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 시대 왕안석는 일찍이 인종 때 천자에게 상서를 올려 정치 개혁의 필요함을 주장했는데, 이 만언서(萬言書)는 천하의 명문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는 이 상서에서 현재의 중국이 밖으로는 이민족의 모멸을 받고 안으로 재정 궁핍으로 인민까지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묻고, 그것은 정치에 올바른 법이 시행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또 그에 의하면 정치가 합당하지 못한 것은 인재를 얻지 못하는 인사의 문제이며, 그 인재 결핍의 원인은 교육이 나쁘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만일 모든 것이 인간의 문제라면 인간의 힘으로 재건하지 못할 리가 없으며 더욱이 성패는 천자의 열의 여하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신종은 왕안석의 의견에 크게 찬성하고 또 그 인물에 심취해 밤낮으로 그와 정치를 논의한 끝에 과감히 여러 정치적인 개혁에 착수했던 것이다.



왕안석은 시인인 동시에 철학자였다. 하지만 그의 철학은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논리 사상은 아니며 한 번 보고 사물의 진상을 해석적으로 파악하는 직관주의 철학이다. 그는 이념에 구속된 이론을 싫어해, 그것이 리(理)에 엄폐된 것, 이론 때문에 진실을 놓친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므로 그의 정치 개혁은 먼 장래에 공허한 영상을 그리며 그것에 끌려드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현실을 직시해 거기에 있는 왜곡을 밝혀내고 불합리를 바로잡아 합리화의 궤도에 올린다는 방식이었다. 



그는 유교 경전 중에서 주공이 제정한 정부 기구를 기록했다고 일컬어지는 <주례>에 새로운 주석을 가했는데, 그것은 손이 닿지 않는 이상향을 먼 과거에 묘사한 것은 아니고 고대의 정치 원리는 언제라도 실제로 행하고자 하면 행할 수 있는 모범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의 정치는 이상주의가 아니라 합리주의자였다.



왕안석의 신법에 의해 그때까지 적자가 계속되던 국가 재정은 호전되어 오히려 잉여가 생기게 되었다. 재정이 너무 건전해져 정부의 창고에 금전과 미곡이 산적하게 되자 다음에는 경기를 정체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물론 이것은 하층민을 괴롭힌 것은 아니다. 적어도 실업자가 적었던 것은 신종 시대 지방에 비밀결사의 반란이 거의 보고되지 않았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문제는 종래의 방임 정책에 의해 묘미를 누려왔던 자산가 계급이다. 신법에는 어딘가 사회주의적 성질이 있고 정부의 통제가 엄했으므로 투기적인 돈벌이를 기도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한 사태가 자산가들에게는 심각한 불경기와 같은 느낌을 갖게 한 것이다.”<중국통사>


















송나라 인종시대 왕안석(AD 1021~1081)은 최고위직에 임명되자 곧 정부는 모든 백성의 후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일반 원리로 정했다. 그에 의하면 ‘국가는 노동자 계층을 돕고 노동자가 부자들에게 몸이 부서지도록 시달리는 일을 막으려는 목표를 갖고 상업과 산업, 농업을 완전히 장악해야 한다.' 그는 아득한 옛날부터 정부가 백성들에게 강요해 왔고 농번기에는 들에서 백성들을 빼내 온 경우가 많았던 부역을 폐지하며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면서도 홍수를 막기 위한 대규모 토목 공사를 시행했다. 농부들을 노예로 만들어 놓았던 대금업자에게서 그들을 구해 내고는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한 자금을 당시로서는 낮은 이율로 빌려주었다. 실업자에게는 나중에 자기 땅의 소산물로 정부에 갚는다는 조건으로 경작과 정착에 필요한 다른 도움을 무상으로 지원했다. 모든 지역에 노동 임금과 생필품 가격을 규제할 관리를 임명하고 상업을 국유화했다. 정부가 지역 산물을 구매하여 일부는 지역의 미래 수요를 위해 저장해 놓고 나머지는 전국에 퍼져 있는 국가 저장소로 운반해 판매했다. 예산 체계를 확립해 예산 위원회가 비용을 계획하고 산정했으며, 예산을 매우 엄격하게 집행했다. 이에 따라 이전에는 정부 자금이 흘러가는 길목마다 숨어 있던 은밀한 큰 주머니로 들어가던 막대한 금액을 절약했다. 노인과 실업자, 극빈자에게 연금을 제공했다. 교육 제도와 과거 체계를 개혁했다.


 

이 고상한 실험은 실패했다. 첫째 유토피아적인 면보다는 실제적인 면이 더 많았던 특정 요소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세금은 부자 소득에서 나오는 것이었으나 확대된 국가 경비에 필요한 자금 일부는 농작물의 일부를 거둬 얻는 것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곡 부자와 합세하여 세금이 너무 많다고 불평했다. 사람들은 언제나 국가가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비용을 지불하는 일보다 기능을 확장하는 일을 더 좋아하기 마련이다.



나아가 왕안석은 상비군을 백성들의 자원 낭비로 보고 규모를 축소하고 남자가 한 명 이상인 모든 가족이 전시에는 병사를 제공할 책임을 보편적으로 감당하게 했다. 그는 가축을 잘 보살피고 군사용으로 필요할 때는 정부가 이용한다는 조건으로 많은 가족에게 말과 사료를 제공했다. 하지만 침략과 반란 때문에 전쟁이 일러나는 횟수가 늘어나자 이런 조치는 왕안석 인기에 급속한 종말을 안겨 주었다. 아울러 왕안석은 자신 조치를 집행할 정직한 사람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패가 관료 사회 전체에 퍼졌으므로 중국 역시 그 이후 많은 나라처럼 사적인 착취와 공적인 부정행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오래된 난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왕안석의 친형제와 역사가 사마광이 이끄는 보수주의자들은 그 실험은 애초부터 불합리했다고 비판했다. 그들은 인간의 부패성과 무능력함 때문에 정부의 산업 통제는 비현실적이며, 최선의 정부 형태는 서비스와 상품을 생산하려는 인간의 타고난 경제적 충동에 의존하는 자유방임형 정부라고 주장했다. 부자들은 자기 재산에 대한 높은 세금과 정부의 상업 독점에 자극받아 왕안석 조치의 신뢰성을 떨어트리고 집행을 방해하며 좋지 않은 평판 속에서 종식시키려는 일에 자원을 쏟아부었다. 이 반대 운동은 조직을 잘 갖춰 황제에게 압력을 행사했다. 홍수와 가뭄이 계속 이어지는 상황에서 하늘에 불길한 혜성까지 나타나자 천자는 왕안석을 관직에서 파면한 후 그의 조치들을 취소시키고자 적대자들을 요직에 앉혔다. 모든 것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갔다.”<문명 이야기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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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도쿠가와 시대 내지 그 이전 시대가 ‘정체’되었다가거나 ‘폐쇄적’ 혹은 ‘쇄국적’이었거나 ‘봉건적’이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소리다. 1853년 페리 제독의 내항이 일본을 ‘개국’시켰다는 주장이나 1806년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은 도쿠가와의 유산과 급격한 단절을 이루었다는 주장은 수정되어야 한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 일본도 하루아침에, 아니 한 세기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일본 도시화는 획기적이었다. 1550년 이후 한 세기 반 동안 일본에서는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도시가 하나에서 다섯으로 늘었다. 18세기에 이르면 일본 도시 인구는 중국이나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많았다. 오사카와 쿄토, 에도(토쿄) 인구는 각각 적어도 100만을 넘었다. 특히 에도 인구는 130만에 육박했다. 일본 인구의 6~13%가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도시에 살았다. 반면 당시 유럽의 도시인구는 2%에도 미치지 못했다. 일본 인구는 세계인구의 겨우 3%였지만, 10만 이상이 거주하는 도시에 거주하는 비율은 무려 8%나 되었다."<리오리엔트>

















"메이지 유신 이전 도쿠가와 시대에는 전국적으로 260여 개의 지방마다 영주가 있었다. 이 지방 영주를 다이묘, 또는 번주라고 하고, 그들이 다스리는 봉건국가를 번이라고 한다. 이처럼 반독립적인 번이 다수 존재했다는 점은 막말기의 변혁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각 번들 간의 경쟁의식이 강했다. 다수의 정치에서 생존을 위한 부국강병의 경쟁, 생존의 경쟁 의식을 갖고 치열하게 노력했다는 점이 대내외 위기에 민감하고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였다.”<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일본의 정치와 사회 체제의 분권화와 다양성이 중국에서 나타난 것보다는 훨씬 다채로운 대응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러한 다양성 덕분에 시행착오 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성공적으로 대응하였다. 예를 들면, 번 대부분은 효과적으로 대응하기에 너무 작거나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지만, 충분한 수의 번들이 다양한 대응을 할 수 있었다. 엄격한 계급 구분도 영향을 끼쳤다.”<동양문화사(하)>
















"일본의 봉건제는 유럽의 봉건제와 유사한 면도 있지만 몇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우선 센고쿠(戰國)시대 이후 일본의 봉건제는 쇼군과 다이묘가 주종 관계에 있지 않았다. 유럽의 왕-제후 관계와 달리 일본의 쇼군은 가장 강력한 무가(武家)일 뿐이다. 천황 위임을 정통성의 근거로 하지만, 그 위임은 힘에 기반한 것이었고, 결국 통치 근원이 되는 것은 무력이고 실력이었다.



제한적 권위의 통치자로서 쇼군은 다이묘들에게 세금을 징수할 수 없었다. 다이묘들의 충성 서역은 전시에 쇼군을 군사적으로 지원할 군역만을 의무화하였다. 일반적으로 중앙 권력이 강성해지면 지방의 사적 무력 보유를 억제하는 방향으로 통치체계가 정비되지만, 일본은 그럴 수 없었다. 군역이 계약의 기초이므로 다이묘의 무력 보유를 금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극상이 난무하는 센고쿠시대를 거치면서 충성 맹서는 약속의 무게를 잃은 지 오래다. 쇼군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군역 의무가 쇼군 안전을 위협할 수도 있는 패러독스 상황에서 쇼군은 다이묘들을 견제하기 위해 군역을 다른 형태로 부담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쇼군이 군역의 연장선상에서 성곽 축성, 제방이나 도로 건설 등 전쟁 기간시설 관련 공사에 다이묘가 인력과 자재 등을 제공하도록 의무를 부가한 것이 천하보청(天下普請)이다.



이에야스는 쇼군 자리에 오른 후 바로 천하보청을 발령한다. 히비야이리에 매립사업을 비롯하여 소토보리(에도성 바깥쪽 해자) 조성, 에도성 축조, 고카이도 정비 등에 전국 다이묘를 동원한 것이다. 천하보청은 쇼군 통치의 상징이자 다이묘 견제책이기도 했다. 이에야스는 다이묘들의 천하보청에 대한 순응 정도를 다이묘의 충성심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 저항 가능성이 높을수록 더 많은 의무를 부과하고 순응할수록 의무를 경감하였다.



각 다이묘는 천하보청에 따른 재정 압박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라도 정해진 기일 내에 높은 완성도로 사업을 완료할 수 있도록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에 실패할 경우 신임을 잃는 것은 물론, 더 큰 부담이 되어 돌아오거나 처벌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이묘들이 천하보청의 명을 받아 공사에 임하기는 하지만 공사 완료에 필요한 자재와 기술을 보유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각자 부족한 자재나 기술을 번끼리 거래하거나 전문가들을 인력 시장에서 구해야 했다. 기존에 없던 자본이나 자재, 전문 인력에 대한 수요가 생겨나고 시장에서 거래되기 시작했다. 



천하보청은 각 번의 통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천하보청 수행을 위해서는 번의 자원 동원력이 향상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다이묘가 천하보청의 압박을 견디기 위해 행정력 강화와 세수 증대를 위한 새로운 땅 개간 등 통치체제 정비에 힘을 기울여야 했다.



천하보청의 묘미는 국가에서 거둔 국부가 고스란히 인프라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만약 쇼군이 중앙의 군주로서 징세, 즉 화폐나 현물 형태로 생산량의 일정 부분을 거두어 갔다면 그 과정에서 많은 비효율과 왜곡된 자본 축적이 발생했을 것이다. 일본은 천하보청에 따라 세금 징수가 아니라 ‘결과물’ 형태로 의무를 부과했기에 관리비용 등의 매몰비용이나 착복으로 인한 증발 없이 모든 투입이 실물 인프라로 이어졌다. 



일본으로서는 쇼군이 다이묘를 견제해야만 하는 정통성 딜레마를 겪고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행운이었다. 전근대 유럽과 동아시아 국가들은 소수의 중앙 지배층을 정점으로 하는 다단계의 착취적 구조를 기본으로 한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하고 통치에 민주성이 결여된 전근대이기에 세금은 비효율성도 높고 생산력 확대를 위한 재투자에도 사용되기 어려웠다. 세금은 누군가의 금고로 들어가 사치로 낭비되거나 다 쓰이지도 못하고 소멸되는 국부의 무덤이었다.



일본은 중앙의 징세권이 없었다는 사정이 천하보청과 맞물려 전혀 예기치 못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우선 천하보청에 동원된 자원은 중앙 지배층에 이전되어 축적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지방 지배층인 다이묘들은 자본 축적의 기회는커녕 악몽 같은 상황에 처했다. 번 정부는 동원 인부들에게 노임을 지급하고 자재를 구매하기 위해 끊임없이 재정을 지출해야 했다. 천하보텅 비용 마련을 위해 빚을 내야 하는 다이묘도 있을 정도였다. 말단에서 세금 형태로 걷히는 생산물은 천하보청을 거치면서 노임이나 자재 대금 형태로 제분배되었다. 이러한 직접적인 자원 투입 결과로 높은 수준의 공공인프라가 창출되자 한층 더 경제활동이 촉진되고, 이는 다시 말단 세금 납부자의 생활 개선으로 이어졌다. 천하보청이 의도치 않은 국부 인큐베이터가 된 셈이다.<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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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 낡은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낡은 것이라고 주장되는 이른바 전통은, 그 기원을 따지고 보면 극히 최근의 것이며 종종 발명된 것이다.



홉스봄 교수가 엮은 이 책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던 ‘오랜 전통’의 허상을 여실히 드러내준다. 홉스봄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새로운 국경일, 의례, 영웅이나 상징물들이 대량으로 만들어지는 등 ‘전통 창조’가 유럽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문제는 그런 발명된 전통이 역사와 동떨어져 있으며 정치적 의도에 의해 조작되고 통제된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황실의례가 대표적인 예다. 이 책은 특히 이 시기 유럽에서 전통의 창조가 ‘현재’의 필요를 위해 과거 이미지를 만들어낸 예를 추적하며, 만들어진 전통이 어떻게 역사적 사실로 자리잡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정치인들에 의해 국민국가 권위와 특권을 부추기기 위해 사용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나아가 이 책은 집단적 기념행위가 국민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전략’이었으며, 신호와 의례가 사람들로 하여금 만들어진 ‘공식 기억’을 믿도록 하는 데 의도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특히 19세기 말, 20세기 초라는 시기에 전통이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홉스봄은 이 시기 유럽이 산업경제가 도래하고 도시화가 전개되며 국민국가가 대두하는 와중에서 급변하고 있었다고 진단한다. 사람들은 급변하는 사회에서 안정을 필요로 했고 그것이 전통이 창조되어야 할 이유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당시는 선거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대중정치가 출현한 시기다. 이때 국가는 어떻게 신민들이나 구성원들의 복종과 충성심을 확보하고 유지할 것인가, 혹은 그들 눈에 어떻게 정당하게 비칠 것인가라는 유례없는 문제에 직면했으며, 엘리트는 스스로를 대중과 연결시키기 위해 의례나 레토릭 그리고 상징물을 필요로 했는데, 그것이 전통 창조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홉스봄 교수는 신생국이건 역사가 오랜 국가건 모두 오래 된 과거를 요구하기 마련이라고 지적한다. 1870년대 이후 유럽 각국은 ‘전통의 발명’이라는 견지에서 의미심장한 몇 가지 발전을 보였다. 첫째는 초등교육 발전으로 대부분 선진 유럽 국가들이 초등교육 의무제를 도입하고 자국 역사와 국민적 전통을 아동들에게 주입시켰다. 두 번째는 공식 의례의 발명인데, 프랑스에서 1880년 바스티유의 날이 국경일로 제정되고 <라 마르세예즈>가 국가로 지정되었으며, 영국에서는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50주년 기념행사(1887)와 60주년 기념행사(1897)가 대단히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세 번째는 공공 기념의 대량 생산으로, 수많은 기념물이 이 때 건립되었다. 현재 유럽 대도시들을 장식하는 수많은 동상과 건축물이 그 결과다.



1870년과 1914년 사이에 태어난 ‘신생국’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은 대체로 영국식 모델에 기초해서 국가 수도를 정하고, 국기, 국가, 국경일을 제정했다. 이런 전통에서 영국은 가장 앞선 전범을 보였는데, 1740년에 만들어진 영국의 <신이여 국왕을 보호하소서(God save the king)>가 세계 최초의 국가(國歌)이기 때문이다. 국기는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나타난 삼색기가 선례가 되었다. 만들어진 전통에서 무엇보다도 핵심적 역할을 하는 것은 기념행위다. 기념행위는, 그것이 없다면 일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 집단적 기억을 안정화시키려는 계산된 전략이다. 그것은 과거로 하여금 현재에 돛을 내리게 하고, 시간이 멈춰 있을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1870년 이후 거행된 기념행위는 한 가지 면에서 그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 예를 들어, 이전까지는 엘리트 중심이던 왕실의례가 이번에는 대중을 겨냥해서 거행되었다는 사실에 그 새로움이 있었다. 대중 민주주의 시대에 군주는 모든 신민의 집합체와 직접 관계를 설정해야 했던 것이다. 문제는 19세기 기념행사들이 대체로 민중을 ‘위한’ 것이었지만 민중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집단적 정체성과 전통의 창조에 대한 관심은 1980년대 들어 포스트모더니즘과 ‘언어적 전환(linguistic turn)’이라는 새로운 사조에 의해서도 촉진되었다. 이 두 사조는 역사적 서술의 중립성에 대한 역사가들의 무비판적 믿음에 종지부를 찍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각에서 볼 때 역사적 사료는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텍스트에 불과하며,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된 서술은 실은 권력 의지에 의해 구성된 담론일 뿐이다. 게다가 마르크스주의가 주장한 바대로 확고한 경제적 토대와 그 위에 구성되는 상부구조에 대한 확신이 사라지면서 ‘사실’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게 되었다. 그 결과 랑케 이래 역사학을 지배해 온 실증주의가 도전받게 되었으며, 역사가들은 과거를 기억하는 것과 과거를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것 사의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역사가가 내세우는 모토는 과거가 ‘실제로 어떠했는가’를 찾아내는 작업이 아니라, ‘왜 우리가 지금 하는 것처럼 과거를 개념화하는가’에 집중되었으며, 과거 사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왜 기억되는가’를 밝히는 것으로 변한 것이다. 역사는 이제 일종의 ‘공공 기억’ 학문적 권위 세례를 받은 과거의 재현”이라고까지 말해진다.



근대 들어 국가가 어떻게 신민들이나 성원들의 복종과 충성, 협력을 확보하고 유지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해야만 그들 눈에 정당하게 비칠 것인가라는 유례 없는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국가가 개인으로서 신민 또는 시민들과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게 되는 정규적인 관계들이 점점 더 핵심적인 문제로 떠올랐다는 바로 그 사실로 말미암아, 한때 사회적 종속관계를 폭넓게 떠받쳤던 낡은 장치들은 취약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과거에는 한 통치자 아래에서 상대적인 자율성을 누렸던 집합체나 법인체, 하지만 역시 자기 구성원을 통제하면서 정상에서 버티던 더 높은 권위에 잇닿아 있는 권위 피라미드가 사회 위계를 성층화했고, 그런 구조에서 각 계층은 합당한 자리를 온전히 차지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계급이 관등을 대체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사회적 변형들로 말미암아, 그런 낡은 구조는 침식되었다. 국가와 지배자가 직면한 문제들이 더 첨예하게 제기된 경우는 명백히 신민들이 시민, 즉 제도적인 차원에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정치행위 – 비등한 예로 선거의 경우 -의 주체로 변형된 경우였다. 그런 문제들이 한층 더 첨예해진 경우도 있었는데, 말하자면 대중으로 시민 정치운동이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지배체제의 정당성에 의도적으로 도전했을 때, 혹은 상위에 군림하는 몇몇 다른 인간집단체 – 가장 일반적으로 계급, 교회, 민족체 -에 한계를 설정함으로써 국가질서와 양립할 수 없음을 위협적으로 시위할 때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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