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인간은 자신을 

자유로운 존재라고 생각하는 환상이 있다. 

그렇기에 모든 일을 자기중심으로, 

다시 말해 자신 필요나 목적 중심으로 

생각하게 된다.” 

- 질 들뢰즈





논란이 있지만 우리나라 법은 술 마신 뒤 저지른 범죄에 대해 처벌이 관대하다. ‘심신미약’(diminished responsibility) 상태로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보고 정상을 참작해 준다. 비슷하게 프랑스는 치정 범죄에 처벌이 가벼운 편이다. 이성이 감정을 억누를 수 없는 ‘극한 상태’에 있었기에 자유의지가 발휘될 수 없었다고 감안해 준다. 그렇지만 이러한 몇 가지 심신미약 상태를 제외하면 법은 인간 의식이 항상 특정 행동을 지시하는 ‘정상’ 상태에 있기에 인간을 자신 행동에 대해 온전히 책임이 있는 존재로 생각한다. 



고대 로마인들 또한 정신이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면책해 주었다. 범죄자가 자신 의지로 통제할 수 없었다고 판단되면 무죄가 선고되었다. 로마나 현대 사회의 이러한 판결은 멀리 아리스토텔레스의 법제 개념에 근거한다. 사법당국이 용의자를 처벌하기 위해서는 범죄 행위뿐 아니라 행위자 동기를 증명해야 한다. 이 같은 행위자 동기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죄지은 마음’(라틴어로 mens rea)이라고 표현했다. ‘죄지은 마음’을 달리 말하면, 시민은 자신이 의도한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만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플라톤 이래로 서구 사회는 인간 영혼과 마음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인간은 동물과 달리 자유의지가 있기에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고 믿었다. 근대 서구 시민사회는 자유의지를 기반으로 모든 개인이 타인 인격을 존중하고 선과 악에 대해 스스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주체라고 전제하며, 인권을 부여했다. 특히, 근대 서구 사상을 연 데카르트는 ‘의심할 수 없는 생각하는 나’의 ‘내 생각’을 증명하기 위해 자유의지를 논리의 공리(公理)로 삼았다. “1)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 2) 결정론에 지배받는 존재는 자유의지를 가질 수 없다. 3) 순수한 물리적 존재는 결정론의 지배를 받는다. 4) 따라서 인간은 순수하게 물리적 존재만은 아니다.” 
















칸트의 도덕법칙도 개인이 자유로운 자신 양심 속에서 스스로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가 생각하는 도덕법칙은 개인의 자율적인 의지와 분리할 수 없다. 개인 스스로의 판단을 내리는 것이 칸트의 정언명법(네 ‘의지’의 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위 하라)인데, 당시에 신의 존재를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었던 칸트는 신이나 자연법칙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필연 상황에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칸트는 자유의지가 존재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알 수도 없고 증명할 수도 없는 세계 – 칸트 용어로는 물자체 혹은 본체계, 예지계, 초감성계 –에 있으며, 인간은 신이나 자연법칙의 필연성 제물이 아니라 언제나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우리는 칸트 사고를 통해 자유의지가 얼마나 답하기 어려운지 문제인지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 생각과 달리, 인간이 자유롭게 의지를 발휘하여 자신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는 그리 많지 않았다. 고대에는 인간의 자유의지 개념이 거의 전무했다. 히브리인들 운명론은 <구약성서>에서 엿볼 수 있다. “인간은 변덕스러운 운명의 희생자다. 노력과 성공 사이에는 어떠한 필연적 관계도 없다. 빠르다고 해서 달리기에 이기는 것은 아니며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더라. 지혜가 있다고 해서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총명하다고 해서 재물을 모으는 것도 아니며, 배웠다고 해서 늘 잘 되는 것도 아니더라. 불행한 때와 재난은 누구에게나 닥친다(<전도서> 9:11).”



예수 이후 신학자들 사상도 히브리인들 운명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간은 신의 결정론에 맞서 자신 운명을 바꿀 자유의지가 없었다. 사도 바울은 율법적인 노력으로 구원을 확보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므로 장차 다가올 삶에서 인간이 맞게 될 운명은 전적으로 신의 의지에 달린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신학도 신의 전능성을 기조로 삼았다. 그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는 것은 신의 전능함을 부정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갖는 중요성을 부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이 구원을 스스로 얻어낼 만큼 의지가 있다면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내려올 필요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혁명을 일으킨 루터도 인간은 누구도 자신 선행으로 구원을 바랄 수 없다고 보았다. 오히려 구원은 오직 신의 은총일 뿐이며, 선행이든 계율 준수든 신의 마음에 들기 위한 개인 노력과는 상관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천국으로 가기 위해 기도할 뿐이며 그 이상의 일을 할 수는 없다. 루터에게 있어 구원받을 자의 선택은 오로지 주어지는 것, 개인 노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칼뱅도 구원이란 신이 내린 은총의 산물일 뿐이며 인간 업적이나 자격에 구애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누가 구원받고 누가 단죄 받을지는 예정되어 있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성례(聖禮)도 아무런 효험이 없다. 그래도 신자는 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은총을 받기 위한 수단이 전혀 아니다. 인간은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자신 운명을 바꿀 수 없다.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그들 영혼에 신의 축복이나 저주의 낙인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바울부터 아우구스티누스나 루터, 칼뱅에 이르기까지 사람은 각자의 생활 태도나 노력과 상관없이 오직 신이 구원받을 사람을 자유롭게 선택한다는 기독교 전통 사상은 신의 전능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구원이라는 게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라면 신은 거기에 얽매이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 능력을 인정해야만 한다. 구원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스스로 구제하다’는 의미가 되며, 따라서 신의 무한한 힘에 한계가 생기게 된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신이 세상 모든 것의 주재자라면 악의 존재 역시 신이 주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이 정의롭다면 그의 힘으로 방지할 수 있는 고통과 악이 왜 발생하도록 그대로 두는 것인가? 신이 전능함에도 불구하고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정의롭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학에 다음 세 가지 견해가 병립하기 매우 어렵다. ‘신은 정의롭다’ ‘신은 전능하다’ ‘악은 존재한다.’



이 난제를 푸는 방법 하나는 인간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로써 악의 존재에 대한 책임은 신에게서 우리에게로 옮겨진다. 만약 신이 어떤 규범을 세웠을 뿐 아니라 개인에게 그것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을 자유를 부여했다면, 우리는 옳은 것 대신 잘못된 것을 선택한 것에 책임져야 한다. 나쁜 일을 한 자는 현세 또는 내세에서 신의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그의 고통은 악이 아니라 위반에 대한 징벌이다. 따라서 중세시대에 교회는 자유의지를 다시 불러들였다. 교회 예식과 절차(세례, 기도, 미사 참석, 성가 참례 등)를 강조한 것이다. 사실 신학적으로 ‘행함을 통한 구원’이라는 생각, 자유의적인 생각은 이미 배경에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가톨릭에서는 예식과 성례를 잘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유대교에서는 신의 율법을 잘 기키고 시나이 산의 계명(십계명)을 준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렇듯 종교에서도 자유의지 여부가 답하기 얼마나 어려운지 문제인지 알 수 있다.
















철학에서 보면 인간 자유의지를 증명 없이 공리로만 사용한 데카르트나 증명에 실패한 칸트와 달리 스피노자와 흄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음을 설득한다. 흄은 “우리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을 때 책임이 있다. 그런데 결정론(필연성)이 참이라면 인간 행동과 욕구, 사상 등 모든 것은 인과 법칙에 의해 결정되고 인간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다. 반면 결정론이 거짓이라면 사건은 인과 법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생기는 일이며, 이것도 인간 통제력을 넘어선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스피노자는 흄의 환경론(필연성과 우연성)에 인간 내면의 메커니즘을 덧붙여 결국, 인간이 의지를 자유롭게 발휘할 수 없다고 논증한다. 인간은 비록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우리 사고와 행위를 규정하는 욕망을 의식하면서도 그 욕망을 일으킨 원인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비유한다. “만일 공중으로 던져진 돌멩이가 그 순간 의식을 갖게 된다면, 그 돌멩이는 자신이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있다고 상상하게 되리라.” 스피노자가 보기에 인간의 ‘자유의지’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자신 ‘의지’대로 선택하고 행동한다고 여기지만, 이는 다만 그때그때마다 자신도 모르는 충동에 따라 결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의 요점을 당시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인간은 자기 바깥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에 의해 미리 결정되지 않는 한 자유롭다. 하지만 인간의 그 어떤 행위도 그런 조건은 성립하지 않으므로,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자유란 어떤 행위나 결정이 외부에서 귀결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그 행위자의 본성에서 귀결된 것이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가 신만이 자유롭다고 말한 것은 옳다.” 
















근대 철학자들의 논증뿐 아니라 첨단 장비를 이용한 현대 신경과학자들도 흄과 스피노자 주장을 지지하며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러워한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2018)에서 이 같은 실험 결과를 정리하여 설명한다. “사람들은 자신 뇌 안에 갇혀 있으며, 또한 사회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자신의 핵심적 정체성은 뇌신경망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환상이다. 최신 과학 이론과 최신 기술 장비에 따르면 정신은 어떤 경우에도 조작에서 자유롭지 않다. 심지어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이상인 자유와 사랑, 창의성조차 다른 누군가 목적을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 정신은 조작된 산물이다. 우리는 우리 밖의 세계를 통제할 수 없으며, 우리 자신 몸 안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우리가 통제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자유의지가 없다. 우리 욕망이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의 마술 같은 발현이 아니라 생화학적 과정의 산물이다. ‘자아’는 허구적 이야기다. 우리 정신 안에 스토리텔러가 있어서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바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한다.“ 
















우리는 오늘 점심 식사로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의식적으로 결정한다고 생각하기에 우리에게는 분명히 자유의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점심 메뉴를 고르는 아주 간단한 일조차 엄청나게 많은 요인에 좌우된다. 연구 결과는 한 종(種)의 수준에서 보나, 개인 수준에서 보나 식욕은 대체로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 유전자 안에 새겨져 있으며 뇌 회로도 이미 그런 식으로 배선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식욕은 오랜 세월 동안 특정 음식을 더 맛있다고 여기도록 진화해 온 생물학적 특성에 의해 결정된다. 



예를 들어 당신이 태어나기 수십 년 전 친할아버지가 어떤 음식을 좋아했었는지가 오늘날 당신 음식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태어난 네덜란드 인구 집단을 대상으로 한 연구가 있었다. 이 연구는 1944년에서 1945년 사이에 1년 동안을 거의 굶다시피 살았던 독일 점령 치하의 가족에서 태어난 아동들과 독일 점령지가 아닌 덕분에 식량 조달이 훨씬 용이한 환경에서 태어난 아동들의 건강을 비교해 보았다. 그 결과 수정 당시 영양 상태가 심각하게 불량했던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아동들은 나중에 비만과 당뇨병에 걸릴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먹을 것이 귀한 환경에서 잉태된 아이의 신진대사는 나중 모든 것이 풍족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고생한 것이다. 태어나기 전 가혹한 환경 변화에 따라 유전자가 변했고 이런 변화는 다음 세대, 그리고 그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체중과 체형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이는 유전자는 150개 정도가 있다. 그중에는 얼마나 배고픔을 느낄지 지시하는 유전자(이 유전자는 언제 먹어야 하고, 언제 배가 부른지 알려 주는 신호를 뇌로 보낸다)와 쾌락회로에 관여하는 유전자(어떤 사람은 뇌의 보상경로를 자극하려면 더 많은 칼로리가 필요하다. 이들 수용체의 민감도가 떨어지기에 남들보다 더 많이 먹어야 기분이 좋아진다), 뇌가 몸속의 필수 영양분 수준을 감지하여 영양분이 너무 부족하면 더 먹으라고 지시를 내리는 것과 같은 유전자 등이 있다.



사람은 선천적으로 고칼로리나 고당도, 고염도 음식을 선호하게 되어있지만, 이것 말고도 평생에 걸쳐 생긴 온갖 식습관이나 기호는 말할 것도 없고, 개인이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나 만족 지연 같은 것도 작용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그날 호르몬 수치도 영향을 미치고, 당신이 얼마나 지친 상태인지, 당신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지도 영향을 미친다. 짜장면이나 짬뽕을 고르는 일만 해도 거기에 따르는 의사결정 과정은 복잡할 뿐 아니라 대체로 무의식으로 이루어진다.
















흄의 주장처럼 사람들이 이성적일지라도 – 사실 주로 이성적이지 않고 감정적이지만 - 자신이 통제하는 범위 밖의 힘에 영향받으며, 또한 스피노자 주장처럼 감정과 인지 반응 사이에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없기에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전제에 의문을 던진다. 이에 더해 신경과학은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결정을 내리도록 뇌가 조종한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행동하려고 마음먹기 최소 0.3초에서 최대 10초 전부터 행동 관련한 뇌 활동은 무의식적으로 증가한다. 뇌는 사람이 인식하기 전부터 벌써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만약 어떤 행동이 의식적으로 마음먹기 전에 이미 무의식 상태에서 시작되었다면 자유의지 역할은 그 과정에 끼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의식적 의지는 환상에 불과하다.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직관은 우리 내면에 숨겨진 것이 밖으로 표현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보통 생각이 마음에 떠오르고, 그것이 정서를 유발하고, 느낌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느낌이 먼저 일어나고 그 뒤를 이어 정서가 표현된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잘못되었다. 기쁨이나 슬픔이라는 정서가 먼저 나타나고, 기쁨이나 슬픔에 대한 느낌이 그 뒤를 따르며, ‘기쁘다’ 혹은 ‘슬프다’고 말하는 마음의 상태를 규정하는 생각들이 나타난다. 정서 상태가 먼저 오고 느낌과 생각이 그 뒤를 따른다는 점은 사람이 행동하기 전 인식하는 것보다 무의식이 먼저 발현된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신경생리학자들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애초 없다고 주장한다. 자유의지뿐 아니라 자아라는 개념도 물리적 뇌 신경의 착각이다. “우리 인간은 행동에 대한 모든 결정을 스스로 내리는 ‘자아’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계속해서 착각한다. 이 믿음은 떨쳐내기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하고 압도적인 환상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자유의지가 있다는 ‘압도적인 환상’을 갖게 되었을까? 우선 인간 본성 측면에서 살펴보면, 우리에게 정서가 먼저 유발되고 느낌과 생각이 뒤따르는 이유는 진화 과정에서 정서가 먼저 생겨났고 그다음 느낌이 생겼기 때문이다. 정서는 자동으로 자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된 도구다. 신경세포를 활성화시키는 연결망으로 인해 우리 인식보다 결정이 앞서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 행동에 대해 이러한 사전 무의식을 알지 못한 채 나중에야 자신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의식화한다. 즉, 과거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제시함으로써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다. 우리가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이유는 뇌가 인과관계를 추론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 뇌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말이 되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 사실을 조금씩 날조한다. 결국 우리가 결정을 내릴 때 의식적 자아는 그 결정을 가장 늦게 알뿐 아니라 왜곡되어 알게 된다. 신경과학자들이 내린 난처한 결론은 이렇다. “이런저런 일을 하거나 하지 않을 판단은 의식에서 ’비롯된다기‘보다는 의식에서 ’드러난다‘고 하는 편이 적절하다.”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압도적 환상’을 양육(사회화)의 측면에서 보면 도덕과 법률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자유의지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고 단순한 환상이라고 한다면, 자유의지에서 유래하는 ‘책임’도 붕괴하고 도덕철학이나 법철학이 성립하지 않을 염려가 있다. 그래서 칸트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도덕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이론을 전개했다. 자유의지에 대한 대중 통념은 한 가지 가정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듯하다. 즉, 우리들 각자는 과거에 우리가 했던 것과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다는 가정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저질렀다면, 그가 그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점을 전제한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주체는 결코 자율적이고 주관적인 주체가 아니다. 인간은 태생 자체가 다른 무수한 원인에 지배받을 수밖에 없다. 인간 의지는 철저히 타율적인 존재다. 우리 의지는 기본적으로 타인 의지에 의해 감염된 ‘최면 상태’와 같이 작동한다. 의지가 자유롭다는 생각, 그것이야말로 일종의 독단이자 사회적 현상에 대한, 그리고 우리 정신 본성에 대한 무지다. 
















프로이트의 양심 이론도 옳고 그름에 대한 생득적 개념이나 절대적 개념의 가능성을 부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프로이트는 인간이 본래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 지를 결정하는 것은 초자아다. 초자아에서 생긴 두려움이 죄책감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정신분석 치료를 받는 사람들이 흔히 자신의 초자아와 싸워서 그것의 요구를 철회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문화가 제시하는 윤리적 요구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불교적 관점에서도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행하는지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행위를 할 때 어떠한 정서 상태에 있었는지 이다. 행위 자체는 단순히 마음 작용의 후속 절차, 즉 반향(反響)일 뿐이다. 정서 상태(emotional states)가 매 순간 활발하게 발현하는 반면, ‘정서 특성’(emotional traits)은 행위 결과로서 창조되어 개인에게 남아 오래 지속된다. 정서 특성은 수동적인 형태로 쌓이고 의식적으로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것은 불교적 사고가 프로이트적 사고 및 현대의 심층 심리학에 매우 가까이 접근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우리 마음속 밑바닥에 숨겨진 성향 또는 잠재적 기질이라고 부르는 어마어마한 영역이 잠자고 있고, 다양한 자극을 받아 이 기질들이 활성화된 상태로 일어난다는 점을 고대에도 이미 잘 이해하고 있었던 듯하다. 이 정서 특성들이 일생에 걸쳐 매 순간 퇴적암 지층처럼 쌓여가고, 깊은 곳에 쌓인 지층은 현재의 경험 안에 격하게 분출될 수도, 잠잠하게 드러날 수도 있다.



특이한 점은 이러한 시각이 자기(self)에 대한 가변적인 시각[無我]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어떤 정서들이 심층에 내재하는 동안, 개인은 저마다 독특한 인성을 갖게 된다. 경험적이고 습관적인 반응을 결정하는 정서 패턴들은 독특한 경험에 의해 긴 시간에 걸쳐 축적되면서 독자적인 형태로 발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환경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배우고, 긴 시간에 걸쳐 퇴적된 잠재 성향은 일련의 습관을 형성한다. 이렇게 학습된 반응에 따라 우리는 순간순간 적절한 방식으로 새롭게 반응한다. 

















우리는 우리 의지로 행한 결과에 따라 뭐든 우리가 얻은 것을 가질 자격이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운명을 전부 통제할 수 없고 우리 성공과 실패는 다른 누군가에게, 가령 신이거나, 운명의 장난이거나, 순간의 선택에 따른 예상 밖의 결과 등에 좌우되는가? 내게 주어진 보상은 행운 덕이지 자유의지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겸손이 시작된다. ‘신의 은총인지, 어쩌다 이렇게 태어난 때문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몰라도 덕분에 나는 지금 여기 서 있다.’ 그런 겸손함은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는 가혹한 성공주의나 능력주의를 넘어설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자유의지의 폭정을 넘어, 보다 더 관대한 공동체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게다가 우리는 굳이 현대 서양의 자유의지 개념이 필요치 않을 수도 있다. 고대에는 자유의지 개념이 거의 전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유의지 자리를 대신할 대안적 견해가 오히려 매력적일 수 있다. 그 대안적 견해란, 개인 수준에서는 습관적 행동을 바꾸기가 쉽지 않지만, 법률 제정이나 정책 입안, 교육 등을 통해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환경을 바꿈으로써 거시 수준의 변화가 만들어진다면 우리가 집단적으로 특정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고 유지해서 집단 수준에서 바람직한 큰 변화를 일구어낼 수 있다. 



일단 개인과 마찬가지로 집단도 병든 신념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의식이 작동해서 만들어 낸 산물이라고 생각되는 신념조차 의식적 자각 없이 일어나는 뇌의 작동으로 결정된다. 평생 계속 이어지는 학습을 통해 뇌 속에서는 새로운 경로가 만들어진다. 과학자들은 이를 가소성이라 부른다. 몇몇  연구에서는 단순히 페이스북 피드를 바꿈으로써 사람 감정 상태를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의식적이고 지적인 활동 결과로 여긴 의견이나 신념 중 상당 부분이 사실은 뇌 기능이 주도하는 감정 반응에 의해 빚어진다는 의미다. 이런 지식을 적용해서 우리의 신념을 역설계(reverse-engineering)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데올로기 스위치’ 설계의 가능성은 한 인간 신념을 일반적으로 어느 정도까지 바꿔 놓을 수 있다. 사람들은 실제로 극적인 사건 결과로, 혹은 삶의 경험이 천천히 축적되면서 자신 생각과 의견을 바꾸기도 한다.



인간의 본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없다. 우리가 종 전체 특성을 공유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 집단이 전체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얘기하는 것 또한 지나친 단순화다. 신념 체계는 집단적 재평가와 그에 따르는 압력 아래에 변하고 진화한다. 집단도 자신 생각을 바꿀 수 있고, 또 실재로 바꾼다. 타고난 선천성과 자율적인 개인의 힘이라는 기존의 지배적 통념에서 멀어져 우리를 이끌고, 인생 결과를 빚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면 기회가 열린다. 

















소크라테스도 모든 악행은 악의가 아닌 제대로 학습하지 못한 무지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만약 우리 실수가 미칠 영향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특정 덕목에 대한 참된 이해는 도덕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윤리적 사고를 펼쳐 나감에 있어 기원전 5세기 당시 그리스에 널리 퍼져 있던 도덕관념에 크게 반발했다. 소크라테스 임무는 의지의 나약함이라는 널리 퍼져 있는 일반적인 생각이 왜 사실상 잘못인가를 보이는 것이다. 의지 나약함은 한 개인이 어떤 행위가 그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쾌락을 추구하려는 욕구에 압도되어 결국 그 행위를 해야겠다고 생각할 때 – 즉 개인 의지가 유혹을 이겨낼 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을 때 – 발생한다고 대부분 사람은 생각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런 개인이 사실상 자신 입장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지니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수행하려고 선택한 행위가 – 즉 자신이 나쁜 것이라고 믿지만 자신에게 쾌락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되는 행위가 – 사실상 결국 고통을 주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나쁜 행위를 한 것은 다름 아닌 무지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자신 행위가 선을 산출할 것이라고 믿고 있으나 그의 이러한 믿은 잘못된 것이다. 
















니체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건 행위가 아니라 태도며, 잘못된 행위는 몰이해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이렇게 비유한다. “어린아이가 동물에 대해 보이는 잔인함은 어린아이의 몰이해에서 비롯된다. 그 아이는 동물이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결국 어떤 행위가 악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늘 ‘어리석은 행위’일뿐이다. 그런 행위를 선택했던 지성 정도가 너무 낮았던 것이다. 타인 고통을 유추할 수 있는 능력, 우리 기억과 상상력을 활용해 고통을 주는 행위에 대해 혐오감을 느낄 수 있는 능력, 이것은 오로지 배움에 의해 가능해진다. 배움이 커지면 해석도 달라진다.



이런 과정을 거칠 때 우리는 ‘도덕적 인류’에서 ‘현명한 인류’로 진화해간다. 모든 것을 자유의지에 따른 죄악으로 보는 관점에서 지성 정도에 따른 어리석은 행위로 보는 관점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지은 게 아니라 어리석은 행위를 한 것이다. 지금의 최고 지성도 언젠가는 더 우월한 지성에 의해 추월당할 것이므로 우리는 여전히 어리석다. 범죄자를 니체적 개념에서 하나의 ‘어리석은 자’로 보자. 이렇게 범죄자에게서 자유의지를 제거하면 죄라는 개념과 벌이라는 개념도 세계에서 추방된다. 형벌을 가해 범죄자에게 보상받고자 하는 복수심까지도 극복해 나가야 한다. 사악한 자유의지가 문제라면 거기에 대한 벌은 분노하는 자의 자의에 의해 무한대로 커질 수도 있지만, 남에게 끼친 손해에만 집중한다면 벌은 정확히 계량 가능한 것이 되어 원한의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다.



악한 행위를 한 사람이 자신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도 모르고 있다면 그에게 벌을 내리는 게 가능할까. 벌은 행위의 모든 의도를 다 알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가능한 법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태반이다. 우리는 우리 본능과 육체, 정신 운동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도 않다. 따라서 우리는 범죄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명명할 수 있어야 한다. 범죄자에게서조차 죄를 빼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낯설며, 일부 철학자나 과학자 사이에서나 공허하게 떠도는 이야기라 여겨질 수 있지만, 범죄자에게 자유의지가 없었다고 보고 처벌보다는 진짜 ‘교화’ 관점에서 운영되는 교도소들이 있다.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남쪽으로 약 96킬로미터 떨어진 숲에는 세계에서 가장 이상한 교도소 중 하나가 있다. 그곳은 마약 밀매범, 성범죄자, 살인범 약 250명이 수감되어 있는 노르웨이에서 두 번째로 큰 감옥이지만, 감방이나 철장을 볼 수 없으며, 권총이나 수갑으로 무장한 교도관도 볼 수 없다. 교도관들은 ‘우리는 그 사람들과 이야기한다. 이야기가 우리 무기다’라고 말한다.



할렌(Halden) 교도소 수감자에게는 바닥 난방을 갖춘 개인 전용 방이 주어진다. 평면 텔레비전과 전용 욕실, 수감자들이 요리할 수 있는 주방에는 자기로 된 접시와 스테인리스스틸 칼이 있다. 또한 도서관과 암벽등반 연습용 벽, 수감자들이 자신 음반을 녹음할 수 있는 음악 스튜디오까지 완비하고 있다. 



할렌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만 더 가면 마지막 형량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중범죄자 115명이 수감되어 있는 그림 같은 섬 바스퇴위가 나온다. 수감자와 교도관이 함께 버거를 뒤집고 수영을 하고 느긋하게 햇볕을 쬐고 있다. 솔직히 교도소 직원과 수감자를 구분하기가 어렵다. 바스퇴위 교도관들은 유니폼을 입지 않고 수감자와 함께 같은 테이블에 앉아 함께 식사하기 때문이다. 섬에서는 영화관과 일광용 베드, 스키 슬로프 2개가 있어 온갖 종류의 일을 할 수 있다. 섬에는 교회와 식료품점, 도서관도 있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미쳐버린 건가? 수많은 살인자를 휴양지로 보내는 형을 선고하는 것은 얼마나 순진해빠진 행동인가? 바스퇴위 직원에 의하면 이는 더없이 정상적인 일이다. 그들은 수감자와 친구가 되는 것이 그들을 하대하고 모욕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배운다. 노르웨이에서 교도소는 나쁜 행동을 예방하는 곳이 아니라 나쁜 ‘의도’를 예방하기 위한 곳이다. 교도관들은 수감자들이 정상적인 삶을 준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그들 의무라고 생각한다. 이 ‘정상성 원칙’에 따르면 벽 안의 삶은 가능한 벽 밖의 삶과 비슷해야 한다. 
















우리 선조들은 코페르니쿠스와 뉴턴, 다윈, 아인슈타인 개념을 처음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우주에서 인간 자리를 재평가해야 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자유의지 개념도 그와 비슷한 사상 붕괴의 여정을 출발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분명 그 통찰에 담긴 함축적 의미와 윤리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 신념이 역사와 사회 산물임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덜 독단적이 되고, 다른 사람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된다. 누구도 완벽하게 객관적일 수 없고, 누구도 객관적 진실을 완전하게 깨우쳤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자신이나 외부 대상과 맺는 관계를 변형시킨다. 우리 상처를 치유하고 타인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누군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잘못을 가한 것이 아니란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의 행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의도적인 것은 아니다. 부처님 말씀처럼 각각의 사건과 사람을 셀 수 없이 많은 조건의 결과로 봄으로써[緣起] 하나의 사건이나 단 한 사람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게 한 구조적 원인을 알게 될 때 우리 미움과 괴로움은 사라질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열린책들 세계문학 54
볼테르 지음, 이봉지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철학자 팡글로스는 형이상학적, 신학적 우주론을 강의하였다. 그는 다음 같은 사실을 멋지게 증명해 보였다. 즉 원인 없는 결과란 없으며, 우리의 세계는 가능한 모든 세계 중에서 최선의 세계며, 남작 각하의 성(城)은 이 세계의 성 중에서 가장 멋진 성이며, 남작 부인은 가장 좋은 남작 부인이라는 것을 증명했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은 쉽게 증명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목적을 가지고 있고, 그 목적이란 가장 좋은 목적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일례로 코는 안경을 얹기 위해 만들어졌고, 그래서 우리는 안경을 씁니다. 다리는 양말을 신기 위해 만들어졌고, 그래서 우리는 양말을 신습니다. 돌은 원래 성을 짓는 석재로 쓰이기 위해 생성되었습니다. 그래서 남작 각하는 멋진 성을 소유하고 있지요. 왜냐하면 이 지방에서 제일 유력한 남작은 가장 좋은 성에 살아야 하니까요. 또 돼지는 식용으로 쓰이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1년 내내 돼지고기를 먹습니다." pp 10-11. - P10

그들은 캉디드에게 법률을 들먹이며 그 연대의 모든 군인들로부터 서른여섯 대씩 얻어맞는 태형 아니면 머리통에 총알 열두 발을 한꺼번에 맞는 총살형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였다. 캉디는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은 둘 중 어느 쪽도 원치 않는다고 강변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쨌든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결국 그는 신이 은총으로 내려 준 자유의지로 서른여섯 대씩의 태형을 선택했다. 연대에는 총 2천 명의 군인이 있었다. 그들이 2열로 늘어선 사이를 한 번 왕복하는 동안, 그는 도합 4천 대를 맞았다. 그러자 머리에서 엉덩이까지 신경과 근육이 모두 터져 나왔다. 막 세 번째 차례가 시작되려고 할 때, 캉디드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차라리 머리를 부숴 달라고 빌었다. pp 16-17. - P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회는 존재를 결정하지만, 

관념의 본질을 결정하지 않는다.“

- 피터 버거





자유란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알려져 있다. 자유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고의 가치다. 현대 시민 사회에서 말하는 '자유'는 이처럼 개인의 자유를 말한다. 그렇지만 자유가 무엇인지 쉽게 말하기는 어렵다. 역사를 보면 매 시기마다 자유 의미가 달랐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문명, 특히 아테네 문명은 자유와 개인 존엄성을 높이 평가한 사회다. 자유를 뜻하는 그리스어 ‘엘레우테리아(Eleutheria)’는 당시 다른 고대 근동 사회의 어떠한 언어로도, 심지어 히브리어로도 번역할 수 없었다. 그리스를 제외한 고대 문명 대부분 사회는 개인이 집단에 종속된 상태인 절대주의나 교권주의에 압도되어 있어 자유라는 개념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 엘레우테리아에 해당하는 로마어는 ‘리베르타스’(Libertas)다. 이는 뉴욕 자유의 여신상(Statue of Liberty)의 모티브가 되었다. 자유를 ‘liberty’라고 해석한다면, ‘억압으로부터 벗어나서 얻은 자유’라는 뜻이 담겨있다. 반면, ‘freedom’은 ‘원래부터 부여받은 권리로서 자신 의지대로 행할 수 있는 자유‘다. 토크빌은 ’freedom‘을 ’자연적 자유‘라고 이름 붙인 반면 ’liberty‘는 ’시민적 자유‘나 ’공민적 자유‘라고 정의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현재 흔히 말하는 자유는 liberty라기보다는 freedom에 가깝다. 고대 도시국가 그리스인들이 생각한 자유 개념은 이처럼 우리 생각과 매우 달랐다. 고대 자유는 폭정과 억압을 방지하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면, 시민이 도시 통치에서 어떠한 역할이라도 맡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의회에 출석하고, 토론장에서 의견을 발표하고, 정치 논쟁을 판단하고, 어느 한 쪽 편을 들어 투표할 특권과 의무가 바로 고대 자유였다. 아울러 행정관으로서 봉사하거나 필요한 경우 배심원으로 참석하는 일도 고대 자유에 속했다. 


















고대 자유는 이처럼 시민이 자치에 참여함(self-governing)을 의미했다. 공동체를 위한 선(common good)을 달성하고자 동료 시민과 함께 깊이 고민하고 정치 공동체 운명을 만들어가는 데 힘을 보태는 일이 고대 자유였다. 따라서 자치를 위해 시민은 바람직한 인성이나 시민적 소양(시민적 덕성), 예컨대 공적인 일에 필요한 지식을 쌓고, 공동체 소속감을 키우며, 전체를 생각하는 마음을 갖추는 일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자유에는 자치가 필요하고 자치는 시민 덕성에 의존한다는 생각이 고대 자유사상의 핵심이다. 

 















고대 그리스인은 개인이 교육을 통해 절제와 지혜, 중용, 정의 같은 덕목들을 함양할 경우에만 자치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곧 그리스 철학은 ‘파이데이아’(paideia), 즉 덕성 교육이 폭정을 미연에 방지하고 시민 자유를 보호하는 주된 방안이었다. 그래서 자치를 열망하는 자유 시민들에게는 ‘교양학’(liberal arts) 교육이 강조되었다. 교양학은 반복적인 기예나 돈벌이 학문이 아닌 자유 시민이 갖추어야 할 학문이기에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문법과 논리학, 수사학, 산술, 기하학, 음악, 천문학으로 구성되었다. 정치학자 페트릭 데닌(1964~ )은 “이름 자체에 자유민을 함양한다는 뜻이 담긴 이 교양학 교육을 우리가 더 이상 누리지 못하는 이유를 이제 사람들은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라며, 현 상황을 고대 사회와 대비하며 안타까워한다. 우리는 “한때 ‘노예교육’이라 여겨진 학문을 선호하고 있다. 즉 오로지 돈벌이와 직업교육에 몰두하며, ‘시민’ 칭호를 누리지 못했던 사람들이 받았던 교육에만 매달리고 있다.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은 한때 자유민과 농노를, 주인과 노예를, 시민과 하인을 구분했던 정체(政體)를 비난한다. 우리는 무지몽매했던 선조들보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기고만장하지만, 지난날 자유를 박탈당한 사람들만 받았던 교육 형태를 채택하고 있다.” 

 















자유(freedom)는 어느 정도 개신교에 뿌리 두고 있다. 유럽의 종교개혁은 단순한 예배 의식보다는 늘 진심 어린 신앙을 추구하며 개인 양심을 존중했다. 개신교 교의는 인간 죄가 종교적 예식이나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따라 용서됐기 때문이다. 과거 가톨릭교회는 인간 죄가 종교적 또는 도덕적 행위에 따라 용서된다고 가르쳤고, 따라서 각종 의식과 의례가 성행했다. 반면 믿음을 통해 죄를 용서받는다는 개신교 교의는 특정한 행위나 의례보다 동기가 더 중요했다. 어떤 행동이 순수한 마음과 하느님을 향한 믿음에서 나온 것인지 알려면 자기 마음을 살펴봐야 했기에 각자 개인적인 양심에 의존하게 되었다. 바로 이 점이 그냥 신을 따르고자 하는 가톨릭 전통을 약화시켰다. 개신교에서 개인의 양심은 유럽을 ’세속화‘시킨 힘이었다. 그 덕분에 한 나라에 여러 종교가 공존하거나 아예 종교가 없는 관용의 자유도 가능해졌다. 



처음에는 종교적 의미에서 관용의 자유로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자유 자체가 하나의 권리로서 존중되었다. 이것이 1789년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자유(freedom)였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발생한 모순과 충돌이 대단히 컸던 탓에 프랑스인은 그들 구호(자유, 평등, 박애) 중 자유를 자연적 자유, 곧 구속받지 않고 자기 멋대로 하는 자유로 이해했다. 그들은 혁명 전 사회에서 수많은 불합리한 제한과 압박을 받았고, 혁명으로 이 제한과 압박을 깨부쉈으므로 그 결과 모두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다.



자유가 가치 있다고 여겨진 것은 프랑스 혁명부터다. 1801년 출간된 한 논문의 문장이 ‘자유’라는 가치의 탄생을 알린다. “현재 개혁가들이 널리 퍼뜨리고 신성시하고 불가사의한 의미를 각인시킨, 10년 전에는 미치지 않은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떠올리지 않았을 법한 단어는 ‘자유’나 ‘휴먼’과 같은 표현들이다.” 프랑스 혁명 여파로 ‘자유’라는 단어는 19세기에 정치의 핵심 개념으로 부상했다. 특히 “자유사상은 앙시앙 레짐 몰락이 가져온 변화를 강조하고, 개인 권리를 관대하게 인정하려는 정치적 실천”처럼 보였다. 

 















1815년 나폴레옹 패배 이후 유럽이 신성동맹 지배 아래 놓이게 되자 마침내 권력의 정상에 서게 된 귀족 보수주의자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이 결집했다. 자유주의자들은 공포통치에 동조했던 사회주의 급진주의자들을 해산시키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프랑스 혁명의 근본정신인 자유가 구현되기를 희망했다. 프랑스 혁명 구호 가운데 자유주의자들에게 가장 와 닿았던 것은 ‘재주만 있으면 어떠한 경력이든 추구할 수 있다’는 오늘날 ‘능력주의’라는 용어로 더 익숙한 구호였다. 결국 능력주의나 엘리트주의는 자유주의 개념의 하위 범주가 된다.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은 대중이 개혁을 주도하는 것에 반대했다. 자유주의자들 눈에 대중이란 기본적으로 배우지 못한, 따라서 비합리적인 존재로 비쳤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들이 도달한 결론은 주도권을 갖고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은 능력 있는 전문가 집단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전문가 집단은 어떠한 분야든 학습을 통해 현실을 이해하고 필수적이고 바람직한 개혁을 가장 잘 이루어낼 수 있는 집단으로 정의되었다.



이러한 자유(freedom) 개념은 서유럽 선진국에서 1860년과 1890년 사이에 점차 확산되었다. 여기에는 존 스튜어트 밀의 기여가 컸다. 그는 1859년에 『자유론』을 펴냈다. 독재 국가가 자유(liberty)를 위협하는 경우는 낯익은 문제였기에 그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개인이나 소수의 자유(freedom)에 대한 다수의 지적 강압이었다. 그는 주변에서 과거에 보잘것없었던 사람들이 권력을 장악하면 남들 권리를 부인하고 견해 차이를 용납하지 않는 경우를 자주 보았다. 그래서 그는 자유를 새롭게 정의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떤 행동이 상대방에게 더 좋다는 이유로, 그것이 상대방을 더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하다거나 혹은 심지어 올바르다는 이유로 상대방이 어떤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도록 강제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라고 밀은 주장했다. 
















1840년 중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정치적 자유 의미를 부르주아 계급과 연결시켰다. 부유한 지배층이 자신이 소유한 부(富)를 지키기 위해 모든 시민의 자유를 강조했다. 그 당시 부유층 다수는 반혁명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다. 평등을 내세운 가난한 다수가 소수 부유층의 재산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었다. 자유권을 강조하고 자유권 침해를 제도적으로 방지하기 위해 자유의 중요성을 헌법에 명시한 것이다. 자유는 부르주아의 실제 이해관계를 감추는 관념적 표현이었다. “자유주의는 국가 생활 속에서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제약받지 않는 지배자들이 자유롭지 못한 시민을 지배하기 위한 억압”이라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지적했다. 



부르주아가 부를 지킬 수 있도록 필요한 사상을 개발한 철학자가 존 로크(1632~1704)다. 그는 사유재산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시민의 자유(freedom)를 자신 논리의 근거로 삼았다. 경제적 독립이 불가능하다면 시민들의 자유는 미사여구에 불과하다는 것, 이것이 바로 로크의 핵심 통찰이었다. 로크는 이를 논증하기 위해서 우선 천부인권이라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에게 부여된 권리에서 출발했다. 개인의 인신(人身)은 그 사람 소유며, 자기 인신을 소유할 권리는 천부적 권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 인신에 대한 소유권을 기반으로 생산한 것의 소유 권리를 정당화한다. 즉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자기 인신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있기에 자기 인신이 수행한 노동으로 획득한 대상도 그 사람 소유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로크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인간이 공동체를 결성하고 스스로를 정부 지배하에 두고자 하는 가장 큰 목적은 그들 재산을 보존하기 위함이다.“ 

 














애덤 스미스(1723~1790)는 『국부론』에서 그 핵심을 간결하게 말한다. ”귀중하고 방대한 재산을 획득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정부 수립을 요구하게 된다. 재산이 없으면 정부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정부는 재산 안전을 위해 형성되는 한, 실제로는 가난한 사람에 맞서 부자를 지키기 위한, 혹은 재산을 전혀 갖지 못한 사람에 맞서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가진 사람을 지키기 위한 것에 다름 아니다.“ 개인 재산, 특히 공장과 자본 설비의 소유권 보호는 물론 자본주의 필수 조건을 보호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자본가들이 경제 권력과 정치권력을 갖게 된 것은 이렇듯 생산수단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소유 관계를 보호하는 구실을 정부에 부여하는 것은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지배 계급인 자본가 권력 원천을 보호하는 일을 정부에 맡긴다는 뜻이다.

 
















역설적으로 로크와 스미스의 국가 논리에는, 개인의 사유재산이 부당하다는 무의식 판단이 함께 전제되어 있다. 만약 사유재산 제도가 정당하다고 여겼다면, 사유재산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당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사유재산을 긍정하자마자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서 보호 장치로서 국가의 강제력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로크가 논리로 만든 자유는 명백한 한계를 가진다. 그것은 공적인 삶이나 공공 가치[liberty]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인신을 통해서 획득한 재산과 그 보호[freedom]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밀의 자유주의는 1870년 이후 면모를 바꾸어 신고전파 패러다임으로 변하게 되며, 오늘날에도 신자유주의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 이제 자유라는 개념에는 경제활동만이 부각되고 여러 정치적, 사회적 차원은 은폐된다. 
















자유(freedom)라는 개념은 가장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인간의 특징을 가정하고 있다. 그것은 ‘개인주의’와 ‘주의주의’(主意主義, voluntarism)라는 개념이다. 특히 개인이 규제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하는 선택이라는 뜻의 주의주의 이념을 윤리와 정치 토대로 삼는다. 페트릭 데닌은 칸트(1724~1804)가 자율성을 본격적으로 고양한 철학자임에 주목한다. “자유주의의 근본 전제는 계몽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개인 자율성 전제와 관련있다. 자유주의 문제는 칸트 철학이 악용되었다는 데 있지 않다. 개인 자율성을 고양한 것이 처음부터 잘못이었다.” 칸트는 계몽주의 인간관에 기초한 자유주의 윤리학의 강력한 대변자다. 개인으로서 인간 자유와 존엄성을 모토로 하는 자유주의 윤리학 기초는 칸트의 원자론적 인간관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당연히 자유란 무엇인지, 어떻게 가능한지 구체적으로 따져보는 것이 윤리학의 일차적 과제가 된다. 하지만 이 과제와 씨름하던 칸트의 모든 노력은 미궁에 빠지고 만다. 자유라는 것이 이성의 필연적인 전제임에는 틀림없으나 결국 구체적인 사례를 들 수도, 개념적으로 파악될 수도, 이성적으로 통찰할 수도 없는 불가해한 사태라는 결론에 이른다. 신비한 자유 이념 앞에서 이성은 전적으로 무능력에 빠진다.



칸트는 이성 체계의 중심에 자유를 놓고 그 자유의 객관적 실재성을 입증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최후에 깨달은 것은 자유 이념의 불가해성이다. 자유를 이론적으로 엄밀하게 증명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다만 ‘이성의 선험적 사실’로 받아들인다. 자유는 설명하거나 증명할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에게 무조건 닥치는 주관적 사실로서, 혹은 윤리학의 가능성을 위해 반드시 전제되어야하기에 무조건 요청되는 것이다. 
















사실 처음으로 주의주의를 분명하게 표현한 사람은 국가를 옹호한 철학자 토머스 홉스(1588~1779)다. 홉스에 따르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상태로 존재한다. 이런 취약한 조건에서 삶이 ‘추하고 잔인하고 짧다’는 것을 인식한 사람들은 합리적인 자기이익에 따라 국가로부터 보호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자신 자연권을 대부분 포기한다. 그 정당성은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선택한 계약에서 생겨난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율적이고 이성적으로 선택했다고 생각한 일도, 무의식 상태에 내린 잘못된 결정일 수 있다. 예컨대, 경제학자들은 경제학 강의가 그저 인간을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개별 행위자로 기술할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은 학생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쳐 더 이기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1993년 로버트 프랭크가 수행한 한 실험은 경제학과 학생들이 다른 학과 학생들보다 “경제학에서 널리 사용되는 자기 이익 모델이라는 소리를 자꾸 듣다보면 실제로도 자기 이익 방식으로 행동하는 정도가 더 증가한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자기 이익이라는 개념은 교육으로 학습되는 개념이다. 자기 이익이라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꼼수와 잔머리, 심지어 거짓말로까지 확장된다. 프랭크가 행했던 또 다른 실험에서는, 공동 구매 경우에 친구들을 희생해 가면서 업자로부터 상납을 챙겨 먹을 가능성이 경제학과 학생들 집단에서 현저히 더 높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경제학 학습의 결과는, 자기 이익에 입각한 행동이 만사에 깊숙이 침투해 있으며, 자기 이익은 대체로 적절한 것이고 심지어 바람직한 것이기도 하다는 믿음을 강화한다. 그리고 이 믿음은 다시 자기 이익을 떳떳이 과시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프랭크의 여러 실험은 경제학을 배우는 과정에서 학생들의 그러한 성향이 더욱 강화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는 경제학과 한 학년 전체를 조사했다. 그중 절반은 게임 이론가(게임 이론 자체가 자기 이익이라는 동기를 기초로 이론을 수립하는 학문이다)에게 미시 경제학을 배웠으며, 다른 절반은 공산주의 중국 경제 발전을 연구하는 전문가로부터 미시 경제학을 배웠다. 학기가 끝날 무렵 게임 이론가로부터 배운 학생들이 다른 쪽 집단 학생들보다 자기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성향이 더 많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자유주의 개념 번창은 이기주의나 개인주의 이론이 점점 더 현실이 되어가는 세상을 만들어낸다. 오늘날 자유주의 체제에서 사람들은 갈수록 자율적으로 살아가며, 이러한 상태에서는 국가 역할을 확대하여 무질서를 통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의 자율성을 더욱 보호하려면 국가 역할이 더 확대하고 실정법을 통해 개인을 규제해야 할 필요성은 더욱 커진다. 자유주의는 결국 두 가지 요소, 즉 해방된 개인과 통제하는 국가뿐이다. 홉스는 『리바이던』에서 이 두 실체를 완벽하게 묘사했다. 국가는 오로지 자율적인 개인들로만 구성되고, 개인들은 국가에 의해 ‘억제’된다. .

 













따라서 자유주의 사회에서 개인과 국가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기에 과거 전통에 대한 존중이나 미래 세대에 대한 의무가 무시되고, 즉각적인 자유 추구만이 대세가 된다. 예컨대 자녀는 갈수록 개인 자유를 제한하는 원인으로 간주되기에 원하면 낙태를 할 수 있는 자유주의 사상이 강화한다. 그 결과 출생률이 감소한다. 경제 영역에서는 대개 당장 이익을 내라는 끊임없는 요구에 쫓겨 단기 수익을 올리려는 충동이 장기 투자를 막는다. 그리고 시장에서 넘쳐나는 상품에 감탄할 뿐이지, 지구의 풍부한 자원이 단기간 내 고갈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지 못한다. 설령 훗날 우리 자녀들에게 식수와 같은 귀중한 자원이 부족해질지라도 개의치 않는다. 이런 활동을 규제하는 일은 실정법을 시행하는 국가 소관으로 치부되지 문화 규범의 산물인 교양 있는 개인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 
















자기실현을 추구하고 욕망을 충족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언제나 더 큰 경제성장과 사회에 만연한 소비가 필요하다. 자유주의 사회는 경제성장이 둔화될 경우 여간해서는 생존하기 어렵고, 경제성장이 얼마간이라도 멈추거나 역행할 경우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공공의 선(common good)에 무관심한 사람들의 유일한 목표가 바로 ‘자유’(freedom)다. 더욱 중요한 점은 칸트가 우리에게 하나의 중요한 문제, 즉 자유의 문제를 남겨놓았다. 이 세계에서 어떻게 자유가 가능한가? 이러한 세계에서 우리가 자유롭게 행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우리는 직관적으로 매우 강력하게 자유가 실재함을 옹호한다. 하지만 우리 직관이 과연 자유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만큼 확실한지 반드시 물어보아야만 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시우행 2023-06-28 17: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은 도서들이 많이 보이네요.

북다이제스터 2023-06-28 19:07   좋아요 0 | URL
네, 대부분 책이 나쁘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
 







“오늘날 적(敵)은 

제국이나 자본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그것은 민주주의라고 불린다.” 

- 알랭 바디우 







대의(代議) 민주주의는 국민 정치권력을 선거로 한 사람 혹은 다수 대표자에게 양도하는 이념이다. 사람들은 대의 민주주의의 산실인 의회가 국민 의지를 실행하는 '공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사정은 그렇지 않다. 헤겔 지적처럼 의회는 관료들 판단을 국민에게 알리고 마치 국민 자신이 결정한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정교한 장치다. 의회가 탄생한 역사를 보면 그러한 정교한 조작이 반영되어 있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지배계급은 ‘민주주의’란 단어를 몹시 혐오했다. 하지만 점차 세월이 지나자, 지배계급은 민주주의 운영 규칙을 자신들이 정할 수만 있다면 민주주의가 그리 큰 위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나폴레옹(1769~1821)은 도시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정보를 잘 통제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려 유권자들을 겁줄 수만 있다면, 선거에서 당당히 승리하고 자신이 민주적임을 몸소 증명했다. 



1871년 파리 코뮌(역사상 최초 파리 시민들이 세운 사회주의 자치 정부) 때문에 프랑스는 민주주의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부르주아는 딜레마에 빠졌다. 민주주의는 인민대중이 지배함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대체로 가난한 자들이다.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특권층과 비특권층 간의 이해관계는 명백히 달랐다. 따라서 인민대중이 정치에 참여하면, 지배계급의 기득권이 훼손될 수 있었다. 하지만 민주화는 불가피해졌다. 비록 지배계급은 이러한 상황을 반기지 않았지만, 사회주의 혁명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민주주의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민주주의 제도를 조작할 필요가 있었다. 가장 노골적인 조작은 의회 기능에 엄격한 한계를 부여하는 것, 특정 집단과 특정 기구에 특별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 상원을 통해 하원을 압박하는 것이었다. 


 















영국 지배계급도 대중이 선거권을 획득해도 자신들이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일에 크게 지장이 없음을 점차 깨달았다. 국가 권력 대부분은 의회의 통제 범위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 권력은 비선출 조직인 군부나 경찰, 사법부, 행정부에 있었다. 이러한 국가 조직은 의회 활동을 규정하고, 마음에 안 드는 조치는 위헌으로 거부할 수 있었다. 의회는 대중이 지배계급을 압력 하는 창구가 되지 못하고, 대중의 대표자를 길들이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지배계급은 자신들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의원들이 요구사항을 제기하도록 강요했다.



이처럼 지배계급이 민주주의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민주주의로 전향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 효과를 약화하려는 시도였다. 또한 정부와 언론인, 자본가, 금융가는 민족주의를 앞세워 지배계급과 피착취 계급이 공동운명체라고 주장했다. 한쪽이 호화롭게 사는 동안 다른 한쪽은 땀 흘려 일하거나 굶어 죽는데도 그들 모두 ‘한 배를 탔다’는 것이다. 그러한 조치로 지배계급에게 치명적인 위협으로 여겨졌던 선거권이 노동자 대표들을 길들이는 수단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영국 의회는 상업자본 뜻에 따라 선거가 좌우되는 상황을 창출하고자 하였다. 토리당(국교회와 지주계급를 대표)과 휘그당(비국교도와 상인을 대표) 중 어느 당도 의회가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기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순히 왕실에 대해 자신들 특권을 보장하는 장치로 간주했다. 게다가 의회는 이러한 계급 성격을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정치를 완전히 독점하던 휘그당과 토리당의 수십 개 가문은 장남을 상원에, 차남 이하 아들을 하원에 보내어 국가를 교대로 통치했다(대륙의 프랑스나 스페인과는 달리 영국은 귀족 특권이 장남에게만 상속되었다). 의원 3분의 2는 그냥 임명되었고 나머지 3분의 1만 유권자 16만 명가량이 선거로 뽑았는데, 그나마 일부 투표는 매수로 이루어졌다. 선거권을 부여하기 위해 지대 수입을 파악했던 호구조사는 처음부터 토지 소유 계층이 의회를 지배하도록 보장했다. 이처럼 영국도 프랑스에서처럼 선거권을 생득권리가 아니라 토지 소유에 근거했기에 하층계급을 민주주의에서 훨씬 쉽게 배제할 수 있었다. 


















1787년 미국 헌법제정회의에서 보여준 지도력으로 흔히 미국 헌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제임스 매디슨(1751~1836)은 모든 시민이 투표할 수 있는 고대 직접 민주주의인 ‘순수한’ 민주주의를 비판했다. 시민들의 정념으로 폭압적인 의회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보면서, 그는 “모든 아테네 시민이 소크라테스였다 해도 모든 아테네 민회는 여전히 폭도의 모임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매디슨은 소수가 다수를 대표하여 민중의 정념을 숙고와 심의로 조정할 수 있는 대의정치 방식을 선호했다. 

 

















미국 건국 아버지 중 한 명인 해밀턴은 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부자들이 가지고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 부자들 악행은 아마도 궁핍한 사람들 악행보다는 국가 번영에 더 이로울 것이며, 도덕적으로 덜 타락한 것입니다.” 해밀턴은 부유함이 대표 선발에 미치는 영향을 그 어떤 사람보다도 공개적으로 옹호했다. 그는 경제력이 역사적 위대함을 향해 나아가는 올바른 길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그는 부유하고 용감하며, 근면한 상인들이 국가를 지도하길 바랐다. 18세기 미국의 대의 정부는 선거 그 자체만으로 귀족적/과두적 효과를 낳을 것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형식상 하층계급이 선거에서 배제되지 않은 현대 대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대중과 부자 의견이 갈릴 때는 부자 의견이 채택된다. 정치학자 벤저민 페이지와 마틴 길렌스는 이익집단과 부유한 미국인, 일반 시민 중에서 미국의 공공정책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는 집단을 측정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두 사람은 1981년부터 2002년까지 일자리와 임금, 교육, 건강보험, 시민권, 경제 규제, 문화 관련 쟁점, 외교 정책과 같은 분야에 제안된 정책 약 2,000개를 분석해서 세 집단 중 어떤 집단이 최종 결과에 영향을 미쳤는지 살폈다. 그들은 “일반 시민은 연방정부 정책에 거의 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라는 결론을 얻었다. 조사 결과는 일반 시민 중 3분의 1 정도만 자기 뜻을 관철했다. 하지만 이조차도 그들 견해가 이익단체나 부자 견해와 일치할 때만 가능했다. 일반 시민은 정책 수립 과정에서 의미 있는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그들 목소리는 부유하고 조직적인 이익집단, 특히 기업 목소리에 묻혀 아예 들리지 않는다. 이 연구를 통해 미국인 대부분이 느끼는 사실, 즉 자기 목소리는 중요하지 않으며, 일반 시민은 자기가 통치되는 방식에 대해 의미 있는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자연 상태를 가정하여 국가 성립과 대의 정치를 정당화한 철학자 토머스 홉스(1588~1679)의 사회계약론은 심오한 뜻이 있다.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1938~ )는 인간이 자신의 정치권력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한다는 홉스 주장을 다시 해석했다. 권력을 대표자에게 양도하는 순간, 우리는 권력이 없는 존재, 즉 글자 그대로 노예로 전락한다. 그리고 권력을 양도받은 대표자는 과잉된 권력을 가진 존재로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게 된다. 자발적인 권력 양도가 ‘자발적인 복종‘으로 이어지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그래서 대의 민주주의는 결코 민주주의적일 수가 없으며, 오히려 진정한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가 된다. 루소도 영국식 의회민주주의를 최선의 사회 체제라고 보지 않았다. 선거란 시민의 권리인 동시에 약점이기 때문이다. “영국인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그들은 의회 의원을 뽑는 동안에만 자유로울 뿐이다. 의원들이 선출되는 즉시 시민들은 곧바로 노예가 되어버린다.” 


















데이비드 흄은 인간이 결코 자유롭게 사회계약을 맺기 어렵다는 사실을 ‘가난한 농민들과 장인들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다른 지역으로 떠나서는 결코 살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어떤 계약이든 달게 수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만약 진정으로 사회계약이 가능하려면,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주어진 국가나 사회를 떠나서 살 수 있어야만 한다. 이 점이 바로 흄이 당시 유행하던 다양한 사회계약론 모두가 허구에 불과하다고 공격했던 핵심 근거다. 우리는 어떤 국가나 사회를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국가나 사회에 맹목적으로 던져져 훈육되는 존재일 뿐이다.


















홉스 사상은 표면상 ‘리바이던’이란 국가의 옹호가 아니다. 그의 철학은 바로 합리적인 계산으로[자유의지로] 자신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이 계약을 통해 자신 주권을 ‘양도’했지만, 개개인의 내적인 힘[자유의지]이 전혀 정치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개개인의 집합은 그저 다중일 뿐이며, 국가라는 끈이 없다면 이 다중은 그저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구슬에 불과한 존재일 뿐이라고 홉스가 주장하기 때문이다. 홉스의 세계에서는 국가와 다중이 있을 뿐, 개개인들이 서로 간의 관계로 형성하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홉스가 자신 이론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전제한 자발적 계약[자유의지]과 결과로 나타나는 반-개인주의[반-자유의지]가 홉스 정치철학의 핵심이다. .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1883~1950)는 유권자들이 정치가들의 영향력에서 독립된 정치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발견했다. “정치 과정에 대한 분석에서 우리가 알게 된 것은 대개 진정한 의지가 아니라 ’가공된 의지’(manufactured will)다. 개인이 정치가들 제안과는 독립된 명확한 자기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 정치에서 대중의 선호는 정치가들 행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로버트 위브(1930~2000)는 대중의 참정권은 시민이 “개인의 자유의지를 토대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권력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보통 선거권과 다수결이라는 규칙은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개인이 국가를 형성한다는 이미지를 사람들 상상력 속에 불어넣었다.” 결국 ‘자유로운 인간이 자기가 살아갈 정치 형태를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 투표장에 가는 장엄한 모습’은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 개인 선택이나 동의 행위 범위를 넘어 사람들 삶을 지배하는 권력 구조가 이미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에 관해서 어려운 질문을 던져보라고 요구한다. 그는 선거가 결국 가장 뛰어난 인물을 뽑는 것이 목적이기에 귀족정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만약 민주주의의 진짜 의미를 다수가 통치하는 제도라고 간주한다면, 미국과 같은 선거제는 오늘날 일부 정치학자가 판단하듯 과두정에 가깝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바람직한 정체(政體)와 그렇지 않은 정체를 구분하고 세부 정체에 우선순위를 부여했다. [바람직한 정체(왕도정>귀족정>금권정), 타락한 정체(민주정>과두정>참주정)]



“정체에는 세 종류가 있고, 그것들이 왜곡된 또는 타락한 형태도 셋이다. 세 종류의 정체란 왕도정체와 귀족정체 그리고 세 번째로 재산평가에 근거한 정체다. 세 번째 정체는 금권정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해 보이지만, 대부분 사람은 혼합정체라고 부르곤 한다. 이들 가운데 최선은 왕도정체고, 최악은 금권정체다.



왕도정체가 왜곡된 것이 참주정체다. 참주정체는 왕도정체가 타락한 것으로, 사악한 왕이 참주가 된 것이다. 참주는 자신 이익을 추구한다. 참주정체가 세 가지 왜곡된 정체 가운데 최악임은 분명하다. 반면 과두정체는 치자들의 악덕으로 빚어져 귀족정체에서 생겨난다. 그들은 부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기에 소수 사악한 자들이 권력을 장악한다. 끝으로, 민주정체는 금권정체에서 생겨나는데, 이 둘은 서로 이웃하기 때문이다. 금권정체도 다수자 지배를 목표로 하는데, 재산평가를 충족하는 자는 누구나 동등하기 때문이다. 이상이 가장 흔한 정체 변화다. 약간의 변화만 생겨도 그러한 이행은 아주 쉽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1892~1982)는 “지금까지 알려진 민주주의는 대중 전부가 아니라 일부 특권층만 자유롭고 평등했을 때 가장 융성했다“고 지적한다. ”일반인에게 민주주의 제도의 기원이며 표본이라고 간주되어 온 아테네 민주주의가 일부 특권층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지고, 또 그들의 특전이 되어 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또한 근대 민주주의 전통의 창시자인 존 로크가 18세기 영국 휘그당에 속한 과두정치의 중요한 철학자이며 예언자였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더욱이 19세기 영국의 민주주의의 전당(殿堂)이 소수 재력가에게만 선거권을 갖게 하는 방식을 토대로 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1883~1946)도 비슷한 지적을 했다. “민주주의는 여전히 시험 중에 있다. 이유는 부자들이 숫자 면에서 얼마만큼 대의(代議)를 하는가와는 상관없이 부자들 힘은 수적인 비율보다 항상 클 것이기 때문이다.”


















루소는 스스로 법을 만드는 국민과, 자신을 대신하여 법을 만들어 줄 대표를 선출하는 국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대의정’과 ‘민주정’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 오늘날에는 대의 정부를 민주정에서 파생한 것으로 간주하지만, 18세기 후반에는 대의제에 따라 조직된 정부는 민주정과 확연히 다른 것으로 이해되었다. 오직 선거에 기초한 정부에서는, 공직을 가질 동등한 기회를 모든 시민이 가질 수 없다. 관직 배분 차이는 하찮은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의회에 농부보다 변호가가 더 많다는 점은 시시한 문제가 아니다. 변호가가 의회에 들어갈 기회를 더 많이 가지게 된다는 것이 농부에게 상대적으로는 무관심한 일이라 해도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몽테스키외, 루소 모두는 선거가 본질적으로 과두정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과두정은 선거가 사용되는 환경과 조건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선거 그 자체 속성에 기인한 것이라고 믿었다.



수많은 자료는 선거가 아닌 ‘추첨’[제비뽑기]을 민주정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소개하고 있다. 더욱 중요한 점은 추첨이 바로 민주적 선출 방법으로 묘사된 반면, 선거는 다소 과두정이나 귀족정인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추첨을 통해 집정관을 지명하는 것은 민주정이고, 선거에 의한 것은 과두정이다”라고 말했다. 추첨은 민주적이고 선거는 과두적이라는 생각은 우리 상식을 벗어난다. 



몽테스키외도 추첨을 민주주의로, 선거를 귀족주의로 밀접하게 연관시킨다. 몽테스키외는 “추첨에 의한 선발은 민주정의 특성이요, 선거에 의한 선발은 귀족정 특성이다. 추첨은 누구의 감정도 상하게 하지 않는 선발 방법으로, 각각 시민에게 조국을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희망을 준다”라고 썼다. 몽테스키외는 민족정이 추첨과, 그리고 귀족정이 선거와 어울린다는 사실을 하나의 불변적인 법칙으로 상정했다. 이 두 방법은 어떤 독특한 문화에 속한 것이거나, 어떤 민족에게만 한정된 산물이 아니다. 이 둘은 바로 민주정과 귀족정의 본질 그 자체에서 파생된 것이다.



루소 역시 <사회계약론>에서 추첨을 민주정으로, 선거를 귀족정으로 연결시킨다. 행정관을 선발하는 데에는, 어떤 방법을 사용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이 질문을 다룬 구절에서, 루소는 몽테스키외 말을 인용하며, “추첨에 의한 선발은 민주정의 본질”이라는 그의 생각에 동의를 표한다. “추첨은 민주주의에 적당한 선발 방식이다. 추첨은 어떤 특정집단의 의지 개입 없이 행정직을 배정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의 자유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민주정의 기본 원칙은 시민이 통치자이자 피통치자라는 두 위치를 번갈아 가며 차지할 수 있어야만 한다. “자유의 형태는 다스리고 또 다스림을 받는 것을 번갈아 하는 것이다.” 민주적 자유는 내일이면 자신이 차지할 그 자리에 오늘 앉아있는 그 누군가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통치자는 입장을 바꾸어 지배받는 사람 처지에서 결정을 내리도록 유도된다. 피통치자 처지를 잘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정의를 외치는 것, 즉 권력에 있는 사람들에게 통치를 받는 사람들 처지를 상상해 보라고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에게 그렇게 할 수단과 동기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과적으로 이 근본적인 원칙에 따르면 추첨은 합리적인 해결책이 된다. 



오늘날 생각과는 달리, 시민이 권력을 행사한 대부분 정치제도에서는 추첨이 사용되었다. 추첨은 로마 시민 의회에서도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공화국들에서는 추첨을 통해 행정관을 선발하곤 했다. 11세기와 12세기에 설립된 초기 이탈리아 코뮨에서는 행정관을 선발하기 위해 추첨을 사용했다. 공화주의 부흥의 중심지였던 피렌체에서, 공화주의 체제 핵심은 바로 추첨을 통한 행정관 선출이었다. 베네치아에서는 1797년 몰락할 때까지도 추첨이 계속 사용되었다.  추첨의 목적은 자신이 속한 파당 사람을 선택하는 도당들을 막기 위해 고안되었다. 피렌체인들도 공화정 기간 동안 다양한 행정관과 정무위원회 위원 선발에 추첨을 이용했다. 14세기 말 추첨은 행정관 선발에 공평성을 보장하고 파당을 막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추첨은 개인이나 당파에 의해 행정관이 선출이 조작되는 것을 막았다. 어느 누구도 추첨 과정의 단계를 통제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없었다. 추첨이라는 중립적이고 조작 불가능한 메커니즘이 바로 공정하다고 느끼도록 만들었다.



지만 추첨이 평등하고 민주적인 특성이 있다는 신념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며, 실제로 15세기 말까지도 논란의 여지가 없던 사안도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도 추첨을 괴상한 관습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추첨은 통치에 특별한 재능이 없는 사람을 포함해, 무작위로 아무나 선발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따라서 추첨은 분명 결점이 많은 선출 방법이고, 추첨이 이제 사라진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결론은 타당한지 의심해 보아야 할 주장이다.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모든 평의회위원들과 판사들 뿐 아니라 대부분 행정관은 전문가가 아니라 보통 시민이었다. 아테네인들은 각각의 정치적 기능은 비전문가에 의해서 수행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내린 가정은 만약 전문가들이 정부에 관여하게 되면 불가피하게 그들이 지배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아테네인들은 아마도 집단적 정책 결정에서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않은 지식과 기술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권력의 한 근원이 되며, 법률적으로 그들 각각 권력이 어떻게 규정되든, 그러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이점을 갖는다고 판단한 듯하다. 전문가로 이루어진 평의회 또는 전문 행정관이 민회를 좌지우지할지도 모르고, 법정에서 전문가들은 다른 판사들의 중요성을 축소시킬 것이다. 


















마이클 샌델은 최근의 역사적 경험으로 봐도 “최고의 인재들이 저학력자 동료 시민들보다 통치를 잘한다는 생각은 능력주의 오만에서 비롯된 신화일 뿐”이라고 말한다. 1945년 윈스턴 처칠의 보수당을 눌렀던 영국의 클레멘트 애틀리(1883~1967) 내각의 장관 가운데 일곱 명이 탄광 갱부 출신이었다. 매우 유능하다고 평가받은 외무장관 어니스트 베빈은 전후 세계질서의 설계자 중 한명이었다. 그는 11세 때 학교를 중퇴하고 노동조합 지도자로 성장했다. 하원 의장과 부수상을 지낸 허버트 모리슨은 14세에 중퇴하고 지방정부에서 일하며 명망을 쌓았는데, 런던의 대중교통 시스템을 개발한 공로가 컸다. 보건부 장관 어나이린 베번은 13세에 중퇴한 뒤 웨일스에서 광부로 일했고, 장관이 되어서는 영국 국민의료보험 제도를 수립했다. 



‘20세기 영국에서 가장 개혁적인 정권으로 평가되는 애틀리 정권은 노동계급에 힘을 실어주었으며, 애틀리 전기 작가는 ‘영국의 새로운 사회계약에 쓰일 윤리 언어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샌델은 “정책 결정이 ‘스마트하냐 우둔하냐’ 문제로 여겨질수록 ‘스마트한 사람(전문가나 엘리트)’이 결정하고, 일반 시민들이 토론과 결의를 하는 일에서 배제하는 게 옳다고 여겨지지 마련”이라고 ‘정치 엘리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Redman 2023-06-15 2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그리의 홉스 해석은 갸우뚱하네요. 네그리가 하고 싶운 말이 있는데, 그걸 위해 홉스를 이용한 느낌이랄까요? 저도 홉스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집에 있는 책들과 교차검증 해봐야겠습니다 ㅋㅋㅋ

북다이제스터 2023-06-15 22:17   좋아요 1 | URL
저도 잘 모르지만 네그리와 홉스는 거의 같은 과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도 제 주장을 위해 이것저것 짜집기 한 거 뿐입니다. 여타 학자들이 그렇듯이요.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는 대로의 인간일 뿐 아니라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는 대로의 

인간이기도 하다.” 

- 군나르 시르베크








우리는 나중에 발생한 일이 이전 일보다 더 완벽한 상태라고 믿으며 ‘발전’ 개념을 확신한다. 하지만 이러한 확신은 그냥 새로운 태도일 뿐이며, 특히 19세기 말 무렵 이전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은 태도다. 찰스 다윈(1809~1882)의 『종의 기원』(1859)이 발표되면서 진보란 개념이 확산되었고, 그와 함께 역사란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과정이라는 생각도 생겨났다. 『종의 기원』 마지막 페이지에 ‘진보’라는 단어가 있다. “자연선택은 오로지 각 개체에 의해, 개체를 위해 작동하므로 모든 정신과 물질적 자질은 완성을 향해 ‘진보’되어갈 것이다.” 하지만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1941~2002)는 “진화는 특정한 방향성이 있는 진보가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진화는 ‘무엇인가’가 어디론가 움직여 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일어나는 변이가 확장되거나 위축되는 일로 봐야 한다”라며, 다음과 같은 표현은 모두 잘못된 사실이라고 지적한다.



· 35억 년 전 지구에 살던 생물은 박테리아와 그 사촌들 같은 아주 간단한 종류의 단세포 생물들뿐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지구는 쇠똥구리와 해마, 피튜니아[관상용 식물], 인류 등으로 붐비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진보가 생명의 역사를 진전시켜 온 기본 추진력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 있는가?

· 지난 몇 십 억년 동안 동물은 전체적으로 몸의 크기, 먹이 섭취 및 방어 기술, 뇌와 복잡한 행동, 사회적 조직화, 환경 조절의 정확성 등에서 상승 진화했다.

· 진화가 진행됨에 따라 생물의 구조나 생리 기능에서 전문화 정도가 커진다.

· 인간의 해부학적 복잡성, 신경의 정교함, 습성의 다양성과 유연성 등 호모 사피엔스의 생명 특성을 보면, 인간은 틀림없이 어떤 진보의 경향을 보인다.

· 생명체 발달 과정은 복잡화, 조직화, 전문화를 통해 진화 단계를 하나씩 밟아 사다리 위로 올라간다. 어마어마한 대뇌 피질과 기막히게 복잡한 행동 패턴을 소유한 인류는 우리가 아는 한 그 정상에 위치에 있다.

· 인류가 지구 시간의 마지막 순간에 나타난 존재라는 지질학 발견을 봐선, 진화 방향은 인간을 향한 예정된 진보다. 

· 다른 생물은 인류보다 못하다.



우리가 이렇게 착각하는 이유는 “경향성을 알고 싶어 하는 강렬한 인간 욕망이 종종 실재하지도 않는 방향성을 찾아내거나 입증되지 않는 원인을 추론해” 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건에서 반드시 패턴을 찾아내려는 습성이 있어서, 단순히 무작위로 발생한 사건도 뚜렷한 경향성을 잡아내어 그 원인으로 삼는다. 대부분 사람은 순전히 무작위적인 결과에서도 규칙성이 자주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착각인 “외견상 방향성이나 경향성은 사실 자연계에서 변이 정도가 축소되거나 확장된 ‘부차적’ 결과이지, 어떤 것이 특정 방향으로 움직인 결과가 아니다.”
















‘다른 생물은 인류보다 못하다‘는 믿음은 인간의 ’고질병‘이다. 이러한 인본주의 사상은 중세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이미 ‘세상은 곧 인간과 같다’라는 개념으로 그 씨앗을 엿볼 수 있다. 신학자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의 우주관은 “인간이 신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세계가 인간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여겼다. 수도사였던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 역시 인간 이성에 대해, 인간 삶에 대해, 인간 구원에 대해 인간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성 토마스와 같은 스콜라 신학자들 또한 인간 본성을 영광스런 신의 피조물로 찬양했으며, 인간과 신의 동역(同役) 가능성을 믿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同役)자 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린도전서 3:9>) 더욱이 그들은 인간 이성 능력을 굳건히 믿었다. 이후 스콜라 철학에 영향 받은 단테(1265~1321)도 현세가 인간의 유익을 위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이 자유의지로 선을 택하고 악을 피할 수 있다고 보았다. 무엇보다도 인간성에 대한 그의 희망과 궁극적 믿음은 중세 전성기를 지배했던 분위기를 대표한다. 이 점에서 단테는 인간에 대해 가장 긍정적인 확신을 표명한 작가 중 하나로 손꼽힌다. 















중세 후기가 되자 신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새로운 계급, 곧 상인 계층이 번성했다. 상인은 당시 영주와 성직자, 기사, 농노로 이어지는 봉건 피라미드에서 설 자리가 없었다. 상인은 농노를 자유민이라고 이름 붙인 임금노동자로 삼기위해 영주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상인은 또한 자신이 번 재산을 지키기 위해 사회가 안정되길, 소유권이 보장되길 원했다. 그들은 돈이 넘쳤는데, 세입을 늘리는데 한계가 있던 국가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왕은 상인들에게 세금을 늘려 국가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상인과 국가가 함께 공생하며 발전하는 체계가 만들어졌다. 신에게 사랑받지 못한 상인 계급은 자신들 위상을 강화할 다른 방법도 찾았다. 당시 유럽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했던 이슬람 세계가 상인들 소망을 이룰 방안이 되었다. 이슬람 세계가 그동안 연구한 그리스-로마 문명을 십자군 전쟁 원정으로 접하게 된 상인들은 기독교 이전 고전 사상에 탐닉하게 되었다. 그 사상은 중세 신학자들이 보잘것없고 덧없는 존재로 여겼던 바로 ‘인간’이었다. 무역이 발달했던 고대 그리스인에게 인간은 독립적이고 지적이며, 모험심이 강하고 능력도 있는 그런 존재였다. 중세 상인들에게 이러한 인간형은 전형적으로 돈을 잘 버는 바로 자신들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르네상스 시기(14~16세기) 상인 계급은 인본주의라는 뿌리를 고대 그리스에서 캐어내 자본주의에 이식했다. 

 


스피노자(1632~1677)는 인간이 자신만의 기준으로 세계를 판단하기에, 예컨대 ‘식물과 동물은 인간에게 양분을 제공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식의 목적론적 세계관을 가지게 된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세계관으로 인간은 신이 “자신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들었다”면서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으로 여기고, 인간만의 가치를 세계에 투영해서 좋음과 나쁨, 질서와 무질서, 아름다움과 추함 같은 이항대립적 가치론을 구축한다. 하지만 이런 가치론은 사물의 참된 원인을 몰라서 내리는 인본주의일 뿐이라고 스피노자는 비판한다. 사람들은 모든 자연물이 어떤 목적을 위해 작용한다고 추측한다. 하지만 자연은 아무런 목적도 없으며, 모든 목적인(目的因)은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하다. 
















특히 목적론 사고 속에서 사물은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본질만 가지며, 그러한 본질을 향해 나아가는 미완(未完)의 존재로 간주된다. 사물 변화는 오직 본질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으로 설명되며, 이로부터 벗어난 것은 비본질적이고 비정상적일뿐이다. 이러한 목적론 사고가 갖는 위험성은 ‘차별주의’ 논리로 쉽게 전용된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목적론 사고 바탕이 다름 아닌 ‘인본주의’ 사고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인 이상 애초부터 인본주의 사고를 벗어날 순 없지 않을까? 스피노자는 우리가 인본주의 사고를 벗어나 그 ‘외부’를 사유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예를 들어 현재 우리는 남자와 여자를 평등한 이분법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분법은 서양 역사에서 최근 들어 보편화되었다. 고대에서 르네상스까지 인류 분류 방식은 하위 속물에서 상위 이상형 상태까지 위계적 연속체를 이룬다는 ‘단성 모델’이 선호되었다. 물론 그때에도 인간을 크게 여자와 남자 두 무리로 분류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이상적인 형태는 단 하나라고 생각했다. 과거부터 계속되어 온 여성 억압의 원인을 이해하려면 분류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단성 모델에서 전통적인 남성성은 더 큰 열정에 의해 단일 사다리의 정상에 있고, 전형적인 여성성은 힘의 생성이 상대적으로 약하기에 단일 사다리 밑에 위치한다). 객관적인 자연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는 범주를 통해서 자연과 교감한다. 이 점을 잘 알면서도 사람들은 어떠한 범주가 너무나 명확하기에 그 구분법은 시간과 문화를 초월해서 절대 변하지 않을 것으로 여긴다.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1948~ )도 인간이 항상 자신 망상 속 사다리의 꼭대기에 스스로를 위치시키고자, 다른 동물들을 실제보다 과소평가한다고 말한다. 드 발은 과학자들이 침팬지의 ‘키스’를 ‘입과 입의 접촉’이라고 부르고, 영장류의 ‘친구’를 ‘특히 좋아하는 제휴 파트너’라고 부르며, 까마귀와 침팬지가 도구를 만들 수 있다는 증거에 대해서는 인류를 정의하는 종류의 도구 제작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해석한다. 어떤 면에서 동물들이 우리보다 뛰어난 인지 능력을 지닌다면 – 예를 들어 특정한 새들은 수천 개의 씨앗이 있는 정확한 위치를 기억할 수 있다 – 과학자들은 이를 지능이 아니라 본능이라고 치부한다. 정치철학자 존 그레이(1948~ )는 “인본주의란 과학을 통해 인류가 진리에 다가설 수 있고, 그래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신념지만, 과학은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 면에서 인류가 다른 동물과 다르다는 속임수를 지탱하기 위해서 사용”되어 왔을 뿐이라고 냉소한다. 과학자들은 수년 전에 인간만이 도구를 이용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얼마 뒤 침팬지나 코끼리 같은 몇몇 동물이 나무 막대기와 돌 같은 물건을 도구로 이용한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들은 인간만이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를 변형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 침팬지가 막대기를 목적에 따라 변형시킨다는 사실이 또다시 밝혀졌다. 그들은 이제 인간만이 도구를 이용해 다른 도구를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자연에서 인간만이 독보적인 지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는 새로운 과학적 발견을 통해 수정되고 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라곤 스스로가 특별한 존재라고 느끼고 싶어 하는 욕구밖에 없다. 

















도시에 사는 까마귀들은 횡단보도가 있는 도로 위에 견과류를 떨어뜨려 지나가는 차바퀴에 껍질이 깨질 때까지 기다린다. 그다음에는 부리로 길 건너기 버튼을 눌러 자동차가 지나가지 못하게 막은 다음에 껍데기가 열린 견과류를 안전하게 회수해 온다. 이러한 행동은 여러 도시에서 여러 번 관찰되었다. 
















문어는 무척추동물로 분류될 뿐 아니라, 지능이 없다고 알려진 달팽이나 조개류와 마찬가지로 연체동물에 속한다. 조개류는 심지어 뇌가 없다. 하지만 문어는 뇌가 있으며 영리하다. 어린아이들이 열지 못하도록 설계된 약병 뚜껑을 문어는 열 수 있다는 사실이 보고된 바 있다. 무척추동물 치고 문어 뇌는 거대하다. 호두 정도 크기인데, 아프리카 회색앵무새 뇌 크기와 똑같다. 훈련된 어떤 회색앵무새는 구어체 영어단어 수백 개를 의미 있게 사용하는 법을 익혔다. 형태와 크기, 재료 개념 또한 이해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고, 수학을 할 수 있었으며, 질문을 던졌다. 회색앵무새는 또한 조련사를 고의로 속이다 못해, 속인 일이 발각되면 사과할 줄도 알았다. 동물 뇌의 처리 능력을 좌우하는 것은 신경세포 수다. 문어는 신경세포 3억 개가 있다. 쥐는 2억 개가 있고, 개구리는 아마도 1600만 개가 있을 터다.



미국 시애틀 아쿠아리움에 사는 태평양대왕문어는 반쯤 돌려서 나사로 고정시킬 수 있는 야구공 크기의 플라스틱 공을 즐겨 가지고 놀았다. 직원은 공 안에 음식을 넣어두었는데, 나중에 놀란 점은 문어가 공을 여는 데 그치지 않고 다시 나사를 조여 원래대로 조립해놓았다는 사실이다. 집에서 어류를 키우는 사람 다수는 문어가 자신들과 함께 텔레비전 보기를 즐기는 듯싶다고 말한다. 권위 있는 저서 『두족류: 가정 수족관을 위한 문어와 오징어』에서, 심지어 주인과 문어가 함께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도록 TV를 수조와 같은 방에 두라고 권한다.



타인 생각이 내 생각과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은 고도로 발달한 인지 상태로, 소위 ‘마음 이론’(theory of mind)으로 알려져 있다. 한때 마음 이론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능력이라 여겨졌다. 일반적인 어린이는 마음 이론이 3세에서 4세 사이에 발생한다. 마음 이론은 의식의 중요한 요소라고 간주되는데, 자의식의 존재를 암시하는 까닭이다(‘난 이렇게 생각하지만, 당신은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개조차도 자신에게 없는 지식이 다른 개체에게는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렇지만 다른 생물 마음이 어떠한지 그려보는 지구상 모든 생물 가운데 으뜸은 틀림없이 문어일 듯하다. 그런 능력이 없다면, 문어는 각양각색의 기만술로 자신을 보호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문어 암컷한테는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 호르몬이, 수컷한테는 테스토스테론 호르몬이, 둘 다에게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코스테론이 있다. 암컷 문어의 에스트로겐 수치는 산란 연령일 때와 수컷을 만날 때 급등한다. 수컷의 테스토스테론 수치도 올라간다.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은 인간의 욕구와 공포, 사랑, 즐거움, 슬픔에 관계하는 화합물이며서 여러 생물에게도 잘 보존되어 있다. 이는 인간이든, 원숭이든, 새든, 바다거북이든, 문어든, 조개든 간에 내면 깊숙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생리적 변화는 동일하게 보인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무뇌 생물인 가리비의 작은 심장조차도 포식자가 접근해오면 한층 빨리 뛴다.



인간은 다른 동물이 감정과 지능이 없다고 여기려 한다. 이런 선입견은 어류와 무척추동물에 대해서 특히 더하다. 하지만 동물은 우리가 상실했거나 결코 획득한 적 없는 감각이 확장된 세계에서 우리가 끝내 듣지 못할 목소리를 내며 살아가는 존재다. 

















동물들이 잠을 자는 방식도 놀랍다. 돌고래와 고래는 꿈을 꾸지 않는 비렘수면으로 잠을 자는 데, 한쪽 뇌 반구만 잠들 수도 있다. 즉 어느 한 시점에는 뇌 반쪽만 잠을 자고 있다는 뜻이다. 한쪽 반구가 잠을 충분히 자고 나면 서로 교대하여, 깨어 있던 반구는 깊은 비렘수면에 푹 빠져든다. 뇌 반쪽이 자고 있을 때에도, 돌고래는 계속 움직이고, 심지어 음성대화까지 할 수 있다. 뇌 활성을 교대로 ‘켜고, 끄는’ 경이로운 기술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수생 포유류만 양쪽 뇌가 따로따로 깊은 비렘수면을 취하는 능력을 지니지 않았다. 조류도 할 수 있다. 조류는 주변을 지켜보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새가 혼자 있을 때는, 뇌의 반쪽과 그 반쪽이 담당한 눈은 깨어서 주변에 어떤 위협 요인이 있는지 계속 지켜본다. 그렇게 할 때, 다른 쪽 눈은 감긴다. 그럼으로써 그 눈을 담당하는 뇌 반구는 잠이 들 수 있다.



새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는 더욱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일부 종에서는 새들이 무리지어 있을 때면, 양쪽 뇌 반구가 동시에 잠을 자는 개체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들은 어떻게 위협을 피할 수 있을까? 답은 참 창의적이다. 무리는 먼저 나뭇가지에 한 줄로 죽 늘어서 앉는다. 양쪽 끝에 있는 개체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뇌 양쪽 반구 모두가 잠에 빠져든다. 양쪽 끝에 앉은 새들은 뇌의 반쪽(서로 반대쪽)만 깊이 잠든다. 따라서 한쪽 끝 새는 오른쪽 눈을, 다른 한쪽 끝 새는 왼쪽 눈을 활짝 뜨고 있다. 그럼으로써 무리에서 양쪽 반구 모두가 동시에 잠들 수 있는 개체 수를 최대한 늘리면서, 무리 전체를 위해 두 마리 새만 위협 요인이 있는지 주변을 지켜본다.. 시간이 좀 지나면, 양쪽 보초병들은 일어나서 몸을 180도 돌려서 다시 앉아, 다른 쪽 뇌를 잠재운다.



대양을 건너서 수천 킬로미터 이주하는 철새들은 한 자리에서 충분히 잠잘 기회가 없다. 하지만 뇌는 이런 상황에서 창의적인 방법을 찾아냈다. 철새들은 비행할 때 겨우 몇 초씩 지속되는 놀라울 만치 짧은 잠에 빠지곤 한다. 이 극도로 강력한 선잠만으로도, 오랫동안 전혀 잠을 자지 못했을 때 뇌와 몸에 닥칠 여러 결핍 증상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 흰정수리멧새는 아마 장거리 비행 때 잠을 줄이는 능력 면에서 가장 경이로운 사례일 것이다. 이 흔한 작은 새를 미군이 수백만 달러 들여서 연구하고 있다. 미군은 24시간 잠을 자지 않는 군인을 만들고 싶은가 보다. 

















여왕개미 평균 수명은 14년이며, 한 마리가 평생 낳는 알의 수는 약 1억 5천만 개에 달한다. 이처럼 많은 알을 낳기 위해 여왕개미는 숫개미 여러 마리와 교미하며 적어도 정자 2억 개 이상을 비축한다. 여왕개미는 저정낭이라 불리는 정자주머니 속에 정자를 저장해 놓고 평생 사용한다. 여왕개미가 알을 낳을 때 저정낭에서 정자를 꺼내어 수정시키면 암컷이 되고 저정낭을 막아 미수정란을 낳으면 숫컷이 된다. 다시 말해 숫컷들은 동정녀로부터 태어난 개체다. 숫개미는 정자 도움 없이 오로지 난자로부터 만들어지는 반수체 동물이기에 그들 세포 속에는 언제나 단 한 벌의 염색체만 들어 있다. 숫개미는 아버지가 없는 개체다. 



남미 지역에 사는 잎꾼개미 군락 하나가 파 엎은 흙 양은 평균 20m^3가 넘으며 무게로 따지면 약 44톤이나 된다. 일개미 한 마리마다 자기 몸무게 너댓 배나 되는 흙덩이를 적어도 10억 번 이상 굴 밖으로 끌어낸다. 이파리를 운반할 때도, 사람으로 치면, 약 15km나 되는 귀갓길을 300kg이 넘는 짐을 입에 물고 시속 24km 속력으로 달리는 셈이다.



개미는 태양과 각도를 측정하여 갈 길 방향을 찾는다. 개미는 먹이가 있는 곳으로 가는 동안 태양과 각도를 측정해 두었다가 먹이를 짚어들고 180도 회전하여 집으로 향한다. 해를 방향지표로 사용하는 데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만일 먹이를 구하러 나가는 시각과 집으로 돌아오는 시각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생겼을 경우다. 하지만 개미 뇌 속에 생물시계가 있어서 한 시간에 15도씩 각도를 조절하여 정확하게 집으로 향한다.



일개미는 자기 의사도 전혀 없는 기계적인 개체가 아니다. 그들도 엄연히 독립적인 몸을 가지고 개별적인 삶을 영위하는 생명체다. 일개미가 알을 낳는 경우도 상당수 관찰되었다. 암놈인 일개미가 낳을 수 있는 알은 결국 미수정란이므로 모두 숫개미로 성장한다. 여왕이 버젓이 살아 있는 동안 일개미가 숫개미를 키우는 일이 언제나 순조롭지만 않다. 실제로 많은 종에서 여왕개미와 일개미들 간 갈등은 끊일 날이 없다. 일개미들은 대체로 여왕 화학물질 영향력이 급격히 약화되는 군락 변방이나 굴 속 어느 한 방 입구를 막은 채 여왕 눈을 피해 자기들끼리 알을 낳는다. 여왕개미가 일개미의 역적모의를 눈치 채면 손수 역도 소굴로 행차하여 그들을 가차 없이 물어 죽이는 일도 있다. 개미 군락에서 일개미들이 아무런 지각도 없이 그저 전체 복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삼엄한 군주의 압제 하에서도 틈틈이 자기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꿀벌이나 다른 곤충들이 빠르게 날갯짓을 하면 순간적으로 상당한 정전기가 발생한다. 정전기로 충만한 곤충 몸뚱이가 꽃 속으로 들어오면서 촉촉한 암술대와 암술머리에 닿으면서 식물의 중앙 관다발 시스템으로 직접 연결되는 전기장을 만들어낸다. 전기장은 뿌리로 연결되는 수분에 의해 접지되어 땅속으로 흐르게 된다. 이러한 정전기 이동은 곤충 몸에서부터 꽃가루가 떨어져 나와 암술머리에 달라붙기 쉽게 해준다. 또한, 꿀벌이 긴 겨울을 보내기 위해 취하는 방법 중 하나는 겨울 동안 자신들 머리 무게를 줄이는 것이다. 핀란드의 어느 한 학자가 꿀벌은 겨울에는 뇌 활동과 뇌 크기를 줄이고 꽃이 피는 봄에는 뇌 크기를 늘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야말로 겨울에 에너지를 절약하는 아주 훌륭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자신 내부 컴퓨터 용량을 줄이는 것이다. 꿀벌을 치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러한 ‘뇌의 축소’에도 불구하고 꿀벌은 겨울 동안에도 꽃이 피어 있던 방향을 기억할 수 있다고 한다. 핀 머리만 한 크기의 뇌로서도 기억력은 나쁘지 않은 것이다. 

















인간에게는 근면이 미덕이라는 윤리의식이 있지만, 게으름 피우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변별 있는 행동 양식이며,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이 공유하는 미덕이다. 이솝 우화에는 일벌과 일개미가 대단히 부지런한 동물로 나온다. 하지만 그 동물들이 과즙을 모으거나 집을 청소하는 시간은 낮 시간의 20%에 불과하다. 그외 시간에는 게으름뱅이처럼 일은 안 하고 빈둥거리기만 한다. 개미나 벌이 근면한 동물의 대명사로 불리게 된 것은 벌집이나 개미집 전체가 보여주는 번잡함 때문인 듯하다. 벌집이나 개미집은 겉보기에는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작은 우주 같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각각의 개미와 벌이 매순간 무엇을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개체 하나하나에 일일이 꼬리표를 붙여 관찰한 결과, 벌과 개미의 휴식 시간이 상당히 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최근에는 군집생활을 하는 곤충들이 사소한 활동에 에너지를 낭비할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새로운 연구 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다. 개미와 벌은 건전지와 같아서 집단을 위해 사용할 일정량의 에너지를 지니고 태어난다. 하지만 그 에너지는 재충전 되지 않기에 빨리 사용하거나 천천히 사용할 수는 있지만 잘 먹고 규칙적으로 운동한다고 해서 더 얻을 수는 없다. 결국 열심히 일할수록 빨리 죽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꿀을 모으지 않고 휴식을 취하고 싶어 하는 벌들의 심정 공감된다.



인간은 생존에 쓰고도 남을 만큼의 자원을 모은다. 인간의 물욕은 대개 문화적인 탓인 것 같다. 사냥이나 채집을 통해 자원을 획득하고, 그렇게 획득한 자원을 대체로 그날그날 소비하는 동물들은 하루에 서너 시간만 일한다. 사실 일밖에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일하지 않고 빈둥거리고 싶어 하는 선천적인 욕구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기에, 인간은 일부러 게으름을 육욕이나 대식과 함께 일곱 가지 죄악(seven deadly sins) 중 하나로 여기는 것이 아닐까? 



옥수수가 도움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내보낼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다. 또는 나무가 다른 나무와 조난신호를 ‘주고받을 것’이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못한다. 또한 아무도 식물이 공격을 받게 되면 재빠르게 화학적 대응책을 강구할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한다. 식물들은 단순히 한자리에 앉아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문제가 발생하면 이에 대응할 수 있고 또 방어물질도 동원할 수 있다. 비록 식물이 신경망도 없고 뇌도 없지만 그들 세포는 서로 연락도 할 수 있고 협조된 대응 체계도 만들어낼 수 있다. 비록 전기충격처럼 신경 섬유를 따라 빠르게 전달할 수는 없지만 식물의 여러 다양한 부분은 질병에 대해 반응할 수 있고 식물의 다른 부분과 의사소통을 할 수도 있다. 몇 년 전만해도 이러한 주장은 대단히 놀라운 발견이었다.



옥수수는 상업적으로 중요한 작물이기에 많은 연구가 있었으나 최근에서야 놀랄 만한 사실을 발견했다. 먹성이 좋은 옥수수 천공충이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먹거리인 옥수수 줄기를 갉아먹기 시작하면 옥수수는 냄새나는 화학물질을 만들어내 이에 대응한다. 이 화학물질은 휘발성이 강하고 바람에 의해 멀리까지 전달된다. 이 냄새는 바로 조그만 나나니벌들을 자극해 모여들도록 하는데, 나나니벌은 옥수수 천공충 애벌레에 모여든다. 암컷 나나니벌은 천공충 애벌레 몸뚱이 속에 알을 낳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새로운 나나니벌 애벌레가 깨어나 자라나면서 옥수수 천공충 애벌레를 서서히 안으로부터 갉아먹는다. 나나니벌 애벌레가 당장은 옥수수를 보호해주는 못한다. 천공충 애벌레는 금세 죽지 않고 계속해서 옥수수 줄기를 갉아먹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공충 애벌레가 성충이 되는 것을 막아 천공충 번식을 제어하기에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면 대단히 중요한 방어 전략이 된다.



생물학자들은 꽃을 피우는 식물을 속씨식물이라고 부른다. 속씨식물 종의 수는 대략 26만여 종이나 된다. 지구상 모든 식물 종의 수가 30만 종정도 된다고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 주변 식물 중에서 속씨식물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꽃을 피우는 식물이 생물학적 분포 전체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나비나 나방, 딱정벌레, 벌, 베짱이, 메뚜기 같은 곤충들만 전부 더해도 100만 종은 훌쩍 넘기 때문이다. 딱정벌레만 해도 그 종류가 4만5,000종을 넘고 지금도 새로운 종이 매일매일 발견되는 실정이다.



생물학은 정확하게 말하면 과학이 아니다. 화학이나 물리학과는 다르게 어떤 규칙이나 법칙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중에는 몇 가지 단순한 규칙이 보이기는 하지만 생물학 분야는 일반적으로 광범위한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꽃’과 같은 정도의 생물은 아주 간단하게 그 정의와 특성을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꽃은 그 크기나 모양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아주 다양하다. 



우리가 동물이나 식물이 단순하고 열등하다고 여겨 지배하려 든다면, 우리가 만든 인공지능이 인류를 지배하는 일이 더 바람직할 수도 있다며 물리학자 김상욱(1970~ )은 우리의 잘못된 논리를 꼬집는다. “폭발물 탐지 로봇은 인간을 위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위험에 몸을 내던진다. 기계지능이 인간과 비교하여 열등한 것이 있다면 욕심이 없다는 것이다. 수많은 종교가 추구하던 궁극의 경지란 대개 자아와 욕심을 버려서 도달하는 상태다. 기계지능은 버려야 할 자아나 욕심이 아예 없다. 기계지능은 인간이 도달하고자 한 열반의 경지에 이미 도달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인간 대신 이들이 지구를 지배할 때 더 나은 세상이 될 거라 상상하는 것이 지나친 비약은 아닐지도 모른다. 더 낫다는 기준에 반드시 인간이 고려되어야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2010) 저자 존 그레이에게 인본주의의 다른 말은 곧 악의 상징, 루시퍼의 속성인 ‘오만’이다. 인간은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경계를 넘어’버렸다는 의미에서 그에게 거의 ‘악’에 가까우며, 그 대표적인 오만한 인간의 사상이 인본주의라는 것이다. 그레이에게 서양 인본주의의 기원은 기독교에 있다.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은 좌든 우든 기본적으로는 이 ‘인본주의’ 사상과 ‘진보’의 결합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다는 게 그레이의 주장이다. 기독교의 힘은 어느새 사라져버렸고, 그 자리에 과학과 기술이 들어와서 종교의 위치를 차지했다. 인간은 다시 자신이 과학과 기술을 잘 다스려서 운명을 개척하여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과학과 기술이 ‘객관적 지식’인 듯 보여도 그것의 활용방식은 인본주의이고, 그 인본주의의 기원은 기독교이고, 기독교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주는 편협한 신화일 뿐이다. 그렇다면 다시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세상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믿음 역시 하나의 허상이다.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조슈아 그린(1974~ )은 “인본주의가 중요한지 아닌지 알아낼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지적한다. “인본주의는 우리의 주관적 느낌을 마치 추상적인 도덕적 실체인 양 만드는 편리한 합리화 도구일 뿐이다. 합리적 논증이 필요 없는 상황이라면 인본주의를 수사적인 무기로 삼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인본주의에 호소하는 것은 논증을 펼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논증의 시간이 끝났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인본주의는 사람-동물 관계에서 뿐 하니라 사람-사람 관계에서도 수사적인 무기로 삼지 말아야 한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1949~ )은 인본주의가 지배 계급의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비판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의 틈이 메워질 수 없을 정도로 급격히 커지고 있는데도 인본주의 방식은 이런 진짜 모순을 덮으면서 시스템 문제를 ‘인간’과 개인 문제로 돌려버린다. 겉으로 진보적이고 의식 있게 보이는 인본주의이야말로 오히려 현 체제를 유지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인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



평론가 문강형준(1975~ )은 휴머니즘 강조가 사회문제를 개인 ‘인간’ 문제로 둔갑시킨다고 비판한다. <인간극장>처럼 휴머니즘(인본주의)을 방영하는 다큐멘터리는 “매번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사람들이 살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감동적으로 그려내, 삶의 소중함을 일깨우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일상의 행복’을 선전하는 프로그램은 일말의 진실은 있을지 몰라도, 생활세계의 잡다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을 싸잡아 ‘마음의 변화’ 하나로 해결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런 메시지야말로 힘든 세상 문제는 그대로 두고 정신의 변화만 요청해서 자기만의 가짜 행복에 빠져들게 만드는 아편이기도 하다. 오직 마음의 문제로만 환원시키면 결국 사회와 인간의 분리만 가속된다. 행복은 결코 개인적인 결단으로만 가능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