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도쿠가와 시대 내지 그 이전 시대가 ‘정체’되었다가거나 ‘폐쇄적’ 혹은 ‘쇄국적’이었거나 ‘봉건적’이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소리다. 1853년 페리 제독의 내항이 일본을 ‘개국’시켰다는 주장이나 1806년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은 도쿠가와의 유산과 급격한 단절을 이루었다는 주장은 수정되어야 한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 일본도 하루아침에, 아니 한 세기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일본 도시화는 획기적이었다. 1550년 이후 한 세기 반 동안 일본에서는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도시가 하나에서 다섯으로 늘었다. 18세기에 이르면 일본 도시 인구는 중국이나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많았다. 오사카와 쿄토, 에도(토쿄) 인구는 각각 적어도 100만을 넘었다. 특히 에도 인구는 130만에 육박했다. 일본 인구의 6~13%가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도시에 살았다. 반면 당시 유럽의 도시인구는 2%에도 미치지 못했다. 일본 인구는 세계인구의 겨우 3%였지만, 10만 이상이 거주하는 도시에 거주하는 비율은 무려 8%나 되었다."<리오리엔트>

















"메이지 유신 이전 도쿠가와 시대에는 전국적으로 260여 개의 지방마다 영주가 있었다. 이 지방 영주를 다이묘, 또는 번주라고 하고, 그들이 다스리는 봉건국가를 번이라고 한다. 이처럼 반독립적인 번이 다수 존재했다는 점은 막말기의 변혁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각 번들 간의 경쟁의식이 강했다. 다수의 정치에서 생존을 위한 부국강병의 경쟁, 생존의 경쟁 의식을 갖고 치열하게 노력했다는 점이 대내외 위기에 민감하고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였다.”<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일본의 정치와 사회 체제의 분권화와 다양성이 중국에서 나타난 것보다는 훨씬 다채로운 대응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러한 다양성 덕분에 시행착오 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성공적으로 대응하였다. 예를 들면, 번 대부분은 효과적으로 대응하기에 너무 작거나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지만, 충분한 수의 번들이 다양한 대응을 할 수 있었다. 엄격한 계급 구분도 영향을 끼쳤다.”<동양문화사(하)>
















"일본의 봉건제는 유럽의 봉건제와 유사한 면도 있지만 몇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우선 센고쿠(戰國)시대 이후 일본의 봉건제는 쇼군과 다이묘가 주종 관계에 있지 않았다. 유럽의 왕-제후 관계와 달리 일본의 쇼군은 가장 강력한 무가(武家)일 뿐이다. 천황 위임을 정통성의 근거로 하지만, 그 위임은 힘에 기반한 것이었고, 결국 통치 근원이 되는 것은 무력이고 실력이었다.



제한적 권위의 통치자로서 쇼군은 다이묘들에게 세금을 징수할 수 없었다. 다이묘들의 충성 서역은 전시에 쇼군을 군사적으로 지원할 군역만을 의무화하였다. 일반적으로 중앙 권력이 강성해지면 지방의 사적 무력 보유를 억제하는 방향으로 통치체계가 정비되지만, 일본은 그럴 수 없었다. 군역이 계약의 기초이므로 다이묘의 무력 보유를 금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극상이 난무하는 센고쿠시대를 거치면서 충성 맹서는 약속의 무게를 잃은 지 오래다. 쇼군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군역 의무가 쇼군 안전을 위협할 수도 있는 패러독스 상황에서 쇼군은 다이묘들을 견제하기 위해 군역을 다른 형태로 부담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쇼군이 군역의 연장선상에서 성곽 축성, 제방이나 도로 건설 등 전쟁 기간시설 관련 공사에 다이묘가 인력과 자재 등을 제공하도록 의무를 부가한 것이 천하보청(天下普請)이다.



이에야스는 쇼군 자리에 오른 후 바로 천하보청을 발령한다. 히비야이리에 매립사업을 비롯하여 소토보리(에도성 바깥쪽 해자) 조성, 에도성 축조, 고카이도 정비 등에 전국 다이묘를 동원한 것이다. 천하보청은 쇼군 통치의 상징이자 다이묘 견제책이기도 했다. 이에야스는 다이묘들의 천하보청에 대한 순응 정도를 다이묘의 충성심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 저항 가능성이 높을수록 더 많은 의무를 부과하고 순응할수록 의무를 경감하였다.



각 다이묘는 천하보청에 따른 재정 압박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라도 정해진 기일 내에 높은 완성도로 사업을 완료할 수 있도록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에 실패할 경우 신임을 잃는 것은 물론, 더 큰 부담이 되어 돌아오거나 처벌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이묘들이 천하보청의 명을 받아 공사에 임하기는 하지만 공사 완료에 필요한 자재와 기술을 보유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각자 부족한 자재나 기술을 번끼리 거래하거나 전문가들을 인력 시장에서 구해야 했다. 기존에 없던 자본이나 자재, 전문 인력에 대한 수요가 생겨나고 시장에서 거래되기 시작했다. 



천하보청은 각 번의 통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천하보청 수행을 위해서는 번의 자원 동원력이 향상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다이묘가 천하보청의 압박을 견디기 위해 행정력 강화와 세수 증대를 위한 새로운 땅 개간 등 통치체제 정비에 힘을 기울여야 했다.



천하보청의 묘미는 국가에서 거둔 국부가 고스란히 인프라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만약 쇼군이 중앙의 군주로서 징세, 즉 화폐나 현물 형태로 생산량의 일정 부분을 거두어 갔다면 그 과정에서 많은 비효율과 왜곡된 자본 축적이 발생했을 것이다. 일본은 천하보청에 따라 세금 징수가 아니라 ‘결과물’ 형태로 의무를 부과했기에 관리비용 등의 매몰비용이나 착복으로 인한 증발 없이 모든 투입이 실물 인프라로 이어졌다. 



일본으로서는 쇼군이 다이묘를 견제해야만 하는 정통성 딜레마를 겪고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행운이었다. 전근대 유럽과 동아시아 국가들은 소수의 중앙 지배층을 정점으로 하는 다단계의 착취적 구조를 기본으로 한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하고 통치에 민주성이 결여된 전근대이기에 세금은 비효율성도 높고 생산력 확대를 위한 재투자에도 사용되기 어려웠다. 세금은 누군가의 금고로 들어가 사치로 낭비되거나 다 쓰이지도 못하고 소멸되는 국부의 무덤이었다.



일본은 중앙의 징세권이 없었다는 사정이 천하보청과 맞물려 전혀 예기치 못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우선 천하보청에 동원된 자원은 중앙 지배층에 이전되어 축적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지방 지배층인 다이묘들은 자본 축적의 기회는커녕 악몽 같은 상황에 처했다. 번 정부는 동원 인부들에게 노임을 지급하고 자재를 구매하기 위해 끊임없이 재정을 지출해야 했다. 천하보텅 비용 마련을 위해 빚을 내야 하는 다이묘도 있을 정도였다. 말단에서 세금 형태로 걷히는 생산물은 천하보청을 거치면서 노임이나 자재 대금 형태로 제분배되었다. 이러한 직접적인 자원 투입 결과로 높은 수준의 공공인프라가 창출되자 한층 더 경제활동이 촉진되고, 이는 다시 말단 세금 납부자의 생활 개선으로 이어졌다. 천하보청이 의도치 않은 국부 인큐베이터가 된 셈이다.<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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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헌법 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우리나라 헌법은 현대 복지국가 이념을 최초 기록한 라이프니치(1646~1716)의 정치철학에 기반을 둔 듯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이상적인 국가는 평화와 시민 안전을 보장하는 일뿐 아니라 자비로운 행위를 통해 시민의 도덕적이고 물질적인 행복을 증진해야 할 의무를 진다.” 이처럼 우리나라 국민이 추구할 최고 목표는 ‘행복’이다. 헌법에 언급될 정도로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목표가 행복이다. 



『행복의 함정』(2011)의 저자 리처드 레이어드(1939~ )는 행복은 자연스러운 목표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하게 마련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행복이 궁극의 목표인 이유는 그것이 단지 선(善)이기 때문이다. 행복이 좋다는 것은 굳이 따질 필요도 없을 만큼 명백하다. 우리에게 행복이 왜 그렇게까지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행복의 절대적 중요성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명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독립 선언문에도 나타나 있듯이 행복은 ’그 자체로 명백한‘ 목표다.” 그렇지만 이 주장은 증명보다는 전제에 해당한다. 레이어드 자신도 말했듯이 이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근거는 없고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행복해지길 원하는가? 우리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행복은 선택할 수 없다.

서점에 가면 『나는 행복을 선택했어요』나 『그래서 나는, 행복하게 살기로 했다』, 『하루에 한 걸음씩 행복해지기』 『스스로 행복하라』, 『행복으로 가는 길』과 같은 행복 관련 많은 책이 진열되어 있다. 이러한 책들은 안녕감(well-being)이나 만족 등을 추구하라는 바람직한 담론이 담긴 듯하다. 하지만 사회에서 회자되는 행복 담론은 그저 무해한 개념이 아니다. 흔히 행복 담론은 우리에게 고통과 안녕감 중에서 선택하라고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요는 우리가 언제나 행복을 선택할 수 있고, 행복에 이르는 여러 선택지가 있다고 전제한다. 또한 마음만 먹으면 삶에서 고통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삶에서 어려움과 비극은 불가피하다. 그런데도 행복 담론은 고통과 행복이 개인 선택 문제라고 고집스럽게 주장한다. 

 















중세 스토아 철학은 자신 의지로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스토아 철학 핵심에는 깊은 숙명론이 있다. 세상은 내가 쓰지 않은 대본에 따라 움직인다. 언젠가는 직접 연출도 하고 싶겠지만, 포기하는 게 좋다. 우리는 단지 연기자일 뿐이다. 자신 역할을 받아들여야 한다. 스토아 철학에는 ‘운명이 허락한다면’이라는 조건부 표현이 많은데, 이를 ‘유보조항’이라 부른다. ‘유보조항’은 우리가 직접 쓰지 않은 대본을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사건은 그저 ‘운명이 허락하는 대로’ 펼쳐진다. 

















『나의 글로 세상을 1밀리미터라도 바꿀 수 있다면』(2007)의 저자 메리 파이퍼(1947~ )는 대학교 졸업반 시절 행복 관련한 대중 도서에 한창 빠져 자만심으로 가득할 때 그녀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었다. 파이퍼는 암으로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워지고 계시던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행복하게 사셨어요?” 할머니는 손녀 질문을 무시했다. 손녀는 할머니가 못 듣기라고 한 듯 집요하게 다시 물었다. 그제야 할머니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화를 내다시피 하며 대답하셨다. ”메리, 난 내 인생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아. 내게 주어진 시간과 재능을 제대로 잘 썼나? 내가 있어서 세상이 더 살기 좋은 곳이 되었나? 나 자신에게 이렇게 묻지.“ 
















손녀에게 행복은 바람직한 인생을 함축하지만, 그녀 할머니에게는 그게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은 "행복하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곧 행복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는 말로 ‘행복의 역설’(헤도니즘의 역설, Paradox of Hedonism)을 설명했다. 행복은 붙잡으려고 애쓸수록 우리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행복은 부산물이지, 절대 목표가 될 수 없다. 행복은 삶을 잘 살아낼 때 주어지는 뜻밖의 횡재 같은 것이다. 우리는 특히 ‘아주 조금만 더’ 라고 생각하며 무엇인가를 원한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것(예를 들면 많은 돈과 명예, 친구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조금만 더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금 더 갖게 되면 우리는 원하는 바를 재조정한다. 이전보다 그저 조금만 더 생기도록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얼마큼이 충분한지 알지 못한다. 



상대적 빈곤 때문에 불행하다.

행복은 선택할 수 없는 문제일 뿐 아니라, 부(富)를 기반으로 한 행복은 상대적 빈곤 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 인간은 절대적 빈곤보다 상대적 빈곤에 더 민감하다. ‘오늘날 가장 궁핍하게 사는 사람조차 수백 년 전 왕보다 잘 살사는 데 몇몇 사람들이 엄청 잘 사는 게 뭐가 대수란 말인가?’라고 생각한다며, 그렇지 않다. 사람은 상대적으로 더 큰 빈곤을 느끼기 때문이다.

 
















과거에 평범한 사람은 부자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누구든 백만장자 삶이 어떤지 자세히 알 수 있다. 텔레비전은 부자들의 호화로운 삶을 비정상적일 정도로 크게 보도한다. SNS에서 백만장자들의 집을 볼 수 있다. 부자들의 라이프스타일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자 ‘SNS로 인한 불만’이라는 증상이 생겼다. 평범한 사람들은 평생 절대 소유할 수 없는 모든 것을 괴로울 정도로 자세히 볼 수 있다. SNS 그 자체든 다른 형태의 대중적 노출이든, ‘SNS 불만’은 보통 사람들이 소유한 것을 하찮게 보이도록 만든다. 비록 그 사람이 객관적인 기준에서 넉넉한 삶을 누리고 있고, 인류 역사에서 극도로 풍요로운, 수천만 명 중 한 사람일지라고 그렇다. 
















행복을 결정하는 요인은 상대적이다. 사람들은 자신 행복을 판단할 때, 자신 실제 상황을 과거 혹은 현재의 사회적 경험에 비추어 비교하는 경향이 있다. 행복이 상대적이라면 국가가 객관적으로 경제를 개선하고 부양하더라도 반드시 국민이 실질적으로 수혜를 얻는다고 확신할 수 없다.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무슨 일이든 쉽게 적응하며, 행복은 객관적으로 충족되지 않기에 국가 경제 정책이 국민 행복 증대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만족을 위해 설계되지 않았다. 인간의 행복은 객관적 조건보다 우리 자신의 기대에 더 크게 좌우된다. 여건이 극도로 좋아진 후에도 이전처럼 불만족스러운 상태가 된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자신 운명에 주관적으로 만족하고 사회적 불만을 막고자 보편적 기본 소득을 도입한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인간의 기본적 필요’를 두고 어떤 정의를 따르든, 일단 한 번 누구에게나 그것을 무료로 제공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시하게 될 것이다. 보편적 기본 소득 덕분에 빈곤층이 지금보다 훨씬 나은 의료 서비스와 교육을 누린다 하더라도, 그들은 전 지구에 불평등이 만연한 것에 극도로 분노할 수 있다."



행복이라는 "목표를 진정으로 달성하려면 보편 기본 소득은 다른 의미 있는 추구에 의해 보완돼야 할 것이다. 일-이후(이외) 세계에서 만족스런 삶을 사는 방법, 심지어 가난하고 직업이 없더라도 삶의 만족도를 높일 방법을 먼저 찾아야 한다. 보편 기본 소득과 더불어 강력한 공동체와 의미 있는 삶의 추구를 결합”해야 한다. 
















유발 하라리가 언급한 “심지어 가난하고 직업이 없더라도 삶의 만족도”를 높인 사회가 요즘 일본이 아닌가 싶다. 현재 일본 젊은 층 대다수는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다. 취직률은 저조하고, 저임금에 시달리며 워킹푸어로 일하고, 현대판 홈리스라고 볼 수 있는 피시방에서 난민처럼 산다. 



하지만 20대 일본 젊은이들이 느끼는 생활 만족도와 행복 지수는 78.3퍼센트까지 상승했다. 일본 중학생과 고등학생 95퍼센트가 자신은 행복하다고 대답했다. 1980년 절정기를 맞았던 일본의 ‘입시 전쟁’이 상징하듯 ‘좋은 학교, 좋은 회사, 좋은 인생’이라는 중산층 꿈으로 일본 전체를 압도하던 시기는 지났다. 1990년대 이후 중산층 꿈이 무너짐과 동시에 기업의 정식 구성원이 되지 못한 젊은이가 증가했다. 그런데도 젊은이들의 삶 만족도가 증가하고 있다. 



요즘 일본 젊은이는 예전만큼 자동차를 구입하지 않는다. 술도 많이 마시지 않는다. 해외여행도 그리 즐기지 않는다. 유학생 수도 급격히 감소했다. 선거 때 투표하러 가는 젊은이 수도 현저하게 줄고 있다. 사회 부조리를 바로잡으려는 대규모 시위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대신 태어난 지역에 애착을 느끼는 젊은이가 증가하고 있고, 대도시권으로 이동하는 인구수가 감소하고 있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2011)의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1985~ )는 그 원인을 이렇게 진단한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리 없다고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행복하다고 느낀다.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될 때, 지금 행복하다.”
















원하는 걸 얻어도 행복하지 않다.

점점 더 많은 세속적 물질을 손에 넣을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기에 오히려 물질적 풍요 그 자체가 불행의 원인일지도 모른다. 해마다 세상은 소비자 구매 심리를 자극하는 더욱 매혹적인 제품을 제공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물건을 소유하는 기쁨보다 물건을 갖지 못하는 비참함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754년에 이미 장자크 루소가 그러한 말을 했다. ”만약 당신이 세상 물질을 갖지 못한다면 불행하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세상 물질을 소유한다고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원하는 것을 돈으로 사더라도 점점 커지는 소비 때문에 일과 소비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행복을 얻기 위한 ‘손쉬운 방법’으로써 소비는 빚 때문에 망하거나 최대 수입만 좇다가 영혼이 고갈되는 결과를 낳는다. 
















내면의 행복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해서 오지 않는다. 외부에서 무언가 주어지는 행복은 지속 시간이 짧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원했던 승용차를 사더라도 만족감이 반년을 넘기기가 어렵다. 인간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쉽게 적응한다. 이 같은 현상은 인간의 행복에는 설정점(set point)이 존재해,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생기더라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행복감은 기저수준으로 회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점은 결국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지속적인 행복을 누린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마치 쳇바퀴 돌리는 다람쥐처럼 아주 잠깐 바닥을 벗어날 수 있을 뿐이라 하여, 이 현상을 흔히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라고 부른다.
















결국 내가 새로운 상황에 곧 적응하리라는 사실을 매번 깨닫지 못할 뿐이다. 노인들은 대게 건강 문제로 많은 고통을 겪기에 노인이 젊은이보다 더 행복하다는 말을 들을 때면 우리는 매우 놀란다. 하지만 많은 사람 대부분은 만성 질병에 잘 적응하는 편이다. 인간은 미래에 어떻게 느낄지 예측하는 데 서툴다. 우리는 자신 감정의 반응 강도와 지속시간 모두를 크게 과대평가한다. 
















흔히 쾌락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BC 341~270)는 행복을 대부분 사람과는 다르게 규정했다. 우리는 긍정적인 정서 차원에서 행복을 떠올린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결핍과 부재 측면에서 행복을 규정했다. 그리스인은 이러한 상태를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것은 어떤 것의 존재가 아니라 바로 불안의 부재다. 행복은 고통의 반대말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를 뜻한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평정주의자’였다. 당신이 불필요한 욕망을 필요한 욕망으로 착각하면 고통이 생긴다. 우리를 괴롭히는 갈망에 비해 그 성취감은 크지 않기 때문이다. 쾌락으로 시작된 것이 고통으로 끝난다. 유일한 해결책은 욕망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내 행복은 타인 불행으로 이루어진다.

부처는 우리 행복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괴로움이 되는 경우가 아주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 사람의 번영은 보통 다른 사람의 궁핍이나 배제에 의존하고 있다. 나라가 부유해지면 항상 불평등이 불행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작가 버나드 맨더빌(1670~1733)이 말한 것처럼 “사회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대다수 사람이 가난하고 불행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중상주의’라고 부르는 이러한 논리는, 한 사람의 손실이 다른 사람에게 이득이 된다는 뜻이다. 중상주의자가 해줄 수 있는 최고 조언은 임금은 낮을수록 좋다는 점이다. 값싼 노동력은 경쟁 우위를 창출해 수출을 증진시키기 때문이다. 맨더빌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노예가 허용되지 않는 자유 국가에서 가장 확실하게 부를 창출하는 것은 부지런히 일하는 빈곤층 다수다.”



이러한 거리낌 없는 주장이 용납될 수 있었던 이유는 빈곤층이 형편없는 사람들이기에 빈곤할 수밖에 없다고 가정했기 때문이다. 동료 노동자와의 경쟁에서 패한 노동자는 나태와 우둔이라는 죄를 뒤집어쓰고 빈곤이라는 형벌을 받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게 되었다. 영국 전 총리 마거릿 대처(1925~2013)는 빈곤을 ‘인격 결함’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빈곤은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데, 가난한 사람은 그럴 의지가 부족하다고 비난한 것이다.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나 언젠가 행복하기를 원한다. 현대사회에는 ‘긍정적 사고’라는 신앙이 있다. 이 같은 낙관주의에 사로잡히면 최악의 경우 모래밭에 머리를 묻고, 우리 모두에게 고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게 된다. 나아가 내 자신 감정을 다치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을 냉담하게 대하게 된다. 하지만 부처(BC 560?~480?)는 “괴로움의 현실이 우리 존재 전체에 완전히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고통을 느끼는 데서부터 우리 삶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불교는 삶의 목표로써 내면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보다 삶의 실재인 변화의 고통[生老病死]을 깨닫고 받아들여야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행복을 가져오는 뭔가를 얻자마자 곧 그것을 잃을까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늘 욕망의 대상을 쫓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결국 그것 때문에 불행해질 것임을 알고 있다. 부처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고정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도 실제로는 순간순간 변화하고 있다. 절대적이고 영원한 실체에 대한 믿음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욕망을 낳고 또 그 욕망은 고통을 가져온다. 만족스러운 순간은 거의 없고 있다 하더라도 아주 짧은 순간일 뿐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영원히 좌절하는 것이다.”
















철학자 스베냐 플라스푈러(1975~ )는 인간이 고통을 인식하고 이를 통해 성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예를 들어, 실패를 겪은 사람은 그것이 왜 실패했는지 생각하고, 무엇을 더 배워야 하는지 고민하여, 다시 일을 시작할 때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계몽주의 이후 인간은 신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을 거부하며, 신이 부여한 운명에 순응하지 않으려 한다. 모든 인간은 적어도 이성적으로 자신 능력에 따라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으며 자유롭게 선택한 직업 활동을 펼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노력만 한다면 출세의 사다리를 오를 수도 있다고 여긴다. 누구나 자신 행복에 대한 주인이다. 



하지만, 고통을 장애나 시스템 오류로만 생각하며 주어진 한계를 극복하려고만 한다면, 인간은 자기 실존과의 중요한 연결 지점을 잃고 말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한계가 있는 존재로 인정할 때 자아를 갖게 된다. 인간이 그 한계와 고통을 경험하고 자신 인생과 사회가 대체 왜 이러한지 근거를 캐물어야 한다. 고통은 생각을 낳는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그 고통을 억지로 참는 사람은 성과(成果)의 강요에 굴복하고 마는 것이다.”  

















성숙한 삶을 살아야 한다.

유발 하라리는 자신의 책 『사피엔스』(2014)와 『호모 데우스』(2016)에서 행복은 달성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다스리는 마음 상태라는 것을 제안한다. 행복을 갈망하지 않는다면 현재 순간에서 만족을 찾을 수 있고, 스트레스와 불만을 피할 수 있다고 말한다. “행복이 주관적 느낌이라고 믿기 쉽고, 자신이 행복한지 비참한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고 믿기 쉽다." 하지만 행복이라는 "특정한 감정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행위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함정이다. 사람들의 기대가 충족되었느냐의 여부, 쾌락적 감정을 즐기는가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질문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런저런 덧없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 데 있다.” 

 















행복을 갈구한다면, 쉬지 않고 그런 감각을 쫓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마침내 행복한 감정을 느낀다고 해도 그 감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과거의 행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기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행복은 갈구할수록 점점 더 스트레스와 불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행복도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개념인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만족의 느낌이 아니라 우리의 성숙된 삶 전체 문제였다. 성숙된 삶은 교육을 받고 습관화를 통해서 달성할 수 있다. 즉 덕이 있는 행위를 하도록 훈련받고 또 이를 꾸준히 실천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행위를 반복하여 우리 본성을 발전시켜 나간다. 우리는 정의로운 행위를 하여 정의로워지고, 절제 있는 행위를 하여 절제 있게 되고, 용감한 행위를 하여 용감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같은 행위와 덕을 행복이라고 보았다. 




















빈센트 반 고흐 <담배를 물고 있는 해골>(1885)



고흐는 해바라기나 붓꽃, 별이 빛나는 밤처럼 아름다운 정경도 많이 남겼지만 시들어 가는 해바라기나 해골과 같은 어두운 소재도 많이 표현했다. 그에게 삶은 기쁨과 환희뿐 아니라 고통과 절망도 함께 버무려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서양 미술사에서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바니타스’(vanitas)의 의미를 담은 정물화가 유행했는데, 해골이나 시든 꽃이 대표적으로 바니타스를 상징하는 소재였다. 인생무상과 삶의 덧없음을 뜻하는 라틴어 바니타스는 삶은 언젠가 끝나기에 부와 명예, 순간적인 쾌락에 집착하는 것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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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리야는 소비 물건이 분류의 체계를 이루며 행동을 구조화하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한다. 광고는 한 상품을 다른 상품과 구별하는 상징을 통해 상품을 코드화하고, 그럼으로써 이를 일련의 배열에 끼워 맞춘다. (그 대상(object)은 개별 소비자에게 그 의미를 전달함으로써 소비될 때 진가를 발휘한다.) 이리하여 잠재적으로 무한히 반복될 기호작용이 제도화되어 사회를 규제하게 되며, 동시에 개인에게 자유에 대한 환영적인 감각을 심어준다. 



소비대상은 욕망을 무한히 자극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부유하는 기표들의 연계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사실, 상품을 단순히 인간적 욕구의 고정적 체계와 연관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지닌 효용물이라고 보는 방식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드리야르, 특히 그의 상품=기호의 이론화가 매우 중시된다. 그는 이제 상품이 소쉬르적인 의미에서 체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임의로 결정된다. 그렇다면 소비는 사용가치의 소비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기호의 소비로 이해되어야 한다.



보드리야르는 개인이 대상을 통해 질서체계에서 그 위치를 찾는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상품의 기능은 개인의 욕구를 채워주는 것일 뿐 아니라 개인을 사회 질서와 연계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소비는 생산에서 시작된 경제적 연쇄의 종착점일 뿐 아니라 교환체계이며 언어이기도 하다. 언어 상에서 볼 때 상품은 개인에 선행하는 기호체계에서 생각되는 물품인 셈이다. 보드리야르에게 있어서 자기 충족적인 개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사회체계, 특히 언어나 재화, 혈연과 같은 것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사회질서에 차별적으로 연결시키고, 그럼으로써 개인에 대한 감각을 구성할 따름이다.



보드리야르는 우리가 속해 있는 세계에서 정보는 점점 많아지고 의미는 점점 적어져 간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 사회처럼 정보의 과부하로 고통받는 사회에서는 의미를 거부하는 것만이 저항의 유일한 방식이라고 제안한다. 우리는 인생 매 순간마다 정보로 넘쳐나는 이미지들에 의해 그야말로 폭격을 당하고 있다. 이에 대처할 유일한 방법, 우리 인생을 점령해 버릴 정보의 힘에 저항할 유일한 방법은 이러한 이미지들을 오직 기표나 표면으로만 받아들이고 그 의미와 기의는 거부하는 것이다.



텔레비전 뉴스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단순히 시청자들이 경험하게 되는 표면적인 이미지들, 기표들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전날 저녁 뉴스를 기억하지 못한다. 거기에는 기억할 것이 없고 오직 이미지와 기표들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뉴스는 파편화된 이미지들의 콜라주다. 개개 이미지는 더 많은 것을 낳고 더 많은 것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원본이 없는 완벽한 복제품, 즉 시뮬라크르이다. 뉴스는 이미지에 대한 이미지의 이미지인 바, 최종적인 하이퍼리얼리티인 셈이다."









니체는 미래에 희망을 거는 어떠한 믿음도 반대했다. 니체는 절대적 진보, 즉 역사나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계획이나 목적을 거부했다. 경험적 사실들에 비추어 보아도 역사가 진보한다는 신념은 오류다. 니체는 "인류의 최종 목표는 인류 최고의 바람직한 모습에 있을 뿐 시간의 마지막 순간에 있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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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3-07-25 2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비의 시대 속에서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얻으려는 것이 아닌, 광고와 홍보로 만들어낸 수많은 이미지의 변주를 남들과 달라보이지 않기 위해 쇼핑하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북다이제스터 2023-07-26 15:39   좋아요 0 | URL
넵 우리는 ‘남들과 달라보이지 않기 위해” 소비하는데, 반면 그들(?)은 ’남들과 달라 보이기 위해‘ 소비하는 듯 합니다. ^^
 



“인간은 자신을 

자유로운 존재라고 생각하는 환상이 있다. 

그렇기에 모든 일을 자기중심으로, 

다시 말해 자신 필요나 목적 중심으로 

생각하게 된다.” 

- 질 들뢰즈





논란이 있지만 우리나라 법은 술 마신 뒤 저지른 범죄에 대해 처벌이 관대하다. ‘심신미약’(diminished responsibility) 상태로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보고 정상을 참작해 준다. 비슷하게 프랑스는 치정 범죄에 처벌이 가벼운 편이다. 이성이 감정을 억누를 수 없는 ‘극한 상태’에 있었기에 자유의지가 발휘될 수 없었다고 감안해 준다. 그렇지만 이러한 몇 가지 심신미약 상태를 제외하면 법은 인간 의식이 항상 특정 행동을 지시하는 ‘정상’ 상태에 있기에 인간을 자신 행동에 대해 온전히 책임이 있는 존재로 생각한다. 



고대 로마인들 또한 정신이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면책해 주었다. 범죄자가 자신 의지로 통제할 수 없었다고 판단되면 무죄가 선고되었다. 로마나 현대 사회의 이러한 판결은 멀리 아리스토텔레스의 법제 개념에 근거한다. 사법당국이 용의자를 처벌하기 위해서는 범죄 행위뿐 아니라 행위자 동기를 증명해야 한다. 이 같은 행위자 동기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죄지은 마음’(라틴어로 mens rea)이라고 표현했다. ‘죄지은 마음’을 달리 말하면, 시민은 자신이 의도한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만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플라톤 이래로 서구 사회는 인간 영혼과 마음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인간은 동물과 달리 자유의지가 있기에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고 믿었다. 근대 서구 시민사회는 자유의지를 기반으로 모든 개인이 타인 인격을 존중하고 선과 악에 대해 스스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주체라고 전제하며, 인권을 부여했다. 특히, 근대 서구 사상을 연 데카르트는 ‘의심할 수 없는 생각하는 나’의 ‘내 생각’을 증명하기 위해 자유의지를 논리의 공리(公理)로 삼았다. “1)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 2) 결정론에 지배받는 존재는 자유의지를 가질 수 없다. 3) 순수한 물리적 존재는 결정론의 지배를 받는다. 4) 따라서 인간은 순수하게 물리적 존재만은 아니다.” 
















칸트의 도덕법칙도 개인이 자유로운 자신 양심 속에서 스스로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가 생각하는 도덕법칙은 개인의 자율적인 의지와 분리할 수 없다. 개인 스스로의 판단을 내리는 것이 칸트의 정언명법(네 ‘의지’의 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위 하라)인데, 당시에 신의 존재를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었던 칸트는 신이나 자연법칙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필연 상황에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칸트는 자유의지가 존재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알 수도 없고 증명할 수도 없는 세계 – 칸트 용어로는 물자체 혹은 본체계, 예지계, 초감성계 –에 있으며, 인간은 신이나 자연법칙의 필연성 제물이 아니라 언제나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우리는 칸트 사고를 통해 자유의지가 얼마나 답하기 어려운지 문제인지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 생각과 달리, 인간이 자유롭게 의지를 발휘하여 자신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는 그리 많지 않았다. 고대에는 인간의 자유의지 개념이 거의 전무했다. 히브리인들 운명론은 <구약성서>에서 엿볼 수 있다. “인간은 변덕스러운 운명의 희생자다. 노력과 성공 사이에는 어떠한 필연적 관계도 없다. 빠르다고 해서 달리기에 이기는 것은 아니며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더라. 지혜가 있다고 해서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총명하다고 해서 재물을 모으는 것도 아니며, 배웠다고 해서 늘 잘 되는 것도 아니더라. 불행한 때와 재난은 누구에게나 닥친다(<전도서> 9:11).”



예수 이후 신학자들 사상도 히브리인들 운명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간은 신의 결정론에 맞서 자신 운명을 바꿀 자유의지가 없었다. 사도 바울은 율법적인 노력으로 구원을 확보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므로 장차 다가올 삶에서 인간이 맞게 될 운명은 전적으로 신의 의지에 달린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신학도 신의 전능성을 기조로 삼았다. 그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는 것은 신의 전능함을 부정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갖는 중요성을 부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이 구원을 스스로 얻어낼 만큼 의지가 있다면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내려올 필요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혁명을 일으킨 루터도 인간은 누구도 자신 선행으로 구원을 바랄 수 없다고 보았다. 오히려 구원은 오직 신의 은총일 뿐이며, 선행이든 계율 준수든 신의 마음에 들기 위한 개인 노력과는 상관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천국으로 가기 위해 기도할 뿐이며 그 이상의 일을 할 수는 없다. 루터에게 있어 구원받을 자의 선택은 오로지 주어지는 것, 개인 노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칼뱅도 구원이란 신이 내린 은총의 산물일 뿐이며 인간 업적이나 자격에 구애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누가 구원받고 누가 단죄 받을지는 예정되어 있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성례(聖禮)도 아무런 효험이 없다. 그래도 신자는 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은총을 받기 위한 수단이 전혀 아니다. 인간은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자신 운명을 바꿀 수 없다.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그들 영혼에 신의 축복이나 저주의 낙인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바울부터 아우구스티누스나 루터, 칼뱅에 이르기까지 사람은 각자의 생활 태도나 노력과 상관없이 오직 신이 구원받을 사람을 자유롭게 선택한다는 기독교 전통 사상은 신의 전능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구원이라는 게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라면 신은 거기에 얽매이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 능력을 인정해야만 한다. 구원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스스로 구제하다’는 의미가 되며, 따라서 신의 무한한 힘에 한계가 생기게 된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신이 세상 모든 것의 주재자라면 악의 존재 역시 신이 주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이 정의롭다면 그의 힘으로 방지할 수 있는 고통과 악이 왜 발생하도록 그대로 두는 것인가? 신이 전능함에도 불구하고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정의롭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학에 다음 세 가지 견해가 병립하기 매우 어렵다. ‘신은 정의롭다’ ‘신은 전능하다’ ‘악은 존재한다.’



이 난제를 푸는 방법 하나는 인간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로써 악의 존재에 대한 책임은 신에게서 우리에게로 옮겨진다. 만약 신이 어떤 규범을 세웠을 뿐 아니라 개인에게 그것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을 자유를 부여했다면, 우리는 옳은 것 대신 잘못된 것을 선택한 것에 책임져야 한다. 나쁜 일을 한 자는 현세 또는 내세에서 신의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그의 고통은 악이 아니라 위반에 대한 징벌이다. 따라서 중세시대에 교회는 자유의지를 다시 불러들였다. 교회 예식과 절차(세례, 기도, 미사 참석, 성가 참례 등)를 강조한 것이다. 사실 신학적으로 ‘행함을 통한 구원’이라는 생각, 자유의적인 생각은 이미 배경에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가톨릭에서는 예식과 성례를 잘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유대교에서는 신의 율법을 잘 기키고 시나이 산의 계명(십계명)을 준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렇듯 종교에서도 자유의지 여부가 답하기 얼마나 어려운지 문제인지 알 수 있다.
















철학에서 보면 인간 자유의지를 증명 없이 공리로만 사용한 데카르트나 증명에 실패한 칸트와 달리 스피노자와 흄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음을 설득한다. 흄은 “우리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을 때 책임이 있다. 그런데 결정론(필연성)이 참이라면 인간 행동과 욕구, 사상 등 모든 것은 인과 법칙에 의해 결정되고 인간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다. 반면 결정론이 거짓이라면 사건은 인과 법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생기는 일이며, 이것도 인간 통제력을 넘어선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스피노자는 흄의 환경론(필연성과 우연성)에 인간 내면의 메커니즘을 덧붙여 결국, 인간이 의지를 자유롭게 발휘할 수 없다고 논증한다. 인간은 비록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우리 사고와 행위를 규정하는 욕망을 의식하면서도 그 욕망을 일으킨 원인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비유한다. “만일 공중으로 던져진 돌멩이가 그 순간 의식을 갖게 된다면, 그 돌멩이는 자신이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있다고 상상하게 되리라.” 스피노자가 보기에 인간의 ‘자유의지’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자신 ‘의지’대로 선택하고 행동한다고 여기지만, 이는 다만 그때그때마다 자신도 모르는 충동에 따라 결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의 요점을 당시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인간은 자기 바깥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에 의해 미리 결정되지 않는 한 자유롭다. 하지만 인간의 그 어떤 행위도 그런 조건은 성립하지 않으므로,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자유란 어떤 행위나 결정이 외부에서 귀결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그 행위자의 본성에서 귀결된 것이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가 신만이 자유롭다고 말한 것은 옳다.” 
















근대 철학자들의 논증뿐 아니라 첨단 장비를 이용한 현대 신경과학자들도 흄과 스피노자 주장을 지지하며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러워한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2018)에서 이 같은 실험 결과를 정리하여 설명한다. “사람들은 자신 뇌 안에 갇혀 있으며, 또한 사회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자신의 핵심적 정체성은 뇌신경망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환상이다. 최신 과학 이론과 최신 기술 장비에 따르면 정신은 어떤 경우에도 조작에서 자유롭지 않다. 심지어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이상인 자유와 사랑, 창의성조차 다른 누군가 목적을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 정신은 조작된 산물이다. 우리는 우리 밖의 세계를 통제할 수 없으며, 우리 자신 몸 안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우리가 통제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자유의지가 없다. 우리 욕망이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의 마술 같은 발현이 아니라 생화학적 과정의 산물이다. ‘자아’는 허구적 이야기다. 우리 정신 안에 스토리텔러가 있어서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바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한다.“ 
















우리는 오늘 점심 식사로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의식적으로 결정한다고 생각하기에 우리에게는 분명히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점심 메뉴를 고르는 아주 간단한 일조차 엄청나게 많은 요인에 좌우된다. 연구 결과는 한 종(種)의 수준에서 보나, 개인 수준에서 보나 식욕은 대체로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 유전자 안에 새겨져 있으며 뇌 회로도 이미 그런 식으로 배선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식욕은 오랜 세월 동안 특정 음식을 더 맛있다고 여기도록 진화해 온 생물학적 특성에 의해 결정된다. 



예를 들어 당신이 태어나기 수십 년 전 친할아버지가 어떤 음식을 좋아했었는지가 오늘날 당신 음식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태어난 네덜란드 인구 집단을 대상으로 한 연구가 있었다. 이 연구는 1944년에서 1945년 사이에 1년 동안을 거의 굶다시피 살았던 독일 점령 치하의 가족에서 태어난 아동들과 독일 점령지가 아닌 덕분에 식량 조달이 훨씬 용이한 환경에서 태어난 아동들의 건강을 비교해 보았다. 그 결과 수정 당시 영양 상태가 심각하게 불량했던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아동들은 나중에 비만과 당뇨병에 걸릴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먹을 것이 귀한 환경에서 잉태된 아이의 신진대사는 나중 모든 것이 풍족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고생한 것이다. 태어나기 전 가혹한 환경 변화에 따라 유전자가 변했고 이런 변화는 다음 세대, 그리고 그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체중과 체형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이는 유전자는 150개 정도가 있다. 그중에는 얼마나 배고픔을 느낄지 지시하는 유전자(이 유전자는 언제 먹어야 하고, 언제 배가 부른지 알려 주는 신호를 뇌로 보낸다)와 쾌락회로에 관여하는 유전자(어떤 사람은 뇌의 보상경로를 자극하려면 더 많은 칼로리가 필요하다. 이들 수용체의 민감도가 떨어지기에 남들보다 더 많이 먹어야 기분이 좋아진다), 뇌가 몸속의 필수 영양분 수준을 감지하여 영양분이 너무 부족하면 더 먹으라고 지시를 내리는 것과 같은 유전자 등이 있다.



사람은 선천적으로 고칼로리나 고당도, 고염도 음식을 선호하게 되어있지만, 이것 말고도 평생에 걸쳐 생긴 온갖 식습관이나 기호는 말할 것도 없고, 개인이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나 만족 지연 같은 것도 작용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그날 호르몬 수치도 영향을 미치고, 당신이 얼마나 지친 상태인지, 당신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지도 영향을 미친다. 짜장면이나 짬뽕을 고르는 일만 해도 거기에 따르는 의사결정 과정은 복잡할 뿐 아니라 대체로 무의식으로 이루어진다.
















흄의 주장처럼 사람들이 이성적일지라도 – 사실 주로 이성적이지 않고 감정적이지만 - 자신이 통제하는 범위 밖의 힘에 영향받으며, 또한 스피노자 주장처럼 감정과 인지 반응 사이에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없기에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전제에 의문을 던진다. 이에 더해 신경과학은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결정을 내리도록 뇌가 조종한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행동하려고 마음먹기 최소 0.3초에서 최대 10초 전부터 행동 관련한 뇌 활동은 무의식적으로 증가한다. 뇌는 사람이 인식하기 전부터 벌써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만약 어떤 행동이 의식적으로 마음먹기 전에 이미 무의식 상태에서 시작되었다면 자유의지 역할은 그 과정에 끼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의식적 의지는 환상에 불과하다.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직관은 우리 내면에 숨겨진 것이 밖으로 표현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보통 생각이 마음에 떠오르고, 그것이 정서를 유발하고, 느낌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느낌이 먼저 일어나고 그 뒤를 이어 정서가 표현된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잘못되었다. 기쁨이나 슬픔이라는 정서가 먼저 나타나고, 기쁨이나 슬픔에 대한 느낌이 그 뒤를 따르며, ‘기쁘다’ 혹은 ‘슬프다’고 말하는 마음의 상태를 규정하는 생각들이 나타난다. 정서 상태가 먼저 오고 느낌과 생각이 그 뒤를 따른다는 점은 사람이 행동하기 전 인식하는 것보다 무의식이 먼저 발현된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신경생리학자들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애초 없다고 주장한다. 자유의지뿐 아니라 자아라는 개념도 물리적 뇌 신경의 착각이다. “우리 인간은 행동에 대한 모든 결정을 스스로 내리는 ‘자아’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계속해서 착각한다. 이 믿음은 떨쳐내기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하고 압도적인 환상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자유의지가 있다는 ‘압도적인 환상’을 갖게 되었을까? 우선 인간 본성 측면에서 살펴보면, 우리에게 정서가 먼저 유발되고 느낌과 생각이 뒤따르는 이유는 진화 과정에서 정서가 먼저 생겨났고 그다음 느낌이 생겼기 때문이다. 정서는 자동으로 자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된 도구다. 신경세포를 활성화시키는 연결망으로 인해 우리 인식보다 결정이 앞서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 행동에 대해 이러한 사전 무의식을 알지 못한 채 나중에야 자신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의식화한다. 즉, 과거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제시함으로써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다. 우리가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이유는 뇌가 인과관계를 추론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 뇌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말이 되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 사실을 조금씩 날조한다. 결국 우리가 결정을 내릴 때 의식적 자아는 그 결정을 가장 늦게 알뿐 아니라 왜곡되어 알게 된다. 신경과학자들이 내린 난처한 결론은 이렇다. “이런저런 일을 하거나 하지 않을 판단은 의식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의식에서 ’드러난다‘고 하는 편이 적절하다.”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압도적 환상’을 양육(사회화)의 측면에서 보면 도덕과 법률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자유의지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고 단순한 환상이라고 한다면, 자유의지에서 유래하는 ‘책임’도 붕괴하고 도덕철학이나 법철학이 성립하지 않을 염려가 있다. 그래서 칸트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도덕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이론을 전개했다. 자유의지에 대한 대중 통념은 한 가지 가정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듯하다. 즉, 우리들 각자는 과거에 우리가 했던 것과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다는 가정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저질렀다면, 그가 그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점을 전제한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주체는 결코 자율적이고 주관적인 주체가 아니다. 인간은 태생 자체가 다른 무수한 원인에 지배받을 수밖에 없다. 인간 의지는 철저히 타율적인 존재다. 우리 의지는 기본적으로 타인 의지에 의해 감염된 ‘최면 상태’와 같이 작동한다. 의지가 자유롭다는 생각, 그것이야말로 일종의 독단이자 사회적 현상에 대한, 그리고 우리 정신 본성에 대한 무지다. 
















프로이트의 양심 이론도 옳고 그름에 대한 생득적 개념이나 절대적 개념의 가능성을 부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프로이트는 인간이 본래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 지를 결정하는 것은 초자아다. 초자아에서 생긴 두려움이 죄책감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정신분석 치료를 받는 사람들이 흔히 자신의 초자아와 싸워서 그것의 요구를 철회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문화가 제시하는 윤리적 요구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불교적 관점에서도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행하는지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행위를 할 때 어떠한 정서 상태에 있었는지 이다. 행위 자체는 단순히 마음 작용의 후속 절차, 즉 반향(反響)일 뿐이다. 정서 상태(emotional states)가 매 순간 활발하게 발현하는 반면, ‘정서 특성’(emotional traits)은 행위 결과로서 창조되어 개인에게 남아 오래 지속된다. 정서 특성은 수동적인 형태로 쌓이고 의식적으로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것은 불교적 사고가 프로이트적 사고 및 현대의 심층 심리학에 매우 가까이 접근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우리 마음속 밑바닥에 숨겨진 성향 또는 잠재적 기질이라고 부르는 어마어마한 영역이 잠자고 있고, 다양한 자극을 받아 이 기질들이 활성화된 상태로 일어난다는 점을 고대에도 이미 잘 이해하고 있었던 듯하다. 이 정서 특성들이 일생에 걸쳐 매 순간 퇴적암 지층처럼 쌓여가고, 깊은 곳에 쌓인 지층은 현재의 경험 안에 격하게 분출될 수도, 잠잠하게 드러날 수도 있다.



특이한 점은 이러한 시각이 자기(self)에 대한 가변적인 시각[無我]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어떤 정서들이 심층에 내재하는 동안, 개인은 저마다 독특한 인성을 갖게 된다. 경험적이고 습관적인 반응을 결정하는 정서 패턴들은 독특한 경험에 의해 긴 시간에 걸쳐 축적되면서 독자적인 형태로 발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환경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배우고, 긴 시간에 걸쳐 퇴적된 잠재 성향은 일련의 습관을 형성한다. 이렇게 학습된 반응에 따라 우리는 순간순간 적절한 방식으로 새롭게 반응한다. 

















우리는 우리 의지로 행한 결과에 따라 뭐든 우리가 얻은 것을 가질 자격이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운명을 전부 통제할 수 없고 우리 성공과 실패는 다른 누군가에게, 가령 신이거나, 운명의 장난이거나, 순간의 선택에 따른 예상 밖의 결과 등에 좌우되는가? 내게 주어진 보상은 행운 덕이지 자유의지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겸손이 시작된다. ‘신의 은총인지, 어쩌다 이렇게 태어난 때문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몰라도 덕분에 나는 지금 여기 서 있다.’ 그런 겸손함은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는 가혹한 성공주의나 능력주의를 넘어설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자유의지의 폭정을 넘어, 보다 더 관대한 공동체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게다가 우리는 굳이 현대 서양의 자유의지 개념이 필요치 않을 수도 있다. 고대에는 자유의지 개념이 거의 전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유의지 자리를 대신할 대안적 견해가 오히려 매력적일 수 있다. 그 대안적 견해란, 개인 수준에서는 습관적 행동을 바꾸기가 쉽지 않지만, 법률 제정이나 정책 입안, 교육 등을 통해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환경을 바꿈으로써 거시 수준의 변화가 만들어진다면 우리가 집단적으로 특정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고 유지해서 집단 수준에서 바람직한 큰 변화를 일구어낼 수 있다. 



일단 개인과 마찬가지로 집단도 병든 신념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의식이 작동해서 만들어 낸 산물이라고 생각되는 신념조차 의식적 자각 없이 일어나는 뇌의 작동으로 결정된다. 평생 계속 이어지는 학습을 통해 뇌 속에서는 새로운 경로가 만들어진다. 과학자들은 이를 가소성이라 부른다. 몇몇  연구에서는 단순히 페이스북 피드를 바꿈으로써 사람 감정 상태를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의식적이고 지적인 활동 결과로 여긴 의견이나 신념 중 상당 부분이 사실은 뇌 기능이 주도하는 감정 반응에 의해 빚어진다는 의미다. 이런 지식을 적용해서 우리의 신념을 역설계(reverse-engineering)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데올로기 스위치’ 설계의 가능성은 한 인간 신념을 일반적으로 어느 정도까지 바꿔 놓을 수 있다. 사람들은 실제로 극적인 사건 결과로, 혹은 삶의 경험이 천천히 축적되면서 자신 생각과 의견을 바꾸기도 한다.



인간의 본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없다. 우리가 종 전체 특성을 공유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 집단이 전체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얘기하는 것 또한 지나친 단순화다. 신념 체계는 집단적 재평가와 그에 따르는 압력 아래에 변하고 진화한다. 집단도 자신 생각을 바꿀 수 있고, 또 실재로 바꾼다. 타고난 선천성과 자율적인 개인의 힘이라는 기존의 지배적 통념에서 멀어져 우리를 이끌고, 인생 결과를 빚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면 기회가 열린다. 

















소크라테스도 모든 악행은 악의가 아닌 제대로 학습하지 못한 무지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만약 우리 실수가 미칠 영향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특정 덕목에 대한 참된 이해는 도덕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윤리적 사고를 펼쳐 나감에 있어 기원전 5세기 당시 그리스에 널리 퍼져 있던 도덕관념에 크게 반발했다. 소크라테스 임무는 의지의 나약함이라는 널리 퍼져 있는 일반적인 생각이 왜 사실상 잘못인가를 보이는 것이다. 의지 나약함은 한 개인이 어떤 행위가 그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쾌락을 추구하려는 욕구에 압도되어 결국 그 행위를 해야겠다고 생각할 때 – 즉 개인 의지가 유혹을 이겨낼 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을 때 – 발생한다고 대부분 사람은 생각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런 개인이 사실상 자신 입장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지니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수행하려고 선택한 행위가 – 즉 자신이 나쁜 것이라고 믿지만 자신에게 쾌락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되는 행위가 – 사실상 결국 고통을 주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나쁜 행위를 한 것은 다름 아닌 무지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자신 행위가 선을 산출할 것이라고 믿고 있으나 그의 이러한 믿은 잘못된 것이다. 
















니체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건 행위가 아니라 태도며, 잘못된 행위는 몰이해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이렇게 비유한다. “어린아이가 동물에 대해 보이는 잔인함은 어린아이의 몰이해에서 비롯된다. 그 아이는 동물이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결국 어떤 행위가 악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늘 ‘어리석은 행위’일뿐이다. 그런 행위를 선택했던 지성 정도가 너무 낮았던 것이다. 타인 고통을 유추할 수 있는 능력, 우리 기억과 상상력을 활용해 고통을 주는 행위에 대해 혐오감을 느낄 수 있는 능력, 이것은 오로지 배움에 의해 가능해진다. 배움이 커지면 해석도 달라진다.



이런 과정을 거칠 때 우리는 ‘도덕적 인류’에서 ‘현명한 인류’로 진화해간다. 모든 것을 자유의지에 따른 죄악으로 보는 관점에서 지성 정도에 따른 어리석은 행위로 보는 관점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지은 게 아니라 어리석은 행위를 한 것이다. 지금의 최고 지성도 언젠가는 더 우월한 지성에 의해 추월당할 것이므로 우리는 여전히 어리석다. 범죄자를 니체적 개념에서 하나의 ‘어리석은 자’로 보자. 이렇게 범죄자에게서 자유의지를 제거하면 죄라는 개념과 벌이라는 개념도 세계에서 추방된다. 형벌을 가해 범죄자에게 보상받고자 하는 복수심까지도 극복해 나가야 한다. 사악한 자유의지가 문제라면 거기에 대한 벌은 분노하는 자의 자의에 의해 무한대로 커질 수도 있지만, 남에게 끼친 손해에만 집중한다면 벌은 정확히 계량 가능한 것이 되어 원한의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다.



악한 행위를 한 사람이 자신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도 모르고 있다면 그에게 벌을 내리는 게 가능할까. 벌은 행위의 모든 의도를 다 알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가능한 법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태반이다. 우리는 우리 본능과 육체, 정신 운동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도 않다. 따라서 우리는 범죄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명명할 수 있어야 한다. 범죄자에게서조차 죄를 빼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낯설며, 일부 철학자나 과학자 사이에서나 공허하게 떠도는 이야기라 여겨질 수 있지만, 범죄자에게 자유의지가 없었다고 보고 처벌보다는 진짜 ‘교화’ 관점에서 운영되는 교도소들이 있다.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남쪽으로 약 96킬로미터 떨어진 숲에는 세계에서 가장 이상한 교도소 중 하나가 있다. 그곳은 마약 밀매범, 성범죄자, 살인범 약 250명이 수감되어 있는 노르웨이에서 두 번째로 큰 감옥이지만, 감방이나 철장을 볼 수 없으며, 권총이나 수갑으로 무장한 교도관도 볼 수 없다. 교도관들은 ‘우리는 그 사람들과 이야기한다. 이야기가 우리 무기다’라고 말한다.



할렌(Halden) 교도소 수감자에게는 바닥 난방을 갖춘 개인 전용 방이 주어진다. 평면 텔레비전과 전용 욕실, 수감자들이 요리할 수 있는 주방에는 자기로 된 접시와 스테인리스스틸 칼이 있다. 또한 도서관과 암벽등반 연습용 벽, 수감자들이 자신 음반을 녹음할 수 있는 음악 스튜디오까지 완비하고 있다. 



할렌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만 더 가면 마지막 형량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중범죄자 115명이 수감되어 있는 그림 같은 섬 바스퇴위가 나온다. 수감자와 교도관이 함께 버거를 뒤집고 수영을 하고 느긋하게 햇볕을 쬐고 있다. 솔직히 교도소 직원과 수감자를 구분하기가 어렵다. 바스퇴위 교도관들은 유니폼을 입지 않고 수감자와 함께 같은 테이블에 앉아 함께 식사하기 때문이다. 섬에서는 영화관과 일광용 베드, 스키 슬로프 2개가 있어 온갖 종류의 일을 할 수 있다. 섬에는 교회와 식료품점, 도서관도 있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미쳐버린 건가? 수많은 살인자를 휴양지로 보내는 형을 선고하는 것은 얼마나 순진해빠진 행동인가? 바스퇴위 직원에 의하면 이는 더없이 정상적인 일이다. 그들은 수감자와 친구가 되는 것이 그들을 하대하고 모욕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배운다. 노르웨이에서 교도소는 나쁜 행동을 예방하는 곳이 아니라 나쁜 ‘의도’를 예방하기 위한 곳이다. 교도관들은 수감자들이 정상적인 삶을 준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들 의무라고 생각한다. 이 ‘정상성 원칙’에 따르면 벽 안의 삶은 가능한 벽 밖의 삶과 비슷해야 한다. 
















우리 선조들은 코페르니쿠스와 뉴턴, 다윈, 아인슈타인 개념을 처음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우주에서 인간 자리를 재평가해야 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자유의지 개념도 그와 비슷한 사상 붕괴의 여정을 출발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분명 그 통찰에 담긴 함축적 의미와 윤리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 신념이 역사와 사회 산물임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덜 독단적이 되고, 다른 사람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된다. 누구도 완벽하게 객관적일 수 없고, 누구도 객관적 진실을 완전하게 깨우쳤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자신이나 외부 대상과 맺는 관계를 변형시킨다. 우리 상처를 치유하고 타인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누군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잘못을 가한 것이 아니란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의 행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의도적인 것은 아니다. 부처님 말씀처럼 각각의 사건과 사람을 셀 수 없이 많은 조건의 결과로 봄으로써[緣起] 하나의 사건이나 단 한 사람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게 한 구조적 원인을 알게 될 때 우리 미움과 괴로움은 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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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열린책들 세계문학 54
볼테르 지음, 이봉지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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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팡글로스는 형이상학적, 신학적 우주론을 강의하였다. 그는 다음 같은 사실을 멋지게 증명해 보였다. 즉 원인 없는 결과란 없으며, 우리의 세계는 가능한 모든 세계 중에서 최선의 세계며, 남작 각하의 성(城)은 이 세계의 성 중에서 가장 멋진 성이며, 남작 부인은 가장 좋은 남작 부인이라는 것을 증명했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은 쉽게 증명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 목적이란 가장 좋은 목적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일례로 코는 안경을 얹기 위해 만들어졌고, 그래서 우리는 안경을 씁니다. 다리는 양말을 신기 위해 만들어졌고, 그래서 우리는 양말을 신습니다. 돌은 원래 성을 짓는 석재로 쓰이기 위해 생성되었습니다. 그래서 남작 각하는 멋진 성을 소유하고 있지요. 왜냐하면 이 지방에서 제일 유력한 남작은 가장 좋은 성에 살아야 하니까요. 또 돼지는 식용으로 쓰이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1년 내내 돼지고기를 먹습니다." pp 10-11. - P10

그들은 캉디드에게 법률을 들먹이며 그 연대의 모든 군인들로부터 서른여섯 대씩 얻어맞는 태형 아니면 머리통에 총알 열두 발을 한꺼번에 맞는 총살형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였다. 캉디는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은 둘 중 어느 쪽도 원치 않는다고 강변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쨌든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결국 그는 신이 은총으로 내려 준 자유의지로 서른여섯 대씩의 태형을 선택했다. 연대에는 총 2천 명의 군인이 있었다. 그들이 2열로 늘어선 사이를 한 번 왕복하는 동안, 그는 도합 4천 대를 맞았다. 그러자 머리에서 엉덩이까지 신경과 근육이 모두 터져 나왔다. 막 세 번째 차례가 시작되려고 할 때, 캉디드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차라리 머리를 부숴 달라고 빌었다. pp 16-17.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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