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중세 후기가 되자 신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새로운 계급, 곧 상인 계층이 번성했습니다. 상인은 당시 영주와 성직자, 기사, 농노로 이어지는 봉건제 피라미드에서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상인은 농노를 자유민이라고 이름 붙인 임금노동자로 삼기 위해 영주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인은 또한 자신이 번 재산을 지키기 위해 사회가 안정되길, 소유권이 보장되길 원했습니다. 그들은 돈이 넘쳤는데, 세입을 늘리는 데 한계가 있던 국가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습니다. 왕은 상인들에게 세금을 늘려 국가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상인과 국가가 함께 공생하며 발전하는 체계가 만들어졌습니다. 



신에게 사랑받지 못한 상인 계급은 자신들 위상을 강화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당시 유럽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했던 이슬람 세계가 상인들 소망을 이룰 방안이 되었습니다. 상인들은 십자군 전쟁 원정이나 스페인의 레콩키스타(Reconquista, 이슬람교 우마이야 왕조가 정복한 이베리아 영토를 가톨릭 국가 스페인이 다시 회복한 사건)로 이슬람 세계가 그동안 연구한 그리스-로마 문명을 접하게 되고 기독교 이전 고전 사상에 탐닉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상은 중세 신학자들이 보잘것없고 덧없는 존재로 여겼던 바로 ‘인간’입니다. 무역이 발달했던 고대 그리스인에게 인간은 독립적이고 지적이며, 모험심이 강한 능력 있는 존재였습니다. 중세 상인들에게 이러한 인간형은 전형적으로 돈을 잘 버는 바로 자신들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르네상스 시기(14~16세기) 상인 계급은 인본주의라는 뿌리를 고대 그리스에서 캐어내 자본주의에 이식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가치와 능력을 인정하며 상인의 경제적 역할을 강조하는 사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자신만의 기준, 즉 인본주의로 세계를 판단하기에, 예컨대 ‘식물과 동물은 인간에게 양분을 제공하기 위해 존재한다’라는 식의 목적론 세계관을 가지게 된다고 비판합니다. 철학자 볼테르(1694-1778) 또한 자신의 풍자 소설인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1759)에서 목적론적 세계관을 꼬집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은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 목적이란 가장 좋은 목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례로 코는 안경을 얹기 위해 만들어졌고, 그래서 우리는 안경을 씁니다. 다리는 양말을 신기 위해 만들어졌고, 그래서 우리는 양말을 신습니다. 돌은 원래 성을 짓는 석재로 쓰이기 위해 생성되었습니다. 또 돼지는 식용으로 쓰이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1년 내내 돼지고기를 먹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자연물이 어떤 목적을 위해 작용한다고 추측합니다. 하지만 자연은 아무런 목적이 없으며, 모든 목적인(目的因)은 인간이 만들어 낸 허구에 불과합니다. 목적론 사고 속에서 사물은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본질만 가지며, 그러한 본질을 향해 나아가는 미완(未完)의 존재로 간주됩니다. 사물 변화는 오직 본질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으로 설명되며, 이에서 벗어난 것은 비본질적이고 비정상적일 뿐입니다. 이러한 목적론 사고가 갖는 위험성은 ‘차별주의’ 논리로 쉽게 전용됩니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차별주의적 목적론식 사고 바탕이 다름 아닌 ‘인본주의’ 사고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인 이상 애초부터 인본주의 사고에서 벗어날 순 없지 않을까요? 하지만 스피노자는 우리가 차별주의 사고에서 벗어나 그 ‘외부’를 사유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예컨대 현재 우리는 남자와 여자를 평등한 이분법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분법은 서양 역사에서 최근 들어 보편화된 생각입니다. 고대부터 르네상스시기에 이르기까지 인간 분류 방식은 하위 속물에서 상위 이상형 상태까지 위계적 연속체를 이룬다는 ‘단성 모델’이 선호되었습니다(단성 모델에서 남성은 더 열정적이기에 단일 사다리의 맨 위에 있고, 여성은 힘이 상대적으로 약하기에 단일 사다리 밑에 위치합니다). 물론 그때에도 인간을 크게 여자와 남자 두 무리로 분류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이상적인 형태는 남성 단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과거부터 계속되어 온 여성 억압의 원인을 이해하려면 범주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은 외부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는 범주를 통해서 자연을 차별적으로 이해합니다. 이 점을 잘 알면서도 사람들은 어떠한 범주가 너무나 명확해서 시간과 문화를 초월해서 절대 변하지 않을 것으로 여깁니다. 인도의 승려로서 대승불교의 교리를 체계화하는 데 크게 기여한 용수(龍樹, 150?~250?)는 말[言]이 의미하는 그대로 실재도 그렇다고 오인하는 일을 ‘희론’(戱論: 부질없이 희롱하는 아무 뜻도 이익도 없는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이것과 저것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구분하여 분류하는 일은 사물 그 자체와 무관하게 ‘말의 차이’ 또는 ‘개념 차이’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말에 따라 보이는 세상도 달라집니다. 우리 현실에서 무엇인가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것은 ‘이름’이 아닙니다. 이름을 붙인 이후에는 이름 그대로의 확고부동한 차별적 ‘진실’로 탈바꿈되고 맙니다. 

















장자(BC 369?~286) 역시 사람들이 사물을 분절하고 이름을 붙이고 정돈하는 방식 자체에 회의의 시선을 던졌습니다. 분류의 다양성 같은 분류 문제에 부딪쳤을 때 겪는 어려움이 시사하듯, 장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계’란 사실 인간이 자신의 그물을 던져 만들어낸 매우 인간 중심적 사고라고 봅니다. 인간은 그렇게 형성된 ‘세계’에서 살아가며, 각 시대와 문화, 입장, 편견 하에서 그것을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갑니다. 게다가 이런 주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세계에 갖가지 가치를 투영해 사물들을 위계화하고 온갖 형태의 ‘시비를 가리고자’ 합니다. 장자는 기존 인식과 가치 전체에 매우 급진적인 비판을 가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넘고 해방되어 세계를 바라보고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도그마를 경계하며, 각종 도그마에서 벗어나는 도(道)를 추구해야 한다고 장자는 말합니다. 
















서양 철학사에서도 어떤 것들이 이름을 얻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 사상이 있습니다. 이 사상은 정의나 향수, 무한, 사랑, 죄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 누군가가 그것에 이름을 붙일 때 존재하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개념은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쟁이나 휴전, 파산, 사랑, 순수, 죄책감을 선언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을 수 있습니다. 이렇듯 아이디어를 상상의 영역에서 세상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이름 자체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명론에 따르면, 이름이 존재하기 전까지 개념들은 대체로 불활성 상태에 있습니다. 

















유명론은 특히 유럽 중세 철학자 피에르 아벨라르(1079~1142)와 함께 등장했습니다. 아벨라르는 개념이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나 문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아벨라르는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서구 사상의 대전제에서 벗어났습니다. 그에게 개념은 논리학이나 언어학의 대상이지 존재론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개념에 존재론적 함의를 부여할 수는 있습니다. 예컨대 개념에 대한 탐구를 통해 우리는 감각으로 지각할 수 없는 많은 것(예컨대 관계, 집합, 수 등)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아벨라르는 이런 존재에 플라톤이 말한 실재성을 부여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신학자 윌리엄 오컴(1287~1347)은 논리학에서 다루는 개념은 더 이상 실재하지 않는다고 더 멀리 밀고 나갔습니다. 그렇다고 그 개념이 무의미하다거나 무가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명제, 추론 형식, 종과 유 같은 개념은 여전히 중요하며, 인간 사유의 고유한 성취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객관적인 실재가 아닙니다. 객관적 진리와 논리적 타당성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오컴이 이렇게 생각한 데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만일 개념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을 위해 동원되는 추상물이라면, 인식은 개념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구성’되는 것입니다. 이론적 존재는 발견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론적 존재는 우리가 대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동원하는 고안물이며, 인식이란 이 고안물을 통해 경험을 구성하는 일입니다. 달리 말해, 인식이란 세계를 그대로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현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그것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대상을 지칭하는 단어가 단순히 하나의 명사라고 해서 그 대상이 하나일거라고 착각해선 안 됩니다. 예컨대 명사 ‘정신’이 있기에 그 명사가 표현하는 대상이 한 가지일 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둘 중 한 가지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하나는 정신이 곧 뇌라고 결론 내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뇌는 질량과 부피를 갖는 반면, 생각은 둘 중 어느 쪽도 갖지 않기에 이 발상은 맞지 않습니다. 혹은 정신이 분명히 어떤 비물질적인 실체, 혼이나 유령이라고 잘못된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일단 정신이 결코 단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만 깨달으면 이런 얼토당토않은 결론을 내리는 상황을 피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가 정신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원하고 욕망하고 이해하고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 모든 일을 하기에 인간에게 정신이 있다고 말합니다. 진짜 정신이 무엇인지 아직 알 수는 없지만, ‘범주의 오류에 빠지지 말라’는 교훈은 언어의 속성과 세계의 속성의 혼동을 막아주는 유용한 안내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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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환경부에 따르면 중국 경제 성장 때문에 발생하는 생태계 파괴 비용은 국내 총생산의 10퍼센트 내지 12퍼센트에 해당합니다. 곧 국가 경제 성장률과 똑같은 수준입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제 성장이 만족스러운 삶을 자동으로 만들어낸다면 우리는 지금쯤 낙원에서 살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찔할 정도의 경제 성장은 생태계를 더욱 파괴합니다. 국민 총생산이 마치 ‘국민 삶의 질 총계’나 ‘국민 쾌락의 총계’, ‘국민 행복의 총계’를 의미하는 것처럼 취급되는 경향이 있지만, ‘국민 총생산=국민 오염 생산의 총계’라는 방정식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















예컨대, 기업들은 생수가 깨끗한 물이라고 광고하기에 우리는 생수가 아닌 수돗물을 그냥 마시기 꺼립니다. 그렇다면 과연 생수가 정말로 더 깨끗하고 안전한 물일까요? 화산 활동으로 생성된 현무암의 지반으로 걸러졌다는 둥, 구름까지 뚫고 올라가는 스위스의 명산에서 채취했다는 둥, 숫제 천사의 눈물을 받아왔다는 둥 온갖 이유를 붙인 고급 생수가 고작 세 컵 분량에 5달러가 넘게 팔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 수돗물 99퍼센트가 음용 가능할 뿐 아니라, 사실 많은 사람이 생수라고 생각하며 마시는 물은 그냥 수돗물입니다. 병으로 판매되는 물 중 절반 이상이 약간의 처리 과정을 거친 수돗물이며, 양대 생수 브랜드인 펩시의 아쿠아피나와 코카콜라의 다사니는 그저 디트로이트시가 제공하는 물을 한번 걸러서 플라스틱 병에 담아 파는 것에 불과합니다. 병에 들어 있는 물을 생수라고 마실 때마다 우리는 이런 엄청난 사기극에 속는 동시에 거들고 있는 셈입니다. 생수를 구입하면 4.5리터짜리 한 병에 평균적으로 1.5달러를 내게 되는데, 이는 우리가 같은 양의 수돗물을 사용할 때 내는 돈의 2천배에 육박합니다. 이것은 고스란히 경제 ‘성장’에 반영됩니다.



우리는 사실상 거짓말이나 다를 바 없는 무언가에 어마어마한 돈을 쓰는데, 그런 소비를 별개로 보더라도 그 막대한 플라스틱 병 사용으로 인한 환경 파괴가 실로 엄청납니다. 생수 한 잔에는 같은 양의 수돗물에 비해 2천 배나 더 많은 에너지가 소비됩니다. 미국만 놓고 보더라도 플라스틱 생수병의 70퍼센트는 곧장 매립되며, 토양을 오염시키고 물길을 막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캘리포니아와 하와이 사이 어딘가에 텍사스 주의 두 배 정도 크기로 넓은 플라스틱 부유물 ‘섬’이 만들어지고 말았습니다. 

 















물 같은 식품에 대한 수요는 탄력적이지 않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음식이 싸더라도 정해진 음식 양 이상을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사실이 식품 회사들에 의미하는 바는 식품산업 성장률이 인구 증가율(또는 감소율)과 대략 동일할거란 점입니다. 식품 회사들은 그런 미미한 성장률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맥도날드 같은 회사가 인구 증가율보다 더 빠른 발전을 원할 경우 두 가지 선택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똑같은 양의 음식에 돈을 더 많이 쓰도록 하든지 아니면, 실제로 더 많은 음식을 먹게 하는 것입니다. 식품산업은 이 두 가지 전략을 동시에 구사합니다.



세계 경작지에서 한해 생산할 수 있는 총 칼로리는 정해져 있습니다. 가공식품은 과도한 양의 칼로리 에너지를 소비하고 또 낭비합니다. 멕시코인이나 아프리카인처럼 옥수수를 직접 먹으면, 옥수수 안에 있는 모든 에너지를 섭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옥수수를 소나 닭, 돼지에 먹이면, 에너지 90퍼센트는 잃어버리고 맙니다. 채식주의자들이 ‘음식사슬의 낮은 단계’에 있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음식사슬에서 한 단계 올라갈 때마다 음식 에너지 양이 10분의 1로 감소합니다. 한 명이 점심식사로 햄버거 1칼로리를 섭취했다면 옥수수 수만 칼로리를 낭비한 것 있습니다. 그 정도면 굶주리는 수많은 사람 배를 채워줄 수 있습니다. 
















헤겔(1770~1831)의 역사철학은 역사를 자유로운 의식의 진보 과정으로 보는 개념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세계사란 자유의식에 있어서의 진보 과정이며, 우리는 그 과정의 필연성을 인식해야 한다.” 근대 역사철학 자체는 진보라는 이념과 더불어 탄생한 근래의 사상입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세상이 실제보다 이해하기 쉽고 설명하기 쉬우며, 결국 예견하기도 쉽다는 병리적 사고에 빠져있습니다. 적어도 역사에 변증법 같은 어떤 법칙이 있어서, 모순(혹은 대립)을 통해 인류가 고도 사회로 상향 발전한다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작위적입니다. 















헤겔 사상에 반대했던 철학자 쇼펜하우어(1788~1860)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명의 진보가 우리 문제를 고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진보는 새로운 욕구를 가져다 놓으며, 새로운 욕구와 더불어 새로운 고통과 새로운 형태의 이기심과 부도덕을 가져올 뿐이기 때문이다. 소위 덕목이나 노동에 대한 사랑이나 인내, 절제, 검약은 세련된 이기주의에 불과하다.” 그러면서 그는 성경 한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리라.”<잠언 1:18>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1917~2012) 또한 역사는 진보한다고 생각하는 습관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진보는 지속적으로 상향 선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거대한 재앙 가능성을 동반할지도 모른다고 예측하는 것이 훨씬 올바를 것이다. 더 치명적인 세계대전, 생태학적 재앙, 인간이 더 이상 거주할 수 없는 세계를 만들지도 모르는 기술 등 어떠한 형태로든 나타나리라 생각되는 악몽이 바로 그와 같다. 우리는 지난 묵시록에서 살았던 경험으로 이러한 가능성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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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을 정치학과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은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기 보다는 그냥 놔두는 편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믿음입니다. 시장경제는 완벽하게 작동하기에 시장에서 정부가 필요 없다는 것이죠. 애덤 스미스는 시장이 개인 이익 추구의 원리와 더불어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만유인력처럼 작동한다고 보았습니다. 그 결과 경제학에서 자유방임주의 이론이 생겨났습니다. 자유방임 경제 철학은 비간섭 원리로서, 세상의 체제는 자율적이기에 더 낫게 하려고 시도해보았자 더 나빠질 뿐이므로 그냥 놔두라는 권고입니다. 18세기 경제학자들은 신이 경제법칙을 자연법칙과 똑같이 창조했기에 틀림없이 좋은 것이라고 가정하며, 경제학을 정치학과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죠. 18세기 사상가들은 신이 이성적인 계획에 따라 세상을 만들었으며, 뉴턴(1643~1727)이 이성을 사용하여 신의 계획을 발견해냈다고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찮은 인간이 무한하게 넓은 신의 뜻 – 특히, 선한 신이 악(惡)을 왜 창조했는지를 결코 헤아릴 수 없다는 예전 믿음은 더 이상 새로운 뉴턴 시대에 양립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뉴턴의 발견과 이 발견 위에 세워진 자연신학의 전반적인 요점은 뉴턴이 실제로 신의 마음을 헤아렸으며, 그것을 수식으로 증명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18세기 사상가들은 악의 문제에 답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이들 추론 과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신은 지극히 그리고 완전히 선하다. 정의상 신은 악을 행할 수 없다.

· 신은 뉴턴이 밝힌 대로 이성과 논리, 수학 같은 법칙에 따라 우주를 창조했다.

· 이 두 가정은 서로 상반될 수 없다. 만약 상반된다면 신은 전능하기에 이를 미리 알았을 것이며, 신의 선함으로 인해 이성에 따라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 게다가 만약 이성의 법칙으로 인해 신이 하나보다 더 많은 종류의 세계를 만들 수 있었다면, 신은 선한 존재이기에 모든 가능한 세계 가운데 가장 최상의 세계를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 따라서 이 세상은 가능한 모든 세계 중 최상이다.



당시 대다수 사상가는 만약 이 세계가 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 최상이라면, 변화시킬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계의 모든 악과 고통은 신의 계획 일부이기에 전체 체계에 어떻게든 이득이 됨이 틀림없습니다. 신이 운동 법칙으로 물리 세계를 창조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스스로 작동하듯, 신은 인간 세계를 (인력이나 척력이라는 자연법칙과 유사한) 사회적 상호작용 법칙으로 창조하고, 이 법칙에 따라 가장 조화로운 사회 질서가 마련되었습니다. 이 모든 사상의 최종적인 결과는 자유방임이라는 근본 원리에 바탕을 둔 경제학 철학이었습니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은 “자유방임주의 사상은 청교도주의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며, “하지만 중세나 근대와 달리 신학적 기반을 떠난 현대 사상에서 자유방임 같은 자연 상태 이론은 공감대 형성 부족으로 불완전 이론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합니다. 















철학자이자 정치경제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은 적어도 생산 영역에서만 ‘경제법칙’이 성립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자연에 영향 받는 생산은 필연의 법칙에 지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분배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입니다. 분배는 필연이나 사실 차원[경제]이 아니라 당위나 가치 차원[정치]의 문제입니다. 생산과 분배 사이에는 굵은 분절선이 존재합니다. 그리스 금언이 말해주듯, ‘주어진 것을 선용(善用)하는 것’, 즉 우리 삶에서 주어진 것을 잘 만들어가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공정한 분배를 하려면 사람들이 따라야 할 분배의 가치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치기준이 개인 필요가 아니라 공동체의 집단적 필요에서 나온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가치기준도 자연권으로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가치기준에 정답은 없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언합니다. 따라서 가치기준의 정당성은 미리 전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만들어나가야 하는 대상이 됩니다. 공정한 분배를 위해 사회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회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끝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현실의 시장에서는 개인들 권력이 평등한 것도 아니고 개인만 자원 배분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분명히 어떤 사람은 더 큰 자원 배분 권력을 갖고 있으며, 다른 사람은 자원 배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집단을 만듭니다. 그 결과 주요한 경제적 자원 대부분은 이러한 사람들과 집단들에 의해 권위적으로 배분됩니다. 토지와 화폐, 노동 같은 대부분의 주요한 경제적 자원은 항상 정치적으로 배분되고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정치와 권력이 배제된 순수한 시장에 의한 자원 배분은 불가능하며, 시장에만 맡기는 그 순간에도 시장 내부에서 정치와 권력은 작동합니다. 그러므로 경제에 정치와 권력이 부재하는 상황을 가정하거나 바라는 것은 지극히 비현실적입니다..

 
















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묻어 들어 있음’(embeddedness)이란 개념을 항상 자신 논리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인간 경제는 여러 시장이 통합되어 균형을 찾아가는 체제가 아닌, 항상 사회에 ‘묻어 들어가 있다.’ ‘묻어 들어 있음’이라는 말은, 자유주의 경제 이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시장이 그렇게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경제가 정치와 종교, 사회관계에 종속되어 있다는 생각을 표현한 말이다. 반면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자기조정 시장’ 체제는 거꾸로 사회를 시장 논리에 종속시킬 것을 요구한다.”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는 완전경쟁 자유방임 시장 이론의 전제는 만약 그 이론이 현실과 닮았다면 이론의 결과 또한 현실에 근접하리라는 추론입니다. 그런데 경제학자 켈빈 랭카스터(1924~1999)와 리처드 립시(1928~ )는 자유방임 옹호자들이 지난 수십 년간 그렇게 주장한 논의는 유감스럽게도 오류라고 지적하며, ‘차선’(次善)이론을 설명합니다. 차선이론은 ‘차선’인 시장, 즉 완전경쟁 시장에 ‘거의 근접하는’ 시장이라고 할지라도 세 번째나 네 번째로 좋은 시장, 혹은 아예 완전히 비경쟁적인 시장보다 더 효율적이라고 보장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경제학과에 입학한 학생들이 그래프와 미적분학의 기초를 간신히 배우고 나면 느끼는 좌절감, 곧 경제학은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느낌은 완전경쟁 자유방임 시장 개념을 배울 때 극대화됩니다. 하지만 미시경제학 교과서도 이미 그 정도의 반감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완전경쟁 자유방임이라는 개념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현실을 분석하기 위한 준거점으로 중요하다는 설명을 덧붙입니다. 경제학자들은 완전경쟁 자유방임 경제 모델은 실제 실물경제와 비교할 때 단순화한 것이자 추정치이기는 하지만 정책 수립은 물론 예측에도 유용하게 사용되기 마련이라고 말합니다. .















우리는 완전경쟁 시장이 실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준거점이라고 가정해보죠. 우리는 자유로운 선택을 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고 이성적인 개인이며, 시장에 참여하는 권한과 정보가 공평하게 분포되어 있다고 가정합니다. 그리고 가격은 시장에 의해서 결정되고 시장의 완전경쟁 조건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가정합니다. 자유방임주의자들은 시장을 ‘가능한’ 경쟁적으로 만들기만 하면 그 결과는 이상(理想)에 확실히 근접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점이 랭카스터와 립시가 밝혀낸 오류입니다. 만약 현실이 완전경쟁의 이상과 한 군데라도 어긋나면 최선의 결과를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완전경쟁에 가장 근접한 상태에서 얻어지는 결과일지라도 어떤 다른 차선책에서 얻어지는 결과보다 훨씬 못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완전경쟁 요건을 더 많이 충족시킬수록 – 전부 충족시키지 않는 한 – 완전효율이라는 이상에서 더욱 멀어질 수 있습니다.



특히, 부정적 외부효과(공해, 소음, 악취 등)가 발생하는 경우 재화 가격에 외부효과 비용이 반영되지 않습니다. 자유방임주의 수호자들은 이에 대해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말합니다. 어느 한 분야에서 정상적으로 가격이 매겨지지 않더라도 나머지 부문을 전부 경쟁적으로 만들면 올바른 가격 수준에 근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차선이론이 바로 그러한 정책 해법으로는 효율성을 증대시킬 가능성이 낮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일부 가격이 잘못됐으면 나머지 가격이 정확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일부 가격이 왜곡되어 있는 경제에서 다수를 시정하면 상황이 오히려 악화될 수 있습니다. 



차선이론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점은, 일반균형 모형에서 유용한 정책안을 끌어내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단순한 도구는 현실에서 무엇이 최선일지 알려주지 못합니다. 차선이론이 가져온 가장 주된 파장은 경제학자들과 그 추종자들을 ‘겸손해지게’ 만들었다고 립시는 설명했습니다. 차선이론은 극도로 이상화된 하나의 모형을 근거로 시장 효율성에 관해 한 마디로 단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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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3-11-02 16: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완전경쟁 시장이 현실에서 완전히 불가능한 이상, 시장지상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정부 개입을 통해 파레토 개선이 가능하지요. 정부의 역량이 문제될 뿐이지 정부개입의 당위성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23-11-02 17:08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합니다.^^
네, 맞습니다. 완전경쟁 자유방임 시장은 단어 그 자체로 말도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고 학교에서도 여전히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사실(事實)의 사실(史實)이 궁금했고, 그 역사가 뉴턴과 연계된 점이 흥미로워 글로 남겨보았습니다.^^

혹시 말씀하신 파레토 개선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어떤 사람들 여건을 개선시키는 변화(부유하게 만드는 변화)는 가능하다’라는 파레토 최적을 언급하신 것인지요?

제가 파레토 최적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는 못합니다만, 우선 파레토 최적이 가능하다고 해도 전 파레토 최적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부자들 재산은 흠잡을 데가 없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파레토 최적이 사용되는 것 같아 불편합니다. 파레토 최적은 불평등한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단지 부자가 더 많은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소득 차이는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더욱이 파레토 최적은 외부효과를 고려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외부효과 없이 어떤 사람 여건이 개선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누군가는 우리 후손일 수도 있습니다. A와 B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이 A의 손해 없이 B에게는 이익이 되지만 C에게 손해가 된다면 – 환경 오염같은 사례 – 그것은 다른 문제인 것 같습니다.

끝으로 파레토 최적이 정말 가능한지 무척 의심이 듭니다. 권력의 정도가 서로 많이 다른 인간의 갈등 세계에서 다른 사람을 가난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어떤 사람을 부유하게 만드는 변화가 얼마나 가능할지 의구심이 듭니다. 그러한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얼마나 될지 매우 궁금합니다. 따라서 파레토 최적 이론을 적용할 수 있는 범위가 매우 협소해 보입니다.

추풍오장원 2023-11-02 17:46   좋아요 1 | URL
‘파레토 최적‘은 단순히 말하자면 시장지상주의자의 이상이 실현된 상태,
‘파레토 개선‘은 파레토 최적으로 가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파레토 개선이 불가능한 상태를 파레토 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파레토 최적은 효율성 외에는 어떤것도 고려하지 않는 극단적인 개념이므로,
파레토 개선의 과정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지는 정책에 따라 달라집니다.
소득분배의 개선과 함께 시장효율성도 개선되는 방향이 될 수도 있고, 시장효율성만 개선되는 방향이 될 수도 있지요...
현실적으로 시장의 위력을 부정할 수 없고, 현실의 제약조건을 고려하여 정책을 만들어야 하니
현 경제 체제에서는 정부개입을 통하여 소득분배의 개선을 추구하는게 바람직하다고 생각됩니다.

북다이제스터 2023-11-02 17:4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제가 파레토 개선과 파레토 최적 차이를 잘 몰랐습니다. ㅠ
 



행복은 선택할 수 없는 문제일 뿐 아니라, 물질적 부(富)를 추구하는 행복은 절대적 빈곤보다 더 민감한 상대적 빈곤 문제를 일으킵니다. ‘오늘날 가장 궁핍하게 사는 사람조차 수백 년 전 왕보다 더 잘 사는 데 몇몇 사람이 엄청 잘 사는 게 뭐가 그리 대수로운가?’라고 생각한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상대적으로 더 큰 빈곤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역사학자이자 철학자인 윌 듀런트(1885~1981)는 “가난은 부(富)에 의해 만들어지며, 부가 눈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까지 우리는 가난이 가난인 줄 모른다”라고 말합니다.

















과거에 평범한 사람은 부자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잘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누구든 백만장자가 어떻게 삶을 사는지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은 부자들의 호화로운 삶을 비정상적일 정도로 크게 보도합니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에서 어마어마하게 돈이 많이 부자들의 집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부자들의 라이프스타일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자 ‘소셜 미디어로 생긴 불만’이라는 증상이 생겼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평생 절대 소유할 수 없는 모든 것을 괴로울 정도로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든 다른 형태의 대중적 노출이든, ‘소셜 미디어로 생긴 불만’은 보통 사람이 소유한 것을 하찮게 보이도록 합니다. 비록 그 사람이 객관적인 기준에서 삶을 넉넉하게 누리고 있고, 인류 역사 전체 기준에서 극히 잘 사는 사람일지라고 그렇습니다. 

 















사회운동가 홍세화(1947~ )는 “성공한 자의 거머쥔 부를 동경하는 것은 ‘90퍼센트 사람들’이 덥석 문 당근이다. 그 가능성은 로또복권 당첨 확률에 불과하지만, 모두 성공 예감으로 뜀박질하도록 내몰아 기대하는 미래상으로만 자신을 일치시키고 오늘의 자신을 배반하도록 한다”라고 말하며, 그 이면을 깨달아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내 생각은 내가 주체적으로 형성한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이 나에게 갖도록 요구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간파해야 한다.” 
















그렇다면 상대적 빈곤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모든 사람을 가장 가난한 사람만큼 가난하게 만들어 간단히 평등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명백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은 원래대로 가난하지만, 나머지 모든 사람은 해를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평등을 추구하는 일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인정한다고 해서, 불평등을 그냥 받아들여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불평등이 용인될 수 있는 경우가 언제인가 하는 점입니다. 불평등은 결과적으로 아무도 더 나빠지지 않고, 더 나아지는 사람들이 있을 때에만 허용될 수 있습니다. 이는 정치철학자 존 롤스(1921~2002)가 ‘차등 원칙’(difference principle)이라고 부른 것과 유사합니다. 불평등은 가장 못사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경우에만 허용될 수 있다는 원칙입니다. 하지만 이 원칙이 이상적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사회에서 불평등이 더욱 민감하게 감지되고,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웃이 더욱 부유해지면, 자신이 더 못살게 되는 것이 아님에도 부의 차이를 점점 더 의식하게 되고 불만족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등과 불평등을 오로지 물질 관점에서만 보는 것은 끔찍한 실패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행복을 결정하는 요인은 상대적입니다. 사람들은 자신 행복을 판단할 때, 자신 실제 상황을 과거 혹은 현재의 사회적 경험에 비추어 비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행복이 상대적이라면 국가가 객관적으로 경제를 개선하고 부양한다고 해서 반드시 국민이 행복해진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무슨 일이든 쉽게 적응하며, 행복은 객관적으로 충족되지 않기에 국가의 경제 정책이 국민 행복 증대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만족을 위해 설계되지 않았다. 인간의 행복은 객관적 조건보다 우리 자신의 기대에 더 크게 좌우된다. 여건이 극도로 좋아진 후에도 불만족스러운 상태가 된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자신 운명에 주관적으로 만족하도록 하고 사회 불만을 막고자 보편적 기본소득을 도입한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인간의 기본적 필요’가 무엇이든지간에, 일단 한 번 누구에게나 그것을 무료로 제공하면 사람들은 이를 당연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보편적 기본소득 덕분에 빈곤층이 지금보다 훨씬 나은 의료 서비스와 교육을 누린다 하더라도, 그들은 전 지구에 불평등이 만연한 것에 극도로 분노할 수 있다."


 

행복이라는 "목표를 진정으로 달성하려면 보편 기본소득은 다른 의미 있는 일과 더불어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일 이후(이외) 만족스런 삶을 사는 방법, 심지어 가난하고 직업이 없더라도 삶의 만족도를 높일 방법을 먼저 찾아야 한다. 보편 기본소득과 더불어 강력한 공동체와 의미 있는 삶의 추구를 결합해야 한다.“ 
















유발 하라리가 언급한 “심지어 가난하고 직업이 없더라도 삶의 만족도”를 높인 사회가 요즘 일본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재 일본 젊은 층 대다수는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취직률은 저조하고, 저임금에 시달리고, 워킹푸어로 일하고, 현대판 홈리스라고 볼 수 있는 피시방에서 난민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 젊은이들은 삶이 만족스럽다고 느끼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일본 20대 젊은 층이 느끼는 생활 만족도와 행복 지수는 78.3퍼센트까지 상승했습니다. 일본 중학생과 고등학생 95퍼센트가 자신은 행복하다고 답했습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꽤 높은 만족도입니다. 1980년 절정기를 맞았던 일본의 ‘입시 전쟁’이 상징하듯 ‘좋은 학교, 좋은 회사, 좋은 인생’이라는 중산층 꿈으로 일본 전체가 압도되던 시기는 지났습니다. 1990년대 이후 중산층 꿈이 무너짐과 동시에 기업의 정식 구성원이 되지 못한 젊은이가 증가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 젊은 층의 삶에 대한 만족도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요즘 일본 젊은이는 예전만큼 자동차를 구입하지 않습니다. 술도 많이 마시지 않습니다. 해외여행도 그리 즐기지 않습니다. 유학생 수도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선거 때 투표하러 가는 젊은이 수도 현저하게 줄고 있습니다. 사회 부조리를 바로잡으려는 대규모 시위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대신 태어난 지역에 애착을 느끼는 젊은이가 증가하고 있고, 대도시권으로 이동하는 인구수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2011)의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1985~ )는 그 원인을 이렇게 진단합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리 없다고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행복하다고 느낀다.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될 때, 지금 행복하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세속적 물질을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적 풍요 그 자체가 오히려 불행의 원인일지도 모릅니다. 해마다 소비자 구매 심리를 자극하는 더욱 매혹적인 상품이 나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물건을 소유하는 기쁨보다 물건을 갖지 못하는 비참함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1754년에 이미 루소가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세상 물질을 갖지 못한다면 불행하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세상 물질을 소유한다고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내면의 행복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해서 오지 않습니다. 외부에서 무언가 주어지는 행복은 지속시간이 짧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 원했던 승용차를 사더라도 만족감이 반년을 넘기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은 무슨 일이든 쉽게 적응합니다. 인간의 행복에는 설정점(set point)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생기더라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행복감은 기저수준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결국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행복을 계속 누릴 수는 없습니다. 마치 쳇바퀴 돌리는 다람쥐처럼 아주 잠깐만 바닥을 벗어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흔히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새로운 상황에 곧 적응하리라는 사실을 매번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노인들은 대게 건강 문제로 고통을 많이 겪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인이 젊은이보다 더 행복하다는 말을 들으면 매우 놀랍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만성 질병에 잘 적응하는 편입니다. 인간은 미래에 자신이 어떻게 느낄지 예측하는 데 매우 서툽니다. 우리는 자신 감정의 반응 강도와 지속시간 모두를 크게 과대평가합니다. 
















흔히 쾌락주의자로 잘못 알려진 철학자 에피쿠로스(BC 341~270)는 행복을 대부분 사람과는 다르게 규정했습니다. 우리는 긍정적인 정서 차원에서 행복을 떠올립니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결핍과 부재 측면에서 행복을 규정했습니다. 그리스인은 이러한 상태를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불렀습니다. ‘문제(~taraxia)가 없다(a~)’는 뜻입니다. 우리가 만족을 느낄 때는 어떤 것을 소유해서가 아니라 바로 불안이 없을 때입니다. 행복은 고통의 반대말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를 뜻합니다. ‘다행’(多幸)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의미에서 쾌락은 인생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쾌락 뒤에는 필연적으로 불쾌감이 뒤따르며, 인간의 참된 목표인 고통의 부재로부터 멀어진다는 점이 그의 요지입니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정주의자’였습니다. 불필요한 욕망을 필요한 욕망으로 착각하면 고통이 생깁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갈망에 비해 그 성취감은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쾌락으로 시작된 것이 고통으로 끝납니다. 에피쿠로스는 유일한 해결책이 욕망을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제안합니다. 

















부처(BC 560?~480?)는 우리 행복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괴로움이 되는 경우가 아주 많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한 사람의 번영은 보통 다른 사람의 궁핍이나 배제에 의존합니다. 나라가 부유해지면 항상 불평등이 불행을 초래하기 마련입니다. 작가 버나드 맨더빌(1670~1733)이 말한 것처럼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대다수 사람이 가난하고 불행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중상주의’라고 부르는 이러한 논리는, 한 사람의 손실이 다른 사람에게 이득이 된다는 뜻입니다. 중상주의자가 해줄 수 있는 최고 조언은, 예컨대 임금은 낮출수록 좋다는 점입니다. 값싼 노동력은 경쟁 우위를 창출해 수출을 증진시키기 때문입니다. 맨더빌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노예가 허용되지 않는 자유 국가에서 가장 확실하게 부를 창출하는 것은 부지런히 일하는 빈곤층 다수”입니다. 

 















멘더빌이 이렇게 거리낌 없이 주장했던 이유는 빈곤층이 형편없는 사람들이라고 가정했기 때문입니다. “동료 노동자와의 경쟁에서 패한 노동자는 나태와 우둔이라는 죄를 뒤집어쓰고 빈곤이라는 형벌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영국 전 총리 마거릿 대처(1925~2013) 역시 빈곤을 ‘인격의 결함’이라고 칭하기도 했습니다. 빈곤을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데, 가난한 사람은 그럴 의지가 부족하다고 비난한 것입니다.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나 언젠가는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현대사회에는 ‘긍정적으로 사고하라!’는 신앙이 있습니다. 이 같은 낙관주의에 사로잡힐 경우 우리 모두에게 고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게 됩니다. 나아가 내 자신 감정을 다치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을 냉담하게 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부처는 “괴로움의 현실이 우리 삶 전체에 완전히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고통을 느껴야 한다”고 말합니다. 불교는 삶의 목표로써 내면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보다 삶의 현실인 변화의 고통[生老病死]을 깨닫고 받아들여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행복을 가져오는 뭔가를 얻자마자 곧 그것을 잃을까봐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늘 욕망의 대상을 쫓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결국 그것 때문에 불행해질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부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고정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도 실제로는 순간순간 변화한다. 절대적이고 영원한 실체에 대한 믿음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욕망을 낳고 또 그 욕망은 고통을 가져온다. 만족스러운 순간은 거의 없고, 있다 하더라도 아주 짧은 순간일 뿐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영원히 좌절하는 것이다.” 
















철학자 스베냐 플라스푈러(1975~ )는 인간이 고통을 인식하고 이를 통해 성장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실패를 겪은 사람은 그것이 왜 실패했는지 생각하고, 무엇을 더 배워야 하는지 고민하여, 다시 일을 시작할 때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장애나 시스템 오류라고 생각해 주어진 한계를 극복하려고만 한다면, 인간은 자기 실존과의 중요한 연결 지점을 잃고 말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을 한계가 있는 존재로 인정할 때 자아를 갖게 된다. 인간이 그 한계와 고통을 경험하고 자신 인생과 사회가 대체 왜 이러한지 근거를 캐물어야 한다. 고통은 생각을 낳는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그 고통을 억지로 참는 사람은 성과(成果)의 강요에 굴복하고 마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2014)와 『호모 데우스』(2016)에서 행복은 달성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다스려야 할 마음 상태라고 말합니다. 행복을 갈망하지 않으면 현재 순간에서 만족을 찾을 수 있고, 스트레스와 불만을 피할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행복이 주관적 느낌이라고 믿기 쉽고, 자신이 행복한지 비참한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고 믿기 쉽다." 하지만 행복이라는 "특정한 감정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행위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함정이다. 사람들의 기대가 충족되었느냐의 여부, 쾌락을 즐기는가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질문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런저런 덧없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 데 있다.” 

 


행복을 갈구하면 쉬지 않고 그런 감각을 쫓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마침내 행복한 감정을 느낀다고 해도 그 감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과거의 행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기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행복을 갈구할수록 점점 더 스트레스와 불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BC 460?~380?)는 행복은 재산이나 물질적 재화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몸의 쾌락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짧고, 고통을 산출하고, 반복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적 행복은 쾌락의 절제와 삶의 균형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덜 욕구할수록 덜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행복 역시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만족의 느낌이 아니라 우리의 성숙된 삶 전체의 문제였습니다. 성숙된 삶은 교육을 받고 습관화를 통해서 달성할 수 있습니다. 즉 덕이 있는 행위를 하도록 훈련받고 또 이를 꾸준히 실천하여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위를 반복하여 우리 본성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우리는 정의로운 행위를 하여 정의로워지고, 절제 있는 행위를 하여 절제 있게 되고, 용감한 행위를 하여 용감해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같은 행위와 덕을 행복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 누구도 성인군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할 때마다, 다음에 선한 일을 할 가능성이 많은 인물로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건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인간 본성은 존재 유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본성 자체가 사회에서 만들어가는 산물입니다. 인간 본성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늘 구성되는 과정에 있으며, 생성하는 존재로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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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그 어떠한 원대한 시대사상이 없더라고 ‘그냥’ 살수도 있습니다. 그냥 산다는 것이 잘못된 일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냥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어떠한 사상이 뿌리째 뽑아버릴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안에 깊숙이 심어져 있기에 그냥 산다는 일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국가가 전부라고 생각하여 국가를 위해 자신 인생 모든 것을 다 바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 시민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이 경험했던 전쟁터는 다음처럼 몹시 참혹했습니다. 



"어느 날 백병전이 시작됐어...... 뭐가 기억나느냐고? '오도독오도독' 소리. 그 소리가 기억나......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사방에서 오도독오도독하는데, 사람들 연골이 으스러지고 뼈마디가 뚝뚝 부러져나가는 소리였지. 그리고 짐승의 울음 같은 처절한 비명들...... 서로를 찔러 죽이고, 숨통을 끊어놓고, 뼈를 부러뜨렸어. 총검으로 입이고 눈이고 닥치는 대로 찔렀지...... 심장을 찌르고 배를 찌르고...... 독일군에게 잡혀간 우리 여성 간호병을 찾아냈지. 세상에, 눈알이 도려내지고 가슴이 잘려나가서는...... 놈들이 말뚝에 박아놓았더라고. 몸에 살을 에는 추위에 꽁꽁 얼어 새하얗고 머리는 완전히 백발이 되어 있었어. 그 아이는 겨우 열아홉 살이었어." 



러시아 시민들이 경험한 전쟁터는 이토록 참혹한데 그들은 기꺼이 스스로 지원에서 전장으로 갔습니다. 



“그저 전선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 그게 다였어. 어떻게 히틀러가 모스크바를 차지하도록 보고만 있겠어?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지!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내 또래 소녀들은 너나없이 모두 전선으로 가겠다고 나섰지. 우리는 우리만 애국심에 불타는 줄 알았어...... 우리만 특별한 경우라고...... 하지만 웬걸, 모병사무소에 갔더니 글쎄 우리 같은 여자애들이 한가득인 거야. 세상에, 얼마나 놀랐던지! 심장이 뛰고 피가 끓어오르더라고. 나는 선발이 안 될까봐 가슴을 졸였어." 



딸이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오더라도 어머니는 반기지 않았습니다. "어머니한테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이었는데도 어머니는 딸을 안쓰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딸이 전선에서 돌아온 일을 모욕으로 생각하셨지. 적과 싸우지 않는 것을.” 



전쟁은 이토록 끔찍한데 그들은 왜 기꺼이 그 지옥으로 갔을까요? 



"우린 어렸을 때부터 '조국은 우리의 모든 것이다. 우리는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어. 그래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전선으로 가기로 결정한 거야. 내가 안 가면 대체 누가 가겠어? 나는 반드시 가야 했지..... 나는 '전선으로 갈 거예요, 전선으로 보내줘요! 전선으로!'라고 날마다 '전선, 전선' 노래를 부르며 고집을 꺾지 않았어. 실은, 포스터 글귀들의 영향이 컸어. '모국이 그대들을 부른다!', '전선을 위해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 눈만 뜨면 사방에 보이는 게 그 글귀들이었으니까. 노래는 또 어떤 줄 알아? '일어나라, 위대한 나라여...... 일어나서 죽기까지 싸우라......“ 

 
















”우리의 가장 큰 소원은 죽는 것이었어요! 자신을 희생하는 것, 전부를 내주는 것이요! 콤소몰(소련의 공산주의 청년 정치조직) 선언에도 있어요. ‘나는 내 민족이 내 목숨을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이건 단순히 말로만 하는 맹세가 아니었어요.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교육을 받으며 자랐어요. 군대가 행군하는 걸 보면 모두들 제자리에 멈춰 서서 경의를 표했죠. 승전 이후 군인들은 더 이상 평범한 존재가 아니었거든요.“ 
















상호주관인 시대사상은 오랜 기간에 걸쳐 서서히 형성될 수 있지만, 특정 권력의 선전과 선동으로 아주 단기간 내에 '세뇌'될 수 있습니다. 철학자 죄르지 루카치(1885~1971)는 선전과 선동이 인간을 '도취'시켜 비인간화하기에 이는 비윤리적이라고 말합니다. "도취는 하나의 기만이며 사기다. 감정이입을 핵심으로 삼는 일은 일상적인 삶을 격하시킨다. 니체의 '디오니스적 도취'는 감정이입 반응의 극단적 형태이며, 개인 인격을 균열시키고 불안정하게 만든다. 이는 세계와 인간관계를 공허하게 만든다. 선전과 선동은 인간을 기만하는 위장된 오만일 뿐이다.“



인간에게는 흔히 ‘반복 편견’(repetition bias)이라 부르는 이상한 오류가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자주 들으면 들을수록 그 이야기가 참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믿는 현상입니다. 반복은 마치 서서히 젖어들어 온 몸을 젖게 만드는 가랑비와 같습니다. 기업은 광고를 반복하고 정부 역시 홍보와 선전을 반복합니다. 그들은 같은 이야기를 자주 반복하면 이성을 압도할 수 있으며, 심지어 거짓말도 반복하면 점점 더 진실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뭔가를 자주 듣거나 보게 될수록 우리 뇌는 더 빨리 적응하여 그것을 진실이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2018년 예일대학교 연구진은 사람들이 정보의 신뢰도와는 무관하게 같은 정보에 반복되어 노출되자 그 정보를 사실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였습니다. 아주 약간만 그럴듯해도 반복되기만 하면 사람들은 그걸 믿었습니다. 가령 이러한 제목이 붙은 기사를 살펴보죠. ‘트럼프의 군사 개혁안: 미국은 징병제로 돌아갈 것이다.’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분명 사실이 아닌 이런 기사 제목조차도, 같은 내용을 두 번 본 사람은 한번 본 사람에 비해 두 배나 많이 사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연구진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는 다람쥐 쳇바퀴처럼 가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우리를 반복 편견에 빠뜨리는 위험한 무기와도 같습니다. 사람들은 사실 확인을 통해 확인되었을 때조차, 심지어는 본인의 정치 성향과 상반되는 의견일 때조차도, 자주 노출된 가짜 정보를 사실이라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정보가 되풀이된다 해서 그것이 반드시 사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복은 우리가 무언가를 진실이라 믿게 만드는 미끼 노릇을 합니다. 안타깝게도 정부나 기업, 지도자들은 모두 오래도록 이 미끼를 잘 활용해왔습니다. 가령 히틀러(1889~1945)의 『나의 투쟁』(1927)을 읽어보죠. 히틀러는 성공적인 프로파간다를 위한 몇 개의 핵심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 문장은 그 하나입니다. “몇 개의 간단한 생각을 지속적으로 반복할 것. 틀에 박힌 문구를 사용하고 객관성을 피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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