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을 정치학과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은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기 보다는 그냥 놔두는 편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믿음입니다. 시장경제는 완벽하게 작동하기에 시장에서 정부가 필요 없다는 것이죠. 애덤 스미스는 시장이 개인 이익 추구의 원리와 더불어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만유인력처럼 작동한다고 보았습니다. 그 결과 경제학에서 자유방임주의 이론이 생겨났습니다. 자유방임 경제 철학은 비간섭 원리로서, 세상의 체제는 자율적이기에 더 낫게 하려고 시도해보았자 더 나빠질 뿐이므로 그냥 놔두라는 권고입니다. 18세기 경제학자들은 신이 경제법칙을 자연법칙과 똑같이 창조했기에 틀림없이 좋은 것이라고 가정하며, 경제학을 정치학과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죠. 18세기 사상가들은 신이 이성적인 계획에 따라 세상을 만들었으며, 뉴턴(1643~1727)이 이성을 사용하여 신의 계획을 발견해냈다고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찮은 인간이 무한하게 넓은 신의 뜻 – 특히, 선한 신이 악(惡)을 왜 창조했는지를 결코 헤아릴 수 없다는 예전 믿음은 더 이상 새로운 뉴턴 시대에 양립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뉴턴의 발견과 이 발견 위에 세워진 자연신학의 전반적인 요점은 뉴턴이 실제로 신의 마음을 헤아렸으며, 그것을 수식으로 증명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18세기 사상가들은 악의 문제에 답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이들 추론 과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신은 지극히 그리고 완전히 선하다. 정의상 신은 악을 행할 수 없다.

· 신은 뉴턴이 밝힌 대로 이성과 논리, 수학 같은 법칙에 따라 우주를 창조했다.

· 이 두 가정은 서로 상반될 수 없다. 만약 상반된다면 신은 전능하기에 이를 미리 알았을 것이며, 신의 선함으로 인해 이성에 따라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 게다가 만약 이성의 법칙으로 인해 신이 하나보다 더 많은 종류의 세계를 만들 수 있었다면, 신은 선한 존재이기에 모든 가능한 세계 가운데 가장 최상의 세계를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 따라서 이 세상은 가능한 모든 세계 중 최상이다.



당시 대다수 사상가는 만약 이 세계가 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 최상이라면, 변화시킬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계의 모든 악과 고통은 신의 계획 일부이기에 전체 체계에 어떻게든 이득이 됨이 틀림없습니다. 신이 운동 법칙으로 물리 세계를 창조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스스로 작동하듯, 신은 인간 세계를 (인력이나 척력이라는 자연법칙과 유사한) 사회적 상호작용 법칙으로 창조하고, 이 법칙에 따라 가장 조화로운 사회 질서가 마련되었습니다. 이 모든 사상의 최종적인 결과는 자유방임이라는 근본 원리에 바탕을 둔 경제학 철학이었습니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은 “자유방임주의 사상은 청교도주의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며, “하지만 중세나 근대와 달리 신학적 기반을 떠난 현대 사상에서 자유방임 같은 자연 상태 이론은 공감대 형성 부족으로 불완전 이론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합니다. 















철학자이자 정치경제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은 적어도 생산 영역에서만 ‘경제법칙’이 성립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자연에 영향 받는 생산은 필연의 법칙에 지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분배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입니다. 분배는 필연이나 사실 차원[경제]이 아니라 당위나 가치 차원[정치]의 문제입니다. 생산과 분배 사이에는 굵은 분절선이 존재합니다. 그리스 금언이 말해주듯, ‘주어진 것을 선용(善用)하는 것’, 즉 우리 삶에서 주어진 것을 잘 만들어가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공정한 분배를 하려면 사람들이 따라야 할 분배의 가치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치기준이 개인 필요가 아니라 공동체의 집단적 필요에서 나온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가치기준도 자연권으로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가치기준에 정답은 없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언합니다. 따라서 가치기준의 정당성은 미리 전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만들어나가야 하는 대상이 됩니다. 공정한 분배를 위해 사회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회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끝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현실의 시장에서는 개인들 권력이 평등한 것도 아니고 개인만 자원 배분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분명히 어떤 사람은 더 큰 자원 배분 권력을 갖고 있으며, 다른 사람은 자원 배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집단을 만듭니다. 그 결과 주요한 경제적 자원 대부분은 이러한 사람들과 집단들에 의해 권위적으로 배분됩니다. 토지와 화폐, 노동 같은 대부분의 주요한 경제적 자원은 항상 정치적으로 배분되고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정치와 권력이 배제된 순수한 시장에 의한 자원 배분은 불가능하며, 시장에만 맡기는 그 순간에도 시장 내부에서 정치와 권력은 작동합니다. 그러므로 경제에 정치와 권력이 부재하는 상황을 가정하거나 바라는 것은 지극히 비현실적입니다..

 
















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묻어 들어 있음’(embeddedness)이란 개념을 항상 자신 논리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인간 경제는 여러 시장이 통합되어 균형을 찾아가는 체제가 아닌, 항상 사회에 ‘묻어 들어가 있다.’ ‘묻어 들어 있음’이라는 말은, 자유주의 경제 이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시장이 그렇게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경제가 정치와 종교, 사회관계에 종속되어 있다는 생각을 표현한 말이다. 반면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자기조정 시장’ 체제는 거꾸로 사회를 시장 논리에 종속시킬 것을 요구한다.”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는 완전경쟁 자유방임 시장 이론의 전제는 만약 그 이론이 현실과 닮았다면 이론의 결과 또한 현실에 근접하리라는 추론입니다. 그런데 경제학자 켈빈 랭카스터(1924~1999)와 리처드 립시(1928~ )는 자유방임 옹호자들이 지난 수십 년간 그렇게 주장한 논의는 유감스럽게도 오류라고 지적하며, ‘차선’(次善)이론을 설명합니다. 차선이론은 ‘차선’인 시장, 즉 완전경쟁 시장에 ‘거의 근접하는’ 시장이라고 할지라도 세 번째나 네 번째로 좋은 시장, 혹은 아예 완전히 비경쟁적인 시장보다 더 효율적이라고 보장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경제학과에 입학한 학생들이 그래프와 미적분학의 기초를 간신히 배우고 나면 느끼는 좌절감, 곧 경제학은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느낌은 완전경쟁 자유방임 시장 개념을 배울 때 극대화됩니다. 하지만 미시경제학 교과서도 이미 그 정도의 반감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완전경쟁 자유방임이라는 개념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현실을 분석하기 위한 준거점으로 중요하다는 설명을 덧붙입니다. 경제학자들은 완전경쟁 자유방임 경제 모델은 실제 실물경제와 비교할 때 단순화한 것이자 추정치이기는 하지만 정책 수립은 물론 예측에도 유용하게 사용되기 마련이라고 말합니다. .















우리는 완전경쟁 시장이 실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준거점이라고 가정해보죠. 우리는 자유로운 선택을 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고 이성적인 개인이며, 시장에 참여하는 권한과 정보가 공평하게 분포되어 있다고 가정합니다. 그리고 가격은 시장에 의해서 결정되고 시장의 완전경쟁 조건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가정합니다. 자유방임주의자들은 시장을 ‘가능한’ 경쟁적으로 만들기만 하면 그 결과는 이상(理想)에 확실히 근접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점이 랭카스터와 립시가 밝혀낸 오류입니다. 만약 현실이 완전경쟁의 이상과 한 군데라도 어긋나면 최선의 결과를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완전경쟁에 가장 근접한 상태에서 얻어지는 결과일지라도 어떤 다른 차선책에서 얻어지는 결과보다 훨씬 못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완전경쟁 요건을 더 많이 충족시킬수록 – 전부 충족시키지 않는 한 – 완전효율이라는 이상에서 더욱 멀어질 수 있습니다.



특히, 부정적 외부효과(공해, 소음, 악취 등)가 발생하는 경우 재화 가격에 외부효과 비용이 반영되지 않습니다. 자유방임주의 수호자들은 이에 대해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말합니다. 어느 한 분야에서 정상적으로 가격이 매겨지지 않더라도 나머지 부문을 전부 경쟁적으로 만들면 올바른 가격 수준에 근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차선이론이 바로 그러한 정책 해법으로는 효율성을 증대시킬 가능성이 낮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일부 가격이 잘못됐으면 나머지 가격이 정확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일부 가격이 왜곡되어 있는 경제에서 다수를 시정하면 상황이 오히려 악화될 수 있습니다. 



차선이론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점은, 일반균형 모형에서 유용한 정책안을 끌어내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단순한 도구는 현실에서 무엇이 최선일지 알려주지 못합니다. 차선이론이 가져온 가장 주된 파장은 경제학자들과 그 추종자들을 ‘겸손해지게’ 만들었다고 립시는 설명했습니다. 차선이론은 극도로 이상화된 하나의 모형을 근거로 시장 효율성에 관해 한 마디로 단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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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3-11-02 16: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완전경쟁 시장이 현실에서 완전히 불가능한 이상, 시장지상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정부 개입을 통해 파레토 개선이 가능하지요. 정부의 역량이 문제될 뿐이지 정부개입의 당위성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23-11-02 17:08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합니다.^^
네, 맞습니다. 완전경쟁 자유방임 시장은 단어 그 자체로 말도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고 학교에서도 여전히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사실(事實)의 사실(史實)이 궁금했고, 그 역사가 뉴턴과 연계된 점이 흥미로워 글로 남겨보았습니다.^^

혹시 말씀하신 파레토 개선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어떤 사람들 여건을 개선시키는 변화(부유하게 만드는 변화)는 가능하다’라는 파레토 최적을 언급하신 것인지요?

제가 파레토 최적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는 못합니다만, 우선 파레토 최적이 가능하다고 해도 전 파레토 최적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부자들 재산은 흠잡을 데가 없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파레토 최적이 사용되는 것 같아 불편합니다. 파레토 최적은 불평등한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단지 부자가 더 많은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소득 차이는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더욱이 파레토 최적은 외부효과를 고려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외부효과 없이 어떤 사람 여건이 개선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누군가는 우리 후손일 수도 있습니다. A와 B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이 A의 손해 없이 B에게는 이익이 되지만 C에게 손해가 된다면 – 환경 오염같은 사례 – 그것은 다른 문제인 것 같습니다.

끝으로 파레토 최적이 정말 가능한지 무척 의심이 듭니다. 권력의 정도가 서로 많이 다른 인간의 갈등 세계에서 다른 사람을 가난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어떤 사람을 부유하게 만드는 변화가 얼마나 가능할지 의구심이 듭니다. 그러한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얼마나 될지 매우 궁금합니다. 따라서 파레토 최적 이론을 적용할 수 있는 범위가 매우 협소해 보입니다.

추풍오장원 2023-11-02 17:46   좋아요 1 | URL
‘파레토 최적‘은 단순히 말하자면 시장지상주의자의 이상이 실현된 상태,
‘파레토 개선‘은 파레토 최적으로 가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파레토 개선이 불가능한 상태를 파레토 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파레토 최적은 효율성 외에는 어떤것도 고려하지 않는 극단적인 개념이므로,
파레토 개선의 과정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지는 정책에 따라 달라집니다.
소득분배의 개선과 함께 시장효율성도 개선되는 방향이 될 수도 있고, 시장효율성만 개선되는 방향이 될 수도 있지요...
현실적으로 시장의 위력을 부정할 수 없고, 현실의 제약조건을 고려하여 정책을 만들어야 하니
현 경제 체제에서는 정부개입을 통하여 소득분배의 개선을 추구하는게 바람직하다고 생각됩니다.

북다이제스터 2023-11-02 17:4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제가 파레토 개선과 파레토 최적 차이를 잘 몰랐습니다. ㅠ
 



행복은 선택할 수 없는 문제일 뿐 아니라, 물질적 부(富)를 추구하는 행복은 절대적 빈곤보다 더 민감한 상대적 빈곤 문제를 일으킵니다. ‘오늘날 가장 궁핍하게 사는 사람조차 수백 년 전 왕보다 더 잘 사는 데 몇몇 사람이 엄청 잘 사는 게 뭐가 그리 대수로운가?’라고 생각한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상대적으로 더 큰 빈곤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역사학자이자 철학자인 윌 듀런트(1885~1981)는 “가난은 부(富)에 의해 만들어지며, 부가 눈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까지 우리는 가난이 가난인 줄 모른다”라고 말합니다.

















과거에 평범한 사람은 부자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잘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누구든 백만장자가 어떻게 삶을 사는지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은 부자들의 호화로운 삶을 비정상적일 정도로 크게 보도합니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에서 어마어마하게 돈이 많이 부자들의 집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부자들의 라이프스타일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자 ‘소셜 미디어로 생긴 불만’이라는 증상이 생겼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평생 절대 소유할 수 없는 모든 것을 괴로울 정도로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든 다른 형태의 대중적 노출이든, ‘소셜 미디어로 생긴 불만’은 보통 사람이 소유한 것을 하찮게 보이도록 합니다. 비록 그 사람이 객관적인 기준에서 삶을 넉넉하게 누리고 있고, 인류 역사 전체 기준에서 극히 잘 사는 사람일지라고 그렇습니다. 

 















사회운동가 홍세화(1947~ )는 “성공한 자의 거머쥔 부를 동경하는 것은 ‘90퍼센트 사람들’이 덥석 문 당근이다. 그 가능성은 로또복권 당첨 확률에 불과하지만, 모두 성공 예감으로 뜀박질하도록 내몰아 기대하는 미래상으로만 자신을 일치시키고 오늘의 자신을 배반하도록 한다”라고 말하며, 그 이면을 깨달아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내 생각은 내가 주체적으로 형성한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이 나에게 갖도록 요구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간파해야 한다.” 
















그렇다면 상대적 빈곤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모든 사람을 가장 가난한 사람만큼 가난하게 만들어 간단히 평등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명백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은 원래대로 가난하지만, 나머지 모든 사람은 해를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평등을 추구하는 일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인정한다고 해서, 불평등을 그냥 받아들여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불평등이 용인될 수 있는 경우가 언제인가 하는 점입니다. 불평등은 결과적으로 아무도 더 나빠지지 않고, 더 나아지는 사람들이 있을 때에만 허용될 수 있습니다. 이는 정치철학자 존 롤스(1921~2002)가 ‘차등 원칙’(difference principle)이라고 부른 것과 유사합니다. 불평등은 가장 못사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경우에만 허용될 수 있다는 원칙입니다. 하지만 이 원칙이 이상적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사회에서 불평등이 더욱 민감하게 감지되고,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웃이 더욱 부유해지면, 자신이 더 못살게 되는 것이 아님에도 부의 차이를 점점 더 의식하게 되고 불만족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등과 불평등을 오로지 물질 관점에서만 보는 것은 끔찍한 실패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행복을 결정하는 요인은 상대적입니다. 사람들은 자신 행복을 판단할 때, 자신 실제 상황을 과거 혹은 현재의 사회적 경험에 비추어 비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행복이 상대적이라면 국가가 객관적으로 경제를 개선하고 부양한다고 해서 반드시 국민이 행복해진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무슨 일이든 쉽게 적응하며, 행복은 객관적으로 충족되지 않기에 국가의 경제 정책이 국민 행복 증대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만족을 위해 설계되지 않았다. 인간의 행복은 객관적 조건보다 우리 자신의 기대에 더 크게 좌우된다. 여건이 극도로 좋아진 후에도 불만족스러운 상태가 된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자신 운명에 주관적으로 만족하도록 하고 사회 불만을 막고자 보편적 기본소득을 도입한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인간의 기본적 필요’가 무엇이든지간에, 일단 한 번 누구에게나 그것을 무료로 제공하면 사람들은 이를 당연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보편적 기본소득 덕분에 빈곤층이 지금보다 훨씬 나은 의료 서비스와 교육을 누린다 하더라도, 그들은 전 지구에 불평등이 만연한 것에 극도로 분노할 수 있다."


 

행복이라는 "목표를 진정으로 달성하려면 보편 기본소득은 다른 의미 있는 일과 더불어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일 이후(이외) 만족스런 삶을 사는 방법, 심지어 가난하고 직업이 없더라도 삶의 만족도를 높일 방법을 먼저 찾아야 한다. 보편 기본소득과 더불어 강력한 공동체와 의미 있는 삶의 추구를 결합해야 한다.“ 
















유발 하라리가 언급한 “심지어 가난하고 직업이 없더라도 삶의 만족도”를 높인 사회가 요즘 일본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재 일본 젊은 층 대다수는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취직률은 저조하고, 저임금에 시달리고, 워킹푸어로 일하고, 현대판 홈리스라고 볼 수 있는 피시방에서 난민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 젊은이들은 삶이 만족스럽다고 느끼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일본 20대 젊은 층이 느끼는 생활 만족도와 행복 지수는 78.3퍼센트까지 상승했습니다. 일본 중학생과 고등학생 95퍼센트가 자신은 행복하다고 답했습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꽤 높은 만족도입니다. 1980년 절정기를 맞았던 일본의 ‘입시 전쟁’이 상징하듯 ‘좋은 학교, 좋은 회사, 좋은 인생’이라는 중산층 꿈으로 일본 전체가 압도되던 시기는 지났습니다. 1990년대 이후 중산층 꿈이 무너짐과 동시에 기업의 정식 구성원이 되지 못한 젊은이가 증가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 젊은 층의 삶에 대한 만족도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요즘 일본 젊은이는 예전만큼 자동차를 구입하지 않습니다. 술도 많이 마시지 않습니다. 해외여행도 그리 즐기지 않습니다. 유학생 수도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선거 때 투표하러 가는 젊은이 수도 현저하게 줄고 있습니다. 사회 부조리를 바로잡으려는 대규모 시위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대신 태어난 지역에 애착을 느끼는 젊은이가 증가하고 있고, 대도시권으로 이동하는 인구수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2011)의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1985~ )는 그 원인을 이렇게 진단합니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리 없다고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행복하다고 느낀다.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될 때, 지금 행복하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세속적 물질을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적 풍요 그 자체가 오히려 불행의 원인일지도 모릅니다. 해마다 소비자 구매 심리를 자극하는 더욱 매혹적인 상품이 나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물건을 소유하는 기쁨보다 물건을 갖지 못하는 비참함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1754년에 이미 루소가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세상 물질을 갖지 못한다면 불행하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세상 물질을 소유한다고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내면의 행복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해서 오지 않습니다. 외부에서 무언가 주어지는 행복은 지속시간이 짧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 원했던 승용차를 사더라도 만족감이 반년을 넘기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은 무슨 일이든 쉽게 적응합니다. 인간의 행복에는 설정점(set point)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생기더라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행복감은 기저수준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결국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행복을 계속 누릴 수는 없습니다. 마치 쳇바퀴 돌리는 다람쥐처럼 아주 잠깐만 바닥을 벗어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흔히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새로운 상황에 곧 적응하리라는 사실을 매번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노인들은 대게 건강 문제로 고통을 많이 겪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인이 젊은이보다 더 행복하다는 말을 들으면 매우 놀랍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만성 질병에 잘 적응하는 편입니다. 인간은 미래에 자신이 어떻게 느낄지 예측하는 데 매우 서툽니다. 우리는 자신 감정의 반응 강도와 지속시간 모두를 크게 과대평가합니다. 
















흔히 쾌락주의자로 잘못 알려진 철학자 에피쿠로스(BC 341~270)는 행복을 대부분 사람과는 다르게 규정했습니다. 우리는 긍정적인 정서 차원에서 행복을 떠올립니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결핍과 부재 측면에서 행복을 규정했습니다. 그리스인은 이러한 상태를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불렀습니다. ‘문제(~taraxia)가 없다(a~)’는 뜻입니다. 우리가 만족을 느낄 때는 어떤 것을 소유해서가 아니라 바로 불안이 없을 때입니다. 행복은 고통의 반대말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를 뜻합니다. ‘다행’(多幸)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의미에서 쾌락은 인생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쾌락 뒤에는 필연적으로 불쾌감이 뒤따르며, 인간의 참된 목표인 고통의 부재로부터 멀어진다는 점이 그의 요지입니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정주의자’였습니다. 불필요한 욕망을 필요한 욕망으로 착각하면 고통이 생깁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갈망에 비해 그 성취감은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쾌락으로 시작된 것이 고통으로 끝납니다. 에피쿠로스는 유일한 해결책이 욕망을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제안합니다. 

















부처(BC 560?~480?)는 우리 행복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괴로움이 되는 경우가 아주 많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한 사람의 번영은 보통 다른 사람의 궁핍이나 배제에 의존합니다. 나라가 부유해지면 항상 불평등이 불행을 초래하기 마련입니다. 작가 버나드 맨더빌(1670~1733)이 말한 것처럼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대다수 사람이 가난하고 불행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중상주의’라고 부르는 이러한 논리는, 한 사람의 손실이 다른 사람에게 이득이 된다는 뜻입니다. 중상주의자가 해줄 수 있는 최고 조언은, 예컨대 임금은 낮출수록 좋다는 점입니다. 값싼 노동력은 경쟁 우위를 창출해 수출을 증진시키기 때문입니다. 맨더빌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노예가 허용되지 않는 자유 국가에서 가장 확실하게 부를 창출하는 것은 부지런히 일하는 빈곤층 다수”입니다. 

 















멘더빌이 이렇게 거리낌 없이 주장했던 이유는 빈곤층이 형편없는 사람들이라고 가정했기 때문입니다. “동료 노동자와의 경쟁에서 패한 노동자는 나태와 우둔이라는 죄를 뒤집어쓰고 빈곤이라는 형벌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영국 전 총리 마거릿 대처(1925~2013) 역시 빈곤을 ‘인격의 결함’이라고 칭하기도 했습니다. 빈곤을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데, 가난한 사람은 그럴 의지가 부족하다고 비난한 것입니다.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나 언젠가는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현대사회에는 ‘긍정적으로 사고하라!’는 신앙이 있습니다. 이 같은 낙관주의에 사로잡힐 경우 우리 모두에게 고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게 됩니다. 나아가 내 자신 감정을 다치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을 냉담하게 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부처는 “괴로움의 현실이 우리 삶 전체에 완전히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고통을 느껴야 한다”고 말합니다. 불교는 삶의 목표로써 내면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보다 삶의 현실인 변화의 고통[生老病死]을 깨닫고 받아들여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행복을 가져오는 뭔가를 얻자마자 곧 그것을 잃을까봐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늘 욕망의 대상을 쫓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결국 그것 때문에 불행해질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부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고정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도 실제로는 순간순간 변화한다. 절대적이고 영원한 실체에 대한 믿음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욕망을 낳고 또 그 욕망은 고통을 가져온다. 만족스러운 순간은 거의 없고, 있다 하더라도 아주 짧은 순간일 뿐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영원히 좌절하는 것이다.” 
















철학자 스베냐 플라스푈러(1975~ )는 인간이 고통을 인식하고 이를 통해 성장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실패를 겪은 사람은 그것이 왜 실패했는지 생각하고, 무엇을 더 배워야 하는지 고민하여, 다시 일을 시작할 때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장애나 시스템 오류라고 생각해 주어진 한계를 극복하려고만 한다면, 인간은 자기 실존과의 중요한 연결 지점을 잃고 말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을 한계가 있는 존재로 인정할 때 자아를 갖게 된다. 인간이 그 한계와 고통을 경험하고 자신 인생과 사회가 대체 왜 이러한지 근거를 캐물어야 한다. 고통은 생각을 낳는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그 고통을 억지로 참는 사람은 성과(成果)의 강요에 굴복하고 마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2014)와 『호모 데우스』(2016)에서 행복은 달성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다스려야 할 마음 상태라고 말합니다. 행복을 갈망하지 않으면 현재 순간에서 만족을 찾을 수 있고, 스트레스와 불만을 피할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행복이 주관적 느낌이라고 믿기 쉽고, 자신이 행복한지 비참한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고 믿기 쉽다." 하지만 행복이라는 "특정한 감정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행위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함정이다. 사람들의 기대가 충족되었느냐의 여부, 쾌락을 즐기는가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질문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런저런 덧없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 데 있다.” 

 


행복을 갈구하면 쉬지 않고 그런 감각을 쫓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마침내 행복한 감정을 느낀다고 해도 그 감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과거의 행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기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행복을 갈구할수록 점점 더 스트레스와 불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BC 460?~380?)는 행복은 재산이나 물질적 재화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몸의 쾌락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짧고, 고통을 산출하고, 반복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적 행복은 쾌락의 절제와 삶의 균형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덜 욕구할수록 덜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행복 역시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만족의 느낌이 아니라 우리의 성숙된 삶 전체의 문제였습니다. 성숙된 삶은 교육을 받고 습관화를 통해서 달성할 수 있습니다. 즉 덕이 있는 행위를 하도록 훈련받고 또 이를 꾸준히 실천하여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위를 반복하여 우리 본성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우리는 정의로운 행위를 하여 정의로워지고, 절제 있는 행위를 하여 절제 있게 되고, 용감한 행위를 하여 용감해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같은 행위와 덕을 행복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 누구도 성인군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할 때마다, 다음에 선한 일을 할 가능성이 많은 인물로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건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인간 본성은 존재 유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본성 자체가 사회에서 만들어가는 산물입니다. 인간 본성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늘 구성되는 과정에 있으며, 생성하는 존재로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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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그 어떠한 원대한 시대사상이 없더라고 ‘그냥’ 살수도 있습니다. 그냥 산다는 것이 잘못된 일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냥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어떠한 사상이 뿌리째 뽑아버릴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안에 깊숙이 심어져 있기에 그냥 산다는 일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국가가 전부라고 생각하여 국가를 위해 자신 인생 모든 것을 다 바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 시민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이 경험했던 전쟁터는 다음처럼 몹시 참혹했습니다. 



"어느 날 백병전이 시작됐어...... 뭐가 기억나느냐고? '오도독오도독' 소리. 그 소리가 기억나......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사방에서 오도독오도독하는데, 사람들 연골이 으스러지고 뼈마디가 뚝뚝 부러져나가는 소리였지. 그리고 짐승의 울음 같은 처절한 비명들...... 서로를 찔러 죽이고, 숨통을 끊어놓고, 뼈를 부러뜨렸어. 총검으로 입이고 눈이고 닥치는 대로 찔렀지...... 심장을 찌르고 배를 찌르고...... 독일군에게 잡혀간 우리 여성 간호병을 찾아냈지. 세상에, 눈알이 도려내지고 가슴이 잘려나가서는...... 놈들이 말뚝에 박아놓았더라고. 몸에 살을 에는 추위에 꽁꽁 얼어 새하얗고 머리는 완전히 백발이 되어 있었어. 그 아이는 겨우 열아홉 살이었어." 



러시아 시민들이 경험한 전쟁터는 이토록 참혹한데 그들은 기꺼이 스스로 지원에서 전장으로 갔습니다. 



“그저 전선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 그게 다였어. 어떻게 히틀러가 모스크바를 차지하도록 보고만 있겠어?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지!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내 또래 소녀들은 너나없이 모두 전선으로 가겠다고 나섰지. 우리는 우리만 애국심에 불타는 줄 알았어...... 우리만 특별한 경우라고...... 하지만 웬걸, 모병사무소에 갔더니 글쎄 우리 같은 여자애들이 한가득인 거야. 세상에, 얼마나 놀랐던지! 심장이 뛰고 피가 끓어오르더라고. 나는 선발이 안 될까봐 가슴을 졸였어." 



딸이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오더라도 어머니는 반기지 않았습니다. "어머니한테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이었는데도 어머니는 딸을 안쓰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딸이 전선에서 돌아온 일을 모욕으로 생각하셨지. 적과 싸우지 않는 것을.” 



전쟁은 이토록 끔찍한데 그들은 왜 기꺼이 그 지옥으로 갔을까요? 



"우린 어렸을 때부터 '조국은 우리의 모든 것이다. 우리는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어. 그래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전선으로 가기로 결정한 거야. 내가 안 가면 대체 누가 가겠어? 나는 반드시 가야 했지..... 나는 '전선으로 갈 거예요, 전선으로 보내줘요! 전선으로!'라고 날마다 '전선, 전선' 노래를 부르며 고집을 꺾지 않았어. 실은, 포스터 글귀들의 영향이 컸어. '모국이 그대들을 부른다!', '전선을 위해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 눈만 뜨면 사방에 보이는 게 그 글귀들이었으니까. 노래는 또 어떤 줄 알아? '일어나라, 위대한 나라여...... 일어나서 죽기까지 싸우라......“ 

 
















”우리의 가장 큰 소원은 죽는 것이었어요! 자신을 희생하는 것, 전부를 내주는 것이요! 콤소몰(소련의 공산주의 청년 정치조직) 선언에도 있어요. ‘나는 내 민족이 내 목숨을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이건 단순히 말로만 하는 맹세가 아니었어요.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교육을 받으며 자랐어요. 군대가 행군하는 걸 보면 모두들 제자리에 멈춰 서서 경의를 표했죠. 승전 이후 군인들은 더 이상 평범한 존재가 아니었거든요.“ 
















상호주관인 시대사상은 오랜 기간에 걸쳐 서서히 형성될 수 있지만, 특정 권력의 선전과 선동으로 아주 단기간 내에 '세뇌'될 수 있습니다. 철학자 죄르지 루카치(1885~1971)는 선전과 선동이 인간을 '도취'시켜 비인간화하기에 이는 비윤리적이라고 말합니다. "도취는 하나의 기만이며 사기다. 감정이입을 핵심으로 삼는 일은 일상적인 삶을 격하시킨다. 니체의 '디오니스적 도취'는 감정이입 반응의 극단적 형태이며, 개인 인격을 균열시키고 불안정하게 만든다. 이는 세계와 인간관계를 공허하게 만든다. 선전과 선동은 인간을 기만하는 위장된 오만일 뿐이다.“



인간에게는 흔히 ‘반복 편견’(repetition bias)이라 부르는 이상한 오류가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자주 들으면 들을수록 그 이야기가 참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믿는 현상입니다. 반복은 마치 서서히 젖어들어 온 몸을 젖게 만드는 가랑비와 같습니다. 기업은 광고를 반복하고 정부 역시 홍보와 선전을 반복합니다. 그들은 같은 이야기를 자주 반복하면 이성을 압도할 수 있으며, 심지어 거짓말도 반복하면 점점 더 진실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뭔가를 자주 듣거나 보게 될수록 우리 뇌는 더 빨리 적응하여 그것을 진실이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2018년 예일대학교 연구진은 사람들이 정보의 신뢰도와는 무관하게 같은 정보에 반복되어 노출되자 그 정보를 사실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였습니다. 아주 약간만 그럴듯해도 반복되기만 하면 사람들은 그걸 믿었습니다. 가령 이러한 제목이 붙은 기사를 살펴보죠. ‘트럼프의 군사 개혁안: 미국은 징병제로 돌아갈 것이다.’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분명 사실이 아닌 이런 기사 제목조차도, 같은 내용을 두 번 본 사람은 한번 본 사람에 비해 두 배나 많이 사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연구진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는 다람쥐 쳇바퀴처럼 가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우리를 반복 편견에 빠뜨리는 위험한 무기와도 같습니다. 사람들은 사실 확인을 통해 확인되었을 때조차, 심지어는 본인의 정치 성향과 상반되는 의견일 때조차도, 자주 노출된 가짜 정보를 사실이라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정보가 되풀이된다 해서 그것이 반드시 사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복은 우리가 무언가를 진실이라 믿게 만드는 미끼 노릇을 합니다. 안타깝게도 정부나 기업, 지도자들은 모두 오래도록 이 미끼를 잘 활용해왔습니다. 가령 히틀러(1889~1945)의 『나의 투쟁』(1927)을 읽어보죠. 히틀러는 성공적인 프로파간다를 위한 몇 개의 핵심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 문장은 그 하나입니다. “몇 개의 간단한 생각을 지속적으로 반복할 것. 틀에 박힌 문구를 사용하고 객관성을 피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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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를 만드는 데 아담이 갈비뼈 하나를 내주었기에 여자는 남자보다 갈비뼈가 하나 더 많다는 기독교 전통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믿음은 1543년 해부학자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1514~1564)가 사람 갈비뼈 수를 직접 세어 그 믿음이 틀렸다는 사실을 보여주기까지 이어졌습니다. 



로마의 과학자이자 저술가였던 플리니우스(24?~79)는 세계 최초 백과사전인 『박물지』(77?)에서 여성 월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월경하는 여자에게 우유를 가까이 두면 상하게 된다. 그 여자가 만진 씨는 생명력을 상실하고, 접붙인 나무는 시들고, 정원의 식물은 바짝 말라버리며, 그녀가 앉았던 자리의 나무는 열매가 다 떨어져 버린다. 그녀 얼굴은 거울의 반짝임을 없애고, 철의 끝을 뭉툭하게 하고, 상아의 매끈한 표면도 거칠게 한다. 벌떼도 그녀가 바라보기만 해도 곧바로 죽어 버린다. 그녀의 배설물을 먹은 개는 미쳐서 발작을 일으키며, 그런 개에게 물리면 독성 때문에 치료가 불가능하다.”



분명 정말로 그러한지 간단하게 실험해 보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과학혁명이 있기 전까지 아무도 1,500년 동안 지배해 온 이 믿음을 반박할 증거를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스위스는 오래되고 안정된 민주국가지만 스위스 여성은 1971년까지 투표권이 없었습니다. 뉴질랜드는 1893년 여성 참정권이 인정되었고, 핀란드는 1929년에 인정되었습니다. 조금 늦게 프랑스와 이탈리아조차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여성에게 참정권을 확대한 바 있습니다. 그 후 몇 년 이내에 아르헨티나와 일본, 멕시코, 파키스탄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1971년까지 스위스는 방글라데시와 바레인, 요르단, 쿠웨이트, 사모아, 이라크와 함께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은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여성은 투표권을 얻는 데 자국 남성보다 평균 47년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1291년 남성 시민이 투표를 했던 스위스에서는, 여성을 포함한 보통투표가 이루어지기까지 700년이나 걸렸습니다. 



스위스 남성들은 왜 여성에게 선거권을 주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전 세계 남성들이 했던 똑같은 주장, 즉 여자들이 정치에 참여하면 여성답지 못하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스위스의 어느 여성 참정권 반대론자는 ‘너무 똑똑한 여자처럼 불쾌한 것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대부분 스위스 여성이 남편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고 그런 상태에 만족하기에 어차피 실제로 투표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이유도 많았습니다. 여성을 억지로 공적 영역으로 끌어내면 가정이 무너질 것이라든지, 스위스는 여성 참정권 없이도 100년 넘게 평화롭게 지내 왔고, 두 번의 세계대전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며, 엄청난 번영을 일구었으므로 망가지지 않은 것은 고치지 않는 것이 최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정치는 남자의 일이며, 국사를 여자에게 맡길 수는 없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부유하고 교육열도 높고 민주적인 스위스가 오랫동안 여성 참정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기는 믿음조차 시대나 사회마다 크게 다를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 대부분은 실제로 과거 어느 때 이식된 믿음입니다. 자신이 옳다는 신념은 곧 다른 누군가가 옳다는 신념과 같습니다. 철학자 몽테뉴(1533~1592)는 “사람들의 신념은 자국의 관습이나 부모의 양육 방식, 혹은 우연한 믿음 속으로 휩쓸려 형성된다”고 말하며, “태풍에 휩쓸리듯 판단이나 선택의 여지없이,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사고력이 형성되기 전인 어린 나이에 이미 그렇게 된다”고 덧붙입니다. 
















우리에게 현재 당연하거나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보이지만, 언젠가 모든 사람이 이를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할 일은 없을까요? 우리가 오늘날 가지고 있는 믿음 중 일부는 미래에 옳지 못한 믿음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현재의 믿음 중 무엇이 언젠가 옹호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사회가 공유하는 생각은 너무나 강력하고, 좁기에 누가 세상을 분명하게 보고 행동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세상에 불변하는 객관적인 진리는 없습니다. 상호주관(inter-subjective)만이 존재합니다. 상호주관이란 진리이거나[眞] 옳다거나[善] 아름답다고[美] ‘당시 대다수 사람이 믿은 사실’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철학자 플라톤(BC 428?~327?)은 『국가』(BC360?)에서 예술 규칙에 따라 만들어진 항아리를 아름답다고 규정했습니다.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 역시 미(美)란 적당한 비례와 밝기, 명료성은 물론 완전무결함의 결과라고 설명하며 플라톤의 관념을 확장했습니다. 따라서 미에 반대되는 추(醜)는 비례에 맞지 않는 것, 곧 아퀴나스가 ‘축소되어 욕되다’라고 규정한 거대한 머리와 아주 짧은 다리를 가진 사람 뿐 아니라, 다리가 하나 없거나 눈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을 묘사할 때도 쓰이는 개념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비례와 조화를 이루는 미란 무엇일까요? 미의 의미는 역사에서 계속 변화해 왔습니다. 한 세기 동안 비례가 맞다고 여겨지던 것이 다른 세기에 들어서 더 이상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이해할 때는 다른 사람과 상호 작용하면서 서로 공유한 경험이 바탕이 됩니다. 사회나 특정 집단 내 의미나 규범, 가치는 이러한 공유된 이해를 통해 형성됩니다. 우리는 다수 의견에 쉽게 순응하는 경향이 있기에 공유된 경험이나 환상에 손쉬운 먹잇감이 되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회에 큰 영향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일부러 의식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남녀 사이에 일어나는 사랑의 감정도 ‘상호주관’일 수 있습니다. 유럽에선 18세기에 이르자 오직 남성 간에만 한정되던 두 영혼의 결합이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도 가능하다고 처음 주장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사랑에 빠진 남성이 여성을 부양할 만큼 부유하다는 사실만 진지하게 증명하면 되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사랑이란 단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 되었습니다. 사랑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되었으며, 사랑받는 상대가 이상화되고, 누구하고든 사랑에 빠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또한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부추겨져 사랑에 대한 모든 전제 조건이 철폐되었습니다. 이것은 인류의 가장 놀라운 발명 가운데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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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헌법 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우리나라 헌법은 현대 복지국가 이념을 최초 기록한 라이프니치(1646~1716)의 정치철학에 기반을 둔 듯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이상적인 국가는 평화와 시민 안전을 보장하는 일뿐 아니라 자비로운 행위를 통해 시민의 도덕적이고 물질적인 행복을 증진해야 할 의무를 진다.” 이처럼 우리나라 국민이 추구할 최고 목표는 ‘행복’이다. 헌법에 언급될 정도로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목표가 행복이다. 



『행복의 함정』(2011)의 저자 리처드 레이어드(1939~ )는 행복은 자연스러운 목표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하게 마련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행복이 궁극의 목표인 이유는 그것이 단지 선(善)이기 때문이다. 행복이 좋다는 것은 굳이 따질 필요도 없을 만큼 명백하다. 우리에게 행복이 왜 그렇게까지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다. 행복의 절대적 중요성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명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독립 선언문에도 나타나 있듯이 행복은 ’그 자체로 명백한‘ 목표다.” 그렇지만 이 주장은 증명보다는 전제에 해당한다. 레이어드 자신도 말했듯이 이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근거는 없고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행복해지길 원하는가? 우리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행복은 선택할 수 없다.

서점에 가면 『나는 행복을 선택했어요』나 『그래서 나는, 행복하게 살기로 했다』, 『하루에 한 걸음씩 행복해지기』 『스스로 행복하라』, 『행복으로 가는 길』과 같은 행복 관련 많은 책이 진열되어 있다. 이러한 책들은 안녕감(well-being)이나 만족 등을 추구하라는 바람직한 담론이 담긴 듯하다. 하지만 사회에서 회자되는 행복 담론은 그저 무해한 개념이 아니다. 흔히 행복 담론은 우리에게 고통과 안녕감 중에서 선택하라고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요는 우리가 언제나 행복을 선택할 수 있고, 행복에 이르는 여러 선택지가 있다고 전제한다. 또한 마음만 먹으면 삶에서 고통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삶에서 어려움과 비극은 불가피하다. 그런데도 행복 담론은 고통과 행복이 개인 선택 문제라고 고집스럽게 주장한다. 

 















중세 스토아 철학은 자신 의지로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스토아 철학 핵심에는 깊은 숙명론이 있다. 세상은 내가 쓰지 않은 대본에 따라 움직인다. 언젠가는 직접 연출도 하고 싶겠지만, 포기하는 게 좋다. 우리는 단지 연기자일 뿐이다. 자신 역할을 받아들여야 한다. 스토아 철학에는 ‘운명이 허락한다면’이라는 조건부 표현이 많은데, 이를 ‘유보조항’이라 부른다. ‘유보조항’은 우리가 직접 쓰지 않은 대본을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사건은 그저 ‘운명이 허락하는 대로’ 펼쳐진다. 

















『나의 글로 세상을 1밀리미터라도 바꿀 수 있다면』(2007)의 저자 메리 파이퍼(1947~ )는 대학교 졸업반 시절 행복 관련한 대중 도서에 한창 빠져 자만심으로 가득할 때 그녀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었다. 파이퍼는 암으로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워지고 계시던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행복하게 사셨어요?” 할머니는 손녀 질문을 무시했다. 손녀는 할머니가 못 듣기라고 한 듯 집요하게 다시 물었다. 그제야 할머니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화를 내다시피 하며 대답하셨다. ”메리, 난 내 인생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아. 내게 주어진 시간과 재능을 제대로 잘 썼나? 내가 있어서 세상이 더 살기 좋은 곳이 되었나? 나 자신에게 이렇게 묻지.“ 
















손녀에게 행복은 바람직한 인생을 함축하지만, 그녀 할머니에게는 그게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은 "행복하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곧 행복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는 말로 ‘행복의 역설’(헤도니즘의 역설, Paradox of Hedonism)을 설명했다. 행복은 붙잡으려고 애쓸수록 우리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행복은 부산물이지, 절대 목표가 될 수 없다. 행복은 삶을 잘 살아낼 때 주어지는 뜻밖의 횡재 같은 것이다. 우리는 특히 ‘아주 조금만 더’ 라고 생각하며 무엇인가를 원한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것(예를 들면 많은 돈과 명예, 친구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조금만 더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금 더 갖게 되면 우리는 원하는 바를 재조정한다. 이전보다 그저 조금만 더 생기도록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얼마큼이 충분한지 알지 못한다. 



상대적 빈곤 때문에 불행하다.

행복은 선택할 수 없는 문제일 뿐 아니라, 부(富)를 기반으로 한 행복은 상대적 빈곤 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 인간은 절대적 빈곤보다 상대적 빈곤에 더 민감하다. ‘오늘날 가장 궁핍하게 사는 사람조차 수백 년 전 왕보다 잘 살사는 데 몇몇 사람들이 엄청 잘 사는 게 뭐가 대수란 말인가?’라고 생각한다며, 그렇지 않다. 사람은 상대적으로 더 큰 빈곤을 느끼기 때문이다.

 
















과거에 평범한 사람은 부자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누구든 백만장자 삶이 어떤지 자세히 알 수 있다. 텔레비전은 부자들의 호화로운 삶을 비정상적일 정도로 크게 보도한다. SNS에서 백만장자들의 집을 볼 수 있다. 부자들의 라이프스타일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자 ‘SNS로 인한 불만’이라는 증상이 생겼다. 평범한 사람들은 평생 절대 소유할 수 없는 모든 것을 괴로울 정도로 자세히 볼 수 있다. SNS 그 자체든 다른 형태의 대중적 노출이든, ‘SNS 불만’은 보통 사람들이 소유한 것을 하찮게 보이도록 만든다. 비록 그 사람이 객관적인 기준에서 넉넉한 삶을 누리고 있고, 인류 역사에서 극도로 풍요로운, 수천만 명 중 한 사람일지라고 그렇다. 
















행복을 결정하는 요인은 상대적이다. 사람들은 자신 행복을 판단할 때, 자신 실제 상황을 과거 혹은 현재의 사회적 경험에 비추어 비교하는 경향이 있다. 행복이 상대적이라면 국가가 객관적으로 경제를 개선하고 부양하더라도 반드시 국민이 실질적으로 수혜를 얻는다고 확신할 수 없다.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무슨 일이든 쉽게 적응하며, 행복은 객관적으로 충족되지 않기에 국가 경제 정책이 국민 행복 증대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만족을 위해 설계되지 않았다. 인간의 행복은 객관적 조건보다 우리 자신의 기대에 더 크게 좌우된다. 여건이 극도로 좋아진 후에도 이전처럼 불만족스러운 상태가 된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자신 운명에 주관적으로 만족하고 사회적 불만을 막고자 보편적 기본 소득을 도입한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인간의 기본적 필요’를 두고 어떤 정의를 따르든, 일단 한 번 누구에게나 그것을 무료로 제공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시하게 될 것이다. 보편적 기본 소득 덕분에 빈곤층이 지금보다 훨씬 나은 의료 서비스와 교육을 누린다 하더라도, 그들은 전 지구에 불평등이 만연한 것에 극도로 분노할 수 있다."



행복이라는 "목표를 진정으로 달성하려면 보편 기본 소득은 다른 의미 있는 추구에 의해 보완돼야 할 것이다. 일-이후(이외) 세계에서 만족스런 삶을 사는 방법, 심지어 가난하고 직업이 없더라도 삶의 만족도를 높일 방법을 먼저 찾아야 한다. 보편 기본 소득과 더불어 강력한 공동체와 의미 있는 삶의 추구를 결합”해야 한다. 
















유발 하라리가 언급한 “심지어 가난하고 직업이 없더라도 삶의 만족도”를 높인 사회가 요즘 일본이 아닌가 싶다. 현재 일본 젊은 층 대다수는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다. 취직률은 저조하고, 저임금에 시달리며 워킹푸어로 일하고, 현대판 홈리스라고 볼 수 있는 피시방에서 난민처럼 산다. 



하지만 20대 일본 젊은이들이 느끼는 생활 만족도와 행복 지수는 78.3퍼센트까지 상승했다. 일본 중학생과 고등학생 95퍼센트가 자신은 행복하다고 대답했다. 1980년 절정기를 맞았던 일본의 ‘입시 전쟁’이 상징하듯 ‘좋은 학교, 좋은 회사, 좋은 인생’이라는 중산층 꿈으로 일본 전체를 압도하던 시기는 지났다. 1990년대 이후 중산층 꿈이 무너짐과 동시에 기업의 정식 구성원이 되지 못한 젊은이가 증가했다. 그런데도 젊은이들의 삶 만족도가 증가하고 있다. 



요즘 일본 젊은이는 예전만큼 자동차를 구입하지 않는다. 술도 많이 마시지 않는다. 해외여행도 그리 즐기지 않는다. 유학생 수도 급격히 감소했다. 선거 때 투표하러 가는 젊은이 수도 현저하게 줄고 있다. 사회 부조리를 바로잡으려는 대규모 시위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대신 태어난 지역에 애착을 느끼는 젊은이가 증가하고 있고, 대도시권으로 이동하는 인구수가 감소하고 있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2011)의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1985~ )는 그 원인을 이렇게 진단한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리 없다고 생각이 들 때, 인간은 지금 행복하다고 느낀다.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될 때, 지금 행복하다.”
















원하는 걸 얻어도 행복하지 않다.

점점 더 많은 세속적 물질을 손에 넣을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기에 오히려 물질적 풍요 그 자체가 불행의 원인일지도 모른다. 해마다 세상은 소비자 구매 심리를 자극하는 더욱 매혹적인 제품을 제공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물건을 소유하는 기쁨보다 물건을 갖지 못하는 비참함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754년에 이미 장자크 루소가 그러한 말을 했다. ”만약 당신이 세상 물질을 갖지 못한다면 불행하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세상 물질을 소유한다고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원하는 것을 돈으로 사더라도 점점 커지는 소비 때문에 일과 소비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행복을 얻기 위한 ‘손쉬운 방법’으로써 소비는 빚 때문에 망하거나 최대 수입만 좇다가 영혼이 고갈되는 결과를 낳는다. 
















내면의 행복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해서 오지 않는다. 외부에서 무언가 주어지는 행복은 지속 시간이 짧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원했던 승용차를 사더라도 만족감이 반년을 넘기기가 어렵다. 인간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쉽게 적응한다. 이 같은 현상은 인간의 행복에는 설정점(set point)이 존재해,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생기더라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행복감은 기저수준으로 회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점은 결국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지속적인 행복을 누린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마치 쳇바퀴 돌리는 다람쥐처럼 아주 잠깐 바닥을 벗어날 수 있을 뿐이라 하여, 이 현상을 흔히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라고 부른다.
















결국 내가 새로운 상황에 곧 적응하리라는 사실을 매번 깨닫지 못할 뿐이다. 노인들은 대게 건강 문제로 많은 고통을 겪기에 노인이 젊은이보다 더 행복하다는 말을 들을 때면 우리는 매우 놀란다. 하지만 많은 사람 대부분은 만성 질병에 잘 적응하는 편이다. 인간은 미래에 어떻게 느낄지 예측하는 데 서툴다. 우리는 자신 감정의 반응 강도와 지속시간 모두를 크게 과대평가한다. 
















흔히 쾌락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BC 341~270)는 행복을 대부분 사람과는 다르게 규정했다. 우리는 긍정적인 정서 차원에서 행복을 떠올린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결핍과 부재 측면에서 행복을 규정했다. 그리스인은 이러한 상태를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것은 어떤 것의 존재가 아니라 바로 불안의 부재다. 행복은 고통의 반대말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를 뜻한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평정주의자’였다. 당신이 불필요한 욕망을 필요한 욕망으로 착각하면 고통이 생긴다. 우리를 괴롭히는 갈망에 비해 그 성취감은 크지 않기 때문이다. 쾌락으로 시작된 것이 고통으로 끝난다. 유일한 해결책은 욕망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내 행복은 타인 불행으로 이루어진다.

부처는 우리 행복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괴로움이 되는 경우가 아주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 사람의 번영은 보통 다른 사람의 궁핍이나 배제에 의존하고 있다. 나라가 부유해지면 항상 불평등이 불행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작가 버나드 맨더빌(1670~1733)이 말한 것처럼 “사회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대다수 사람이 가난하고 불행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중상주의’라고 부르는 이러한 논리는, 한 사람의 손실이 다른 사람에게 이득이 된다는 뜻이다. 중상주의자가 해줄 수 있는 최고 조언은 임금은 낮을수록 좋다는 점이다. 값싼 노동력은 경쟁 우위를 창출해 수출을 증진시키기 때문이다. 맨더빌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노예가 허용되지 않는 자유 국가에서 가장 확실하게 부를 창출하는 것은 부지런히 일하는 빈곤층 다수다.”



이러한 거리낌 없는 주장이 용납될 수 있었던 이유는 빈곤층이 형편없는 사람들이기에 빈곤할 수밖에 없다고 가정했기 때문이다. 동료 노동자와의 경쟁에서 패한 노동자는 나태와 우둔이라는 죄를 뒤집어쓰고 빈곤이라는 형벌을 받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게 되었다. 영국 전 총리 마거릿 대처(1925~2013)는 빈곤을 ‘인격 결함’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빈곤은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데, 가난한 사람은 그럴 의지가 부족하다고 비난한 것이다.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나 언젠가 행복하기를 원한다. 현대사회에는 ‘긍정적 사고’라는 신앙이 있다. 이 같은 낙관주의에 사로잡히면 최악의 경우 모래밭에 머리를 묻고, 우리 모두에게 고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게 된다. 나아가 내 자신 감정을 다치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을 냉담하게 대하게 된다. 하지만 부처(BC 560?~480?)는 “괴로움의 현실이 우리 존재 전체에 완전히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고통을 느끼는 데서부터 우리 삶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불교는 삶의 목표로써 내면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보다 삶의 실재인 변화의 고통[生老病死]을 깨닫고 받아들여야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행복을 가져오는 뭔가를 얻자마자 곧 그것을 잃을까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늘 욕망의 대상을 쫓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결국 그것 때문에 불행해질 것임을 알고 있다. 부처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고정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도 실제로는 순간순간 변화하고 있다. 절대적이고 영원한 실체에 대한 믿음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욕망을 낳고 또 그 욕망은 고통을 가져온다. 만족스러운 순간은 거의 없고 있다 하더라도 아주 짧은 순간일 뿐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영원히 좌절하는 것이다.”
















철학자 스베냐 플라스푈러(1975~ )는 인간이 고통을 인식하고 이를 통해 성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예를 들어, 실패를 겪은 사람은 그것이 왜 실패했는지 생각하고, 무엇을 더 배워야 하는지 고민하여, 다시 일을 시작할 때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계몽주의 이후 인간은 신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을 거부하며, 신이 부여한 운명에 순응하지 않으려 한다. 모든 인간은 적어도 이성적으로 자신 능력에 따라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으며 자유롭게 선택한 직업 활동을 펼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노력만 한다면 출세의 사다리를 오를 수도 있다고 여긴다. 누구나 자신 행복에 대한 주인이다. 



하지만, 고통을 장애나 시스템 오류로만 생각하며 주어진 한계를 극복하려고만 한다면, 인간은 자기 실존과의 중요한 연결 지점을 잃고 말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한계가 있는 존재로 인정할 때 자아를 갖게 된다. 인간이 그 한계와 고통을 경험하고 자신 인생과 사회가 대체 왜 이러한지 근거를 캐물어야 한다. 고통은 생각을 낳는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그 고통을 억지로 참는 사람은 성과(成果)의 강요에 굴복하고 마는 것이다.”  

















성숙한 삶을 살아야 한다.

유발 하라리는 자신의 책 『사피엔스』(2014)와 『호모 데우스』(2016)에서 행복은 달성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다스리는 마음 상태라는 것을 제안한다. 행복을 갈망하지 않는다면 현재 순간에서 만족을 찾을 수 있고, 스트레스와 불만을 피할 수 있다고 말한다. “행복이 주관적 느낌이라고 믿기 쉽고, 자신이 행복한지 비참한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고 믿기 쉽다." 하지만 행복이라는 "특정한 감정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행위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함정이다. 사람들의 기대가 충족되었느냐의 여부, 쾌락적 감정을 즐기는가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질문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런저런 덧없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 데 있다.” 

 















행복을 갈구한다면, 쉬지 않고 그런 감각을 쫓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마침내 행복한 감정을 느낀다고 해도 그 감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과거의 행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기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행복은 갈구할수록 점점 더 스트레스와 불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행복도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개념인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만족의 느낌이 아니라 우리의 성숙된 삶 전체 문제였다. 성숙된 삶은 교육을 받고 습관화를 통해서 달성할 수 있다. 즉 덕이 있는 행위를 하도록 훈련받고 또 이를 꾸준히 실천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행위를 반복하여 우리 본성을 발전시켜 나간다. 우리는 정의로운 행위를 하여 정의로워지고, 절제 있는 행위를 하여 절제 있게 되고, 용감한 행위를 하여 용감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같은 행위와 덕을 행복이라고 보았다. 




















빈센트 반 고흐 <담배를 물고 있는 해골>(1885)



고흐는 해바라기나 붓꽃, 별이 빛나는 밤처럼 아름다운 정경도 많이 남겼지만 시들어 가는 해바라기나 해골과 같은 어두운 소재도 많이 표현했다. 그에게 삶은 기쁨과 환희뿐 아니라 고통과 절망도 함께 버무려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서양 미술사에서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바니타스’(vanitas)의 의미를 담은 정물화가 유행했는데, 해골이나 시든 꽃이 대표적으로 바니타스를 상징하는 소재였다. 인생무상과 삶의 덧없음을 뜻하는 라틴어 바니타스는 삶은 언젠가 끝나기에 부와 명예, 순간적인 쾌락에 집착하는 것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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