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간과 동물을 구분해주는 것은 냉철한 자유의지라고 믿는다. 자유의지는 광기 혹은 야만과 합리적인 인간을 구분해주며, 인간 이외 다른 피조물이 갖지 않은 어떤 위엄을 인간에게 부여해준다고 믿는 것이다. 민주적으로 행동하고 정치적 자유를 누리며 권리를 가질 자격이 있는 것은 오직 자유의지 때문이라고 믿는다. 다시 말해, 자유의지가 우리 인간을 가축과 같이 취급하거나 지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우리가 지닌 위엄과 인간성은 즉시 부인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정서적 삶에서 결코 도망칠 수 없다. 중립적이며 초연한 이성과 지성만으로는 우리 삶에서 판단을 내릴 수 없으며, 나를 넘어서는 세계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이성과 지성 또한 정서이기 때문이다.

 

 

현대 뇌신경학 발견이 증명했듯 지성은 정서 없이 기능할 수 없다. 뇌종양에 걸려 외과 수술로 전두엽을 제거한 환자들이 있다. 환자들 지성은 훼손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뇌수술 때문에 그들은 최소한의 감정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과연 정서에서 해방되어 완벽하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현명하고 지혜로운 자가 되었을까? 오히려 그 반대로 그들은 감정 결핍 때문에 거의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게 되었다. 정서가 없기에 무엇에 가치와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지 판단하지 못했다. 우유부단함과 무관심만이 남았을 뿐이다. 우리는 감정이 불러일으키는 것을 이해하고, 그 이해의 감정은 그 자체로 지성이 된다.

 

 

① 인간이 자신을 자유롭고 독립적이라고 느낄수록 더 쉽게 자신 감정의 환상에 굴복해 감정에 휩쓸리게 될 것이며, 그런 감정을 실현시키고 감정과 맞서 싸우기 위해 더욱 더 자신을 자유로운 존재라고 상상할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그런 인간의 왜곡된 이미지는 종교가 만들었다. 종교는 인간에게 과장되고 근거 없는 희망과 두려움을 제공한다. 자신을 통치하고 마음대로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자의적 자유를 소유한 존재, 자연 법칙 위의 존재, 완전한 인간 모델과 일치할 수 있는 존재는 많은 경우 인간이 달성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초월적 가치, 선과 악에 대한 경직되고 자의적인 관념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결국 대개 세속적이며 물질적인 우리 욕망 때문에 우월한 존재가 여기와는 다른 저 세상에서 우리가 욕망하는 것을 충족시켜줄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그런 욕망에 더 많이 시달리고 그런 욕망을 갈구하고 만족하지 못할수록 종교적 환상을 더 쉽게 믿고 더 쉽게 그런 환상에 희생양이 된다.

 

 

종교적 인간은 유약하고 겁이 많을뿐더러 넘치는 정서로 흔들리기에 자신 환상을 포기할 수 없다. 분명 각종 종교가 종교적 인간에게 거래를 제안하는 완벽하게 불가능한 욕망, 거의 제정신이 아닌 욕망이 있다. 예컨대 영원한 삶에 대한 욕망, 신체의 부활, 우리가 저지른 과오를 응징할 사후의 심판, 우리에게 악을 행한 자들에 대한 처단, 우리의 헌신에 대한 보답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더 상당히 속 좁고 협소한 다양한 종교적 욕망이 있다. 그것은 행운을 잡기 위한 의지, 우리 통제를 벗어나는 것을 지배하고자 하는 의지로 요약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 변덕에 자연을 굴복시키고자 하는 욕망이다. 종교적 믿음의 환상이 낳는 것은 무엇보다도 과잉되고 비현실적인 욕망이다. 종교인은 분노에 사로잡힌 고행자일 뿐이다. 사실 그는 탐욕스럽고 속물적이다. 더 나쁜 것은 그런 불가능한 욕망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것은 실현 가능한 욕망, 합법적 욕망, 그 자신의 포기로 귀결된다.

 

 

② 우리는 우선 전능한 신의 의지와 무한한 인간의 자의적 의지로 이해되는 자유 관념을 포기해야 한다. 그런 환상으로서의 자유 포기가 사실 자유의 획득이다. 그렇게 해야 도달할 수 없는 우리 자신에 대한 관념과 의지 횡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정말 우리 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 우리에게 좋거나 나쁜 것들, 그리고 소위 진정한 자유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은 그런 자유 관념을 포기하는 길뿐이다.

 

 

우리는 또한 이 세계가 우리 인간에게 적합하게 만들어졌다는 믿음을 포기해야 한다. 세계가 우리 희망 사항에 합당하게 만들어졌다는 믿음은 또한 이 세계가 우리 선행에 보답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것은 세계가 우리에게 적대적일 때 세계가 우리 악행을 처벌하고 있다는 믿음의 다른 표현이다. 따라서 우리는 선과 악, 완전과 불완전 관념에 대해서도 역시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우리 인간은 자신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자의적으로 그 어떤 선택이라도 할 수 있으며, 이성이 우리에게 명령한 것이라면 그 어떤 결정도 따를 수 있는 의지 힘을 부여받았다고 믿는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어떤 사람은 파트너와 맺은 관계를 끝내길 원하고 매일 그렇게 말하면서도 계속해서 불편한 관계를 몇 년이고 이어간다. 어떤 이는 직장을 옮기길 원하고 매일 아침 구인 광고를 살펴보지만 단 한 번의 면접시험에도 지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이는 금연과 식이요법을 원하지만 아침마다 하는 결심이 그날 저녁 흐지부지되기 일쑤다.

 

 

이러한 상황에서 실패는 오직 의지 때문일까? 대답이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의지 이상의 무엇인가 때문에 성공이나 실패했다고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피상적이고 정형화된 관념이나 혹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또 다른 본질적인 것 때문은 아닐까? 다음과 같이 가정해볼 수도 있다. 자유의지가 강력해 보일 때 우리를 이끈 것은 사실 자유의지가 아니라 저항할 수 없는 욕망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결핍 때문에 욕망이 생긴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이나 아직 우리가 아닌 것을 욕망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자신 존재가 되도록 해주는 것, 다시 말해 우리 본성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것을 욕망할 뿐이다. 욕망이 바로 인간 본질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우리 자신인 존재, 간단히 말해 양보 없이 우리 자신인 존재다.

 

 

욕망이 없다면 인식도 이성도 도덕도 없다. 인식은 무엇보다 진리에 대한 욕망이며, 이성은 정합성에 대한 욕망이다. 그리고 도덕은 좋은 삶에 대한 욕망이다.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 원칙과 도덕을 내세우는 것은 공허한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원칙과 도덕 또한 욕망이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자유의지라고 여기는 일은 욕망의 표현일 뿐이다.

 

 

최근 신경생리학 연구는 스피노자가 주장하는 이런 요점을 지지해준다. 인간의 뉴런 운동에 관한 연구는 인간의 ‘판단’ 문제를 다룬다. 벤저민 리벳은 판단 원인은 사실 의지가 아니라 신경 전달 물질의 변화이며, 신경 전달 물질의 변화가 일어난 다음 0.5초에서 1초가 지난 후에야 그런 변화를 정신이 의식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진정한 결정은 우리가 의식하기 전에 이루어진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여부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식적 결정, 즉 우리가 그렇게 자랑스워하는 자유의지 노력은 오히려 판단 원인이 아니라 판단 결과며 우리 행위를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인 것이다. 자유의지 노력은 우리를 행동하게 하는 진정한 힘에 수반되는 메아리이자 그림자일 뿐이다. 이미 3세시 전에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단지 자신 행동은 인식하지만 그 행동을 결정한 원인을 모르는 것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자유 관념은 그들 행위를 결정하는 그 어떤 원인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성립한 것이다. 그들이 인간 행위는 의지에 의존한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이 행위 원인에 대해 아무런 관념도 가지지 않은 채 하는 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의지가 무엇이며 그 의지가 어떻게 신체를 움직이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것에 무지하지만 그것을 안다고 잘난 척하면서 본부를 차지하고 그곳에 머무는 영혼을 발명해낸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조소와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에티카> 2부, 정리 35, 주석)

 

 

자유의지가 강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사실 애매하지 않은 분명한 욕망에 추동되기 때문이다. 자유의지가 약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활력을 주는 힘에 상반되는 방향으로 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심하며 그래서 결정을 내리지 않는 데 자유롭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다만 우리 안의 서로 상반되는 욕망이 균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자유로운 선택이야말로 우리의 내적 필연성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그런 내적 필연성에 따라 살 수 있을 뿐이라고 믿는 오류로 이어진다. 하지만 신조자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 세계를 창조하는 자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 신조차도 자의적 자유를 행사하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스피노자 생각과 달리 우리는 신이 이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길 좋아한다.

 

 

신은 아담이 금지된 과일을 먹지 못하게 하고 낙원에서 아담을 추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신은 유다의 배반을 막을 수 있었으며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소원을 들어줄 수 있었다. 신이 그렇게 하지 않았던 까닭은 바로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신 자신이 원했기 때문이다. 신은 인간 운명을 결정하고 아담에 대한 처벌과 추방을 의도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사건이 의미나 메시지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스피노자에 따르면 신은 세 개의 꼭짓점이 없는 삼각형을 만들 수 없는 것과 동일하게 이 세계의 진행 과정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다. 이 세계는 이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 그대로 필연적인 것이다. 신이 그가 행하는 것, 그가 선택한 것 이외 다른 것을 행할 수 있다면 이것은 신이 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길 원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신의 존재 방식, 신이라는 존재를 불완전하게 만든다. 그것은 불합리하다. 신이 자신의 존재 방식에 속하지 않는 다른 행위를 선택한다는 것은 그가 아닌 다른 존재이기를 선택한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 방식에 따르지 않는 존재, 즉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을 선택한 신은 이미 이전의 그 신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신은 그가 행동하는 대로, 즉 필연적으로 행동하며 세계는 필연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그대로의 세계다. 이 세계는 신이 자신의 필연적 본성에 따라 창조한 것이다.

 

 

③ 자유의지가 왜 우리에게 해가 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자유는 우리 역량 증대를 가로막는다. 자유롭다는 믿음 때문에 우선 우리는 자신에 대한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거기에 이어 우리 앞에 놓인 진정한 제약에 대해 알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된다. 본성에 대한 오해는 우리 역량에 타격을 가하고 우리를 제약하는 속박에 대한 오해는 그런 속박을 감내하도록 이끈다.

 

 

④ 자유의지 관념은 우리 역량을 강화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약화시킨다. 그 관념은 우리가 우리의 참된 역량을 왜곡시킬뿐더러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맞서도록 이끈다. 자유의지 관념은 우리 것이 아닌 욕망을 가질 수 있다고 믿게 한다. 그리고 우리 자신 욕망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척하게끔 이끌어간다. 그런 싸움에서 우리 자발성(그리고 자발적 선택의 관념이 주장하는 모든 가치)과 욕망이 모두 동시에 반드시 패배한다. 승자는 없다.

 

 

스피노자에게 욕망은 ‘계속해서 실존하려는 노력’이며 그와 동시에 ‘인간의 본질이다.’ 따라서 의지와 욕망 싸움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상대로 싸운다는 말이 된다. 그때 그런 싸움은 욕망이 언제나 자신을 명백히 드러내려하고 우리 행위를 이끈다는 사실에 타격을 가한다. 결과적으로 욕망은 약해지고 퇴색되고 가치가 떨어지게 된다. 환상으로서의 자유가 아니라 진정한 자유의 요체는 우리의 내적 필연성을 순순히 수용하는 것처럼 이런 제약과 의존 또한 순순히 받아드리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 요체는 우리가 우리의 내적 필연성과 연결시킬 수 있는 제약을 인식하는 것이다.

 

 

⑤ 자유의지 관념을 포기하는 것은 우리가 자신, 외부 대상과 맺는 관계를 변형시킨다. 우리 자신과 대면해 필연성과 결정론을 수용하는 것은 죄의식, 회환, 후회, 우유부단, 부적합함, 열등함 등의 감정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외부의 다른 대상과 관련해서는 양심, 질투, 학대, 굴종, 분노, 애도 등의 감정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어 준다.

 

 

타인에게 가해지는 비난과 요구, 비방의 불합리성은 그런 행위가 자유의지 결과인 양 여기기를 포기하고 그들 행위가 숙고의 결과가 아니란 사실을 받아들일 때 명백해진다. 그런 행위는 행위자들이 알든 모르든 간에 연쇄된 원인의 결과다. 그들은 자신 행위를 자유롭게 선택하지 않았고 자신들 존재 역시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 아니다.

 

 

⑥ 결정론의 가르침은 우리 상처를 치유하고 타인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며 정당하게 그들을 사랑하게끔 해준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세 가자 종류의 이로움이 있다. 우선 굴욕의 유독한 가시를 뽑아낼 수 있다. 누군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잘못을 가한 것이 아니란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의 행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의도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례적이고 능히 피할 수 있었던 것보다는 필연적이며 어쩔 수 없었던 것에 대해 훨씬 더 관대하다. 만물의 필연성에 대한 고찰은 불안과 분노를 가라앉혀준다. 마지막으로 각각의 사건과 사람을 셀 수 없이 많은 조건의 결과로 봄으로써[緣起] 감정은 점점 희석된다. 이제 하나의 사건이나 단 한사람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서 정서는 안정을 찾는다.

 

 

⑦ 바보, 광인, 환상 속에 사는 자, 극단적인 사람들 또한 실존하고 행동할 권리를 가진다. 이런 권리는 현자와 이성적인 자들의 권리와 전혀 다르지 않다. 우리는 그들이 숙고 끝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그들에게 관용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게 한 원인을 알게 될 때 우리 미움과 괴로움은 사라진다.“<비참한 날엔 스피노자>

 

 

 

 

 

 

 

 

 

 

 

 

 

 

 

 

 

 

 

"책임이란 법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윤리 문제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의도와 지식이 모두 있을 때 윤리적 책임이 생긴다고 했으며, 이 개념은 형법상 유죄 여부와 정신이상을 다루는 많은 현대 법제의 기초가 되었다. 피의자에게 형사처벌을 묻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그 행위를 했다는 증거 그리고 그 행위를 자유의지로 했다는, 즉 행위가 의도적이었다는 증거(mens rea)가 있어야 한다. 라틴어 mens rea를 직역하면 ‘죄지은 마음’이다.

 

 

하지만 자유의지 개념을 포기하면 형사사법 제도 전체 그리고 형사 책임 개념의 기반이 무너진다. 누군가를 범행에 대해 죄가 있다고 판단하려면 그 사람이 범죄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뿐 아니라 의도적이었다는 점도 증명해야 하며 이것이 자유의지 개념이다.

 

 

사람들이 이성적일 때도 자신이 통제하는 범위 밖의 힘이 작용하고 있으며, 감정과 인지 반응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은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전제에 의문을 던진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의도하지 않은 결정을 내리도록 뇌가 조종한다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형사사법제도의 초점을 처벌에서 갱생으로 옮김으로써 더 나은 제도를 만들 수 있다. 신경과학이 발전해가면서, 자유의지에 대한 사람들 상식이 바뀌어 우리 행동 많은 부분이 완벽하게 우리 통제 아래 있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범죄자들을 판단하고 처벌할 때 현실을 감안하고 인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개념이 자리를 잡을 것이다.

 

 

인도적 대우란 피해를 입은 사회의 감정적 만족이나 ‘정의 실현’ 일환으로 처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필요악으로 여기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처벌을 통해서 사람들, 즉 처벌을 당하는 사람과 그것을 보고 범죄를 저지르지 않기로 하는 사람들이 더 나은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정도까지만 처벌해야 한다. 죄인이 법을 준수하는 생산적인 시민으로서 사회로 복귀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드는 처벌은, 아무리 좋고 옳게 느껴지더라도 지양해야 한다."<법정에 선 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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