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주 나누기는 모호한 경계선에 대한 고려나 구분선의 재조정을 차단시키면서 범주 자체를 고정시켜 버리는 병리적 결과를 낳는다. 독립적인 시각을 가진 언론인 100명이 있다면 우리는 100가지 견해를 입수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판에 박힌 방식으로 기사를 쓰도록 만드는 과정이 작동하면서 이런 다양성이 급격하게 위축되고 만다. 그리하여 견해도 하나로 수렴하고, 사태 원인으로 지목하는 항목도 동일해진다.



문제는 사건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 우리가 사건을 지각하는 방식에 있다.”<블랙 스완>




















"우리는 단지 주어진 것이기에 당연하다고 간주하는 범주에 따라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다. 주어진 범주는 사고에 우선하는 인식론적 위치에 있고 따라서 엄청난 지속력을 지닌다. 하지만 경험을 새롭게 조직화해야 하는 이질적인 것을 대면할 때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범주의 냐약성을 감지하며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린다. 사물이란 단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분류 도표 속에 들어 있기에 유지되는 것이다.



따라서 분류 정리를 한다는 것은 권력을 행사하는 일이다. 인간 이하라고 규정된 적(敵)은 절멸될지도 모른다. 모든 사회적 행위는 도서관의 도서 목록이나 조직 도표, 대학의 학과처럼 명확하게 다듬어졌건 아니건 분류 도식에 의해 결정된 경계를 따라 흐른다. 동물 세계는 모두 다 무의식적 존재론의 격자 속에 맞아 들어간다. ‘엘리펀트 맨’이나 ‘늑대 소년’과 같은 괴물은 우리가 설정한 개념의 경계선을 침범하기에 우리에게 공포를 주기도 하고 매혹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동물들은 범주들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기에 징그럽게 느껴진다. 그 예로서 물에서 헤엄치며 뭍에 기어오르는 ‘미끈미끈한’ 파충류나 집 안에 살지만 가축화 경계선 외부에 머물러 있는 ‘불결한’ 설치류를 들 수 있다. 우리는 누군가를 다람쥐가 아닌 쥐라고 부름으로써 모욕한다. ‘다람쥐’는 <인형의 집>에서 핼머가 노라에게 부르던 애칭처럼 친밀함의 표현일 수 있다. 하지만 다람쥐도 쥐와 마찬가지로 설치류이고 위험하고 세균이 득실거린다. 다람쥐는 명백하게 옥외에 서식하기에 덜 위협적으로 보인다.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고 따라서 의식용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물고기도 아니고 새도 아닌 중간에 있는 동물이다. 예를 들면 뉴기니의 신비 숭배에 있어서 화식조(火食鳥)나 서구 마녀들의 술에 들어가는 수고양이가 있다. 머리카락, 손톱 깍은 것, 배설물도 마법의 약에 들어간다. 그것은 신체의 모호한 경계 영역, 즉 유기체가 주위 물질세계로 흘러넘치는 곳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모든 경계선은 위험하다. 지키지 않고 놔두면 무너질 것이고 우리 범주도 붕괴될 것이며 우리 세계는 혼돈 속으로 해체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범주를 설정하고 그것을 감찰한다는 것은 심각한 업무이다. 지식 세계의 경계선을 새롭게 그으려고 시도했던 철학자는 금기(taboo)를 집적거렸던 것이다. 그가 신성한 주제를 피해서 노를 저어갔다고 할지라도 위험을 피할 수 없었다. 지식이란 본연적으로 모호하기 때문이다. 파충류나 쥐처럼 이것은 하나의 범주에서 다른 것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다.“<고양이 대학살>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객관적 진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그릇된 것일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위험하다. 진리는 항상 특정한 개념체계에 상대적이며, 그 개념체계는 대개 은유에 의해 규정된다. 은유 대부분은 오랜 시간을 통해 우리 문화 안에서 발전되지만, 그 중 많은 은유는 정치와 종교, 경제 지도자, 광고인, 매스컴 등 힘을 가진 자들에 의해 우리에게 강요된다. 객관주의 신화가 번성하고 진리가 항상 절대적이라는 문화 안에서는 그 문화에 은유를 부과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절대적이고 객관적으로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을 규정하게 된다.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마주치는 사물과 경험을 우리에게 의미 있는 방식으로 범주화한다. 범주화란 어떤 속성을 부각하고, 어떤 속성은 축소하며, 또 어떤 속성은 은폐함으로써 어떤 종류 대상 또는 경험을 식별하는 자연적인 방식이다. 범주화는 우리 감각적 기제를 통한 대상 관념에 근거하는 ‘지각적 차원’, 대상과의 운동적 상호작용 본성에 근거하는 ‘운동 활동 차원’, 대상 기능에 관한 관념을 근거로 하는 ‘기능적 차원’, 주어진 상황에서의 대상 사용에 근거한 ‘합목적 차원’ 등이다. 따라서 대상 종류에 관한 우리 범주는 적어도 이러한 자연적 차원을 갖는 게슈탈트이며, 각각 게슈탈트는 상호작용적 속성을 규정한다.

 

 

각각 차원은 그것에 의해 부각되는 속성을 부여한다. 특정한 속성 부각은 필연적으로 다른 속성을 축소하거나 은폐하게 되는데, 이점은 범주화할 때 항상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리가 어떤 특정 무리의 속성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다른 속성에는 관심을 집중시키지 않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일상적인 기술(記述)을 할 때 우리 목적에 적합한 속성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 범주화를 사용한다. 즉 모든 기술은 부각이고, 축소이고, 은폐이다.“<삶으로서의 은유>




















“사람들의 기본적인 실수는 두 개의 상태, 또는 개념 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없으면 그 둘이 엄밀히 구분되지 않으니 그걸 하나로 보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낙태 반대론자들은 임산부 자궁 속 세포는 시기에 따르는 유의미한 구분이 존재하지 않으니 처음부터 인간 생명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통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언어와 논리가 자연의 모호한 구분을 묘사하기에 역부족이더라도 경계는 엄존하며 그 경계로 나뉘는 분류가 실재한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경계선을 긋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실이 바뀌지 않는다. 뚜렷하고 확고한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실질적인 구분의 존재를 반박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명확한 사고는 삶의 회색 지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모호함 때문에 무언가를 거부하는 경향은 논리보다는 심리의 차원이다.“<가짜 논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