르기까지 우리 시대 가장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데 다소 진전을 이루겠지만, 큰 진전은 매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과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자연의 법칙’이란 개념은 16~17세기 사이에 처음 나타났습니다. 그 이전에는 이런 개념이 거의 없었습니다. 16세기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만들어지고 여기에 ‘입법자로서의 신’이라는 기독교적인 생각이 접목되면서, ‘자연의 사물에까지 법을 만들어 부여하는 신’이라는 개념이 받아들여졌습니다. 데카르트가 자연의 법칙이란 개념을 처음 사용한 과학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신이 우주를 만들 때 법칙을 부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떻게 우주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자연법칙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감각과 이성 모두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라는 생물이 대체 어떻게, 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우주의 보편법칙을 이해하고 발견할 수 있을까요? ‘우주의 보편법칙을 이해하는 인간’이라는 관념은 우연히 진화한 인간 존재에게 너무나 많은 능력을 부여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우주에 대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인간에게 우주가 이해된다는 사실”이라고 말했습니다. 

















우주 역사 138억 년을 1년으로 보면, 1월 1일 0시에 빅뱅이 일어나 우주가 탄생했습니다. 지구는 9월에야 생겼습니다. 지구에 생명체가 생긴 때는 9월 25일쯤입니다.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21시 45분에야 인류는 두 발로 걷기 시작했고 23시 59분 59초경에 갈릴레이가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처음 올려다보았습니다. 근대 과학의 역사는 우주 달력에서 단 1초입니다. 뉴턴 시대에도 그랬던 것처럼, 어느 시대 과학자든 자기 시대 과학을 최첨단이라고 여기면서 완성 직전 단계에 와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의 감각 기관 중 우리 눈만 보더라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눈은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눈이 아니라 뇌를 통해 사물을 봅니다. 우리 눈에 들어오는 시각 정보는 초당 11메가바이트에 달하지만, 우리가 정말 뇌로 ‘보는’ 것은 고작 초당 60비트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직 소수 정보만이 뇌로 이동합니다. 뇌는 정신이 쏟는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매우 빠른 속도로 나머지를 추측합니다. 우리는 망막으로 본 불완전한 대상을 상상으로 메워 생생한 대상으로 바꿔줍니다. 



시각이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망막과 상상이 함께 만듭니다. 그러한 과정을 우리는 의식하지 못합니다. 우리 뇌가 끊임없이 이미지를 산출하여 머릿속에서 세상을 만든다는 측면에서 우리가 깨어있더라도 뇌는 항상 꿈을 꾸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 뇌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습니다. 우리 뇌는 현실을 잘못 해석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합니다. 

















실재를 알기 위해서는 뇌 안에 이미 세계를 바라보는 기존 지식과 경험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눈을 통해 뇌에 들어온 신호는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합니다. 뇌는 무질서한 신호를 분류하고 재배열하고, 때론 무시하고 의미를 부여합니다. 실재는 뇌가 만들어 냅니다. 우리 두뇌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패턴에 맞도록 우리가 지각한 내용을 자동으로 끼워 맞춥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1889~1951)의 말을 인용하면, “당신은 보고자 하는 것만 보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세계를 그려냅니다. 우리 바깥에 독립된 외부 세계가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모든 것은 우리 마음의 반영이고, 우리가 만들어냅니다. 물리학자 스티브 호킹(1942~2018)은 “과학이란 제한된 일부 모형에 불과하며, 그 모형과 우리가 실제 얻은 관측결과를 관계 짓는 규칙의 집합일 뿐이다. 과학 이론은 우리 마음속에만 있을 뿐, 그 이외 어떠한 실재(그것이 무엇을 뜻하든 간에)도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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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클 폴라니가 보기에 이는 기독교의 산물입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에 개별적인 진리를 넘어서는 ‘초월적 진리’가 있다는 전통 내지는 이념을 심어주었습니다. ‘저 바깥에’ 존재하는 진리가 발견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폴라니는 과학의 전통 내지 객관적, 초월적 진리에 대한 추구의 기저에는 기독교 이념이 깔려 있다고 보았습니다.


** 양성자나 전자가 전하를 띠었다고 말할 때 중성자에 없는 에너지가 가득 차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하의 정의는 전하를 띤 입자가 다른 입자를 밀어내거나 끌어당길 때 전하를 띠었다고 간주됩니다. 어느 물리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하라는 것은 일종의 태도와 같다.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누구는 카리스마가 있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 삼체문제의 공간 상태는 18차원입니다. 우선 한 물체의 운동을 나타내려면, 6 가지 정보가 필요합니다. 3차원 공간이기에 위치를 나타내는 좌표 3개와 각 좌표의 속도를 나타내는 수 3개가 필요합니다. 전체 물체가 세 개이니, 이들 상태를 모두 나타내려면 6 X 3 = 18차원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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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심리학의 핵심은 우리 자아가 서로 충돌하는 부분들로 분열되어 있다는 점이 입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 몸에 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은 특정 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으면서도 종종 서로 다른 목적을 추구하는 위원 여러 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와 비슷합니다. 마음의 분할은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 마음은 서로 상충하는 목적을 갖고 작동하는 모듈의 결합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119 긴급구조대원이 들려준 기이한 사례가 이런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다리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을 구조하는 어느 대원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놀라운 일은 사람들이 차를 다리 한쪽에 세워두고, 차 문을 잠근 뒤 다리에서 뛰어내린다는 점입니다. 마치 다시 돌아올 것처럼 말이죠.”



다시 돌아올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차 문을 잠글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서로 다른 목적을 갖고 작동하는 모듈의 결합체라, 항상 차 문을 잠그라고 말하는 마음은 다른 마음에 영향받지 않습니다. 마음은 제각기 독자적인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현대 정신과학에서 이해가 안 되는 문제는 정신이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졌다는 성질이 입증되었다는 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마음의 본질이 입증되었음에도 어찌 된 일인지 다들 우리가 한결같이 일관된 사람이라고 믿는다는 점입니다. 혹은 일관된 사람이어야 한다고 남을 강요한다는 점입니다. 일관되지 않은 남은 믿을 수 없고 나도 남이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길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일관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이율배반적인 존재입니다. 뉴스를 보면서, 주택 공급이 안정화 되어 전반적으로 주택 가격이 낮아지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하다가도 내 집값이 떨어지는 건 참지 못합니다. 나이는 천천히 먹어야 하지만, 주말은 빨리 와야 합니다. 사람은 일관되지 않은 다중인격체입니다. 

 















또한, 프로이트의 양심 이론은 우리가 태어날 때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프로이트 역시 인간이 본래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생각을 거부합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 마음은 ‘원초아(이드)-자아(에고)-초자아(슈퍼에고)'로 구성됩니다. 초자아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결정합니다. 원초아가 인간 육체와 관련된 본능이라면, 초자아는 사회에서 배우는 규범이 내재된 상징입니다. 



프로이트는 초자아에서 생긴 두려움이 죄책감을 만들어낸다고 보았습니다. 초자아는 기본적으로 자아에 대한 검열자나 재판관 역할을 합니다. 비록 양심의 명령이나 도덕적인 자유의지인 듯 보이지만, 결국 사회에서 형성된 초자아가 검열하는 과정입니다. 자아에게 초자아란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훈육 등으로 생긴 사회의 질서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를 테면 우리나라 중학교 3학년 도덕 교과서에서 파업에 대한 논의는 이런 훈육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교과서는 ‘자신 권익을 지키기 위해 파업한다’는 입장과 ‘시민에게 불편을 주면서 파업하는 것은 나쁜 일’이라는 입장을 먼저 대립시킵니다. 그 다음, 이 두 입장을 절충하여 “자신 권익을 향상시키기 위해 시민생활에 불편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마지막 수단으로 파업하는 행위는 나쁘지 않다”는 원칙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이는 파업하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모든 파업은 직간접적으로 시민생활에 불편을 끼칩니다. 그리고 파업 효력은 바로 그런 불편에서 나옵니다. 아무리 격렬하게, 아무리 오랫동안 파업을 해도 시민생활에 아무런 불편도 끼치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파업하는 노동자 호소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모든 파업이 시민생활에 불편을 끼침에도 성숙한 시민사회가 이를 용인하는 까닭은 우리 모두가 언제라도 마지막 수단으로 파업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훈육된 초자아의 영향에 따라, 우리는 같은 노동자로서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응원하기보다 내일 아침 출근길의 불편함부터 떠올리게 됩니다.
















프로이트 주장에 따르면, 주체 내면에서 도덕적 의지나 양심의 가책이 생기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주체의 자유의지라고 볼 만한 증거가 없습니다. 도덕적 의지나 양심의 가책은 초자아 기능에 불과하며, 초자아란 시대 요구에 따라 자신 마음에 형성된 ‘흔적’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내 마음에 생생하게 울려 퍼지는 양심의 소리란 단지 시대유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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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상인 집단은 사회에 새로운 자본주의 시각을 어떻게든 확산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상인 친화적인 경제체제를 구축하려면 빈곤한 노동자나 소작농 등 당시 적대적인 사람들이 상인 집단의 사고방식을 따르도록 변화시켜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상인 집단은 적대적인 사람들을 강하게 대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가난한 자들을 강제로 일하도록 해야 하며, 대부분 사회복지는 그들 게으름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으므로 철폐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점차 자본가는 자신 스스로에게 적용한 근면이나 성실의 규율을 ‘게으른’ 노동자들에게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본가 미덕은 ‘비생산적이고 게을러터진’ 노동자를 가차 없이 대할 수 있는 권리나 의무로 자연스럽게 전이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가치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자본가가 노동에서 ‘의미’를 찾아 낸 것은 노동자에게 노동을 강제하고 노동자의 계급투쟁을 막고자 함이었습니다. 
















노동자는 점차 길들여졌습니다. 심지어 일자리를 잃게 되면 괴로움까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일자리를 잃는 일은 단지 수입원이 사라진 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실업은 사회적인 죽음이 되었습니다. 일터에서 함께 했던 동료들과 더 이상 교제하지 못하고, 동시에 오랜 기간 일터에서 누렸던 역할과 지위를 상실합니다. 소위 ‘퇴직의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노동자는 몇 년간 우리 속에 갇혀 있다가 도망쳤으나 갑자기 많아진 자유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우리 주위를 빙빙 돌며 우리 속 ‘지옥’을 그리워하는 가축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일은 절대 고통스럽지 않으며, 노동자는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베버의 ‘소명의식’에서 시작해 지금의 ‘인간중심 경영’ 이론이나 ‘소비주의’에 이르기까지 노동을 강제하기 위한 더 세련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회사는 노동자가 행복한 ‘한 가족’으로 느끼도록 ‘인간중심 경영’ 운동을 전개합니다. 회사는 ‘한 가족’이라는 생각에 따라 우리는 직장에서 상당 수 친구를 사귄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 일상은 직장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사람들은 하루 대화 3분의 2 이상을 직장에서 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많은 사람이 직장에서 동료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어느 연구 결과를 보면, 노동자들에게 제일 친한 친구 10명 이름을 적어보라고 요청할 경우 동료 직원 이름을 단 한 명이라도 적은 사람은 절반 이하로 나타났습니다. 평균적으로 이웃 주민이 동료보다 명단에 더 많이 오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중요한 일이 닥치면 누구와 상의하느냐는 질문에 동료를 단 한 명이라도 적은 사람은 절반 이하였습니다. 동료와 친밀한 유대를 맺고 있는 사람은 아주 소수에 불과합니다.



많은 기업이 직원들 자율성이나 완화된 위계질서, 업적과 성취에 따른 보수 체계를 선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성과를 거두어야 월급이 오르고 고용 안정도 보장된다는 현실은, 단순한 암시일지라도, 동료 사이의 치열한 경쟁을 유발합니다. 생계를 놓고 동료와 은밀히 경쟁할 때 친밀함이 형성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회사는 노동자의 여가시간까지 빼앗아가며 저녁 회식이나 맥주 파티, 체육대회, 산악회, 친목행사 같은 여러 명목으로 노동자 불만이나 소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일의 의미를 만들어내야 할 임무를 부여받은 경영진은 노동자가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일에 몰입(engagement)하도록 새로운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심지어 노동자가 스스로 회사나 직장 상사처럼 힘 있고 부유한 존재로 여기도록 동료애나 가족 같은 회사, 이윤 나누기(profit sharing), 애사심, 주인의식(ownership)과 같은 ‘인간중심 경영’으로 노동자를 속이고 있습니다. 















‘인간중심 경영’은 심리학자 엘튼 메이오(1880~1949)가 노동자 임금 인상을 억제하고 노동조합 결성을 막고자 기업가 록펠러(1839~1937)에게 제안해서 만든 연구입니다. 록펠러 재단은 메이오 연구에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대환영이었습니다. 그들이 메이오 심리학 연구를 후원한 이유는 노동자에게 돈을 덜 주면서도 그들이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메이오 이론은 노동자가 실제 착취당하지만 대우를 잘 받은 듯 믿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메이오는 노동자가 관리자 조작에 쉽게 흔들리는 단순한 감정 덩어리라고 가정했습니다.


 

인간중심 경영을 계기로 종업원에게 보내는 따뜻한 미소가 급여 인상보다 훨씬 더 돈이 남는 장사라는 교훈을 전 세계 경영진이 즉시 깨달았습니다. 인간중심 경영은 노동자에게 좋은 듯 들리지만, 아름다운 말로 실질적인 노사 협상을 대신합니다. 

















경쟁에 치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으로 힘든 노동자는 불안과 고독, 소외 같은 감정을 느낍니다. 소외된 노동자는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해야 했기 때문에 했어'라고 말합니다. '바로 내가 원해서 그것을 했어'라는 말이 중요한 데, 그렇게 하지 말하지 않는 사람에겐 복종만이 남습니다. 그래서 기업에서는 실제로 관리직 숫자가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노동자가 자신 삶 모든 것을 바쳐 자발적으로 제대로 일하지 않으니 위협하거나 혼내줄 관리자가 더 많이 필요한 것입니다. 



노동자는 시키는 대로 하다 보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자신에게 무슨 능력이 있는지 아예 잊고 살게 됩니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노동자에게 자본주의는 계속 일하도록 동기 부여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건 바로 ‘소비주의’입니다. 소비주의란 소득과 지출이 더 늘수록 우리가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고용주는 노동자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자네가 일하기 싫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하지만 자네가 노동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면 월급으로 받은 돈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네. 집에 가면 자네가 주문한 싸구려 소비재가 잔뜩 뒹굴고 있을 거야. 자네가 그렇게 갈망했던 행복은 그것으로 얻게 될 거야. 직장에서 일하면서 느낀 비참한 시간을 소비재가 전부 보상해줄 걸세.’ 노동자는 기계화된 노동 과정과 소외된 현실의 삶을 감당하기 위해 소비를 통해 잠시 현실에서 벗어납니다. 

















소비주의는 더 많고 더 비싼 상품을 사면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환상을 낳습니다. 심지어 싸구려일지라도 더 많은 상품을 소비하면 ‘소확행’이라는 소소한 행복으로 노동의 고통을 잊게 된다고 우리는 믿게 되었습니다. 소비는 현실 고통을 한순간 잊게 만들고, 현실로부터 도피하게 만드는 마취제이자 아편 역할을 합니다.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1931~1989)는 소비하는 삶을 '코미디'라고 불렀습니다. 나날의 단조로움을 피하려는 소비,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소비, 문제를 잊기 위한 소비는 결국 우리 삶을 코미디로 만들어 버립니다. 
















소비주의의 본질은 현실 문제를 능동적으로 사유하고 비판적으로 반성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현실 고통을 한순간 잊게 만들고, 체념하게 만드는 고통의 완화제일 따름입니다. 소비주의는 현실의 모순을 심리적 차원으로 환원시켜, 어떻게든 자본주의 본질만 건드리지 않으면서 뭔가를 해소해보라는 놀라운 전략입니다. 결국 기존 지배 체제와 질서에 순응하게 되고 이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소비주의가 고통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유와 실천을 제약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노동자는 많은 상품을 소비하지만, 여전히 불행과 불안을 느낍니다. 그러면 노동자는 자신 소득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결론짓곤 합니다. 불행의 근본 원인을 이렇게 잘못 판단하면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필요하다는 감정에 점점 괴롭게 됩니다. 현재도 열심히 일하지만 장차 더 열심히 일해 더 빨리 승진하고 돈도 더 많이 벌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물질적인 것을 손에 넣으면 일시적으로 만족할 수 있지만 그 감정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점점 커지는 소비 규모 때문에 일과 소비의 악순환만 반복됩니다. 행복을 향한 ‘손쉬운 방법’으로 소비를 선택하게 되면 빚 때문에 망하거나 최대 수입만 는 고갈된 영혼만이 남습니다. 
















자본의 술책은 임금노동자를 빚 속에 빠뜨려 빚이 청산되지 않도록 하면서 빚의 상환에 전념하도록 만드는 데 있습니다. 임금노동자의 빚은 과거 노예제도와 유사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노예처럼 살아가는 사람 대부분은 어떤 식으로든 빚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진 게 없기에 빚에 의존해 살게 되는데, 과거 노예주나 식민지 지배자들이 그랬듯이 현대사회의 지배계층도 부채를 통해 임금노동자를 통제하려듭니다. 현대인도 융자나 주택대출 같은 부채를 갚아야하기에 부채가 없을 때보다 더 고분고분하고, 더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더 기진맥진한 삶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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